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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44화
15. 5년 후(1)
“으음.”
황실 도서관에서도 가장 쾌적한 이곳.
오직 황태자만이 출입할 수 있는 전용 도서관이었다.
황실에서 유일하게 ‘군주론’과 관련된 서책들을 보관하고 있으며, 황자들은 이용할 수 없다. 통치의 익힘이란 오로지 황태자의 전유물이니까.
“으으음!”
올해로 23살의 나이가 된 황태자 ‘하이든 그린리버’도 마찬가지였다. 아침부터 도서관에 나와 통치의 기본을 익히고 있었다. 비록 황태자라면 15살쯤 독파했어야 하는 책들이지만, 어찌 하겠는가? 배움의 시작이 엄청나게 늦었거늘.
“그러니까…… 백성들은 대부분 글을 모르니 바보라는 소린가? 무슨 내용이 이래? 까짓 모를 수도 있지. 거참.”
심지어 책의 내용을 잘못 이해하기까지 한다.
무려 5년이나 지났음에도 한결같은 모습이었다.
책이라도 꾸준히 읽는 게 장족의 발전이리라.
“에이! 오늘 같은 날은 역시.”
책을 덮는 것만큼은 화통하기 짝이 없는 황태자.
즉시 자리를 털고 도서관부터 빠져나왔다.
“전하.”
그러자 황태자궁의 상선내관 ‘테오’.
제2 황실기사단의 부단장 ‘폴’이 황태자에게 다가왔다.
“아침독서는 한 시간으로 정해진 것이 아니옵니까?”
“그렇긴 한데, 오늘은 영 날이 아니야.”
“폐하와의 약속을…….”
“내일, 아니 오후 독서 때 채울 테니까.”
“하오나…….”
상선내관 테오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또한 안다. 황태자가 자발적으로 책을 읽기 시작한 것 자체로 기적이란 사실을. 벌써 20년째 황태자의 곁을 보필해온 내관으로서 감히 장담할 수 있었다.
“부단장. 오늘이 그날이던가?”
“그날이라 하시면.”
“단장과 이안, 마지막 대련 말이야.”
“아, 그렇습니다.”
이안과 단장의 대련.
벌써 5년째 치러지고 있는 대련이다.
특별한 일이 없다면 일주일에 한번 꼴로 치러지며, 항상 이른 아침부터 시작해 하루가 시작될 때쯤 마무리를 지어왔다.
“지금쯤 제대로 붙고 있겠구먼.”
그들의 대련도 오늘로 마지막이라 한다.
그런 자리에 황태자가 빠질 수 있겠는가?
무려 왼팔과 오른팔의 마지막 대련인데 말이다.
“가지. 간만에 구경이나 해야겠어.”
대련장소는 제2 황실기사단 본부 연무장.
설레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황태자였다.
“볼 때마다 우리 단장이 처참하게 깨지던데, 요즘은 어때? 좀 나아졌나? 아님 여전히 그대로인가? 그대로라면 그냥 끝날 쯤에 가야겠어. 마음이 아프거든.”
황태자가 부단장 폴에게 물었다.
그들이 대련을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1년 전.
당시만 해도 올리버는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
이안 페이지라는 강력한 마법사에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그걸 왜 몰라? 부단장씩이?”
“전하께서 보신 것이 제게도 마지막이었습니다.”
“……아아.”
대련 중에는 올리버가 황태자의 곁을 지킬 수 없다.
그때만큼은 부단장 폴이 호위를 책임져야 한다. 즉 황태자의 발길이 소원해졌던 순간부터, 부단장 또한 그들의 격돌을 구경할 수가 없었다는 얘기다.
“그래도 뭐, 들은 게 있을 거 아닌가?”
“워낙 말을 아끼는 분인지라.”
“하긴, 그렇긴 하지.”
부단장의 말을 빠르게 수긍해 버린 황태자.
어느덧 제2 황실기사단 본부가 지척이었다.
단지 가까워졌을 뿐인데도 들려온다.
두 거물의 격돌로부터 파생되는 소리가.
“후우우…….”
제2 황실기사단의 대연무장.
그 한편으로 우뚝 선 갑옷차림의 남자.
이제는 중년에 접어든 ‘올리버’가 깊은 숨을 토해냈다.
이미 수 시간동안 진행된 대련, 마지막 격돌만 남겨두고 있었다.
‘마지막만큼은.’
올리버가 움켜쥔 검은 연습용 철검이었다.
애검이라 자신했던 놈들은 이미 예전에 박살났고, 마침내 깨달을 수 있었다. 마법사를 상대하는데 검의 수준은 필요 없다는 것을. 그 검이 전설적인 아티펙트라면 모를까.
‘기필코.’
자기최면을 걸 듯 되새기고 또 되새긴 올리버.
그의 머리 위로 수백 개 얼음덩이가 드리웠다.
모두 저 연무장 가운데 등을 지고 서 있는 청년.
갈색 머리칼을 길게 늘어트린 청년의 마법일 터.
심지어 저것들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할 뿐이다.
“하아아압!”
기합소리와 함께 올리버의 몸이 측면으로 튕겨졌다.
직선적인 접근은 상대의 마법에 금방 막혀 버린다.
사실 지금처럼 빙 둘러가는 것도 마찬가지다.
가능성을 조금이나마 쥐어짜낸 잔기술일 뿐.
파박! 파바바박! 파바박!
동시에 수백 발의 얼음덩이가 우수수 쏟아졌다.
목표가 지나간 바닥에 속속들이 꽂히는 얼음덩이들.
미처 피하지 못한 얼음은 싸구려 철검이 쳐냈다.
한데도 검이 깨지거나 상하지는 않았다.
“흐읍!”
올리버가 뛰던 방향을 황급히 틀어버렸다.
갑자기 저러는 까닭이 뭘까? 간단한 이유였다.
쿠구구구구……!
원래대로였다면 올리버가 향했을 바닥.
그 바닥이 원기둥처럼 하늘로 치솟았다.
표현 그대로 ‘간발의 차이’였다.
방향을 틀지 않았다면 저 기둥뿌리에 부딪쳤을 터.
5년의 수련이 새겨준 확고한 본능이었다.
‘다음은.’
하나 청년 마법사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부터 시작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열기.’
열기가 느껴지는 쪽으로 시선을 가져간 올리버.
그곳에는 커다란 주먹 모양의 불꽃 한 쌍이 땅바닥을.
정확히 표현하자면 올리버를 힘껏 내리찍기 시작했다.
쿠웅-!
한번을 가볍게 피하자.
쿠웅-! 쿠웅-!
두 개의 불꽃주먹이 연이어 생겨났다.
뿐이랴? 무차별적으로 휘두르기 시작한다.
덕분에 연무장 바닥은 하루도 성할 날이 없었다.
‘저 불꽃주먹은 곧 사라진다.’
이미 수차례 겪어봐서 알고 있다. 더 이상 신경 쓸 필요가 없다. 다음 주문이 펼쳐지기 전에 한발자국이라도 가까워져야 한다.
‘마법사에게.’
망설임 없이 마법사를 향해 달려드는 올리버.
그 뒤를 쫓던 불꽃주먹도 화르르 사라져 버렸다.
예상, 아니 경험 그대로였다.
파지지지직-!
올리버의 면전에 번개줄기가 뻗어왔다.
그쯤이야 몸을 빙그르 돌려 피할 수 있었다.
하나 바닥에 깔린 강력한 냉기, 올리버의 발목을 기다렸던 냉기만큼은 피하기가 어려웠다. 붙잡히면 거기서 끝이다.
“어딜!”
그의 재빠른 선택은 철검이었다. 발목 대신 철검을 내어준 거다. 손잡이까지 얼어붙은 철검을 미련 없이 내동댕이친 올리버. 그가 허리춤에서 또 다른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
이제 정말 몇 발자국 남지 않았다.
푸른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와의 거리가.
단 한 번이라도 닿을 수 있을까?
‘닿을 수 있다.’
굳건한 믿음과 함께 뻗어가는 전진.
그 앞을 거대한 불꽃 한 덩이가 막아섰다.
아니, 막아서고자 했다.
‘벤다.’
마나가 섞인 불꽃을 베어버리는 검사.
그런 칼잡이가 세상에 존재한다고?
5년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스걱!
지금은 아니다.
그런 칼잡이가 세상에 존재한다.
제2 황실기사단장 올리버 레이우드.
황태자의 호위기사가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두 갈래로 찢어진 불꽃 사이로 뚜렷하게 보인다.
아직 미동조차 하지 않는 청년 마법사의 모습이.
“하아아압!”
장장 5년의 목표.
그 지척에 도달한 올리버의 울부짖음.
번뜩이는 철검이 마법사의 심장을 노렸다.
대련의 정수가 담긴 마지막 찌르기였다.
푸욱!
망설임 없이 파고든 철검.
공격은 명백하게 성공했다.
실로 5년 만에 성공해 낸 쾌거.
‘…….’
한데도 올리버의 표정은 밝아질 수가 없었다.
피 한 방울조차 묻어나지 않았으니까.
육신을 파고드는 느낌 역시 없었으니까.
‘미러 이미지.’
육신의 형상을 복제해 내는 환영마법.
본체가 아닌, ‘미러 이미지’가 당한 거다.
올리버의 모든 것을 담은 찌르기에.
“고생하셨습니다.”
그 한마디와 함께 올리버의 등을 누르는 손가락.
올해로 열일곱의 청년 마법사, 이안 페이지였다.
“결국 생채기 한 줄을 내지 못하는군요.”
올리버는 이안의 본체를 감지하지 못했다.
실전이었다면 벌써 죽은 목숨이란 얘기다.
접근까지는 성공했으나, 끝내 닿지 않았다.
“심장을 노리시면서 생채기 운운하시면…….”
이제는 제법 사내다워진 이안의 목소리.
훌쩍 커버린 신장에 얼굴선도 꽉 잡혔다.
늘어뜨린 머리칼이 특히나 인상적이었다.
“상처라도 입는 날엔 진짜 죽겠네요.”
이안이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지난 5년, 올리버와의 대련은 그야말로 박진감이 넘쳤다. 전력을 다하지는 않았지만, 예상했던 힘의 허용치로부터 훨씬 더 멀어져야만 했다. 심지어 매주 강해졌다.
‘내가 남보고 괴물 운운하는 건 좀 웃기긴 한데.’
올리버 또한 확실히 괴물이었다. 저 재능과 노력이 마법사로서 발휘되었다면, 전생의 이안과 어깨를 나란히 했겠다 싶을 정도로.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검을 거둔 올리버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큰 도움을 받았다. 한계를 돌파했으니까.
비록 이안의 털끝하나 건드리지 못했지만.
“목걸이값 한 거죠.”
“그 이상의 은혜를 받았습니다.”
“방금 보니까 그런 것 같긴 하네요.”
오늘의 대련을 빠르게 복기해 본 이안.
불을 베어버리던 올리버의 모습이 떠올랐다.
이야기책에나 나올 법한 광경 아니던가?
“불을 베는 기사라. 그 양반한테 말해줘야…….”
“예?”
“아닙니다. 책 쓰는 양반이 생각나서.”
이안의 싱거운 대답에 올리버가 목청을 다듬었다.
“한 가지만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지금 이안 님의 경지는 어느 정도십니까?”
무려 5년이란 세월이 지났다.
올리버 자신이 5년 전보다 강해진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강해졌음이 자명할 터.
“기대하시는 만큼은 아닐 겁니다.”
그 질문에 씁쓸히 웃는 이안이었다.
물론 괄목할 만한 성장은 이루어냈다.
오히려 상식을 뛰어넘은 성장이긴 하다.
‘5클래스 마스터.’
5클래스 마법사의 경지.
그것도 마스터까지 오른 마법사는 역사상 손에 꼽힌다. 17살이라는 나이마저 감안한다면 그야말로 상상초월이다. 전생에도 26살이 되어서야 5클래스 초입에 접어들었으니까.
‘그래도 기대만큼은 한참 못 미치지.’
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목표했던 바는 최소 6클래스 마스터.
한데 예상치 못한 장벽이 성장세를 가로막았다.
‘육신의 근본적인 성장.’
제아무리 이안이라도 육신 본연의 성장속도 자체를, 그와 함께 자라나는 마나하트의 성장까지 촉진시킬 수는 없었다. 감히 상상이나 해봤겠는가? 다 자라지 못한 마나하트로는 5클래스 마스터가 한계였단 사실을.
‘애초에 불가능한 일.’
몸의 성장조차 끝나기 전에 5클래스를 넘어선다?
역사상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다.
당연히 기록도, 경험담도 없을 수밖에.
‘내가 최초일 테니까.’
마치 미개척지를 나아가는 느낌.
그 느낌이 크게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루 빨리 몸뚱이가 여물기만을 바랄 뿐.
“이야! 역시! 제국 최고의 마법사와 기사다워!”
이안의 생각이 깊어지는 그때였다.
박수소리와 함께 나타난 백금발 미남자.
5년이란 긴 세월을 무색케 만드는 존재.
황태자 하이든이었다.
“전하.”
“황태자 전하.”
이안과 올리버가 가볍게 예를 올렸다.
1년 전부터 슬슬 보이지 않는 것 같더니만, 오늘은 또 무슨 변덕이 불었을까?
“듣자하니 두 사람, 오늘이 마지막 대련이라던데.”
“예. 앞으로는 조금 바빠질 듯하여.”
이안의 대답에 황태자가 손뼉을 탁 쳤다.
“옳지. 다 함께 아침식사나 하면 되겠군. 내 오른팔과 왼팔의 무궁한 발전을 축하하는 의미로다가, 어떻겠느냐?”
황태자의 눈은 오직 이안만을 바라봤다.
애당초 올리버는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송구하오나.”
하나 이안에게는 사정이 있었다. 올리버와의 대련이 오늘로 마지막이듯, 또 다른 ‘마지막’이 이안을 기다렸으니까.
“상아탑의 개인교습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상아탑?”
“고위마법사로서 의무를 부여받는 날인지라, 아무래도.”
“아아! 그렇지 참.”
아카데미를 대신한, 5년간의 상아탑 개인교습도 오늘로 끝이 날 예정이었다. 이제부터 이안은 고위마법사이자 ‘의무자’가 된다. 지금까지는 ‘교육생’의 신분이었기에 모든 책무로부터 제외되었다. 하나 지금부터는 다르다.
“바빠진다는 게 그런 의미였군.”
황태자 또한 수긍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오른팔이나 다름없는 이안의 본격적인 ‘상아탑 점령기’가 시작되는 거다. 적어도 황태자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쩔 수 없지.”
“송구하옵니다.”
“아까부터 송구할 것도 많다.”
별일 아니라는 듯 손사래부터 치는 황태자.
이안에게 무한대나 마찬가지인 신뢰를 보냈다.
5년간 굳을 대로 굳어진 믿음의 증거였다.
“다녀오너라. 식사는 다음에 하자꾸나.”
“금방 시간을 만들도록 하겠습니다.”
황태자에게 예를 취해보인 이안.
올리버와도 막간의 눈인사를 나눴다.
“그럼.”
이안의 파란색 로브가 펄럭거렸다.
뿐이랴? 저 하늘로 치솟기 시작한다.
처음 목격했을 때는 크게 놀랐었다.
사람이 자유롭게 날아다니다니?
하나 이제는 놀라지 않는다.
두 사람 다 질리도록 봤으니까.
“다녀오겠습니다.”
이안의 모습이 순식간에 멀어져갔다.
처음 목격했을 때보다 더 빨라진 것 같다.
창공을 가르는 독수리가 부럽지 않을 정도로.
“다른 건 몰라도 저건 참 부러워. 나도 저렇게 날아봤으면 좋겠군. 새처럼, 아니 새보다 빠른가?”
사라져가는 이안을 한참 지켜보던 황태자.
그가 진심으로 부러운 듯 읊조렸다.
“단장.”
“하명하십시오.”
“대충 보아하니 거의 호각이던데, 이안하고 말이야. 응? 어때. 이제 좀 해볼 만한가? 마법사랑?”
그 물음에 올리버가 옅은 미소를 띠었다.
“두 가지로 대답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두 가지라?”
“먼저 이안 님은, 흠집 하나 낼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아주 솔직한, 그래서 더욱 자존심이 상할지도 모를 대답이었다. 하나 올리버는 아주 덤덤하게 말문을 이어갔다. 지난 5년 동안 충분히 체감했고, 충분히 인정했으니까.
“이 격차는 앞으로도 계속 벌어질 거라 생각합니다.”
“그 정도인가?”
“그 정도입니다.”
황태자 역시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대답.
아무리 그렇다 한들 흠집 하나 낼 수 없다니.
그 정도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오나, 다른 마법사라면.”
이어진 올리버의 목소리.
이번만큼은 아까와 어조부터 달랐다.
특유의 올곧은 자신감이 느껴졌다.
“예. 충분히 해볼 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