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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48화
17. 대초원의 계획(1)
“생각보다 심각한데.”
대초원의 반을 가르는 북쪽. 여러 종의 몬스터 서식지를 두루두루 살펴본 이안이 당혹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과연 그럴 수밖에 없었다.
‘대초원 몬스터들이 연합이라도 한 건가.’
몬스터가 칠 할, 원주민이 삼 할을 차지한다고 알려진 대초원이다. 지난 수백 년간 원주민들은 하나의 부족을 이루는 데 성공했으나, 여러 종으로 나뉜 몬스터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서로를 죽고 죽이던 사이였다. 한데 그런 놈들이 하나로 뭉쳐 버린 거다. 뿐이랴?
‘피에릭 영지만 공격하는 게 아니었어.’
몬스터들은 피에릭 영지, 즉 그린리버 제국만 공격한 것이 아니었다. 대초원을 기준으로 북쪽의 콜드우드 제국, 북서쪽에 닿아 있는 로 공국의 국경까지 동시다발적으로 침범하고 있었으니까.
‘왜?’
더 자세한 정황은 살피기 어려웠다. 다만 몬스터들이 삼국의 국경을 모두 침범하고 있다는 것. 그중에서도 피에릭 영지가 가장 집중적으로 공격받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었다. 아마 이유는 큰 뱀의 협곡 때문이겠지.
‘다른 국가들은 통하는 길이 좁고 다양하다.’
타국으로는 부대를 나누어 소수로 진입해야 하지만, 그린리버 제국으로는 큰 길이 뚫려 있어 침범하기 용이한 구조였다. 상대적으로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으리라.
‘그럼 원주민들은?’
몬스터들은 그야말로 모든 방향을 공격하고 있었다. 하면 가장 가깝고 접근조차 쉬운 원주민들의 부락은 어떨까? 그들도 똑같이 몬스터들에게 공격을 당하고 있을까?
‘확인하자.’
원주민 부족 집결된 초원의 남쪽.
수백 개의 크고 작은 부락들, 그곳 언저리에 도착한 이안이 플라이 주문을 해제시켰다. 어떤 변수가 일어날지 모른다. 마나를 최대한 아껴두는 쪽이 현명할 터.
‘조용하군.’
몬스터로 시끌벅적한 대초원의 북쪽과는 달랐다.
원주민들의 남쪽 대초원은 평화롭기 이를 데 없었다. 몬스터의 습격은커녕, 더 가까이 접근했다간 이안이 습격자로 비춰질 지경이다.
‘수상해.’
그래서 더욱 수상했다.
마치 딴 세상처럼 조용한 북쪽의 분위기.
지금 이 상황에 그럴 수가 있단 말인가?
‘몬스터에 예민한 건 원주민일 텐데?’
의구심의 골이 깊어지는 그때였다. 마침 주변일대를 순찰하던 소규모의 원주민들이 창과 도끼를 앞세우며 슬금슬금 다가왔다. 물론 목표는 이안이었다.
“웬 놈이냐!”
이안을 포위한 검은 피부의 원주민들. 하나같이 칼리안 대영주와 비슷한 덩치를 가졌다. 몬스터의 가죽과 뼈로 치장한 모습이 꽤나 위협적이기도 했다.
“적이 아닙니다.”
그들과 마주한 이안의 입에서 생소한 언어가 흘러나왔다. 전생에 용언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여러 언어를 익혔고, 대초원 원주민들의 언어 또한 그 대상이었다.
“그린리버 제국에서 왔습니다.”
원주민들도 조금은 놀란 눈치였다.
외부인의 입에서 익숙한 말이 들린다.
모두가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다.
“우리 말을 어떻게 알지?”
무리 중 유독 거구의 원주민이 앞장서 물었다. 까맣고 탄탄한 피부가 살덩이보단 흑요석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설명 드릴 시간이 없습니다. 주술사의 왕을 뵙고자 왔습니다.”
“뭐라?”
주술사의 왕.
쉽게 말하자면 원주민들의 ‘탑주’와 같다.
그들 또한 마나하트와 마나브레인을 타고난 자들이 존재하며, 마법사가 아닌 주술사로 키워진다. 마나를 다루는 만큼 마법사와 많은 부분이 겹치면서도 많은 부분이 다른 존재들이다.
“북쪽 몬스터와 관련된 문제를 논의하려고 합니다. 주술사의 왕이시라면 지금 이 사태를 모를 리 없으니…….”
“놈!”
친히 그들의 언어로 상황을 설명했던 이안.
하나 원주민들의 반응은 냉담할 뿐이었다.
오히려 적대감을 여실 없이 내비췄다.
“제국의 앞잡이가 건방을 떠는구나. 주술사들의 왕께서 네놈 따위가 만나고 싶으면 만나지는 분인 줄 아느냐?”
창대 끝으로 바닥을 쿵 치는 원주민들.
이안의 눈에 주술사의 왕이 탑주쯤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적어도 원주민들에게는 그보다 높은 존재였다. 말 그대로 ‘왕’이다.
“썩 꺼져라 이놈! 한 번만 더 헛소리를 지껄였다간 오늘밤 대초원의 정령께 바칠 제사상 위로 올려주마!”
거칠고도 명백한 축객령이 떨어졌다.
하나 그 축객령을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는 이안이었다. 오히려 짜증만 치솟았다. 이안은 성격파탄자가 아니다. 남의 터전에 들이닥쳐 무작정 박살부터 내고 일을 진행하는 타입이 아니란 얘기다. 전생에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번 생 역시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래왔다. 하나 지금은 얘기가 다르다.
“그럼, 너희들의 눈에는.”
정중함은 처음이면 족하다.
두 번의 정중함이 무슨 소용이랴?
상대는 그 정중함을 받을 준비도, 자격도 없는데.
“내가 꺼지라면 꺼져줄 사람으로 보이나?”
이안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원주민들 또한 창대를 고쳐 겨누었다.
“죽어야 정신을 차릴 놈이로다!”
먼저 덤벼들기 시작한 거구의 원주민.
한데 이안의 대응은 마법이 아니었다.
아니, 마법이 ‘전부’가 아니었다.
‘아이스 스피어.’
기다란 얼음덩이가 이안의 손에 나타났다.
마치 칼처럼 얇고 기다란 얼음덩이였다.
뒷부분만 뭉툭한 것이 손으로 잡기 편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만든 거다.
‘마나는.’
이안이 취한 자세는 명백한 검법.
이는 명백한 ‘제국검법’의 자세였다.
검이 있어야 할 자리를 얼음덩이가.
아니, ‘얼음칼날’이 대신할 뿐.
‘최대한으로 아낀다.’
지난 5년, 이안은 올리버와 대련만 주구장창 나눈 것이 아니다. 마나하트의 성장에 도움이 될까 싶어 육체적인 운동까지 겸했다. 자연히 기사들의 훈련과 검술을 정식적으로 익혀볼 수 있었다. 나름 흥미와 재미도 느꼈다.
‘재능은 영 아니었지만.’
무인으로서의 재능은 평이했다.
하지만 이안은 마법사다. 마나를 이용한 육체강화와 몇몇 보조마법의 힘을 빌린다면.
‘대부분의 젊은 황실기사와 맞먹는 수준.’
민첩함이나 반응속도 등을 강화시켜 주는 보조마법들. 그러한 외부요소들이 작용된 이안의 검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봐줄 만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것이 올리버와 제2 황실기사단 전원의 평가, 아부나 과장이 전혀 섞이지 않은 냉정한 평가였다.
채애앵!
덩치 큰 원주민의 창날이 하늘로 튕겨졌다.
근육의 힘만으로는 넘을 수 없는 격차였다.
‘무, 무슨 힘이……!’
흡사 부족의 주술사 호위대와 비슷한 힘,
그들 역시 작은 덩치로 엄청난 힘을 뿜어댄다.
저 제국인도 비슷한 부류일까?
‘매직 미사일.’
원주민이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그 틈을 놓치지 않는 이안이었다.
쾅!
작은 마나의 구체 한발이 원주민의 복부를 때렸다. 작은 폭발도 일어났다. 죽진 않으나 한동안 고생 좀 할 터. 내장이 뒤틀렸을 테니까.
“커허억!”
근력은 부족의 호위대와 같다.
한데 저 요술은 주술사의 그것이다.
원주민들이 당황한 듯 뒤로 물러났다.
“마, 마법사. 제국의 마법사!”
그들 또한 제국의 마법사를 안다.
주술사와 비슷한 족속들이 아니던가? 그 사실을 깨달은 원주민들이 뿔피리를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지원을 요청하기 위함이었다.
“시끄럽게 만들지 말고.”
하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땅바닥에서 튀어나온 덩굴이 팔과 뿔피리를 낚아챘으니까. 여기는 대초원이다. 적은 마나로도 대지 계열의 마법을 부리기 최적화된 장소.
“몬스터가 국경을 침범하고 있다.”
이안이 포박된 원주민들에게 다가갔다.
날카로운 얼음칼날로 하여금 목까지 겨눈다.
“그런데 너희들은 아무런 영향도 없군. 관련이 없을 수가 없겠지.”
목에 살짝 닿는 것만으로도 피가 묻었다.
얼음의 끝이 그만큼 날카롭다는 증거.
“말해. 주술사의 왕, 어떻게 만날 수 있지?”
“주, 주술사의 왕께서는…….”
“젊은이, 나를 찾는가?”
후방으로부터 들려온 노인의 목소리.
거리는 멀었지만, 소리는 들려왔다.
주술사 또한 마법사와 동류의 존재.
외침에 마나를 불어넣는 거야 일도 아닐 터.
“제국인이 어째서 주술사의 왕을 찾는 겐가?”
늑대 가죽을 뒤집어쓴 노인이 다가왔다.
대인원의 호위 병력은 덤이었다.
“주술사의 왕이 되십니까?”
“그렇게들 부르더군.”
“그린리버 제국에서 왔습니다. 몬스터에 관한 일을 여쭙고자 왔는데.”
목에 겨누었던 얼음칼날을 거둔 이안.
그가 노인의 손에 쥐어진 박달나무 지팡이를 흘겨보며 말했다.
“혹 아시는 바가 있으신지요.”
“몬스터들이 무얼 어찌하고 있기에?”
“삼국의 국경을 침범하고 있습니다.”
“흔한 일이지.”
당연한 듯 대답하는 노인.
흔한 일, 맞다. 흔한 일이다.
문제는 규모가 흔하지 않다는 거다.
“이상하네요. 부족분들이야말로 몬스터의 움직임에 민감하신 분들일 텐데,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말씀하시군요. 그것도 주술사의 왕이라는 분께서.”
이안의 불신이 깊어졌다.
또한 확실해졌다.
“그리고…….”
당장 눈에 들어오는 결정적인 요소가 있었다.
“당신은 주술사의 왕이 아니야.”
“……?”
이안의 말에 흠칫 놀라는 노인.
찰나였으나 이안의 눈을 피할 수는 없었다.
“무슨 헛소리를…….”
“그 지팡이.”
이안의 눈이 향한 곳은 노인의 지팡이.
아까부터 지켜봤던 저 박달나무 지팡이.
그것이 노인의 정체를 판가름하는 단서였다.
“주술사의 왕은 지팡이가 다른 걸로 압니다만.”
대초원 원주민의 생태를 잘 모르는 이안이다.
하나 다른 건 몰라도 저것만큼은 확실했다.
주술사의 왕, 그들에게 주어지는 지팡이.
이안이 노렸던 ‘네 번째 아티펙트’니까.
“무슨 짓을 꾸미는 거지?”
이안의 나지막한 물음.
그 물음에 노인이 지팡이를 번쩍 들었다.
“불의 정령이여!”
그러자 큼직한 불꽃이 허공을 태우기 시작했다.
제국 마법사들의 마법과는 종류가 달랐다. 불꽃으로부터 머리와 팔의 형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불의 정령을 표방한 마법, 아니 ‘주술’이었다.
“네놈 따위가 알 일이 아니다, 제국인.”
말투부터 돌변한 원주민 주술사.
그가 불러낸 불꽃이 이안을 공격했다.
“하…….”
저들에겐 실로 비장의 한 수였을 터.
하나 이안은 냉소만 흘릴 뿐이었다.
아무래도 얕보인 모양이다. 주술사의 왕도 아니고, 주술사의 왕 행세나 하는 주술사 나부랑이에게.
‘난감하네.’
마나를 아낀답시고 칼잡이 흉내를 냈던 탓이 컸다. 아마 저 주술사의 눈에는 이안이 딱 그 정도 수준으로 비춰졌으리라. 검을 다룰 줄 알며, 매직 미사일 수준의 최하급 마법을 구사하는 제국 마법사쯤으로.
‘불의 정령이라.’
정령을 표방한 주술로 이안을 공격한다.
하면 이안은 그 이상을 보여줘야겠지.
명색이 제국 최고의 마법사가 아니던가?
아직 비공식적이긴 하다만.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주술사의 불꽃을 피한 이안이 허공에 소환진을 그렸다. 늑대정령이나 유니콘을 소환할 때보다도 훨씬 복잡하기 짝이 없는 소환진, 그럼에도 한 치의 오차 없이 완성시킨 이안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소환술.”
이번만큼은 일부러 외친 거다.
제국어가 아닌, 원주민의 언어로.
놈들은 정령을 신앙처럼 믿으니까.
“불의 정령, 살라만다.”
주술사의 가짜 불의 정령 따위보다 훨씬 커다란, 압도적인 열기로 이글거리는 불꽃 도마뱀 한 마리. ‘불의 정령 살라만다’가 대초원의 땅에 소환되는 순간이었다.
“부, 불의 정령……?”
무려 진짜배기 정령의 등장이다. 주술사들의 모조품 따위가 아닌, 진정한 정령 살라만다가 소환된 거다. 하물며 주술사가 불러낸 가짜 정령을 순식간에 잡아먹어 버렸다.
“살고 싶다면.”
원주민들의 주변을 맴도는 살라만다.
후끈한 열기가 원주민들에게 전해졌다.
들이쉬는 것만으로 내장이 타버릴 것 같았다.
허튼 짓을 했다간 당장에 불살라버릴 기세였다.
“수작질은 거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