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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24화 (24/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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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4화

    6. 용언서(4)

    가고일의 시체가 이안의 발에 닿았다.

    곤죽이 되어버려 질퍽거리는 감촉.

    이젠 시체라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다.

    ‘일단 트랩은 다 빠진 것 같은데.’

    그렇다고 마냥 서 있을 수는 없다.

    마나 트랩이란 일회용 함정이 아니니까.

    마나가 충전되는 즉시 다시금 기능을 회복한다.

    즉 매개체를 제거해야 완전히 멈춘다는 얘기다.

    포도주 저장고의 냉기 마법과 같은 맥락.

    그 매개체가 이안의 목적이기도 했다.

    “생각보다 빨리 만났구나.”

    이안이 지하 최하층에 마련된 황금빛 단상으로 다가갔다.

    그 위에 가지런히 놓인 단 한 권의 서책.

    아주 오래되었음에도 먼지 한 톨 묻지 않은.

    보석으로 장식된 표지가 매우 인상적인 책이었다.

    “용언서.”

    이 용언서가 바로 구 상아탑 지하를 움직이는 매개체였다.

    서책 자체에 마나의 저장 기능이 내재된 거다.

    “이 쪽지도 여전하네.”

    그러한 용언서 위에 놓인 쪽지 한 장.

    뭔가 대단한 내용이 적혀 있을 것 같지만.

    -인간이 탐할 물건이 아니다.

    -이 쪽지를 읽을 네놈은 더더욱 아니겠지.

    다소 장난스러운 두 줄이 전부인 쪽지였다.

    첫 줄은 아주 틀린 말도 아니긴 하다.

    어지간해선 서문조차 이해하지 못할 테니까.

    물론 두 번째 줄은 인정불가다.

    ‘누가 썼을까?’

    마법사들이 모두 빠져나간 옛 상아탑.

    이곳을 제 집처럼 사용했을 누군가.

    아마 포도주 저장고도 이자의 작품일 터.

    ‘역시 드래곤?’

    드래곤이 인간의 언어로 쪽지를 남겨?

    그것도 저리 도발하듯 장난스럽게?

    전생에 봤을 때도 고민했던 생각들.

    결론부터 말하자면, 답은 없었다.

    단지.

    화르륵!

    손에 닿는 순간 스스로 불타 버린다는 것.

    평범한 쪽지조차 주문이 걸려 있다.

    모르긴 몰라도 이 용언서를 감춘 장본인이 아주 뛰어난 마법사임은 분명하다.

    ‘괴짜인데다가.’

    재 가루 묻은 손을 툭툭 턴 이안이 황금빛 단상으로부터 용언서를 집어 들었다. 단상을 통해 지하의 곳곳으로 전해지는 마나, 특히 저 마나트랩을 향한 공급을 완전히 끊어내야 했다. 꾸물거렸다간 마나 트랩이 또다시 발동할 터. 그땐 뼈도 못 추린다.

    지이이잉……!

    단상으로 흘러들어 가는 마나가 차단되는 소리.

    이제 마나 트랩도, 저장고의 냉기도 끊어지리라.

    ‘이번 생에는.’

    한결 여유를 되찾은 이안이 용언서를 바라봤다.

    언제 봐도 신비롭기 짝이 없는 물건.

    이 땅에 드래곤이 존재했다는 명백한 증거.

    이안을 과거로 돌려보낸 결정적인 힘.

    ‘접근 방법을 좀 다르게…….’

    그리 생각하며 용언서를 펼치는 이안이었다.

    책을 자주 잡아본 손이 행한 무의식적인 행동.

    한데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아니, 기이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어?”

    좀처럼 용언서로부터 눈을 떼지 못하는 이안.

    그럴 수밖에 없다. 전생과는 달랐으니까.

    ‘공백이……?’

    본래 장마다 빼곡하게 차있어야 할 용의 문자.

    그 사이사이에 수많은 공백이 존재했다.

    몇몇 특정한 문자가 전부 사라져 버린 것처럼.

    ‘어떻게 된 거지?’

    이안이 다시 한 번 용언서를 꼼꼼하게 훑었다.

    도대체 어떤 글자들이 모습을 감춘 걸까?

    ‘설마.’

    계속해서 살펴본 끝에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런 일이 발생한 까닭은 차치하더라도, 사라진 글자의 공통점만큼은 확실하게 보였으니까.

    ‘황금용 일족의 언어.’

    황금용 일족.

    황금빛 가죽과 비늘을 가진 드래곤들.

    오랜 풍문에 따르면 그들이 시공간을 책임지는 용의 일족이라 알려져 있다. 물론 그 풍문은 사실이었다. 이안이 그들의 언어로 회귀를 경험하며 증명하지 않았던가?

    ‘황금용 일족의 언어만 사라졌다.’

    이안이 연구했던, 시간마법을 가능케 만들었던 황금용 일족의 언어. 바로 그들의 언어가 용언서에서 자취를 감춘 것이다. 단 한 글자도 남김없이.

    ‘어째서?’

    가능한 일이냐는 물음은 차치해 두기로 했다.

    용의 언어, 시간의 회귀 자체가 비현실적일 일.

    가능과 불가능을 따지기에는 너무 멀리 왔다.

    다만 특정 언어들이 사라진 이유는 알아내야 한다.

    앞으로의 용언 연구에 핵심적인 자료가 될 터.

    ‘이미 사용을 했기 때문에?’

    지금으로선 가장 가능성이 높은 추론이다.

    이안은 이미 황금용의 언어로 시간을 되돌렸다.

    이게 무엇을 뜻하겠는가? 높은 수준의 마나만 되찾는다면 언제든 시간을 쥐락펴락할 수 있다는 얘기다. 분명 기대감이 있었다.

    ‘그걸 불가능하게 만들기 위해서라면…….’

    잠시 생각을 멈춘 이안.

    그가 책을 덮고 마나를 끌어 모았다.

    황금용의 언어를 읊어보기 위해서였다.

    지금의 수준으로는 몇 글자 내뱉기 힘들겠지만, 딱 한 글자라도 뱉어내는 것이 핵심이었다.

    [……!]

    역시, 상황은 예상대로 흘러갔다.

    용언서에서 사라진 황금용의 언어.

    그 언어를 단 한마디조차 뱉을 수 없었다.

    용언이란 단지 육성으로 토하는 소리가 아니다.

    마법을 통해 전하는, 그야말로 마나에 뿌리를 둔 언어다.

    ‘사라진 용언은 다시 쓸 수 없다.’

    지금 당장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하나였다.

    한 번 사용된 용언이 사라진다는 것은 즉, 일회용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황금용 일족의 용언뿐만 아니라, 이 용언서에 기록된 모든 용언이.

    ‘계속 되돌릴 수 있지 않을까 싶었는데.’

    감히 예상조차 못했던 사태.

    믿는 구석 하나가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

    이 사실을 몰랐다면 어찌할 뻔했는가?

    두 번째 삶, 그 무게가 더욱 무거워졌다.

    “흐음.”

    더 고민을 해봐야 나올 건 없었다.

    일단 챙길 것부터 챙겨서 나가야겠지.

    이후의 문제는 차차 생각하면 된다.

    마음을 정한 이안이 단상 아래부터 살폈다.

    전생과 같다면, 이쯤 어딘가 보관함이 있을 거다.

    유용하게 쓰일 가치가 담긴 보관함이.

    ‘있다.’

    이윽고 손에 닿은 보관함의 손잡이.

    그 손잡이를 있는 힘껏 끌어당겼다.

    드르륵!

    마치 서랍이 열리듯 뽑혀 나오는 커다란 보관함.

    그 안에 보관된 물건은 다름 아닌 고가의 ‘금은보화’들. 이안이 재물에 연연하지 않았던, 연연할 필요가 없었던 이유가 바로 이 보관함 안에 모두 담겨 있었다.

    ‘챙겨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앞으로의 계획에 재물 쓸 일이 자주 있을 터.

    필요할 때마다 부담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자금을 미리 확보해두는 편이 옳았다. 지원을 요구하는 방법도 있겠으나, 이왕이면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자금이 필요했다.

    ‘일단 값나가는 것부터.’

    마음 같아서는 몽땅 챙겨가고 싶다.

    하나 지금의 여건상 당장은 힘들었다.

    준비해온 자루는 하나, 그마저도 크지 않다.

    아쉽지만 다음을 기약하는 수밖에.

    ‘내가 무슨 도굴꾼도 아니고.’

    이러고 있자니 꼭 도굴꾼이 된 기분이었다.

    하기야, 틀린 표현도 아니리라.

    아무도 모르게 유적지를 찾아왔다.

    비밀리에 만들어진 지하통로까지 찾았다.

    그 아래 숨겨진 유물과 보석들을 챙긴다.

    챙기지 못한 보물을 어찌할까 고민한다.

    이게 도굴꾼이 아니고 또 뭐란 말인가?

    ‘근데 왜 이렇게…….’

    어느덧 자루에 최고급 보석이 가득 찼다.

    목표였던 용언서도 챙겼고, 가고일의 눈도 챙겼다.

    ‘든든하지?’

    정체 모를 든든함이 이안을 보듬었다.

    사라진 용언의 충격조차 망각될 정도로.

    참으로 묘한 기분.

    꼭 성공한 도굴꾼의 기분이었다.

    ‘한탕 제대로 친다’라는 표현을 이럴 때 쓰는 걸까?

    “……일단 나가자.”

    보석으로 가득한 자루를 등에 짊어진 이안.

    한시라도 빨리 빠져나갈 필요성을 느꼈다.

    이 석연찮은 만족감을 떨쳐내기 위해서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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