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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144화 (144/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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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144화

    57. 폭풍전야 (5)

    (수천 년에 걸쳐 이어진 악연의 원흉, 미치광이 인간 프란 페이지의 핏줄이여. 그 조악한 분신을 제거한 뒤 곧장 세상 밖으로 나가 본신까지 찾아내 주도록 하마.)

    “글쎄, 그건 좀 힘들걸?”

    상대가 바뀌자 이안의 말투 역시 반 토막으로 잘려버렸다. 사실 젊은 용, 심지어 어린 용이라고 해도 이안보다는 오래 살았을 거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세월의 차이가 벌어져 있을 터. 하나 이안은 거리낌이 없었다. 저 ‘새끼 도마뱀’ 무리에게까지 존칭을 붙이고 싶진 않았으니까.

    (건방진 인간, 기습 한 번 성공한 주제에 콧대가 아주 하늘을 찌르는구나!)

    마주치자마자 이안에게 제압당했던 붉은 용, 문지기 ‘헤르파이 도토스’가 조금 흥분한 채로 외쳤다. 뿐일까? 당장이라도 이안을 잘근잘근 씹어버릴 듯 노려보기에 이르렀다.

    “당한 쪽 콧대가 더 하늘을 찌르는 것도 우습긴 하지.”

    (…….)

    “몇 대 맞았다고 친구들까지 우르르 불러왔잖아?”

    (사냥에 정정당당함이 필요한가?)

    “근데 도마뱀도 콧대가 있었나?”

    (이놈……!)

    쿵!

    제대로 통하기조차 힘들어 보이는 대화.

    더 이상 나눌 필요도, 까닭도 없었다.

    서로가 입만 아플 뿐이리라.

    쿵! 쿵! 쿵!

    사사로운 이야기 대신 헤르파이 도토스, 그를 필두로 한 여섯 마리 어린 용의 발 구르는 소리가 우레와도 같이 퍼져 나갔다. 이는 명백한 분노와 적대감의 표현이었으니, 지금 당장 피바람이 불어 닥쳐도 문젯거리가 될 게 없는 분위기였다.

    “지금 덩치 크다고 자랑하는 건가?”

    평범한 존재, 아니 평범하지 않은 존재에게도 엄청난 위압감을 선사할 소리였다. 하지만 이안에게는 씨알조차 먹히지 않았다. 해봐야 거대한 몸집으로 쿵쾅거리는 것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별로 부럽진 않은데.”

    이안이 조소를 지으며 오른쪽 발을 높이 올렸다.

    나아가 보랏빛 모랫바닥을 쿵! 하고 내리쳤다.

    여섯 마리 드래곤과 똑같은 발 구르기.

    하나 그 결과만큼은 차원이 달랐다.

    쿠구구구구구……!

    내리찍은 발 앞으로 균열이 일기 시작했다. 수십 갈래 균열이 부채꼴 모양을 이루며 힘차게 뻗어 나갔다. 여섯 마리 젊은 용의 발 구르기에 대한 ‘이안 페이지 식 화답’이었다.

    “들어와 봐.”

    손가락마저 까닥거린 이안. 그 자신감 넘치는 모습이야말로 젊은 용들의 분노를 이끌기 충분했다. 감히 인간 따위가 저토록 광오할 수 있단 말인가? 모욕도 이런 모욕이 없었다. 가능한 한 빠르게 처리하고 싶었다. 저 분신과 바깥세상 어딘가에 숨어있을 본체까지 전부 다.

    쿠웅!

    하지만 여섯 젊은 용의 분노.

    쿠웅! 쿠웅!

    그리고 이안을 제거하고자 리시스 라덴쥬에게 올렸던 ‘충언’은 끝내 기각될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이안의 분신조차 이겨내지 못했으니까, 아니, 이겨내는 것은 고사하고…….

    “이번에는 기습도 아니었는데.”

    쿠웅! 쿠웅! 쿠웅!

    가히 ‘일방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이안의 힘 앞에, 어린 드래곤 무리가 말이다.

    오히려 기습을 가했을 때보다 압도적인 것 같았다.

    “그치?”

    여섯 마리 어린 용을 모조리 쓰러뜨린 이안, 그가 문지기 ‘헤르파이 도토스’의 몸통을 발끝으로 툭툭 치며 말했다. 만물의 최강자로서 치욕스럽기 짝이 없는 대접, 그럼에도 아무런 반항조차 할 수 없었다. 비단 헤르파이 도토스 뿐만 아니었다. 다른 용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모두가 보랏빛 모래에 처박힌 채로 꿈틀거리기 바빴다.

    “또 변명할 게 남았으면 지금 얘기해. 해결해줄 테니까.”

    (크으윽……! 이노오옴……! 감히……!)

    그 치욕스러움은 이안의 발길질로부터 느껴지는 게 아니었다. 젊은 드래곤들이 참을 수가 없는 까닭, 그것은 저 이안 페이지란 인간에게, 심지어 분신에 불과한 존재에게 여섯 모두가 패배했다는 사실이었다. 도저히 믿어지지 않는 결과에 치가 파르르 떨렸다.

    (과연, 그자의 핏줄이 맞는가?)

    (인간의 힘이라고는 믿을 수 없군.)

    (악몽과도 같은 인간, 그 자가 돌아온 건가……!)

    이를 멀찍이서 지켜보던 여타 드래곤 일족들, 그들 역시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그 옛날 프란 페이지에게서 맛봤던 어마어마한 힘의 차이, 감히 인간의 것이라고는 믿기 어려운 힘이 저 자그마한 인간 청년, 이안 페이지로부터 여실 없이 느껴졌다.

    일족 절반을 잃어버렸던 과거의 악몽이 다시금 펼쳐진 기분이었다. 그래서일까, 이안을 향한 살기가 더더욱 자욱하게 풍겼다.

    “이쯤 해두면 되겠습니까?”

    물론 어린 드래곤들이 치를 떨든 말든.

    여타 드래곤들이 살기를 쏘아대든 말든.

    이안은 무심한 어조로 리시스 라덴쥬에게 물었다.

    (좋은 지도편달이었다.)

    그 물음에 리시스 라덴쥬 역시 기다란 목을 주억거렸다.

    (저 아이들도 느낀 바가 있을 것이다.)

    “변명만 할 것 같은데 말이죠.”

    (현명한 아이들이다. 곧 많은 것을 깨달을 수 있겠지.)

    리시스 라덴쥬의 말에 젊은 드래곤들이 몸을 가누었다. 그리고는 서로 부축하며 멀찌감치 물러났다. 일족의 수장이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계속 이놈이니 감히니, 더는 이안에게 으르렁거릴 수가 없었으니까. 나아가 패배는 패배였다.

    “이만 돌아가도 되겠습니까?”

    (물론이다. 돌아가도록 하라.)

    “이른 시일 내로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적, 혹은 아군으로 말인가?)

    “제3의 무언가일 수도 있죠.”

    (그렇군. 부디 좋은 소식 기대하겠다.)

    “저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가볍게 인사를 나눈 이안.

    그의 육신이 점차 흐릿해져 갔다.

    분신체가 사라지는 순간의 고유적 효과였다.

    “그럼.”

    그렇게 이안의 육신이 사라졌다.

    보랏빛 공간에는 또다시 드래곤 일족들.

    그리고 보랏빛 구체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 * *

    (아타르 하카.)

    이안이 사라진 보랏빛 무차원의 공간, 방금까지 이안과 대화했던 리시스 라덴쥬가 허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자 또 다른 용 한 마리가 그 방향으로부터 날아왔다. 검은 가죽과 비늘을 가진 존재, 검은 용이자 일족 내 서열 두 번째, ‘검은 불꽃’ 아타르 하카였다.

    (혹, 방금 그자의 술수가 남아 있나?)

    리시스 라덴쥬의 물음에 검은 용 아타르 하카가 눈을 감았다. 그러더니 회색빛 마나를 사방으로 널따랗게 퍼뜨렸다. 이안의 광역 탐지 주문 ‘씨어 디텍션’과 흡사한 느낌이었다.

    (없다. 적어도 나의 눈으로는.)

    (그런가. 자네의 능력이라면 확실하겠지.)

    리시스 라덴쥬의 단호한 결론으로 미루어 볼 때.

    검은 용 아타르 하카의 특기는 ‘탐지’인 것 같았다.

    (아타르 하카, 오래간만에 일을 하나 해줘야겠다.)

    (방금 그 인간의 감시를 말하는 건가?)

    (강한 존재다. 의심이 많고 예민한 것 같더군. 자네밖에 적임자가 없음을 이해해 주게.)

    미안함이 묻어나는 리시스 라덴쥬의 어조.

    그 목소리에 검은 용 아타르 하카가 대답했다.

    (모든 것은 일족을 위하여.)

    그러자 리시스 라덴쥬 역시 똑같은 대답을 읊조렸다.

    (모든 것은 일족을 위하여.)

    그 '일족의 다짐'을 주고받음과 동시에.

    검은 불꽃이 아타르 하카의 육신을 집어삼켰다.

    * * *

    “……하여간 도마뱀 놈들도 믿을 건 못 되는군.”

    본체로 깨어난 이안 페이지, 그가 한숨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눈앞에 펼쳐진 기이한 광경을 바라보며 내뱉은 숨이었다. 그것은 마치 사방의 먼지가 한 대 뭉쳐진 것과도 같았는데, 놀라운 점은 그 먼지의 뭉치가 드래곤의 ‘형상’을, 조금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일족의 수장 ‘리시스 라덴쥬’와 검은 용 ‘아타르 하카’의 형상을 실시간으로 빚어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의 대화 역시 또렷하게 들렸다.

    “프란 페이지도, 드래곤도 전부 뒤통수 후려갈길 생각밖에 없는 건가?”

    언어의 힘과 술식의 힘이 합쳐진 결합체.

    이안이 명명하기로 9클래스의 경지.

    그 초월적인 대마법 중 하나,

    더스트 워치, ‘먼지 감시자’의 효과였다.

    “하기야, 나부터 어떤 놈 뒤통수를 칠까 고민 중이긴 한데.”

    피식 웃어 보인 이안.

    그가 모여든 먼지를 휘휘 저으며 중얼거렸다.

    "어느 쪽 뒤통수를 먼저 때려줄까?"

    이안의 일차적인 판단은 그랬다. 결국 처음부터 떠올렸던 바람, ‘양쪽 모두 이안의 앞길에서 치워버리고 싶다’던 그 진심 어린 심정이 유일한 해답인 것 같았다. 문제는 어찌 치우냐는 거다. 프란 페이지와 드래곤 일족 전체의 힘은 분명 막강했다. 이안 혼자의 힘으로는 단언하건대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양쪽을 적절하게 이용해 줘야 할 텐데.’

    서로의 제거를 돕도록 유도하는 것, 지금으로선 그 ‘줄타기’가 최선이었다. 비록 아슬아슬할 테지만, 위태함에서 중심을 잡아 나아가는 일이야말로 지금 이안에게 요구되는 역량이리라.

    ‘프란 페이지의 약점부터 찾는다.’

    그것이 급선무였다. 프란 페이지가 지녔다는 ‘불사의 힘.’ 장인들에게도 일부분 적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그 힘의 ‘출처,’ 그리고 ‘파훼의 방법’까지 몽땅 알아내야만 했다. 그래야 프란 페이지에게서 우위를 점할 수 있으며, 장인들에게 약속했던 죽음을 내려줄 수도 있을 터.

    ‘그래야 마음 놓고 이용할 수 있으니까.’

    언제든 프란 페이지란 ‘양날의 검.’

    그 검을 쓰고 제거할 수 있는 준비.

    그 초석이야말로 모든 계획의 시작이었다.

    ‘조금 과감하게 나설 필요가 있는 것 같군.’

    드래곤조차 불사의 힘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기껏 해봐야 ‘연금술사적 역량’이 가미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추측뿐이지 않던가? 그런 미궁에 쌓인 힘을 조사하는 일, 역시나 이안 개인의 힘으로는 어려움이 따랐다. 그러한바 방법을 달리해볼 필요가 있었다. 조금은 더 과감하게, 그리고 과격하게 말이다.

    ‘당사자에게 직접 물어본다.’

    프란 페이지.

    불사의 힘을 누리는 당사자.

    그에게 직접 물어보는 방법을 떠올렸다.

    ‘내가 드래곤을 만났다는 사실을 모를 리 없겠지.’

    이안은 프란 페이지를 얕보지 않았다. 아무리 감시용 사념체를 찾아내고 퍼핏 플레이와 몇몇 마법으로 하여금 눈속임에 철저했다고는 해도, 그의 감시망에서 완벽하게 벗어났음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도 이안을 통제할 수단이 있기에, 언어의 힘이란 권능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전수해 준 게 아니겠는가?

    ‘드래곤을 만나봤고, 그 결과 프란 페이지 당신을 돕기로 했다. 그러니 나에게도 불사의 힘을 내려달라.’

    이안의 계획을 정리하자면 그랬다.

    드래곤 일족과의 접선을 먼저 인정한다.

    그 결과 드래곤은 믿을 수 없다고 판단.

    프란, 당신을 돕기로 했음을 알린다.

    대신 이안 자신한테도 불사의 힘을 내려달라.

    하면 그 과정에서 약점도 알아낼 수 있을 터.

    ‘통할지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선 가장 이상적인 방법의 하나였다. 비록 그 수천 년 묵은 능구렁이가 순순히 따라줄지는 알 수 없으나, 한 번쯤 시도해볼 가치만큼은 충분한 계획이었다.

    “……당신과 손을 잡기로 결정했다.”

    앞으로의 행보를 구상했던 이안.

    그가 아무도 없는 허공을 향해 읊조렸다.

    어떤 확신을 기반으로 둔 행동이 아니었다.

    절반의 지레짐작이 동반된 읊조림이었을 뿐.

    “프란 페이지.”

    하나 그 지레짐작은 정확히 들어맞았다. 이안의 확답이 떨어지자마자, 허공으로부터 이질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마치 여닫을 수 있는 문처럼, 공간 자체가 스르르 열리기 시작했으니까.

    “현명한 판단이다.”

    그 ‘공간의 문’을 열어 젖힌 남자.

    프란 페이지가 흐뭇한 듯 말했다.

    “이안.”

    그는 어디에든 존재했고.

    언제나 들을 수 있으며.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었다.

    유일한 핏줄이자 유일한 수단.

    ‘이안 페이지’의 근처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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