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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87화
32. 자격을 증명하라(1)
(그대는 나의 본신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본신의 동족들도 아니다.)
“아마 그럴 겁니다. 인간이니까요.”
드래곤의 얼굴은 분명 짐승과 같았다. 한데도 읽어졌다. 그 잔뜩 일그러진 표정이, 자그마한 인간, 이안 페이지를 향한 의심으로 가득한 눈빛이.
(인간이며, 그 언어를 입에 담을 수 있는 존재. 그 존재는 유일하다. 내가 그를 몰라볼 리가 없고, 그도 날 몰라볼 리 없지.)
“저는 말씀하시는 그 존재가 아닙니다.”
(때문에, 그대의 존재는 모순이다.)
단호한 어조로 말문을 이어가는 드래곤이었다.
(그가 아니라면, 그대는 나의 본신이거나 본신의 일족이어야만 한다. 그래야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다. 방금 보여줬던 그 힘, 그것은 결코 흉내낼 수 있는 힘이 아니니.)
드래곤의 논리는 간단했다.
인간이 용언을 쓸 수는 없다.
그게 가능한 자는 하나뿐이다.
한데 너는 아니다. 확신할 수 있다.
그러니까 너는 드래곤이어야만 한다.
‘뭐 이렇게 앞뒤가 꽉 막혔어?’
이안은 고민에 휩싸였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까?
저 꽉 막힌 용에게.
“……이곳이 어디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제가 속한 세상에는 당신들, 드래곤들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사라졌다?)
이안의 말에 드래곤의 표정이 바뀌었다.
고뇌 속으로 빠져든 표정이었다.
(한동안 찾아오지 않아 짐작은 하고 있었다만.)
드래곤이 사라진 지 수백 년, 혹은 천 년 이상이 흘렀거늘, 고작 ‘한동안’이라니?
‘시간관념이 완전히 허물어졌군.’
그렇다면 수백 년, 혹은 천 년 이상의 세월을 ‘한동안’이라 표현할 수도 있으리라. 세월에 무감각한 드래곤이라면 더더욱.
(허나 그 사실과 그대의 존재는 어떠한 연관도 없다.)
“아뇨, 관계가 있습니다.”
이안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생겼다.
짐작했던 바가 맞아들었기 때문이었다.
‘바깥의 일을 전혀 모른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겠는가? 최소한으로 잡아도 수백 년 간의 일을 모른다는 얘기다. 인즉.
‘여기에 갇힌 지도 수백 년째란 얘기지.’
물론 이 공간이 어디인지는 모르겠다.
‘기억의 보고’라는 이름만 들었을 뿐.
여기서 확신할 수 있는 사실 하나.
이 드래곤의 말과 지식은 모두.
‘아주 오래 전의 기억에 머물고 있다.’
아직 드래곤이 사라지기 이전.
그때를 기준으로 남아 있는 기억.
그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한 존재.
(어떤 관계가 있다는 거지?)
그 낡은 존재가 입을 열었다.
이안 역시 차분하게 대답했다.
“혹시, 페어리들의 여왕을 아십니까?”
(알다마다. 내 본신과 그 일족의 권속이지. 아주 자그마하고 여린 심성을 가진 아이였다. 어찌 묻는 것이냐?)
여린 심성까지는 모르겠지만.
오래 전이니 그럴 수도 있을 터.
“그녀는 천 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사라져 버린 드래곤들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둥지였던 자리에 일족의 보금자리까지 이룬 채로 말이죠.”
(천 년……?)
드래곤이 당혹스러운 듯 되물었다. 영겁의 세월을 살아가는 드래곤 일족에게도 천 년이란 제법 긴 시간일 터.
“정확히 천 년은 아닙니다만, 저희 인간들은 이제 드래곤을 전설 속의 존재, 혹은 상상의 영물 정도로만 생각합니다. 그 정도로 긴 세월이 흘렀죠.”
잠시 말문을 잃어버린 드래곤.
상단한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표정으로부터 읽어낼 수 있었다.
“저도 한때는 다른 이들과 똑같이 여겼습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당신들께서 남긴 흔적에 휘말리고 있는 상황입니다. 아, 흔적이 아니라 의도된 장난일지도 모르겠군요.”
이안의 말이 물 흐르듯 이어졌다.
거짓보다는 진실을 선택했다.
“제가 사용했던 용언 마법, 그 언어가 담긴 용언서라는 책을 얻었고, 권속의 힘이라는 능력까지 얻었습니다. 말씀드린 페어리 퀸, 저와 함께 있습니다. 저를 이곳으로 보내준 엘릭서, 그 액체도 드래고니안의 도움을 통해 만들었죠.”
물론 부분적인 진실만 밝혔다.
자신이 회귀자임을 밝히는 것.
황금용 일족의 언어를 사용했다는 것.
아직 거기까지는 밝힐 생각이 없었다.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많은 것들이 변했죠. 제가 누구냐 물으셔도, 저는 인간이란 대답밖에 드릴 수가 없습니다. 당신들과 조금 접점이 있는 인간, 딱 그 정도밖에는.”
이안의 목소리가 거기서 멈췄다.
할 수 있는 말은 모두 내뱉었다.
판단은 눈앞에 저 드래곤의 몫.
(……혹시, 그대와 같은 인간이 또 세상에 존재하는가? 인간의 몸으로, 그 언어의 힘을 구사하는 자가 그대 말고도 존재하느냐는 물음이다.)
“아뇨,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그런가…….)
드래곤이 그 커다란 눈을 감았다.
깊은 상념 속으로 빠져든 모습.
‘실존했을 거라곤 생각했는데.’
새삼 그 자태가 이안의 눈에 들어왔다. 권속들을 만나고, 용언 마법까지 펼침으로서 드래곤의 존재는 확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신비로웠다. 또한 두려웠다. 도대체 얼마나 강한 존재일까? 일말의 가늠마저 불가능했다.
‘닿을 수는 있을까?’
8클래스 경지에 올랐던 시절의 이안은 가끔가다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9클래스의 경지까지 올라간다면, 보이지도 않는 경지였지만, 만에 하나라도 도달한다면, 그때는 비로소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지 않을까? 드래곤과.
‘글쎄…….’
정작 이렇게 마주하고 보니 힘들어졌다.
그때의 생각과 자신감을 확신하기가.
(그대의 말은 잘 들었다. 흥미롭군.)
생각이 멈췄을 때, 드래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처음과는 달랐다.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였다. 표정에 가득 담겼던 의구심 또한 사라진 것 같았다. 적어도 이안의 느낌으로는 그랬다.
(먼저, 그대가 마신 액체는 엘릭서란 비약이 아니다. 바로 이곳, 시간의 보고로 통하는 열쇠일 뿐, 아마 그 열쇠를 완성시켜 준 아이가 내 본신의 반쪽짜리 후손, 드래고니안이라 불리는 일족 중 하나겠지.)
“이름이 에반투스라고 했습니다.”
(에반투스, 그래. 그 이름이 맞다. 그 아이의 브레스로 열쇠가 완성되었기에, 그대는 수많은 보고 중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드래곤의 말에 이안이 궁금증을 느꼈다.
아까부터 계속 들리는 단어.
시간의 보고라는 표현.
그것이 궁금해졌다.
“질문을 하나 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말하라.)
“그 시간의 보고란 무엇입니까?”
틈을 놓치지 않는 이안의 질문.
드래곤 또한 멈추지 않고 대답했다.
(내 본신과 그 동족들은 가히 무한에 가까운 삶을 살아가지. 하지만 그 삶 속에 겪었던 모든 경험을 세세하게 기억하지는 않는다. 해서, 오래된 기억은 이 보고 속에 간직한다.)
이안은 드래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눈앞에 존재야말로 그 ‘정신체’라는 뜻이리라.
‘아주 오래 전의 기억이 담긴 정신체.’
이안이 되묻지 않자, 드래곤의 정신체 역시 설명을 이어갔다. 자그마한 인간 마법사가 제대로 알아듣고 있음을 눈치챈 까닭이었다.
(본신이나 그 동족들에게 필요한 기억, 혹은 떠올리고 싶은 기억이 있다면 언제든 찾아와 내게 물어볼 수 있지. 생생한 대답을 들을 수도 있다. 나는 언제나 정신체로 분리된 그 순간 속에서 살아가고 있으니까.)
기억의 보고.
과연 그 작명이 정확했다.
기억의 저장소가 아니겠는가?
“그렇군요. 설명 감사드립니다.”
(그대는 힘을 탐하고 엘릭서를 마셨는가?)
“……부정하지는 않겠습니다.”
(아쉽겠군. 힘은커녕 낡은 기억이 전부라서.)
그래, 드래곤의 말대로 아쉽긴 했다. 하지만 곧 생각을 고쳐먹었다. 비록 수백 년, 혹은 천 년이 지나버린 기억이었지만, 그것들은 드래곤이란 초월적인 존재의 기억이다. 실로 엄청난 가치를 지녔을 터.
“혹시.”
이안이 조심스레 물었다.
“저도 그 기억을 열람할 수 있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대에게는 권한이 없다.)
이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그럴 줄 알았다.
혹시나 해서 물어봤을 뿐.
(하지만.)
빠르게 포기하려는 찰나.
드래곤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대는 조금 특별한 것 같군.)
특별한 것 같다?
기대가 생긴 이안이었다.
(원한다면 지금부터 그대를 본신의 동족, 혹은 본신의 가장 강력한 아군이자 스승 되는 존재와 동일한 권한을 내어주도록 하겠다.)
본신의 아군이자 스승.
유독 그 부분이 거슬렸다.
무려 드래곤의 스승이라.
아까 말했던 그 존재일까?
인간 중 유일하다는 존재?
이안이 계속 귀를 기울였다.
(단, 합당한 자격을 보여줘야만 한다.)
“어떻게 보여드릴 수 있습니까?”
(간단하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말하는 드래곤.
이내 한 박자 쉬더니 발언을 수정했다.
(……아니, 그대에게는 어려울지도 모르겠군.)
수정된 발언과 함께 드래곤의 날개가 펼쳐졌다. 그러자 사방을 칠흑으로 물들였던 어둠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그야말로 널따란 공간. 아니, 오히려 널따랗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았다. 아공간 주머니의 내부처럼 어둡고도 밝은 무한의 공간이 펼쳐졌으니까.
(어색한가? 이건 우주라는 이름의 초월적인 공간, 그 공간을 형상화한 풍경이다. 실제 우주는 아니지만, 그곳과 똑같지.)
‘우주……?’
이안은 알아들을 수 없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의미를 되묻지는 않았다.
당장 중요한 건 따로 있었으니까.
“자격을 증명하는 법, 말씀해 주십시오.”
(나를 쓰러뜨리면 된다.)
“……네?”
이안이 되물었다.
설마 잘못 들은 걸까?
누구한테 누굴 쓰러뜨리라고?
(말하지 않았나? 그대에겐 어려울지 모르겠다고.)
“…….”
이안은 어이가 없었다. 하마터면 드래곤에게 욕을 할 뻔했다. 비록 정신체라 할지라도 명백한 드래곤이다. 손찌검 한 번으로 자신의 베리어를 박살 냈던 무지막지한 힘, 그 힘까지 목격해 버렸다. 그런데 지금 뭘 어찌하라고?
(걱정할 건 없다. 이곳은 무차원의 공간, 그대는 결단코 죽지 않는다. 상처는 모두 허상이며, 느껴지는 고통 역시 허상이다. 뿐만 아니라 나는 드래곤으로서의 어떠한 권능도 누릴 수 없다. 브레스는커녕 언어의 힘, 조잡한 마법조차도. 포악한 짐승이나 마찬가지지.)
모든 권능을 누리지 못한다?
심지어 마법과 브레스까지?
이안의 귀가 솔깃해졌다.
(원치 않는다면 기꺼이 내보내주도록 하겠다. 어차피 그대는 발길을 잘못 들인 방랑자에 불과할 뿐, 아무런 손해도 없을 터이니.)
드래곤 딴에는 배려에 가까웠던 말.
하나 그 말이 오히려 이안을 자극했다.
용언도, 마법도, 브레스도 쓰지 못하는 괴물.
‘심지어 허상이다.’
죽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는다.
이 공간 자체가 허상이니까.
해볼 만하지 않겠는가?
‘충분히.’
이안이 결정을 확고하게 내렸다.
깊어진 눈으로 드래곤을 올려보았다.
“해보겠습니다.”
(호오.)
이안의 대답이 예상 밖이었을까?
드래곤의 얼굴에 흥미로움이 묻어났다.
아니, 단순한 흥미로움은 아닌 것 같았다.
조금 더 노골적으로 표현해 보자면…….
‘마침 심심했는데, 잘 걸렸다.’
그렇다. 이안은 확신할 수 있었다.
바로 그러한 표정이 분명했다.
* * *
이안이 불꽃과 함께 사라진 지도 세 달째.
제국은 지금, 유례없는 위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탑주께서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으셨나?”
“예. 가족 분들도 여전히 행방을 모르십니다.”
“의도적으로 감춘 것은 아니었고?”
“심문 마법의 결과로는 그러했습니다.”
“허어, 대체 어디로 사라지셨단 말인가.”
상아탑주의 권한을 임시로 물려받은 4클래스 고위마법사 로난, 그가 이마를 감싸며 중얼거렸다. 이런 시국에, 제국의 안과 밖이 모두 시끄러워진 시점에, 그 모든 소란을 압도적인 힘으로 잠재워야 할 상아탑주 이안 페이지는 어디에 있는 걸까?
“회의를 소집하게. 정식 마법사 전원 참석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