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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53화 (53/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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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53화

    19. 의외의 주인공(1)

    중립도시 ‘데미데라’는 어떤 국가에도 소속되지 않은, 표현 그대로 ‘자유로운 중립도시’였다. 삼국 또한 데미데라의 필요성을 인정, 중립도시로서의 명맥을 백여 년째 이어가고 있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데미데라의 ‘시장’ 은골로가 직접 그린리버의 사절단을 안내했다.

    중립도시의 귀족이나 마찬가지인 대상인들은 6년에 한 번 투표를 진행하는데, 그 투표로 뽑힌 이가 바로 19대 시장 은골로였다.

    “다른 사절단들은?”

    “각기 다른 귀빈채로 모셨습니다.”

    삼국의 비호 아래 중립도시를 꾸려나가는 데미데라다. 당연히 삼국귀빈을 위한 귀빈채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 규모는 어지간한 대저택을 가볍게 뛰어넘는 초호화 저택의 절정으로, 유지 및 보수비용만 도시운영비의 2할을 차지할 정도였다.

    “이 귀빈채를 사용하시면 됩니다. 저쪽에 따로 마련된 저택은 황태자 전하께서 쓰심이 좋을 것 같군요. 귀한 손님 중에도 가장 고귀하신 분을 모시고자 마련된 별채인지라.”

    시장 은골로의 안내처럼 여러 저택 안쪽으로 가장 규모 있고 호화스러운 저택 한 채가 자리 잡고 있었다. 황태자의 눈이 그곳으로 향했다.

    “음, 그럭저럭 훌륭하군.”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거린 황태자.

    일주일가량 머물게 될 곳 아니겠는가?

    저 정도면 제법 훌륭했다.

    “이보게 탑주. 당분간 별다른 일정은 없는 건가?”

    황태자가 탑주에게 물었다.

    특유의 오만한 태도로 돌아왔다.

    “협정 당일까지는 특별한 일정이 없사옵니다.”

    “그렇단 말이지.”

    황태자가 제 턱을 쓰다듬으며 입 꼬리를 올렸다. 협정 당일까지라면 시간이 꽤 많다. 아무래도 중립도시의 수많은 놀거리를 누비며 한바탕 즐기고픈 마음이 굴뚝같나 보다.

    “좋아. 다들 쉬라고. 이안은 나와 함께 간다. 따라와.”

    그리 말하더니 귀빈채 안쪽 대저택으로 향하는 황태자였다. 그 뒤를 이안과 올리버, 제2 황실기사단과 황태자 전담 하인들이 쪼르르 쫓아갔다.

    “탑주님.”

    그 모습을 잠시간 지켜보던 5황자 라그나르가 탑주를 불렀다. 목소리에서 약간의 조급함이 느껴졌다. 어지간해서는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아주 미세한 조급함이.

    “예. 황자전하.”

    귀빈채의 저택으로 들어선 라그나르.

    그 뒤를 탑주가 조용히 따랐다.

    둘만의 대화 장소가 필요한 까닭이었다.

    “이번 일에 책임을 묻지는 않겠습니다.”

    방에 도착한 라그나르의 첫마디였다.

    ‘이번 일’이란 이안 페이지가 끼어든 상황을 일컫는 말이었다.

    “단지, 형님 옆에 들러붙은 저 마법사.”

    라그나르 역시 협정에 거는 기대가 컸다.

    자신의 정치적 데뷔무대다. 저 멍청한 황태자가 헛소리를 지껄이는 틈으로 협상의 주인공이 되고자 했다. 한데 별안간 방해꾼이 나타났다.

    “거슬립니다. 이번에도 예감이 좋지 않아요.”

    “충분히 이해하옵니다.”

    황자의 말에 공감을 표한 탑주.

    그 또한 이안이 거슬렸다.

    오늘은 더더욱 그랬다.

    “하오나, 너무 심려치 마시옵소서. 이안 페이지의 마법적 역량이 뛰어난 건 사실입니다만, 어디까지나 본질은 외교입니다.”

    아무리 이안이라도 17살 청년이다. 황족은커녕 귀족도 아니다. 지금껏 많은 변수를 보여 왔으나, 외교처럼 마법 외의 문제만큼은 경우부터 다르단 얘기였다. 놈이 어디서 국가간의 외교술을 배워봤겠는가?

    “그 자리에 마법으로 할 수 있는 일은 극히 미미합니다. 발언권조차 없을 테지요. 아니, 있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겁니다. 주제에 무슨 묘안을 생각할 수 있겠습니까?”

    협상 테이블의 고위마법사는 장식품일 뿐, 우리가 이만큼 대단한 마법사를 보유하고 있음을 과시하는 장식품 말이다. 탑주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발언권이 생길 터.

    “외교란 결국 말과 생각이 모든 과정과 결과를 좌우하는 영역, 전하께서는 그저 준비하신 대로, 협정의 주인공이 되어주시길.”

    탑주라고 속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부글부글 끓었다. 하나 오랫동안 준비해온 계획이다. 상아탑의 제국, 그 시작의 열쇠인 5황자가 흔들린다면 여러모로 좋지 않다.

    “후우, 알겠습니다. 잘 알겠는데, 그래도 거슬리는 건 어쩔 수 없네요. 되도록 빨리, 어떻게든 해결을 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안을 향한 라그나르의 적개심은 5년간 눈덩이처럼 불어나 버린 상태였다. 이안을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기 위하여 많이 노력했으니까. 한데 모조리 실패해 버리고 말았다. 아군은커녕 인사조차 제대로 나눠본 적이 손에 꼽힌다.

    ‘감히 나를 무시해?’

    라그나르는 철저히 만들어진 인품 속에서 살아왔다. 능력 있고 정중하며 친절한, 아래로부터 치세하는 준비된 성군감. 적어도 힘이 생기기 전까지는 그렇게 살아갈 생각이었다. 한데 저 이안이란 놈이 처음으로 자신의 본성을 끄집어냈다.

    “눈앞에서 치워주든, 다른 수를 쓰시든.”

    “그 점 또한 심려치 마시옵소서.”

    탑주 역시 5년간 여러 준비를 해왔다. 이안 페이지라는 위험한 무기, 그 무기를 손에 쥐기 위한 방법을. 금지된 흑마법부터 주술사의 주술, 머나먼 타 대륙의 잡다한 사술까지.

    “곧 전하의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옵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요.”

    5황자와 탑주. 그들의 은밀한 대화가 계속되는 무렵, 이안은 황태자와 함께 가장 커다란 대저택 내부로 들어왔다. 황제에게 하사받은 저택과 비교하더라도 뒤처지지 않았다.

    “가만 있자. 내 알기로는 데미데라의 밤거리 공연이 그렇게나 일품이라던데, 재미난 구경거리가 많겠군. 하하!”

    황태자의 머릿속은 이미 놀러나갈 생각으로 가득했다. 협정의 책임자란 자각 자체가 없는 것 같았다. 황제가 봤다면 절로 한숨이 나올 상황, 이안과 올리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게는 안 되지.’

    라그나르의 데뷔무대이자 황태자 몰락의 서막을 알리는 협정이다. 전생보다 몇 년 앞당겨지기는 했으나, 본질 자체는 똑같다.

    ‘토벌대의 분담규모, 토지와 원주민 노예의 정확한 배분.’

    전생의 라그나르는 이 협정과정에서 많은 이득을 그린리버 제국 쪽으로 돌려냈다. 뿐이랴? 좀처럼 풀리지 않았던 정확한 토지배분의 해답까지 제시했다. 아마 이번 생에도 비슷하게 흘러갈 터.

    ‘가만히 둔다면 말이야.’

    물론 이안은 그 꼴을 두고 볼 생각이 없었다. 단 하나의 공적도 쌓을 수 없도록 훼방을 넣을 작정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국 저놈이 필요한데.’

    5년이 지났음에도 아직 정신을 못 차린 황태자, 저놈이 유일한 체스말이었다. 썩 훌륭한 말은 아니다만 어쩌겠는가? 사절단 제1 발언권자가 황태자인 것을.

    “하아…….”

    한숨을 푹 쉰 이안이 황태자에게 다가갔다.

    황태자는 이미 몇몇 하인들한테 볼거리와 먹거리를 소상히 조사해오라 명령을 내리고 있었다. 조사비용 한번 두둑하게 쥐어주면서.

    “몰래 나가야 하니까 변복할 옷도 좀 사오고. 화려한 거 안 된다? 눈에 띄니까. 최대한 수수한 거.”

    “전하.”

    “아! 내가 빨간색 싫어하는 거 알지?”

    “전하.”

    “응? 어찌 그러느냐?”

    이제야 이안을 돌아보는 황태자.

    멀뚱멀뚱 뜬 눈이 순수해보일 지경이다.

    “어디에도 나가실 수 없습니다.”

    “뭐라? 아니, 왜? 시간이 아직 많이…….”

    “준비를 하셔야죠.”

    “준비야 며칠 넉넉히 잡아서…….”

    “지금부터 당장 시작하셔야 합니다.”

    마치 못이라도 박듯 또박또박 말하는 이안이었다. 단 한마디의 반박도 허용치 않았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꿈도 못 꿀 대접, 오직 이 대륙에서 이안만이 가능했다.

    “사절단의 제1 발언권자는 황태자 전하십니다. 전하께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신다면, 그 차례는 5황자전하께 넘어가겠죠.”

    “그야 아바마마께 들어서 알고는 있다만…….”

    “장담하건대, 그럴 경우 협정의 주인공은 5황자전하가 되실 겁니다. 칼을 갈고 준비해왔을 테니까요. 그래도 좋으십니까?”

    “으음…….”

    황태자의 표정이 대번에 찡그려졌다.

    5황자 라그나르가 활약할 무대라니.

    그런 건 싫었다. 죽기보다도.

    “그, 그게, 사실은 말이다.”

    이안의 말에 잠시 고민했던 황태자, 그가 개인적인 짐으로부터 웬 종이뭉치를 꺼냈다. 그러더니 이안에게 건네며 말했다.

    “오기 전에 아바마마께서 몇 가지 조언을 내려주셨느니라. 물론 답까지 가르쳐 주시지는 않았다만.”

    이안이 종이뭉치들을 펼쳐봤다. 이번 협정의 배경부터 어떤 대화가 오고갈 것인지, 어떤 문제를 다룰 것인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심지어 황제의 친필인 것 같았다.

    “나름대로 답을 적어보라 하시여 그리 하긴 해봤는데…….”

    정리된 내용 밑으로는 황태자의 필체도 보였다. 해당 문제에 관한 답을 적어보라 명받았고, 황태자 또한 나름의 답을 적어본 모양이다. 물론 볼품없는 주장으로 가득했다. 무언가 끄적거리기라도 했다는 점에 의미를 둬야 할 판이었다.

    ‘황제도 복잡하겠지.’

    황제가 답을 적어주지 않은 이유. 이안은 알 것도 같았다. 황제는 똑똑한 사람이다. 황태자의 그릇이 좁아터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을 터.

    ‘스스로 넓히길 바라는 건가.’

    황제의 그릇이 아닌 황태자, 그럼에도 황제로 만들고 싶은 아들. 부족하나 좋은 인재들을 두고 그들과 토론하다보면 깨닫는 바가 있지 않을까? 아마 그런 심정이리라.

    “솔직히 잘 모르겠다. 병력과 물자가 어쩌고, 땅과 노예가 어쩌고. 괜히 입 열었다가 망신만 당할 바에야, 꾹 다물고 있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하고.”

    어느새 풀이 죽어버린 황태자였다.

    제 딴에는 고민이 많았던 모양이다.

    걱정으로부터 도피하고 싶었겠지.

    도시의 수많은 여흥거리 속으로.

    ‘황제의 바람을 들어줄 수는 없지만.’

    스스로 깨닫기까지 기다려 준다?

    함께 토론이나 하고 앉아서?

    이안에게는 그럴 시간이 없다.

    대신 답을 알려줄 수 있다.

    ‘적어도 바보는 면하도록.’

    황태자의 말마따나 망신당하지 않도록.

    마음을 정한 이안이 황태자의 종이뭉치를 한 장 한 장 살폈다. 그러고는 마나를 이용해 황태자가 적은 답안, 그 마른 잉크를 싹 다 지워 버렸다.

    “제가 답을 적어드리겠습니다.”

    “응? 갑자기 무, 무슨 답을?”

    “협정 자리에서 다루어질 모든 논의, 그 대응법과 해답을 적어드릴 겁니다. 그러니까 전하께서는 지금부터 협정 당일까지.”

    이안은 직접 글씨를 쓰지 않았다.

    이미 여러 자루의 깃펜들이 허공에 떠 스스로 필기하고 있었으니까. 이안이 알고 있는 모든 것, 라그나르를 협정의 주인공으로 만들어준 내용을.

    “외우십시오. 무조건.”

    물론 외우지 못해도 괜찮다.

    그럴 때는 따로 방법이 있으니.

    단지 기회를 한번 쥐어주는 거다.

    황태자 스스로 무언가 이루어볼 기회를.

    ‘체스말도 이왕이면 튼튼한 편이 좋으니까.’

    * * *

    그로부터 일주일이 흘렀다. 많은 이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황태자 하이든은 단 한 번도 귀빈채 바깥으로 나오지 않았다. 몰래 나가는 법도 없었다. 몰래 나가는 거? 병사들은 다 안다. 모르는 척 할 뿐이지. 한데 이번만큼은 진짜였다.

    “도대체 저택 안에서 뭘 하는 거야?”

    귀빈채 주변을 지키는 제국군 병사들이 작은 목소리로 떠들었다.

    “창녀들이라도 왕창 부르셨나?”

    “아하, 안에서 거하게 노셨다?”

    그에 대한 제국군 병사들의 반응은 크게 두 부류였다. 황태자의 삐뚤어진 성정과 오랜 소문을 그대로 믿고 있는 자들이 있는가하면.

    “그래도 요즘은 좀 달라지시지 않았나?”

    “그렇다니깐? 저번에 말했지? 왜 있잖아. 나 황궁에서 잠깐 근무할 때, 그때 한번 뵙거든? 근데 갑자기 내 어깨를 툭툭 쳐 주시더라고. 무슨 수고가 많다면서…….”

    5년간 조금씩 변해온 황태자의 성정을 눈치챈 이들도 몇몇 존재했다. 물론 전자가 압도적으로 많았지만 말이다.

    “그러면 뭐해? 5황자전하께서 계신데.”

    물론 두 부류는 공통적으로 5황자 라그나르를 더욱 존경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라그나르는 그러한 위치가 되고자 19년을 완벽하게 살아왔으니까.

    “아마 이번 협정도…….”

    윗분들 얘기에 재미가 좋은 그때였다.

    멀찍이 걸어오는 백금발의 미남자.

    그 양쪽으로 거느린 기사와 마법사.

    각각 황태자와 단장, 고위마법사였다.

    드디어 외출에 나서는 모양이다.

    “화, 황태자 전하!”

    귀빈채 주변을 지키던 병사들이 머리부터 조아렸다. 마법사와 황실기사는 청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던데, 혹시 자신들의 얘기가 들리지는 않았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작게 말하긴 했으나, 장담하기 어려웠다.

    “아아, 수고들이 많군.”

    다행이 그러한 사태는 벌어지지 않은 것 같았다. 병사들에게 손까지 흔들어주며 웃어주는 황태자의 모습으로 보아 확실했다. 들었다면 결코 넘길 자가 아니니까.

    “화, 황태자 전하. 당장 호위대를 꾸리도록 하겠…….”

    “아니.”

    병사의 말에 손을 저어 보이는 황태자.

    “가까우니 그럴 필요 없느니라. 그 뭐더라. 도시의회 회의장이었나? 아무튼 오늘 협정 있을 자리가 있지 않느냐. 알지? 거기 좀 미리 가있으려고.”

    병사들이 모를 리가 있겠는가?

    당장 오후에 그곳으로 모셔갈 예정인데.

    문제는 지금이 아침이라는 거다.

    아침부터 협정 자리에는 왜 가겠다는 걸까?

    “황태자 전하, 송구하오나 1차 협정은 오늘 오후…….”

    “안다, 알아. 그냥 연습이나 좀 해보러 가는 길이니라.”

    연습은 또 무슨 놈에 연습?

    의아해진 눈으로 슬쩍 올려다본 병사들.

    황태자의 표정을 확인하기 위한 행동이었다.

    “……?”

    순간 병사들 모두가 놀란 눈이 되었다. 장난기로 가득할 줄 알았던 황태자의 몰골이 생각보다 심각했기 때문이다. 저 퀭해진 눈하며 시커먼 눈 주변. 쏙 들어간 볼에 보랏빛 입술까지. 모르긴 몰라도 고생깨나 했을 법한 몰골이리라.

    ‘지금껏 무슨 짓을 했길래?’

    정말 창녀라도 불러 밤새도록 흥청망청 놀기라도 한 걸까? 아니, 놀았으면 잠이나 잘 것이지 연습은 또 무슨 연습? 도무지 황태자의 생각을 짐작하기 힘든 병사들이었다.

    ‘도대체가 무슨 생각인지 원.’

    결국 생각하기를 포기해버린 병사들.

    좌우로 물러나 황태자와 그 일행에게 길을 열어줬다.

    ’에라 모르겠다! 단장에 고위마법사까지 있는데 뭔 일 있겠어?’

    하나 병사들은 알지 못했다.

    길어진다면 며칠간 치러질 삼국의 협정.

    그 협정이 불러일으킬 실로 예상 밖 결과를.

    전생과는 사뭇 달라진, 황태자 하이든의 결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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