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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68화 (68/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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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68화

    24. 검은 장막(2)

    ‘여긴……?’

    대각선의 통로를 뚫고 나온 바깥.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그야말로 허허벌판의 ‘평야’였다.

    풀밖에 보이지 않는 널따란 평야.

    사방으로 낭떠러지가 존재했다.

    땅이 솟아나 있기라도 한 걸까?

    ‘아니, 잠깐만.’

    솟아난 것이 아니었다.

    애당초 하늘 위에 떠 있는 거다.

    땅덩어리가 ‘부유’하고 있단 얘기다.

    지척의 구름뭉치가 확신을 줬다.

    듣도 보도 못한 ‘부유의 땅’.

    도대체 여긴 어디란 말인가?

    ‘사람?‘

    당혹감을 참아낸 이안.

    그가 저 멀리 누군가를 발견했다.

    낭떠러지 끝에 걸터앉아 있는 남자.

    일단 겉보기로는 사람인 것 같았다.

    참 아슬아슬하게도 앉아 있었다.

    ‘뭐지?’

    이안은 다소 혼란스러움이 느껴졌다. 무언가 있을 것 같다는 느낌과 호기심 두 가지로 여기까지 왔다. 심지어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기이한 것들을 찾았다. 구름과 닿을 정도로 높이 부유하는 평야,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까지.

    ‘확실히 수상한데.’

    머리는 수상함을 떠올렸다.

    그것이 정상적인 반응이니까.

    한데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기이하리만큼 편안하게 느껴졌다.

    눈앞에 보이는 모든 풍경들이.

    심지어 저 사람까지도.

    ‘환술인가?’

    그럴 가능성이 컸다. 아니, 확실했다.

    문제는 확신이 있음에도 환술을 몰아낼 수가 없다는 거다. 어지간하면 환술에 당하지 않는 이안이다. 최소한 환술임을 자각함과 동시에 벗어날 수 있다. 그런데.

    ‘느껴지지 않는다.’

    환술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실체가 있어야 몰아낼 수도 있거늘.

    이런 경우, 까닭은 딱 두 가지다.

    처음부터 환술의 영향이 아니거나.

    혹은.

    ‘술자가 나보다 훨씬 강하거나.’

    이안은 6클래스 마법사다.

    8클래스의 지식까지 갖고 있다.

    적어도 인간 중에는 없을 거다.

    이안보다 강한 마법적 역량을 지닌 자가.

    ‘환술의 영향이 맞다면.’

    그렇다면 답은 하나다. 여전히 낭떠러지에 걸터앉아 등만 보이는 저 사람. 아니, ‘사람처럼 보이는 존재’. 저 남자가 바로 환술의 술자임이 분명할 터.

    ‘최소한으로 잡아도 전생의 나와 비슷해.’

    전생의 이안, 즉 8클래스 마법사와 동급이거나 혹은 그 이상일 가능성도 무궁무진했다. 그래야 현재의 이안을 지금처럼 완벽하게 기만할 수 있으니까.

    ‘만약 내게 적의를 갖고 있다면…….’

    도망칠 곳은 어디에도 없으리라.

    목숨을 내건 도박이 필요하겠지.

    저 존재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는.

    꿀꺽!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는 이안. 전생과 현생을 통틀어 흔치 않은 생리현상의 작용이었다. 뭣 모르던 시절까지 제외하자면, 아마 최초일지도 모르겠다.

    “말씀 좀 묻겠습니다.”

    이안이 그 존재가 걸터앉은 쪽으로 천천히 접근하며 말했다. 물론 어느 정도 거리를 뒀다. 목소리에 마나를 녹여 증폭시켰기에 충분히 닿을 정도였다.

    “여긴 어딥니까? 당신은 누구고.”

    적인지 아군인지.

    혹은 중립의 존재인지.

    지금 무엇을 원하고 있는지.

    여부부터 확인해 둬야만 했다.

    그래야 뭐든 할 수 있으니까.

    아니, 그보다도.

    ‘궁금하다.’

    이안은 자부할 수 있었다.

    전생의 자신은 독보적인 존재다.

    지금 또한 엄청난 힘을 보유했다.

    그러한 자신보다 강력한 존재.

    조금도 아닌, 아늑히 먼 존재.

    도대체 그 정체가 뭘까?

    결코 인간은 아닐 터.

    ‘드래곤?’

    가장 유력한 후보다.

    용언서부터 권속의 힘까지.

    수많은 연결고리가 있지 않았던가?

    ‘최초의 마법사?’

    이번 생에서 이안이 선택한 일종의 ‘콘셉트’.

    이쪽도 가능성은 차고 넘쳤다.

    실존했음이 확실한 존재니까.

    ‘신?’

    신을 믿지 않는 이안이다.

    그럼에도 후보 중 하나로 떠올렸다.

    용이나 최초의 마법사가 아니라면.

    답은 그보다 위에 있지 않겠는가?

    “…….”

    남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여전히 등만 보인 채 걸터앉아 있을 뿐이었다. 그 모습이 하도 평온해보인 탓일까? 몇몇 외형적 특징들이 눈에 들어왔다.

    ‘머리색이 나랑 똑같네.’

    길게 늘어진 밝은 갈색의 머리칼.

    귀하진 않아도 흔치 않은 색이다.

    아주 허름한 로브까지 입고 있었다.

    아니, 그냥 거적때기인 것 같다.

    “다시 한 번 묻겠…….”

    [룸바츠.]

    순간 멈칫할 수밖에 없는 이안이었다.

    그 존재로부터 말소리가 들려왔으니까.

    ‘용언……?’

    목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었다.

    귀로 듣는 소리 역시 아니었다.

    마나와 정신이 공명하는 소리.

    용언 특유의 형태가 분명했다.

    [스펠기아.]

    그 존재의 말소리가 계속 이어졌다.

    아무리 들어도 용언과 흡사한 언어.

    다만, 용언 마법은 아닌 것 같았다.

    예컨대 용들의 ‘생활 용어’라고 할까?

    [라 - 드라코쉬.]

    고작 세 단어로 이루어진 문장.

    그럼에도 이안은 해석할 수 없었다.

    마지막 문장 ’라 - 드라코쉬’만 뺀다면 말이다.

    ‘드라코쉬, 드래곤. 라 - 드라코쉬, 드래곤을.’

    문제는 앞의 두 단어였다.

    룸바츠, 그리고 스펠기아.

    도대체 무슨 뜻일까?

    ‘드래곤을’ 어찌 하라고?

    ‘룸바츠 스펠기아 라 - 드라코쉬.’

    역시나 용언 마법은 아니었다.

    보다 일상적인 용의 언어가 확실했다.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는 것 같았다.

    “제가 용언을 조금 알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잘 아는 편도 아닙니다. 혹시 가능하시다면 다른 언어로…….”

    [룸바츠, 스펠기아, 라 - 드라코쉬.]

    용의 언어를 쓰는 존재가 다시 한 번 강조하듯 읊조렸다. 룸바츠, 스펠기아, 라 - 드라코쉬. 이안이 그 말을 속으로 되새겼다. 자신도 모르게.

    “……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세상이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하늘도, 구름도, 부유의 땅도.

    밝은 갈색머리를 가진 남자도.

    이안의 손과 발, 몸뚱이까지.

    흡사 허상의 공간이 사라지듯.

    ‘도대체…….’

    동시에 이안의 두 눈이 스르르 감겼다.

    저항은커녕 잠깐 버티기조차 힘들었다.

    눈을 감으면서도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이 정도의 무력감이라니.

    다른 누구도 아닌, 이안 자신이.

    대체 얼마나 강하기에?

    저 존재가?

    ‘누구…….’

    마지막까지도 정체가 궁금했다.

    드래곤의 언어를 구사하는 존재.

    역시 드래곤 중 하나일까?

    ‘……?’

    마지막 의식이 끊어지기 직전.

    그 존재가 이안을 돌아봤다.

    잔주름 가득한 중년의 얼굴.

    덕분에 마지막 감상이 떠올랐다.

    이 상황과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못생겼…….’

    절로 떠오를 수밖에 없었던 감상.

    이윽고 이안의 의식이 끊어져 버렸다.

    어둠으로 가득한 무의식 속 세계.

    그 어둠 속을 얼마나 헤맸을까?

    (뭐야?)

    아주 익숙한 목소리.

    페어리 퀸의 목소리였다.

    (이건 또 왜 이러고 있어?)

    그 목소리가 이안의 머리를 쩌렁쩌렁 울렸다.

    (인간! 설마 죽은 게야?)

    이안의 눈이 스르르 떠졌다.

    떠짐과 동시에 주변부터 살폈다.

    더 이상 부유의 평야가 아니었다.

    지하실, 포탈 너머 지하실이 보였다.

    “으윽!”

    이안이 제 이마를 감싸 쥐었다.

    엄청난 두통이 엄습해 왔으니까.

    ‘꿈…… 인가?’

    아니, 아무리 생각해도 꿈은 아닌 것 같았다. 꿈 따위가 그토록 생생할 수 있을까? 그것은 명백한 현실이며 마법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머리통이 지끈거릴 까닭도 없으리라.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게냐? 네 어미란 것은 무슨 일이 생겼느냐며 계속 두들기지, 네놈은 도통 나오지를 않지. 하도 짜증이 나 와봤더니만!)

    이안은 침실에서 포탈을 열었다.

    문은 당연히 잠갔고, 열쇠도 없다.

    오직 페어리 퀸만이 방 안에 있었다.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한 거다.

    “……얼마나 여기 있었습니까? 제가?”

    (인간의 기준으로 반나절은 훨씬 지났느니라.)

    놀랄 수밖에 없는 이안이었다.

    한두 시간도 아니고 반나절이라니?

    얼마 지나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거늘.

    (됐고, 어서 밖으로 나가보아라. 네 어미가 문을 부수고 들어올 지도 모르니까.)

    이안은 페어리 퀸의 말이 들리지 않았다. 대신 라이트 주문으로 하여금 밝아진 주변부터 살폈다. 꿈이 아니라면, 뚫고 지나간 통로가 남아 있겠지.

    ‘없어?’

    한데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벽을 뚫고 지나갔던 통로가.

    통로는커녕 흔적조차 없었다.

    도대체 어찌된 영문이란 말인가?

    ‘그럴 리가.’

    이안이 차근차근 상황부터 가늠했다.

    벽을 부수고자 마셨던 하프 엘릭서.

    그 작은 약병이 품속에 남아 있었다.

    가득 담긴 모습 그대로였다.

    ‘정말…….’

    마찬가지로 착용했던 아티펙트들 또한 탑주의 진열대 위에 놓여 있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누구의 손도 타지 않았던 것처럼 가지런히.

    ‘정말 꿈이었다고?’

    단지 ‘생생하다’라는 표현.

    그 표현으로 치부할 수 없는 꿈이다.

    아무래도 확인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내 말이 들리지 않느냐?)

    “물러나세요.”

    (뭐?)

    쾅!

    이안이 다시금 벽을 뚫기 시작했다.

    뚫는 방향도, 마법도 똑같았다.

    단지 빨라졌을 뿐이었다.

    뚫고 나가는 속도가.

    쾅! 콰광! 쾅!

    파스스스스…….

    체감되는 깊이 또한 비슷했다. 이쯤이겠거니 하자마자 바깥의 차가운 공기부터 들어왔으니까. 하늘도 보였다. 다른 점이 있다면 어둡다는 거다. 벌써 반나절이 지났으니까.

    쾅!

    마무리로 통로의 출구를 넓혀준 이안이 후다닥 바깥으로 뛰쳐나왔다. 예상대로라면 평야가 보여야 한다. 사방으로 펼쳐진 낭떠러지와 구름이 잔뜩 깔린 ‘부유의 땅’ 말이다.

    “분명히……!”

    하나 이안이 예상했던 풍경.

    낭떠러지, 구름, 정체불명의 존재.

    그 풍경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다.

    이곳은 단지 어두운 숲속에 불과했다.

    저 멀리 커다란 성벽만 내려다보였다.

    제국의 수도, 그린리버디움의 성벽이었다.

    황성 밖 야산의 중턱쯤인 것 같았다.

    (갑자기 무슨 짓거리야? 미친 게냐?)

    따라온 페어리가 버럭 소리쳤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절해 있었던 놈이다. 그런 놈이 깨어나자마자 벽부터 부수기 시작했다. 미친 것처럼 보일 수밖에 없으리라.

    “…….”

    이안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대신 아까의 기억을 되새겼다.

    정말 꿈일지도 모르는 기억.

    그곳의 존재가 했던 용언을.

    ‘룸바츠, 스펠기아, 라 - 드라코쉬.’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아니, 놀라운 사실이 느껴졌다고 표현할 수 있었다. 아까만 해도 알아듣지 못했던 용언, 그 뜻을 지금은 해석할 수 있을 것 같았으니까. 정확히 무슨 뜻인지, 그 존재가 자신에게 무슨 말을 하고자 했던 것인지 알겠다는 얘기다.

    ‘룸바츠.’

    절대.

    ‘스펠기아.’

    믿지 마라.

    ’라 - 드라코쉬.’

    드래곤을.

    ‘룸바츠 스펠기아 라 - 드라코쉬.’

    절대 믿지 마라. 드래곤을.

    * * *

    사락!

    저택으로 돌아온 이안. 그는 가족들부터 안심시킨 뒤, 삼 일째 틀어박혀 용언서만 들춰보고 있었다. 모든 업무와 계획들을 일시적으로 중단시켰다. 그래야만 했다.

    사락! 사락!

    용언서를 넘기면 넘길수록 확신할 수 있었다. 부유의 땅, 낯선 존재, 그것들은 결코 꿈이 아니라는 것을.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이전보다 확연하게 넓어졌으니까. 용언이란 미지의 문자를 읽어냄은 물론, 그 뜻을 풀이하는 눈과 지식이.

    ‘여전히 3할도 이해할 순 없지만.’

    얼마나 많은 용언을 이해할 수 있느냐.

    그것은 지금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아무런 대가도 치르지 않았다.

    당장 느끼기로는 분명 그랬다.

    이 이상의 연구조차 없었다.

    마지막 연구가 몇 달 전이다.

    한데 이러한 변화가 생겼다.

    그 사실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도대체 왜?’

    아무리 고민해봐야 답은 없었다.

    이안의 상식을 넘어선 문제다.

    그 존재도, 부유의 땅도, 용언도.

    단, 한 가지 공통점이 존재했다.

    ‘드래곤.’

    용언서부터 권속의 힘.

    그리고 삼일 전 겪은 일까지.

    모두 드래곤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런데 믿지 말라고? 드래곤을?’

    ‘용언‘이라는 드래곤의 언어를 얻었다. ‘권속‘이라는 드래곤의 권능조차 얻었다. 뿐이랴? 드래곤으로 추정되는 존재까지 만났다. 한데, 그 드래곤을 믿지 말라니?

    “흐음…….”

    잠시간 생각에 잠겼던 이안.

    그가 탁, 하고 용언서를 덮었다.

    무거운 책이 아니겠는가?

    가볍게 덮어도 요란했다.

    ‘나중에 생각하자. 나중에.’

    아무리 모든 업무와 계획을 중단시켰다지만, 오늘만큼은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상아탑주 허버트 레온의 공개적인 처형식에 참관해야만 했다. 썩 내키지는 않았지만, 황제까지 참관하는 처형식이므로 빠질 수가 없었다.

    ‘아마 출발선이 되겠지.’

    이안은 지난 5년간 수많은 변화를 만들어왔다. 여전히 살아계신 어머니부터 아군이 된 더글라스, 빠른 고위마법사 등극에 황태자의 입지 변화, 올리버의 성장 등등. 되도록 예정된 흐름을 타는 편이 좋다고 생각했지만, 살다보니 그럴 수가 없었다.

    ‘탑주의 처형이.’

    하나 모든 변화를 합쳐도 오늘만큼 크지는 않을 거다. 이안의 판단으로는 그랬다. 5황자 라그나르의 가장 큰 아군이자 일국의 상아탑주가 처형된다. 전생에는 오래토록 살아남아 위대한 상아탑주로 기록된 허버트 레온이, 전혀 다른 시점에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사라진다는 얘기다.

    ‘진정한 시작.’

    그 끝에 선 이안이 로브를 가다듬었다.

    걸터둔 스태프를 잡고, 의자에서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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