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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105화
38. 장인의 발자취(3)
이안의 예상처럼, 보르돈 마을은 평범한 마을이 아니었다.
중년 촌장 잭슨을 포함한 스물 남짓의 사기꾼들에게 장악당한 지 오래였으며, 기존 주민들은 지속적으로 수탈을 당하는 형태였다. 물론 주민들은 자신이 젊은 촌장 무리에게 수탈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그럴싸한 사이비 행각의 힘이었다.
“스튜 맛이 좋네요.”
“하, 하하. 다행입니다. 정말로.”
잭슨과 그 무리가 마을을 통째로 집어삼켜 왕처럼 군림해 왔던 오늘, 좀처럼 보기 드문 외부인이 찾아왔다. 간만에 옛 경험이나 살려보려고 했다.
한데 첫 번째 시도부터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수면제 한통을 다 썼음에도 저 밝은 갈색 머리의 외부인, ‘리안’이란 청년은 쓰러질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니까.
‘대체 왜?’
비싼 수면 비약이 아닌 싸구려 비약이라서? 아니, 그럴 리는 없다. 값싼 이유는 어디까지나 독성 탓이다. 근본적인 효과 자체는 다를 바 없단 얘기다.
‘약이 오래되어서 그런가?’
잭슨의 사고는 딱 그쯤에서 멈췄다. 그 이상의 판단을 내리기란 힘들었다. 특히 저 외부인한테 원인이 있다는 생각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스튜만 벌써 세 그릇째였다.
‘생각보다 맛있네.’
한편 이안은 진심으로 스튜의 맛을 즐겼다. 돌이켜보자면 이런 평범한 식사, 전생의 12살 이후로 먹어본 적이 없었다. 자그마치 36년 만에 맛보는 별미 아니겠는가? 물론 허기가 반찬이기도 했다.
‘약만 타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이안은 마법사다.
그냥 마법사도 아니고 대마법사다.
어지간한 약물이야 마나로 차단할 수 있다.
하지만 변질된 맛과 향은 별개의 문제였다.
‘그나저나…….’
이안이 중년 촌장 잭슨을 바라봤다.
그는 빈 그릇들을 치우고 있었는데, 당황한 기색을 내색하지 않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었다. 그래봐야 이안의 눈까진 속일 수 없었지만, 나름 쓸 만한 연기력의 소유자였다.
‘조금 더 지켜볼까?’
조잡한 주제에 아티펙트의 원리로 만들어진 석상하며, 하필이면 가짜 용의 교단을 참칭하는 행동까지. 눈여겨볼 점들이 제법 많았다. 힘으로 제압한 뒤 캐낼 수도 있겠으나, 일단 자연스럽게 지켜보는 쪽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런데, 아까 봤던 그 석상 말이죠.”
“예? 아, 드래곤의 석상이요. 말씀하시죠.”
“평범한 물건은 아닌 것 같던데, 혹시 직접 조각하신 석상입니까? 아니면 어디 외부에서 구해오신 물건인가요?”
이안의 질문에 촌장 잭슨이 고민했다.
뭐라도 대답을 해야 자연스러울까?
그럴싸하게 대답할 필요가 있었다.
“그…… 몇 년 전이었던가, 흉작이 생각보다 길어질 때 들여온 석상입니다. 그때부터 사정도 나아지기 시작했죠. 이제 저희 마을한테는 드래곤이 곧 신이나 마찬가집니다.”
결코 거짓말이 아니었다. 세부적인 상황이야 다를 지언정, 상황 자체는 진실만을 얘기했다. 흉작이 길었던 것도 사실, 그쯤 마을에 석상을 들여온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정말 드래곤한테 응답을 받는 겁니까?”
오히려 거짓말은 이안의 몫이었다. 아무 것도 모른다는 표정으로 두 눈까지 껌뻑거렸다. 제 아무리 촌장 잭슨의 연기력이 뛰어나다 한들, 두 번의 삶 속에서 도가 터버린 이안을 넘어설 수는 없었다. 42세의 정신머리로 12세의 천진한 표정과 말투, 떨림까지 연기해본 경험이 있는가? 없다면 말을 말라.
“저희 마을은 그렇게 믿고 있습니다.”
“그럼 제 기도에도 응답을 해주실까요?”
“진실만 하시다면야, 분명 그래주실 겁니다.”
“오…….”
이안이 감탄을 터뜨렸다.
철저히 만들어진 감탄이었다.
“가능하다면 기도를 좀 올려보고 싶은데, 혹시 외부인에게도 허락이 되는지요? 아시다시피 저같은 타지인으로선 흔치 않은 기회인지라…….”
“아무렴요. 지금 당장이라도 가능합니다.”
잭슨이 거리낄 것 하나 없다는 듯 이안을 석상까지 안내해 줬다. 기도를 올리던 주민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침 예배가 끝난 모양이었다.
“규칙은 딱히 없습니다. 그냥 편하게, 진심을 담아 기도해 보십시오. 그 마음만 진실하다면 드래곤께서 충분히 응답을 해주실 겁니다.”
잭슨이 석상을 가리키며 말했다.
제법 사이비다운 어조와 말투였다.
“잠시 물러나드리겠습니다.”
편히 기도를 올리라며 멀찍이 떨어져주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안의 목표는 기도가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상황 속에서 저 촌장과 주민들의 반응을 살펴보고 싶었다.
‘이 석상이 고장나 버린다면 말이지.’
아무래도 이 조잡한 석상의 마법 효과가 가짜 용의 교단을 유지시켜주는 핵심인 것 같은데, 과연 그 구심점이 제 기능을 잃는다면 어떻게 대처할까?
‘어디 밑천 한번 드러내 봐.’
옅게 웃은 이안이 주문을 발동시켰다.
그 대상은 조잡한 드래곤 석상이었다.
‘스펠 디소더.’
아티펙트가 마법을 발동시키는 원리는 마법사와 똑같았다. 즉 술식의 연산을 방해하는 최상위 주문, ‘스펠 디소더’ 역시 먹혀든다는 얘기였다.
“용이시여. 부디 앞으로 남은 일정에 등불을 비춰주십시오. 제가 이 여행을 통해 깨닫고자 하는 것을 모두 깨닫고, 고향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이안이 다 들리는 목소리로 기도를 읊었다.
촌장 잭슨의 귀에도 그 기도가 전해졌다.
‘저놈을 어떻게 털지?’
기도 중인 ‘여행객 리안’의 모습을 계산대에 올려 이래저래 살펴본 촌장 잭슨, 그린리버에서 여기까지 왔다면 상당히 긴 여행이었을 터.
한데도 복장의 상태나 피부 때깔이 괜찮았다. 여행 내내 좋은 잠자리와 양질의 음식을 먹어줬다는 증거나 마찬가지다. 단언하건데 노잣돈 꽤나 들고 다니는 여행객이 분명하리라.
‘자기 몸 하난 지킬 수 있는 놈 같은데.’
상당한 노잣돈과 함께 먼 거리를 여행하는 놈이 그 흔한 경호원조차 없다. 날붙이를 앞세운 클레반의 공격에도 여유롭게 대처해 냈다. 일신의 무위에 자신이 있다는 거다.
‘미리 애들부터 모아놓고, 그 다음에 유인해야겠군.’
놈을 으슥한 곳으로 유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곧 석상의 응답을 목격할 테고, 이것저것 흥미가 동하기 시작하겠지.
그때 잘만 구슬리면 된다. 예컨대 더 대단한 걸 보여준다고 하든가, 기타 써먹을 미끼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
그런데 조금 이상했다.
슬슬 발동될 때가 된 것 같은데.
드래곤 석상이 뿜어낼 빛줄기 말이다.
‘뭐지……?’
마을 주민들의 아침예배 당시.
그때까지만 해도 잘만 뿜어댔다.
한데 왜 갑자기 멈춰 버린 걸까?
‘설마 고장이 난 건가? 저게 고장도 나?’
지금까지, 그러니까 ‘그놈’이 저 석상을 조각해 준 이후부터 단 한 번도 고장난 적은 없었다. 분명 그랬을 지언데, 하필 이제 와서 고장이라니?
‘젠장! 도움이 안 되는구먼.’
낭패였다. 저 외부인과 주민들이 보는 앞에서 ‘그놈’을 불러와 고쳐낼 수도 없는 노릇이거늘, 어떤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순간이었다.
“으음, 제 딴에는 진심을 다해서 기도했는데, 아무래도 부족했던 것 같군요. 아무런 응답도 없는 걸 보니…….”
이안이 촌장 잭슨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비록 말은 그렇게 하고 있었으나, 표현하기 힘든 실망감으로 똘똘 뭉친 목소리였다.
“그, 그럴 리가요. 저희도 가끔 응답받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아침예배가 끝난 뒤에는 자주 그러더군요. 이러실 게 아니라, 조금 쉬시다가 다른 예배에 참석해보시지요.”
“다른 예배요?”
“저희 마을은 드래곤께 주기적으로 예배를 드립니다. 바쁘신 일정이 없으시다면, 오늘 하루는 저희 마을에서 쉬시는 게 어떠시겠습니까? 묵으실 방도 내어드리겠습니다.”
“그래도 그렇게까지는…….”
이안의 반응에 촌장 잭슨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저희 마을은 예로부터 손님이 귀한 마을입니다. 찾아주시는 손님 한분 한분이 모두 귀빈이시죠. 헌데 그 귀한 손님께서 실망하신 채로 떠나신다면, 저희로서도 마음이 편치가 않을 것 같아 드리는 부탁입니다.”
아까부터 말은 참 잘하는 잭슨이었다.
사이비의 품격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알겠습니다.”
이안에게도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다. 저들이 마련해줄 숙소라는 곳에 박혀있는 척 하다보면, 놈들이 망가진 조각상을 어찌 다루는지도 알아낼 수 있을 테니까.
“이쪽으로, 쉬실 곳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촌장 잭슨에게 안내를 받은 이안, 쉬실 곳이란 바로 잭슨의 오두막집 한쪽으로 마련된 별채였다. 일단 겉보기에는 손님을 대접하고자 만들어진 사랑방 같았다.
‘일단 안심부터 시켜두자. 사냥은 그다음이다.’
‘여행객 리안’을 사랑방까지 안내해 준 잭슨이 입맛 한번 쩝 다시며 나왔다. 일단 저 석상부터 고치는 게 급선무였다. 돈 많은 여행객 놈을 속여먹기 위해서라도, 멍청한 주민들을 계속 등쳐먹기 위해서라도 필수였다.
“이봐, 콜린!”
그가 부하 하나를 호출했다.
예배를 어찌하느냐 물었던 주민이었다.
상당히 큰 덩치와 험악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부르셨습니까. 형님, 아니 촌장님.”
“지금 당장 그놈, 데리고 와.”
“아까 보니까 또 정신병이 도진 것 같던데요?”
그 대답에 잭슨이 약병 하나를 꺼냈다.
진한 보라색 액체가 담긴 약병이었다.
“진정제야. 가서 먹이고 데려와. 빨리!”
“그, 금방 다녀오겠습니다.”
“그리고 에스테반!”
또 다른 부하가 후다닥 달려왔다.
콜린과는 다르게 왜소한 남자였다.
“너는 애들 데리고 마을 사람들 통제해. 절대 석상 근처로 기웃거리지 못하게 만들라는 얘기야. 그 손님도 잘 감시하고, 알아듣겠어?”
“예, 촌장님.”
얼마나 기다렸을까? 곧 험악한 수하 콜린이 누군가를 데려왔다. 아니, 끌고 왔다고 표현하는 쪽이 옳았다. 진정제가 맞긴 맞는 건지, 약에 잔뜩 취해 몽롱해진 얼굴이었다.
“오, 클레반.”
약에 취한 채 끌려온 인물은 바로 ‘클레반’이었다. 텔레포트로 나타난 이안을 자객이라 부르며 덤벼들었던 바로 그 미치광이 꼬마였다.
“아까는 미안했다. 손님이 계시지 않았더냐? 착한 네가 이해를 해줬으면 좋겠구나.”
잭슨이 클레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발작에 가까웠던 아까와 달리 차분해 보였다.
그 보라색 진정제의 효과인 것 같았다.
“너를 부른 건 다름이 아니라, 이 석상 말이다. 네가 우리에게 만들어준 석상, 덕분에 마을을……, 크흠! 아무튼 문제가 좀 생긴 것 같거든. 살펴봐줄 수 있겠느냐?”
그 부탁에 꼬마 클레반이 석상으로 다가갔다. 약에 취해 멍한 표정은 여전했으나, 적어도 석상을 바라보는 눈빛만큼은 매섭게 살아났다.
“…….”
말없이 조각정과 망치를 쥔 클레반, 그가 무작정 드래곤 조각상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촌장 잭슨은 분명 고쳐달라고 부탁했던 것 같은데, 그렇다고 보기엔 상당히 과격해 보였다. 거의 조각정과 망치로 두들겨 패는 수준에 가까웠으니까.
“어때, 고칠 수 있겠지?”
그러나 잭슨은 클레반의 행동이 익숙해 보였다.
탕! 타앙! 탕! 탕!
물론 클레반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묵묵하게 조각정과 망치를 휘둘렀다. 가뜩이나 조잡했던 드래곤 석상의 굴곡이 더더욱 조잡해졌다.
“조심 좀 하라고, 드래곤 모양은 나와야 할 거 아니야?”
자신에게 뭐라고 하든지 말든지, 클레반의 망치질은 한동안 계속 펼쳐졌다. 이래저래 두들겨도 보고, 어느 부분은 과감하게 박살 내보기도 하고, 석상 아래쪽으로 무언가를 새기는 것 같기도 했다. 참으로 기상천외한 수리가 마무리될 무렵.
“끝인가? 다 고쳐진 거야?”
“…….”
“이 약이 이래서 문제라니깐.”
잭슨이 혀를 끌끌 차며 석상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고는 대충 아무 말이나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앞으로도 이 짓거리, 계속 해먹을 수 있도록 도와주시고. 음, 또…….”
그러자 석상으로부터 빛이 뿜어져 나왔다. 석상에 걸린 ‘스펠 디소더’ 주문이 완벽하게 파훼된 결과였다. 바로 저 정신 나간 꼬마, 클레반의 조각정과 망치로부터 말이다.
“좋았어!”
쾌재를 부른 잭슨이 부하에게 손짓했다.
그만 클레반을 돌려보내란 뜻이었다.
보상은커녕 한마디 칭찬조차 없었다.
“따라와.”
험악한 부하 콜린이 클레반의 목덜미를 잡고 되돌아갔다. 보르돈 마을에서도 아주 구석진 곳에 우두커니 세워진 창고, 그 자물쇠가 잠긴 창고야말로 클레반의 집이었다.
“정신 돌아올 때까지 얌전하게 박혀 있으라고.”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창고 문이 닫혔다.
철컥거리며 자물쇠까지 잠겨 버렸다.
그럼에도 클레반은 조용했다.
허공만 바라볼 뿐이었다.
“기억이…… 나질 않아.”
진정제를 복용한 이후 처음으로 중얼거린 클레반, 이안을 자객 취급 할 때와는 목소리 자체가 사뭇 달랐다. 조금 더 성숙해진 느낌이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누구였지?”
누구도 들어줄 리가 없는 물음.
그 말이 허공으로 퍼져나가는 순간이었다.
“나도 궁금하군.”
웬 청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시에 그 형체까지 스르르 나타났다.
“누군데 아티펙트를 다룰 줄 알지?”
밝은 갈색의 머리칼을 가진 여행객.
투명화 마법에서 빠져나온 이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