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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79화
29. 느림보 손님(2)
남부 관문 바깥에서 벌어졌던 소동은, 새로운 상아탑주 ‘이안 페이지’의 화려한 데뷔전으로 일단락되었다. 황제 테리 그린리버의 명으로 괴물에 관한 대대적인 조사가 실시되기는 했으나, 얻어낼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 답답이는 도대체 왜 온 거야?)
(나도 처음부터…… 자네를 찾고자…… 했던 것은…….)
(아우! 답답해. 답답해!)
그 본체나 마찬가지인 푸른 빛깔 영혼이 이안과 함께 있었으니까. 용아병 ‘스파르토이’의 영혼과 페어리 퀸이 뜻밖의 회포를 풀었다.
아니, 회포라기보다는 싸움에 가까웠다. 서로가 썩 반가움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두 사람의 말다툼을 멈춰낸 이안.
그가 용아병 스파르토이에게 물었다.
“상의하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여유가 생겼으니 얘기부터 들어볼 차례였다. 이안 역시 답답한 말투를 즐기는 편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참아줄 만했다.
(나는…… 그분들께서 자취를 감추신…… 그 순간으로부터 쭉……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깨어난 건 얼마…… 되지 않았지.)
(말 좀 빨리 하라고! 빨리!)
“여왕님은 조용히.”
조용히 하라면 조용히 할 수밖에 없는 페어리 퀸의 운명.
그녀가 억울한 듯 양쪽 볼을 부풀리며 탁자 위에 돌아 누워버렸다. 그래봐야 용아병의 이야기는 들릴 테지만.
(육신…… 그대들의…… 표현으로는 빈껍데기……. 그 껍데기는 오직 나만의 의지로…… 만들어진다. 설령…… 그분들이라 할지라도…… 나의 껍데기를 만드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 헌데…….)
가뜩이나 느린 말투의 용아병.
거기다 말문까지 자주 멈춘다.
말하는 게 무척 힘들어보였다.
(깨어나는 순간부터…… 감지할 수…… 있었다.)
“뭘 감지하셨죠?”
(내가…… 만들어낸 기억이 없는…… 육신을.)
용아병의 얘기는 이러했다.
결코 본인이 만든 바 없었던 육신,
그 빈껍데기가 감지되었다는 얘기였다.
수백 년 간의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그 지하에…… 조각난 육신을 찾아…… 깃든 기억을…… 읽어보았다……. 어떤 존재가 나의 육신을…… 만들었는지…… 왜 그곳에 있는 것인지…… 보이지는 않았으나…… 대신 그대와…… 페어리 여왕의 모습을…… 보았다.)
옛 상아탑 지하의 ‘조각난 육신’.
이안의 마법에 박살난 그 껍데기였다.
(다른 권속들의…… 행방을 모르기에…… 하는 수 없이 여왕의 더스트…… 그 기운을 따라……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왜 영혼의 모습으로 오지 않으셨습니까?”
(더스트의 기운을…… 감지하기 위해서였다. 추격은 육신이 있어야…… 가능한 일……. 소란을 피운 것은 사과…… 하도록 하지. 그래도 인간들을…… 해치지는 않았다.)
“그건 압니다.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페어리 퀸과는 다르게 인간에 대한 존중을 지닌 용아병 스파르토이였다.
존중이 아닌 다른 감정일 수도 있겠다만, 걸리적거린다며 해치지 않은 것으로도 다행이리라.
“정리하자면, 용아병께서 스스로 만들지 않은 육신. 그 육신이 느껴졌고, 그 육신의 기억으로부터 저와 여왕님을 봤다. 그 길로 여왕의 더스트가 뿌려진 방향을 감지하며 여기까지 오게 된 거다. 문제를 상의하기 위해서. 맞습니까?”
(그러…… 하다.)
이안은 용아병의 상황부터 정리해냈다. 그렇다고 해답까지 알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당장 용아병의 이름이 ‘스파르토이’란 사실조차 처음 알았거늘, 무얼 더 알겠는가?
“여왕께서는 짐작 가는 바가 있으십니까?”
(흐응, 글쎄다. 착각한 게 아니겠느냐? 저놈 몸뚱이를 누가 만들었겠어? 그분들께서도 불가능하신 일인데. 골통이 텅텅 비었다 보니 기억력도 따라간 모양이로다.)
실로 도움이 안 되는 그녀였다.
“먼 길 오셨는데, 도움 될 이야기는 드리지 못하겠군요.”
(괜찮다……. 그대가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 페어리의 여왕이 무지한 것 역시…… 당연한 일이니.)
(뭐라고? 이 골바가지가!)
“여왕님. 조용히.”
(왜 자꾸 나한테만……!)
다시금 조용해진 페어리 퀸.
이안의 목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도움은 모르겠습니다만, 당장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이겁니다. 그 육신이 있었던 곳에는 마법을 하나 얻었죠.”
(마법……?)
“보여드려도 되겠습니까?”
이안은 용아병의 의사부터 물어봤다.
마법의 효과를 알기에, 이후 할 말이 없도록 장치하나 마련해두는 셈이었다. 페어리 퀸의 돌아누운 어깨가 조금 들썩거렸다.
(보여…… 다오.)
“이런 마법입니다.”
이안이 ‘권속의 주문’을 외웠다.
동시에 황금빛 마나가 뿜어졌다.
(설마……?)
“권속의 힘이라 하더군요.”
(권속의…… 힘…….)
용아병이 잠시간 말을 멈췄다. 한줌 빛으로 이루어진 영혼이었지만, 무언가 가늠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과연…… 그대에게서 느껴지는…… 힘. 그분들의 권능과…… 동일하다……. 그것이 바로…… 권속의…… 힘이겠지.)
페어리 퀸이 그랬던 것처럼, 용아병 스파르토이도 이안에게서 느껴지는 강압적인 힘을 느꼈다. 즉, 그 또한 이안의 권속이 되어버렸다는 얘기였다.
(이래서…… 페어리의 여왕이…… 그대의 말이라면…… 저항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었나?)
계속해서 말문을 이어가는 용아병.
짐짓 깨달음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물론 여전히 느림보 거북이였지만.
(그분들의 권능이…… 주어졌다는 것은…… 무언가 큰 뜻이 있을 터……. 나는 제대로…… 찾아온 것 같군.)
“뭔가 짚이는 점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다. 그분들의 뜻은…… 헤아릴 수 없지……. 다만 따를 뿐……. 그분들의 종이자…… 방패이자…… 수문장이자…… 권속으로서…….)
다만 페어리 퀸과 달리, 용아병은 작금의 상황을 빠르게 인정해 버렸다.
인간이 어째서 드래곤의 권능을 가졌는지 의심조차 없었다. 심지어 깨어난 이후 겪었던 육신에 관한 혼란까지 ‘그분들의 뜻’이라는 하나의 결론으로 귀결시켰다.
‘속편해서 좋네.’
느릿한 말투와 어울리는 느긋한 태도였다. 용아병, 그리고 페어리 퀸. 같은 권속인데도 어찌 저리 다를 수가 있을까?
(그 자존심 높은…… 페어리들의 여왕께서…… 인간의 수족처럼 살고 있었다니…… 볼만한 광경이로고.)
(네놈도 이제 마찬가지거든?)
(나는…… 그분들의 뜻을…… 존중하기에 아무런…… 불만도 없다네. 하지만 자네는…… 아까부터 보아하니…… 많은 것 같더군. 불만이…….)
(인간! 이놈한테 말이나 좀 빨리 하라고 명령해 보아라! 너에게도 이롭지 않겠느냐? 귀가 달렸다면 말이다! 어서!)
두 권속의 말다툼을 보고 있자니, 이안은 새삼 별거 없단 생각이 들었다.
좀 더 표현의 수위를 높여보자면, 그래. 수준이 낮다. 저 모습만 봐도 느껴지지 않는가?
‘지닌 힘은 진짜라는 게 문제다만.’
비록 수준 낮은 말싸움이나 벌이고 있다지만, 저들이 가진 힘만큼은 결코 낮지 않았다.
영혼이 깃든 완전체 용아병의 위용은 이미 북부 관문에서 지켜보았다.
마법사 부대의 공격을 그대로 흡수해 버림은 물론, 무지막지한 힘까지 자랑했다. 아마 계속 싸워야 했다면, 이안도 승리를 장담할 순 없었을 거다.
‘그 드래고니안도 나와 비슷하거나, 더 강할 거라 했지.’
모든 권속들의 힘은 비슷한 경지일 터.
페어리 퀸 또한 6클래스 상당의 번개 마법을 펼치는 존재다. 개인으로만 따져도 강했지만. 그녀의 진정한 힘은 ‘일족’이다.
수백 마리의 페어리 일족을 이끌지 않던가? 쪽수엔 장사 없다.
‘전생과는 달라졌다. 많은 것들이.’
전생에는 이토록 강한 존재들이 이안의 삶에 끼어든 바가 없었다.
페어리 퀸이야 용언 연구 과정에서 직접 찾아갔고, 다른 드래곤의 권속을 보거나 들어본 것은 이번 생이 첫 번째였다.
‘이번 생에는 자꾸만 엮여가고 있어.’
용언을 연구했기 때문일까?
용언을 사용했기 때문일까?
‘시간을 되돌린 부작용일까.’
용언이든, 시간의 역행이든.
결코 열어선 아니 되는 상자.
그런 상자를 열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계속, 많은 것들이 바뀌겠지.’
저번 생과 이번 생의 간극.
그 차이가 점점 더 멀어져 갔다.
‘더 많은 것들과 엮일 테고.’
이 흐름이라면 장담할 수 있었다.
전생에 없었던 권속들과의 인연.
큰 폭으로 넓어진 용언 이해도.
얼떨결에 얻게 된 권속의 힘.
환술 속 기이한 남자까지.
‘……이래서 조급했던 건가.’
이안은 지금에 와서야 깨달았다.
최근 들어 느꼈던 불만족스러움.
더뎌진 성장세에 대한 조급함.
그 감정적 기복의 원인을.
이전까진 그랬다. 조급함을 느끼면서도, 왜 조급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전 상아탑주 허버트는 소멸되었으며, 라그나르 역시 날개를 잃었다. 조급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얘기다. 느긋하게 2, 3년 정도 기다리면 마나하트의 성장이 끝날 테니까.
‘더 강한 존재들이 수두룩해. 실존했던 드래곤들, 그 드래곤의 권속이란 존재들, 환술 속 남자까지. 심지어 내 삶에 개입하고 있어.’
원인은 바로 그것이었다.
이안의 삶에 끼어드는 존재들.
이안만큼 강하거나, 더 강한 자들.
그런 존재들이 천지에 존재하는 이상.
‘여기서 성장을 멈출 수는 없다.’
확실한 건 결국 하나였다.
이 속도로는 어림조차 없다.
지금보다 더 강해져야만 한다.
아니, 전생보다도 강해져야 한다.
‘내가 너무 안일했어.’
마냥 드래고니안의 정보를 얻어내고.
마냥 엘릭서의 제작만을 기다리고.
마냥 엘릭서의 효과만을 바라고.
과연 그것이 전부일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회귀자라는 이점에 가둔 거야. 스스로를.’
수준 높은 마법적 지식들.
자신만의 독특한 마나호흡.
엘릭서, 아티펙트의 도움 등.
이안은 전생의 기억에 의존하며 빠른 길만 택해왔다. 그 결과 육신의 성장이 마법적 성장을 따라가지 못하는 벽에 부딪혔음에도, 여전히 엘릭서의 도움만 바랐다.
‘나는 8클래스를 이룬 마법사가 아니다.’
이안은 근본적인 문제를 잊고 있었다.
용언과 함께 시간을 거슬러 올라왔다.
전생의 이안 페이지가 현재의 생으로?
아니, 표현 그대로 어려져버렸다.
42세의 8클래스 마법사가 아닌.
18세의 6클래스 마법사로.
전생의 몸이 아니라는 거다.
‘아직 도달하지 못한 경지일 뿐.’
전생이란 다른 세상일 뿐이다.
어쩌면 허상일지도 모른다.
이안은 현재를 사는 자.
그것이 중요했다.
‘현재만의 문제는, 현재만의 기억으로.’
마나하트의 성장은 미지의 영역.
전생 따위 아무런 소용도 없었다.
극적으로 6클래스에 도달했을 때.
당시를 되짚어보는 이안이었다.
‘대초원에서, 거의 죽을 뻔 했었지.’
어마어마한 머릿수의 몬스터로부터 빠져나오면서, 이안은 그야말로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마나, 근본적인 체력, 정신력까지. 3일간 빈사상태에 빠질 정도로.
‘육신은 쓰면 쓸수록 성장하는 법.’
마나하트도 그런 걸까?
고려해 본 바가 있긴 있었다. 단지 비효율적이며 장담할 수 없는 방법이라 판단했을 뿐.
한데 지금에 와서 떠올려 보니, 불가능한 일도 아닌 것 같았다.
‘수련다운 수련.’
스스로를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수련!
대체 얼마 만에 떠올려본 단어일까?
오묘한 기분이 드는 이안이었다.
‘충분히 시도해 볼 만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불가능했다.
사방에 적이 수두룩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가능하다.
‘오히려 지금이니까.’
이안에게 주어진 기회일지도 모른다.
적은 희미하며, 아군은 뚜렷한 상황.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얼마간의 여유가 주어졌다.
“스파르토이 님.”
결심이 확고하게 굳어진 이안.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용아병을 불렀다.
(어찌…… 부르는가?)
이안의 부름에 용아병은 페어리 퀸과의 입씨름을 멈추고 응답했다. 권속의 힘이 적용된 이상, 대화를 거부할 권리조차 없었다.
“이번에 보니, 영혼이 깃든 육신은 고강한 힘을 가지셨더군요. 공격적인 마법도 소용이 없었고, 충격 자체를 아예 흡수하시는 것처럼 보였는데, 제 짐작이 맞습니까?”
(물론이다. 나는…… 그분들의 방패이자…… 그분들의 영역을 지키는 문지기로서…… 불굴의 육신과 정신을…… 가졌지.)
(불굴의 육신은 무슨! 번개 한 방이면 쪼개질 뼈다귀가.)
이안도, 용아병도 이제 페어리 퀸의 땍땍거림은 가볍게 무시한 채 대화를 이어나갔다.
“혹시 제 공격 마법도 버티실 수 있을까요?”
(그대의 수준이라면…… 크게 어렵지는 않을 것…… 같군.)
이안의 공격 마법은 어렵지 않다.
실로 자존심이 상하는 얘기였다.
그럼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한 번 붙어봤으니까.
“한 가지 더, 용아병께서도 고통을 느끼십니까?”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네.)
살짝 허세가 느껴지는 용아병의 어조.
확인해 보면 금방 알게 될 일이다.
“앞으로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이안이 두 눈을 반짝였다.
* * *
수련다운 수련으로 한계를 돌파해낸다.
간단하지만, 이안에게는 어려웠던 발상.
그 목표와 함께 바삐 움직였다.
이안도, 덩달아 상아탑까지도.
왜 상아탑까지 바빠졌느냐?
“휴가 냅니다.”
“네? 갑자기 무슨…….”
“지금부터 대초원 토벌이 시작되는 반 년 후까지, 탑주의 권한을 여기 계신 로난 님과 데커드 님께 임시적으로 일임하도록 하겠습니다. 상아탑의 고위마법사 중 가장 큰 어른이신 두 분이니, 문제될 일은 없을 겁니다. 아마도.”
이안이 휴가를 내버렸으니까.
그 사유는 더더욱 가관이었다.
이름하여 ‘폐관 수련’이란다.
전 상아탑주 허버트 레온이 흑마법에 집중하고자 휴가를 냈던 것처럼, 이안 역시 마나하트의 성장에 집중하기 위하여 휴가를 내버린 거다.
탑주로서의 업무조차 로난과 데커드라는 고참 마법사 둘에게 떠넘겨 버렸다.
“그럼.”
상아탑주로 등극한지 얼마나 되었다고, 돌연 휴가를 내버린 젊은 탑주 이안 페이지의 다음 행선지는 ‘황궁’이었다.
상아탑주에게는 달마다 한 번씩, 황제와 독대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지는데, 특별한 사유가 없다면 황제조차 거부할 수 없었다.
“새로운 상아탑주와의 첫 번째 독대로군. 그래, 어떠한 사안을 상의하고자 발걸음을 하셨소? 탑주.”
탑주의 권한을 화끈하게 사용해버린 이안, 그가 황제를 단독으로 알현했다.
상대가 현명하고 날카로운 존재이니만큼 여전히 긴장되는 자리, 그럼에도 예전과는 달랐다. 원하는 바를 확실하게 가져왔고, 거침없이 내뱉었다.
“감히 폐하께 부탁드릴 것이 있사옵니다.”
“부탁이라, 6년만이로군. 말씀해 보게.”
“땅이 필요하옵니다.”
“땅이라?”
“정확히는, 버려진 땅을 원하옵니다.
이안이 가장 먼저 물색한 것은 ‘적당한 장소’였다. 6클래스의 마법을 미친 듯이 쏟아내도 괜찮을 장소가 필요했으니까. 넓고 버려진 땅이라면 더할 나위 없으리라.
“자네 정도의 마법사가 마법을 펼친다면, 제아무리 버려진 땅이라 한들 남아나지 않을 것 같은데 말이지.”
“그 점은 염려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마법의 직접적인 타격까지는 대부분 흡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단지, 그 여파가 닿아도 문제없을 땅이 필요합니다.”
물론 그 타격을 흡수해낼 방법이 ‘용아병 스파르토이’란 사실은 얘기하지 않았다.
“으음.”
이안의 자초지종을 들어본 황제가 고민에 빠졌다.
“그러한 용도로 사용해도 괜찮을 땅, 마땅한 곳이 있긴 있군. 가깝기도 가깝지. 그리 멀지 않으니까. 본래는 마을이었는데, 이름이…… 십자로 마을이었던가?”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십자로’라는 이름의 마을이 존재했던 땅, 하나 지금에 이르러서는 화전 농업이 휩쓸고 간 자리인지라 풀 한 포기 자라지 않는 땅, 수도에서도 멀지 않은 서남쪽에 자리 잡은 땅.
이안은 그 척박한 땅을 황제로부터 하사받았다.
* * *
‘생각보다 수월하군.’
휴가를 내고부터 수련장으로 사용할만한 땅을 받아내기까지. 한번 마음먹고 행동에 나서자 정말이지 일사천리였다. 그만큼 의욕적이었으며, 설레기까지 했다.
‘진즉 이렇게 했어야 하는 건데.’
시간을 거슬러 올라온 이래, 이만큼 순수하게 의욕적이었던 순간이 있었던가? 없었던 것 같다. 항상 전생의 기억과 더불어 빠르고 편한 길, 상황의 계산만 반복하며 살아왔다.
극소수의 가치를 제외하고는 삶의 초점이 그렇게 맞춰져 있었다.
‘이런 것도 나쁘지 않아.’
이안의 행보는 좀처럼 멈추는 법을 몰랐다.
용아병 스파르토이의 영혼과 함께 하사받은 서남쪽의 땅, ‘옛 십자로 마을의 터’로 직행했다.
오늘부터 당장 시작하기 위함이었다. 마나하트의 성장에 박차를 가할 수련을.
(죽어버린…… 땅이로군.)
도착한 옛 십자로 마을의 터는 척박함으로 가득했다.
오죽하면 용아병조차 한마디씩 거들겠는가? 현재에 이르러선 중심 영토 내 화전 농업이 금지되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 폐해를 직격으로 받은 땅이었다.
(내가 무엇을…… 도와주면 되는가?)
“잠시만, 먼저 해둘 것이 있습니다.”
이안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탁 트여도 너무 탁 트였다. 물론 인적이 드문 땅이다.
그래도 조심해서 나쁠 건 없다.
‘적당히 가려야겠지.’
이안이 검은 흙으로 가득한 대지 위에 오른쪽 손바닥을 얹었다. 동시에 주문 하나를 외우기 시작했다.
“어스 월.”
그러자 바닥으로부터 흙의 장벽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 규모는 이안이 피에릭 영지에서 펼쳤던 얼음 장벽보다 높이만 낮을 뿐, 길이는 훨씬 길었는데, 심지어 일직선조차 아니었다.
“흐음…….”
흙의 장벽은 네모난 모양으로 펼쳐졌다.
장벽 안에 이안이 갇혀 버린 모양새였다.
“괜찮네.”
그야말로 사각의 수련장.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누구도 내부를 살필 수 없었다.
“이제 빈껍…… 아니, 육신을 좀 보여주시겠습니까?”
(나의 뼛조각은…… 가져왔는가?)
“물론입니다. 여기.”
용아병 스파르토이는 자신의 육신을 구성하는 조건으로 ‘용의 뼛조각’이 필요하다고 했다.
미리 알려줬으면 좋았겠으나, 뒤늦게 알려준 탓에 남부 관문의 조사 현장에서 몰래 찾아와야만 했다.
‘설마 용암 속에서도 멀쩡할 줄은.’
용아병의 뼈는 멀쩡했다. 굳어버린 용암 속에 본래의 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었으니까. 실로 엄청난 강도였다.
(이제 그 뼛조각을…… 심어주게.)
“그냥 심기만 하면 됩니까?”
(그렇…… 다네.)
용아병 스파르토이의 요청에 따라 뼛조각 하나를 흙바닥에 묻어준 이안. 그러자 용아병의 푸른빛 영혼 역시 그 바닥 속으로 이끌리듯 스며들어 갔다.
쿠구구구구……!
그렇게 얼마나 기다렸을까?
이안의 두 발 아래로부터 커다란 진동이 느껴졌다.
촤악!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낸 것은 창, 그리고 창을 쥔 손뼈였다.
용아병 스파르토이가 제 손처럼 들고 다녔던 창, 바로 그 육중한 창끝이 손뼈와 함께 지면 위를 꿰뚫었다.
촤악! 촥! 파스스스스…….
이어서 반대편 손이 나와 땅을 잡았고, 도마뱀 형상의 두개골 역시 튀어나왔다.
인간과 비슷한 몸뚱이 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생각보다 볼품은 없네.’
주섬주섬 기어 나오는 꼴이 영 볼썽사나웠다.
불굴의 육신과 정신이니, 그분들의 방패이자 수문장이니, 자랑스레 떠들던 것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대가 원했던…… 나의 육신이다.)
물론 흙바닥으로부터 기어 올라오는 모습만 그럴 뿐, 다 빠져나와 우뚝 선 용아병 스파르토이의 위용은 얼마 전과 같았다. 용암조차 무용지물인 육신, 아니 뼈가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여쭤보겠습니다.”
(무엇…… 인가.)
“정말 고통을 느끼시지 않으십니까?”
(고통이라는…… 것을 모른다고…… 했을 텐데.)
“정신적인 고통이라든지.”
(나의 의지는…… 불굴이다.)
“좋습니다.”
정말 고통을 느끼지 않느냐?
벌써 여러 번에 걸친 질문이다.
만약 느낀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으니까.
“지금부터.”
용아병으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이안.
그가 조심스럽게 말문을 이어갔다.
“스파르토이 님께서 해주실 일은 간단합니다.”
이안의 말문이 이어지면 이어질 수록.
“불굴의 육신과 정신, 그 자부심 넘치는 권능을 발휘하셔서.”
전신으로부터 방대한 마나가 요동쳤다.
“각종의 마법을 견뎌주십시오.”
(각종의 마법을…… 견뎌 달라?)
“만약 제가 탈진한다면.”
이안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그때부턴 곁을 지켜주시면 됩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랬다.
이러한 방식은 무식할 뿐이라고.
보다 효율적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전생의 기억을 토대로 한 수련이든.
엄청난 효과가 기대되는 엘릭서든.
환상적인 힘을 지닌 아티펙트든.
그러나, 이번만큼은 다르다.
전생에는 없었던, 이번 삶의 난관.
마나하트의 성장이라는 문제.
조금 색다르게 돌파해내리라.
“가족들이 찾으러 올 때까지.”
이번 생의 첫 번째 수련다운 수련.
그 시작의 축포는 응당 마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