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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23화 (23/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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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3화

    6. 용언서(3)

    이안이 처음 용언서를 발견했을 때. 그땐 말 그대로 우연이었다.

    낙향을 하는 도중, 여행을 겸했다.

    지리를 익히거나 전쟁을 준비함이 아닌, 바람 따라 별길 따라 걷는 순수한 여행.

    옛 상아탑도 마찬가지였다.

    ‘한 번쯤 와보고 싶긴 했으니까.’

    이안은 당시 옛 상아탑의 지하에 숨겨진 포도주 저장고를 발견했었다. 냉기주문이 걸린 저장고였는데, 그래서인지 조금 남아 있던 와인의 숙성 상태가 아주 괜찮았다.

    ‘그냥 두기 아까울 정도로.’

    발길이 뚝 끊긴 옛 상아탑.

    사실상 폐하나 다름없는 곳.

    가만히 썩기에는 와인의 수준이 아까웠다.

    ‘옛 상아탑의 와인. 그럴싸하잖아?’

    남아 있는 멀쩡한 와인 몇 병을 챙긴 뒤, 저장고에 걸린 냉기 주문도 끊어내고자 했었다. 족히 백 년은 수고했을 매개체 아니겠는가? 대량의 마나가 주입되어 있을 터. 일어날지 모르는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제거하는 편이 옳았다.

    ‘그러다 발견했지. 더 아래가 있다는 사실을.’

    하나 냉기의 근원지는 저장고가 아니었다.

    당연히 매개체도 저장고에 존재하지 않았다.

    이는 훨씬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냉한 기운.

    “여전하네.”

    전생에 비해 일찍 찾은 포도주 저장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기억 속 그대로였다.

    차가운 공기, 마법으로 마감된 목재 술통들.

    제법 널따란 공간이 술통으로 가득했다.

    대부분 빈 술통이었다.

    ‘하여간 술 엄청 좋아해. 누군지는 몰라도.’

    이안이 가운데 위치한 대형 술통으로 다가갔다.

    족히 열 명의 장성은 들어갈 크기.

    바닥에 고정되어 꿈쩍도 하지 않는다.

    통 통!

    커다란 술통을 살짝 두드려 본 이안.

    속이 비었음을 알리는 공허한 소리만 들렸다.

    전생과 마찬가지로 크기만 클 뿐, 와인 한 방울 없는 텅텅 빈 술통이 확실했다.

    콰앙!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마법으로 하여금 커다란 술통을 박살 냈다.

    그러자 훤히 드러나는 술통의 내부.

    정상적인 술통이 아니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만 술통일 뿐, 아래가 뻥 뚫려 상아탑 본래의 돌바닥이 보였으니까.

    ‘입구를 참 현실적으로 숨겨놨단 말이야.’

    당시 이안은 고차원적인 입구가 존재할 거라 믿었다.

    마법으로 감춰놨다거나, 마법을 발동시켜야만 문이 열린다거나, 저장고의 입구가 그랬던 것처럼 지극히 상아탑과 어울리는 입구를 찾아 헤맸다.

    ‘현실은 술통 아래였지만.’

    등잔 밑이 어둡다고 했던가.

    어찌나 허탈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한숨이 다 나온다.

    드드드득!

    이안이 술통 아래 돌바닥을 옆으로 강하게 밀었다.

    부족한 근력은 마나를 통해 강화시켰다.

    휘오오오오……!

    강렬한 냉기와 함께 지하로 통하는 계단이 드러났다.

    비좁은 탓에 몸을 구겨야만 내려갈 수 있는 통로.

    물론 전생이 그랬다는 얘기다.

    ‘지금은 아니지.’

    작아진 이안의 몸뚱이로는 그럴 필요가 없다.

    아마 과거로 돌아온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어린 몸뚱이가 도움이 되는 상황은.

    첨벙!

    계단 아래 고인 물이 가장 먼저 이안을 반겼다.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컴컴한 지하.

    한 구의 라이트가 부족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라이트.”

    몇 구 더 만들고 나서야 방향을 잡을 수 있었다.

    이미 지나가본 길이라지만, 장님 신세로는 힘들다.

    더군다나 조금만 들어가면 ‘그놈’이 나타난다.

    ‘가고일.’

    비좁은 통로를 나와 둥그런 방에 도착했다.

    더 이상 나아갈 길이 보이지 않는 큼직한 방.

    그 가운데 석상이 하나 세워져 있었다.

    전생에 저 가고일 형상의 석상을 봤을 때.

    그때는 정말이지 크게 놀랐던 이안이다.

    진심으로 석상인 줄 알았으니까.

    ‘상아탑 지하에 가고일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어?’

    또한 중요한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리 마법사라도 가고일을 부리지는 못한다.

    즉, 이 지하는 상아탑이 만든 게 아니다.

    ‘포도주 저장고부터 이 가고일까지 전부.’

    마법사들이 상아탑을 옮겨간 직후 누군가 만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전생은 물론이거니와 지금도.

    파슷! 파스스……!

    가고일 석상이 돌가루를 흘리기 시작했다.

    곧 쩍쩍 갈라지며 흉측한 몰골을 드러낼 터.

    두 번은 놀라지 않는다.

    “카아아아아악-!”

    기괴한 울음소리와 함께 바위를 깨부수고 튀어나온 회색의 가고일. 놈이 침을 뚝뚝 흘리며 이안을 노려봤다. 오래간만의 먹잇감으로 낙점을 찍어버린 모양이다.

    ‘눈이 보라색이었군.’

    마치 자수정을 박아다 놓은 듯 영롱한 보랏빛 눈. 저 가고일의 눈이 연금업계에는 그렇게 귀하다는 얘기를 얼핏 들은 바가 있다. 생김새만 놓고 보자면 사실인 것 같다.

    ‘전생에는 제대로 보기 힘들었는데.’

    그때는 놀란 마음에 과한 힘을 썼다.

    지금으로선 감히 상상도 못할 마법을.

    자연히 생김새를 감상할 여유가 없었다.

    아작을 내다못해 가루로 만들어 버렸으니까.

    ‘레디오한테 가져다주면 좋아하겠어.’

    마침 이안에게도 연금술사가 한 명 있다.

    괜찮은 엘릭서 한 병 뽑아주지 않겠는가.

    “아쿠아 볼.”

    파이어 볼과 함께 가장 기초적인 원소 마법.

    ‘아쿠아 볼’ 여러 구가 이안의 주변에 나타났다.

    가고일을 상대로는 영 못 미더운 마법이었다.

    고작 해봐야 큼직한 물방울이 전부.

    반면 놈의 가죽은 돌덩이 수준이 아니던가?

    ‘화력이 전부는 아니거든.’

    현재의 이안은 가고일을 단숨에 찢어발길 능력이 없다. 하프 엘릭서라도 마셨다면 모를까, 인즉 마법적 효율을 극대화시켜야 하는 상황.

    “아쿠아 볼.”

    수많은 물방울이 가고일을 때렸다.

    물론 직접적인 타격이 들어가지는 않았다.

    그저 물에 젖기만 할뿐.

    “아쿠아…….”

    “카아아악!”

    울부짖으며 달려드는 가고일.

    이안의 물방울이 꽤나 거슬리는 모양이다.

    그럼에도 계속해서 물방울을 쏘아댔다.

    피하기가 무섭게 다시금 장전되는 아쿠아 볼.

    “카륵, 카르륵……!”

    미꾸라지처럼 이리저리 피하는 이안.

    급기야 가고일이 날개를 퍼덕거렸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듯하다.

    ‘피하는 건 끝인가.’

    마법으로 민첩해진 몸은 한계가 명확하다.

    날갯짓 섞인 돌진을 피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놈은 그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슬슬 두 번째 계획으로 넘어갈 시점이리라.

    “카아아아아-!”

    어쩐지 울부짖음에 확신이 느껴졌다.

    이번에야말로 저 자그마한 인간 먹잇감.

    이안을 잡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 말이다.

    놈의 날갯짓 섞인 쇄도가 시작되었다.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속도.

    그렇다면 이쪽은.

    “아이스 월.”

    얼음의 장벽이 순식간에 솟아올랐다.

    냉한 공기 덕에 생성 속도가 곱절은 빨랐다.

    가고일의 돌진을 가로막는 용도일까?

    아니, 그러한 용도는 결단코 아니었다.

    이안의 앞이 아닌, 발아래로부터 솟아났으니까.

    쾅!

    놈의 몸뚱이가 보기 좋게 얼음 장벽을 때렸다.

    상반신이 장벽을 꿰뚫을 정도로 강한 쇄도력.

    바꿔 말하자면, 그대로 얼음에 끼어버린 거다.

    당분간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벽 뒤에 있었으면 죽을 뻔했네.”

    얼음 장벽 위에 서 있던 이안.

    그가 바닥으로 사뿐히 내려왔다.

    가고일의 뒤꽁무니만 보이는 상황.

    만족한 듯 양손에 마나를 집중시켰다.

    파직! 파지직! 파지지직!

    이안의 양손에서 춤을 추기 시작한 번개.

    흠뻑 적셔놓은 값은 해야 하지 않겠는가?

    “라이트닝.”

    백색의 강렬한 번개 줄기가 가고일을 덮쳤다.

    아니, 가고일을 포함한 얼음 장벽 전체를 덮쳤다.

    놈의 단단한 가죽 뒤 꼭꼭 숨겨진 속살.

    그 속살까지 태우기에 번개만큼 좋은 수도 없으리라.

    “캬아아아악!”

    한동안 울려 퍼지는 가고일의 비명.

    그 찢어지는 소리가 점차 작아질 무렵.

    놈의 생기를 잃은 몸뚱이도 축 쳐져 버렸다.

    “휴우.”

    근방에 만연하는 가고일의 살타는 냄새.

    썩 맡기 좋은 냄새는 아니었다.

    계속 있다간 구역질이 날 것 같다.

    ‘슬슬 열릴 때가 됐는데.’

    이안의 기억으로는 그랬다.

    가고일을 처치하니 통로가 열렸다.

    정확히는 가고일이 석화되어 있던 중앙.

    그 단상 아래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다.

    다른 점이 없다면, 이번에도 마찬가지 아닐까.

    쿠웅! 쿠웅! 쿠구구구……!

    역시 예상대로였다.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중앙의 홀.

    육중한 무게를 뽐내듯 굉음을 토한다.

    이제 거의 다 왔다.

    저 구멍으로 내려가면 된다.

    단지, 그 전에 해둘 작업이 하나 있다.

    ‘여기서부터가 중요하지.’

    마음을 정한 이안이 가고일의 시체.

    그 다리를 잡아 통로 쪽으로 질질 끌고 갔다.

    덩치가 덩치이니만큼 상당히 무겁다.

    마나의 도움이 컸다.

    “아, 일단 눈부터.”

    막상 뽑으려니 내키지가 않는다.

    그래도 어쩌겠는가. 귀한 재료라 들었는데.

    두 눈 딱 감고 보랏빛 안구를 끄집어냈다.

    단단한 것이 자수정이나 다를 바 없었다.

    “좀 낫군.”

    촉감이 단단해서 천만 다행이다.

    물컹거렸다면 진심으로 싫었겠지.

    볼일을 끝낸 이안이 가고일 시체를 마저 옮겼다.

    그러고는 중앙의 홀 아래로 가차 없이 밀어버렸다.

    깊숙한 만큼 꽤 오랫동안 떨어진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쾅! 콰아앙! 콰쾅!

    구멍 아래로부터 들려오는 폭발음.

    그것은 단지 시작에 불과했다.

    폭발 외에도 수많은 소리가 들려왔으니까.

    번개가 치는 소리, 얼음이 얼어붙는 소리 등.

    하나같이 강력한 마법을 떠올리게끔 만든다.

    ‘무식하게도 깔아놨네.’

    저 소리의 정체는 ‘마나트랩’.

    전생에는 저 마나트랩을 이안이 직접 맞이했다. 당시야 최상위 방어마법을 사용했으니 별 문제 없었다지만, 지금의 수준으로는 힘들 거다. 그래서였다.

    ‘끝인가.’

    소란스러웠던 통로 아래가 잠잠해졌다.

    아직 트랩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나, 그 정도는 쉽게 막을 수 있으리라.

    “패더 폴.”

    드디어 코앞까지 다가온 용언서.

    그리고 몇 가지 ‘실용적인’ 물건들.

    모두 저 아래에 고이 모셔져 있을 터.

    저속낙하 주문과 함께 몸을 던지는 이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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