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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94화 (94/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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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94화

    34. 채찍과 당근(2)

    이안의 인사말에도 에반투스와 그 자손들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분명히 어디선가 들어본 목소리, 결코 낯설지 않은 냄새, 하지만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도대체 누구지? 에반투스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에반투스의 긴가민가한 반응에 이안이 손뼉을 쳤다. 달라진 생김새가 문제였다. 곧장 페이스 오프 주문을 풀고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미청년까지는 아니었지만, 누구에게나 충분히 호감을 살 법한 얼굴, 마법사 이안 페이지 본연의 모습이었다.

    (네놈은……!)

    에반투스가 놀란 듯 중얼거렸다.

    어찌 저 얼굴을 몰라보겠는가?

    사라져버렸던 이안 페이지.

    놈이 눈앞에 나타났는데.

    “제가 없는 동안 사고를 좀 치셨더군요.”

    이안이 쥐고 있던 란데오르의 꽃잎과 그 새파란 잎사귀를 바닥으로 흩뿌렸다. 에반투스 역시 어렵지 않게 알아볼 수 있었다. 알아듣기도 했다.

    (사고라니? 설마 너희들의 황제와 관련된 문제를 말하는 것인가? 어림도 없는 소리다! 그것은 나의 명령으로 비롯된 일이 아니거늘! 어디까지나 너희들이 5황자, 라그나르라고 했던가? 그놈의 간곡한 요청으로……!)

    반사적으로 자기 변호에 돌입했던 에반투스, 이내 무언가를 깨닫고는 거리부터 벌렸다. 자신은 더 이상 이안의 권속이 아니었다. 자손들을 죽이고 자결하라는 명령 또한 사라졌다. 심지어 놈보다 강하기까지 하다. 권속의 주문, 그 범위만 유지하며 잡아 족치면 그만이라는 얘기다.

    ‘당황할 필요가 전혀 없다.’

    에반투스가 평정심을 되찾았다.

    페어리와 용아병, 그들과는 달랐다.

    저 인간이 권속의 힘을 부릴 수 있든.

    또 어떤 대단한 능력들을 가졌든.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놈이 세월의 허락을 대신 내려줄 것도 아니고.’

    용의 힘을 쓴다하여 용은 아니다.

    브레스를 타고난 자신이 그렇듯.

    저 인간 마법사도 마찬가지란 뜻이다.

    ‘차라리 잘되었다.’

    마침 거슬렸던 존재가 제 발로 찾아왔다.

    불안 요소는 사전에 지워두는 것이 좋겠지.

    ‘지금, 여기서 끝장을 본다.’

    드래고니안, 에반투스의 붉은 눈동자가 번뜩거렸다. 동시에 그 흉측한 날개를 좌우로 뻗었다. 날아오르기 위해서였다.

    (인간 마법사여. 이곳이 어디인 줄 아느냐?)

    “용의 둥지였던 곳, 아닙니까?”

    (맞다. 용케도 알아차렸군.)

    그리 말한 에반투스가 용의 둥지, 그 표면 아무 곳에나 공격 마법을 난사했다. 하지만 그 어떠한 마법도 흠집조차 낼 수 없었다. 마법 자체를 흡수하는 것처럼 보였다.

    “튼튼하네요.”

    이안의 짤막한 감상에.

    (인간 따위의 무덤으로 쓰기엔 과분한 장소지.)

    에반투스가 화답했다.

    명백한 적대감의 표시였다.

    “오늘은 아무도 죽지 않을 겁니다.”

    (지금 나를 제압이라도 해보겠다는 건가?)

    “피를 보긴 좀 그렇죠.”

    이안의 목소리는 당당함으로 넘쳤다.

    6클래스 주제에, 미치기라도 한 걸까?

    에반투스의 비릿한 조소가 이어졌다.

    (도대체 뭘 믿고 까부는 건지 모르겠군. 설마 아직도 그 권속의 주문을 믿고 있는 것이냐? 그렇다면 큰 오산이지. 네놈이 나의 근처로 접근이나 할 수 있을 거라 보는가?)

    에반투스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혹 저번처럼 다른 권속들의 도움을 믿는 건가? 그 멍청한 것들이 또 권속의 주문에 당하기라도 해버린 것이냐? 그래봐야 소용없는 짓이다. 페어리들은 여기까지 날아오는 데만 수백 일이 걸릴 터. 용아병, 스파르토이 그놈도 마찬가지다.)

    에반투스는 장담할 수 있었다. 이미 포탈은 닫혔고, 페어리 퀸과 페어리들이 날아오기엔 너무나도 먼 거리였다. 게다가 이곳은 용의 둥지다. 푹신할지언정 훼손시키거나 꿰뚫을 수 없는 마법의 대지로 이루어져 있다. 용아병의 뼈조차 심을 수 없다.

    (네놈은 고립되었다. 아직도 모르겠는가?)

    “그럴 리가요. 제가 바보도 아니고.”

    가벼이 대꾸해 낸 이안.

    그가 전신에 마나를 끌어모았다.

    격한 마나의 흐름에 핏줄마저 치솟았다.

    완벽한 ‘전투태세’로 돌입하기 시작했다.

    무려 동급 마법사와의 대결 아니겠는가?

    전생과 이번 생을 통틀어 처음이었다.

    참기 힘든 흥분과 기대감이 몰려왔다.

    “권속의 주문은 사용하지 않겠습니다.”

    (……?)

    “대신 자손 분들의 개입 없이, 깔끔하게 둘이서 해결을 봤으면 합니다. 만약 제3자가 끼어든다면, 저는 제가 가진 모든 역량을 동원하여 그 3자와 함께 죽을 겁니다. 그 정도는 가능하다는 거, 충분히 아실 거라 믿습니다.”

    애당초 에반투스는 그럴 생각조차 없었다.

    6클래스의 인간 마법사를 처리하는 일?

    자신이 가진 힘만으로도 충분했으니까.

    문제는 놈의 원인 모를 당당함이었다.

    ‘더 강해지기라도 했다는 건가?’

    그러나 가능성은 적다. 그 짧은 시간에 어찌 6클래스를 돌파할 수 있겠는가? 제아무리 천재라 한들 놈은 인간에 불과하다. 성장의 최대치는 물론이거니와, 그토록 빠르게 성장할 리도 없다. 한계가 명확하단 소리다.

    (객기라도 부리는 것인가?)

    “말귀가 좀 어두우십니까?”

    (……뭐?)

    이윽고 이안의 육신에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정체 모를 푸른색 기운이 전신으로부터 피어올랐다. 두 눈 또한 푸른색 안광으로 넘실거렸다. 뿐일까? 숨 한 번 내뱉을 때마다 푸른색 연기가 목구멍에서 토해졌으며, 치솟은 핏줄 또한 푸르게 빛났다.

    “한번 붙어보자 이겁니다.”

    지금 이 순간.

    이안은 붉은 피가 흐르지 않았다.

    마나와 완벽하게 일체화된 푸른 피.

    그 푸른색을 가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마법으로.”

    통일 전쟁의 선봉장이었던 이안 페이지.

    그가 전생에 창조해냈던 7클래스 마법.

    아니, 마법이라기보다는 일종의 ‘현상.’

    “메타모포시스, 마나.”

    그야말로 각성 상태에 돌입하는 주문.

    드래곤의 정신체를 쓰러뜨렸던 수단.

    바로 그 현상이 완성되는 순간이었다.

    “용의 씨 좀 받은 것 가지고.”

    (……?)

    “잘난 척 떠들기는.”

    이안이 내뱉은 명백한 도발.

    에반투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붉은 눈동자가 흉악하게 번뜩거렸다.

    (……악연을 끊어주마.)

    “할 수 있으시다면.”

    그 높낮이조차 없는 한 마디와 함께.

    이안의 몸이 아지랑이처럼 사라졌다.

    텔레포트일까? 아니면 블링크?

    정답은 둘 다 아니었다.

    하지만 비슷했다.

    (뭣……!)

    이안은 어느새 에반투스의 배후에 나타나 속삭였다. 권속의 주문을 발동시키기에 정말이지 완벽한 거리, 그리고 상황이었지만.

    “권속의 주문은 사용하지 않겠다, 분명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거짓말이 아니었다.

    이안은 권속의 주문을 사용하지 않았다.

    덕분에 거리를 벌릴 수 있었던 에반투스였다.

    “어느 쪽이 위에 있는지.”

    하나 이안은 신경 쓰지 않았다.

    상대가 거리를 벌리든, 무슨 짓을 하든.

    대신 육신으로부터 일렁거리는 마나.

    그 마나의 강도만 더더욱 끌어올렸다.

    “누가 더 높은 곳에 군림하는지.”

    수많은 드래곤 일족들, 그 스승이라는 최초의 마법사까지. 이안보다 강한 마법적 존재를 알아챘다. 한데 자신은 고작해야 드래고니안조차 제압할 수 없다면?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그것은 이안의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참에 한번 판가름해 보죠.”

    이안의 마나가 둥지를 강타했다.

    그 대상은 드래고니안, 에반투스였다.

    * * *

    (허억……! 헉! 허어억……! 크으!)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거친 숨소리.

    그 숨소리의 주인은 에반투스였다.

    (어, 어떻게…….)

    이해하기 힘든 에반투스였다.

    졌다. 이안 페이지에게 패배했다.

    권속의 힘에 굴복당한 것도 아니었다.

    (내가, 내가 인간에게……?)

    결코 다른 요소가 섞이지 않았다.

    인간 마법사에게 실력으로 밀렸다.

    자괴감마저 느껴질 지경이었다.

    부정하고, 부정하고, 또 부정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뚱이.

    바닥끝까지 소비된 마나.

    모든 것이 알려주고 있었다.

    (아, 아버지!)

    (멈춰라!)

    에반투스는 이 당혹스러운 와중에도 아들과 딸의 움직임부터 멈췄다. 저 인간 마법사에게 자신이 당했다. 그보다 훨씬 약한 자손들은 상대조차 되지 않는다는 얘기다. 무엇보다도 아까 했던 경고가 귓가에 맴돌았다.

    “3자가 끼어든다면, 반드시 죽이겠다.”

    이안의 그 말은 결코 허언이 아니었다.

    죽이고자 한다면 능히 죽일 수 있으리라.

    (너희들의 상대가 아니다.)

    (아, 아버지, 하지만……!)

    “부모님 말씀은 일단 듣고 보는 겁니다.”

    그들의 대화를 잘라 버린 목소리.

    승리자, 이안 페이지의 음성이었다.

    물론 이안이라고 멀쩡하지만은 않았다.

    단지 에반투스에 비하여 상황이 나을 뿐.

    “후우……!”

    이안이 에반투스의 앞에 주저앉았다.

    아주 편하다 못해 친숙한 자세였다.

    (……또 그 권속의 주문을 사용하려는 모양이군.)

    예상했다는 듯 중얼거리는 에반투스.

    자포자기한 심정이 역력하게 느껴졌다.

    하나 이안의 대답은 그 예상과 달랐다.

    “일단 사과부터 드리겠습니다.”

    (……갑자기 무슨 헛소리지?)

    “처음 만났을 때, 제가 안전을 꾀한답시고 불합리한 명령부터 내리지 않았습니까? 심지어 권속의 영향으로 지킬 수밖에 없는 명령이었죠. 그 점, 사과드립니다.”

    (…….)

    에반투스의 눈이 혼란으로 차올랐다. 자손들도 마찬가지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아주 찢어죽일 기세로 마법을 퍼부었던 인간 아니던가? 한데 그런 자가 이제는 미안하단다. 도무지 꿍꿍이를 파악하기 힘들었다.

    “행동으로 보나, 그 목적으로 보나, 자손들을 향한 애착이 강하신 것 같습니다. 저도 비슷하거든요. 이건 뭐, 거의 병에 가까우니까요.”

    (…….)

    “그런 분께 수틀리면 자손들을 죽이라 명했으니, 감정이 상할 만합니다.”

    이안의 어조에 나름대로 진심이 묻어났다.

    그 또한 가족이라면 눈부터 뒤집히는 자.

    에반투스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무슨 꿍꿍이인지는 모르겠다만…….)

    “꿍꿍이 있는 거 맞습니다.”

    (네놈이 어떤 소리를 지껄이든 간에…….)

    “그래도 한번 들어나 보십시오.”

    조금의 틈도 내어주지 않는 이안.

    그가 옅은 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드래고니안 에반투스, 당신이 모든 드래곤들의 수장, 리시스 라덴쥬님의 핏줄임을 알고 있습니다. 생각보다 대단한 아버지를 두셨더군요.”

    (……!)

    순간 에반투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안이 말한 사실은 여타 드래곤의 권속들조차 모르는 일이다. 즉, 페어리 퀸이나 용아병도 에반투스가 어떤 드래곤의 후손인지 모른다는 뜻이다. 한데 인간이 어찌 그 사실을 알고 있단 말인가?

    (그, 그걸 네놈이 어찌……?)

    “직접 들었습니다.”

    (직접…… 들어……?)

    이안의 말이 뜻하고 있는 바.

    에반투스는 정확하게 알아차렸다.

    “거래를 하죠.”

    이안이 던진 미끼는 벌써 물었다.

    이제 낚싯대를 들어 올릴 차례.

    “저는 그분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그, 그게 사실인가?)

    “에반투스 님도 마찬가집니다.”

    에반투스의 눈빛이 크게 흔들렸다. 더는 꼼짝조차 힘들 것 같았던 몸을 꿈틀거리며 이안에게 기어왔다. 그 모양새가 제법 처절하게 느껴졌다.

    (방법을 말해다오. 사실이라면 내 무엇이든……!)

    “사실입니다.”

    채찍은 실컷 휘둘렀다.

    이제부터 당근의 차례였다.

    “증명도 가능합니다.”

    이안은 에반투스가 꼭 필요했다.

    시간의 보고로 들어가는 열쇠의 완성도.

    란데오르 꽃의 채집과 해독의 방법도.

    모두 에반투스의 손에 달렸으니까.

    다른 문제들은 차후의 일이었다.

    “대신.”

    이안의 입술이 느릿하게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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