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16/16)
  • “응. 자기 전에 놀자고 했어…….”

    “그럼 붕붕이를 혼내주어야겠군.”

    환이 환희의 방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환희가 소리를 빽 질렀다.

    “붕붕이 괴롭히지 마! 내가 조져버릴 거야!”

    딸이 내지른 경박한 말에 해진이 경악했다.

    “환희야! 너 그 말 어디서 배웠어! 그런 말 쓰면 안 돼.”

    “환이 아빠한테서 배웠어.”

    이환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얼마 전에 박 비서와 통화하면서 얼핏 했던 말을 찰떡같이 기억하고 배운 모양이었다. 하여튼 이상한 쪽으로 머리가 비상해서 걱정이었다.

    “애 앞에서 나쁜 말 쓰지 말라고 했죠!”

    “그게 아니라…….”

    “맞아, 환이 아빠 자꾸 박 비소 삼촌한테 나쁜 말 해.”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환희 너도 조용히 해.”

    해진이 엄하게 말하고서야 두 부녀는 조용해졌다.

    “흠.”

    “힝.”

    결국 붕붕이는 혼이 나지 않았고, 오후에 가까운 공원으로 소풍을 갔다가 항공기 모형을 사러 가는 것으로 환희는 합의를 해주었다. 고집이 워낙 센 아이라서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이었다.

    소풍을 가서 환희는 잔디밭을 실컷 달리며 놀았다. 박 비서가 사 온 샌드위치는 끝내주게 맛있었다. 저녁에는 사 온 항공기 모형을 셋이서 함께 조립했다.

    환이 설거지를 하는 동안 해진은 환희에게 책을 읽어주었다. 역시 제일 좋아하는 공룡 이야기였다. 환희는 아직도 공룡이 이 세상에서 멸종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듯했다. 아무래도 나이가 들고 나서 다시 충격받지 않게 잘 설명해주어야겠다고 해진은 생각했다.

    환희가 잠에 들고서야 해진은 방에서 나왔다. 환은 노트북으로 업무보고 메일을 확인하는 중이었다. 그는 육아를 전담하면서도 이렇듯 아주 중요한 일은 메일로 보고를 받고 있었다.

    대기업의 전무라는 직책쯤 되면 꿀 빨면서 남들 부리기만 할 줄 알았는데, 환의 모습은 그렇지가 않아서 해진은 안쓰러웠고 동시에 자랑스럽기도 했다.

    ‘그래도 일하는 모습은 진짜 섹시하단 말이지.’

    은테 안경을 낀 채 거실 탁자 앞에 앉아서 노트북을 두드리는 환의 모습은 솔직히 끝내주게 섹시했다. 보고 있으면 시간 가는 줄도 몰랐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선을 느낀 환은 해진을 쳐다보고 씩 웃어 보여서 그를 더 설레게 만들었다.

    “자러 갈까요?”

    환이 안경을 벗으며 물었고, 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체 없이 곧바로 노트북을 덮은 환은 해진이 선 곳까지 걸어와 그를 번쩍 안아 들었다. 해진은 익숙하게 그의 목에다 팔을 감았다. 그리고 짧게 입을 맞추었다.

    “환희는 잘 잡니까?”

    “아까 공원에서 엄청 달렸잖아요. 완전 곯아떨어졌어요.”

    “다행이군요.”

    다시 입술이 맞닿았다. 쪽, 쪽, 소리를 내며 오래 섞인 뒤에야 떨어졌다. 환이 안방 쪽을 향해 걸었다. 그의 얼굴 너머로 환희가 벽에 그려놓은 노란색 티렉스가 보였다. 흔히 사람들이 알고 있는 포악한 모습이 아닌, 먹잇감을 찾아 신이 나서 웃고 있는 귀여운 티렉스였다.

    해진은 그의 품에 안긴 채 안방으로 가며 생각했다. 행복에 형태가 있다면 바로 저런 노란색의 귀여운 동물 형태를 띠고 있지 않을까 하고 말이다.

    외전 02

    육아는 정말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잠도 자지 못하고 분유를 먹여야 했고, 겨우 잠들었나 싶으면 다시 빼앵 울면서 깨어나기 일쑤였다.

    그래도 환희는 정말 순하고 고생을 덜 시키는 축에 속한다는 다른 사람들의 말을 듣고 환은 기겁했다.

    어린 환희를 키우는 일은 힘들었지만 환은 육아를 기꺼이 떠맡았다. 해진이 새로 취직한 회사에서 편하게 일해야 하니까.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이런 귀찮은 생물을 떠맡게 된 것을 후회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환은 그러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육아는 고통스러웠지만 그만큼 보람찼다.

    환희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컸다. 해진은 조심스럽게 베이비시터를 고용할 것을 제안했지만 환은 거절했다.

    “내 손으로 키우고 싶습니다. 나 때문에, 나로 인해서 해진 씨가 힘들게 낳은 아이니까 말입니다.”

    나름 진지하게 대답했는데 어쩐지 해진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거 좀 서운한 말이네요.”

    “……예?”

    해진은 조금 씁쓸하게 웃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꼭 제가 손해만 본 것 같잖아요.”

    “손해…….”

    환은 그가 내뱉은 단어를 멍청하게 따라 하다가 자신이 무슨 말을 잘못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꼭 제가 환희를 낳은 게 벌 같잖아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미안합니다.”

    얼른 사과하자 해진의 표정이 조금 풀려 안도했다.

    “물론 처음에는 저도 낳기 싫고, 무서웠지만…… 어쨌든 제 의사로 낳은 아이잖아요. 우리 가족이고요.”

    가족, 그래. 환은 그 단어가 가진 의미를 간과했단 사실을 깨달았다. 해진이 손을 뻗어와 그의 손을 맞잡아주었다. 마치 위로하는 듯했다. 따뜻하고, 작은 그의 손은.

    “환희는 제 아이이기도 해요.”

    해진이 그의 손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꼭 아이에게 하듯이 달래는 그 동작이 싫지 않았다. 해진의 앞에서는 이렇게 애가 된 듯한 기분을 자주 느끼는 그였으니 말이다.

    환은 잡힌 손 하나를 조심스레 빼어냈다. 그리고 제 손을 잡은 해진의 손 위에 살며시 얹었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해진 씨는 임신한 동안 혼자 고생했지 않습니까. 그러니 지금이라도 하고 싶은 일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가뜩이나 작고 약한 몸으로 열 달 동안이나 아이 하나를 배에 넣고 다녔다. 입덧 때문에 밥도 제대로 못 먹고 말이다. 그래서 지금이라도 해진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껏 했으면 싶었다.

    해진이 눈을 휘며 예쁘게 웃었다. 환은 할 수만 있다면 이 웃음을 영원히 보고 싶었다.

    “알았어요. 그럼 당분간은 제 일에 집중하고, 이후에 환이 씨도 하고 싶은 거 편히 하실 수 있게 제가 빨리 자리 잡을게요.”

    “무리해서 서두르진 마십시오.”

    “응, 알았어요.”

    해진이 그에게 폭 안겨왔다. 환은 제 품에 닿은 온기를 기꺼이 마주 안았다.

    어쨌든 환은 그렇게 육아를 한동안 전담하게 되었다. 물론 휴일에는 해진과 함께 아이를 돌봤지만 빌어먹을 쥐똥만 한 회사는 공휴일에도 출근을 시키기 일쑤였으며 야근은 밥 먹듯이 했다.

    혼자 밤늦게까지 아이를 돌보는 일은 괜찮았다. 다만 해진이 걱정되었다.

    [언제 옵니까?]

    전화를 하려다가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 바로 답장을 받기가 힘들었다. 그렇다고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 일전에 메시지를 받지 않아 전화를 계속했다가 엄청 혼이 난 적이 있었다. 일하는데 방해하지 말라나.

    갑갑했지만 제 사랑스러운 남편이 그렇다면 무조건 그런 것이므로 반항하지는 않았다.

    그러니 오늘도 하루 종일 환희를 돌보는 일을 무사히 해내야 했다. 해진이 퇴근 후 먹을 저녁밥도 직접 했다.

    그런데 오늘따라 환희가 자꾸 놀아달라고 떼를 써댔다.

    “아빠 지금 작은 아빠 오면 먹을 맘마 만들고 있잖아. 착하게 기다려라.”

    “싫어! 티티붕붕이 해저!”

    평소에는 착하게 말을 잘 듣는 환희지만 가끔 이렇게 고집을 피울 때가 있었다. 대체 누굴 닮은 건지…….

    “아빠 맘마 다 만들고 놀아주마.”

    “빨리! 티티붕붕이!”

    ‘티티붕붕이’란 바로 ‘티티붕붕’이라는 가상의 공룡이 되어 환희를 등에 업고 기어가는 놀이였다. 최대한 빨리 기어서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적들에게서 도망치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제 발아래에서 두 손을 반짝 쳐들고 방방 뛰어대는 환희를 보니 이번에도 이길 수가 없었다. 그는 국자를 내려놓고 불을 끈 뒤 한숨을 푹 내쉬었다.

    “후…… 알았다. 잠깐만 노는 거다.”

    “응!”

    환희가 작은 몸을 방방 뛰며 즐거워했다. 환은 딸 앞에 네발로 엎드렸다. 환희가 기다렸다는 듯이 얼른 아빠의 등에 올라탔다. 환이 네발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랴! 티티!”

    “……붕붕…….”

    ‘티티’라고 환희가 외치면 꼭 ‘붕붕’이라고 대답해주는 것도 이 놀이의 법칙이었다. 환은 네발로 열심히 거실을 기었다.

    “더 빨리! 티티, 더 빨리!”

    “부, 붕붕……!”

    “끼햐앗! 하하!”

    환희는 아빠의 등에서 소리를 빽빽 질러대며 무척 즐거워했다. 환은 숨이 차서 헉헉댈 때까지 기고서야 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환희의 밥을 먼저 먹인 뒤 TV를 틀어준 환은 거실에 앉아 업무를 처리했다. 박 비서에게 몇 가지 지시를 한 뒤 시간을 확인했을 때는 벌써 여덟 시였다. 미간에 꾸깃하게 주름이 잡혔다.

    “아빠, 곰 세 마리 불러저…….”

    “아빠 일해야 한다.”

    일을 해야 한다는 말에 시무룩하게 돌아선 환희는 조그마한 엉덩이를 하늘로 쳐들고 고개를 러그에다 푹 파묻었다.

    “뭐 하나, 이환희.”

    “아빠 일 다 할 때까지 기다리고 있어.”

    “그렇게 머리를 처박고?”

    “응.”

    한숨이 푹 나왔다.

    “알았다, 원하는 대로 실컷 불러주마.”

    결국 환은 노트북을 놔두고 환희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목소리를 흠흠, 가다듬은 뒤 근엄하게 노래를 시작했다.

    “곰 세 마리가…….”

    “해진 아빠도 같이하면 안 돼?”

    “……기다려라.”

    결국 이번에는 해진에게 전화를 걸 수밖에 없었다. ‘긴급한 일이 아니면 일할 때 전화 금지’라는 법칙이 있지만 곰 세 마리를 부르는 것은 긴급한 일에 속했다. 이 노래는 원래 셋이서 같이 부르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영상 통화가 연결되자 해진의 모습이 드러났다.

    - 어, 환이 씨? 무슨 일이에요?

    “……곰 세 마리, 불러야 합니다.”

    - 응?

    이번에는 환희가 화면에 쏙 끼어들었다.

    “아빠! 곰 세 마리 불러줘!”

    해진은 딸의 말에 활짝 웃고는 곧바로 노래를 시작했다.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라 익숙했다.

    - 곰 세 마리가 한집에 있어.

    첫 소절은 세 사람이 같이 불러야 하고, 그다음은 차례대로 한 사람씩 불러야 했다.

    “아빠곰.”

    - 엄마곰.

    “애! 기! 곰!”

    철저하게 분배된 파트대로 한 곡을 끝마친 뒤에야 환희는 뿌듯한 얼굴로 해진 아빠에게 인사를 건네고 방으로 들어갔다.

    환은 한숨을 푹 내쉬고 마른세수를 했다.

    “미안합니다. 일하느라 바쁠 텐데.”

    - 환이 씨가 더 고생이죠. 우리 든든한 남편.

    “늘 예쁘게만 말하는 내 남편 덕분에 나는 하나도 안 힘듭니다.”

    환의 말에 해진이 씩 웃었다.

    “그나저나 언제 퇴근합니까? 밥 안 먹고 기다리고 있는데.”

    - 음, 오늘은 늦을 것 같은데.

    예상치 못한 대답에 환의 얼굴이 굳었다. 사과하려는 해진을 마주 보지 않고 환은 그대로 종료 버튼에 손을 가져갔다.

    “알겠습니다. 저녁 챙겨 먹어요.”

    - 저, 환이 씨…….

    그리고 해진의 말을 듣지 않고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환희의 방에서는 책을 우렁차게 읽는 소리가 들려왔고, 집은 고소한 찌개 냄새로 가득했다. 저녁때가 한참 지났는데 배가 하나도 고프지 않았다.

    해진에게 섭섭한가, 누가 묻는다면 그는 아니라고 당장 대답할 수 있었다. 이건 서운한 감정과는 조금 달랐다. 다만…… 뭐랄까…… 그저 좀 슬펐다. 아니, 이 감정은 미안함에 더 가까웠다.

    ‘얼마나 일을 하고 싶었을까. 저렇게 일을 좋아하는 사람이 일 년을 넘게 도망쳐 다니고, 아이를 배고 있었으니.’

    하지만 아주 조금, 조금은 서운하기도 했다. 나름대로 맛있게 끓여진 찌개가 아깝기도 했지만, 뭐, 아침에 먹으면 될 테니까.

    환은 평소대로 환희에게 ‘치카치카’를 시키고 재워주었다. 환의 미니어처 여성 버전처럼 생긴 환희는 잠들었을 때 유일하게 해진의 모습을 닮았다. 그래서 자는 환희의 모습을 보는 것을 그는 굉장히 좋아했다.

    사랑스러운 딸이 자는 모습을 보고 있는데, 어쩐지 오늘은 기분이 그다지 풀리질 않았다. 환은 그 사실에 화가 났다. 내 사랑스러운 아이가 바로 앞에 있고 곧 있으면 남편이 올 텐데 말이다.

    ‘정신 차려라, 이환.’

    지금 자신은 훌륭한 전업주부이자 남편 역할을 해내야 했다. 해진이 제 남편 역할을 톡톡히 해주고 있듯이 말이다.

    [집 근처 오면 말해요. 내가 데리러 가겠습니다.]

    메시지를 보내자 얼마 지나지 않아 해진에게서 전화가 왔다. 근처에 온 건가, 지하철역으로 데리러 가야지, 생각하며 휴대폰을 귀에 대는데 흘러나온 말은 의외의 것이었다.

    - 아, 미안해요, 환이 씨. 저 오늘 철야해야 할 것 같아요.

    해진의 말에 일어나려던 것을 자리에 그대로 힘없이 앉았다.

    “……철야라니요. 그저께도 프로젝트다 뭐다 하면서 거의 자정까지 일했지 않습니까.”

    - 갑자기 팀에 일이 생겨서……. 제가 맡은 프로젝트가 엎어질 수도 있는 일이라서요.

    오늘도 혼자 자야겠군, 그리 생각하며 전화를 끊으려는데 해진의 작은 한숨 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 미안해요.

    그 말이 철야를 해야겠다는 말보다 그에게 더 아프게 들렸다.

    “해진 씨가 미안할 이유가 뭐가 있습니까. 몸 챙기고 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 응, 일찍 자요.

    “싫습니다.”

    오늘만큼은 고집을 조금 부리고 싶었다. 제 남편에게 혼이 날지라도 말이다.

    “내가 기다릴게요.”

    이번에는 조금 가벼운 한숨이 들려왔다.

    - 알았어요. 얼른 끝내고 갈게요.

    환은 조용히 소리 없이 웃었다. 영상 통화가 아니라서 웃는 얼굴이 보이지 않더라도 상관없었다. 해진도 지금 수화기 너머에서 웃고 있음을 알 수 있어서였다.

    오랜만에 밀린 업무를 모두 처리하고 소파에 잠깐 드러누워 휴대폰으로 보도된 기사 몇 가지를 확인했다. 출근은 하지 않더라도 그는 여전히 전무였고, 출근할 때 못지않은 양의 업무를 처리하고 있었다. 물론 밥 먹듯이 철야를 하는 남편에 비해서는 적은 양이지만 말이다.

    휴대폰을 쥔 채로 잠깐 존 모양이었다. 잠을 자다가 깨어났을 때 제일 먼저 느낀 것은 익숙한 딸기 향이었다. 어린이용 시럽약 냄새 같기도 하고, 아주 단 음료에 들어가는 착향료 같기도 한 해진의 냄새.

    손을 뻗자 그가 만져졌다. 환은 그것만으로도 안도했다.

    “나 왔어요.”

    저보다 훨씬 작은 체구를 가진 그를, 재킷도 벗지 않고 품에 파고든 남편을 있는 힘껏 껴안았다.

    “……기다렸습니다.”

    “많이?”

    “응. 많이.”

    눈을 뜨고 꽉 안은 팔을 풀자 밀가루떡같이 사랑스러운 얼굴이 보였다. 해진이 배시시 웃었다.

    “상 줘야겠다, 그럼. 우리 남편.”

    그리고 입을 맞춰왔다. 환은 덜 깬 졸음 속에서 그의 입맞춤을 달게 받았다.

    외전 03

    환희는 그토록 소원하던 공룡 박물관에 갔다 왔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제일 좋아하는 삼촌인 박 비서네 집에 놀러 가기로 했다. 무려 3박 4일 동안 말이다.

    “이렇게 매번 신세만 져서 어떡해요.”

    해진은 박 비서에게 환희를 맡기는 일을 굉장히 미안해했지만, 박 비서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아휴, 별말씀을요. 저는 환희랑 있는 게 제일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추가 수당도…….”

    말꼬리를 슬쩍 흐리다가 환의 눈치를 한 번 보고서야 박 비서는 말을 이었다.

    “아주 톡톡히 받거든요. 하하.”

    “그래도 애 보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아휴, 걱정 마세요. 말씀드렸지만 제 여자친구도 아이 정말 좋아합니다! 지금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어요. 셋이서 놀면 저희야 즐겁죠.”

    해진은 구십 도로 허리를 조아렸다. 옆에 선 환의 눈에 불이 붙어 괜히 박 비서에게 그 불똥이 튀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그럼 이번에도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 아휴, 아닙니다. 깨, 깨끗하게 손 씻고…… 철저하게 위생 관리하면서…… 돌보겠습니다.”

    상체는 해진에게, 시선은 환에게 둔 채로 박 비서가 말했다. 환희는 이미 신이 나서 주변을 날아다니듯이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환희, 하루에 까까 하나만 먹는지 삼촌한테 전화해서 확인할 거다.”

    “알았어!”

    환희는 든든한 자기편이 되어줄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 듯 이미 박 비서의 뒤에 숨어 환에게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었으며, 해진은 여전히 신세를 지기 미안한 얼굴로 어쩔 줄을 모른 채 이별을 했다.

    “허, 참. 삼촌이 그렇게 좋나. 뒤도 안 돌아보고 가네.”

    한 번 돌아보지도 않는 제 딸이 해진은 조금 야속하긴 했으나 환이 한동안 쉴 수 있다 생각하니 다행이기도 했다. 그동안 너무 고생했으니까.

    “우린 맛있는 거 먹으러 가요, 환이 씨.”

    “오랜만에 데이트입니까?”

    “응. 내가 환이 씨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거예요.”

    해진의 말에 환의 눈이 호선을 그리며 웃었다. 방금 환희를 데리고 간 박 비서가 봤더라면 제 상사가 아니라고 할 정도로 환한 웃음이었다.

    “신청을 받아들이죠.”

    “네!”

    “먹고 싶은 거라도 있습니까? 말씀하시면 바로 리조트 셰프에게 연락하겠습니다.”

    리조트 셰프가 만든 음식을 워낙 좋아하다 보니 이후로도 환은 가끔 그를 불러 해진이 먹고 싶어 하는 것을 의뢰하곤 했다. 해진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뜸을 들였다.

    “뭐든 이야기하십시오.”

    “……정말요?”

    “해진 씨가 먹고 싶으신 것은 그게 뭐든 저도 환영이니 말입니다.”

    또 이상한 거 말하면 식겁할 거면서 하여튼 말은 잘한다, 생각하며 해진은 조금 더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

    “저, 사실 순댓국이 먹고 싶어요.”

    아니나 다를까 순댓국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환의 얼굴에 깊은 근심이 드리웠다.

    “저…… 환이 씨한테서 도망 다닐 때요.”

    그리고 덧붙인 말에는 표정이 더더욱 안 좋아졌다.

    “그때 제가 순댓국이 갑자기 먹고 싶은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입덧 때문인지 가게 앞에 가니까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나지 뭐예요?”

    “……그랬습니까.”

    환은 이제 거의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힐 정도였다. 해진은 쯧, 하고 불쌍하다는 투로 혀를 한 번 차고는 걸음을 멈추고 소매로 환의 이마를 닦아주었다.

    “그런데 며칠 전부터 그 순댓국이 계속 생각나는 거예요. 자다가도 막 생각나고…….”

    어쩔 줄을 몰라 땀만 뻘뻘 흘리는 환이 이젠 조금 불쌍할 지경이어서 해진은 애써 웃어 보였다.

    “그래서 꼭 그 집에 다시 한 번 가보고 싶어요. 그때 못 먹은 게 너무 아까워서요.”

    해진은 다시 걸었다. 휴일이라 거리는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근처에 공원이 있어 더 북적거렸다.

    “하지만 환이 씨는 그런 음식 싫어하시니까……. 그냥 나중에 저 혼자 먹으러 가도 돼요.”

    “아닙니다. 저는 해진 씨가 하는 것은 모두 같이하고 싶습니다.”

    당연히 혼자 먹으라고 할 줄 알았는데, 곧바로 이어진 말에 해진은 솔직히 약간 감동했다.

    “정말이세요……?”

    “그럼요. 당연합니다. 같이 먹고 싶습니다. 순댓국.”

    말하는 환의 입가가 파르르 떨리는 것은 눈치채지 못한 채 해진은 그에게 와락 안겼다.

    “고마워요!”

    환은 잠시 당황한 눈치였다가 이내 제게 안긴 남편을 마주 안았다. 표정이 여전히 조금 굳어 있었지만 해진은 그저 감동의 물결 속에서 남편을 꽉 안기만 했다.

    두 사람은 결국 해진이 가고 싶었다던 그 순댓국밥집으로 갔다. 해진은 신이 나서 주문했다. 환은 메뉴를 한참 들여다보았지만 이 집은 순댓국 말고는 메뉴가 없었다. 아니, 있기는 했지만 역시나 환이 먹기에는 어려워 보였기에 해진과 똑같이 기본 순댓국을 주문했다.

    “환이 씨, 저 당분간 일 쉬려고요.”

    환이 챙겨준 수저를 받으며 해진이 말했다. 환은 조금 놀란 기색을 보였다.

    “일을 쉬신다는 건, 휴가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아뇨. 퇴사하려고요.”

    물을 따르던 손이 뚝 멈추었다. 이번에는 정말로 놀란 얼굴이었다. 해진은 멋쩍게 웃었다.

    “내가 아는 ‘퇴사’라는 그 단어가 맞습니까?”

    “네. 회사 그만둔다고요.”

    “지금 다니는 곳 좋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좋죠.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왜? 그렇게 열심히 일하던 해진인데. 환은 의아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의아함은 곧 걱정으로 이어졌다.

    “혹시 해진 씨를 힘들게 하는 놈이 있다거나, 상사의 괴롭힘이 있다거나…….”

    “아, 아뇨. 아니에요. 제가 팀장인데, 제가 팀원들을 괴롭히면 괴롭혔죠.”

    그래. 그래도 어디 가서 괴롭힘당할 해진은 아니었다. 순해 보이긴 해도 나름대로 성깔이 있는 편이니……. 환은 안도하면서도 여전히 의아했다.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동안 너무 달린 것 같기도 하고, 환희랑 시간도 많이 못 보낸 것 같아서요.”

    환이 전적으로 육아를 담당해준 덕분에 해진은 일에 전념할 수 있었다. 새로 들어간 회사에서 순식간에 팀장직을 달고 지금도 회사를 거의 먹여 살리다시피 하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최근 들어 그동안 너무 일에만 매달려 있었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다. 특히 환희가 환을 더 좋아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거나, 밤에 해진을 보겠답시고 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 더더욱 그러했다.

    “……나는?”

    귀여운 환희를 생각하며 혼자 쓰게 웃던 해진이 앞에서 들린 목소리에 시선을 들었다.

    “나랑도 많이 못 보냈지 않습니까.”

    조금 얼굴을 붉히며 환이 말했다. 해진은 당혹스럽기도 했고, 기분이 좋기도 했다. 천하의 이환이 지금 뭐라는 거야.

    “애교예요?”

    “투정입니다.”

    풉,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가 환의 표정이 풀리지 않아서 해진은 조금 머쓱했다. 다시 보니 환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나도 해진 씨와 시간을 많이 보내고 싶습니다. 그러고 싶어서 청혼한 거니까요.”

    그래, 생각해보니 드물게 일찍 퇴근하는 날에도 환희와 놀아주느라고 환과는 거의 단둘이 있던 적이 없었다. 팀장을 달고 나서부터는 집에 있거나 환희와 노는 게 전부였다. 갑작스레 깨닫고 나니 면구스러웠다.

    “아……. 미안해요.”

    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해진 씨가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일에 전념하게 도와주겠다고 먼저 제안한 건 나니 말입니다. 다만 이젠 제게도 신경을 좀 써주었으면 좋겠다고 몰래 생각하곤 했는데, 일을 그만둔다고 막상 말하니 조금…….”

    말을 줄줄 잇던 환이 뚝 이야기를 멈추었다. 해진이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제 손을 맞잡아서였다.

    “정말 미안해요, 환이 씨.”

    이환은 당혹스러웠다. 해진에게서 미안하다는 말을 들을 줄은 전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사실, 이야기를 꺼내면서도 환은 그에게서 사과를 받을 거라곤 예상하지 않았었다. 그의 말대로 일에 전념하라고 한 건 자신이었고, 해진이 아이를 낳게 만든 원인도 자신이었으니 그에 대한 책임도 모두 자신이 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 해진이 고생했던 일들을 떠올리면 지금 자신이 하는 육아쯤이야 고생 축에도 속하지 않았다. 해진은 씻지도 못하며 그 더러운 산길에서 벌레들과 함께 보냈지 않은가.

    “나는…… 괜찮습니다, 해진 씨.”

    그래서 진심으로 대답했는데도 해진의 표정은 쉽게 풀리질 않았다.

    “그래도 내가 미안해요. 환이 씨를 너무 내버려둔 것 같아요, 그동안.”

    ‘내버려두었다’는 그의 말에 우습게도 환은 알지 못했던 서러움이 새록새록 올라오는 듯했다. 여태껏 괜찮다고 말한 게 무색하게도 말이다.

    투정을 부린 거야 사실이지만 말 그대로 투정일 뿐이었다. 해진이 제게 관심 한 톨을 주지 않는다 해도 환은 개의치 않았다. 지난 잘못에 대한 참회라든가 아직도 사라지지 않은 해진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 아니었다.

    다만 환은 좀 이상했다. 저처럼 잘난 알파를 혼자 내버려두고 밖에서 멀쩡히 일하는 해진이 말이다. 자신이 오메가였다면, 그리고 제 남편이 저처럼 완벽한 알파였다면 절대 그냥 혼자 두지 않았을 텐데 말이다.

    그저 그뿐이었다. 나 같은 남편을 집에 두고도 일이 되는군. 강해진은 정말로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이군.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해진이 저를 ‘내버려두었다’고 말하니 정말로 자신이 내버려져 있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었다.

    외전 04

    해진은 맞잡은 그의 손을 가볍게 주물렀다. 이전이라면, 아니, 다른 사람이라면 어디 소독도 하지 않은 손으로 제 손을 만지느냐고 화를 버럭 냈을 터다. 하지만 해진은 이제 그에게 예외가 되는 유일한, 아니, 환희까지 합해 유이한 사람이었다.

    “이제 환이 씨랑 데이트도 자주 하고, 이렇게 맛있는 것도 먹으러 다니고 싶어요. 그동안 생각해보니 남편 얼굴보다 회사 사람들 얼굴을 더 자주 본 것 같아.”

    제 손을 조물조물하는 해진의 자그마한 손을 내려다보며 환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무슨 생각 해요?”

    마침 순댓국이 나왔고, 해진이 먼저 그릇을 그에게 내밀어주어 환은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내가 해진 씨를 생각보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있었나 보다,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지체 없이 하는 말에 해진의 뺨이 붉어졌다. 환은 그가 하는 대로 옆에 있던 작은 그릇에 담긴 붉은 장을 떠서 펄펄 끓는 뚝배기 안에 넣었다. 세 숟갈째가 되었을 때 해진이 그의 손목을 쥐었다.

    “그만 넣으세요. 매울 거예요.”

    이왕 먹는 것이면 해진과 똑같은 맛으로 먹고 싶었지만 환은 해진의 말에 고분고분 따랐다.

    “환이 씨가 생각보다 나를 많이 사랑한다는 그 말이…… 너무 좋네요.”

    순댓국을 저으며 해진이 다소 수줍게 말했다. 결혼한 지 몇 년이 흘렀는데도 해진은 아직도 이렇게 수줍어하는 때가 가끔 있었다. 그게 환은 말할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날이 갈수록 오히려 사랑을 더 크게 느낀다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말은 아끼고 싶었다. 좀 더 아끼고 아껴서, 강해진에 대한 제 사랑이 넘치고 넘쳐서 견딜 수가 없을 때에 말할 것이다. 아직까지는 견딜 수 있었다.

    “그럼 이제 내가 퇴근하면 마중해주는 해진 씨를 볼 수 있는 겁니까?”

    거의 환희를 보느라 집에 있기는 하지만, 환도 가끔 출근을 하기는 했다. 환희가 어린이집에 있는 시간에 말이다. 출근이라기보다는 그냥 눈도장을 찍고 나오는 쪽에 가까웠지만 나갔다가 집에 돌아왔을 때 해진이 없어 허전할 때가 몇 번 있었다.

    “네! 제가 내조할게요! 환이 씨 이제 하고 싶은 거 하시면서 지내실 수 있도록요.”

    숟가락을 든 채로 불끈! 주먹을 쥐어 보이며 하는 말에 환은 피식 웃었다.

    “내가 하고 싶은 게 뭔지는 알고 그렇게 말합니까.”

    사실 섹스가 이전보다 줄어들기는 했다. 환은 환희를 돌보아도 밤에 그렇게 피곤하지 않았지만, 일에 녹초가 되어서 돌아온 해진을 붙들고 섹스를 보챌 순 없었다.

    해진에게 히트사이클 억제제를 먹으라고 먼저 권한 것도 환이었다. 히트사이클 때문에 고생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서였다. 물론 달떠서 할딱거리는 제 오메가의 모습을 다시 보고 싶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해진이 힘들지 않은 게 더 중요했다.

    “글쎄요? 우리 남편이 하고 싶은 게 뭘까?”

    해진이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물었다. 순진무구한 저 얼굴을 보며 당장이고 차로 끌고 가 엎어뜨리고 바지를 내리고 싶은 심정을 제 순수한 남편은 절대 모를 것이다.

    “일단 드시죠. 먹고 싶었던 순댓국 아닙니까.”

    “네. 환이 씨도 맛있게 드세요!”

    해진은 순댓국을 저어 호호 불어가며 맛있게 떠먹었지만 환은 안에 든 것을 하나하나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고깃덩어리 비슷한 게 있고 뭔지 정체를 알 수 없는 건더기가 숟가락을 휘저을 때마다 물컹하게 걸렸다. 그리고 순대도 어마어마하게 컸다.

    커다란 순대를 밥그릇 뚜껑에 덜어서 야무지게 조금씩 먹는 해진은 여전히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환은 이 비위생적인 식당과 정체 모를 건더기가 들어 있는 국이 좋았다. 해진이 제 옆에 있으니까.

    두 사람은 순댓국밥집을 나와 공원을 조금 걸은 뒤 장을 보러 갔다. 오랜만에 둘이 장을 보는 것이라 해진은 잔뜩 들뜨고 신이 났다.

    “와, 저 이거 먹어보고 싶었는데! 앗, 이것도요! 이거 새로 나온 맛인가 봐요!”

    성분을 제대로 알 수도 없는 싸구려 과자를 마구 골라 카트에 담는 그를 보니 환도 가슴이 벅차게 기분 좋았다. 물론 해진이 보지 않을 때 몰래 과자 몇 개를 빼기는 했다.

    “환이 씨! 이거 어때요?”

    주류 코너를 지나던 그가 무언가를 하나 집어 들어 보였다. 와인이었다.

    “오늘 밤에 오랜만에 우리 둘만 있으니까…… 이거 하나 마실까요, 우리?”

    환은 해진이 고른 와인병을 살폈다. 마트에서 파는 것치고는 그래도 제법 괜찮은 브랜드였다. 역시 제 남편은 안목이 있었다.

    “좋습니다. 두 병으로 하죠.”

    “앗, 두 병씩이나…….”

    해진이 얼굴을 조금 붉혔다. 무슨 꿍꿍이라도 있는 것처럼 귀 끝을 붉히며 수줍어하기까지 했다. 환은 그 의도를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와인 두 병을 카트에 넣었다.

    장을 봐 온 뒤에 환은 잠깐 업무를 처리하고 해진은 책을 읽었다. 그리고 저녁은 환이 직접 했다.

    그는 와인에 어울리는 스테이크와 야채를 굽고 곁들여 먹을 몇 가지 음식을 더 했다. 해진의 입맛에 맞게 간은 약하게 하고 고기는 바짝 익혔다. 환 본인은 레어에 가까운 미디엄을 좋아했지만 이제는 식성도 해진을 따라가는 것인지 바짝 익힌 게 좋았다.

    “저 정말 앉아만 있어요?”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며 해진이 물었다. 환은 웃어 보였다.

    “예. 앉아만 있어요. 내가 다 할 테니.”

    “그래도 오랜만에 제가 쉬는 날인데…….”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니 앉아 있어요.”

    부드럽지만 단호한 말에 해진은 어쩔 수 없이 아일랜드 식탁 앞에 앉아 요리하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와이셔츠 위에 앞치마를 두르고 요리하는 환은 언제 봐도 섹시했다. 움직일 때마다 불끈거리는 등짝과 팔뚝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환이 만든 요리는 늘 그랬듯 무척 맛있었다. 해진은 제 입맛에 완벽하게 맞춘 요리를 배부르게 먹고 디저트까지 먹었다.

    두 사람은 거실로 자리를 옮겨 와인을 마셨다. 안주는 마트에서 같이 사 온 치즈였다. 환은 평소에도 술을 많이 마시지 않을뿐더러 이렇게 집에서 술을 마셔본 적은 더더욱 없었기에 조금 어색했지만 해진이 아주 기뻐해서 기분이 좋았다.

    본래도 술이 약한 해진은 금세 취했다. 와인 한 병을 둘이서 다 비우기도 전이었다. 환은 해진이 몸을 흔들 때에 몰래 잔을 가져가 제 입에다 비워버렸다.

    “환이 씨, 제가 안 놀아줘서…… 정말 삐지셨어요?”

    “안 삐졌습니다.”

    “아깐 삐졌다면서요…….”

    투정을 부린 건 저였는데 오히려 해진이 입술을 내밀며 토라지려 하기에 환은 당혹스러워 얼른 손을 내저었다.

    “마, 맞습니다. 예, 삐졌습니다.”

    대답하니 이제는 한숨을 폭 내쉰다. 대체 어쩌라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저, 늘 생각했거든요. 더 멋진 사람이 되고 싶다고요.”

    “지금도 해진 씨는 충분히 멋있습니다.”

    솔직한 마음을 곧바로 말했는데, 해진은 그 대답이 마음에 차지 않는지 발개진 얼굴을 찌푸렸다.

    “그런 거 말고요…….”

    “빈말 아닙니다. 정말로 저는 해진 씨가…….”

    “이환 전무님한테 어울리는 오메가가 되고 싶어요, 저는.”

    끼어들듯이 덧붙인 말에 환은 그제야 자신이 해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해진은 상체를 좌우로 흔들흔들하며 말을 이었다. 가뜩이나 마르고 가느다란 상체가 부러질 것 같아서 환은 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와 어울리는 오메가라니, 무슨 뜻입니까?”

    취해서 따끈따끈해진 뺨을 부드럽게 손바닥으로 감쌌다. 해진은 반쯤 반사적으로 그의 손바닥에다 제 뺨을 비볐다.

    “저는 사실…… 아무것도 아니잖아요. 어쩌다가 매칭률이 좋아서 전무님이랑 연을 맺게 된 건데…….”

    마음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저는 그냥…… 운이 좋을 뿐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환이 씨, 아니, 이환 전무님 같은 알파를 남편으로 둔 게요……. 물론 개고생은 했지만…….”

    환은 스스로를 아주 호되게 꾸짖었다. 등신 같은 놈. 해진의 마음도 알아차리지 못하고.

    “조금이라도 더 환이 씨한테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면…… 열심히 일도 하고, 스펙도 쌓아야죠! 대기업 전무는 못 되더라도…….”

    말을 미처 다 잇지 못하고 결국 해진이 풀썩, 상체를 옆으로 기울였다. 환은 제 어깨에 기댄 자그마한 정수리를 보며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취한 것도 아닌데 그 역시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이야.’

    짐작하지 못했다. 그저 아이를 잘 보살피고 여태껏 한 대로 해진이 잘 지낼 수 있게 내조만 하면 될 거라 생각했다.

    환은 한숨을 삼키며 잠든 그를 안아 들었다. 술에 취한 해진은 평소보다 훨씬 따끈따끈하고 말랑말랑했다. 꼭 따끈하게 데운 찹쌀떡 같았다. 그리고 딸기 향이 났다.

    그는 해진을 한입에 삼키고 싶다고 생각하며, 이미 반응이 와버린 아랫도리를 원망하면서 그를 침대에 눕혔다.

    이불을 덮어주던 환은 문득 깨달았다. 해진이 저를 혼자 둔 이유는 제게 관심이 없어서가 아님을. 제 남편은 혼자서 죽도록 노력하고 있었다. 이 결혼 생활을 더 완벽하게 만들려고 말이다.

    문득 이불 밖으로 해진의 손이 삐죽 튀어나왔다. 환은 그의 손을 이불 속으로 도로 넣어주었다.

    “……잘 자요, 해진 씨.”

    무해하기 그지없는 얼굴은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웠다.

    외전 05

    해진은 예정보다 일찍 퇴사했다. 후임이 생각보다 빨리 구해진 덕분이었다.

    두 사람은 계획했던 대로 시간을 더 자주 보냈다. 환희도 태권도 학원과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해서 환은 24시간 육아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물론 환은 환희가 처음 유치원에 가는 날에 오히려 섭섭해했다.

    “그래도 친부가 교육을 전적으로 담당하는 것이 환희에게도 좋지 않겠습니까? 더러운 환경에서 혹시라도 감염이 되거나 하면…….”

    “환이 씨, 환희 제 딸이에요.”

    해진이 그의 얼굴을 돌려 저를 보게 하며 또박또박 힘줘 말했다.

    “제 피를 물려받은 제 딸은 어딜 가든 씩씩하게 지낼 거예요.”

    뒤이은 말에 환은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 다른 아이도 아니고 강해진의 딸이라면 자신이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해진이 퇴사한 뒤에도 환은 곧바로 일에 복귀하지 않았기에 두 부부는 당분간 집에서 시간을 보냈다. 환희가 유치원에 간 뒤 함께 영화를 보러 가기도 하고, 장을 보기도 하고, 때로는 환의 회사에 같이 가기도 했다.

    “이러고 있으니 꼭…… 우리 연애할 때로 돌아간 것 같아요.”

    어느 날 영화를 보고 나오는 길에 해진이 말했다. 환은 조금 움찔할 수밖에 없었다. ‘연애’ 시절의 자신은 해진을 진심으로 대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이전이라면 또 쭈그러들었겠지만 그는 이제 해진의 화법을 알 수 있었다. 그때의 이야기를 꺼내는 건 절대 저를 다그치거나 미워해서가 아니었다.

    그 이후로 바로 아이를 낳고 육아를 했으니 연애다운 연애를 제대로 못 해본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아마 해진은 그 점을 아쉬워하는 것이리라.

    “그때 해봤던 것들, 다 다시 해보죠.”

    그렇게 말하자 해진의 얼굴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어떤 것들요?”

    “뭐든요. 전부 다. 갔던 레스토랑들, 공원, 모조리 다.”

    그가 해진의 손을 맞잡았다. 영화를 보고 온 식당에는 사람이 많았고, 이전이라면 감염이 걱정되어 오지 않았을 환이지만 해진이 원하는 일이라면 괜찮았다. 물론 손 소독제를 계속 사용하고, 해진과 자신이 앉을 의자를 깨끗하게 물티슈로 닦아도 성에 차지 않았지만 말이다.

    “진짜 데이트를 해진 씨께 선사해주고 싶군요.”

    해진은 환하게 웃었다.

    “지금도 충분히 진짜 데이트 같은데요.”

    환이 마주 웃었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착한 사람이 어떻게 제게 왔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기적이었다.

    “우리 그럼 환희 데리고 바다 놀러 가요. 작년에도 환희가 엄청 좋아했잖아요.”

    작년에 세 식구가 바닷가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그때 환희와 놀아주느라 해진이 고생했던 기억도 났다.

    “좋습니다.”

    역시 바닷가에도 리조트를 하나 지어서 해진 혼자 쓰게 해주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 이번 생일 선물은 그게 좋을 듯했다.

    “이제 나갈까요?”

    입가를 닦고 일어서려던 해진이 문득 동작을 멈추더니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환은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튀어 오르듯 일어나 해진에게 다가갔다.

    “괜찮습니까?”

    “아, 네. 그냥 현기증이 좀…….”

    붙잡은 몸도 뜨거운 걸 보니 열까지 나는 모양이었다. 환은 스스로를 꾸짖었다. 저 즐겁겠다고 몸 약한 사람을 데리고 이렇게 돌아다니다니.

    “어서 집에 갑시다. 제가 안아드리겠습니다.”

    “아, 아뇨, 정말 괜찮아요!”

    주변에 시선이 많아서 신경 쓰는 것인가. 그런 것 따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단 사실을 아직도 이 귀여운 남편은 모르는 모양이다. 이렇게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돌아다니는 등 이런 평범한 일들마저 벌써 기자들이 사진을 오백 장은 찍었을 텐데 말이다.

    자신이 걱정할 바는 아니지만 박 비서가 이번에도 기사를 막느라 제법 고생하겠군, 생각하며 그는 해진을 번쩍 안아 들었다.

    해진은 부끄러워 어쩔 줄 모르는 투로 환의 품에다 얼굴을 파묻었다. 그 동작마저도 환에게는 그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열이 오른 해진은 따끈따끈하기까지 했다.

    “닥터 최를 당장 부르겠습니다.”

    “아, 아니에요. 정말 괜찮아요. 그냥 지병…… 응, 지병 때문에 그래요.”

    황급히 내뱉는 말에 환은 한숨을 내쉬며 가게를 나가 그를 조수석에 태웠다. 워낙 가진 병이 많은 해진이어서 늘 걱정이었다. 역시 영화는 집에서 볼 걸 그랬나, 후회가 되었다.

    해진의 열이 내리지 않아 환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해진은 기어코 해열제만 조금 먹고 버티겠다고 했다. 당장 병원에 데려가고 싶었지만 남편의 뜻을 존중해야 하니 그럴 수도 없어 갑갑했다.

    환희가 유치원 친구네 집에 잠깐 놀러 갔다 온다고 하기에 몇 시간의 여유가 더 생겼다.

    박 비서와 잠깐 통화를 한 환이 방으로 들어왔을 때, 해진은 마침 옷을 갈아입고 있었다.

    “아, 환이 씨. 셔츠 그거 세탁하실 거면 제 거랑 같이 빨아요.”

    벗은 어깨와 팔에 환의 시선이 오래 머물렀다. 저와는 몸선이 많이 달랐다. 단단하고 탄탄한 몸을 가진 자신과는 달리 해진은 몸의 모든 곳이 가늘고 말랑말랑했다. 그리고 오늘은 열이 올라서인지 특히 더 분홍빛이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해진이 얼굴을 조금 붉혔다. 환은 손을 뻗었다. 그의 손목을 부드럽게 쥐었다.

    “목욕, 같이 하겠습니까.”

    벌써 뜨거운 물에 들어갔다 나온 듯 발개진 얼굴로 해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환은 목욕물 온도를 세심하게 맞추었다. 환희를 목욕시키다 보니 이제 목욕물 온도쯤이야 쉽게 맞출 수 있었다.

    “아아, 진짜 따뜻해요……. 나 그러고 보니 몸 오랜만에 담그는 것 같아…….”

    해진이 하도 기분 좋아해서 환은 고작 목욕으로 이런 뿌듯함을 느껴도 되나 싶었다. 몸을 겹쳐 앉은 자세이기에 환은 아까부터 발기한 성기가 해진에게 거슬리지 않도록 허리를 뒤로 빼느라 고역이었지만 말이다.

    “옛날에는 욕조 있는 집 살아보는 게 소원이었는데. 소원 이뤘네요.”

    “그랬습니까? 그거 귀여운 소원이군요.”

    “혼자 원룸에 살 때는 욕조가 없으니까 몸을 담글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대중목욕탕에 자주 갔거든요.”

    대중목욕탕이라는 말에 환은 미간을 구겼다. 정말 얼마나 갑갑했으면 그렇게 더러운 곳에 갔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고 가여웠다.

    “목욕탕 갔다가 바나나우유 마시면 진짜 맛있는데. 아, 바나나우유 사 올 걸 그랬다.”

    “제가 사다 드리겠습니다.”

    “같이 나가요. 머리 덜 말리고 축축하게 산책하면서 마시는 게 제맛이거든요.”

    집에서 마시는 것과 무슨 차이인지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뭐, 요즘은 날씨도 따뜻하고 하니 괜찮을 터다.

    욕조에 그저 몸을 담그고 있는 것뿐인데도 해진에게서는 달큼한 딸기 향이 계속 났다. 환은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불편한 아랫도리를 최대한 뒤로 빼려 했다.

    그러나 바로 코앞에 있는 알몸의 해진을 감당하기가 영 어려웠다. 페니스는 커질 대로 커졌고, 이제 해진의 등에 닿는 것은 어쩔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당장 이 우뚝 선 물건을 제 오메가의 구멍에 쑤셔 박고 싶은 마음을 꾹 참고 환은 그의 어깨에 입술을 살짝 묻는 것으로 제 의사를 표현했다.

    “으응…….”

    해진이 몸을 기분 좋게 움츠리며 작게 신음했다. 그것만으로도 미칠 지경인데, 순간 진한 딸기 향이 코끝으로 훅 끼쳤다.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그 향이 평소보다 짙었다.

    환은 그의 허리와 옆구리를 손으로 애무하며 한 가지 결론에 도달했다. 어깨에 묻은 입술을 떼자 해진이 그를 돌아보았다.

    “……해진 씨, 혹시…….”

    이 정도로 향이 짙은 것은 히트사이클의 증상이었다. 그리고 오늘 하루 내내 열이 오른 것도 혹시…….

    가뜩이나 붉어져 있던 해진의 뺨이 더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가 대답 전 엉덩이를 뒤로 조금 빼었다. 안 그래도 한계까지 참고 있는데 엉덩이에 발기한 성기가 닿아 곤혹스러운 것도 잠시, 환은 깨닫고 말았다. 해진의 구멍이 젖어 있단 사실을.

    “저…… 억제제 안 먹었어요.”

    속삭이듯 내뱉은 말을 듣는 순간 환의 남은 이성이 뚝 끊겨버렸다.

    요란한 물보라와 함께 해진의 몸이 번쩍 들렸다. 뒤이어 환이 그를 제 무릎 위에다 마주 보게 앉혔다.

    “흣…….”

    해진이 피할 새도 없이 젖은 구멍에 곧바로 그의 페니스가 닿았다. 환은 당장 쑤셔 넣고 싶은 것을 참고 그 위에 제 것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히트사이클이 이제 막 시작된 해진의 몸은 뜨겁고 또 달았다. 환은 도저히 거부하기 힘든 유혹을 느끼며 해진을 껴안듯이 끌어당겨 제 페니스를 그의 입구에 거세게 비볐다.

    “아, 흑, 처, 천천히…….”

    제 오메가의 애원을 들어주고 싶었으나 천천히 할 여력이 도저히 없었다. 환은 그의 젖은 구멍에 빠르게 문질렀고, 해진은 그의 딱딱한 성기가 밑에 스치는 감촉을 감당하지 못하는 듯이 헐떡거렸다.

    물속에서도 흠뻑 젖어 미끄러운 해진의 안쪽이 느껴질 정도였다. 스치는 것만으로도 해진은 온몸을 떨며 버거워했다.

    “흣, 느낌, 너무, 강해서, 읏……!”

    저 역시 느낌이 너무 강해서 미칠 것 같다는 말은 하지 않고 다만 허리를 더 빠르게 움직였다. 욕조 물은 정신없이 흘러넘치고 두 사람의 팔다리가 뒤엉키며 정신없이 서로를 탐했다.

    섹스를 최근에 안 한 건 아니지만 계속 약을 먹고 있던 탓에 히트사이클은 오랜만이었다. 해진은 안에서부터 흠뻑 젖는 것을 느끼며 환에게 매달렸다.

    “흐, 아, 아아…….”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해진은 제 몸의 열기를 느꼈다. 환의 딱딱한 페니스가 연신 입구를 스치며 그를 자극하고 있었다. 딱 미칠 것 같았다. 그와의 히트사이클이 얼마나 강렬한지 잊고 있었다.

    외전 06

    해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몸이 잔뜩 뜨거워져서는 말을 듣지 않았다. 입이 벌어지고 아래쪽은 이미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서 환의 성기를 원했다.

    오랜만의 히트사이클은 꼭 중독 같았다. 온몸이 녹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해진은 끙끙 앓았다. 환과 여러 번 섹스를 해봤지만 이렇게 진득한 쾌감과 함께 정신없이 시작한 적은 처음이었다.

    환은 그의 어깨를 잘근잘근 씹다시피 하며 젖은 안쪽으로 조금씩 밀고 들어왔다. 딱딱한 성기가 젖은 안으로 들어오며 해진은 거의 자지러질 듯이 소리를 내질렀다.

    “아, 흐읏, 아……!”

    욕실의 습기 때문에 소리가 더 크게 울렸다. 환에게 단단히 매달리고 싶었으나 어지럽고 손에 힘이 들어가질 않아 그의 어깨를 자꾸 놓쳤다. 가느다란 손목은 이내 환에게 붙들려 환의 허리에 힘없이 감겼다.

    이상했다. 이토록 정신이 없고 감당하기 버거운데도 더 느끼고 싶었다. 히트사이클이 오랜만이라 그런 것일까. 혹은 욕조에서의 섹스가 오랜만이라 그런 것일까.

    딱딱해질 대로 딱딱해진 환의 성기는 해진의 안으로 더 들어오지 않고 다시 빠져나갔다. 무슨 의도인지 파악하지 못한 해진이 당혹감에 눈을 떴다. 환이 이를 앙다물고 있었다.

    ‘왜 빼냈지……?’

    의아함에 흐린 시야만 겨우 뜨고 있는데 환은 허리를 움직여 해진의 바깥쪽을 자극했다.

    “하아…….”

    견디지 못하겠다는 듯 목을 긁는 소리로 신음한 환은 잠깐 허리를 멈추더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해진이 보기에 그 모습은 꼭 사냥감을 눈앞에 둔 맹수 같았다. 그러니까, 사냥감을 씹어 먹고 싶은데 눈앞에 두고 참는 맹수 말이다.

    그는 다시 페니스로 바깥을 문지르기만 했다. 해진이 다칠까 봐 긴장하는 듯했다. 잔뜩 힘을 준 팔뚝과 어깨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런데도 허리 아래는 멈출 수가 없는지 몸짓이 굉장히 거칠었다.

    ‘차라리 빨리 넣어줬으면 좋겠어…….’

    아래쪽에 비비기만 하고 삽입을 하지 않으니 안달이 나서 더 감각이 커지는 듯했다. 해진은 치솟는 쾌감 속에서 용기를 낼 수밖에 없었다.

    “아, 안에, 넣어줘요…….”

    환의 미간이 설핏 사납게 구겨지더니 그가 귀두 끝을 해진의 입구에 밀어 넣었다.

    “……조금 거칠게 할지도, 후, 모릅니다.”

    동시에 하는 말에 해진은 ‘네! 제발요!’ 하고 소리 지르고 싶은 것을 참고 곧 밀려들 쾌감을 기다리며 눈을 꾹 감았다.

    그리고 환의 말은 빈말이 아니었다. 그대로 몰아치기 시작하는데, 해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이 그가 흔드는 대로 그저 흔들리기만 했다.

    “아, 흑, 으응, 아.”

    이성을 잃고 덤벼드는 이환이, 제 남편이 알파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그가 작정하고 페로몬을 흘리면 이렇게 위압적이라는 사실도 뒤늦게 떠올랐다.

    이환은 해진의 젖은 아래를 사납게 파고들었다. 구멍 안쪽을 무지막지하게 쑤셔대는 살덩어리는 해진에게 거의 무기처럼 느껴졌다. 사방으로 물이 튀었다. 지독한 쾌감 속에서 해진은 벌써 오르가즘에 다다를 것 같았다.

    “자, 잠깐, 흣.”

    정말 절정에 다다를 것 듯해 애원하자 환이 정말로 동작을 뚝 멈췄다. 해진은 젖은 눈을 하고 그를 마주했다.

    안을 쑤셔대던 페니스가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내벽을 긁고 나가는 자극에 흐윽, 하고 다시 한 번 신음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욕조 속에서 몸을 일으킨 환이 욕실장 문을 열고 뭔가를 꺼냈다. 콘돔 하나를 뜯어 발기한 성기에 씌우기까지는 채 몇 초가 걸리지 않았다.

    ‘그냥 해도…… 되는데…….’

    매칭률 99.99퍼센트의 알파와 오메가의 섹스는 그와 거의 비슷한 임신 확률을 가진다는 사실을 해진은 떠올리지 못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

    콘돔 씌운 성기가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첨벙, 큰 물소리와 함께 환이 그를 바짝 껴안았다.

    “흐읏, 아…….”

    “후, 미안합니다. 해진 씨. 주체가…… 안 돼서.”

    환이 그리 말했지만 주체가 안 되는 쪽은 사실 해진이었다. 그는 오랜만의 히트사이클에 거의 이성이 나갈 것 같았다. 오직 환의 몸만 원했다. 구멍 안쪽에서부터 퍼진 쾌감은 꼭 뜨거운 물처럼 온몸을 적시고 절정으로 이끌었다.

    “아, 너무, 좋, 아요. 흣, 으응. 더 깊이 넣어, 흑, 줘.”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해진은 나오는 대로 웅얼거렸다. 거의 비명 같은 신음이 욕실을 꽉 채웠다.

    환 역시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었다. 그는 해진의 안에다 성기를 난폭하게 쑤셔 박으며 조금씩 속도를 올렸다. 와중에도 해진의 작은 몸이 부서질까 싶어 팔로 있는 힘껏 껴안았지만, 제 팔 힘이 더 셀 거라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환이 해진의 안을 드나들 때마다 질퍽한 애액이 새어 나와 욕조 물을 더럽혔다. 환은 그를 있는 힘껏 껴안은 채 앞뒤로 빠르게 움직였다. 물속이지만 미끄러운 해진의 안쪽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다.

    히트사이클을 맞은 해진의 몸이 노곤노곤하게 녹듯이 풀어졌다. 꼭 알파의 몸에 맞춰지듯 그의 몸은 환이 주는 쾌락에 맞추어 점점 더 달아올랐다.

    “흐읏, 아, 환이, 씨.”

    해진이 결국 오르가즘을 맞았다. 성기에서 쏟아진 정액이 물속을 뿌옇게 만들었다. 오랜만의 히트사이클이라 그런지 쏟아지는 정액의 양도 많았다.

    환은 움찔거리는 해진의 안쪽을 적나라하게 느낄 수 있었다. 수축하는 내벽은 꼭 페니스를 쥐어짜는 듯했다. 오메가의 본능에 따라 정액을 제 안으로 받아들이려 하는 것이었다.

    “해진, 씨, 힘을 조금…….”

    “읏, 아, 너무, 너무, 좋아…….”

    힘을 조금 빼달라고 말하려고 했지만 해진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하아…….”

    환도 슬슬 정신이 나가고 있었다. 히트사이클을 맞은 해진의 몸은 평소와 완전히 달랐다. 평소의 섹스보다 몇 배는 더 강한 자극에 금방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나마 이성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을 때 콘돔을 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마지막으로, 환은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환이 움직일 때마다 욕조 물이 거의 다 넘치다시피 했다. 출렁거리는 물결에 맞춰서 해진의 속 역시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한계치를 넘은 쾌감은 해진을 정신없이 휘둘렀다. 지독히도 기분이 좋은데, 너무 좋아서 괴로울 정도였다. 오르가즘이 괴로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해진은 처음 깨달았다.

    “환이, 씨, 흣, 처, 천천, 아흣!”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나마 뱉은 말은 출렁거리는 물소리에 다 먹혀버렸다. 해진은 제 몸이 제 것이 아닌 것 같다 생각하며 몰아치는 두 번째 오르가즘을 겨우 견뎌냈다.

    그러나 환은 멈추지 않았다. 거대한 성기를 연신 안에 쑤셔 박으며 해진의 몸을 부서질 것처럼 쥐고 있었다.

    해진은 겨우 눈을 떴다. 아득한 시야 속에서 환의 얼굴이 어렴풋이 보였다. 눈빛이 영 이상했다. 초점도 없고 저를 보고 있지만 보고 있지 않는 것 같았다.

    ‘완전 맛이 간 거 같은데…….’

    그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몸을 조금이라도 비틀어보려고 애썼지만 불가능했다. 안을 가득 채운 페니스가 복부를 뚫기라도 할 기세로 퍽, 퍽 쑤셔 박혔다. 이미 오르가즘을 두 번이나 넘긴 그는 더 감각을 견뎌낼 수 없었다.

    “그, 그만, 해, 읏!”

    가뜩이나 정신이 없는데 환은 그의 말은 전혀 듣지도 않는 듯이 몰아치기만 했다. 해진은 이제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아, 흑, 환이, 씨, 나, 기분, 이상……!”

    “하아, 후, 해진 씨, 안쪽이, 꼭, 나를 잡아먹는 것 같습니다.”

    “흣, 뭐라는 거야, 미친, 읏!”

    환이 마지막 스퍼트를 올리며 허리를 빠르게 흔들었다. 꼭 짐승 같은 숨을 거세게 몰아쉬던 그가 성기를 부풀리기 시작했다.

    “아, 아파, 으, 아파요!”

    해진이 거의 울며 애원했다. 사실 아프다기보다는 좋은 감정이 더 컸지만, 아픔과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감각이 어마무시했다. 해진은 제 안쪽에서 부푸는 환의 성기를 느끼며 경련하듯이 파들파들 떨었다.

    환은 무지막지하게 커진 것을 느리게 움직였다. 비명도 지르지 못하는 해진을 눈치채지조차 못했다. 그렇게 몇 번을 더 움직이고 콘돔에 사정했다. 히트사이클을 맞은 제 오메가의 체취를 있는 힘껏 들이마셨다.

    “하, 후우, 해진 씨……. 해진…… 씨?”

    그리고 환은 기겁하고야 말았다. 해진이 제 품에서 축 늘어진 게 아닌가.

    “해진 씨!”

    늘어진 해진이 뭐라고 욕을 했지만 미처 듣지 못했다.

    * * *

    닥터 최는 자다 말고 옷도 제대로 입지 못하고 뛰어왔지만 다행히도 해진은 잠깐 기절했을 뿐 건강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환은 스스로를 무척이나 꾸짖었다. 가뜩이나 몸이 약한 사람을 데리고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해진 씨, 미안합니다. 내가, 짐승 새끼처럼…….”

    그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커다란 덩치를 구겨 침대에 파고들었다. 해진은 잠결에도 끙, 소리를 내며 환의 품을 찾아들었다.

    환이 그렇게 제 남편을 안고 잠든 지 30분 정도 지났을 무렵, 환희가 박 비서의 차를 타고 친구네 집에서 돌아왔다.

    아이는 거실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곤 안방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침대에서 꼭 안고 잠든 두 아빠를 보고 자그마한 양손을 허리춤에 짚은 채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에휴, 내가 또 비켜줘야겠네.”

    의젓한 맏딸답게 아이는 아빠들의 이불까지 여며주고 안방을 나왔다. 딸아이가 냉장고에 반찬이 뭐가 있는지 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부엌으로 가고 있는 동안에도 두 아빠는 서로를 안고 단잠에 빠져 있었다.

    잠결에 해진은 그의 품을 더 파고들었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제 오메가의 등을 감싸 안았다.

    < 외전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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