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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54화
19. 의외의 주인공(2)
‘굼벵이도 구르는 재주가 있다더니.’
지난 일주일의 시간.
황태자에게 모든 것을 암기시킨 이안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생각보다 암기력이 괜찮았으니까. 물론 몇 가지 마법으로 누적된 피로나 집중력을 조절해 주기는 했으나, 감안하더라도 기대이상의 성과였다.
‘너무 의외라 그런가.’
정말 손톱만큼도 기대하지 않았던 탓일까? 황태자가 보여줬던 모습들이 좀처럼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하고자 하는 그 의지도 마음에 들었다. 지금껏 접해왔던 황태자의 태도와 모습 중 가장 최고의 한 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물론 실전이 문제겠다만.’
회담은 중립도시 데미데라의 시청, 그곳에서 가장 널따란 대회의장을 무대로 삼았다. 참석인원으로는 각국의 후계자들과 토벌대 규모 및 군수물자를 본인 선에서 판단할 수 있는 고위군인 하나, 마법적 지원을 논할 고위마법사 둘로 고정되었다.
‘익숙한 얼굴들이 많군.’
이안은 회귀자다. 삼국을 일통시킨 장본인 중 하나이기도 했다. 타국의 어지간한 주요 인사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사절단의 핵심 인사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괜히 기죽게 생겼네.’
저런 쟁쟁한 놈들 사이에 황태자가 껴서 말이나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숨이라도 쉴 수 있으면 다행이 아닐까? 이안 자신도 모르게 걱정부터 앞섰다.
‘하, 내가 지금 누굴 걱정하는 건지.’
뒤늦게 깨닫고는 듯 볼을 긁적거린 이안. 설마 황태자를 걱정하는 날이 올 줄이야. 이번 생에서 어머니와 레디오, 더글라스를 제외한 누군가를 걱정해 본 일, 단언컨대 처음인 것 같다.
‘처음은 아닌가.’
문득 5년 전, 사교계에 관한 편지를 보냈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도 걱정이라면 충분히 걱정이긴 한데.
‘……그만 생각하자. 그만.’
이안이 자신을 부정하는 그때.
협정의 중재를 맡은 시장 ‘은골로’가 대회의장 안으로 들어왔다. 최대한으로 격식을 차린 복장이었다.
“협정의 중재를 맡은 데미데라 19대 시장, 은골로 나빌입니다. 지금부터 협정의 모든 내용은 기록될 것이며, 소인의 재량껏 자리를 파할 수 있는 권한이 있습니다. 모쪼록 유념해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시장 은골로의 개회말과 함께 협정의 막이 열렸다. 근 10년 만에 치러지는 삼국의 협정답게 보이지 않는 긴장감이 팽팽했다. 도시 밖 주둔 중인 호위대의 숫자만 삼국을 합쳐 3천이 넘어선다. 제 3자의 적극적인 적극적인 중재가 마땅히 필요했다.
“아시다시피, 본 공국은 대초원으로 통하는 길이 좁고 험한 탓에 많은 병력과 물자를 조달하기가 어려운 실정입니다. 하여 보병대보다는 마법사와 정예기사 쪽으로, 직접적인 물자보다는 대금으로 치르기를 희망합니다만.”
시작 주제는 토벌대 분담 규모.
로 공국의 실권자 베나트 공작, 바로 그의 후계자 ‘막스웰 베나트’가 대륙공용어로 의견을 피력했다. 모국어가 아님에도 발음이 상당히 자연스러웠다.
“사실 이 부분에 관하여 콜드우드 제국 측과는 합의가 된 상황입니다. 아, 오해는 마십시오. 만약 그린리버 제국 측에서 합당한 반대의사를 표하신다면, 마땅히 처음부터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리 말하며 그린리버의 테이블, 정확히 말하자면 황태자 하이든을 바라보는 막스웰이었다. 더불어 모든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문제는 ‘눈’만 황태자를 향한다는 거다.
‘양쪽 귀는 라그나르를 향해 열려 있다.’
황태자에 관한 정보. 아니, 정보랄 것도 없다. 그린리버 제국의 후계 상황은 유명하니까. 성군으로 칭송받는 황제의 유일한 고집, 그 대상의 아둔함, 5황자의 특출함까지.
‘말해봐. 연습한 대로.’
아마 그린리버의 황태자가 제대로 된 의견을 말할 거라 생각하는, 나아가 그리 해주길 바라는 사람은 이안밖에 없을 거다. 그렇기에 더더욱 간절했다.
“…….”
그러나 좀처럼 입을 열지 못하는 황태자 하이든. 바로 옆에 앉아 있던 5황자 라그나르가 예상했다는 듯 목청을 가다듬기 시작했다. 자신의 차례임을 확신한 행동이었다.
“황태자 전하를 대신해서.”
라그나르의 목구멍이 열리는 그 순간.
“……군사문제에 관한 발언권은.”
황태자가 결심한 듯 말문을 열어젖혔다.
동시에 모두의 귀도 황태자에게 쏠렸다.
“본 제국의 대장군이자 역전불패의 지휘관이신 던컨 미토스 공께 일임하도록 하겠습니다. 전문가께서 옆에 계신데 구태여 제가 왈가왈부할 이유는 없지 않겠습니까?”
긴장감으로 역력한 황태자의 목소리.
떨림이 있었으나, 더듬지는 않았다.
충분히 들어줄 만한 어조였다.
“던컨 공.”
“아, 예. 그리하도록 하겠습니다.”
얼굴에 금칠을 당한 노장군 던컨 미토스가 급히 정신부터 차렸다. 결코 황태자의 금칠 때문이 아니다. 태도 때문이었다. 황태자가 저리 나올 줄은 전혀 예상치 못했으니까.
“이 노장이 생각해본 바, 로 공국의 요청에 대해서는…….”
의아함을 품으면서도 넘겨 받은 소임에 최선을 다하기 시작한 대장군 던컨 미토스. 단지 라그나르가 더 나은 황제감이라 여길 뿐, 그 역시 현 황제와 제국에 충성을 다하는 인물이다. 그 어떤 계산된 행동도 없었다.
‘시작이 좋다.’
한편 그 모습에 쾌재를 부르는 이안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작이 훨씬 좋았다. 예상된 질문에 준비한 답변일 뿐이었으나, 그 대답을 적절하게 끄집어낸 것만으로도 대견하게 느껴졌다.
‘계속 그렇게만 해라.’
걱정에 이어서 이번에는 응원이다.
더 이상 자신을 부정하지 않았다.
놈이 그래도 뭔가를 하고 있다.
저 얼간이 같았던 황태자가.
‘사람 구실 한 번 해보라고.’
이후로도 협정은 비교적 순탄하게 이어졌다. 그 과정 속에서 말해야 할 때는 말하고, 입을 다물어야 할 때는 꾹 다무는 황태자였다. 오직 이안이 가르쳐 준, 수천 번 넘게 되풀이했던 기준을 철저하게 따랐다.
‘슬슬 마지막이군.’
어느 정도 조마조마함이 사라진 이안.
그의 예상처럼 오늘 협정 마지막 차례, 토벌 이후 대초원의 땅과 자원을 어찌 나누느냐. 즉 ‘분배’에 관한 협의가 시작되기 직전이었다.
‘오늘 가장 중요한 부분.’
이안뿐만 아니라 모두들 그렇게 여겼다.
대초원의 땅은 기름지다. 아마 묻혀 있을 자원도 어마어마할 거다. 그 엄청난 땅을 공평하게, 혹은 조금이나마 더 이득을 보는 방향으로 분배받는 것이 삼국의 목표였다.
“우리 단도직입적으로 얘기를 나눠봅시다.”
콜드우드 제국의 황태자 ‘헥토르 콜드우드’가 무릎을 탁 치며 말했다. 저쪽은 그린리버와 다르게 황태자가 권력의 중심부에 서 있었다.
‘어미가 같은 황자를 제외하고 모든 동생들을 죽였지.’
저 호방한 목소리와 생김새와는 달리 아주 냉혈한 자다. 전생에도 대륙일통에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지도자, 바로 그 남자가 계속해서 말문을 이어갔다.
“무턱대고 가까운 쪽으로 삼등분? 그리 해서는 공평하게 나눌 수가 없겠죠. 매장된 자원이, 토지의 질이 다릅니다. 잘 잡으면 대박이겠으나, 못 잡으면 쪽박이니.”
기름진 땅으로 유명한 대초원이긴 하나, 그중에서도 엄연한 차이가 존재한다. 뿐일까? 매장된 여러 자원들까지 고려하자면 더더욱 그렇다. 조국과 가까운 기준으로 삼등분을 했다가는 크게 후회할 가능성이 컸다.
“누군가, 어느 국가는 분명 손해를 볼 것이고 감정이 상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말이 좋아 감정이지, 전쟁의 불씨가 될 수도 있다 이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 말이 옳았다. 웅크리고 있을 뿐, 세 나라 모두 대륙일통의 야망을 품고 있는 ‘대국’이다. 과거 수많은 제국들을 복속시키며 살아남은 가장 강력한 국가들. 하찮은 불씨 하나가 대륙에 피바람을 몰고 온다 해도 허언이 아니니라.
“적어도 본 제국은 아직 분란을 원치 않습니다. 천년만년 평화로워도 나쁠 건 없겠지요. 그러니 좋은 복안을 가지고 계시다면 말씀 좀 해주십시오. 사이좋게 나눠먹고, 탈 없이 돌아갑시다.”
걸걸한 헥토르 콜드우드의 발언에 소강상태로 접어든 협정. 사절단 모두가 준비해 온 방안들을 검토해보는 모양새였다.
“탑주님.”
한편 탑주와 눈빛을 교환하는 라그나르.
준비해온 한 수를 펼치기 위함이었다.
지금껏 단 한마디도 내뱉지 못했다.
예상 밖의 흐름에 초조함마저 느껴졌다.
‘이안 페이지, 저놈이……!’
안 봐도 뻔하다. 모두 놈의 소행이겠지. 저 거슬리는 놈이 멍청한 형님을 꼬드겨 혓바닥을 놀리도록 만든 거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 형님이, 그 황태자가 저럴 수나 있겠는가?
‘지금부터라도 바로잡아야 해.’
탑주의 끄덕임을 확인한 라그나르.
그가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
웅성거리는 모두에게.
“제가 미약한 의견이나마 한 말씀…….”
그때였다.
“확실한 방법!”
조심스러운 라그나르와 달리 아주 크고 당당한 목소리. 오만함이 느껴질 정도로 당당한 목소리는 이 회의실에서 한명밖에 낼 수 없다. 태생적으로 그러한 목소리를 타고났으니까.
“있습니다.”
바로 황태자 하이든의 것이었다.
덕분에 라그나르의 서론이 묻혀 버리고 말았다.
“그린리버 제국의 황태자 전하께서는 알고 계신 방법을 모든 분들께 소상히 말씀해 주시옵소서.”
협정의 중재자 은골로가 서둘러 말했다.
그럴만한 권리와 사명이 있었다.
이 회의실 안에서는 말이다.
“우선 본 제국의 상아탑, 아니 마탑에서 새로운 마법을 개발해냈습니다. 매장된 광물을 감지해낼 수 있고, 그 매장량까지 대략적으로 측정 가능한 대규모 주문입니다.”
황태자의 말에 시시각각 변하는 회의장의 반응들. 이를 처음 듣는 타국 인사들은 하나같이 반신반의한 눈치였으나, 라그나르와 탑주 만큼은 표정 관리가 힘들 지경이었다.
‘저, 저걸 어떻게……?’
두 사람의 공통된 반응, 그럴 수밖에 없었다. ‘광물탐지 마법’이야말로 그들이 준비한 비장의 한수였다. 오직 이날을 위하여 탑주가 직접 개발해 낸 주문이며, 당연하게도 상아탑에 공개한 바가 전혀 없었다.
“그게 사실입니까?”
사실여부부터 묻는 타국의 사절단들.
분위기에 올라 탄 황태자가 이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물론입니다. 여러분께서도 한번쯤은 소문으로 접해봤을 마법사, 본 제국의 최연소 고위마법사 이안 페이지 공이 직접 고안해 낸 주문이죠.”
그 말에 탑주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술식을 도둑맞은 기분이었다.
하나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상상만으로 마법을 부리는 놈이 아니던가? 만들고자 했다면 만들 수 있겠지. 단지 문제는…….
‘같은 생각을 했다는 겐가? 이 협정에 광물탐지 마법이 필요하단 생각을?’
그것이 믿기지가 않았다. 마법 말고는 아무것도 모를 줄 알았던,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정상인 애송이 따위가 협정의 본질을 꿰고 있다는 소리였으니까.
“오오…….”
많은 이들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협정의 열쇠나 다름없을 마법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따라하고 싶어도 당장은 불가능하다. 인정할 수밖에 없으리라.
“그 마법을 이용해서 일종의 ‘자원 지도’를 만들 예정입니다. 토지의 질도 겸사겸사 살펴야겠죠. 그렇게 완성시킨 지도를 기준 삼아 대초원을 수 조각, 많게는 수십 조각으로 나누는 겁니다.”
이쯤 되자 자신감마저 되찾아 버린 황태자.
손짓까지 섞어가며 협정을 주도하기 시작했다.
“그 수십 조각으로 나눈 땅덩어리를 삼국이 공평하게 나누는 거죠. 자원의 매장량과 토지의 질 양쪽 모두를 고려해서 말입니다. 경계가 조금 뒤죽박죽될 수도 있겠으나, 어차피 수십 년은 개간과 채굴에 주력할 땅 아닙니까?”
“으음…….”
긍정적인 반응이 회의장에 흘렀다.
탑주와 라그나르를 제외한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보다 나은 방법, 없다고 확신합니다.”
광물탐지 마법이란 존재가 나타나 버린 이상, 더 나은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애당초 토지의 질보다 매장된 자원이 컸으니까. 바로 그러한 문제를 깔끔히 해소해 줄 마법이 그린리버 제국에 있다는 거다.
“다들 그렇게 생각하실 거라 봅니다.”
이윽고 황태자가 쐐기의 마침표를 박았다.
주도권이 자국에 있음을 천명하는 마침표를.
“이상입니다.”
오늘의 주인공은 누가 봐도 오직 한 사람.
그린리버의 얼간이로 유명한 황태자.
혹은 겉가죽만 번지르르한 미남자.
그린리버 황실 온갖 소문의 핵심.
하이든 그린리버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