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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42화
14. 큰 공을 쌓다(1)
‘살다 살다 남의 동네 상아탑까지.’
마법사들이 대거 황궁으로 향한 상아탑.
그 내부로 숨어든 콜드워커 암살자 ‘다니엘’.
행동과는 달리 어느 때보다 긴장된 상태였다.
타국의 상아탑 내부 아니겠는가? 1, 2클래스 마법사 일부만 남아 있다고는 하나, 그마저도 정면으로 마주친다면 감당키 어렵다. 최상급 암살자라 한들 방도가 없다는 얘기다.
‘틈새 조금 벌리자고 별짓을 다했네.’
무려 그린리버 제국의 황궁을 테러했다. 어렵사리 침투시킨 첩자들을 복귀시켜야 하는 상황, 그만큼 세실리아의 발각은 본국의 심각한 문제였다. 이해할 수 없는 정황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실체를 확인해야만 앞으로의 행보를 정할 수 있으리라.
‘마나트랩만 조심하자고.’
상아탑 깊숙한 곳으로 내려가는 통로.
그 요소요소에 설치되어 있을 마나트랩.
마음같아선 제어실부터 찾아 작동을 중지시키고 싶었으나, 시간이 촉박하다. 지금껏 훈련받은 대로 회피 혹은 무력화시키며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애당초 본국도 그러한 부분을 고려하여 가장 특화된 암살자를 파견시킨 거니까.
‘별거 아니지.’
암살자 다니엘이 마나트랩을 차근차근 피하거나 속이며 빠르게 나아갔다. 그는 이 분야의 스페셜리스트다. 마나트랩 쯤이야 문제 될 건 없었다. 방해꾼만 없다면 말이다.
“휴우!”
세실리아가 감금된 마나감옥은 지하 중에서도 최하층, 바로 그 앞에 도착한 다니엘이 긴 숨을 내쉬었다. 마나감옥의 외벽을 통통 두드리면서.
“누구……?”
세실리아의 얼굴에 경계심이 잔뜩 했다. 상대는 복면과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으니까. 상아탑의 시험일지도 모르니 조심할 필요가 있다.
“나야. 언니.”
젊은 남자의 목소리다. 그런데 언니라고?
세실리아가 단박에 얼굴을 찡그렸다.
“다니엘?”
“눈치는 여전하셔.”
암살자 다니엘이 후드와 복면을 내렸다.
사창가의 계집마냥 진하게 분칠된 화장.
그 화장이 땀으로 한껏 번져 있었다.
보고 있기에 썩 좋은 몰골은 아니다.
“말해봐. 할 얘기 있지?”
“나, 난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어!”
가장 먼저 튀어나온 말은 역시나 자기변호.
진심이었다. 그녀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복면 쓴 자와의 만남이 거짓이란 사실조차도.
무슨 말을 하든 마나각인까지 해명해야 한다.
그럴 바에야 침묵으로 일관하는 쪽이 유리했다.
시간을 벌다 보면 본국의 조치가 취해질 테니까.
“알아. 근데 그런 거 말고.”
“이, 일단 풀어줘! 내가 직접 본국으로 가서…….”
“누가 안 풀어준데? 따로 움직여야 할 거 아니야? 당연히 내가 먼저 도착하겠지.”
먼저 도착해 보고부터 할 테니 필요한 정보를 달라.
다니엘의 뜻은 그러했다. 옳은 말이기도 하다.
보고를 해야 그에 따른 대처도 시작할 수 있다.
“그, 그 꼬마, 이안 페이지…… 그놈이 다 알고 있어.”
“뭘?”
“콜드워커의 존재, 소속 명단까지.”
“……사실이야?”
그 최연소로 고위마법사, 놈이 문제의 원흉일거라 예상은 하고 있었다. 다니엘뿐만 아니라 콜드워커를 아는 본국 인물 전체가 그렇게 생각했다. 한데 설마하니 그 정도였을 줄이야, 심지어 명단까지 확보하고 있다고?
“나도 몰랐던 마나각인까지 알고 있었어.”
“그건 대부분이 그래. 이제야 알려주더라. 위에서.”
어떠한 관점으로 보든, 상상 이상의 존재가 확실하다.
결코 가볍게 넘길 수 있는 사안이 아닐 터.
“그래서, 다른 건?”
“끝이야. 계속 떠들 시간 없잖아? 나가자니까?”
“흐음, 그렇단 말이지.”
고개를 끄덕인 다니엘이 마나감옥을 열었다.
급격하게 밝아지는 세실리아의 얼굴.
몇 발자국만 나가면 마법을 쓸 수 있다.
훈련된 첩자치고 생존욕구가 강한 그녀였다.
“참, 세실리아.”
“또 뭐…….”
더 이상 들리지 않는 세실리아의 목소리.
가녀린 목에 단검이 쑤셔 박힌 탓이었다.
아직 마나감옥 안, 그곳의 세실리아는 평범할 뿐.
마법사적인 반응도, 대처도 할 수가 없었다.
“쿨럭!”
피가 솟구치는 목을 부여잡은 채 주저앉아 버린 세실리아.
다니엘이 싱긋 웃으며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위에서도 언쟁이 꽤 길었어. 3클래스 마법산데, 구출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그리 말하며 세실리아가 입은 옷으로 단검의 피를 닦았다.
“결론은 이거야. 여기가 어딘데 혹을 달고 탈출해?”
곧 성벽이 닫히고 병사가 깔려 탈출로를 봉쇄할 터.
도주와 은신에 젬병인 세실리아는 짐짝일 뿐이다.
그 잘난 마법조차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그러게 노력 좀 하지. 평가점수도 최하위였던 주제에.”
“끄으으……!”
“마법 하나 믿고 떵떵거릴 때부터 알아봤다, 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난 다니엘.
해줄 조롱은 많았지만, 시간이 없다.
“그럼 잘 있어. 아니, 잘 가.”
“너도.”
“……?”
절묘하게 끼어드는 제3자의 목소리.
다니엘이 본능적으로 몸을 내던졌다.
“누구……!”
하나 그것은 쓰잘머리 없는 몸부림에 불과했다.
어느덧 다니엘의 발아래 한껏 맺혀 버린 냉기.
그 냉기가 얼어붙으며 두 다리를 낚아챘으니까.
“너, 넌……?”
작은 소년, 그리고 마법.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알아챌 수 있었다.
저놈이구나. 그 이안 페이지라는 마법사가.
‘벌써 왔다고? 사교장에서? 아니, 그보다…….’
기척을 지워내는 암살자로서의 능력, 그 반대로 기척을 감지해 내는 능력까지 콜드워커 내 최고라 자부했던 다니엘이다.
그런 자신이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니?
“생각보다 오래된 취미였네. 분칠 말이야. 덕분에 알아봤어.”
“너, 정체가 뭐지? 어떻게 우리를……?”
“세실리아는 벌써 제거한 건가?”
“우리 쪽에서 탈주한 놈? 아니면…….”
“잘했어. 고민 하나 덜었다.”
계속해서 물고 늘어지는 다니엘의 물음.
물론 대답해줄 생각이 전혀 없는 이안이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달려왔을 뿐이니까.
“그럼 이제…….”
“자, 잠깐! 날 생포하는 쪽이!”
“너만큼은 내 손으로 끝내고 싶었는데.”
“……뭐?”
“이제야 푸는군. 동기들의 한.”
“나는 네 동기를 죽인 적이…….”
“없겠지. 아직은.”
다니엘의 두 다리에 얼어붙었던 냉기.
그 냉기가 스멀스멀 위로 올라왔다.
허벅지를 지나 사타구니, 골반, 허리.
복부와 가슴, 어깨, 팔, 손가락까지.
“십 년도 더 남은 일이니까.”
“끄으으으윽……!”
필사적으로 발버둥치는 다니엘.
생존을 위한 본능이 아니었다.
본국에 정보를 넘기지 못한 후회.
그는 세실리아와 본질적으로 달랐다.
행실과 별개로, 완벽하게 길들여진 사냥개였으니까.
“이렇게 생각해. 저번에는 내 동기들이 죽었고.”
이윽고 목과 턱, 머리끝조차 전부.
그야말로 꽁꽁 얼어붙어 버린 다니엘의 전신.
얼음에서부터 탁한 빛이 맴돌았다.
“이번에는 네가 죽는 거야.”
다니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
아마 영원히 그 뜻을 알아차릴 수 없으리라.
“공평하게.”
잠시 기다렸던 이안이 얼음덩어리를 툭툭 쳤다.
가볍게 두드렸을 뿐인데, 쩍쩍 갈라지기 시작한다.
얼음덩어리로부터 토해지는 다니엘의 육신.
그가 얼음에 갇혀 있었던 시간은 찰나였다.
한데도 핏기 하나 없는 시체로 변해 버렸다.
‘보자.’
그런 다니엘의 시신을 이곳저곳 뒤적거린 이안.
혹시 모를 문제점이 있다면 사전에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콜드워커의 지령서라거나, 기타 문제가 발생될 물건들.
다행이 그러한 요소는 없는 듯하다.
‘이놈은 마나각인이…….’
다니엘의 마나각인 위치는 오른쪽 어깨뼈 아래.
그 위치를 찾아냈을 때쯤 마법사들이 몰려왔다.
이안이 상아탑으로 향했음을 전해들은 마법사들.
탑주는 황궁에 남아야 했기에 고위마법사 로난을 필두로 복귀했다.
“이게…… 이게 다 어찌 된 일인가?”
목을 부여잡은 채로 죽어 있는 세실리아.
이미 싸늘하게 식어버린 정체불명의 인물.
일련의 사태에 대한 해명을 요구하는 로난이었다.
“세실리아가 왜…… 그 자는 또 누구고?”
이안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다니엘의 어깨뼈 아래 마나각인.
바로 그 문양을 모두에게 보여줬다.
세실리아의 몸에 새겨진 것과 똑같은 문양을.
* * *
한차례 폭풍이 그린리버 제국을 휩쓸고 지나갔다.
가장 먼저 시작된 것은 대대적인 마나각인자 색출.
이번에야말로 ‘대대적’이라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였다.
황궁의 모든 인사는 물론 귀족부터 백성에 이르기까지.
전 영지를 대상으로 시행하라는 황명이 떨어졌으니까.
뒤늦은 행보였으나, 하지 않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벌써 황궁에서만 두 명의 인사가 행방불명되었소! 시녀부터 황실의 서기관까지! 그런 불순분자들이 활개치고 다니는 동안 대체 무얼 했단 말이오? 탑주. 대답을 해보시오! 모든 권한을 상아탑에 맡겨달라, 반드시 발본색원하겠다 장담하지 않으셨소?”
황제의 분노는 고스란히 상아탑으로 흘러들어갔다.
상아탑은 세실리아의 독점적인 조사를 허가받았다.
한데 성과는커녕 첩자들 간의 접촉까지 허용할 뻔했다.
동료로 추정되는 자들이 황궁마저 활개치고 다녔다.
입이 백 개라도 할 말 없는 상황이 아니겠는가.
“내 더 이상은 상아탑의 장담을 믿을 수가 없는 바, 오늘부로 상아탑에 위임했던 모든 수사권을 회수하겠소. 하니 지금껏 수집한 자료들을 황실과 기사단, 제국군에 공개토록 하시오. 짐의 말을 아시겠소?”
황실과 상아탑은 본디 수평적인 관계다.
하나 이럴 때만큼은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모든 명분과 대의가 황실 쪽으로 쏠렸다.
지금은 그저 넙죽 엎드리는 게 상책이리라.
“즉시 분부대로 행하도록 하겠나이다. 폐하.”
황제와 황태자, 그리고 모든 대소신료가 참석한 대전회의.
공손한 자세로 황제의 엄명을 떠받드는 탑주 허버트였다.
“물러가보시오. 할 일이 아주 태산 같을 터이니.”
황제가 엄중한 표정으로 탑주를 돌려보냈다.
수평적 관계란 쉬이 유지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때로는 친구같이, 때로는 철천지원수같이.
오직 황제만이 오를 수 있는 줄타기나 마찬가지였다.
‘저 녀석도 깨달아야 할 터인데.’
황제가 우측 아래 마련된 황태자석을 슬쩍 바라봤다.
뭐가 그리도 좋은지 헤실헤실 웃고 있는 황태자.
상아탑이 망신을 당하는 것 같아 좋은 모양이다.
‘……아직 멀었구나.’
숨을 푹 내쉰 황제가 다음 안건을 시작했다.
이번 사태의 가장 큰 책임은 단연코 상아탑에 있다.
하나 가장 큰 공로 역시 상아탑에서 가져갔다.
정확히는 상아탑의 최연소 고위마법사.
“마법사 이안 페이지는 앞으로 나와, 폐하께 예를 올리시오.”
내관의 목소리와 함께 대전으로 진입하는 소년.
아주 단정하며 깔끔한 차림새, 정갈히 넘긴 머리칼.
고위마법사 이안 페이지의 두 번째 알현이었다.
“또 보는구나. 이안 페이지.”
탑주를 대할 때와는 정반대로 온화해진 목소리.
황제 테리 그린리버가 이안에게 말했다.
“본론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모두에게 얘기할 기회부터 주겠느니라. 보고는 받았지만, 당사자의 직접적인 경험을 궁금해 하는 이들이 있을 터. 간략하게나마 말해줄 수 있겠느냐?”
사교장에서부터 상아탑 지하까지의 상황.
당시 떠올렸던 순간순간의 추측, 판단, 행동.
그 모든 것들을 직접 얘기해 달라는 요청이었다.
물론 상세한 내용은 신료들 모두가 알고 있었다.
이는 단지 공치사 전, 가벼운 분위기 전환일 뿐.
“물론이옵니다. 폐하.”
“하면 들려다오. 그날의 정황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