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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154화
60. 반격의 서막(5)
“꽤 많네.”
깔끔하게 청소를 마무리시킨 이안. 그가 사방으로 펼쳐진 높고 커다란 책장을 둘러보며 말했다.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양의 서책이 차곡차곡 꽂혀있었다. 심지어 서책 중 대다수가 ‘흑마도서’일 터. 시중에서는 밀거래로도 감히 구해볼 수 없는 최고급 흑마도서 말이다.
“으으으……!”
“갑자기 왜 우, 우리를……?”
이안이 살려둔 소수의 네크로맨서들, 저마다 화려한 로브와 장신구로 치장한 꼴이 고위급에 속하는 놈들인 것 같았다. 굳이 표현하자면 고위 네크로맨서 정도일까?
“여기 있는 거 말고, 따로 보관 중인 흑마도서가 있나? 솔직하게 말하면 살려는 줄게.”
속이 빤히 보였으나, 결국 핥게 되는 달콤한 제안이 고위 네크로맨서들을 살살 구슬렸다.
대답만 솔직하게 한다면 살려주겠다, 이런 제안을 하는 놈들치고 살려주는 놈 없다지만, 그럼에도 따르게 되는 묘한 매력의 제안이었다.
“그,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희가 일생을 다 바쳐 보관해 온 흑마법의 정수입니다! 믿어주십시오!”
“그렇군. 잘 알았다.”
퍼엉-!
네크로맨서의 머릿수가 더더욱 줄어들었다. 이제 숨통이 붙은 네크로맨서는 두 명만 남았다. 일종의 ‘예비인력’이었는데, 이안이 단기간에 완벽한 흑마법적 성취를 이룰 수 있도록 옆에 두고 며칠간 써먹을 작정이었다.
“자.”
이안의 손뼉소리가 탁하고 울렸다. 모든 흑마도서를 독파해 내기 위한 환기였다.
권수가 많다곤 하나, 언어의 힘을 숙달한 이안에게는 남들보다 편리한 수단이 존재했다.
(메타모포시스, 리더.)
메타모포시스Metamorphosis.
리더Reader.
이안의 눈으로부터 푸른색 안광이 겨울날 입김처럼 피어올랐다.
‘메타모포시스, 마나’가 육신을 마나 친화적으로 탈바꿈해 준다면, ‘메타모포시스, 리더’는 표현 그대로 ‘읽는 자’가 강신하는 주문이었다. 지속시간에 한해서 문자로 이루어진 모든 이치를 읽어내고, 즉시 암기하며,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존재, 그것이 바로 ‘읽는 자’였다.
‘삼 일 내로.’
이안이 한쪽 팔을 들어 올렸다. 그가 손짓 한번 크게 휘두를 때마다 책장에 꽂혀 있던 흑마도서들이 저 스스로 튀어나왔다. 어디 그뿐일까?
마나를 머금은 채로 펼쳐지더니 곧 허공에 푸른색 문자까지 우르르 뿜어냈다.
‘독파한다.’
영롱한 푸른빛의 문자들.
문자의 한복판에 우뚝 선 이안.
그리고 그 문자들을 빠르게 훑어낸 이안의 푸른색 눈동자.
‘반드시.’
바야흐로 이안의 흑마법 독파. 프란 페이지의 마수에 대항하는 본격적인 첫 행보가 시작되었다.
* * *
“오, 오늘부로 이안 페이지 님께서는 대륙 최고의 네크로맨서가 되셨습니다! 밤과 죽음의 황제로 등극하게 되신 것을 축하드립……!”
“아부는.”
새까만 기운, 검붉은 기운, 진한 보랏빛의 기운에 이르기까지 차례차례 찍어 누른 이안. 그가 그 중구난방으로 파멸적인 기운들을 갈무리하더니 톡 쏘듯 읊조렸다.
“그렇게 살고 싶어? 내 마법에 죽으면 고통도 없을 텐데.”
“저흰 아직 죽을 준비가…….”
“지금껏 희생시킨 사람들은 다 죽을 준비가 되어서 죽인 건가?”
“그, 그것은…….”
다짐했던 삼 일이 지났다. 아니, 삼일도 채 소모되지 않았다. 삼 일째의 해가 조금 전에 떨어졌으니 말이다. 엄밀히 따지자면 이틀하고도 절반이 소모된 셈이었다.
“아니지?”
“저, 저는 그저 명령에 따라…….”
“네놈이 제일 웃대가리잖아.”
“느, 늙기만 했을 뿐입…….”
“입만 열면 거짓말이지.”
단 두 명의 생존자, 그중 가장 연로한 네크로맨서가 몸뚱이를 낮췄다. 이안의 눈치도 살금살금 살폈다. 살아남고자 온 힘을 다하는 모양새였다. 이쯤 되면 다 빼앗고 살려만 줄까도 싶을 법하건만…….
“정해봐. 마나 하트 박살 나고 벙어리 될래, 아니면 그냥 죽을래?”
“…….”
"개인적으로 후자를 추천하긴 하는데, 깔끔하잖아."
“아, 아, 아닙니다! 절대로 그렇지 않습니다!”
머리를 조아리다 못해 쿵쿵 찧기 시작한 네크로맨서들, 물론 아무리 그래 봐야 이안의 마음을 움직이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럼 이렇게 하자. 한 놈만 살려줄게. 누가 대표로 죽을지는 뭐, 알아서 정하고.”
무책임하게 내던져진 제안, 그 어이가 없는 제안만 남긴 채 등까지 휙 돌려버리는 이안이었다. 더는 신경조차 쓰기 싫다는 듯 흑마도서까지 펼쳤다.
“정해지면 말해.”
둘 중 하나만 죽이겠다, 그러니까 죽을 놈은 너희끼리 정해라. 실로 잔인하기 짝이 없는 제안이었으나, 이안은 솜털만큼도 관여치 않았다. 오직 두 네크로맨서, 그들만의 치열한 눈치 싸움이 시작된 거다.
“…….”
“…….”
무거운 침묵으로 일관되길 수십 분, 이윽고 네크로맨서의 쉬어버린 목소리가 들렸다. 둘 중 그나마 젊은 축에 속하는 네크로맨서였다.
“이자! 이자가 죽어야 마땅합니다! 늙었을 뿐이라며 부인했습니다만, 사실 이 노인네야말로 무고한 자들을 제물로 희생시키기 시작한 원흉이자 장본인입니다!”
조금이나마 젊은 네크로맨서.
그가 작정하고 말문을 쏟아냈다.
동료애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옆에 놈이 죽어야 자신이 산다.
남은 건 오직 그뿐이었다.
“이, 이놈……!”
“이 노인네가 우리 모두의 우두머리였습니다! 지금껏 일으켰던 모든 악행의 원흉이기도 합니다! 저 같은 잔챙이보다야 이 노인네를 본보기로 처리하심이……!”
“그만.”
이안이 흑마도서를 덮었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두 네크로맨서 앞으로 걸어갔다.
“늙은이가 죽어야 한다, 이거지?”
“그렇습니다! 그렇고말고요!”
“허허…….”
이안의 확인에도 젊은 네크로맨서만 길길이 날뛸 뿐, 늙은 네크로맨서는 그저 허탈한 웃음만 지어보일 뿐이었다. 포기했다기보다는 짙어진 절망의 표현인 것 같았다.
“좋아.”
“……!”
이안의 손바닥이 무심하게 뻗어졌다. 동시에 늙은 흑마법사의 눈이 질끈 감겼다. 곧 핏물 한 줌만 남긴 채 몸뚱이가 터져나갈 터.
퍼엉-!
익숙한 폭발음이 울려 퍼졌다. 고깃덩이로 변해버린 몸뚱이 역시 바닥으로 후두둑 후두둑 떨어졌다.
“……?”
한데 어딘가 이상했다. 아무런 느낌도 받지 못했다. 육신이 박살 난 탓에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걸까?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늙은 네크로맨서가 한쪽 눈을 천천히 떠봤다.
“무, 무슨…….”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존재. 그것은 응당 손바닥을 쭉 뻗은 이안이었다. 문제는 손바닥의 방향이었는데, 그 손바닥은 결코 늙은 네크로맨서를 향하지 않았다. 조금 더 비스듬히 빗겨져 있었다. 즉, 젊은 네크로맨서를 향하고 있었다는 거다.
“일이……?”
사방에 마치 딱지처럼 눌어붙어버린 고깃덩이, 그 육편의 주인은 늙은 네크로맨서가 아니었다.
“요즘 말 많은 놈이 싫더라.”
이안이 냉소와 함께 뇌까리며 고깃덩이가 된 젊은 흑마법사의 사체를 바라봤다. 보기만 해도 역한 광경이었으나, 이안은 그 광경으로부터 눈을 떼지 않았다.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결과가 있었으니까. 일종의 실험이기도 했다.
(불사의 육신을 내리겠다.)
최고위 흑마법과 언어의 힘이 결합된 권능. 그 진보된 주문이 시체조각을 하나하나 휘감았다. 물론 시간이 촉박했기에 이론만 세워뒀을 뿐, 실전은 처음이었다.
“그어어어어…….”
한데도 이안의 주문은 성공 가도를 달렸다. 갈기갈기 박살 났던 젊은 네크로맨서의 몸뚱이가 어느새 본래의 모습으로 되살아났으니까.
“허억……?”
그 광경에 늙은 네크로맨서조차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실로 감쪽같지 않던가? 언데드 특유의 기워 붙인 듯 어설픈 모양새조차 보이지 않았다. 변질된 점이라고는 고작 새까맣게 물든 머리칼, 다소 창백해진 피부 정도가 전부였다. 그 외에는 죽기 직전 모습 그대로 되살아난 셈이었다.
“대체 어찌하신 겁니까……?”
되살아난 존재를 멍한 눈으로 바라봤던 네크로맨서, 제 처지조차 잊어버린 듯 질문까지 내뱉었다.
“궁금한가?”
“아,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당연히 안 되지.”
“그런…….”
“팔자 좋군.”
“히이익……!”
무감정으로 똘똘 뭉친 이안의 눈빛과 어투에 네크로맨서가 정신을 차렸다. 곧바로 땅바닥에 넙죽 엎드려 싹싹 빌기 시작했다. 아직 안심할 수 없음을 뒤늦게나마 감지해버린 탓. 아니, 덕분이었다.
“제, 제발 살려…….”
“줄게.”
“예……?”
“살려준다고.”
이안이 늙은 네크로맨서의 심장 쪽으로 손바닥을 뻗었다. 심장 속 마나 하트를 먹통으로 만들기 위해서였고, 그렇게 만들어줬다.
“쿨럭!”
그 여파로 늙은 네크로맨서가 붉은 피를 고통스럽게 게워냈다. 마나 하트를 잃어버린 노쇠한 몸뚱이, 그는 이제 평범함 이하의 노인네나 마찬가지인 셈이었다.
“그 상태로 얼마나 살 수 있겠냐만, 남은 시간 천천히 죽어가면서 후회하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렇다. 마나 하트란 초월적 장기를 박살 내버렸다. 육신은 물론 정신까지 엄청난 타격을 입었을 터, 당장은 문제가 느껴지지 않더라도 곧 증상이 나타나리라.
“그럼 잘 버텨봐.”
더 이상 네크로맨서의 은신처에 볼일이 남지 않은 이안, 그가 텔레포트 주문을 발동시켰다. 물론 여전히 안심할 순 없었다. 아주 급하면서도 자그마한 불씨만 껐을 뿐.
‘이제부터 시작이다.’
물론 자그마한 불씨라 하여 위협적이지 않다는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아주 긍정적인 상황과 전개의 신호탄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로서 인류는 동부 대초원 불사의 군단에게 당당히 맞설 수 있는 수단을 얻게 되었으니까.
‘바빠 죽겠군.’
고생 끝에 수단을 얻어냈으니, 이제는 그 주인부터 찾아줘야 할 터. 이안의 육신이 새하얀 빛줄기와 함께 사라졌다. 목적지는 그린리버 제국의 황궁, 그 안에서도 가장 삼엄한 경계를 자랑하는 황제, ‘테리 그린리버’의 집무실이었다.
“자네……?”
그 갑작스러운 방문에 황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물론 불쾌하진 않았다. 이 제국에서 이안 페이지란 이름이 갖는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았으니까. 나아가 황제 개인적으로도 은인과 같은 존재였다.
“폐하, 소신이 저지른 무례를 용서치 마시옵소서. 하오나 급한 사안이기에 도리가 없었사옵니다. 부디 잠깐이나마 폐하의 시간을 할애해주실 수 있으시겠사옵니까?”
이안이 읍하며 말했다.
황제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칼을 뽑았던 호위기사도 물렸다.
“상아탑주로서의 무례인가, 이안 페이지로서의 무례인가?”
“국난에 대응하는, 상아탑주로서의 무례이옵니다.”
“그렇군. 허면…….”
황제 테리 그린리버가 살피던 보고서들을 내려놨다. 황제의 인장 역시 제자리에 두었다. 대화에 몰입할 준비가 되었다는 표시였다.
“말씀하시오. 상아탑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