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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2화
6. 용언서 (2)
뚜각 뚜각 뚜각 뚜각…….
마차 밖 밤하늘이 참으로 맑았다.
말발굽에 맞춰 밤벌레 우는 소리도 들린다.
모그리안 영지와 작별을 고한지 22일째.
제법 괜찮은 기억들이 고향땅에 남았다.
모그리안 영주성의 수많은 사람들.
선임기사 에릭, 글 쓰는 병사 루카…….
확실히 전생과는 달랐다.
‘무엇보다.’
이안이 어머니를 바라봤다.
외지로 나오는 것은 이번이 처음일 터.
흥미로운 눈으로 마차 밖 풍경을 감상했다.
전생에는 없었던, 가장 값진 결과.
‘새로운 사람들도 얻었고.’
옆으로는 연금술사 레디오. 그리고 그의 아들 더글라스가 보였다.
이미 죽었을 남자와 끝내 적이 되었을 아이.
그들은 커다란 마차에 몸을 실은 채로 황성으로 향하고 있었다.
덕분에 많이 가까워졌다.
‘나쁘지 않네.’
이 평화가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알 수는 없으나, 한 가지는 확실하다.
평화란 스스로의 손으로 쟁취하는 것.
외압이든, 내부에서의 분열이든 통제할 수 있는 힘이 필요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상념에 빠졌던 이안을 끄집어내는 베네사의 목소리.
“어찌 그러십니까?”
이안이 물으려던 말을 레디오가 먼저 묻는다.
요즘 들어 어머니께 말을 자주 건다.
심지어 좀 친해진 것 같다.
‘이 양반 봐라?’
생각해 보니 나이대도 비슷하다.
물론 레디오 쪽이 서넛 더 많겠다만.
너무 예민하게 반응하는 걸까.
“아가씨께서 편지를 주셨는데, 가는 길에 읽어보라고…….”
보따리 속 편지 한 장을 꺼내 드는 베네사.
대영주의 딸 마가렛이 쓴 편지인 모양이다.
“글을 몰라서…… 이안, 좀 읽어주겠니?”
이안이 편지를 건네받으려는 그 순간.
“제가 읽어드리지요. 이래 봬도 글줄은 좀 됩니다.”
“그래주시겠어요?”
“하하, 어려운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생기를 거의 완벽하게 되찾은 레디오.
성격뿐만 아니라 외모까지 제자리를 찾았다.
하얗게 세어버린 머리칼이 오히려 그럴싸한 얼굴.
하지만.
“자, 어디 보…… 응?”
마법으로 하여금 편지를 날려 버린 이안.
팔랑팔랑 날아올라 이안의 손 위에 떨어진다.
“바람에 날렸나 봅니다.”
말도 안 되는 논리로 상황을 일축시킨다.
마법사가 그렇다는 데 어쩔 거야?
레디오가 자신을 어떻게 쳐다보든.
어머니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보든.
하물며 더글라스가 어떤 눈으로 보든.
이안은 신경 쓰지 않고 편지를 훑었다.
“흐음.”
“왜? 무슨 내용인데?”
별 내용은 아니다. 나쁜 내용도 아니고.
몇 가지 거슬리는 부분이 있기는 한데.
어머니와 관련된 부분만 읽어드려야겠다.
“죄송하대요.”
“죄송? 무슨 죄송?”
“부엌데기로 계실 때 사사건건 트집 잡은 거. 저랑 영주성에 들어갔을 때도 계속 무시한 거. 기타 등등 본인이 했던 잘못 전부 다.”
정말이다. 참 구구절절하게도 서술해 놓았다.
이안은 대충 뭉뚱그려 얘기했지만, 언제 어떻게 무슨 소리를 했는지 세세하게도 적혀 있었다. 놀라운 기억력이다.
‘의외의 재능이야.’
이안도 누군가와의 일을 이렇게까지 기억하지는 못할 것 같은데. 생각보다 기억력이 뛰어난 아가씨였다.
‘그냥 못된 짓만 기억을 잘하거나.’
그쪽으로 생각해 보니 또 그게 맞는 것 같다.
어찌되었든 정신을 좀 차린 것 같으니 다행이다.
언제 또 만날지는 모르겠으나, 많이 달라져 있겠지.
지금의 모습과는, 또한 전생의 모습과는.
“죄송하실 것도 없는데, 그래서 다른 내용은?”
“끝이에요. 행복하게 잘살래요.”
“정말? 그게 끝이야?”
“네.”
왠지 의구심으로 가득한 베네사의 눈초리.
그때였다. 마차가 점점 느려지더니 멈춰 섰다.
목적지에 도착한 모양이다.
“이안 님.”
마차를 호위하는 제국군이 이안을 불렀다.
“도착했습니다.”
그 말에 모두들 마차 바깥으로 내렸다.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역시 상아탑.
저 멀리 구 상아탑과 그 터가 보인다.
울퉁불퉁한 돌로 투박하게 쌓아올린 돌탑.
정갈히 깎여 정성스럽게 쌓아진 황성의 상아탑과는 그야말로 정반대의 느낌이었다.
“이틀간 저쪽 노예 마을을 기점으로 머물 예정입니다. 그사이 이안 님께서는 자유롭게 구 상아탑을 구경하시라는 황태자 전하의 하명이십니다.”
‘노예 마을’이라는 다소 노골적인 이름의 마을.
이안도 익히 알고 있는 마을이다. 처음 듣는 모험가들 입장에서는 ‘왜 마을 이름을 그따위로 지었나’ 싶겠지만, 저 이름 자체가 마을의 근본이요, 역사였다.
‘상아탑의 노예들이 살았던 곳이니까.’
구 상아탑의 터가 마법사들로 가득하던 시절. 당시 상아탑의 잡일을 도맡았던 이들이 작은 마을을 이루었다. 상아탑이 옮겨간 이후로도 이 마을에 꾸준히 살았고, 지금은 그 후손들이 자유민으로서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도 좀 그렇긴 하지만.’
후손들이 택한 이름인 것을 어찌하랴.
함부로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었다.
“일행 분들께서는 이쪽으로. 거처하실 곳을 안내해드리겠습니다.”
마을에는 황태자와 촌장이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뭐가 그리 좋은지 웃음소리로 가득했다. 황태자 쪽의 웃음소리가 대부분이었지만, 간간히 촌장도 미소를 흘렸다.
“황태자님께서 이 누추한 마을을 찾아주시다니, 만대에 걸친 크나큰 축복이자 광명이옵니다.”
“하하하! 뭐 그 정도씩이야. 그래, 살 만한가?”
“실은 올해 흉작이 드는 바람에…….”
요즘 부쩍 느끼는 거지만 상당히 독특하다.
저 얼간이 황태자 하이든 말이다.
‘평범한 사람들한테는 그나마…….’
귀족이나 마법사, 황자들이 아닌 평범한 이들.
예컨대 백성들에게는 그나마 좀 사람같이 군다.
물론 그것이 왕으로서의 자질이나 백성을 아끼는 성군의 마음, 뭐 그런 부류의 군왕적 미덕은 결코 아니었다.
단지 자기보다 못하다고 판단되는 자들.
자신에게 진심어린 경외심을 보이는 자들.
말 한마디면 죽는 시늉이라도 할 만한 사람들.
그들한테는 전혀 느껴지지 않을 테니까.
‘열등감이.’
물론 백성을 자신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는 그 자체에서 이미 글러먹었다만, 그래도 감지덕지 아니겠는가?
‘아무한테나 행패를 부리는 것보다야.’
아마 이안을 향한 태도가 수그러진 이유도 비슷한 까닭일 거다. 아직 상아탑의 일원도 아닌데다가 태생은 천출, 하다못해 유적지 구경 따위를 일생의 소원이라고 떠드는 아이. 몸소 그 소원까지 들어줬으니 지금쯤 얼마나 영광으로 여길까!
황태자의 눈에는 그리 비쳐지겠지.
‘황족으로 태어난 게 죄라면 죄인가.’
황제가 유독 황태자를 감싸고도는 이유, 조금 알 것도 같았다.
‘그나저나 상아탑은…….’
지금부터 이틀이라는 시간이 생겼다.
그사이 상아탑 지하에 다녀와야 한다.
몇 가지 장치가 있어 시간이 꽤 걸릴 터, 일정을 넉넉히 잡고 가는 편이 옳다.
“저기, 대장님.”
더글라스가 이안을 톡톡 치며 말했다.
괜히 대장이란 호칭을 허락한 것 같다.
설마 계속 그렇게 부를 줄은 이안도 몰랐다.
“상아탑은 언제 가실 거예요?”
“그건 왜?”
“저, 저도 구경해보고 싶어서…….”
아무래도 지하는 새벽에 다녀와야겠다.
결심을 세운 이안이 말문을 열었다.
“내일 시간 봐서 다녀오자.”
“정말요? 같이요?”
“그래.”
“우와! 감사합니다!”
마치 어른을 대하듯 깍듯한 태도.
마법사라는 위치가 적응이 된 모양이다.
하기야, 저번 생에도 깍듯하긴 했다.
“그리고 대장님, 이거…….”
“응?”
이안에게 무언가를 건네는 더글라스.
붉은 액체가 담긴 작은 병이었다.
“이게 뭔데?”
“쉿! 제가 만든 상처치료제예요.”
“상처치료제?”
연금술에서는 아주 기초적인 물약.
그렇다고 어린 꼬마가 만들 물건도 아니다.
“아빠가 다른 사람들 보여주면 안 된다고 했는데, 특별히 대장님한테만 드리는 거예요.”
큰 비밀이라도 공유하는 양 조심스러운 녀석.
“고마워.”
잽싸게 품속으로 숨기며 장단을 맞춰주는 이안이었다.
‘재능은 재능인가.’
요 며칠 레디오의 도감을 보며 뚝딱뚝딱 거린다고 생각하긴 했다. 한데 설마하니 벌써부터 그 결과물을 선보일 줄이야. 과연 레디오가 숨길 만도 하다.
“이안 님과 일행 분들께선 이 집을 사용하시면 됩니다.”
병사의 안내에 따라 도착한 오두막집.
전체적으로 썩 훌륭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하나 이 마을에 한해서는 아주 괜찮은 거처였다.
“그럼 모쪼록 편히 쉬시길.”
어두운 밤은 계속해서 깊어져 갔다.
그사이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마을을 중심으로 사방에 야영지가 세워졌다.
북으로는 제국군 병사들의 야영지가, 남으로는 제2 황실기사단의 야영지가.
숙련된 병사들답게 그야말로 척하면 척.
‘몰래 다녀오는 것도 일이겠군.’
그 광경에 이안이 혀를 끌끌 찼다.
당장 빠져나가는 것부터가 일이라니.
되도록이면 마나를 아껴야 할 텐데.
‘천천히 가자. 천천히.’
밤공기를 얼마나 마셨을까.
불침번 서는 병사들조차 꾸벅꾸벅 거릴 새벽.
바야흐로 이안의 유적지 탐방이 시작되었다.
말이 좋아 탐방이지, 조금 위험할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