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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51화
18. 한계 돌파(2)
“이안 공! 깨어나셨단 소식을…… 이, 이안 공?”
허겁지겁 이안의 방으로 달려온 대영주 칼리언 피에릭. 그가 이안의 몰골을 보고 크게 놀랐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얼굴은 물론 로브와 바닥까지 피로 얼룩져 있었으니까.
“이게 무슨…… 괜찮으신 게요?”
“괜찮습니다.”
대영주의 물음에 이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얼굴에 묻어 있던 핏자국들이 빻아진 가루마냥 스르르 떨어져 나갔다. 로브의 핏자국도 마찬가지였다.
“그냥 허물 한번 벗은 겁니다.”
“허물……?”
대영주가 잠시 이안의 말뜻을 고민해봤다.
결론은 오리무중, 뜬구름 잡는 얘기가 아닐까.
‘마법사들이 다 그렇지.’
그렇게 정리한 대영주가 본론부터 꺼냈다.
“아, 아무튼 깨어나셔서 다행이오. 내 감사의 인사든 뭐가 되었든, 드릴 말씀이 참으로 많소만, 우선 이것부터 전해드려야 할 것 같아 급하게 찾아왔소.”
대영주가 건넨 것은 수정구였다.
통신역참으로 전해지는 마나서신의 매개체.
통신구와는 성질이 다르다.
“공께서 대초원으로 가셨을 때, 그러니까 열흘 전이군. 상아탑에서 서신이 도착했소. 꼭 임무가 끝나면 보여드리라는 언질이 있었는데, 마침 공께서 혼절을 하시는 바람에…… 일단 확인하시구려.”
상아탑에서 서신을?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이안이 잽싸게 수정구를 건네받았다. 당장 마나를 주입시켜 서신의 내용부터 확인하고자 했다.
“잠시만, 전해드릴 게 하나 더 있소.”
그리 말하며 안주머니로 손을 가져가는 대영주 칼리언. 그가 꺼내 든 것은 편지였다. 통신역참으로 전해온 마나서신이 아닌, 황제의 인장이 찍힌 ‘종이서신’ 말이다.
“오늘 기수를 통해 도착한 황제폐하의 직통 서신이오. 반드시 이안 공께 직접 전달해 달라는 엄명이 있었소.”
“기수를 통해서 말입니까?”
“그렇소이다.”
황제는 상아탑의 통신역참을 이용하지 않고 기수와 종이서신을 선택했다. 자칫 전달이 늦어 엇갈릴 가능성이 높은 고전적인 방법을. 뜻하는 바가 무엇이겠는가?
‘상아탑에 비밀로 해야 하는 내용이거나.’
혹은 상아탑 선에서 서신의 전달을 의도적으로 늦출만한 내용이거나. 결론적으로 똑같은 얘기다. 아마 상아탑의 서신에서 바라는 내용과 정 반대의 입장일 터.
‘우선 상아탑의 서신부터.’
이안이 수정구에 마나를 불어넣자 푸른빛 마나의 문자들이 뿜어져 나왔다. 언제나 그랬듯 아주 익숙한 마나서신의 효과였다.
-고위마법사 이안 페이지에게 알린다. 수행 중인 임무에 차질을 빚을 만한 내용이므로, 서신의 전달 시기를 미루어달라 요청하였다. 피치 못할 선택이었다는 점을 이해해주길 바란다.
임무에 차질을 빚을 만한 내용이라.
이어지는 서신의 내용이 허공에 그려졌다.
-그대의 가정에 작은 소란이 있었다. 정체 모를 괴한이 저택에 침입하였고, 근위병들의 활약으로 가족들과 재산은 무사하다. 현재는 황실과 상아탑의 전력적인 비호 아래 안전을 보장받고 있는 바, 이 서신으로 하여금 걱정할 필요가 없음을 알린다.
그 외에도 몇 가지 말들이 있었으나, 핵심적인 내용은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대저택에 침입자가 발생했고, 근위병들이 잡았으며, 지금은 황실과 상아탑이 나서 가족들을 지켜주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얘긴데.
‘걱정하기를 바라는 서신이군.’
실로 빤히 보이는 노림수였다. 문제가 있다면 그 사실을 알면서도 마음이 날뛴다는 것, 우려했던 사태가 터져 버렸다. 당장에라도 돌아가고 싶어 미칠 지경이다.
‘황제의 서신까지 읽고 판단하자.’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시킨 이안.
이번에는 황제의 종이서신을 펼쳤다.
-친애하는 마법사, 내 아들의 벗 이안 페이지에게.
직관적인 내용만 전달하는 상아탑의 서신과 달리, 황제의 서신은 정석적으로 시작되었다. 비밀리에, 급박하게 보내왔을 서신인데도 격식이 묻어났다.
-이 서찰이 제대로 전달되었다면, 아직 나와 내 아들에게 남은 운이 다하지 않았다는 뜻이겠지. 행운의 여신께 감사를 올리며, 짐은 그대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고자 한다.
황제는 부탁임을 강조했다.
결코 황명이 아니라 부탁임을.
-고위마법사의 신성한 의무로 출타 중인 자네는 아직 소식을 듣지 못했겠지만, 동부 대초원의 몬스터 토벌 건에 관한 삼국의 협정이 조만간 자유도시 ‘데미데라’에서 개최될 예정이다.
‘토벌 협정을 벌써 시작한다?’
이번만큼은 이안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정된 역사가 몇 년은 앞당겨진 상황이다.
이안이 알고 있던 전생의 흐름보다 훨씬.
-그대의 벗이자 황태자 하이든 그린리버를 포함한 5황자 라그나르 그린리버, 상아탑탑주 허버트 레온과 제국군 대장군 던컨 미토스 등이 협정의 사절단으로 내정되었다. 아마 이 편지를 읽을 때쯤이면 데미데라로 향하는 사절단의 행렬이 시작되었겠지.
하나 그 내용은 전생과 마찬가지였다.
이 협정의 가장 중요한 점은 라그나르다.
놈이 본격적으로 전면에 나서는 시작점.
계승싸움의 데뷔 무대나 마찬가지니까.
‘황태자가 몰락하는 결정적인 시작점.’
반면 라그나르는 이 협정에서 발군의 외교력을 발휘한다. 그 결과 귀족은 물론 백성들조차 라그나르의 능력을 알게 되는, 더불어 황태자의 무능함을 체감하는 결정적인 기점이 된다.
-이번 사절단에 황태자의 눈과 입이 되어줄 자는 아무도 없다. 단장 올리버 레이우드는 충직한 인물이나 기사일 뿐, 그러한 이유로 황태자의 벗인 이안 페이지에게 부탁을 하는 바, 부디 데미데라로 향하여 황태자의 힘이 되어다오. 그대의 소중한 가족은 황궁으로 불러와 제국 최고의 보호를 약속할 터이니.
과연 서신을 따로 보낸 이유가 있었다.
지푸라기라도 부여잡는 심정이리라.
황태자가 사람구실을 할 수 있도록.
아니, 실수만 하지 않도록.
“…….”
잠시 두 눈을 감은 이안.
상황부터 정리하기 시작했다.
전생의 기억, 그리고 작금의 상황.
‘탑주가 설계한 판이었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는 모르겠다.
동부 대초원 사태부터 삼국 협정 등 모든 흐름이 탑주의 계략일수도, 혹은 그 요소 중 일부분만 그럴 수도 있으니까. 실로 수많은 추측과 심증이 이안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하나 지금은 선택부터 해야 할 차례였다.
‘가족, 그리고 황제의 부탁.’
저택에 침범했다는 괴한들.
그 또한 탑주의 조작일 가능성도 있다.
이안을 묶어두려는 술수 말이다.
‘나를 제대로 파악했어.’
아마 탑주는 이안에 관한 뒷조사를 멈추지 않았을 거다. 비정상적으로 가족을 우선시하는 이안의 성정 또한 파악해냈을 터. 조작이라면 실로 최고의 한수였다.
‘당연히 가족들한테 달려갔을 테니까.’
조작이든 나발이든 분명 그랬겠지.
불과 어제까지는, 아니.
‘아까까지는 말이야.’
절절히 느껴지는 방대한 마나.
이안은 분명 6클래스에 돌입했다.
전생, 그리고 이번 생을 통틀어 ‘인류 최초’라고 자부할 수 있는 경지를.
‘6클래스는 6클래스만의 마법이 있다.’
탑주조차 상상 못할 마법들.
기록마저 남아 있지 않을 마법들.
그 일부를 실현시킬 수 있는 경지.
그것이 바로 6클래스의 대마법사다.
“하하.”
이안이 자그마한 웃음을 흘렸다.
적이 가소롭다고 느껴질 때.
바로 그 순간에 지어지는 미소였다.
“어찌 그러시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한참을 잠자코 지켜보던 대영주 칼리언이 궁금한 듯 물었다. 그의 성격상 오래 기다린 거다.
“영주님.”
“듣고 있소.”
“제가 영주님과 영지를 지켰습니다. 맞습니까?”
다소 뜬금없는 이안의 물음.
그럼에도 칼리언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했다.
“당연하오. 그대는 나와 영지의 은인이시지.”
“그럼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겠습니까?”
“말씀만 하시오. 그렇지 않아도 내 이안 공의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까 고민하고 또 고민하던 참이었소. 결국 판단까지 내리지는 못했소만.”
제 가슴팍을 쿵쿵 치며 말하는 칼리언.
아무리 봐도 지도자보단 전사에 가까웠다.
“당분간 저를 지켜주셔야겠습니다.”
부탁하는 이안의 두 눈이 번뜩거렸다.
6클래스의 마법사는 알고 있었으니까.
상황을 타개시킬 완벽한 방법을.
* * *
자유, 중립, 상업, 항구.
수많은 꼬리표가 붙는 도시 ‘데미데라’. 협정이 예정된 그곳에 그린리버 제국의 황태자 ‘하이든 그린리버’를 포함한 사절단 전원이 도착했다.
“지금이라도 이안, 부르면 안 될까?”
마차 안 황태자의 표정이 유독 어두웠다. 탑주부터 대장군, 그밖에 사절단 핵심 인사들 모두가 5황자 라그나르의 사람들이다. 결코 편할 수가 없으리라.
“마음을 굳게 다지십시오. 그 누구도 황태자 전하께 위해를 가할 수는 없습니다.”
올리버의 말이 옳았다. 저들은 그럴 생각도 없거니와, 황족 수호의 임무가 주어진 이상 그럴 수도 없다. 탑주와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절단은 라그나르를 ‘적합한 후계자’로서 따를 뿐이지, 아직 ‘주군’으로 모시지는 않는다. 현재의 주군에게 황명을 받잡은 이상, 오히려 황태자의 안위를 지켜줄 터.
“그래도 불안하구나. 이럴 때 이안이라도 옆에 있었으면 좋았을 것을. 하필 고위마법사의 의무인지, 그걸 나가서…….”
황태자가 이토록 불안해하는 반면, 5황자 라그나르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여유로웠다. 힘 있고 똑똑한 자 특유의 자신감마저 엿보였다. 그는 황태자처럼 마차에 타지 않았다. 몸소 말 위에 올라 황성부터 이곳까지 행렬을 함께했다.
“고생 많으셨습니다. 오늘 밤은 여러분들을 위해 따로 연회의 자리를 마련할 터이니, 모쪼록 즐기시며 여독도 푸시길.”
“오오오!”
뿐이랴? 사절단의 호위 병력으로 붙은 기사단과 병사들 쪽으로 말 머리를 돌려 그들과 편히 어울린다. 그야말로 ‘좋은 지도자’의 표본을 과시하고 있었다. 말단병사들조차 5황자를 미래의 황제라 여길 정도로.
‘잘 익었구나.’
그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본 탑주. 오랫동안 키운 열매가 좋은 과육과 과즙을 머금었다. 바야흐로 수확의 계절이 찾아온 거다. 제국을 ‘상아탑의 제국’으로 탈바꿈시킬 첫 단추가.
‘시기가 무르익었는가.’
이 날을 위해 오랫동안 판을 짜왔다. 폐인이 된 헬레느를 심복으로 만들었다. 그녀로 하여금 여러 비공식적인 일들을 처리했다. 대초원에 큰 혼란을 만들고, 그것을 빌미로 협정의 자리까지 마련해 냈다. 독자적인 세력과 연락망이 총동원된 결과였다.
‘혹시 모를 방해꾼도 치워놨으니.’
황태자 옆 가장 성가신 방해꾼.
이안의 성정은 이미 파악해 뒀다.
가족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두는 자.
가족과 관련된 일이라면 반역조차 불사할 터.
‘지금쯤 황성으로 달려가고 있겠지.’
물론 가족을 직접적으로 건들지는 않았다. 단지 좀도둑 정도의 상황을 만들었을 뿐이다. 충분하지 않겠는가? 증거도 없다. 일찌감치 바깥으로 돌려 일을 수월하게 진행했으니, 이제는 그 성정을 자극해 집으로 돌려보내면 그만이리라.
‘이 협상이 끝날 때쯤이면 황자는…….’
탑주가 확신을 품는 그때였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하늘로부터 날아오는 무언가.
그 무언가를 올려다보면서.
“……?”
탑주 또한 모두의 시선을 따라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에는 로브 차림의 남자가 이곳으로 날아오고 있었다. 파란 로브, 엄청난 비행능력, 익숙한 실루엣까지.
“이안!”
가장 먼저 알아본 황태자가 마차 문을 박차고 나왔다. 위축되었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조각마냥 잘 빚어진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환호성마저 지를 기세였다.
“이- 안-!”
이안의 이름을 힘껏 외치는 황태자.
펄쩍펄쩍 뛰며 두 손까지 흔들어댄다.
그 앞으로 파란 로브의 남자가 착지했다.
동시에 한쪽 무릎을 꿇으며 예를 취한다.
“제가 좀 늦었습니다. 황태자 전하.”
그 남자의 정체는 이안 페이지. 지금쯤 황성으로 달려가고 있어야 할 그가 중립도시 데미데라에, 황태자와 그린리버 사절단 모두의 앞에 나타난 거다.
‘어떻게?’
가장 큰 경악은 탑주의 몫이었다.
저 자가 어찌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말이 되지 않는다.
오차의 범위를 빗겨나다 못해 한참 벗어난 결과였다.
“설마 가족을 포기했다고?”
* * *
같은 시각.
수도 그린리버디움의 황궁.
베네사와 레디오, 더글라스는 모두 황궁에 있었다. 대저택에 괴한이 침입했던 그날 이후로 쭉 황궁의 별채에서 지내왔다. 주변을 지키는 병사들 또한 어마어마했다.
“대장님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
더글라스가 중얼거렸다. 녀석은 괴한의 습격에 그리 겁을 먹지 않은 눈치였다. 오히려 아카데미를 가지 못하는 상황이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곧 오실 거야.”
그런 아들에게 한마디 툭 뱉어준 레디오가 베네사를 바라봤다. 꽤 긴 시간이 지났는데도 좀처럼 진정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페이지 부인,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나랏님 먹고 자시는 황궁이 아니겠습니까? 세상 어디보다도 안전할 겁니다.”
레디오의 너스레에도 힘없는 미소만 지어보인 베네사. 어떻게든 참고 있지만 그녀도 이안이 보고 싶었다. 아들의 얼굴을 봐야, 그 따뜻한 손을 잡아야 진정이 될 것 같았다.
“상아탑에서 서신을 보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곧 이안 님께서 저 문을 여시고 짠! 하면서 나타나실 텐데…….”
레디오는 분위기를 풀어보고자 했다.
결코 무언가 알고 뱉은 말이 아니었다.
한데.
“짠.”
그 예상이 정확하게 들어맞아 버렸다. 문이 열리고 파란 로브 차림의 청년이 들어왔다. 모두가 기다리고 또 기다렸던 존재, 이안이었다. 어울리지도 않는 ‘짠’으로 보아 바깥에서 레디오의 너스레를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응……?”
“대장!”
레디오와 더글라스가 이안의 등장에 가장 먼저 반응했다. 이안 역시 가벼운 눈인사를 건넸다. 그러고는 곧장 어머니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갔다.
“제가 좀 늦었죠? 어머니.”
어머니의 떨리는 손을 꼭 붙잡아준 이안. 황태자를 향해 한쪽 무릎을 꿇고 있어야 할 그가, 황궁의 가족들 앞에도 나타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