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15/16)

해진이 환희의 손에다 검지를 쥐여주고 환의 눈치를 조금 봤다. 할 말은 있는데 꺼려지는 눈치였다.

“환이 씨가 혹시라도 너무 힘들어할까 봐요.”

그리고 한다는 말이 제 걱정이어서 환은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환이 씨는 조난 상황에서 물도 못 구하실 테고, 야생 동물별로 대처법도 아직 모르시고 응급 처치법은 금방 배우셨지만 그래도…….”

걱정을 조잘조잘 쏟아내던 해진은 한숨을 푹 내쉬더니 한쪽 손으로 환의 손을 덥석 쥐었다.

“가면, 절대로 제 옆에서 떨어지지 마세요. 아셨죠?”

비장하기까지 한 말에 헛웃음이 나왔다.

“해진 씨는 저를 믿기는 하는 겁니까?”

황당함을 드러내며 묻자 해진은 눈을 한 번 데굴, 굴리곤 조심스레 대답했다.

“한 90퍼센트 정도……?”

90퍼센트라니. 그래도 낮은 수치는 아니다 싶었다. 그래도 그런 것치고는 너무 걱정이 많은데.

“걱정 마세요. 제가 환이 씨 지켜드릴게요.”

“……그거참 든든하군요.”

해진이 주먹을 불끈 쥐며 콧구멍의 평수를 넓혔다. 상상만으로도 흥분이 되는 모양이었다. 저렇게 즐거울까.

“거기 호랑이들이 사람을 안 두려워해서 가끔 사람을 해치기도 한대요……. 아, 진짜 흥분된다. 식인 호랑이라니…….”

……아무래도 제 남편의 취향이 조금 많이 독특한 게 걱정이긴 했다.

“오구, 우리 환희 배고파? 맘마 먹을까? 응?”

해진이 환희를 안아 들고 주방으로 갔다. 환은 그가 준 포켓북을 펼쳤다. 그가 시켰으니 오늘 안에는 독파하고 달달 외워야 했다.

야생에서의 갖가지 대처법이 적힌 책을 읽어 나가며 환은 그가 말했던 수치를 되새겼다. 90퍼센트라. 뭐, 그 정도면 제법 마음에 드는 수치다.

나머지 10퍼센트는 앞으로 자신이 채워 나가야 할 몫이겠지. 싫지 않았다. 오히려 채워 나가야 할 게 남아 있다니 기쁘기까지 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이렇게 벅찬데도 앞으로 더 쌓일 게 있단 사실이 즐겁기만 했다.

“저어, 환이 씨…….”

주방 쪽에서 자신 없는 해진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유식을 만들다 뭔가 또 잘못된 모양이었다. 얼른 일어나 달려갔다.

* * *

인도와 네팔의 경계에 있는 국립 공원은 본래도 관광지로 유명했다. 본래도 1박 2일이나 2박 3일짜리 사파리 체험 프로그램이 있기는 했지만 환은 제 남편이 그런 시시하고 안전한 ‘체험’ 따위는 원치 않으리란 사실을 알았다.

환희는 박 비서가 보살피기로 했다. 해진은 그에게 업무 외의 일을 떠맡긴단 사실에 몹시 미안해했지만, 박 비서는 오히려 기뻐했다. 사랑스러운 조카를 매일 볼 수 있어 행복하다나.

안전 교육은 한국에 있을 때부터 받았으며, 현지에 가서도 이틀 동안 받았다. 이미 알던 사실도 좀 있었지만 해진은 얌전히 주의사항을 숙지했다.

통역이 가능한 이를 포함해 무장한 현지 가이드 세 명을 대동하고 마침내 숲으로 이동할 때, 해진은 흥분을 숨기지 못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환이 씨, 저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지프차를 타고 가며 하는 말에 환은 깜짝 놀랐다.

“괜찮습니까? 멈추라고 할까요?”

“아, 아뇨, 그 정도는 아닌데 너무 흥분되고 떨려서…….”

화색이 돈 얼굴로 말하는 해진을 보자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올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프차는 숲속으로 제법 깊이 들어가서야 멈췄다. 해진은 싱글벙글하며 나는 듯이 뛰어내렸다.

좀 더 안쪽으로 걸어간 일행은 코끼리로 이동수단을 변경했다. 야생 동물을 마주쳤을 때 코끼리가 오히려 더 안전하단 게 이유였다.

환은 벌써부터 풍겨오는 온갖 냄새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심지어 똥을 바닥에 펑펑 싸대는 저 거대한 짐승을 타라니. 하지만 해진을 기쁘게 해주기 위해서라면 감당할 수 있었다. 그래, 소똥도 맞았는데.

이곳에서 효과가 있는지도 확실치 않은 소독제를 주머니에서 꺼내 손에다가 치덕치덕 바른 환은 또 한 움큼을 짜내 해진의 손에도 발라주었다.

“그거 알아요, 환이 씨?”

해진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환은 말을 이어보란 투로 웃어 보였다. 비록 숨을 쉴 때마다 코끼리 똥 냄새인지 뭔지 모를 악취가 파고들었지만 말이다.

“여기 사는 호랑이들요, 점프력이 엄청 좋아서 코끼리를 타도 사실 소용이 없대요. 이 정도 높이는 그냥 뛰어넘어요.”

“그렇습니까?”

호랑이가 덤벼들 수 있다 생각하자 아주 조금 무서웠지만 구태여 티는 내지 않았다.

“네. 그래서 이렇게 코끼리 위에 앉아 있어도 순식간에 공격당할 수 있어요. 호랑이가 얼마나 빠른지 모르시죠? 저기, 저 위치 정도 되는 수풀에 숨어 있다가…….”

환은 저도 모르게 해진의 설명에 집중하며 그가 가리키는 수풀 쪽을 바라보았다. 해진의 손이 휙! 다시 그를 가리켰다.

“확! 덮치는 거죠. 사냥하듯이.”

꿀꺽,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진지하던 해진의 얼굴이 다시 풀어지며 해사하게 웃음을 담아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지켜드릴게요.”

……등줄기에 맺힌 식은땀은 그냥 더워서일 것이다. 그뿐이다. 절대 무서운 게 아니었다.

“호랑이가 덮치는 상황에서 해진 씨가 어떻게 지켜준단 말입니까.”

까딱하면 그대로 즉사할 텐데. 해진은 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헤헤, 소리 내어 웃었다.

“어쨌든 너무 짜릿하지 않아요? 하, 손발에 피가 도는 것 같아…….”

손발에 피가 안 돌면 그건 시체입니다만, 하고 반박하고 싶었지만 제 남편이 하는 말은 무조건 맞으므로 입을 다물었다.

숲속 깊은 곳으로 이동한 뒤 일행은 코끼리에서 내렸다. 이곳에서부터는 도보로 가야 했다.

몸이 약한 해진이 혹시라도 힘들어할까 환은 걱정했지만 해진은 씩씩하게 숲속을 걸어 다녔다.

신이 나서 못 견딜 줄 알았더니 그는 의외로 진지하고 프로페셔널했다. 동물들을 놀라게 해서 좋을 게 없다며 환에게 발소리를 죽이라고 충고하기까지 했다. 진지하게 주변을 탐사하는 해진의 모습에 환은 한 사람에게 두 번 반한다는 말의 뜻을 알 것 같았다.

“헉, 환이 씨. 저거 보여요?”

걷던 중 해진이 손가락을 뻗어 보였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사슴 두 마리가 있었다. 제법 가까운 거리인데도 도망치지 않는 걸 보니 사람을 별로 무서워 않는 모양이었다.

“와아, 진짜 신기하다…….”

가까이 가도 된다는 현지인의 말에 해진은 즉각 길을 벗어나 사슴 쪽으로 다가갔다. 환은 주변을 살피며 해진을 뒤따랐다.

대부분의 풀은 허리를 넘길 정도로 키가 컸고 나무가 빼곡해서 어디에 뭐가 있는지도 알 수 없는데, 해진은 마냥 신이 나서 앞서 걸었다. 환은 그가 걱정되었지만 그의 말대로 생존력은 해진이 훨씬 뛰어나니 얌전히 그의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숲에는 온갖 동물이 다 있었다. 발 디디는 곳마다 벌레들이 도망갔고, 나무 사이로는 새들이 날아올랐으며 심지어 뱀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리고 환은 딱 죽을 지경이었다. 온갖 더러운 박테리아와 세균이, 짐승의 똥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와, 이게 진짜 표범 똥이에요?”

해진은 힘든 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야생 동물이 싸질러 놓은 똥을 보고 기뻐했다.

“만져봐도 돼요?”

……심지어 만지기까지 했다.

“들었어요, 환이 씨? 여기 근처에 표범 있을지도 모른대요……!”

“예, 예. 들었습니다.”

소독제를 짜서 해진의 손에 발라준 뒤 얼른 제 손에도 치덕치덕 발랐다. 비누와 물로 박박 씻기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앗, 저기도 표범 똥! 맞죠!”

환은 벌레가 제게 달려들지 않도록 손을 끝없이 내저으며 해진의 뒤를 따랐다. 당장 집에 돌아가고 싶었다. 제대로 된 위생적인 욕실과 깨끗한 식사가 그리웠다. 하지만 해진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면 괴로움도 조금 줄어들었다.

현지인 가이드는 이 숲의 위험성에 대해 몇 번 경고했다. 실제로도 맹수들에게 다친 현지인이 꽤 있다고 했다. 해진도 예전에 다큐멘터리에서 사건을 본 적이 있다고 했다.

환은 신경 쓰지 않으려 했다. 아주 드문 사건이고, 지금은 이 숲에 익숙한 현지인 가이드도 있으니 걱정하지 말아야지, 생각했다. 그 정도로 위험한 지역이면 오지 않았을 터다. 그러나 기척이 들릴 때마다 신경이 곤두섬은 어쩔 수 없었다.

탐험을 이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일행은 잠깐 쉬기로 했다. 해진은 한국에서 가져온 과자를 가이드들에게 선물해 주었다.

다정한 그의 모습을 보자 질투심이 일었으나 일전에 해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제게만 잘 대해주는 것이 능사가 아니라는 이야기는 그가 해진에게서 배운 수많은 것들 중 하나였다.

그나저나 환은 당장 씻고 싶어서 미칠 것 같았다. 오래 걸은 탓에 온몸이 땀으로 젖었고, 코끼리 냄새가 아직도 코를 찔렀다. 신발 밑창은 무슨 동물의 배설물인지 진흙인지 모를 것으로 질척거렸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에는 화장실이 없었다. 환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버거웠다.

옷을 억지로 털며 옆을 흘끔 보았다. 해진은 현지인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동물과 관련된 이야기를 들으며 눈을 반짝반짝 빛내는 모습을 보니 그래도 오길 잘했다 싶었다.

“그…… 용변은 어디서 보면 됩니까?”

곤란함을 감추려 애쓰며 환이 묻자 현지인은 그런 걸 왜 묻느냐는 투로 수풀 한쪽을 턱으로 가리켰다. 환은 굴욕을 억누르고 배낭에서 물티슈를 챙겨 들었다.

“같이 가드릴까요?”

해진이 물었지만 환은 얼른 고개를 가로저었다. 같이 가다니. 말도 되지 않는다. 아무리 부부라지만 용변을 보는 모습까지 보여줄 수는 없었다.

“얼른 갔다 오겠습니다.”

“하지만…… 진짜 괜찮겠어요, 환이 씨?”

걱정스레 묻는 표정이 제법 진지했다. 사실 코끼리도 뛰어넘는 호랑이 이야기가 떠올랐지만 겁을 내는 모습을 보여줄 순 없었기에 환은 제가 생각하는 한 최대한 멋진 표정으로 웃어 보였다.

“괜찮다마다요. 쉬고 있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환은 절대 괜찮지 않았다. 어릴 때에도 밖에서 아무 데나 용변을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고등 교육을 받고 자란 교양 있는 알파에게 그런 짓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술을 마셨을 때도 담벼락 같은 곳에 함부로 일을 본 적 없었다. 만취한 적도 없지만 말이다. 밖에서 선 채로 아무 데나 배설물을 흘리는 짓은 사람이 해선 안 되는 짓에 속했다. 그러니 환은 지금 사람이길 포기해야 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그는 바지 버클을 풀며 해진 역시 이런 고생을 했으리라 생각했다. 제게서 도망 다니며 이보다 더 위험한 생활을 했겠지. 그때를 생각하면 마음이 다시 아려왔다.

환은 주변을 몇 번이나 확인하고는 선 채로 지퍼를 내렸다. 당혹스럽지만 지성을 가진 성인답게 일을 처리하고 물티슈로 손까지 깨끗하게 닦았다.

워터리스 세정제가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역시 가지고 올 걸 그랬나. 아쉬움과 함께 돌아선 순간 환은 기겁하고 말았다.

처음 보는 거대한 짐승이 환의 바로 앞에 서 있었다. 코뿔소였다.

하마터면 졸도할 뻔했지만, 환은 다행히도 이 짐승이 사람을 해치지는 않는다는 사실과 가이드가 알려준 대처법을 기억해냈다. 놀란 티를 내지 말고, 등을 갑자기 보이거나 큰 소리를 내지 말 것.

“……나는 널 해칠 마음이 없다.”

사람 말을 짐승이 알아들을 리 없지만 그래도 입 밖으로 내어 말했다. 환은 그대로 천천히, 아주 조심스럽게 코뿔소를 놀라게 하지 않을 속도로 뒷걸음질을 쳤다. 맹수가 아니라 다행이었다. 물론 맹수가 자주 출현하는 지역은 최대한 배제해달라고 사전에 요청해두었지만 말이다.

본래대로라면 이 냄새나고 거대한 짐승은 사람을 무서워하니 돌아서서 사라지거나, 더 가까이 다가오지 않아야 했다. 그런데 무슨 조화인지 코뿔소가 환에게 한 걸음을 더 가까이 다가왔다.

“오지 마라.”

준엄하게 경고했으나 역시 짐승이 사람 말을 알아들을 리 없었다. 환은 당혹스러워 한 걸음을 더 물러났고, 코뿔소는 또 한 걸음을 더 가까이 다가왔다. 심지어 더러운 주둥이를 제게 들이대려 하는 게 아닌가.

“저리 치워! 난 유부남이란 말이다!”

환은 진저리를 치며 옆으로 걸어 움직였다. 코뿔소는 그를 두려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여전히 따라붙었다.

‘젠장, 무슨 짐승 새끼가…….’

냄새가 지독하게 코를 찔렀다. 빨리 이 불결한 짐승과 떨어지고 싶단 생각에 환은 걸음을 더 서둘렀다. 옆으로 기다시피 걸어서 일행이 있는 곳까지 가는 동안에도 코뿔소는 졸졸 따라왔다.

“어, 환이 씨!”

바위 위에 걸터앉아 있던 해진이 벌떡 일어났다. 현지 가이드들도 기겁하며 다가왔다.

“그, 환이 씨 뒤, 뒤에…….”

“압니다. 저는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저 짐승이 왜 자꾸 쫓아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코뿔소가 어느새 환의 뒤를 졸졸 쫓아오고 있었다. 환은 당혹스러워 어쩔 줄을 모르는데, 정작 현지 가이드들은 피식피식 웃기 시작했다. 코뿔소가 환을 해치지는 않으리라 확신한 모양이었다.

“이게 가능한 일입니까? 좀 떨어지라고 하십시오.”

“저는 코뿔소 말은 못 해요.”

통역을 담당한 현지 가이드가 장난스레 대답하곤 어깨를 으쓱 움츠려 보였다. 보다 못한 해진이 일어나 가까이 다가갔다. 손을 휘휘 내저어 보이자 그제야 코뿔소는 더 다가오지 않고 고개를 이리저리 휘두르다 숲속으로 사라져버렸다.

“환이 씨는 동물한테도 인기가 많네요. 하하.”

제 배우자의 웃음을 듣고서야 환은 안도했다. 내색 않으려 했으나 다리가 후들거릴 지경이었다. 해진이 그의 안색을 살폈다.

“우리 환이 씨, 많이 놀랐어요?”

알파가 되어 제 짝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였으니 창피해야 마땅했다. 그러나 환은 창피하지 않았다. 놀라기는 뭘 놀랐냐고 시침을 뗄 수도 있었으나 그러지 않았다. 다만 고개를 유순히 끄덕였다.

그는 제 오메가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창피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위로받고 보호받는 일이 조금도 부끄럽지 않았다. 그는 하나밖에 없는 제 배우자이니까.

“……예. 놀랐습니다.”

“에구, 우리 남편. 이리 와요. 안아줄게요.”

해진이 까치발을 들고 덩치 큰 그를 품에 안아주었다. 환은 얌전히 그의 품에 안긴 채로 몸을 최대한 웅크렸다. 저보다 작은 해진이 저를 마음껏 안을 수 있도록 말이다.

해진의 요구에 따라 현지 가이드는 하루 동안 잠깐 따로 활동하기로 했다.

무전기를 상시 소지하고 있으며 혹시라도 발생할 위기 상황에 상해를 입어도 책임을 지우지 않겠다는 계약 내용은 일전에도 한 번 설명을 듣고 확인한 바 있었다. 그 계약 내용이 환의 마음에 찰 리가 없었지만 말이다.

그래도 가까운 곳에서 현지 가이드들이 캠프를 하고 있으니 안심을 해야 하는데, 환은 잔뜩 신경이 곤두서서 가만히 앉아 있을 수도 없었다. 텐트는 고작해야 한 장짜리이고 야수는커녕 비바람도 막아주기 힘들 것 같았다.

이런 곳에서 잠을 자야 한다니. 미친 짓이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진지하게 텐트 곳곳을 점검하는 해진을 보니 든든했다.

“환이 씨, 괜찮으세요?”

해진이 제법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까부터 환의 안색이 영 좋질 않았다.

“……씻질 못해서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이제 고작 하루 지났을 뿐인데, 역시 환이 씨는 연약하고 섬세하시구나……. 해진은 그리 생각하며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지금 이 숲속뿐만 아니라 이 험한 세상에서도 환을 잘 지켜주어야겠다고.

“손 내밀어보세요.”

해진이 요구하자 또 손은 얌전히 내민다. 꼬질꼬질한 손을 물에 적신 수건으로 꼼꼼하게 닦아주었다. 저랑 손잡고도 소독제를 쓰던 놈이니 이 상황이 얼마나 괴로울까.

더러워진 환의 손을 닦으며 해진은 새삼 신기했다. 이렇게 예민한 양반이 어쩌자고 여기까지 저를 따라왔는지 말이다.

“……예전에.”

잠깐의 침묵 속에서 환이 운을 뗐다. 그리고 기억을 되새기려는 듯 미간을 구기곤 한참 뜸을 들였다. 해진은 얌전히 기다리며 환의 손가락 마디마디를 깨끗이 닦아주었다. 대체 무슨 끔찍한 기억이길래.

“해진 씨를 찾아다닐 때에도 한동안 씻지 못했던 적이 있습니다.”

……정말 끔찍한 기억 맞구나.

“그 동네는 제대로 된 숙박 시설이 없더군요. 그렇다고 위생 상태가 불분명한 공중 시설에서 몸을 씻을 수도 없고…….”

‘위생 상태가 불분명한’이라는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해진은 그러려니 했다.

“그래서 무려 이틀이나…… 사흘을 못 씻은 적도 있습니다. 돌이켜보니 정말 끔찍하군요.”

그렇다. 이환에게는 이틀 사흘 못 씻는 일이 거의 재앙일 것이다. 해진은 사흘 동안 씻지 못한 환의 모습을 상상해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자비롭지 않은 부처를 상상하는 게 더 쉬울 듯했다.

“저는 전혀 생각도 못 했어요. 그냥 편히 지내신 줄 알았는데…….”

물론 오랜만에 만난 환의 얼굴이 많이 상해 있기는 했었지만, 목숨처럼 여기는 위생까지 포기하며 저를 쫓아다닌 줄은 몰랐다. 저는 그때 환의 돈을 펑펑 쓰면서 호화로운 리조트를 오갔는데 말이다.

“이상하게도 그때는 씻지 못하는 일이 그렇게까지 괴롭진 않더군요.”

해진은 물 적신 수건을 깨끗하게 헹군 뒤 그의 반대쪽 손을 닦아주었다.

“그땐 왜 별로 안 괴로우셨어요?”

“강해진 씨를 그대로 잃을 수도 있단 생각이 더 괴로웠으니까요.”

닦아주던 손길이 조금 느려졌다. 환이 그의 손을 제 손으로 덮듯이 감싸 쥐었다.

“알겠지만 나는 예민하고 거슬려하는 게 많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늘 피곤하게 살아왔고 말입니다.”

해진이 쥐고 있던 물수건이 아래로 떨어졌다. 환이 그를 끌어당겼다. 저 역시 씻지 못해 더러운데도 환은 그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하지만 그런 내가 유일하게 피곤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해진 씨입니다.”

누가 짐작이나 했을까. 이렇게 답 없이 오만한 알파가 제게 빠져 이런 애정을 바칠 줄이야.

사실 해진은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저를 물건처럼 내려다보던 이환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말이다.

그를 의심하기도 했었다. 이렇게 잠깐 잘해주다가 금세 변덕을 부리고 또 저를 막 대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환은 그러지 않았다.

해진은 이제 알 수 있었다. 자신이 이환의 예외라는 사실을.

저를 안은 커다란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환이 씨, 나는요, 환이 씨의 예외가 될 수 있어서 기뻐요.”

저보다 덩치도 훨씬 크고 잘난 이 알파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이제 조금은 알 법도 했다.

“그러니까 환이 씨도 저의 예외가 되어주세요. 평생 동안요.”

다시 팔을 풀고 제 남편의 얼굴을 확인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듯이 그렁그렁한 눈을 마주한 채 해진은 짐짓 장난스레 놀란 표정을 지었다.

“우리 남편, 안 씻어도 여전히 잘생겼네요?”

“당연한 걸 이제 알았습니까?”

뻔뻔한 게 역시 이환다워서 다행이었다. 해진은 물수건을 텐트 안에 널어놓고는 짐을 살폈다.

“컵라면 드실래요? 잠깐 불 피우는 건 괜찮으니까 얼른 물 끓여서 먹어요.”

“좋습니다.”

평소라면 절대 입에도 대지 않을 음식이지만 배가 고프기도 했고, 해진이 먹고 싶어 하는 눈치기에 환은 얼른 대답했다. 그런데 짐을 살피던 해진의 표정이 삽시간에 나빠졌다.

“무슨 일 있습니까?”

“……어떡하지. 아까 배낭이 바뀌었나 봐요.”

불길했다. 환은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쓰며 해진의 설명을 기다렸다.

“식량 배낭이…… 없네요.”

심각하게 읊조리는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러니까, 음식과 물이 들어 있는 배낭을 지금 잃어버렸다는 뜻입니까?”

“음, 그게…… 운이 좋으면 저쪽 가이드분들 캠프에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제가 무전을 해볼게요.”

환은 머리가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큰일이 아니리라 애써 스스로를 다독였으나 불안감은 어쩔 수 없었다.

다행히도 무전기는 헤어지기 전에도 테스트했기에 제대로 갖고 있었다. 문제는 제대로 동작이 되지 않는다는 거였다.

“아, 왜 이러지……. 아깐 잘됐는데.”

“운이 나쁘면 간혹 수신 상태가 좋지 않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휴. 아무래도 그 운이 나쁜 게 지금인 것 같네요.”

무전기를 툭툭 두드리던 해진이 포기한 투로 내려놓았다. 축 처진 어깨가 보기 안쓰러워 환이 그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환이 씨, 배고프시죠?”

“아뇨, 하나도 안 고픕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해진 씨가 걱정이죠.”

사실이었다. 유순하게 제 품에 안긴 해진의 체온을 느끼고 있자니 하나도 배가 고프지 않았다. 다만 아이를 낳은 지 몇 달 되지 않은 제 오메가가 걱정이었다.

그 힘든 일을 해냈으니 적어도 일 년은 얌전히 요양하는 게 좋지 않을까, 뒤늦게 고민이 되기도 했지만 오기 전부터 기대에 차 있는 모습을 보면 그럴 수도 없었다.

환은 해진을 안고 있던 팔을 풀고 그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떼었다. 해진이 눈썹을 팔자로 휘며 웃어 보였다. 미안함이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그래도 응급 처치 키트는 있어서 다행이에요! 패혈증이나 과다출혈, 중독으로 죽을 일은 없을 거예요!”

“다행입니다. 그거 정말 안심되는군요.”

현지 가이드들과 약속한 날짜는 이틀이었다. 물은 이곳에서도 구하기 쉬우니 상관이 없고, 먹을 것은 찾아보면 될 터다. 다행히도 해진은 이곳에 있는 식물 중 먹을 수 있는 것들을 구별해냈다. 물론 환은 그중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았지만 말이다.

“일단 오늘은 이대로 자고, 아침에 다시 무전을 해보죠. 괜찮을 겁니다.”

벌써 밤이 깊어 아마 가이드들도 잠들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해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텐트를 단단히 닫고 전등을 끈 뒤 나란히 누웠다. 환은 자신이 잠들 수 없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바로 곁에 있는 해진의 온기가, 아직도 들뜬 듯한 제 남편의 기척이 지독히도 사랑스러워 아무래도 좋았다.

“해진 씨.”

“네에.”

“잘 자요.”

달달한 웃음소리가 바로 곁에서 들렸다.

“환이 씨도 잘 자요.”

환은 살며시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쥐었다. 해진의 손은 언제 쥐어도 자그마하고 따스했다.

그 때였다. 텐트 밖에서 기척이 들렸다. 환은 벌떡 일어났다.

“무슨 소리죠?”

“글쎄요. 별거 아닐 거예요. 누워요, 환이 씨.”

저를 말리는 해진을 두고 환은 밖에서 들리는 기척에 귀를 바짝 기울였다. 맹수일까? 도망쳐야 하나? 매뉴얼대로라면 가이드에게 연락을 취해야 하지만 무전기가 작동하지 않으니…….

다시 휘익, 하는 소리가 밖에서 들렸다. 어둠 속에서 그림자가 지나친 듯도 했다. 환은 마른침을 삼켰다. 아무리 해진이 원해서 왔다지만 역시 잘못한 일은 아닐까, 뒤늦게 후회까지 되는 것이었다. 온갖 생각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그리고 다시 휘익, 하는 소리. 환은 누운 해진을 제 등 뒤로 보호하며 잔뜩 신경을 곤두세웠다.

“걱정 말고 내 뒤에 계십시오, 해진 씨.”

“환이 씨…….”

“걱정 마십시오, 제가 지켜드리겠습니다.”

해진이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환은 주먹을 꽉 쥐며 다시 결의를 불태웠다. 그 어떤 맹수가 덤벼들더라도 제 오메가를 지켜낼…….

“그게 아니라, 이거 그냥 바람 소리예요…….”

……주먹을 차분히 내렸다.

머쓱함에 어쩔 줄 모르고 있는데, 해진의 팔이 그의 허리에 감겨왔다. 뒤로 닿는 온기가 달았다.

“저는 환이 씨가 언제나 진중해서 좋아요. 그래서 늘 든든해요.”

어째서 제 짝은 이리도 다정할까.

“앞으로도 그 진중함으로 저를 지켜주세요. 제가 믿고 따라갈 수 있게요.”

어느새 머쓱함은 잊어버리고 사랑스러움이 그 자리를 채웠다. 환은 돌아앉아 누운 해진을 짓누르듯 껴안았다. 제 품에 감겨오는 온기를 단 한 톨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바람이 두 부부의 애정을 읽은 양 조용히 잦아들었다.

불행히도 다음 날 아침까지 무전기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환은 현지 가이드들에게 제대로 책임을 물을 생각이었다. 이딴 장비를 줘놓고 안전 관련 계약에 서명을 했다니, 그로서는 용서할 수 없었다.

해진은 이른 새벽부터 일어나 이슬을 채취한답시고 열심히 애를 썼다. 바지런히 텐트 근처를 다니더니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마실 수 있는 물을 한 통이나 구해 왔다.

“……정말 마셔도 되는 겁니까?”

묻는 말에 해진은 어깨를 으쓱 움츠려 보였다.

“싫으면 마시지 마세요.”

“미안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얼른 사과하자 해진이 만족스레 웃으며 한 모금 마신 물병을 내밀었다. 물을 마시던 환은 해진이 몸을 숙이고 무언가 부스럭거리는 것을 보고 미간을 구겼다. 몸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으나 채집망 비슷한 게 해진의 손에 쥐여져 있었다.

“……그건 뭡니까?”

“아…….”

해진이 멋쩍게 웃었다. 채집망에 든 것은 네다섯 마리의 벌레였다.

“이 벌레가 단백질이 풍부하고 해로운 균도 적은데……. 역시 그냥 굶는 게 편하시겠죠?”

환은 기절하고 싶은 것을 참고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아, 환이 씨 창백해졌다.”

벌레를 그대로 우르르 쏟아버린 해진은 손을 깨끗이 턴 뒤 소독제를 꺼내 찹찹 바르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어 보였다. 생글생글 웃는 그 얼굴을 보자 잠깐 상했던 비위가 금세 나아졌다.

다행히도 무전기는 상대방 쪽 실수로 연결이 되지 않은 것이었다. 점심이 되기 전에 환과 해진은 식량이 든 배낭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환의 설득으로 남은 나날은 현지 가이드들과 떨어지지 않기로 약속했다.

며칠간의 탐험 동안 해진은 반짝반짝하게 화색이 돈 채 무척이나 진중한 모습으로 온갖 곳을 다 돌아다녔다.

환은 금방이라도 피곤해 쓰러지고 싶었으나 기를 쓰고 해진의 뒤를 지켰다. 사실 진중하게 탐험에 임하는 해진을 보고 있으면 이깟 피로쯤 아무렇지 않았다.

돌아오는 날, 해진은 아쉬움 그득한 얼굴로 몇 번이고 가이드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포옹을 왜 연달아서 하는지 환은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해진이 무척 아쉬워하는 눈치기에 어쩔 수 없이 별말 않았다.

전용기를 타고 한국으로 돌아올 때에 해진은 숲에서 보았던 것들을 조잘거리며 읊다가 금세 잠에 빠졌다.

전용기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브라마푸트라강의 전경은 무척 아름다웠으나, 환은 그를 깨우는 대신 제 무릎에 눕혔다. 그가 원하면 앞으로도 언제든지 다시 볼 수 있는 광경이니까.

이제 생후 5개월에 들어선 환희는 박 비서가 잘 돌봐준 덕에 통통하게 살도 오르고 아픈 곳 없이 건강했다. 박 비서는 해진에게 환희를 안겨주며 못내 아쉬워했다.

“우리 딸, 삼촌 안 괴롭히고 잘 있었어?”

“환희가 삼촌이랑 놀아주느라 고생했죠. 얼마나 착한지 모릅니다. ……그, 안기 전에는 꼭 손 깨끗이 씻었으니 걱정 마시고요.”

환이 허리를 숙여 아이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러자 환희가 자그마한 손바닥을 휘둘렀다.

“그래, 아빠다.”

“부!”

‘부!’ 하고 소리 지른 환희가 환의 얼굴을 찰싹! 소리 나게 때렸다. 환은 그대로 굳었다. 박 비서마저 굳었으나 해진은 시원하게 소리 내어 웃었다.

“하하! 우리 딸, 아주 아빠를 야무지게 패네!”

“……배구 선수를 시켜도 될 것 같군요. 아주 아픕니다.”

해진이 환에게 아이를 넘겨주었다. 다행히도 환희는 아빠를 더 때리지 않고 얌전히 안겼다.

“아빠들이 너무 오랜만에 얼굴 보여줘서 심통 났나 봐요.”

환희가 환의 얼굴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샐쭉 웃어 보였다. 환은 마음이 따뜻한 무언가로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예전에는 이게 무엇인지 알지 못했는데, 이제는 알았다. 그가 앞으로도 평생 안고 지낼, 제 가족에게 오롯이 퍼부을 사랑이었다.

* * *

신혼집은 키스틸 레저 본사 근처였다. 환은 해진의 건강을 생각해 경기도 외곽의 조용한 동네를 고려하고 있었다. 그러나 해진은 아무래도 소아과가 가까운 곳에 있는 게 안심이 되고, 환이 일에 소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했다.

“저 보살피시느라고 한동안 출근도 제대로 못 하시고……. 그러다 진짜 잘리신다고요.”

“제가 잘릴 일은 영원히 없을 겁니다만, 그래도 해진 씨의 말이 일리가 있으니 그렇게 하죠.”

얼른 대답했는데 어쩐지 해진의 표정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환은 그의 뺨을 한쪽 손으로 감쌌다. 부드러운 눈길이 제 남편의 얼굴을 한 번 훑었다.

“또 할 말 있으면 편하게 해요.”

할 수 있는 한 다정하게 어르자 해진은 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다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저…… 저도 슬슬 복귀하고 싶어요.”

환은 스스로를 꾸짖었다. 그래, 이전에도 그렇게 열심히 일했던 사람이니. 좀 더 쉬었으면 싶지만 그가 원한다면야.

“키스틸 레저 내부에 자리를 마련해두겠습니다. 이전에 일했던 것처럼 기획 쪽으로…….”

“아뇨.”

해진이 제 뺨을 감싼 그의 손을 살며시 끌어 내렸다.

“제힘으로 취직하고 싶어요. 환이 씨가 도와주시지 않아도 돼요.”

“하지만…….”

“제가 하고 싶어요.”

자리에서 일어난 해진이 세탁기에서 막 건조가 끝난 아기 옷을 들고 왔다. 환은 그가 가져온 아기 옷을 차곡차곡 개기 시작하며 해진이 말을 잇길 기다렸다.

“사실, 제가 이전에 도망 다니면서 깨달은 게 하나 있거든요.”

환이 갠 아기 옷을 해진이 차례대로 가져갔다. 각이 제대로 잡혀서 깨끗하게 접힌 옷가지는 환의 성격을 대변했다.

옷을 서랍에 넣고 돌아와 보니 환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아마 도망 다닐 때 이야기를 꺼내서일 터다.

“음, 사실 우리나라에도 관광지로 개발하기 좋은 곳이 아주 많은데, 생각보다 안 알려져서 다들 모르더라고요. 그래서 이번에는 국내 여행 쪽으로 일을 해보고 싶어요.”

환은 남은 아기 옷을 능숙하게 갠 뒤 주방으로 갔다. 해진은 그가 갠 것을 마저 정리한 뒤 주방으로 따라갔다. 환은 냉장고에서 이유식 재료를 차례대로 꺼냈다.

“국내 여행도 키스틸에서 개발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을 텐데요.”

“그렇긴 한데요, 아무래도 대기업은 이미 관행 같은 게 있어서 새롭게 뭘 하기가 좀 힘들거든요.”

이왕이면 스타트업에 들어가서 하고 싶은 일을 마음껏 하고 싶었다. 승진도 하고, 현장 답사도 자주 가고, 제 이름을 내건 상품을 개발하고 말이다.

환은 해진의 말을 경청하며 이유식 재료를 빠르게 다듬었다. 그의 손이 닿은 재료는 순식간에 형태를 바꾸어갔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달갑진 않습니다. 저도 일을 하는 사람이지만, 이왕이면 같은 건물에 해진 씨가 있는 게 마음이 놓이기도 하니.”

해진이 등 뒤로 다가가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환은 손을 멈추고 칼을 내려놓았다. 그리곤 제 허리에 감긴 해진의 팔을 쓰다듬었다.

“그래도 저는 여전히 환이 씨의 남편으로 지낼 거니까요. 퇴근하면 집에서 만날 수 있고, 아침에 눈뜨면 옆에 있는 남편이요.”

등에 닿는 온기가 달았다. 환은 문득 아득했다. 강해진 없이 여태 자신은 어떻게 살아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우리 사이에 변하는 건 없을 테니 걱정 말아요.”

변하는 게 없을 거란 해진의 말이 깊은 위로가 되었다. 그래서 환은 진심으로 안도할 수 있었다.

“작은 회사는 야근을 많이 한다던데…….”

망설이다 한 마디 내뱉자 등 뒤에 매달린 해진이 푸스스 웃었다.

“야근은 대기업이 더 많이 하거든요? 걱정 말아요. 매일 칼퇴할게. 집에 와서 우리 남편이랑 놀아줘야지.”

이번에는 환이 웃었다. 더 참지 못한 그가 뒤를 돌았다. 제 허리에 감긴 팔을 풀고 해진을 꽉 껴안았다.

“숨 막혀요, 환이 씨…….”

이제는 해진이 투정을 부리는 것인지 아닌지도 구분할 수 있었다. 목소리에 웃음이 섞이고 외려 제 품에 파고드는 걸 보면 이건 투정이었다.

환은 있는 힘껏 제 짝을 품에 안았다. 아무리 안아도 모자라고 아쉽고 더 원하게 되는 자신의 강해진을.

* * *

아이를 보는 일은 생각보다 힘들고, 생각보다 즐거웠다. 갓난아기는 그야말로 기어 다니는 시한폭탄 같다고 환이 말한 적 있었다. 딸보고 폭탄이 뭐냐며 타박하면서도 해진은 그의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오늘은 하루 종일 얌전한 환희였다. 덕분에 해진은 미뤄두었던 외국어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서재에 들어가기 전, 환은 절대 걱정 말라며 혼자서 아이를 볼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며 해진에게 이어폰을 꽂고 공부에 집중해도 된다고 했다.

조금 불안하긴 했어도 해진은 기꺼이 그렇게 했다. 환이 아직 아이 돌보는 데에 서툴긴 해도 나름 노력하니까 말이다. 아니, 나름이 아니라 정말 열심히 노력하고 있었다.

이환이 변했다. 그 사실은 아이를 낳기 전에도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변할 줄은 해진도 몰랐다.

신기한 것은 아이 기저귀는 척척 갈면서, 집안일 도와주시는 분이 조금만 청소를 잘못해도 성에 안 찬다며 화를 낸다는 점이었다.

‘뭐, 완전히 바뀌는 것보다야 낫긴 하니까.’

해진은 이어폰을 빼고 책을 덮었다. 서재는 방음이 잘되어서 앉아 있으면 바깥 소리가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슬슬 나가볼까…….’

기지개를 켜고 서재를 나와 거실로 간 해진은 제 앞에 펼쳐진 광경에 발소리를 죽이곤 조용히 웃었다.

휴대폰을 꺼내 카메라 앱을 켰다. 눈앞 광경을 최대한 담기 위해 이리저리 앵글을 조정한 뒤, 찰칵, 촬영 버튼을 눌렀다.

한 컷으로는 부족해서 이번에는 하반신에 포커스를 맞추어 또 한 번 찍었다. 누운 환의 하얀 털실 양말과 환희의 분홍색 털실 양말은 누가 봐도 패밀리룩이었다.

휴대폰을 탁자 위에 올려둔 해진은 살며시 그 광경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함께 마주 보고 잠든 자신의 남편과 딸이 있는, 완벽하기 그지없는 광경으로.

느린 햇빛이 들어와 가족의 오후를 비추었다.

< 본편 끝 >

외전 01

“샌드위치에 들어가는 햄은 저염 맞습니까? 빵은 모두 호밀빵으로 했고?”

환의 물음에 박 비서가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예. 여부가 있겠습니까.”

“재료는 확실히 유기농입니까? 주스도 액상과당이나 설탕 없이 만든 것 맞습니까?”

“맞다니까요…….”

박 비서는 지친 기색이 역력한 모습으로 다시 대답했다. 그제야 환은 선심 쓰듯 휴대폰을 꺼내어 무언가를 전송했다.

“약속한 것 보내드렸습니다.”

상사의 말에 박 비서는 얼른 제 휴대폰을 확인했다. 그리고 그가 보내온 것을 보자마자 피로를 싹 잊고 활짝 웃었다.

액정화면에는 바로 어제 찍은 따끈따끈한 환희의 사진이 있었다. 카메라를 향해 손을 내밀고 있는 환희의 모습은 무척이나 사랑스러웠다.

“아이구, 환희야아…….”

박 비서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사진을 저장했다. 오늘 새벽부터 샌드위치와 주스를 구하느라 돌아다닌다고 정신이 하나도 없고 피곤했지만 사랑스러운 조카의 - 친조카는 아니지만 - 사진을 보니 하나도 피곤하지 않았다.

환은 종이봉투에 담긴 샌드위치와 주스병, 깨끗하게 깎인 과일들을 확인한 뒤 뒤에 있던 차에 올라탔다.

인사를 하고 막 돌아서려던 차에 환이 헛기침을 했다.

“수고 많았습니다. 나중에 같이 식사라도 하죠. ……환희 데리고.”

뒤이은 제 상사의 말에 박 비서는 깜짝 놀랐다. 몇 년 동안 그를 모셔왔지만 대놓고 ‘수고 많았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었다.

뭐, 새벽부터 고생한 값이야 어차피 휴일 수당으로 하루 근무치 쳐줄 테고, 샌드위치와 주스도 모두 이환의 카드로 결제한 것이니 제게는 손해가 없지만…….

이환 전무가 변하긴 변했나 보다, 하고 그는 생각했다. 특히 아이를 갖고 나서부터 말이다.

가족이라는 게 그에게 꽤 큰 영향을 준 모양이었다. 그리고 박 비서는 제 상사의 변화가 아주 달가웠다.

차에 탄 그에게 깊숙이 허리를 숙여 보였다.

“가족과 함께 즐거운 시간 보내십시오, 전무님.”

그대로 떠나는 차 뒤꽁무니를 보며 박 비서는 다시 한 번 흐뭇하게 웃었다.

환은 조수석에 놓인 종이봉투를 흘끔흘끔 보며 뿌듯한 기분에 휩싸였다. 아마 저것을 보면 해진이 무척 기뻐할 것이다. 물론 박 비서를 새벽부터 부려먹었다는 사실은 절대 말해선 안 되겠지만 말이다.

오늘은 오랜만에 세 식구가 밖에 같이 나가는 날이었다. 해진은 요즘 이환보다 더 바빴고, 집에서 육아를 전담한 환은 매일 늦은 밤까지 일하고 지쳐 돌아온 해진을 보며 마음 아파해야 했다.

빌어먹을 스타트업 회사는 쥐똥만 한 주제에 왜 자꾸 사람을 야근시키고 부려먹는 것인지. 마음 같아서는 확 인수해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해진이 저를 어떻게 생각할지 이제는 알았기에 그럴 수조차 없었다.

덕분에 환은 하루에도 몇 번씩 해진에게 전화를 걸고 싶은 것을 참아야 했다.

‘착하게 기다려요.’

해진이 그렇게 명령했기에 함부로 전화를 거는 일은 없지만 말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이환을 맞이한 것은 거실에 누운 두 부녀였다.

해진과 환희 모두 티셔츠만 잠옷이 아닌 것으로 갈아입은 것을 보니 나갈 준비를 하다가 ‘잠깐만 환이 아빠 오기 전까지만 자자’ 하며 드러누웠을 두 부녀가 눈앞에 선하게 떠올라서 환은 웃음을 참았다.

‘어쩐다. 박물관 예약 시간이 얼마 안 남았는데.’

오늘은 환희가 좋아하는 공룡 박물관에 가기로 했다. 이제 네 살이 된 환희는 해진의 호기심을 물려받기라도 했는지 공룡이나 거대로봇, 항공기 같은 ‘커다랗고 움직이는 무언가’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것은 공룡이었다.

그래서 오늘도 모처럼 해진이 쉬는 날을 맞추어 셋이 공룡 박물관에 가기로 했는데, 이 두 부녀가 일어날 생각을 않으니 어쩐다.

환은 손목에 찬 시계를 흘끔 확인한 뒤 한숨을 작게 내쉬었다. 깨우기에는 두 사람 모두 너무 곤히 자고 있었다.

‘음. 좀 더 자도 괜찮을 거 같기도 하고…….’

그는 별수 없다는 투로 딸의 등을 감싸듯이 누웠다. 팔을 뻗으니 해진에게까지 손이 닿았다. 조금만 더 누워 있어도 될 것이다. 오늘은 귀한 휴일이니까. 아무도 세 사람을 방해할 수 없는 날이니까.

세 사람은 결국 한낮이 지나서야 깨어났다. 공룡 박물관에 가지 못한단 사실을 깨달은 환희는 울고불고 난리를 부렸다.

“흐어엉! 공뇽! 공뇽 내놔! 환이 아빠 미워!”

“울지 마라! 그깟 박물관 내가 사주면 될 것 아냐!”

“아 진짜 이 인간이! 애 앞에서 그런 말 좀 하지 말라니까요!”

조그마한 주먹으로 환을 퍽퍽 때리며 울던 환희는 해진이 안고 쓰다듬어주며 한참을 달래고서야 울음을 그쳤다. 그러고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해진의 품에 안긴 채로 환을 노려보았다.

“이해영, 같이 코야코야 한 건 해진 아빠인데 왜 자꾸 나를 노려보나?”

아명이 아닌 본명을 부르자 가뜩이나 심통 난 환희의 얼굴이 더 부어올랐다.

“환이 씨가 깨워줬어야죠. 환이 아빠가 오면 깨워줄 거니까 그때까지 자자, 하고 잔 건데. 그치, 환희야?”

“맞아!”

해진이 대신 대답을 해주자 환희는 혓바닥을 쏙 내밀고 다시 작은 아빠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양 갈래로 묶었던 머리칼이 자느라 부스스하게 헝클어져 있었다.

“허 참. 어이가 없군. 이해영, 그러게 어젯밤에 빨리 코야 하라고 할 땐 하지 않고 붕붕이 가지고 논 것도 환이 아빠 잘못으로 몰아붙일 셈인가?”

‘붕붕이’는 환희가 가장 아끼는 티렉스 인형이었다. 아가리를 쩍 벌리고 날카로운 이빨을 모두 드러낸 이 고무 공룡 모형을 환희는 털 인형보다 더 아끼고 좋아했다.

“그건…… 붕붕이가 놀아달라고 했어…….”

환희가 눈만 빼꼼 내고 자신 없이 변명했다.

“붕붕이가 환희한테 놀아달라고 했어?”

해진이 한 마디를 거들자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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