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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39화
13. 사교계(1)
“거의 절반 크기로 줄인 건데, 괜찮을까요?”
평온한 수도의 어느 날.
이안 페이지의 대저택 앞.
웬 소년 하나가 이안과 마주하고 있었다.
이안보다 서너 살 정도 많아 보이는 소년.
스람 공방의 견습생 ‘반스’였다.
“더 작아지긴 힘들겠죠?”
“예. 아무래도 지금보다 작게는 좀…….”
지니고 다니기 용이한 통신구의 형태.
이안은 끝내 떠올리지 못했다.
해서 스람의 공방에 다시금 의뢰를 맡겼다.
혹시 크기를 줄일 수 있다면 줄여 달라.
그 결과물이 지금 막 도착한 거다.
“충분하긴 합니다. 수고가 많았겠네요.”
“공방 최고의 실력자 분들이 며칠 고생 좀 하셨습니다. 저, 저도 많이 도왔고요.”
“그 정도로 어려운 작업입니까?”
“예. 아무래도 비싼 물건이다 보니 조심스러운 면도 있고요. 싹 다 해제한 다음에 기초 마나회로부터 차근차근…….”
복잡한 마도공학 언어들이 들려온다.
단 한마디조차 알아듣기 어려울 지경.
적당히 끊어내고자 말부터 돌리는 이안이었다.
“이건 의뢰빕니다.”
“아, 아뇨. 공방주님께서 돈은 받지 말라고…….”
“일한 대가는 받아야죠.”
“아휴, 절대 받지 말라고 당부하셨습니다요.”
돈 주머니를 권하는 이안. 한사코 거부하는 반스.
상관이 그리 명했다는데 어쩌겠는가? 더 높은 지위를 앞세워 강제로 쥐어줄 수도 있겠지만, 그래봐야 저 견습생 소년만 곤란하게 만들 뿐이다.
“그럼.”
이안이 의뢰비 중 일부를 집어 반스에게 건넸다.
“배달비라도 받으세요.”
“이, 이것도 저는…….”
이안은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챙겨두라는 암묵적인 표시.
반스 또한 침을 꿀꺽 삼키며 주머니에 넣었다.
“저,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까지 챙겨주시고.”
무려 고위마법사가 베풀어주는 친절이다.
무언가 생각 난 듯 쭈뼛거리기 시작한 반스.
표정이 영 좋지 않다.
“저, 저기 이안 님?”
“말씀하세요.”
“일전에, 이안 님께서 처음 공방에 찾아오셨을 때 말입니다. 그때 제가 너무 급한 바람에 그…… 무례를 조금 저질렀던 것 같기도…….”
뜬금없이 시작된 반스의 고해성사.
물론 기억에 남아 있는 이안이었다.
“화, 확실한 건 아닙니다만, 맞든 아니든 제가 너무 죄송스러워서. 혹시 기억하신다면 정말로 그때는…….”
그날 이후로 걱정이 컸나보다. 충분히 그럴 만 하다.
평범한 귀족도 아니고 고위마법사에게 무례를 저질렀으니, 어느 날 불쑥 찾아와 저놈들을 당장 끌어내라며 소리쳐도 할 말이 없으리라.
“아, 이제 기억이 좀 나네요.”
“예, 예?”
“비키라고 했었던가? 맞죠?”
“허업!”
역시, 괜히 말했다싶은 반스였다.
하여튼 입이 주책이다.
“앞으로는 조심하세요.”
“예, 옙! 조심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른 마법사나 귀족들한테는 조심하란 당부였는데.
그 말뜻을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굳이 정정해줄 필요는 없겠지.’
어차피 말조심하란 뜻은 똑같으니까.
반스를 돌려보낸 이안이 저택 안으로 돌아왔다.
“대장!”
아까부터 대화를 엿듣던 더글라스가 불쑥 말을 건다.
“새로운 부하예요?”
“뭐?”
“아까 그 형아요. 새 부하면 제 밑인데.”
“부하는 무슨.”
오늘은 더글라스의 첫 등교일이다.
갑자기 어디에 등교를 하느냐?
바로 ‘황립 연금술 아카데미’.
아주 예쁘게 차려입기까지 했다.
그 아버지인 레디오도 마찬가지였다.
“그럼 녀석 좀 데려다주고 오겠습니다.”
“다녀올게요, 대장!”
레디오 부자가 나서자 공허함이 내리깔린 대저택.
어머니도 요즘은 주방에서 통 나오시질 않는다.
새로운 ‘뉴 팥 파이’ 연구에 한창이셨으니까.
황태자의 ‘진흙’ 발언을 듣고 충격이 컸다더라.
그 여파로 이안만 소원성취 제대로 했다.
슬슬 팥 파이는 추억 속에 묻고 싶어질 정도로.
‘평화로워서 좋긴 한데.’
이안 역시 당분간은 크게 할 일이 없었다.
상아탑에서 하는 일이라곤 간단한 교육이 전부.
아카데미 과정을 개인교습 받는 거나 마찬가지다.
‘너무 평화롭단 말이지.’
시간을 되돌린 이래 쉴 새 없이 달려왔다.
마나반응검사부터 헬레느와의 일전까지.
체력이야 마나호흡으로 보충할 수 있다.
하나 정신적 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잠깐이나마 쉬고 싶었고, 마침 여유가 생겼다.
한데 그 여유란 놈이 오히려 어색해져 버렸다.
‘이렇게 쉬고 있어도 되는 걸까?’
그런 강박감으로부터 벗어나기가 어려웠다.
자꾸 뭔가를 해야만 할 것 같은 강박감.
힘을 되찾는 것도, 어머니를 지키는 일도.
상아탑의 신흥 세력을 일으킬 계획도.
라그나르를 향한 복수도.
할 일이 태산 같다.
“후우.”
커다란 의자에 몸을 뉘인 이안.
이럴 때 누군가라도 있었으면 좋으련만.
아무런 걱정 없이 농담이나 주고받을 상대가.
이안이 고위마법사임을 알면서도 술수나 견제, 두려움 따위를 전혀 느끼지 못할, 가히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이.
‘없나.’
어머니는 어머니다.
레디오는 걱정이 너무 많다.
더글라스는 아직 어리다.
그밖에 인물이라면…….
‘황태자?’
순간 황태자 하이든을 떠올린 이안.
어이가 없는 듯 머리까지 헝클어뜨린다.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떠올릴 사람이 없어서 황태자라니.
정말 머리가 어떻게 돼버렸나 보다.
지나친 정신적 피로 탓일까?
“이안 님.”
그때 저택의 하녀가 이안을 찾았다.
조금은 안면이 생긴 하녀 ‘하라’였다.
“황궁으로부터 초대장이 도착했습니다.”
“초대장이요?”
갑자기 웬 초대장이란 말인가?
딱히 초대받을 일은 없을 텐데?
빠르게 내용부터 확인해 본 이안.
황제가 보낸 초대장이 아니었다.
인장부터 황태자의 것이었으니까.
왠지 모를 반가움마저 느껴졌다.
‘사교계라.’
초대장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했다.
바로 황실의 ‘사교계’가 열린다는 것.
특히 이번에는 황제가 아닌, 황태자 주최란다.
그 자리에 이안과 베네사를 초대한다는 내용.
일주일 후, 장소는 당연하게도 황궁 무도회장이었다.
‘이런 자리에 나를 초대해?’
본디 마법사는 사교계에 초대받지 않는다.
상아탑의 무기가 강력한 마법이라면, 황실의 무기는 명분과 백성, 그리고 수많은 귀족가문이 보유한 사병과 재산이다. 따라서 귀족가문과의 관계가 중요할 수밖에 없고, 그 관계를 돈독히 유지시켜주는 ‘장치’ 중 하나로서 ‘사교계’가 존재하는 거다.
‘생각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그러한 자리에 상아탑의 마법사를.
그것도 고위마법사를 초대한다?
황제가 안다면 골치깨나 썩힐 일이리라.
-너에게만 미리 알려주는 것이니라!
더욱이 가관인 것은 초대장 아래.
자랑이랍시고 적힌 황태자의 친필이었다.
아마 이안 외 다른 귀족들한테는 사교계 전날.
혹은 당일 날 아침에야 초대장을 보낼 요량일 터.
아군이 되어도 모자랄 귀족들을 골탕 먹이기 위해서.
‘그래. 이런 놈이었지.’
마법사 초대에 이어 귀족들까지 불쾌하게 만든다.
사교계의 의미 자체를 역행해버리는 장난질.
이런 멍청한 장난이 취미인 놈 아니겠는가.
이런 자를 순간적으로나마 떠올리다니?
마음 편히 대화를 나눌만한 친구로?
스스로가 원망스러운 이안이었다.
딱 이용할 만큼만 이용해먹자.
더도 말고 딱 이용할 만큼만.
“…….”
그런데 왜 이토록 신경이 쓰이는 걸까?
이대로라면 가속화가 진행될 뿐이다.
전생보다도 훨씬 빨리 찾아올 거란 얘기다.
모든 귀족이 황태자로부터 등을 돌리는 순간이.
“하, 젠장.”
얼굴을 거칠게 문지른 이안.
그가 책상 앞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깃펜과 함께 누런 양피지 한 장을 펼쳤다.
황태자에게 편지를 쓰기 위함이었다.
‘말을 해줘도 못 알아먹으면, 거기까지인 거지.’
그렇게 되새기며 한 줄 한 줄 편지를 적어 내렸다.
* * *
이안이 보낸 편지는 제법 효과가 있었다.
사교계 초대가 예정되었던 귀족들.
그들 모두에게 일찌감치 초대장이 전달되었다.
하나 이안과 베네사의 이름은 끝내 빠지지 않았다.
황태자 주최 사교계의 초대 명부에서 말이다.
딱 절반만큼만 효과를 본 거다.
‘그래도 다행인 건가.’
결국 꼼짝없이 사교계에 참가해야 할 상황.
이안은 황제를 알현할 때처럼 차려입었다.
어머니 베네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저, 정말 들어가도 되는 건지 모르겠구나.”
생전 처음 황궁 앞에 서본 베네사.
그녀의 얼굴이 걱정으로 가득했다.
목소리마저 부들부들 떨린다.
“걱정 마세요. 별거 아니니까.”
이안도 사교계는 잘 알지 못한다. 다만 그런 생각은 해본 바가 있다.
처음 꽃단장한 어머니를 봤을 때, 귀족가의 영애였다면 사교계에서 한가락 하지 않았을까? 한데 오늘따라 더더욱 확신이 생겼다. 그간 잘 먹고 잘 쉰 대다가 황궁출신 하녀들에게 집중관리까지 받은 결과였다.
‘확실히 전문가들은 다르단 말이지.’
분칠부터 드레스와 장신구의 조합까지.
이안은 다시 한 번 느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아버지를 닮은 게 틀림없다.’
그것이 아니라면 다리 밑에서 주워왔거나.
출생조차 의심케 만드는 어머니의 자태였다.
“이안 님.”
마침 이안을 부르는 목소리.
사교계 손님들을 안내하는 하인이었다.
“초대 받으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이안 님, 그리고 이쪽은 페이지 부…… 인?”
순간 베네사의 외모에 놀란 듯 보이는 하인.
“마, 맞으신지요……?”
최연소 고위마법사 이안 페이지의 어미가 부엌데기 출신임은 꽤나 유명한 풍문이다. 특히 부엌데기와 마찬가지로 낮은 계층에 속하는 하인으로서는 더더욱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인생역전의 표본 그 자체였으니까.
‘무슨 부엌데기 출신이…….’
하인 역시 부엌데기라면 많이 봐왔다.
북부 여인 특유의 억척스러움도 안다.
그렇기에 자연스럽게 떠올렸던 외모와 분위기가 있다.
한데 그 예상을 가볍게 뛰어넘어 버렸다.
좀처럼 보기 드문 미인이 아닌가?
“제, 제가 그 페이지 부인은 맞습니다만, 문제라도……?”
“아! 아닙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이쪽으로.”
겨우 정신을 차린 하인이 앞장서 걸었다.
그럼에도 좀처럼 발길을 떼지 못하는 베네사.
“가요.”
“으, 응?”
그런 어머니의 손을 꽉 붙잡는 이안이었다.
“그럼, 편히 즐기시길.”
이안과 베네사를 사교장 안으로 안내해 준 하인.
그가 또 다른 손님을 맞이하고자 떠났다.
졸지에 둘만 덩그러니 남겨진 모자.
“새, 생각보다 사람이 많구나?”
“그러게요.”
전생에도 사교계와는 연이 없었던 이안이다.
당연한 얘기다. 상아탑의 마법사니까.
그것도 정점에 군림하지 않았던가.
호기롭게 별거 없다고 하긴 했다만.
솔직히 아는 바가 적었다.
‘듣던 거 이상인데.’
사교장은 크게 세 갈래로 분류되어 있었다.
먼저 초대된 귀족가문의 가주들이 모인 곳.
각각 젊은 후계자들이 모인 곳.
마지막으로 부인과 영애들이 모인 곳.
물론 법도가 그리 구분지은 것은 아니다.
암묵적으로 나뉘어져 있을 뿐.
일종의 관례라고 볼 수 있다.
‘어머니를 홀로 두기는…….’
언제까지 입구에 서 있을 수도 없는 일.
이안은 가주나 후계자들이 모인 자리로.
어머니는 여인들이 모인 자리로 가야 하는데.
영 내키지가 않는 이안이었다.
‘마법사임을 밝혀야 하나?’
이곳은 귀족들의 사교계다.
위세 높은 가문끼리의 돈독함.
더 높은 가문을 향한 굽실거림.
더 낮은 가문을 아우르는 차별.
실로 정치의 구렁텅이가 아닐 수 없다.
“이안.”
고민으로 가득한 이안의 얼굴 탓일까.
먼저 말문을 여는 어머니 베네사였다.
“엄마는 저쪽으로 가있으면 되는 거지?”
그녀 또한 눈이 있고 생각할 수 있다. 지금 이 사교장이 세 분류로 나뉘어 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있겠는가.
“아뇨. 그러실 필요는…….”
“괜찮아. 모두 고귀하신 분들이시잖니.”
웃는 얼굴로 아들을 안심시키는 베네사. 긴장된 발걸음과 함께 귀족가의 여인들이 모여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다른 이들이 하는 것처럼 술잔도 하나 집어 들었다.
“어머니.”
이안의 부름에 베네사가 뒤를 돌아봤다.
긴장으로 범벅이 된 그녀의 얼굴.
“아들이 누군지 알죠?”
“응?”
“여기 어머니보다 고귀한 사람, 없어요. 그러니까 당당하게 밝히세요. 아들이 누군지, 어디서 뭐하는 사람인지.”
단순히 어머니라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베네사는 상아탑의 4클래스 고위마법사, 바로 그런 권력자의 어머니다. 이 사교장에 모인 귀족 중 그 누구도 베네사보다 낮으면 낮지, 결코 위에 있을 수는 없으리라.
“그럼. 내 아들이 누군데.”
주먹을 불끈 쥐어 보인 베네사가 귀족여인들의 틈바구니 속으로 섞여 들어갔다. 씩씩한 모습이었지만, 이안은 여전히 불안했다. 어느 곳으로 가지도 못한 채 어머니 쪽만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