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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76화 (76/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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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76화

    28. 드래고니안(3)

    불과 몇 분 전까지 크루드는 이렇게 생각했다.

    자신이야말로 주인공이 아닐까?

    일찍감치 세상을 떠난 부친의 길드. 그 길드를 물려받아 이만큼 키워냈다.

    투자하는 사업마다 성공가도에 올랐다.

    돈이 돈을 낳는다고, 현재에 이르러서는 대상인조차 부럽지 않을 부자로 거듭났다. 뿐일까? 믿음직한 수하들도 여럿 얻었다. 사내로 태어나 이 정도 성공이면 세상의 주인공이거나, 못해도 거물 중 하나는 된다고 여겼다. 대륙의 모든 경제, 정치, 문화를 쥐락펴락하는 극소수의 거물 말이다. 그런데.

    ‘상아…….’

    크루드가 항상 꿈꿔왔던 ‘거물’.

    그 거물 중에도 최고를 달리는 존재.

    최연소 고위마법사로 등극했던 자.

    황태자의 스승이라 불리는 마법사.

    상아탑의 새롭고도 젊은 주인.

    ‘……탑주?’

    이안 페이지라는 이름의 청년.

    바로 그 거물이 눈앞에 나타났다.

    도대체 왜 나타났는지는 모르겠다.

    까닭의 갈피조차 잡을 수 없었다.

    ’에이, 설마.’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럴 리가 없다. 그럴 리가 없어!

    크루드는 그렇게 빌고 또 빌었다.

    주변의 수하들도 마찬가지였다.

    ‘상아탑주가 왜 여기 있겠어?’

    상아탑주가 무슨 이유로 도둑 길드까지 찾아왔겠는가? 상아탑 산하의 멀쩡한 정보기관을 나두고. 개인적인 의뢰거리가 있어서? 그렇다 한들 직접 오지는 않았을 거다. 믿음직한 아랫것을 따로 보내겠지. 크루드는 확신할 수 있었다. 높으신 분들 한두 번 만나는 것도 아니고, 다 그런 식이다.

    ‘암, 그렇지. 닮은 놈일 거야. 분명 닮은…….’

    “상아탑에서 굴러먹다 왔습니다만.”

    “노허엉……?”

    뒷말을 입 밖으로 흘린 크루드.

    발음조차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혓바닥이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

    아니, 단순한 느낌이 아니다.

    혓바닥은 물론 머리부터 발끝까지.

    온몸뚱이가 빳빳하게 굳어버렸다.

    정말로 마비 증상이 일어난 거다.

    “으…… 어?”

    “머, 머미……!”

    비단 크루드뿐만이 아니었다.

    주변의 수하들 모두가 그랬다.

    이리 쓰러지고, 저리 널브러졌다.

    혀가 꼬이고, 숨 쉬기조차 힘들어졌다.

    ‘마법……?’

    마법이다.

    마법이 틀림없다.

    대상의 육신을 마비시키는 마법.

    그 이름이 ‘페럴라이즈’라고 했던가?

    “칼을 막 던지면 씁니까? 위험하게.”

    응접실의 누구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크루드가 그런 실수를 저지를 리도, 마법사인 이안이 맞아줄 리도 만무했으니까. 단지 입 밖으로 말할 수가 없었을 뿐.

    “놀라서 마법까지 썼네.”

    이안이 아무도 믿지 않을 소리와 함께 손짓하자, 크루드를 포함한 주변의 모두에게 걸렸던 페럴라이즈 주문이 일제히 풀어졌다. 굳어졌던 몸뚱이가 정상적으로 움직였고, 터질 듯 솟아났던 혈관 또한 안정을 되찾았다.

    “헉! 허어억! 허억!”

    도둑 길드의 수하들은 대부분 거친 숨을 몰아쉬거나, 마비되었던 육신의 기능부터 황급히 점검했다. 오직 한 명, 길드장 크루드만이 계속해서 이안의 눈치를 살필 뿐이었다. 어떻게든 이 최악의 상황에서 빠져나갈 기회가 필요했으니까.

    ‘어떻게, 이제 난 어떻게 해야…….’

    소위 잘나간다는 인사들을 자주 접해본 크루드다. 높은 벼슬아치나 귀족들, 손꼽히는 대상인들까지. 그렇기에 자신이 있었다. 어지간한 권위나 재산에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을 배짱이, 상황을 주도해낼 역량이. 한데 지금은 아니었다. 이건 좀 많이 아니었다.

    ‘탑주, 상아탑주라니……!’

    상아탑주가 무엇인가? 마법의 정점이다. 기분에 따라 도둑 길드 전체를 지워버릴 수 있는 무력의 소유자란 얘기다. 설령 황제한테 무례를 저질렀다 해도 지금처럼 본능적으로, 그리고 원초적으로 두렵지는 않았을 거다.

    “손님대접이 영.”

    젊은 상아탑주의 중얼거림.

    그 중얼거림이 크루드의 귓구멍에 박혔다.

    이제 무엇을 하든 행동으로 보여야만 했다.

    “어, 어, 어찌 상아탑의 주인께서 친히 발걸음을…….”

    “그렇지 않아도 후회 중입니다.”

    “후, 후회 말씀이십니까?”

    “이상한 창고 바닥에나 앉아 있고.”

    자리에서 일어난 이안이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읊조렸다. 불만족스러운 표정도 잊지 않았다. 비록 청결 마법의 영향으로 먼지 한 톨 묻어나지 않았다만.

    “그것이, 이, 일단 사죄부터 받아주십시오!”

    그 더러운 바닥에 길드장 크루드가 넙죽 엎드렸다. 수많은 이물질이 코와 입으로 빨려들어왔으나, 그 따위 것 아무래도 좋았다. 길드와 목숨을 보존할 수만 있다면.

    “길드 내부적으로 착오가 있었습니다! 미리 알았다면 결단코, 결단코 이런 무례는 없었을 겁니다! 부디 넓은 아량으로 이놈들의 사죄를 너그럽게 받아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러 말하며 이마를 쿵쿵 찧는 크루드.

    시늉조차 아니었다. 피가 배어나왔다.

    살아남고자 하는 열망이 느껴졌다.

    “일어나세요. 그러다 골병듭니다.”

    “제 머리가 박살 나는 한이 있더라도……!”

    “취향 아닙니다.”

    “시, 시정하겠습니다!”

    그 한마디에 벌떡 일어나는 크루드였다.

    피가 안면을 타고 내려와 목깃에 닿았다.

    정말 맹렬하게도 찧어댄 모양이었다.

    “저도 규칙을 지켜드리지 못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알아본 거라, 딱히 추천인이랄 게 없었거든요.”

    “물론이십니다. 급하신 일이 있으셨겠지요. 알아서 모시지 못한 저희들의 불찰입니다!”

    “하하…….”

    저자세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하지만 지금 크루드가 선보인 모습은 정말이지, 비굴함 그 자체였다. 한 톨 자존심마저 몽땅 내다버린 모습이 아니겠는가? 전생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그때도 이렇게까지 펄쩍 뛰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눈에 보이는 위치가 좋긴 좋네.’

    두 번의 삶을 살아가는 이안.

    이제야 세상을 알기 시작했다.

    “일단 제대로 된 객실로 모시겠습니다. 이런 누추한 곳에서 상아탑주님을 모실 수는…….”

    “아뇨, 시간도 없으니 여기서 진행하죠.”

    이안의 말에 크루드는 입을 다물었다.

    상아탑의 새로운 주인 이안 페이지.

    그가 어떤 인물인지 감이 왔으니까.

    ‘기준이 확실한 자다.’

    스스로 정해둔 선이 있을 거다.

    그 선만 넘지 않는다면 너그럽다.

    다만, 그 선을 넘어버리는 순간.

    ‘어떻게 변할지 장담할 수 없다.’

    크루드가 침을 꿀꺽 삼키는 그때.

    “아까도 말씀드렸듯, 정보를 사러 왔습니다.”

    이안이 계속해서 말문을 이어갔다 .

    “개인적인 일이라 상아탑의 인력을 투입시키기도 그렇고, 어찌할까 고민하던 참에 소문이 들리더군요. 실력과 비밀유지.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도둑 길드가 있다고.”

    “영광이고, 또 과찬이십니다.”

    “확실히 첫인상은 좀 실망스럽긴 했습니다만.”

    “…….”

    “실수는 누구나 하는 법이니까요.”

    “실망시켜드리지 않도록 최선을…….”

    “행동으로 보여주셨으면 하는데.”

    행동으로 보여 달라.

    본업에 충실하란 뜻이다.

    어렵지 않게 이해한 크루드.

    그가 몸을 잔뜩 숙이며 말했다.

    “하명만 해주십시오. 바로 내어드릴 수 있는 정보라면 내어드릴 것이고, 약간의 조사가 필요한 정보라면 빠른 시일 내에 답을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사력을 다하겠다는 크루드의 말에.

    “혹시 용의 교단이란 이름을 들어보셨습니까?”

    이안도 곧장 본론에 나섰다.

    “드래곤을 신처럼 숭배하는 일종의 종교집단으로 알고 있습니다. 물론 그 규모나 입지만 놓고 보자면 종교라 부르기도 애매하지요. 제국에는 아직 이렇다 할 사례가 없고, 대초원너머 로 공국에서도 서쪽 끝까지 가야…….”

    괜히 도둑 길드의 수장은 아닌 모양이다. 단지 아느냐 물었을 뿐인데 술술 나온다. 이안이 전생에 찾아갔던 그 시골구석 사기꾼집단, 그들의 위치가 튀어나오고 있었으니까.

    ‘하긴, 그때도 이놈들 정보 듣고 갔던 거니까.’

    즉, 새롭게 경신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용의 교단에 관한 도둑 길드의 정보가.

    일이년도 아니고, 무려 이십여 년 후까지.

    물론 그 경신이란 이런저런 활동을 통해 조금씩 이루어지는 것. 이번 생에는 보다 집중적인 조사를 의뢰해볼 차례였다. 드래고니안의 행방을 쫒기 위해서.

    “그 용의 교단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하오시면, 상세한 조사를 원하시는 건지요?”

    상황이 안정적으로 돌아가자 본연의 빠른 눈치를 되찾은 크루드였다. 현재의 정보 수준보다 상세한 조사, 이안이 원하는 바를 정확하게 짚었다.

    “네. 사소한 정보부터 허무맹랑한 정보까지, 토씨 하나 빠트리지 말고 전부 조사해주시길 원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드리지만, 아무리 허무맹랑한 정보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허무맹랑한 정보를 두 번이나 강조하는 이안이었다. 크루드는 그저 정보의 경중을 나누지 말란 소리쯤으로 여겼지만, 그 정도만 해도 문제될 것은 없었다.

    “아, 그리고 의뢰비는…….”

    “의뢰비는 받지 않겠습니다. 물론 탑주께 의뢰비 정도야 푼돈이심을 압니다. 단지 무례를 저지른 이놈과 길드 전체의 자그마한 성의라고 여겨주십시오.”

    크루드의 목소리가 막힘없이 흘러나왔다.

    아까부터 준비했던 의뢰비 관련 멘트였다.

    이 정도면 충분한 대처라고 여기는 그 순간.

    “그럼 이거라도 받으시죠.”

    “……예?”

    이안이 아까부터 쥐고 있던 종이뭉치의 절반을 뚝 떼어 크루드에게 쥐어줬다. 그것들은 모두 몬스터 투기장에 돈을 걸었던 배당표였다. 그 두께만 봐도 상당한 금액이 걸렸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건……?”

    “의뢰비는 그 배당금으로 대신 치르겠습니다. 아마 꽤 나올 거예요. 창 든 얼음트롤, 칼라스였나? 배당률이 높았거든요.”

    잠시 후, 몬스터 투기장을 담당하는 진행자의 목소리가 음성 증폭 수정구를 통해 사방으로 퍼졌다. 창고의 조악한 나무 벽으로는 그 소리까지 막아낼 수 없었다.

    -놀라운 반전입니다! 연전연패로 은퇴를 눈앞에 뒀던 얼음트롤 부족의 백전노장! 하얀 머리 칼라스가 불굴의 오크, 피넛을 상대로 신승을 거두다니요!

    동시에 어안이 벙벙해진 크루드였다.

    하얀 머리 칼라스라면 그도 잘 안다.

    말 그대로 투기장의 ‘물어뜯기는 개’.

    도박판 참여를 유도하는 ‘호객 도구’다.

    그 늙다리 몬스터가 승리를 거두다니?

    승률 백퍼센트의 오크, 피넛을 상대로?

    “무, 무슨…….”

    혼란스러움도 잠시.

    까닭을 유추해볼 수 있었다.

    트롤에게 돈을 건 자가 누구던가?

    마법사다. 6클래스의 상아탑주다.

    ‘마법……?’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크루드는 판단할 수 있었다. 마법사가 관여된 경기다. 평소였다면 경기를 멈추고 조사하는 것이 원칙, 하나 방법이 없었다. 영향을 준 마법사는 또 누구던가? 그것도 6클래스의 상아탑주다.

    “가, 감사합니다. 역시 탁월한 안목이십니다.”

    결국 방법은 하나였다.

    진심으로 감사한 척 받을 수밖에.

    이안이 무슨 짓을 했든, 무관하든.

    크루드에게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상아탑주를 상대로 추궁할 용기도.

    마법이 관여되었음을 밝힐 수단도.

    어떤 것도 해볼 수가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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