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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127화 (127/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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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127화

    50. 가고일의 왕(2)

    “가고일의 왕, 그 존재에 관한 기억을 제가 열람해볼 수 있겠습니까?”

    이안의 물음에 정신체가 눈을 반짝였다. 그 커다랗고 섬뜩한 동공이 이완과 수축을 반복했다. 분명 즐거움의 증거였지만, 이안으로선 분노와 불쾌함으로 느껴질 따름이었다.

    (자격부터 증명해야 하는 법. 그간 얼마나 강해졌는지…….)

    “또 그 증명을 해야 하는 겁니까?”

    (물론이다.)

    단호하기 짝이 없는 대답.

    하나 이안도 물러서지 않았다.

    시간을 낭비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다음으로 미루기는 불가능합니까?”

    (날로 먹으려고 드는군. 불가하다.)

    “에반투스 님의 목숨이 경각에 달린 문제입니다. 당신의 자손이기도 하죠. 그런데도 미룰 수가 없겠는지요?”

    (에반투스가……?)

    이제야 반응을 보이는 리시스 라덴쥬의 정신체였다. 비록 정신체에 불과하다곤 하나, 기본적으로 본신의 모든 것을 그대로 따라갈 터. 자손에 대한 감정이 다르지는 않으리라.

    “가고일의 왕이란 존재가 나타났습니다. 에반투스 님께서는 그 왕과 일족에게 당한 것으로 추정되고요. 지금으로선 생사조차 알 수 없는 상황입니다. 해서, 관련된 정보를 얻고자 찾아온 겁니다.”

    그 말에 정신체의 긴 목이 옆으로 휘었다.

    이해할 수가 없다는 몸짓처럼 보였다.

    (그럴 리가. 봉인이 풀렸을 리가 없을 터인데?)

    “하지만 사실입니다.”

    이안의 확고한 대답.

    거짓은 아닌 것 같았다.

    그리 판단한 정신체가 말했다.

    (……좋다. 그 존재에 대한 모든 것을 말해주도록 하지. 기회는 한 번뿐이니 집중해서 듣도록 하라.)

    짐짓 근엄한 어조로 말한 정신체.

    그가 오래된 기억을 끄집어냈다.

    (가고일의 왕, 놈은 우리가 언어의 힘을 전수받기 이전, 세상을 쥐락펴락하던 절대자였다. 말하자면 최상위 포식자였지. 인간은 물론 우리 일족들까지 사냥감으로 여겼던 존재로서, 상상을 초월하는 번식력까지 가졌다.)

    전설 속에서도 다루지 않는 이야기.

    그러나 이것은 명백한 역사였다.

    먼 고대에나 존재했던 ‘포식자’.

    ‘가고일의 왕’에 관한 기억.

    (하나 우리 일족들이 언어의 힘을 깨우친 이후부터는 그 격차가 줄어들었지. 결국 우리들의 적수조차 되지 않았다. 따지고 보면 그리 강한 존재도 아니었어.)

    당연한 얘기였다. 언어의 힘을 숙달한 용 일족보다 강할 리가 있겠는가? 물론 이안에게는 엄청나게 버거운 적이 아닐까 싶다만, 어디까지나 정신체의 입장이었다.

    (다만 놈에게는 석화라는 이름의 성가신 능력이 있는데, 그 자리에 돌처럼 굳어 수백 년, 아니 수천 년이 지나도록 유지할 수 있지. 단순한 돌덩이가 되는 게 아니다.)

    정신체가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놈들은 이 보고와 같은 ‘무차원의 공간’을 만들어낼 수 있다. 육신은 돌덩이 속으로, 정신은 무차원의 공간 속으로 숨어버리는 원리로, 놈들의 눈이 열쇠의 재료로 쓰이는 까닭이기도 하지. 무차원의 힘, 가고일의 눈에는 바로 그 힘이 담겨있으니까.)

    시간의 보고, 즉 ‘무차원의 공간’은 용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오히려 가고일의 전유물에 가까웠으며, 용들은 단지 그 눈에 담긴 ‘무차원의 힘’을 빌리는 처지에 불과했다.

    (놈들의 왕은 특별했다. 평범한 가고일의 석화야 부수면 그만이지만, 놈의 석화는 도저히 파손시킬 수가 없더군. 일족 중 누구도 흠집조차 낼 수 없었지. 우리 일족들의 스승이었던 최초의 마법사, 그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안이 순간 움찔거렸다. 아무래도 드래곤의 정신체는 그 마법사의 이름이 ‘프란 페이지’란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비슷한 외형적 특징, 비슷한 이름, 비슷한 인간 마법사인 이안을 보고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때부터 우리는 무차원의 공간을 연구했다. 덕분에 놈들보다 훨씬 더 안정적이고 완전무결한 공간을 창조해 냈고, 석화 속으로 숨어버린 가고일의 왕을 새로운 공간에 가두어버렸다. 놈으로선 기가 찰 노릇이겠지. 제아무리 석화를 풀어도 사방천지의 풍경은 변하지 않았을 터이니…….)

    즉 무차원의 공간으로 진입한 가고일의 왕, 놈을 새로운 무차원의 공간에 재차 가둬 버렸다는 얘기였다. 가고일의 왕에게는 그야말로 정신고문이나 다를 바 없었을 터.

    “그럼 그 공간에서 스스로 빠져나온 걸까요?”

    (결단코 불가능한 일이다.)

    정신체가 선언하듯 읊조렸다.

    그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다.

    (만약 놈이 그 공간에서 빠져나왔다면 가능성은 하나밖에 없다. 누군가 풀어줬겠지. 본신을 포함한 일족이거나, 혹은 우리와 함께 무차원의 공간을 연구했던 최초의 마법사, 그분의 소행이거나.)

    드래곤 일족, 혹은 최초의 마법사.

    둘 중 하나가 가고일의 왕을 풀어줬다?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아무런 이유도 없이 풀어줬을 리는 없을 텐데요.”

    이안의 말에 설득력이 있었다.

    드래곤의 정신체 또한 인정했다.

    (본신의 기억과 경험, 그리고 판단의 척도를 종합해본 결과, 가장 그럴듯한 사유는 놈이 가진 ‘번식력’이다.)

    “번식력?”

    (이미 말했듯, 가고일은 엄청난 번식력을 갖고 있다. 마치 바퀴벌레와도 같지. 하지만 그 수많은 가고일의 번식능력을 합친 것보다도 가고일의 왕, 놈 하나가 지닌 번식력이 곱절은 더 월등하다. 심지어 우등한 가고일을 생산하더군.)

    이안은 가고일을 만나봤다. 크게 위협적인 존재는 아니었으나, 범인류적으로 볼 때 충분히 강력한 괴물이었다. 그런 존재가 바퀴벌레처럼 무한대로 증식한다고?

    ‘그건 좀 끔찍한데.’

    이안이 혀를 내두르며 물었다.

    “허면 봉인을 푼 존재의 목적이 번식이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러니까, 예를 들자면 대량의 가고일로 이루어진 군대를 양성한다거나…….”

    (아닐 것이다. 놈들은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 둘만 붙여놔도 금세 상잔을 일으킬 정도지. 그러한 족속으로 군대라. 글쎄, 여러모로 힘들지 않겠는가?)

    “군대를 제외한다면 어떤 목적이 있겠습니까?”

    (놈들의 눈에 담긴 무차원의 힘.)

    가고일의 눈, 무차원의 힘.

    정신체의 추측은 그것이었다.

    (그 힘을 지속해서, 대량으로 공급받고자 할 가능성이 크다고 추측된다. 어떤 경우에도 드나들거나 엿볼 수 없는 강력한 공간을 생성한다든가, 오랜 세월 유지한다든가. 그러한 까닭들을 떠올려볼 수 있겠군.)

    즉 가고일의 눈을 대량으로 취하고자 봉인으로부터 끄집어냈다는 추측이었다. 가고일의 개체 수가 적어진 지금으로선 가고일의 왕이 갖춘 번식능력이 필요할 테니까. 이안이 듣기에도 가능성은 충분했다. 다만 한 가지가 석연치 않았다.

    “그 추측대로라면, 가고일의 왕은 눈이 뽑혀나갈 자손들을 계속 낳아주는 셈인데, 언어의 힘으로 정신까지 지배할 수도 있는 겁니까? 평범한 존재도 아니고 말이죠.”

    가고일의 왕은 한때 최상위 포식자로 군림했던 존재다. 그만큼 강력하며, 응당 걸맞은 정신력까지 갖췄을 터. 한데 그러한 존재의 정신을 지배할 수 있다? 아무리 언어의 힘이라도 그러한 경우가 가능할까?

    이안의 지식으로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아니, 내가 알기로 그러한 힘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럼 어찌…….”

    (가고일의 왕은 가고일들을 자손으로 여기지 않는다. 조금 아프게 배설한 배설물에 불과할 뿐이지. 이해관계만 통한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이해하겠는가?)

    “……이해했습니다.”

    순간 탄성마저 뱉을 뻔했던 이안이었다.

    정말이지 기가 막힐 정도의 비유였다.

    (지금 세상에는 나의 본신과 일족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들었다. 내가 아직 존재하는 바, 죽지는 않았을 테지만, 오래전부터 자취를 감추었다고 했지. 현재도 유효한가?)

    “유효합니다.”

    (그렇다면 가고일의 왕, 그 존재가 풀려난 일과 어떠한 연관이 있을 것이다. 그 거대하고도 다양한 개성을 가진 일족들이 완벽하게 사라질 방법은 두 가지, 먼저 세상의 이치가 전부 그렇듯, 죽음과 함께 흙으로 사라지거나…….)

    “무차원의 공간 속으로 숨었을 수도 있겠군요.”

    (말귀가 밝군. 다만 말미에 한마디를 더 추가하자면, 누군가에게 ‘숨겨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겠지.)

    무차원의 공간 속으로 숨었거나.

    혹은 의도적으로 숨겨졌거나.

    두 경우를 언급하는 정신체였다.

    이안에게도 의미하는 바가 컸다.

    ‘연관이 있다.’

    프란 페이지의 행방.

    그와 관련된 단서들.

    분명 연관이 있으리라.

    “한 가지 더 묻겠습니다.”

    (그럴 자격은 없지만, 말해보아라.)

    “제가 그 가고일의 왕을 이길 수 있겠습니까?”

    지금으로서 가장 핵심적인 질문이었다.

    정신체의 눈에 푸른빛 마나가 일렁거렸다.

    이안이 이루어낸 경지를 가늠해 보는 눈치였다.

    (호오, 꽤 재미난 장난감들을 얻었군.)

    “재미난 장난감……, 그런 셈이죠.”

    (가능성은 충분하다.)

    “가능성 말입니까?”

    (본인의 힘을 맹신하지만 않는다면.)

    본인의 힘을 맹신하지 마라.

    그 한마디로 이해할 수 있었다.

    이안은 눈치와 이해력이 빠른 편이다.

    “……알겠습니다.”

    (벌써 두 번째 얘기하지만, 말귀가 밝아서 좋군.)

    기분 좋게 중얼거린 정신체.

    이안이 마지막 질문을 올렸다.

    “이번 질문을 마지막으로 드리겠습니다.”

    (좋다.)

    “혹시 프란 페이지란 이름을 아십니까?”

    (프란 페이지?)

    잠시 고민하는 듯 보였던 드래곤의 정신체.

    곧 그의 막힘없는 대답을 들어볼 수 있었다.

    (그대의 이름이 이안 페이지라 했으니, 제법 비슷한 이름이로군. 으음, 나는 알지 못하는 이름이다. 어째서 묻는 건가?)

    확실해졌다. 적어도 천여 년 전까지의 드래곤은 ‘프란 페이지’란 이름을 알지 못했다. 아마 이름을 본격적으로 사용한 시기가 조금 더 이후의 시간대일 터. 물론 이마저도 기만책이라면 어찌할 도리가 없겠으나, 직접 확인했다는 부분에 의미를 뒀다.

    “아, 크게 중요한 문제는 아닙니다. 그보단 페어리의 여왕께서도 용무가 있으시니 대화들 나누시지요. 제가 드릴 질문은 여기까지입니다.”

    (그런가.)

    그 후로 한동안 페어리 퀸과 정신체의 대화가 이어졌다. 대부분 용아병 스파르토이의 변화와 소멸에 관한 문제였는데, 리시스 라덴쥬의 정신체도 이렇다 할 결론이나 해결책까지 내려줄 수는 없었다. 그저 몇 가지 통상적인 추측과 위로가 전부였다.

    * * *

    (어찌…… 되었소?)

    시간의 보고로부터 빠져나온 이안과 페어리 퀸, 그 복귀에 브레스로 하여금 비약의 완성을 도왔던 말리오투스가 물었다. 약간의 수면과 레디오의 여러 회복약으로 호전된 모습이었으나, 여전히 전투에 나서기란 불가능해 보였다.

    “에반투스 님을…….”

    이안의 대답은 간단했다.

    “구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오오……!)

    물론 진심으로 에반투스를 구하고자 나선 것은 아니었다.

    페어리 퀸이 당한 경우였다면 조금 더 감정적일 가능성도 있겠지만, 드래고니안 일족과는 아직 이렇다 할 유대가 형성되지 않았다. 다만 그 배경에 깔린 의문점들이 궁금했다. 또한 그 의문으로부터 얻고자 하는 단서까지 찾아내고 싶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에반투스를 구할 수 있다면야, 아주 기꺼운 마음으로 구해줄 터.

    (조심해라. 그분께서도 네 녀석이 가진 힘을 너무 맹신하지 마라, 그렇게 조언하시지 않았더냐? 가슴 깊이 새겨듣는 게 좋을 게야.)

    옆에 있던 페어리 퀸이 경고했다.

    드래곤 앞 깜찍했던 콧소리는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지 않아도 그럴 생각입니다.”

    자신의 힘을 너무 맹신하지 마라.

    바꿔 말하면 ‘주변의 힘을 빌려라’.

    다행히도 이안에게는 존재했다.

    손을 뻗어 빌릴 만한 힘이.

    “여왕님.”

    (듣고 있다.)

    “페어리 일족 분들을 모두 소집해 주세요.”

    (흐응, 머릿수에는 머릿수로 대응하시겠다?)

    “그런 셈이죠.”

    나지막이 읊조린 이안. 그의 손으로부터 흘러나온 마나가 저택 한구석 수정구를 휘감았다. 그러자 확장된 저택, 일명 ‘이안 페이지의 장원’ 곳곳에 석상처럼 굳어 있었던 용용이 1호, 2호, 3호, 5호, 6호, 7호가 각각 우렁찬 포효와 함께 작동하기 시작했다.

    “다만, 이쪽은.”

    이안이 아공간 주머니부터 장검 한 자루를 꺼냈다. 대장장이 장인 할리아가 만든 걸작, 아직 이름조차 부여받지 못한 보검이었다.

    “소수정예로 가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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