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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89화 (89/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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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89화

    33. 수습, 그 이상(1)

    (그것이, 내게 주어진 이름이다.)

    드래곤, 리시스 라덴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모든 용 일족의 수장이기도 하지.)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수장이라니. 드래곤 중에 으뜸이란 소리가 아니겠는가? 페어리 퀸이 어째서 ‘리시스 라덴쥬’를 찾았는지, 조금은 알 것도 같았다.

    (물론 내가 아니라, 나의 본신이.)

    장난스럽게 덧붙이는 용들의 수장 리시스 라덴쥬의 정신체였다. 그래봐야 동일한 존재라는 건 변함이 없을 터. 적어도 천 년 전까지는 말이다.

    “페어리의 여왕께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그 아이가 내 본신을 유독 따르긴 했지. 걸핏하면 울어재끼는 울보 녀석이 여왕이라니. 신기하단 말이야.)

    “울보…….”

    이안이 하던 말을 급하게 멈췄다.

    천 년가량 전의 이야기 아니겠는가?

    그때는 울보였을 수도 있겠지.

    암, 그렇고말고.

    ‘전혀 어울리지는 않지만.’

    그리 결론을 지어버린 이안.

    가감 없이 본론으로 들어갔다.

    “한 가지 더 여쭤보겠습니다.”

    (말하라.)

    “드래고니안, 에반투스에게 자손이 있습니다. 그 자손들은 세월의 허락이라는 것을 받아야한다고 들었습니다만, 혹시 가능하십니까?”

    드래고니안 에반투스의 후손들, 그들에게 주어진 수명에 관한 물음이었다. 그 문제를 이안이 해결해준다면 조금이나마 적극적으로, 또한 진심을 다해서 따르지 않겠는가?

    (불가능하다. 나의 권능은 이 공간에서만 주어지는 것, 바깥의 흐름까지 바꿀 수는 없다. 단, 그들의 수명이 끝날 때까지도 본신과 일족들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이곳으로 보내도 좋다. 이 공간에서 만큼은 계속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니.)

    이 공간에서 만큼은 세월의 허락이 가능하다.

    하니 임시로라도 연명하고 싶다면 보내라.

    그러한 얘기였다.

    “그렇게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음.)

    완벽한 해결은 불가능하더라도, 당장 죽을 문제는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 물론 수명이 백년가량 남았다곤 하나, 권속에게 백년이란 생각보다 촉박한 세월인 것 같았으니까.

    “혹시 바깥세상의 드래곤들, 어디로 사라졌을지는 추측이 불가능하신지요?”

    (알 수 없다. 하지만, 나의 본신은 살아 있을 거다.)

    “어떻게 확신하십니까?”

    (내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니까.)

    이안은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본신이 죽으면 정신체도 사라진다.

    그런 의미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드래곤의 말이 계속해서 이어졌다.

    (만약 본신과 일족들의 안위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면, 경우는 두 가지밖에 없다고 본다. 첫째로는 내분, 드래곤에게 위해를 가할만한 존재는 그 동족밖에 없지.)

    오만한 발언이었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잔뜩 약화된, 심지어 아무런 권능도 허락되지 않은 정신체조차 이 정도로 강할지언데, 진정한 드래곤들은 어떻겠는가?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겠지.’

    바로 그렇다.

    가히 무적의 존재.

    이보다 더한 표현은 없으리라.

    (하지만 예외는 존재하는 법. 본신과 동족을 제외한다면, 드래곤에게 위해를 가할 만한 존재가 딱 하나 남는다.)

    “누구죠?”

    이안은 물어보면서도 알 수 있었다.

    처음부터 꾸준하게 언급된 존재.

    용언을 부린다는 그 인간이겠지.

    아마 ‘최초의 마법사’가 아닐까?

    (그는 그대가 부리는 술식의 마법을 창조한 장본인이자, 언어의 힘을 우리 드래곤에게 전수해준 인간이다. 드래곤 모두의 스승이라고도 일컬을 수 있겠군.)

    “무슨…….”

    드래곤에게 들은 이야기 중 가장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짐작은 했어도, 이 정도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무려 인간이, 드래곤들의 스승이라고?

    “용언은 용들의 언어가 아닙니까?”

    (내가 한번이라도, 용언이란 표현을 사용한 적이 있던가?)

    “…….”

    그래, 그러고 보니 그렇다.

    정말로 없다. 확실하게 없었다.

    언어의 힘이라고만 표현했을 뿐.

    처음 본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바깥세상의 인간들에게 어찌 알려졌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것은 용의 언어가 아니다. 단지 위대한 힘을 가진 고유의 언어일 뿐.)

    드래곤의 말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우주라는 곳을 본떠 만들었다던 무차원 공간의 풍경이 바뀌었다. 푸르른 들판이 널따랗게 깔렸고, 하늘에는 온갖 용들이 날아다녔다.

    “여긴…….”

    (놀랄 것 없다. 이 공간은 곧 나의 의지, 기억 속 풍경을 재생한 것이다. 아마 그대에게는 오래 전의 세상이겠지.)

    이안이 그 사방으로 펼쳐진 풍경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어디일까? 대륙 어디에 이토록 푸르고 널따란 초원이 존재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알 도리가 없었다.

    (저기, 보이는가?)

    드래곤이 바라보는 방향.

    초원 멀찍이 모여 있는 드래곤들.

    그리고 그 틈새에 낀 자그마한 존재.

    “인간?”

    이안이 그 드래곤 무리와 인간들에게 다가갔다. 이안은 그들을 볼 수 있었으나, 허상들은 이안이 보이지 않았다.

    “……?”

    최초의 마법사로 추정되는 인간과 이안, 두 사람의 거리가 손을 뻗으면 닿을 정도로 가까워질 쯤, 이안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분명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얼굴이었으니까.

    ‘환술, 그 환술 속의 남자가 분명하다.’

    이안과 똑같은 밝은 갈색 머리칼.

    다소 못난 편에 속하는 생김새.

    바로 그자가 확실한 것 같았다.

    동시에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했던 일종의 경고가.

    [드래곤을 절대로 믿지 마라.]

    무려 드래곤의 스승이라는 존재다.

    그런 존재가 분명 그렇게 말했다.

    (왜 그러나? 아는 얼굴인가?)

    “아, 아닙니다. 본 것 같기도 하고.”

    (이해한다. 인간들은 다 비슷하게 생겼지.)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드래곤.

    그가 날개를 사방으로 뻗었다.

    동시에 주변의 풍경이 무너졌다.

    본래 있었던 장소로 돌아온 거다.

    사투를 벌였던 무차원의 공간, 그 어둡고도 밝은 공간으로.

    (더 묻고 싶은 것이 남았는가?)

    드래곤의 물음.

    이안은 잠시 고민했다.

    여러 생각들이 떠올랐다.

    그리고 결론을 지었다.

    “……아직 많습니다만, 때가 아닌 것 같군요.”

    (그렇군. 이만 나가기를 원하는가?)

    “예.”

    (좋다.)

    흔들림 없는 대답에 드래곤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안은 급할 것이 없었다. 언제든 다시와 물어볼 수 있으니까.

    (그리고.)

    “말씀하십시오.”

    그로부터 이어진 드래곤의 침묵.

    무슨 일이냐고 되묻기 바로 직전.

    멈췄던 말문이 다시금 이어졌다.

    (또 와라.)

    “네?”

    (심심하니까.)

    그 말에 이안이 피식 웃었다.

    기분이 썩 나쁘지 않았다.

    드래곤 로드의 초대라.

    또 언제 받아보겠는가?

    (하면, 보내주마.)

    드래곤은 분명 보내주겠다고 했다.

    한데 왜 앞발을 들어 올리는 걸까?

    심지어 내쳐치기 시작했다.

    이안의 몸뚱이를 향하여.

    “으악!”

    이안은 분명 배리어를 발동시켰다.

    그럼에도 배리어는 발동되지 않았다.

    이안의 육신에 마나가 부족했으니까.

    다시 말하지만, 이곳은 정신체의 의지.

    그의 말과 생각이 곧 공간이다.

    이안의 마나를 바닥내고 싶다?

    그럼 그 순간 바닥나는 거다.

    바로 지금처럼.

    (또 언제 오려나.)

    드래곤 로드, ‘리시스 라덴쥬’의 정신체가 내리찍었던 앞발을 치웠다. 놀랍게도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현실이었다면 고깃덩이가 되었을 이안의 육신은커녕, 그 비슷한 흔적조차도.

    (조금만 더…….)

    몇 마디 중얼대며 바닥에 드러누운 드래곤의 정신체, 그의 두 눈이 감기기가 무섭게 어둠이 내리깔렸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영겁의 수면 속으로 빠져들 차례였다.

    (강해져서 왔으면 좋겠는데…….)

    벌써부터 졸음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오래간만에 즐거웠군.)

    그는 이안에게 패배하지 않았다.

    아무리 정신체라 할지라도.

    권능을 부릴 수 없다 할지라도.

    그는 모든 드래곤들의 수장이다.

    결코 호락호락한 존재가 아니다.

    단지, 이유가 있다면.

    (아니, 처음인가. 나로서는…….)

    실로 오래간만의.

    처음일지도 모르는 즐거움.

    그 짧았던 여흥의 보상이라고.

    아마 그렇게 대답할 수 있으리라.

    * * *

    “……처음 보자마자 죽이려 들더니만.”

    이안이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불꽃과 함께 사라졌던 그 장소 그대로.

    본인은 몰랐으나, 100일 만의 귀환이었다.

    “이래서였나.”

    허상이라도 소름이 끼쳤다.

    무력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

    상상으로조차 떠올리기 싫었다.

    ‘설마 갈 때마다 이렇게 나와야 하는 건…….’

    아닐 거다. 그럴 리가 있을까?

    본래 드래곤들이 출입했을 터.

    ‘아니겠지.’

    그렇게 믿은 이안이 심장을, 정확히는 마나 하트부터 점검했다. 혹시 마나 하트의 성장마저 허상은 아닐까? 그러한 걱정이 들었지만.

    ‘좋아. 그대로다.’

    우려했던 바는 일어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붉은 용의 다섯 숨결’을 통해 막혔던 성장을 이루어냈다.

    물론 용아병과의 수련도 유효했다. 아마 그 무식한 수련이 아니었다면 이보다 오래 걸렸을 터. 모든 노력이 하나로 귀결된 상황이었다.

    ‘가족들이 걱정하겠는데.’

    돌아가고자 플라이 마법을 펼쳤던 이안.

    ‘아.’

    그가 다시금 지면 아래로 내려왔다.

    ‘이제부터는…….’

    이안이 마나를 끌어 모았다.

    오른손으로 새하얀 빛이 몰렸다.

    뭉쳐진 빛이 꼭 수정과 같았다.

    ‘날아다닐 필요가 없으니까.’

    그 빛의 수정을 손끝으로 으깨 버렸다.

    그러자 곧 강렬한 빛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이안의 육신을 집어삼켰다.

    무려 7클래스의 ‘공간 이동 마법’.

    ‘텔레포트.’

    그 주문의 목적지는 대저택.

    이안과 가족들의 보금자리였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도착했다.

    “어머나!”

    마침 눈앞에 어머니, 베네사가 있었다.

    분홍색 고양이 에스펠도 함께였다.

    “이, 이안?”

    (네, 네놈?)

    겹쳐서 들려오는 두 여인의 목소리.

    저리 놀랄 정도로 시간이 지난 걸까?

    아니면 갑자기 나타났기 때문일까?

    “이안!”

    베네사가 달려와 이안의 손을 잡았다.

    시간이 꽤 지나가 버린 모양이었다.

    적어도 몇 주 이상은 족히…….

    “도대체 세 달이 넘도록 어디를…….”

    “…… 세 달이요?”

    어림짐작에서 수 배나 뛰어버렸다.

    세 달이라니, 심지어 넘었단다.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이안, 어서 상아탑으로, 상아탑으로 가보렴. 지금 온 나라가 아주 난리도 아니란다.”

    이안은 어머니로부터 백 일간의 정황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자세하지는 않았으나, 파악하기엔 충분했다. 황제의 급격한 건강 악화부터 제국간의 이상기류까지 모두.

    “흐음…….”

    생각보다 심각했다. 특히 황제의 건강악화가 거슬렸다. 전생과 마찬가지로 의문점이 많은 경우였다. 심지어 6년이나 이르게 시작되었다. 역시 자연스러운 악화는 아닌 것 같았다.

    ‘전생이나, 지금이나.’

    당시에도 온갖 독살과 마법, 저주라는 소문을 파다하게 낳았던 황제의 죽음.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아마 외부 세력의 관여가 있었겠지. 대충 짐작이 갔다. 용의 교단, 드래고니안, 라그나르. 많은 것들이 이안의 머릿속을 스쳐갔다.

    ‘일단 전쟁부터 멈춰야겠지.’

    전쟁 또한 마찬가지였다. 너무 이르다. 아니, 애당초 이안은 전쟁을 시작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가장 후회했던 일 중 하나가 전쟁이다. 반복할 순 없지 않겠는가?

    ‘대륙일통이 이루어진다면, 그 경우는…….’

    전쟁 따위의 결과물이 아닐 거다. 오직 자신, 이안 페이지라는 존재가 이륙해낼 경지. 그 어마어마한 힘 앞에 스스로 무릎들을 꿇는 경우겠지. 강압적인 전쟁과 학살은 단언컨대 없으리라.

    “다녀올게요.”

    이안이 베네사에게 말했다.

    더불어 빛을 손끝으로 모았다.

    육각수정의 형태의 하얀 빛.

    텔레포트 술식의 효과였다.

    “수습하러.”

    * * *

    “로 공국과의 불가침 조약이 체결되었습니다. 조건만 충족시킨다면, 일방적으로 파기될 걱정은 거두셔도 될 것 같습니다.”

    콜드우드 제국의 황태자, 그린리버와는 달리 자국 내 모든 실권을 장악한 ‘헥토르 콜드우드’가 부하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다리가 제법…….”

    포도주잔을 쥔 그의 손이 희열과 함께 떨렸다. 기회라는 이름의 사다리, 여태껏 단 한 번도 놓쳐본 바가 없었다. 언제나 쥐어 움켜쥐었다. 기회가 날 때마다 힘을 키웠고, 기회가 날 때마다 경쟁자를 죽였으며, 결국 이 자리까지 올라왔다.

    “튼튼하겠군.”

    스스로의 직감, 잠입시킨 모든 정보망, 공국과의 협상 결과가 헥토르 콜드우드에게 속삭였다. 이 사다리야말로 가장 이상적인 기회임을, 인간이 남길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족적, ‘대륙일통’의 첫 번째 발자국임을.

    “음.”

    헥토르 콜드우드가 포도주로 입술을 적셨다. 그는 그린리버 제국의 눈을 피하여 국경선, 모그리안 영지와는 영원한 앙숙, ‘앰버 영지’에 도착한 상태였다. 일부 고위마법사와 기사, 정예병들도 함께.

    “좋아.”

    마음을 굳힌 채 막사에서 빠져나온 헥토르 콜드우드. 바깥에는 이미 은밀하게 집결된 병사들로 하여금 군영까지 갖춰진 상황이었다.

    “그린리버 쪽에도 소식이 갔겠지.”

    물론 은밀하게 움직였다.

    수많은 부대로 나뉘어 이동했다.

    그럼에도 흔적과 목격은 필연적이었다.

    아마 지금쯤 소식이 닿았을 터.

    ‘소용없겠지만.’

    희미하게 웃어 보인 헥토르 콜드우드가 단상 위로 올라갔다. 집결된 모든 병사들이 한눈에 보이는 높다란 단상이었다.

    “전쟁은 사다리다.”

    대뜸 병사들에게 말하기 시작한 헥토르.

    음성 증폭 수정구가 목소리를 키워줬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 더 많은 보물이 숨겨져 있는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 말이다. 그건 높으신 분들한테나 해당하는 말이 아니냐고? 아니, 그대들도 마찬가지다. 오히려 그대들과 같은 잡졸들에게 더욱 유용한 사다리지.”

    자신의 병사들에게 ‘잡졸’이란 표현을 서슴없이 사용한다. 그럼에도 아무런 반발심조차 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수많은 ‘잡졸’들의 눈과 귀가 헥토르에게 집중되었다.

    “칼과 창을 앞세워 국경 너머로 뛰어드는 즉시, 눈앞에 펼쳐진 모든 것은 사다리다. 빼앗고 싶으면 마음껏 빼앗아라. 겁간하고 싶다면 마음껏 겁간하라. 죽이고 싶다면 마음껏 죽여라. 저 너머에서 그대들이 올라탄 사다리, 그대들이 거머쥔 모든 것들은 온전히 그대들의 것임을, 나 헥토르 콜드우드가 보장한다.”

    그야말로 잡졸들을 위한.

    잡졸이란 존재를 대변해 주는 연설.

    그 연설에 병사들의 사기가 들끓었다.

    “전쟁에 내던져지는 것이 억울한가? 그 억울함 이상의 것들을 저 국경 너머에서 빼앗아라. 한아름 가득 품고 고향으로 가져가라. 재물이든, 계집이든, 그 무엇……!”

    연설의 내용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그때였다. 헥토르가 선 단상으로 새하얀 빛줄기가 몰려들었다. 처음에는 몰랐다. 아주 작은 빛이었으니까.

    “……?”

    한데 그 빛이 조금씩 확연해졌다.

    뿐일까? 형상마저 이루기 시작했다.

    팔, 손, 다리, 몸통과 머리까지.

    영락없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연설 한번 살벌하네.”

    점차 인간의 모습을 이루어낸 빛.

    그 빛의 입에서 육성이 새어 나왔다.

    이는 명백한 사람의 목소리였다.

    “누, 누구냐!”

    그 기괴한 모습에 병사들이 몰려왔다.

    인간 형상의 빛을 원형으로 포위했다.

    동시에 황태자의 주변을 가로막았다.

    “누굴까?”

    그 나직한 되물음과 함께.

    인간 형상의 빛이 색을 이루었다.

    새하얀 빛이 아닌, 사람의 색깔로.

    피부는 하얀 축에 속하는 살색으로.

    머리칼은 밝은 빛깔의 갈색으로.

    부릅뜬 두 눈동자는 푸른색으로.

    이미 잘 알려진, 누군가의 모습으로.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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