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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58화
21. 뜻밖의 수확(1)
(멍청한 소리를 하는구나. 그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존재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단다. 네놈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수천 번을 죽었다 깨어나도 불가능해.)
마치 선고하듯 읊조리는 페어리 퀸.
그녀의 목소리가 확신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이를 어쩌랴.
‘이미 읽고, 시간까지 거슬러 올라왔는데.’
고작 인간으로 태어나 읽어버린 자가 있다.
그뿐일까? 세월까지 거슬러 올라왔다
일년도, 십년도 아닌 무려 삼십년씩이나.
‘굳이 얘기할 필요는 없겠지.’
그리 판단한 이안이 보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책 얘기는 나중에 하시고 일단 확인부터 하시죠. 말씀드렸던 보석입니다. 이 중 7할을 내어드리겠습니다. 괜찮은 조건이라고 봅니다만.”
이 수많은 보석 중 7할을 내어주겠다? 보금자리의 모든 페어리들이 최고급 보석을 한두 개씩 끼고 살아도 넘치는 양이었다. 앞으로 태어날 후손들까지 넉넉하게 누릴 수 있으리라.
(아아…….)
막상 보석을 본 페어리 퀸의 눈동자가 멍해져 버렸다. 그녀 또한 페어리다. 본능을 마음대로 억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울 터.
(추, 충분하구나. 네 말, 믿어주도록 하마.)
붉어졌던 얼굴을 지워 버린 페어리 퀸.
그녀가 공중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았다.
약간의 마나도 뿜어져 나왔다.
“그런 것도 가능하셨군요.”
(내가 못하는 게 어디 있겠느냐?)
그녀는 더 이상 한손으로 틀어쥘 수 있는 페어리가 아니었다. 완벽한 인간의 모습으로, 매혹적인 숙녀의 모습으로 변해버렸으니까. 연분홍빛 날개 역시 보이지 않았다. 로브처럼 변해 온몸을 휘감고 있었다.
(자, 받아라.)
인간의 모습으로 변한 페어리 퀸이 자루 하나를 던졌다. 이안의 지팡이처럼 광택 하나 없는 검은색 자루, 바로 ‘아공간 주머니’였다.
(네가 원했던 수단이니라. 거기에 보석을 담아. 아무리 담아도 한계가 없을 테니까.)
이안에게 일을 떠맡긴 페어리 퀸.
그녀가 다시금 단상 위를 어루만졌다.
애틋함이 느껴지는 표정과 함께.
단순한 권속 이상의 감정이었다.
(흐으음.)
이안이 보석을 모두 담았을 때쯤.
그녀 또한 결심한 듯 이안을 바라봤다.
(조건을 하나 더 달겠다.)
“조건?”
(여기 있었던 책, 내게 다오. 하면 일족의 알을 내어주도록 하마.)
“약속이 틀리지 않습니까?”
(약속이라? 내가 네 녀석과 약속한 적은 없을 텐데? 보석부터 확인하겠다고 했지. 어울리지도 않게 아둔한 척을 하는구나. 인간.)
페어리 퀸의 말이 사실이긴 했다. 물론 그렇다 한들 용언서까지 내어줄 마음은 없었다. 이안의 경지를 보다 높은 곳으로 안내할 실마리가 아니던가?
“거절합니다.”
(이해할 수 없구나. 인간에게는 그저 한 글자도 읽을 수 없는 괴서나 다를 바 없다. 갖고 있어봐야 죽기 전까지 먼지만 쌓일 책이지. 거절할 이유가 전혀 없을 텐데?)
“여왕께서는 그 책을 읽으실 수 있습니까?”
(아니, 나 또한 불가능하다.)
“한데 어째서 원하시는 겁니까?”
(그 책을 읽을 수 있는 존재, 그분들을 안다.)
“누구죠? 그 존재가.”
이안의 날카로운 질문.
페어리 퀸은 태연히 대답했다.
(거기까진 말해줄 수 없다. 미리 말하건대, 네놈이 수천 번을 캐물어도 마찬가지니라. 내 의지와 관계없는 일이지.)
“말하고 싶어도 말해줄 수 없다는 뜻입니까?”
(다시 똘똘해졌구나.)
전생에는 듣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
저리 말하는데 계속 물을 수도 없으리라.
“그래도 책은 못 드립니다.”
(하, 도대체 내 말을…….)
“정 원하신다면 제가 죽은 뒤에 가져가시죠.”
(불가하다. 단명할 족속임은 잘 알고 있다만, 그조차도 너무 멀다. 책에 무슨 변고가 일어날지 모르는 일이지. 네가 죽은 뒤 돌려보낼 페어리와는 다른 얘기니라.)
생각보다 완고한 페어리 퀸의 의지.
정말 용언서를 갖고 싶은 모양인데.
“여왕께선 책의 주인을 알고 있으니 가져가겠다는 말씀만 하셨습니다. 더 자세한 이유는 말해줄 수 없다고도 하셨죠.”
(충분하지 않느냐?)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 주인, 저도 알고 있으니까요.”
(……뭐?)
“드래곤.”
드래곤이란 말에 흠칫 놀라는 그녀.
아름다운 청록색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드래곤의 언어가 아닙니까?”
(그, 그걸 네가 어떻게……?)
“짐작만 했을 뿐입니다. 반응을 보니 맞는 것 같네요.”
(이놈! 감히 나를……!)
“여왕께서 지금보다 합당한 이유를 말씀해 주시지 않는다면, 책은 넘겨드릴 수 없습니다.”
물론 합당한 이유를 말해도 마찬가지다.
단지 듣고 싶었다. 페어리 퀸과 드래곤의 관계를.
(자, 잠시만 기다려 보아라. 잠시만!)
이안의 속내와는 별개로, 더 나은 이유를 말해달란 요청은 합당했다. 더군다나 이안은 힘으로 찍어 누르기조차 힘든 존재, 결국 할 수 있는 말을 정리하기 시작한 그녀였다.
(……조금만 더 얘기해 주도록 하지.)
“듣고 있습니다.”
회심의 미소를 속으로 감춘 이안.
도도하지만 허점도 많은 존재다.
페어리 퀸 말이다.
(네 말처럼 그분들께서는 드래곤이란 존재가 맞다. 그 책에 적힌 글자들 또한 그분들의 언어지. 오직 그분들만 읽을 수 있는 고귀한 언어, 그것이 바로 용언이다.)
“지금껏 말씀하신 부분에 드래곤만 넣으면 똑같은 소리 아닙니까? 어영부영 넘어가실 생각이라면 그만 두시죠.”
(대체 나를 무엇으로 보는 게냐? 끝까지 들어라. 끝까지! 누가 단명 하는 족속 아니랄까봐!)
내심 찔렸는지 발끈하는 페어리 퀸이었다.
가능하다면 얼렁뚱땅 넘어가볼 요량이었으리라.
(나는 그분들의 권속이었느니라. 어느 날, 그분들께서 자취를 감추신 후부터는 그분들의 둥지였던 곳에 보금자리를 만들었지. 돌아오실 때까지 기다릴 수 있도록. 그로부터 영겁의 세월이 흘렀으나, 언젠가는 반드시 돌아오실 거라고 믿는다.)
이안 역시 처음 듣는 사실이었으나, 어느 정도 예상했던 바이기도 했다. 페어리 퀸이 드래곤과 관계가 있다면 응당 수하가 아니었겠는가? 웃전일 리는 없으니까.
(용언서는 바로 그분의, 혹은 그분과 같은 드래곤 일족의 물건이다. 본래 있어야 할 자리, 그분들의 둥지였던 곳에 되돌려놓겠다는 뜻이니 더 이상 토를 달지 말도록.)
어느 때보다 완고한 페어리 퀸의 어조.
이 이상으로 해줄 말이 없음을 나타내는 표시였다.
‘이유가 확실하긴 한데.’
주인의 자리에 되돌려 놓겠다.
이처럼 확실한 이유가 어디 있을까?
이대로라면 주는 것이 도리일 판이다.
‘나도 조금은 더 보여줘야겠군.’
이안 역시 감추고 있던 몇 가지를 보여줄 때가 되었다. 아무래도 이 거래, 생각 이상의 결과가 따라올 것 같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잘 알겠습니다.”
(알았으면 당장 가서 그 책이나 가져오너라!)
또다시 콧대가 하늘로 승천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천년 가까이 묵었을 페어리의 여왕이다. 한데 고작 인간에게 밑천까지 털렸다.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는가?
“죄송하지만, 한 가지 더 여쭙겠습니다.”
(이놈이 정녕……!)
“중요한 문제니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후우, 알겠다. 어디 떠들어보아라.)
“만약 그 책을 조금이나마 읊조릴 수 있는 대단한 존재가 나타났다 가정해봅시다. 하면 여왕님과 그 대단한 존재, 둘 중 누구한테 용언서의 소유권이 있다고 보십니까?”
다소 갑작스런 이안의 물음.
콧방귀를 뀌는 페어리 퀸이었다.
(흥! 질문이라고 하느냐? 그 존재께 드려야지. 분명 그분들이실 테니까.)
“그 존재가 드래곤이 아니라면?”
(답답하도다. 몇 번을 말해야 알아듣느냐?)
“어디까지나 가정 아니겠습니까?”
(그럼 그 또한 그분들께서 계획하신 일이겠지.)
‘그분’들을 향한 여왕의 믿음은 확고했다.
어찌 되었든 그분들이 계획하신 일이라.
처음으로 크게 미소 짓는 이안이었다.
“그렇군요.”
(의미 없는 질문은 그쯤 하는 게 어떻겠느냐? 슬슬 화가 나는구나. 똑똑한 놈인 줄 알았더니만, 역시 인간은…….)
“답례로 흥미로운 거 하나 보여드리겠습니다.”
(뭐?)
짜증이 잔뜩 섞인 페어리 퀸의 대꾸.
하나 그 짜증은 곧 당혹스러움으로 번졌다.
[아타르.]
아니, 당혹스러움 그 이상이었다.
오죽하면 귀를 의심해야 했으니까.
여타 종족보다 수백 배 우수한 자신의 귀를.
[하카.]
아타르 하카.
그 마나의 ‘용언‘이 완성되자.
화르르륵!
붉음을 넘어서 검붉은색의 불꽃.
그 강렬하디 강렬한 불꽃이 피어올랐다.
이안의 쭉 뻗은 손바닥 위로부터.
“윽……!”
그와 동시에 휘청거리는 이안의 몸뚱이.
극심한 마나소모가 불러온 후유증이었다.
(너, 너 지금 무슨……?)
“아실 텐데요. 제가 지금 뭘 한 건지.”
그래, 알고 있다.
그녀는 드래곤의 권속이다.
지금 이 순간도 마찬가지다.
‘용언 마법’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네가 어떻게……?)
“어쩌다 보니까.”
(말도 안 된다. 어찌 인간이……!)
그야말로 충격에 휩싸인 페어리 퀸.
알 수 있다. 이안은 결코 드래곤이 아니다. 애당초 드래곤이었다면 처음 만난 그 순간부터 벌벌 떨었을 거다. 그녀의 몸속에 내재된 ‘권속의 힘‘이 발동했을 테니까.
(너는 분명 드래곤이 아닐 지언데?)
“그럴 리가요. 저는 분명 인간입니다. 여왕께서 믿고 계신 상식이 틀린 거겠죠. 증거는 확실하지 않습니까?”
(…….)
“그 용언, 읽을 수도 있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계속된 연구로부터 얻게 된 한마디 용언.
붉은 용 일족의 기초적인 마법으로 추정되는 용언이었다. 그 어떤 화염보다 강렬한 불꽃을 일으킬 수 있지만, 감당키 힘든 마나소모가 문제였다.
‘용언이 사라지지도 않았고.’
더군다나 이 용언은 시간을 되돌렸던 황금 용 일족의 언어, 그 용언서에서 자취를 감춰 버린 용언과 달랐다. 이미 한번 사용했음에도 언어 자체가 사라지지 않았다.
“물론 주인이 나타난다면 돌려드려야겠죠. 하지만 여왕께서도 인정하신 바, 현 시점에서 용언서의 소유권은…….”
(너다.)
순순히 인정하는 페어리 퀸이었다.
(더 이상 용언서를 요구하지 않겠다. 네 말대로 진정한 주인께서 나타나시기 전까지, 혹은 네 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그 책은 너의 소유다. 인간.)
그야말로 순식간에 차분해져 버린 그녀.
심경의 변화라도 생긴 모양일까.
“감사합니다.”
(대신에…….)
무언가를 더 요구하고자 했던 페어리 퀸.
그녀의 말이 이어지려는 바로 그때였다.
쿠구궁!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한 굉음.
비단 굉음뿐만이 아니었다.
쿠구구구구……!
무거운 돌이 한꺼번에 움직이는 소리.
그 원인은 금방 알아챌 수 있었다.
‘길이 더 있었다고?’
끝인 줄만 알았던 옛 상아탑의 지하 최하층. 그 한쪽으로 새로운 통로가 나타나기 시작한 거다. 매우 깊숙한 통로였는데, 가로막은 돌문만 수십 개가 넘었다. 열리고, 열리고, 또 열리고 나서야 비로소 그 끝을 가늠해 볼 수 있었으니까.
‘설마 용언에 반응한 건가?’
그럴 가능성이 무엇보다 컸다.
용언 말고는 마땅한 이유가 없었다.
용언서를 발견했던 장소 아니던가?
‘뜻밖의 수확이군.’
정말 수확일지는 모르겠다만.
예감이 나쁘지 않은 이안이었다.
저 통로 너머로 있을 것 같았으니까.
결코 이안에게 해가 되지 않을 무언가가…….
“……?”
그 예감의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이었다.
쿵! 쿵!
들려온다.
통로 너머 깊숙한 곳으로부터.
‘발소리?’
그렇다기에는 다소 요란한 소리였다.
하나 저 일정함으로 볼 때 확실했다.
누군가의 발소리, 아니.
‘이쪽으로 달려오는 소리.’
쿵! 쿵! 쿵!
육중한 뜀박질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단언컨대 인간의 보폭은 아니었다.
그보다 훨씬 넓다.
(도, 도대체 뭐가 다가오는 거냐?)
“……저도 모르겠습니다.”
이안이 지팡이를 힘껏 움켜잡았다. 페어리 퀸 역시 본연의 자그마한 모습으로 돌아왔다. 전투에는 그 모습이 가장 유리하다.
쿵! 쿵! 쿵! 쿵!
이윽고 발소리의 정체가 두 사람, 아니 두 마법사의 시야에 들어왔다. 그 육중한 존재는 자신의 몸보다 좁은 통로를 깨부수며 달려오고 있었다. 아주 위협적인 기세로.
쿵! 쿵! 쿵! 쿵! 쿵!
그 존재는 기본적으로 ‘뼈’였다.
도마뱀과 흡사한 머리뼈 아래를 크고 굵은 뼈들이 지탱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무쇠로 만든 갑옷을 착용했으며, 손에 든 창의 길이만 족히 3미터가 넘어섰다.
“저건…….”
두 번의 삶을 사는 이안조차 처음 목격하는 존재, 심지어 들어본 소문도 없다. 도대체 저 괴물의 정체가 무엇이란 말인가?
(용아병……?)
페어리 퀸은 저 괴물의 정체를 아는 듯했다.
정확한 명칭까지 알고 있었으니까.
“용아병? 그게 뭡니까?”
(나와 같은, 그분들의 권속이니라.)
“적이 아닌 겁니까?”
(원래 그렇기는 한데…….)
잠시 말 꼬리를 흐렸던 페어리 퀸.
그녀가 용아병의 옹이진 눈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공허한 어둠만이 존재할 뿐.
본디 있어야 할 ‘안광’이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뵈는 게 없는 것 같구나.)
그 말을 인정하기라도 한 걸까?
용아병이 육중한 창을 사방으로 휘둘렀다.
페어리 퀸의 표현대로 뵈는 게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