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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91화 (9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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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91화

    33. 수습, 그 이상(3)

    ‘어디서부터 손을 볼까?’

    많은 선택지들이 떠올랐다. 그 중 가장 시급한 문제는 황제의 목숨, 지금 이 순간에도 꺼져가고 있을 황제의 생명부터 살리는 게 급선무였다. 아직 죽을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딱히 내 사람은 아니지만.’

    비록 황태자 때문이긴 하나, 황제는 이안에게 아주 호의적인 인물이었다. 뿐일까? 통치 중에도, 사후에도 성군으로 칭송될 만큼 뛰어난 지도자이기도 했다.

    ‘벌써 죽기에는 아까운 사람이지.’

    이토록 갑작스럽게 황제가 죽고, 황태자 하이든이 황제가 된다면, 과연 지금처럼 완벽에 가까운 국정 운영이 가능할까? 황태자 고유의 능력은 언급할 가치도 없거니와, 그 첫 번째 조언자가 될 이안 역시 여러모로 부족했다.

    ‘나는 현자가 아니야.’

    스스로가 예전부터 인정했듯, 이안은 정치적인 감각이나 대국적인 안목을 타고나지 않았다. 그저 마법적인 재능이 인간을 뛰어넘었을 뿐.

    ‘황제를 오래 살려둘수록, 많은 것을 얻는다.’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 아무리 황태자라도 황제에게 계속 배운다면, 언젠가 사람구실이 가능할 거다. 황태자만 그럴까? 이안도 충분한 가르침을 받겠지.

    ‘그가 정립시킬 정책도 많을 거고.’

    황제는 의욕이 넘치는 지도자였다.

    살려만 둔다면 정력적인 활동을 펼칠 터.

    수명을 연장시키는 편이 여러모로 이로웠다.

    ‘좋아.’

    황제, 테리 그린리버부터 살린다.

    그 배후의 움직임은 이후 잡아낸다.

    이안의 결정이 똑바로 세워졌다.

    “탑주님.”

    생각이 정리된 그때, 중년의 고위마법사 로난이 탑주의 방에 올라왔다. 그는 ‘상아탑주의 대행자’로서 탑주의 방을 마음껏 오고갈 수 있었다.

    “콜드우드 쪽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럭저럭 마무리를 지어놨습니다.”

    콜드우드 제국의 앰버 영지 내 정예군 군영으로 향하기 직전, 이안은 상아탑에 들려 로난과 데커드와 만났다. 상황을 정확하게 가늠해 두기 위함이었다.

    “정말 놈들이 물러가겠습니까?”

    “그럴 겁니다.”

    “으음.”

    고위마법사 로난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공간이동의 대마법사가 자신을 노린다?

    무서워서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을까?

    ‘미쳐 버리지나 않으면 다행이지.’

    그리 생각한 로난이 이안을 바라봤다.

    3개월 만에 나타난 젊은 상아탑주.

    정말이지 무서운 존재였다.

    ‘하다하다 이젠 텔레포트라니.’

    로난 역시 처음에는 기겁을 했었다.

    거기까지 가능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도대체 어디까지 성장한단 말인가?’

    상아탑주 이안 페이지의 성장.

    그리고 그 끝에 도착할 경지.

    과연 얼마나 대단한 존재일까?

    왠지 모를 기대감마저 생겼다.

    “이제 남은 것은 폐하의 건강입니다.”

    이안의 말이 로난을 생각에서 끄집어냈다.

    전쟁만큼 중대한 문제가 아니겠는가?

    재빨리 정신부터 차리는 로난이었다.

    “확실히 의심스럽기는 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폐하의 건강이지 않습니까? 대대로 황실 비전의 엘릭서까지 복용하시는데…….”

    황실 비전의 엘릭서.

    이안도 황태자에게 받아 마셔봤다.

    역대 황제들의 장수 비결이기도 했다.

    “저도 단순한 악화는 아닐 거라고 봅니다.”

    “그렇다는 것은…….”

    중얼거렸던 로난이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했으니까.

    “하지만 황실의 연금술사들도, 저희 쪽에서 파견된 의료마법사들도 모두가 같은 의견을 내놨습니다. 폐하의 건강 악화에는 아무런 외부적 요인도 없다고 말입니다.”

    그 말에 고개를 끄덕거린 이안.

    그렇겠지, 분명 전생에도 그랬다.

    괜히 의심했던 자들만 죽어나갔다.

    “이 문제는 제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저의 복귀는 당분간 비밀로 해주십시오. 로난 님과 데커드 님, 두 분만 아시고 계셔야 합니다.”

    “당분간 말입니까?”

    “정말 불순한 세력이 존재한다면, 제가 없어야 더 자유롭게 움직일 테니까요.”

    동시에 잡아내기도 쉬워지리라.

    “며칠만 더 수고해 주세요.”

    이안이 미안하다는 어조로 말했다. 벌써 6개월 째 상아탑주의 업무를 수행중인 로난 아니겠는가? 데커드라면 모를까, 로난은 본디 마법적인 증진에만 흥미를 가졌던 마법사다. 결코 유쾌한 반년은 아니었으리라.

    “하하, 괜찮습니다.”

    로난은 그럼에도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아니, 불만을 갖지 않고자 노력했다. 만약 전 상아탑주가 시킨 일이었다? 그랬다면 조금은 짜증이 났을 거다. 하나 지금의 경우는 얘기가 달랐다. 무려 6클래스조차 뛰어넘은 상아탑주의 명령이니까.

    ‘이런 존재에게 충성을 다한다면.’

    떨어지는 콩고물조차 차원이 다를 터.

    그 콩고물만 알뜰하게 주워 먹어도.

    ‘나도 가능할지 모른다. 5클래스.’

    다시 한 번 결심을 굳힌 로난.

    그가 사람 좋은 미소를 지었다.

    “사실 수고랄 것도 없습니다. 대행이긴 해도, 어쨌든 상아탑주 아닙니까? 확실히 어딜 가든 대접부터 다르더라 이거죠. 충분히 즐기고 있으니, 미안하실 필요 없습니다.”

    로난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 이안도 그 반응이 싫지만은 않았다. 속내가 빤히 보였지만, 오히려 그런 속내를 가질수록 다루기가 쉬웠으니까.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두 사람은 가벼운 몇 마디를 주고받은 뒤, 각자의 위치로 돌아갔다. 로난은 상아탑주의 대행자로서 탑주의 방을 지켰고, 이안은 텔레포트 주문과 함께 저택으로 돌아갔다.

    * * *

    집으로 돌아온 이안은 가족들에게 3달 간의 공백부터 설명해야만 했다.

    물론 시간의 보고에 들어가 드래곤의 정신체를 만났다는 얘기까진 하지 않았다. 단지 ‘수련 중 기이한 공간에 들어가 빠져나오는데 시간이 걸렸다’ 정도로만 압축시켰다. 일종의 ‘사실을 기반으로 둔 각색’이었다.

    “왜 그렇게 거리를 두십니까?”

    (흥! 또 얼렁뚱땅 권속의 주문을 사용하려는 수작이겠지. 네놈의 그 알량한 속내를 이 몸이 모를 줄 알았더냐?)

    가족들과의 대화 이후, 이안은 페어리 퀸과 따로 독대를 나눴다. 그녀의 증언에 따르자면, 이안이 사라짐과 함께 권속의 영향력까지 지워졌다고 한다.

    “그런 분이 어째서 남아계신 거죠?”

    (그, 그건…….)

    두 볼을 잔뜩 부풀린 페어리 퀸.

    이유까지 말하기는 힘들었다.

    어찌 입 밖으로 꺼내겠는가?

    이 저택에 사는 이안의 가족들.

    특히 그 어미, 베네사 페이지!

    그 여인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고.

    (그, 그간의 정을 생각하여 잠시만, 아주 잠깐만 봐준 것뿐이니라. 둔해빠진 스파르토이라면 모를까, 에반투스라면 충분히 쓸데없는 짓을 벌일 수도 있었으니까!)

    이 또한 거짓은 아니었다. 권속의 힘이 풀리고도 며칠 더 지났을 시점, 세 명의 권속들은 판단을 내렸다. 이안 페이지가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고, 혹은 죽었을 거라고.

    (네놈이 사라졌음을 확신하고 나서야, 우리도 각자의 판단에 따라 움직일 수 있었다. 스파르토이, 그놈은 확인할 것이 있다면서 떠나 버렸지. 갈 곳도 없는 주제에 어디를 간다는 건지 원. 아, 물론 에반투스도 떠났다. 이를 아주 박박 갈더구나.)

    “어디로 떠났습니까?”

    (그건 말해주지 않았다. 그놈, 나와 스파르토이한테도 삐졌거든. 권속의 힘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거 빤히 알면서도 그러더군. 하여간 속 좁은 놈,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 페어리 퀸.

    이안도 대충 감이 잡히는 것 같았다.

    ‘황제의 건강 악화가 교단과 관련되었다면…….’

    독이든, 마법이든, 저주든 무언가 특별한 수단이 존재할 터. 드래고니안 정도의 마법사, 심지어 수백 년을 살아온 존재라면, 그 정도 무기 하나쯤은 알고 있지 않겠는가?

    ‘역시 황제부터 살펴봐야겠어.’

    몇 가지 계획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나 일단은 황제의 상태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죽어가고 있는지, 저번 생과 차이점이 있는지, 기타 수상한 점은 없는지. 상황을 살펴본 뒤에 결정해도 늦지 않으리라.

    “그래서, 계속 그렇게 거리를 두실 작정입니까?”

    (물론! 이 몸은 여왕이니라. 수치는 한번이면 족하다!)

    “그러시군요.”

    이안이 고개를 가볍게 끄덕거렸다.

    “……어디서 듣자 하니까.”

    그러고는 말문을 이어갔다.

    “예전에는 눈물이 많으셨다고 하던데.”

    (……뭐라?)

    “울보라고 불렸을 정도로.”

    (네, 네가 그걸 어찌…….)

    하나 그 단호함도 잠시, 예상치 못한 이안의 발언에 당황해버린 그녀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족히 수백 년은 훌쩍 지나버린 낡은 성격, 그리고 별명이었으니까.

    “만났습니다.”

    (……?)

    “드래곤 일족의 수장.”

    페어리 퀸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앙 다물었던 입술마저 스르르 벌어졌다.

    (지, 지금 무슨 소리를…….)

    “더 듣고 싶으십니까?”

    (똑바로, 똑바로 말해보아라! 어서!)

    “제가 지금은 좀 바빠서.”

    (인간……!)

    그야말로 안달이 나버린 페어리 퀸.

    이안의 노림수가 그대로 흘러갔다.

    “이렇게 하죠. 권속의 주문을 강요하진 않겠습니다. 대신, 당분간 가족들의 안전을 지켜주십시오. 조만간 여유가 생긴다면, 그때는 여왕께 들려드릴 얘기가 많을 겁니다.”

    마치 자비라도 베푸는 양 능글맞은 목소리였다. 평소였다면, 평소의 여왕이었다면 콧방귀나 흥 뀌어줬을 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럴 수가 없었다.

    (아, 알겠다! 맡겨만 다오!)

    콧방귀는커녕 이안의 바짓가랑이라도 잡고 애원을 해야 할 판이었으니까. 영겁의 세월 오매불망 기다렸던, 이제는 꿈에서조차 만나기 힘든 그분들이 아니겠는가? 특히 드래곤들의 수장, 그분의 이야기라면 더더욱 특별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가족들 곁에 계속 남아주신 것도 감사드리고요. 이렇게 밖에 대접해 드리지 못하는 것도 죄송합니다. 진심입니다.”

    (지, 지금이라도 알았으면 되었느니라.)

    “답례라고 하기는 뭣하지만, 조만간 원하시는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아마 여왕께서 가장 원하시는 보상일 겁니다.”

    (……!)

    페어리 퀸은 직감할 수 있었다.

    그녀 자신이 가장 원하는 보상.

    방금까지의 얘기로 유추했을 때.

    ‘설마, 그분을……?’

    그분, 드래곤을 만나게 해주는 것.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수백 년 전에 말라버렸던 눈물.

    그 눈물마저 흐를 것 같았다.

    “가족들은, 믿고 맡기겠습니다.”

    (……알겠다. 어서 할 일을 끝내고 오너라.)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이안의 몸뚱이가 새하얀 빛을 머금었다.

    오늘만 벌써 여러 번 발동시키는 주문.

    공간이동 마법, 텔레포트였다.

    “그럼.”

    * * *

    그린리버 제국의 황궁.

    5황자 라그나르의 처소.

    그곳에 라그나르가 있었다.

    ‘하늘은 나를 버리지 않았다.’

    슬쩍 시간을 가늠해본 라그나르.

    그가 최면이라도 거는 듯 생각했다.

    ‘교단이 나를 돕는다. 이안 페이지, 그 건방진 놈도 사라졌다. 모든 정사의 흐름이 나를 돕고자 움직이고 있어. 이건 기회야.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릴 기회.’

    라그나르가 생각하는 원점이란 무엇일까? 간단하다. 그린리버의 모두가 자신을 진정한 황제감이라 여기는 것, 또한 지지하는 것. 작금의 황태자는 아무런 능력도 없으며, 계속해서 멍청한 짓만 일삼는 것. 그렇게 황태자의 자리를 빼앗고, 종국에는 황제로 등극하는 것. 그것이 라그나르의 원점이자 목표였다.

    ‘아바마마.’

    황제, 테리 그린리버.

    라그나르의 하나뿐인 아버지.

    ‘아바마마만 사라져 준다면.’

    또한 황태자의 유일한 버팀목.

    5황자 라그나르의 유일한 장애물.

    ‘어차피…….’

    친아비이자 장애물.

    그 ‘존재’가 거슬렸다.

    치워 버리고 싶었다.

    하나 망설여졌다.

    두 갈래로 나눠진 감정.

    혈육이냐, 야망이냐.

    고민은 생각보다 짧았다.

    ‘당신도 나를 버렸잖아?’

    희미하게 웃어 보인 라그나르.

    그가 처소 한구석 꽃병을 바라봤다.

    아주 신기한 꽃 한 송이가 보였다.

    자그마한 자줏빛의 열두 갈래 꽃잎.

    새파란 잎사귀와 새파란 줄기까지.

    외관상 썩 아름다운 꽃은 아니었다.

    ‘태어났을 때부터, 줄곧.’

    라그나르가 꽃의 잎사귀를 땄다.

    소매에 감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는 결코 평범한 꽃이 아니었다.

    교단으로부터 어렵사리 구해낸 ‘꽃’.

    아무런 증거조차 남지 않는 ‘극독’.

    황제의 건강을 악화시킨 ‘주범’.

    ‘란데오르의 꽃.’

    처소에서 빠져나온 라그나르의 발걸음.

    그 발걸음이 황제의 침소를 찾아갔다.

    지난 몇 달간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똑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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