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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92화
33. 수습, 그 이상(4)
“라그나르?”
“공주마마.”
황제의 침소에는 공주, 하이리 그린리버가 있었다. 황제의 건강이 본격적으로 나빠지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쭉, 간병인을 자처하며 아비의 곁을 한시도 떨어지지 않았다.
“자주 오는구나.”
“제게도 아버지가 되시는 분입니다.”
“……그런 뜻으로 얘기한 건 아니란다.”
“그러시겠지요. 알고 있습니다.”
라그나르와 하이리, 둘의 사이는 미묘했다. 결코 좋은 편도, 나쁜 편도 아니었다. 직접적으로 부딪칠 일이 손에 꼽혔으니까. 하지만 양쪽 모두 ‘황태자’라는 접점을 가지고 있기에, 이 미묘한 관계의 지속은 아마 영원할 것 같았다.
“아바마마께서는, 차도가 좀 있으신지요?”
공주 하이리는 구태여 대답하지 않았다. 보이는 그대로인데, 대답하여 무엇을 하겠는가? 황제는 이제 의식마저 간당거렸다. 혼수상태에 빠진 지도 어느덧 한 달이 넘었다.
“어서 쾌차를 하셔야 할 터인데…….”
라그나르가 진심으로 걱정스럽다는 듯 중얼거렸다. 제 아비인 황제의 손까지 조물조물 만져줬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막내아들과 같았다. 약간의 위화감조차 없었다.
‘……위험해.’
하나 그러면 그럴수록 공주 하이리의 경계심은 깊어져 갔다. 결코 저렇게 나올 아이가 아니다, 오랜 세월 보고, 듣고, 겪어온 모든 경험들이 그렇게 속삭였다.
‘경계하자.’
물론 마음만 그렇게 먹었을 뿐.
내색까진 하지 않는 공주 하이리였다.
5황자의 눈치는 어마어마하게 빠르다.
조금만 낌새를 보인다면 바로 알아챌 터.
“마마, 황실 약방에서 탕약을 보내왔습니다.”
어색한 침묵이 감도는 그때, 침소 바깥으로부터 하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황제에게 먹일 탕약을 가져왔다는 뜻이었다.
“들어오셔요.”
공주 하이리가 황제의 침대 곁에서 일어나며 읊조렸다. 곧 황실 연금술사들이 들어왔고, 병에 담긴 탕약을 공주한테 전달했다. 색도, 향도 모두 진한 감청색의 액체였다.
“어제와 똑같은 탕약인가요?”
“예, 마마. 송구하오나…….”
“아뇨, 질책하는 건 아니에요. 그만 물러가 보세요.”
그리 말하며 탕약을 바라보는 하이리.
그녀가 여러 도구로 탕약을 검사하기 시작했다.
“음……!”
하나 공주는 이 정도의 검사로 만족할 수 없었다. 황제의 급격한 건강 악화는 그녀로서도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 의심할 수 있는 건 모두 의심해 봐야만 안심이 되었다.
쪼르륵!
그래서였다.
탕약의 일부를 작은 잔에 따른 까닭.
직접 마셔봐야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또 저러는군.’
탕약을 마셔보는 공주의 행동에 라그나르가 조용히 어금니를 물었다. 정말이지 방해만 되는 여자였다. 공주가 직접 나선 이후, 좀처럼 란데오르의 꽃을 황제에게 복용시킬 틈이 없었다. 식사도, 약도, 물까지도 모두 공주의 손을 거쳐야만 했으니까. 이대로라면 금방 죽지 않을 터.
‘그래도 죽긴 죽겠지만.’
문제는 기간이었다. 라그나르는 되도록 황제가 빨리 승하해 주기를 바랐다. 그래야 자신의 갈팡질팡한 감정도 깔끔하게 정리 될 것 같았다. 후련해질 것 같다는 얘기였다.
‘제기랄…….’
라그나르가 소매 속 란데오르의 꽃, 그 잎사귀를 만지작거렸다. 액체에 닿는 순간 녹아버리는 식물이다. 어떻게든 저 탕약으로 빠뜨리기만 하면 되는 문제거늘.
‘오늘은, 어떻게 해서든.’
황제에게 복용시키고 싶었다.
아비의 수명을 단축시키고 싶었다.
한 번만 더 먹이면 적당할 것 같았다.
두 달 이내로 끝을 볼 수 있을 터.
그때였다.
“하이리…….”
황제가 힘겹게 의식을 되찾았다.
간병 중인 공주 하이리도 알아봤다.
대단한 기적이나 쾌차는 아니었다.
몇 시간에 한 번 꼴로 일어나던 일.
그럼에도 공주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아바마마! 정신이 좀 드세요?”
그녀는 진심으로 기뻐하며 황제에게 달려갔다. 황제가 잠깐씩 의식을 차리는 순간마다 저토록 눈물겨운 상봉이 일어났다. 라그나르의 입가에 보일 듯 말 듯 조소가 지어졌다.
‘지금이야.’
지금이 기회였다. 침소 한구석으로 황제의 호위기사인 ‘덤필 모릿’이 보였으나 전혀 문제될 바 없었다. 그 노기사야말로 라그나르를 교단에 입교시킨 장본인이니까.
‘넣기만 하면 돼.’
이윽고 새파란 란데오르의 잎사귀가 탕약 안으로 들어갔다. 과연 신비로운 식물이었다. 액체에 닿자마자 흔적도 없이 녹아버렸다. 인위적인 약품도 아닌 것이 어떻게 저럴 수 있을까?
“아바마마, 탕약 좀 드셔보세요.”
란데오르의 잎사귀가 완벽히 녹아들 때쯤.
뒤늦게 탕약부터 챙기는 하이리였다.
황제에게 먹여주기 위함이었다.
“드시고 어서 쾌차를 하셔야…….”
한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공주는 탕약의 병을 조심스레 잡았다.
크게 급하지도 않았고, 엉키지도 않았다.
분명 그랬는데.
챙그랑!
탕약을 담은 약병이 바닥으로 떨어져 버렸다.
탕약 또한 엎질러져 카펫에 스며들었다.
“이, 이게 왜……?”
공주는 이해가 되질 않았다.
아차, 싶은 느낌마저 없었다.
떨어뜨릴 이유가 전혀 없었거늘.
‘이런 멍청한……!’
그 모습에 라그나르도 짜증이 치솟았다.
하필 이런 순간에 약병을 떨군다고?
‘설마, 눈치를 챈 건 아니겠지?’
그러한 의심마저 들 정도의 타이밍.
라그나르가 하이리의 눈치를 살폈다.
겉보기로는 조금의 내색도 없었다.
‘……일단 나가자.’
그리 판단한 라그나르가 도망치듯 침소에서 빠져나갔다. 그러던 중 황제와 눈이 마주쳤지만, 성의 없는 목인사만 건네며 시선을 뿌리쳤다. 황제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 그 눈빛이 불편한 까닭이었다.
‘그렇게 쳐다보지 말라고!’
라그나르를 바라봤던 황제의 두 눈.
그 눈에는 미안함으로 가득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화가 났다.
‘곧 시체로 나뒹굴 주제에, 이제 와서!’
원인불명의 현기증을 느낀 라그나르.
그가 자신의 처소로 급히 돌아왔다.
한동안 나가지 못할 것 같았다.
적어도 황제가 죽기 전까지는.
‘이제 와서! 이제 와서! 이제 와서!’
라그나르가 스스로 통제할 수 없는, 그 감정의 응어리로부터 몸서리치는 그때, 잠시 깨어났던 황제도 다시금 의식을 잃어버렸다. 벌써 몇 주째 반복되는 증상이었다.
“아바마마…….”
비정상적으로 급격한 혼절.
간헐적으로 돌아오는 의식.
누구도 원인을 밝혀내지 못했다.
하이리는 불안하고, 또 무서웠다.
“이렇게 돌아가시면 안 돼요. 절대로…….”
아비에 대한 딸의 심정으로서도.
오라비인 황태자를 위해서도.
황제의 죽음은 비극의 시작이리라.
“이럴 때, 이안 님이라도 계셨다면…….”
만약 그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물론 마법사라고 죽어가는 생명까지 살릴 수 있는 건 아닐 테지만, 그래도 이안 페이지라면 다를 것 같았다. 그 엄청난 마법으로 아바마마의 질병을 고쳐낼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그런 막연한 기대마저 들었다.
“하아…….”
공주 하이리의 한숨이 사방을 울렸다.
침소에는 오직 황제와 공주 하이리.
노기사 덤필 모릿의 숨소리만 들렸다.
분명 방금까지는 그랬다.
“타임 슬립.”
황제도, 공주도, 덤필의 것도 아닌.
제3자의 목소리.
그 목소리가 침소에 나타났다.
“누, 누구!”
화들짝 놀란 공주 하이리가 뒤를 돌아봤다.
등 뒤로부터 들려왔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
하이리의 눈에는 가장 먼저 노기사 덤필 모릿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아무런 소리도 듣지 못한 듯,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한데 어딘가 조금 이상했다.
“더, 덤필 경?”
노기사 덤필은 눈을 껌뻑거리지도, 공주의 부름에 반응하지도 않았다. 숨만 미미하게 쉬고 있을 뿐, 그대로 멈춰 버린 모양새였다.
“덤필…….”
“쉿, 조용히.”
놀랄 만한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방금 들렸던 제4자의 작은 목소리.
그 목소리가 또다시 들려왔으니까.
이번에는 조금 더 가까이서 들렸다.
“누구……?”
공주가 허공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그리 물으면서도 심장이 콩닥거렸다.
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던 탓이었다.
“접니다.”
이윽고 누군가의 모습이 드러났다.
투명했던 몸뚱이가 반투명한 색으로.
이내 완연한 형체와 색을 이루었다.
“이, 이안 님?”
그는 아까부터 투명화 마법과 텔레포트로 하여금 황성의 이곳저곳을 은밀하게 누볐던 존재, 상아탑주 이안 페이지였다.
“어떻게…… 아니, 그보다도…….”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이안의 등장에, 하이리는 어떤 얘기부터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괜찮습니다. 다 알고 있으니까요.”
“덤필 경은 어떻게 되신…….”
“무해한 마법입니다. 잠시 멈췄을 뿐이죠.”
타임 슬립, 마비와 수면 주문의 궁극적 단계로, 마법에 걸린 순간과 해제되는 순간까지를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의식 또한 그대로 이어진다. 너무 길게만 사용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상황은 알고 있습니다. 해결을 할 생각이니,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주셨으면 합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그 말에 공주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주 결연하고도 단호한 눈빛이었다.
“제가 무엇을 해드리면 되는 거죠? 스승님.”
“스승? 아.”
반문했던 이안이 곧 말뜻을 알아챘다.
공주와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좋습니다.”
스승이란 호칭을 받아들인 이안.
그가 공주에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먼저…….”
* * *
그로부터 몇 시간 후.
이안이 황궁을 빠져나왔다.
손에는 꽃과 잎이 함께 쥐어져 있었다.
라그나르, 놈의 침소에서 찾아낸 꽃.
그 꽃으로부터 뜯어온 꽃잎과 잎사귀였다.
‘란데오르의 꽃.’
마나라는 기운을 중화시키는 효과.
전생의 이안을 죽였던 극독의 재료.
레디오의 마나 중독을 고쳐낼 열쇠.
그러나 뿌리가 내려진 자리를 벗어나는 즉시 말라버리는 성질 탓에 채집은커녕, 재배조차 불가능했던 기괴한 꽃, 그 꽃이 라그나르의 침소에는 멀쩡한 모습으로 꽂혀 있었다.
‘황제도 이 꽃에 당한 건가.’
설마 란데오르의 꽃을 이런 식으로 만나기 될 줄은 몰랐다. 레디오의 병을 고쳐주기 위해서라도, 자신의 유일한 약점을 지워내기 위해서라도 필요했던 꽃이 아니던가?
‘어떻게 멀쩡한 거지?’
이안은 지난 6년, 란데오르의 꽃과 관련된 자료를 꾸준하게 찾아봤다. 채집이나 재배, 약재화 시킬 수 있는 방법이 필요했으니까. 하나 아무런 단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라그나르, 놈의 작품은 아닐 텐데.’
라그나르는 전생에도, 그리고 이번 생에도 란데오르의 꽃으로 자신의 목적을 이루었다. 결단코 스스로의 힘은 아니었을 터, 당장 떠오르는 외부 세력은 하나밖에 없었다.
‘에반투스.’
용의 교단의 주인.
드래고니안 에반투스.
놈이 라그나르에게 접근했다면?
‘놈부터 찾아내야겠군.’
정말 놈의 수작질이 맞을까?
맞는다면 해독법을 알고 있을까?
그것까지 짐작해 낼 도리는 없었다.
하지만 찾아서 물어볼 순 있겠지.
‘순순히 말하지는 않겠다만.’
일단 찾아내는 것이 급선무였다.
마침 이안에게는 방도가 있었다.
당근과 채찍, 양쪽 모두 완벽했다.
‘드래곤의 이야기로 시작하거나.’
혹은.
‘마법으로 두들겨 패거나.’
후자로 시작하는 편이 좋겠다.
한 번쯤 겨뤄보고 싶었으니까.
자신과 비슷한 경지의 마법사.
그런 존재와 호각을 다투는 싸움.
물론 패배할 것 같지는 않았다.
‘마법만큼은, 나보다 위란 없다.’
결심을 세운 이안이 다음 행선지부터 정했다.
‘오번 파커.’
에반투스의 심복이었던 황성귀족 오번 파커.
그의 황성 내 저택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일단 얼굴부터 좀 바꿔볼까.’
이안은 아직까지 복귀했단 사실을 숨기고 있는 몸, 사람들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라도 생김새를 바꿔야만 했다.
‘페이스 오프.’
피에릭 영지의 파견마법사 매리.
그녀가 사용하는 것과 같은 주문.
하나 이안의 마법은 수준이 달랐다.
단순히 인상을 바꾸는 정도가 아니었다.
실처럼 작아진 눈, 툭 튀어나온 이마 뼈, 좌우로 벌어진 코와 팔자주름까지. 비록 미청년은 아닐지언정 호감을 사기에 충분했던 얼굴은, 이제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너무 과하게 바꿨나.”
그리 중얼거렸던 이안.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을 바꿨다.
정체를 감추는 일이다.
‘확실한 편이 좋겠지.’
걷기 시작한지 삼십 분이나 지났을까?
이안의 두 다리가 저택 앞에 멈췄다.
에반투스의 심복으로 추정되는 귀족.
바로 오번 파커 일가의 대저택이었다.
“뉘쇼?”
저택을 지키던 경호원이 물었다.
이안의 한층 나빠진 인상 때문일까?
조금 무례하면서도 공격적인 어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