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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21화 (2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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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클래스 마법사의 회귀 21화

    6. 용언서(1)

    술과 고기, 연주로 가득했던 영주성은 어느덧 묵직한 공기만이 남았다. 더 이상의 연회도, 더 이상의 와인도, 더 이상의 웃음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 정도였을 줄이야.’

    영주성에 마련된 황태자의 처소.

    황태자는 여전히 아까의 일을 떠올리며 북부 와인을 홀짝였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흥미로웠다.

    ‘어린놈이 그렇게 강할 수가 있나?’

    마법사가 첩자로 의심되는 정황이 밝혀져서?

    아니, 그런 건 황태자에게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단지 세실리아를 상대로 그 꼬마가 승리했다는 사실.

    오직 그것만이 황태자의 흥미를 끌어당겼다.

    ‘별거 없는 놈이라고 생각했는데.’

    황태자도 3클래스가 어떤 의미인지는 알고 있다.

    대부분은 2클래스조차 넘기기 힘들다고 들었으니까.

    한데 그런 자를 이겼다.

    그 이안이라는 꼬마가.

    슬슬 탐이 나기 시작했다.

    ‘오른쪽으로는 단장, 왼쪽에는 그놈이라…….’

    검으로는 이미 절대적인 입지를 가진 올리버.

    발전가능성이 무궁무진한 이안.

    이 둘을 곁에 거느릴 수만 있다면?

    모두가 자신의 발 앞에 설설 기지 않을까?

    별궁의 눈엣가시 같은 황자 놈들도.

    상아탑의 콧대 높은 마법사 놈들도.

    ‘한데 어떻게 구슬리지?’

    살면서 한 번도 타인의 마음을 얻어 본 바가 없다.

    사람 구슬리는 법을 알 턱이 있겠는가.

    ‘그렇지! 아바마마처럼 해보는 거야.’

    평소 많이 봐왔다.

    아바마마께서 공을 치하하는 방법.

    그대로 한 번 해보는 거다.

    못 할 것도 없잖아?

    “단장.”

    “하명하십시오.”

    “그놈, 여기로 데려와.”

    황태자의 말을 이해한 단장 올리버.

    대기 중인 수하들로 하여금 이안을 대령시켰다.

    “찾으셨습니까. 황태자 전하.”

    “오, 왔구나. 왔어.”

    황태자가 가식적인 얼굴로 이안을 맞이한다.

    처음 봤을 때와는 정반대의 태도였다.

    설마 저 정도로 돌변할 줄이야.

    사람이라면 조금 민망할 법도 할 텐데.

    “내 너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래, 너의 그 뛰어난 무용에 감탄했도다. 그 첩자 년도 대단한 마법사가 아니었더냐? 그런 년을 산 채로 잡아다 놨으니, 네 공이 큰 줄로 안다.”

    “황공하옵니다.”

    한껏 의기양양해진 황태자의 목소리.

    스스로 생각해도 제법 근엄했다 여기는 모양이다.

    “해서 말이지. 내 특별히 너에게 상을 내리고 싶구나. 혹 받고 싶은 상이 있더냐? 돈이든, 황금이든, 땅이든. 말만 한다면 무엇이든 들어주마.”

    이안은 자칫 코웃음을 칠 뻔했다.

    지금 제 아비라도 따라하겠다는 건가?

    어설퍼도 너무 어설프다.

    ‘그렇게 말해봐야 요구할 것도 없는데 말이지.’

    말 그대로다.

    황태자에게는 요구할 만한 게 아무것도 없다.

    현 황제나 상아탑의 탑주라면 모를까.

    해봤자 재물이 전부일 터.

    ‘말 나온 김에 얘기나 한번 해볼까.’

    순간 적절한 요구가 한 가지 떠오르는 이안이었다.

    들어줄지는 모르겠다만, 요구해 볼 가치는 충분하다.

    가는 길이 좀 애매하여 나중에나 들릴까 싶었는데.

    “하오면…….”

    “말해봐라.”

    “전하께서 허락만 해주신다면, 황성으로 가는 길에 옛 상아탑의 터를 구경해 보고 싶습니다.”

    “옛 상아탑의 터를?”

    옛 상아탑의 터.

    백여 전까지만 해도 상아탑이 자리했던 일종의 유적지다.

    상아탑이 황성과 가까운 지금과는 달리 아주 먼 곳에 있었다.

    “그 폐허는 왜? 뭐 볼게 있다고.”

    “소인에게는 이야기로만 접할 수 있었던 땅입니다. 언젠가 한번쯤 꼭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황태자로서는 너무 소박한 청이었다.

    소박함을 넘어 이해조차 되지 않는 소원.

    억만금의 금은보화나 벼슬까지는 아니더라도, 무언가 재물적인 가치를 바랄 거라 여겼거늘. 고작 바란다는 게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유적지 탐방이라니. 역시 어린놈은 어린놈이다. 적어도 겉모습만 어릴 뿐 권좌에 눈이 먼 황자 놈들과는 달랐다.

    ‘까짓 못 들어줄 것도 없지.’

    옛 상아탑의 터라면 돌아가는 길과 조금 엇나가기는 했다.

    물론 가는 길에 들리지 못할 정도로 먼 거리 또한 아니었다.

    “정 소원이라면, 들어주도록 하마.”

    그 말에 이안이 쾌재를 불렀다.

    생각보다 빨리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옛 상아탑의 터, 그곳 깊숙한 지하에 숨겨진 물건.

    ‘용언서.’

    전생에는 죽기 몇 년 전에야 찾아낸 고대의 서책.

    시간마법을 연구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해준 서책.

    이안조차 제대로 완독할 수 없었던, 극히 일부분만 이해할 수 있었던 용의 언어. 바로 그 정수가 기록된 한 권의 책을.

    ‘이번 생에는 얼마나 이해할 수 있을까?’

    어쩔 수 없는 마법사 특유의 탐구심.

    두근거림이 느껴지는 이안이었다.

    * * *

    그린리버의 하늘과 가장 가까운 높다란 탑.

    마법의 중심이자 기록의 보고 상아탑.

    지금 그곳에 한바탕 난리가 불었다.

    소속된 모든 마법사가 마나각인의 유무를 검사받았다.

    아카데미의 학도들도, 상아탑의 마법사들도.

    북부의 사건으로 인한 대대적인 검사였다.

    “밝혀진 건 아무것도 없소. 각인의 의미조차 알 수 없는 상황 아니오? 하물며 복면을 썼다는 제삼자가 잡히지도 않았소. 결국 그 아이의 증언이 전부라는 얘긴데.”

    탑주 허버트를 포함한 상아탑의 고위마법사들.

    그들 또한 긴급히 소집된 회의장에서 두 가지 안건을 논하고 있었다.

    “반면 그녀는 오랜 세월을 상아탑과 제국에 헌신해 온 마법사요. 어떤 누명을 썼을지, 어떤 모함을 받았을지 모른다는 일이오. 더군다나 그곳에는 황태자가 계시지 않소? 전하께서 평소 상아탑을 어찌 생각하시더이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역시 세실리아였다.

    상아탑에서 타국의, 또는 어떤 집단의 첩자로 의심되는 마법사가 나타났다. 그것도 무려 3클래스의 마법사란다. 자칫 상아탑 전체의 위신이 땅바닥에 떨어질지도 모르는 중차대한 문제.

    “그러한 바, 직접 조사를 인계받기 전까지 상아탑은 그녀를 향한 모든 의심과 억측을 잠정적으로 보류하도록 하겠소. 이는 탑주로서의 명령이오.”

    상아탑이란 예로부터 그런 집단이었다.

    철저히 안으로 감싸고 도는 집단.

    마법사라는 자존심과 유대감으로 묶인 집단.

    그들은 강하나, 극소수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더더욱 하나로 뭉쳐야만했다.

    강한 힘에는 더럽고 추악한 견제가 따르는 법.

    수많은 견제로부터 자유롭기 위한, 나아가 상대를 찍어 누르고 머리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수단. 그것이야말로 상아탑의 존재의의였으니까.

    “또한 이번 사건의 증인이자, 여러분도 익숙할 이름…….”

    일순간 마법사들의 눈이 번뜩였다.

    그들에게도 이안의 이름은 흥미로움 그 자체.

    “그 이안 페이지라는 소년을 어떻게 규정해야 하는가.”

    몇몇은 이미 흥미로움을 넘어섰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이안이란 상아탑에서 아주 뜨거운 존재였다.

    “지금까지 모든 정보를 규합했을 때, 당장 이 소년이 가진 마법적 역량은 최소한 2클래스 마스터. 어쩌면 그 이상에 버금갈지도 모른다는 판단이 내려졌소.”

    탑주의 말에 장내가 술렁거렸다.

    그들도 들은 것이 있으니 예상은 하고 있었다.

    다만 개인의 예상과 탑주의 공식적인 확언은 무게부터 달랐다.

    단순히 클래스의 성취도를 문제 삼는 것이 아니다.

    배우지도 못한 마법을 부린다는 사실 자체가 문제였다.

    “해서, 상아탑은 보다 대대적인 조사단을 꾸릴 예정이오.”

    이안의 모든 것을 파헤치기 위한 조사단.

    필연적으로 고위마법사들의 힘이 필요할 터.

    ”정말 그 아이가 누구에게도 마법을 배운 바가 없는지, 지금껏 평범하게 자라온 소년이 맞는지, 어떤 환경에서 자랐는지, 부모는 어떤 자들인지. 상아탑의 힘을 총동원해서라도 빠짐없이 밝혀내겠소. 하니 여러분도 힘을 빌려주시길 바라오.”

    회의장 전체가 수긍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불미스러운 점이 있다면 밝혀내야 한다.

    이미 세실리아라는 전례가 생기지 않았던가?

    “다만 조사가 끝난 후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 즉 이안 페이지를 둘러싼 수많은 의혹들이 전부 걷어진다면…….”

    잠시 말문을 멈춘 탑주 허버트.

    “그때는 인정을 해야겠지.”

    이안이라는 소년이 가진 비현실적인 재능.

    가히 ‘최초의 마법사’와 비견되는 천재성.

    모든 것에 대한 의심을 지워야 한다는 선언이었다.

    “그래야 대책을 강구하지 않겠소? ‘최초의 마법사’에 버금가는 재능을 아군으로, 완벽한 상아탑의 소유물로 키워낼 대책 말이오.”

    탑주는 제국이 아닌, 상아탑만을 입에 담았다.

    상아탑의 일원이 아닌, 소유물이라고도 표현했다.

    이는 결코 말실수 따위가 아니었다.

    “마냥 어르고 달래 무언가를 쥐어주는 것만이 능사는 아닐 터. 우리는 우리만의 방법을, 오직 상아탑만이 행할 수 있는 대책을 세울 것이외다.”

    회의에 참석한 마법사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스럽게도 이안의 나이가 아직 어리다.

    힘을 가졌다한들 성숙하지는 못할 터.

    상아탑으로선 그 점이 가장 중요했다.

    “충분히 길들일 수 있는 나이가 아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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