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141화
57. 폭풍전야 (2)
주변의 정리가 필요하다.
그러니 하루 정도 말미를 달라.
이안이 프란에게 건넨 요청이었다.
어렵지 않게 수락을 받기도 했다.
하나 이안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모든 행보는 내가, 내 방식대로 선택한다.’
주변 사람들과의 인사? 정리? 필요 없다. 사실 이안은 ‘3할의 실패’란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 역시 깨끗하게 떨쳐냈다.
본인이 주체가 되어 모든 문제를 완벽하게 해결하겠노라, 그러한 다짐의 결과물이었다.
‘일단 드래곤부터 만나봐야겠어.’
이대로는 프란에게 끌려다닐 뿐이다.
놈의 장단에 놀아날 뿐이라는 얘기다.
이 상황을 능동적으로 헤쳐나갈 방법.
그중 하나로 ‘드래곤과의 접선’을 택했다.
‘한쪽 얘기만으로는 판단이 힘들다.’
이안은 이 상황을 자신의 손으로 통제하길 바랐다.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으며 주체적인 선택을 내리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상황의 객관적인 정보와 시야가 필수였다. 하여 어머니, 최초의 마법사, 페이지란 성씨와 관련된 문제도 일부러 따져 묻지 않았다.
‘전부 놈의 계획일 수도 있으니까.’
최초의 마법사가 누구든, 페이지란 성씨의 시초가 누구든, 어머니의 정체가 무엇이든 상관치 않는다.
최초의 마법사는 과거일 뿐이며, 페이지란 성씨는 문자일 뿐이고, 어머니는 어머니일 뿐이다. 설령 모든 것이 진실이자 엄청난 비밀마저 숨겨져 있다 한들, 우선 작금의 문제가 이안의 통제 아래 움직일 때 다뤄볼 문제였다.
“그 전에.”
이안이 다짜고짜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한쪽으로 팔을 뻗었다.
갑자기 무슨 짓을 하려는 걸까?
“나와.”
동시에 뻗었던 손을 꽉 쥐었다.
그러자 새카만 그림자가 확하고 튀어나왔다.
단언하건대 자의로 나타난 것은 아니었다.
강제로 끄집어낸 거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어쩐지, 일거수일투족을 다 안다 했더니만.”
그림자는 곧 인간의 형태를 이루었다. 이안과 같은 머리칼의 남자, 불과 몇 분 전에 사라졌던 ‘프란 페이지’였다. 이안을 지켜보고자 숨겨둔 ‘감시용 사념체’라 표현할 수 있었다.
"그간 재미 좀 봤겠어?"
지금껏 이런 식으로 감시가 이루어졌던 거다.
가진바 힘이 부족한 탓에 알아챌 수 없었을 뿐.
하지만 지금부터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에이, 오해다. 그냥 잘 배워왔나 시험 삼아서…….”
“시끄럽고.”
이안이 뻗었던 팔을 끌어당기자 프란의 사념체가 질질 끌려왔다. 마치 멱살이라도 잡힌 것처럼 말이다.
“꺼져.”
“아무리 그래도 꺼지라니…….”
“한 번만 더 이딴 식으로 나오면.”
이안의 날 선 경고가 이어졌다.
“아까 얘기, 없었던 걸로 하지.”
“워워! 진정해. 잘 알았으니까.”
다시금 사라져 버린 프란 페이지.
이번에는 정말 사라진 것 같았다. 예전이라면 모를까, 지금의 이안을 속이기란 쉽지 않을 터. 하물며 사념체 따위로는 더더욱 그랬다.
“…….”
그 후로 한참의 시간이 흘렀다.
조용히 생각 속에 잠겼던 이안.
그가 주문 하나를 발동시켰다.
“퍼핏 플레이.”
퍼핏 플레이.
인형 놀음.
이안이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분신 둘을 만들어냈다. 동시에 본신은 가수면 상태로 들어갔다. 과거 피에릭 영지에서 부렸던 주문과 같았으나, 질적인 차이만큼은 어마어마했다.
‘하나는 나를 지키고.’
퍼핏 플레이의 분신은 총 두 명.
그중 하나는 본신의 곁을 지킨다.
더불어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한다.
‘나머지 하나로만 움직인다.’
나머지 하나는 계획대로 움직인다.
약간의 눈속임 내지 안전장치였다.
‘가자.’
정확히 하루 내로 끝내야하는 일.
이안이 텔레포트 주문을 발동시켰다.
목적지는 불과 얼마 전에 방문했던 그곳.
절제 절명의 순간을 맞이했던 장소.
바로 수많은 가고일의 보금자리.
‘빗물받이 산맥’이었다.
(네놈……?)
심지어 동굴 속 가고일의 왕, 놈의 얼굴 앞으로 정확히 이동했다. 한데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았다. 의사소통에 자유로웠으며, 덩치 역시 전보다 커졌다. 반절이 뜯겨나갔던 보라색 안구도 조금은 회복된 모양이었다.
“또 보네.”
(큭……! 크흐흐흐!)
이안의 인사에 가고일의 왕.
놈이 광기로 가득 찬 웃음을 터드렸다.
(그래. 그렇지 않아도 네놈! 네놈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저 빌어먹을 결계만 아니었어도 진즉에 찾아내 사지를 다 찢어발겼을 텐데! 설마 제 발로 기어올 줄이야!)
가고일의 왕이 콧구멍까지 벌름거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드래곤에게 일정량의 힘을 돌려받은 기세였다. 저 몇 가지 변화와 자신감만 봐도 유추할 수 있는 사실 아니겠는가?
(도대체 뭘 믿고 기어왔는지는 모르겠다만, 아! 설마 그때 그 기억만 믿고 온 건가? 크하하핫! 네놈, 아무래도 명줄이 다한 것 같구나.)
위협적으로 몸을 부풀리는 가고일의 왕.
놈이 흉악한 이빨을 번뜩거리며 말했다.
(당장에 쳐 죽여주겠다! 뼈마디 하나 남기지 않고 모조리 다 씹어……!)
“말이 많군.”
듣기 거북한 듯 중얼거린 이안, 그가 검지와 엄지를 들어 가볍게 움직였다. 마치 가고일의 주둥이를 잡아 비틀어버리는 것 같은 손짓이었다. 물론 손짓으로 끝나지 않았다.
콰드득!
정말 가고일의 왕, 그 거대한 괴물의 주둥이가 비틀렸다. 아니, 비틀리다 못해 찢어져 버렸다.
뿐이랴? 번뜩거리던 이빨조차 모조리 뽑혔다. 녹색 피가 봇물 터지듯 흘러내렸다.
(크허어어어……?)
놈의 신음에는 고통만 실리지 않았다. 아직 상황파악이 덜 되었음을 알리는 의아함, 그리고 본능적인 공포가 꿈틀거렸다.
“짐승처럼 울음소리만 낼 때가 좋았어.”
이안의 손짓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머지 팔을 들어 무언가 쭉 찢어버리는 시늉까지 펼쳐 보였다. 바로 날개, 가고일의 왕이 가진 한 쌍 날개를 찢어버리기 위한 손짓이었다.
(크아아아악! 이,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입 좀 다물어봐. 목까지 비틀어버리기 전에.”
이안이 가고일의 왕을 집어던졌다. 그 거대한 몸뚱이가 동굴의 벽면으로 날아가 거칠게 부딪쳤다. 오히려 처음 만났을 때보다도 크게 벌어진 힘의 차이였다.
이대로라면 가고일의 왕이 완벽한 힘을 되찾는다 해도 감히 덤벼들 수조차 없으리라.
(크흐흐……!)
그럼에도 가고일의 왕은 위축되지 않았다. 놈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그에게는 믿을만한 구석이 있었으니까. 바로 산맥 전체를 둘러싼 일족들이 존재하지 않던가?
(건방진 놈! 도망치려거든 지금 당장 도망쳐라!)
느껴졌다.
아주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가고일이 몰려드는 소리 말이다.
마치 ‘자그마한 지진’과도 같은 진동.
그 소지진이 점차 동굴 쪽으로 다가왔다.
“아까부터 기다렸다.”
(뭐……?)
“전부 다 몰려오는 거.”
이안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오히려 얼굴이 여유로움으로 가득했다.
아까부터 기다렸다, 그 말이 딱 어울렸다.
(다이아몬드.)
더불어 새로운 주문을 펼치기 시작했다. 기존의 ‘술식’과 ‘언어의 힘’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마법, 이안이 과거의 세상에서 남몰래 창조시킨 새로운 주문, 이안 스스로 ‘9클래스 마법’이라 칭할 수 있는 마법이 사상 최초로 발동되는 순간이었다.
(더스트.)
다이아몬드 더스트.
이안이 정립시킨 ‘9클래스의 경지’.
그 미세한 냉기의 가루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겉보기로는 정말이지 별거 아닌 것 같았다.
마치 밀가루 포대가 허공에서 터져버리듯 수많은 냉기의 결정만 흩날릴 뿐이었으니까.
(크, 크하하! 그따위 짓거리로 뭘……!)
가고일의 왕.
그 괴물에게 비웃음을 사는 그때였다.
폭.
냉기의 가루 하나가 폭, 하며 터졌다.
정말 미미하기 짝이 없는 폭발이었다. 분명히 처음에는 그랬다.
(개화하라.)
언어의 힘을 통한 명령.
이안이 내린 명령 한마디에.
지이이이이잉-!
흩날린 결정들이 굉음을 일으켰다.
이는 단순한 폭발 따위가 아니었다.
잔뜩 농축된 냉기의 동시다발적인 ‘방출’.
‘개화’란 곧 그 냉기의 대방출을 뜻했다.
콰드득, 콰득, 콰드드드득……!
밀가루 한 톨만 한 냉기의 결정. 그 가루 하나에 담긴 냉기는 이안이 과거의 세상에서 펼쳤던 프로스트 노바, 그 주문의 규모와 맞먹을 정도였다. 이 비교가 무엇을 뜻하겠는가?
(…….)
가고일의 왕이 입을 다물었다. 순식간에 펼쳐진 광경이 너무나도 비현실적인 탓이 컸다. 충격적이며 놀랍기까지 했다.
“후우……!”
가벼운 숨소리와 함께 주문을 갈무리시킨 이안, 하나 그 가벼움과는 달리 이안의 9클래스 주문, ‘다이아몬드 더스트’가 일으킨 여파는 실로 놀라웠다. 이를 무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입 다물 생각이 좀 드나?”
표현의 방법은 다양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어떠한 비유든 가져다 붙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딱 하나, 펼쳐진 광경을 정확히 표현해낼 방법이 다양했다. 그것은 바로 ‘설산’이었다. 동굴은 모든 벽면이 얼어 일종의 ‘냉동고’를 이루었으며, 그 냉기의 마수가 동굴 바깥까지 퍼져 나가 산맥마저 뒤덮어버렸다.
(히, 히익……!)
그렇기에 ‘설산’이었다. 푸른색 풀과 나무, 포근한 흙으로 가득했던 ‘봄날의 산맥’에 ‘때 아닌 겨울’을 선사해줬다는 얘기다. 물론 가고일의 왕이 믿었던 일족들, 그 어마어마한 머릿수의 가고일 무리도 냉기의 여파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살고 싶으면.”
이안이 가고일의 왕에게 걸어갔다. 그 어떤 마법도, 언어의 힘도 부리지 않았다.
한데도 가고일의 왕은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압도적이다 못해 충격적인 힘의 격차였으니까.
“저번에 했던 거, 다시 해봐.”
(뭐, 뭐라고……?)
“드래곤이 있었던 그 무차원의 공간.”
이안 페이지와 가고일의 왕.
두 존재의 눈이 가까이 맞붙었다.
석화에 걸렸을 때와 비슷한 거리였다.
“거기로 날 들여보내.”
(……!)
가고일의 왕이 머리를 바쁘게 굴렸다.
하나 그 생각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쨌거나 살아남을 기회가 생겼다.
심지어 놈의 목표는 자신이 아닌 것 같았다.
아무래도 드래곤에게 목적이 있는 것 같은데…….
“싫어? 그럼…….”
(아, 아니다! 멈춰! 멈추라고!)
기겁하며 소리친 가고일의 왕.
그는 이 상황을 거부할 까닭이 없었다.
드래곤이라면 일말 의리조차 없었으니까.
“시작해.”
(갑자기 죽이는 건 아니겠지……?)
“하는 거 봐서.”
(그, 그럼 눈……. 내 눈을 봐라.)
가고일의 왕이 가진 보랏빛 눈, 그 눈과 마주치기 무섭게 ‘석화’가 진행되었다.
가고일의 왕은 물론 이안의 육신까지 돌덩이처럼 변해버렸다. 물론 육신만 돌이 되었을 뿐, 정신은 온통 보랏빛 무차원의 공간, 즉 드래곤 일족의 새로운 영토로 진입했다.
“…….”
다시 돌아온 보랏빛 공간. 이안이 주변을 둘러봤다. 저번에 왔을 때와 변한 것이 없었다. 커다란 보랏빛 구체, 그로부터 내리치는 번개, 바닥을 이룬 보랏빛 흙과 모래까지.
(뭐지?)
다만, 그때와 다른 점이 있다면 ‘드래곤’이었다. 가고일의 왕과 함께 나타났던 당시와는 달리, 이번엔 진입하자마자 제 모습을 드러냈으니까. 바로 이안에게서 마나를 소멸시켰던 장본인이자 보랏빛 공간의 문지기, 레드 드래곤 ‘헤르파이 도토스’였다.
(네놈은 분명 금제의 힘…….)
그 붉은 용의 의문 가득한 목소리가 이어지는 찰나.
“새끼 도마뱀은 빠져.”
이안이 놈의 말문을 단칼에 끊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