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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88화 (88/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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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88화

    32. 자격을 증명하라(2)

    고위마법사 데커드와 로난, 그들을 필두로 모든 마법사들이 모인 대회의장. 그래봐야 총 인원보다 절반가량이 적었다. 나머지 절반은 어디에 있느냐? 전원 모그리안 영지의 서남부, 즉 콜드우드 제국과의 국경선으로 파견을 나갔다.

    “폐하께서는 차도가 없으신가?”

    백발의 노인, 고위마법사 데커드의 목소리였다. 회의의 진행은 불같은 성정을 가진 로난이 아닌, 침착한 데커드가 도맡았다.

    “아직 원인조차 밝혀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황실 의원들은 말할 것도 없고, 외부에서 초빙된 의원들도 마찬가집니다.”

    “독이나, 마법일 가능성은 전혀 없고?”

    “황실 연금술사들과 저희 상아탑에서 확인해 봤습니다만, 마찬가지였습니다. 현재로서는 갑작스레 건강이 악화되었다고밖에…….”

    제국은 그야말로 비상사태였다. 안으로는 황제 ‘테리 그린리버’가 악화된 건강으로 쓰러져 버렸다. 당초 이안이 예상했던 6년이라는 수명보다 앞당겨진 상황이었다.

    “콜드우드 쪽의 동향은? 우리 상아탑의 정보망이든, 군부이든, 황실이든, 사설 단체든 어디를 통했든 간에 새로운 소식이 있소?”

    “아직 이렇다 할 보고는 없습니다.”

    “으음…….”

    바깥의 흐름 또한 심상치 않았다. 얼마 전, 콜드우드 제국으로부터 일방적인 통보를 받았다. 지척까지 다가왔던 동부 대초원의 몬스터 토벌, 그 삼국 협정으로 약속된 대대적인 연합 작전에서 빠지겠다는 통보였다.

    “아니, 그럴 리가 없지!”

    고위마법사 로난이 격양된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내가 생각해도, 당장 내가 콜드우드의 수뇌부라 생각해봐도! 지금은 기회나 마찬가지요. 영토 침범의 기회 말이올시다!”

    전 탑주 허버트를 빠르게 처형시킬 수 있었던 까닭, 반대의 목소리가 하나도 없었던 이유. 그것은 허버트의 죄질이 악랄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보다 날카로운 무기, 6클래스의 대마법사 이안 페이지가 존재했기에 가능한 처결이었다. 한데 지금, 그 이안이라는 무기의 행방이 묘연해졌다.

    “분명히 눈치를 챘을 거요. 우리가 처한 모든 상황을! 콜드우드라면 오래 전부터 첩보전에 목숨을 건 족속들이 아니오?”

    제국의 1인자인 황제가 병석에 누웠다. 제국의 2인자나 마찬가지인 상아탑주마저 사라져 버렸다.

    그린리버 제국에는 더 이상 5클래스도, 6클래스의 마법사도 존재하지 않는다. 국방력에 구멍이 뚫렸다는 소리다. 그것도 엄청나게 치명적인 구멍이.

    “로 공국과의 동맹 건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공국으로 보낸 사절단으로부터 보고가 들어올 예정이오. 아마 오늘밤 군무 회의쯤 받아볼 수 있겠지. 모든 것은 그 결과에 달렸소.”

    상아탑주의 권한을 양도받은 데커드와 로난, 그들은 하루에도 수많은 회의에 참석해야만 했다. 상아탑의 회의는 물론 황실 회의, 국무 회의, 군무 회의, 연합 회의 등 쉴 틈이 없었다. 그만큼 안팎의 정세가 급변하는 탓이었다.

    “공국이 우리의 손을 잡는다면 한시름 놓을 수 있겠지만, 그 반대일 경우…… 그때부터는 적극적인 준비에 나서야 할 터.”

    적극적인 준비.

    무엇을 의미하겠는가?

    그린리버와 콜드우드.

    두 거대한 제국 간의 전쟁.

    전시 체제에 돌입한다는 뜻이리라.

    “상아탑은 한시도 긴장을 놓지 마시오.”

    데커드의 경고가 이어지는 그때였다.

    “데, 데커드 님! 로난 님!”

    외부와의 연락을 담당 중인 젊은 마법사.

    그가 회의장 안으로 헐레벌떡 들어왔다.

    긴급한 문제라도 생긴 모양이었다.

    “무슨 일인가?”

    “겨, 결렬입니다!”

    “결렬? 자세히 말해보게.”

    “공국, 로 공국으로 파견된 사절단에서 보고가 올라왔사온데…….”

    뒷말은 듣지 않아도 들을 수 있었다.

    지금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

    그린리버 제국과 로 공국의 동맹.

    그것이 결렬되었다는 얘기였다.

    ‘이안 님께서는 어디에…….’

    결국, 모두가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 상황을 해결해 낼 유일한 존재.

    상아탑주, 이안 페이지의 이름을.

    * * *

    대륙에 날선 기류가 불어오는 그때.

    그린리버 제국의 상아탑주 이안 페이지는 아직까지도 시간의 보고에 남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름 모를 드래곤의 정신체와 사투까지 벌여야만 했다. 먹지도, 씻지도, 수면을 취하지도 않았다.

    그래서일까? 드래곤의 정신체가 그랬던 것처럼, 이안의 시간관념 역시 조금씩 흐릿해져 갔다.

    ‘이런 젠장.’

    자격을 증명하고자 사투를 시작한지 ‘1일 차’.

    만신창이가 되어버린 그와 달리, 드래곤의 몸뚱이는 깨끗하기만 했다. 거의 하루가 지난 시점에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사투란 절대적으로 자신의 입장이었다는 사실을.

    ‘용아병보다 더하잖아?’

    그렇다. 제아무리 권능을 사용하지 못하는 정신체라 한들, 그 피부와 비늘 자체가 이미 완벽한 방패였던 거다. 스파르토이의 맷집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는 않았다.

    ‘허상이라 다행이야.’

    그래도 현실 세상에서 용아병을 쓰러뜨리는 것보다는 현실성이 있어보였다. 어째서냐고? 이곳은 허상의 공간이다. 모든 것이 허구다. 의식만 바로잡으면 곧바로 채워졌다. 소진되었던 마나가 몽땅.

    ‘마나가 무한대라면 해볼 만하다.’

    그렇기에 희망을 놓지 않았다.

    여전히 해볼 만한 도전이라고.

    충분히 가능하다고 여겼다.

    ‘25일 차’가 되기 전까지는.

    (벌써 포기하는 것이냐?)

    “대충 계산해 봤는데, 벌써는 아닐 겁니다. 적어도 인간의 입장에서는요.”

    지쳐 버린 듯 대(大) 자로 뻗어버린 이안에게 드래곤의 정신체가 말했다.

    이 공간에서는 바깥세상의 시간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낮밤은커녕 졸리지도, 배가 고프지도 않으니 더더욱 그랬다.

    (말만 하여라. 바깥으로 보내줄 터이니.)

    “아직 안 간다니까요?”

    (그렇다면 나야 좋지.)

    드래곤의 말은 진심이었다. 그는 이안과의 ‘만남’이, 어쩌면 조그마한 인간을 괴롭히는 ‘쥐잡기 놀이’가 상당히 즐거운 것 같았다. 처음 마주했을 때 느껴졌던 그 어마어마한 위압감조차 사라져 버렸을 정도로, 어지간히 심심했나 보다.

    ‘저 모습이 진짜일까.’

    비록 정신체라고는 하나 성격이나 목소리, 버릇 등 모든 요소가 복사되었을 터. 드래곤이라 해서 마냥 근엄하고, 위엄 넘치며, 무섭지만은 않을 거다. 페어리 퀸과 용아병 스파르토이, 그들의 수준 떨어지는 입씨름만 봐도 그렇지 않던가?

    ‘설마, 그 쪽지를 남긴 드래곤이?’

    처음 발견했을 당시의 용언서, 그리고 권속의 주문이 담긴 수첩과 함께 놓여 있던 쪽지. 그 드래곤이 남긴 것으로 추정되는 쪽지의 인상과 여러모로 비슷했다.

    ‘드래곤들이 전부 저 모양은 아니겠…….’

    조금 끔찍한 상상이 이어지는 그때.

    이안은 생각을 마무리할 수 없었다.

    커다란 그림자가 드리웠으니까.

    뻗어 누운 몸뚱이 아래로부터.

    (휴식은 여기까지다.)

    바로 드래곤의 앞발이었다.

    배리어마저 박살 내는 그 앞발!

    쿠웅!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잔뜩 긴장한 상태로도 피하기가 어려운데, 하물며 기습까지 당해버렸다. 혼신을 다한 배리어가 없었다면 죽었을 거다. 물론 허상일 뿐이나, 그렇다한들 유쾌하지는 않으리라.

    (언제 봐도 놀랍군. 본디 술식의 마법이란 언어의 힘을 사용할 수 없는 존재, 그 미물들을 돕고자 창조된 재주에 불과하다. 그 조잡한 재주를 거기까지 발전시켰을 줄이야.)

    앞발을 거둔 드래곤이 중얼거렸다.

    진심으로 감탄스럽다는 눈빛이었다.

    “그 말씀, 진심이긴 합니까?”

    (물론.)

    “발길질 한번으로 박살을 내버리면서 하실 말씀은 아닌 것 같습니다만.”

    (그대도 생각해봐라. 마음먹고 짓밟은 벌레가 멀쩡하게 살아나왔다고.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 자력으로 발전시킨 수단을 통해서 말이지. 경이롭지 않겠는가?)

    졸지에 벌레가 되어버린 이안.

    어떻게든 한 방 먹여주고 싶었다.

    저 오만한 드래곤의 정신체에게, 현존하는 인류 최강의 마법사로서.

    ‘슬슬 바깥의 상황도 걱정되고.’

    인고의 시간은 끊임없이 흘러갔다.

    31일차, 시간관념이 깨져 버렸다.

    49일차, 여전히 가망이라곤 없다.

    68일차, 지금까지와 마찬가지다.

    82일차, 슬슬 포기할까 싶어졌다.

    그렇게 맞이한 대망의 ‘90일 차.’

    이안의 몸에 이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마나 하트가…….’

    용아병 스파르토이와의 훈련. 그 무식한 훈련으로부터 느껴졌던 마나 하트의 간질거림이 해소됨과 동시에, 비로소 성장까지 이루어냈다.

    ‘7클래스. 아니, 어쩌면…….’

    마나하트의 성장을 가늠해 본 이안.

    그가 드래곤의 정신체를 올려다봤다.

    확연하게 달라진 표정이 돋보였다.

    넘치는 당당함, 미소까지 그렸다.

    “좀 다를 겁니다.”

    (무엇이?)

    “지금까지와는.”

    그로부터 정확히 10일 후.

    10일 차에 접어들 무렵.

    쿵!

    마침내 드래곤의 정신체가 고꾸라졌다. 비록 용언을 포함한 아무런 권능도 없으며, 정신체에 불과한 만큼 엄청나게 약화된 상태였지만, 어찌되었든 쓰러뜨린 거다. 무려 드래곤이란 존재를, 인간들의 마법사가.

    (대단하군.)

    그러자 허공으로부터 똑같은 생김새의 드래곤이 날아왔다. 동시에 쓰러진 드래곤의 몸뚱이가 증발하듯 사라져 버렸다. 이곳은 무차원의 세계, 모든 것은 허상이다. 드래곤 또한 정신체일뿐, 육체란 애당초 존재하지 않는다.

    (끝내 포기하지 않은 것도, 이 와중에 성장을 이루어낸 것도. 천 년이라고 했던가? 바깥세상이 변하기는 변해 버린 모양이야.)

    무려 드래곤의 진심어린 칭찬.

    기분이 썩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칭찬을 받기 전에 확인부터 하고 싶었다.

    “증명이 된 겁니까?”

    (증명?)

    “쓰러뜨리는 게 증명의 방법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기억을 열람할 수 있는 권한, 그 권한의 증명 말이죠.”

    (아, 그랬었지.)

    “…….”

    (그렇게 바라볼 것 없다. 조금 당황했을 뿐이니까.)

    의심스러움으로 가득한 이안의 눈빛.

    그 눈빛에 찔리기라도 한 걸까?

    드래곤이 해명을 늘어놓았다.

    (좋다. 합당한 자격을 보여준 그대에게 본신의 동족, 혹은 본신의 가장 강력한 아군이자 스승 되는 존재와 동일한 권한을 주도록 하겠다. 바로 지금, 이 순간부터.)

    드래곤의 말이 끝났음에도 이안은 눈만 껌뻑거렸다. 더 이어질 줄 알았으니까. 예를 들자면 용언을 통한 의식이라든가, 선언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끝인가요?”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마찬가지였다.

    시간의 보고 특유의 고요함만 느껴질 뿐.

    (더 무엇이 필요한가?)

    “아뇨, 그건 아닙니다만.”

    뭔가 놀아난 기분이 들었다.

    그럼에도 이안은 꾹 참았다.

    대신 물어봐야 할 것을 말했다.

    자격이 생겼으니, 쓰는 법도 알아야겠지.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뭘?)

    “기억을 열람하려면…….”

    (물어봐라.)

    “……네?”

    (물어본다면, 내가 대답을 줄 터.)

    “…….”

    할 말을 잃어버린 이안이었다.

    놀아나다 못 해 속기까지 한 건가?

    (기억의 전이를 바라나? 그것은 그대에게 이롭지 못하다. 견디지도 못할 것이다. 수천 년이 넘어가는 영겁의 세월을, 감당할 수 있겠나?)

    짐짓 근엄한 어조로 말하는 드래곤.

    하기야,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무려 드래곤의 기억 아니겠는가?

    감당할 수 있을지조차 미지수였다.

    “……대답은 무조건 해주시는 겁니까?”

    (그렇다. 그대는 자격을 증명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먼저.”

    가장 먼저 물어봐야 할 질문. 기억의 전이가 아닌, 묻고 답하는 식의 소통이라면 반드시 확인해둬야 할 사항이 있었다.

    “엘릭서. 제가 마셨던 그 열쇠를 다시 마신다면, 그때도 당신과 만나게 되는 겁니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물어볼 순 없다.

    그러니 그 여부부터 알아둬야 했다.

    언제든 만날 수 있는 존재인지.

    (내 본신의 반쪽짜리 후손, 에반투스. 그 아이의 브레스로 완성된 열쇠라면 언제든 가능하다. 허나 다른 일족의 후손이 완성시킨 열쇠는 다르지. 유념하도록 하라.)

    즉, 재료만 있다면 찾아올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한시름 놓은 이안이 다음 질문을 꺼냈다.

    “열쇠의 재료 중 가고일의 눈이 있습니다.”

    (가고일, 그래. 알고 있다.)

    “가고일은 어디서 만날 수 있습니까?”

    (음?)

    그 질문에 드래곤이 기다란 목을 갸웃거렸다.

    (흔한 미물 아닌가? 워낙 개체수가 많아 자연의 균형을 파괴하는 주범이었지. 그래서 열쇠의 재료로 써버렸거늘.)

    “……지금은 아닙니다. 저는 살면서 가고일이란 괴물을 두 번. 아니, 딱 한 번 만나봤습니다. 그때 얻어낸 눈으로 열쇠까지 만들었죠.”

    (그건 나로서도…… 의외군.)

    심지어 모르는 것까지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속은 것 같다.

    ‘아직 남아 있으니까.’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 열쇠를 만드는데 가고일의 눈이 아주 극소량만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아직 남아 있는 눈의 가루만 가지고도 몇 병은 더 조제할 수 있을 터.

    ‘일단은 넘어가자.’

    이안이 마음을 다스렸다. 확인할 것은 확인해뒀다. 물어보고 싶은 것이 더 존재했으나, 그보다는 바깥의 상황이 걱정되었다. 모르긴 몰라도 시간이 제법 흘렀을 테니까.

    ‘상황부터 살피고, 다시 온다.’

    빠르게 판단을 내린 이안.

    그가 드래곤의 눈을 바라봤다.

    다른 질문은 나중을 기약하더라도.

    알아두고 싶은 것이 하나 있었다.

    “당신은 누굽니까?”

    (첫날 대답을 했던 것으로 아는데.)

    “정신체, 기억의 저장이라는 정체 말고, 이름을 알고 싶습니다.”

    (이름이라…….)

    선뜻 대답하지 못하는 드래곤.

    본신이 아닌, 허상이기 때문일까.

    조금은 어색한 것 같았다.

    이름을 말하는 것이.

    (나의 이름은.)

    이윽고 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리시스, 라덴쥬.)

    리시스 라덴쥬.

    이안에게도 익숙한 이름.

    페어리 퀸에게 들었던 이름.

    그 이름이 머릿속으로 전해졌다.

    한 글자 한 글자가 또렷하게 박혔다.

    (그것이, 내게 주어진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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