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상회의를 끝내고 몇 가지 밀린 업무를 처리한 뒤 방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자거나 또 시커먼 탐험대들이 나오는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보고 있을 줄 알았는데, 해진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침대에 앉아 있었다.
“이리 앉아보세요.”
침대 한쪽을 톡톡 두드리며 하는 말에 환은 은근한 긴장감을 느끼며 다가갔다.
“박 비서님이 어제도 복도에서 내내 쭈그리고 계셨다면서요. 화장실도 못 가고, 환이 씨 기다리느라요.”
뒤이은 해진의 말에 환은 조금 당황했다. 박 비서가 설마 해진에게 뭐라고 말이라도 한 건가?
“그건, 효율성을 위해서…….”
“사람을 그렇게 세워두는 게 어디 있어요. 앞으론 그러지 마세요. 저한테는 잘해주시면서 다른 분들한테는 왜 그러세요.”
나긋나긋한 말투로 제법 단호하게 말하는 그를 보자 할 말이 없었다. 하지만 억울하기도 했다.
“그야 당연히 강해진 씨는 제게 가장 중요한 사람이니까 그런 겁니다.”
해진이 한숨을 폭 내쉬었다.
“저는 환이 씨가 다른 분들한테도 잘 대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저한테 잘해주시는 것처럼요.”
“내가 왜 그래야 합니까?”
이해가 가지 않아 인상까지 잔뜩 구겼다. 가뜩이나 해진을 보살피는 것만으로도 몸이 모자랄 지경인데 남까지 챙기라니.
“박 비서님도 그렇고 최 박사님도 그렇고, 다들 환이 씨를 위해서 일하는 분들이잖아요. 그래서 저한테는 중요한 분들이거든요.”
뒤이은 해진의 말은 환이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한 것이었다.
“환이 씨 주변에 계신 분들이니까 저한테도 중요해요. 그래서 제가 잘 대해드리는 거고요. 환이 씨도…… 그래 줬으면 좋겠어요.”
멍하니 있는 환의 팔목을 해진이 쥐고 끌어당겼다.
“하지만 저는 지금 환이 씨도 좋으니까 너무 애쓰시진 마세요. 사람이 한순간에 바뀌면 죽는다더라.”
해진이 헤헤, 소리 내어 웃었고 환은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어쩌면 그에게서는 평생 배워도 다 못 배운 것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을 했다.
* * *
태아는 무사히 자라고 있고, 산모도 건강하다고 했지만 배가 빵빵하게 불러오고도 입덧은 온전히 사라지진 않았다.
해진이 시도 때도 없이 입덧을 할 때마다 환은 같이 말라갔다. 차라리 제가 대신 괴로웠으면 좋았을 텐데……. 갑갑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진은 해맑게 웃곤 했다.
“그래도 예전엔 냄새만 맡아도 토했는데, 지금은 먹다가 토하니까 훨씬 낫네요!”
“그게 할 말입니까? 얼굴 이쪽으로 봐요. 닦아줄게.”
턱을 쥐고 입가를 살살 닦아주는 환의 얼굴이 영 안 좋아 보여서 해진은 괜히 주눅이 들었다. 정작 본인은 이제 익숙한데, 환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냄새나요. 제가 닦을게요.”
“안 납니다.”
환은 정색까지 하며 해진의 입가와 손을 깨끗하게 닦아준 뒤 번쩍 안아 들고 욕실을 나왔다. 해진은 반사적으로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아무리 못 먹었다곤 해도 애가 배 속에 들어가 있으니 몸무게는 늘어났는데, 어째 저를 드는 힘은 변함이 없었다.
“안 무거워요?”
“가벼워서 걱정입니다만.”
해진은 비실비실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그의 가슴에 이마를 비볐다. 몸도 힘들고 입덧도 괴로웠지만 환의 품에 안겨 있는 게 좋았다.
행여 그가 다칠세라, 욕실에서 침대까지 오는 것도 제 발로 걷게 하질 않고 침대에 내려놓을 때도 환의 손길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이제 괜찮아요. 얼른 일 보러 가세요. 아침부터 바쁘신 거 같던데…….”
오늘따라 일이 많은지 환은 아침부터 계속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분주하게 굴며 밖에 나갔다 오곤 했다.
“별로 안 바쁩니다.”
“혹시 제가 도울 일이라도 있으면…….”
“없으니 그런 말 말아요.”
단칼에 잘라내는 대답이 어째 좀 차가웠지만 해진은 개의치 않고 침대에 얌전히 누웠다. 환이 그의 몸 위에 이불을 덮어 주었다. 발 아래쪽으로 손을 넣어 끌려 내려간 수면양말도 끌어 올려주고, 다시 단단히 이불을 여며주는 동작은 평소와 똑같아서 안심했다.
입덧 때문인지 눈에 열이 오르고 졸음이 밀려왔다. 해진은 풀린 눈꺼풀을 끔벅거리며 환의 모습을 좇았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 이마에 입을 맞췄다.
“좀 더 자요.”
목소리가 달았다.
“내가 곁에 있을 테니까.”
해진은 안도하며 눈을 감았다.
이 리조트에서 환과 지내면서 해진은 자신이 의외로 다른 사람과 지내는 데에 크게 거부감이 없단 사실을 깨닫고 놀랐다. 부모님을 잃은 뒤로 쭉 혼자 살아온 탓에 자신이 누군가와 이렇게 깊이 생활을 공유하는 데에 익숙하지 않으리라 생각했던 건 착각인 모양이었다. 물론 이환이 제게 많이 맞춰주는 것도 있지만.
잠이 밀려들었다. 해진은 기꺼이 졸음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곁에 있을 거란 말과 달리 해진이 다시 깨어났을 때는 환이 없었다.
* * *
눈을 비비며 일어난 해진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환의 노트북은 있는데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 걸 보니 박 비서를 만나러 간 모양이었다.
도로 침대에 누워 만화책이나 볼 요량으로 협탁 서랍에 있는 태블릿PC를 꺼내려던 해진은 스탠드 옆에 놓인 메모를 보고 멈칫했다.
[복도로 잠깐 나와주십시오.]
정갈한 글씨체는 환의 것이었다.
‘무슨 일이지?’
슬그머니 일어나 부른 배를 안고 끙,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문을 열었을 때, 해진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리조트 호텔 복도 벽이 온통 덩굴 식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바닥은 죄다 진흙을 발랐는지 질퍽거렸다.
해진이 경악하는 지점은 다름 아닌 바로 식물의 종류였다. 실제로 열대 지방의 늪지대에서나 볼 수 있는 식물들이 벽을 빼곡하게 채우고 있단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지금은 초겨울이니까.
그는 조심스레 다가가 덩굴 식물들의 이파리를 만져보았다. 그리고 또 경악했다.
‘진짜 생화네?’
이번에는 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진흙이 실내화를 적실 정도로 바닥에 흥건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미끄럽지는 않았다.
‘나 넘어지지 말라고 그런 건가.’
참 귀여운 이벤트네, 생각하며 해진은 걸음을 옮겼다. 덩굴이 뻗어 있는 쪽을 향해 걸어가면 될 것 같았다.
도대체 얼마나 정성 들여 꾸몄는지. 복도 전체가 죄다 덩굴 식물에 뒤덮여 있었다. 벽뿐만 아니라 천장까지 말이다. 벽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꽉 차서 건물 전체가 꼭 아마존의 미로 같았다.
와중에도 전직이 여행사 기획팀 직원이라고, 해진은 이런 콘셉트의 상품이 있어도 좋겠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진짜 식물들이라 퀄리티가 장난 아니었다. 코를 찌르는 풀 냄새가 정말 아마존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을 선사했다. 해진은 심장이 뛸 정도로 흥분되었다.
‘환이 씨는 어디 있지?’
도대체 얼마나 넓은 곳을 꾸며놓은 건지, 복도 저 끝까지도 덩굴이 그득하게 덮여 있었다. 그리고 계단 아래까지.
해진은 잠시 고민하다 계단 아래로 내려가 보기로 했다. 만삭인 그를 배려한 것인지 난간은 덩굴로 덮여 있지 않았다. 하지만 본래 은색이던 난간조차 나무처럼 갈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단색도 아니고, 심지어 나무 무늬까지 꼼꼼하게 넣은 걸 보고 감탄했다.
조심스레 로비로 내려간 해진은 다시 감탄했다. 넓은 로비 전체가 늪지대처럼 꾸며져 있는 게 아닌가. 심지어 프런트 데스크가 있던 곳에는 커다란 나무까지 있었다.
“와아…….”
절로 탄성이 터져 나왔다. 한눈에도 얼마나 공들여서 꾸몄는지 티가 났다. 생생한 풀 내음이며 어디서 들리는지 몰라도 작게 벌레 우는 소리까지 들렸다. 해진이 늘 탐험 다큐멘터리에서 보던 아마존의 광경과 거의 똑같았다.
아마존을 그대로 구현해놓은 듯한 로비를 정신없이 구경하던 해진은 문득 로비에서 이어진 복도 - 물론 이곳도 덩굴 식물로 벽이 뒤덮여 있었다 - 에서 인기척을 읽었다.
기척이 들리는 곳으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한쪽 손은 부른 배를 쥔 채였다. 미끄럽지 않은 진흙길을 조심조심 걸으며 해진은 웃음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이환에게 이렇게 귀여운 면이 있을 줄은 몰랐다.
아니, 귀여운 수준이 아니잖은가. 이렇게 밀림을 그대로 가져온 듯이 호텔 건물을 꾸며놓는 일은 보통 사람은 할 수 없는 일일 터다.
외국에만 있을 식물을 하나하나 들여와서 벽을 장식하게 했을 이환의 얼굴을 떠올리자 다시 웃음이 났다. 그 성격에 직접 일은 하지 않을지언정 내내 제 생각을 했겠지. 몇몇 식물은 직접 만져보고 미간을 구기며 불결해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대.’
싱글싱글 웃으며 복도를 한 번 더 꺾자마자 해진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마침내 화려한 덩굴이 끝나고 매끈하고 넓은 호텔 복도 한가운데, 이환이 서 있었다.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꽃다발을 들고.
해진은 부른 배를 쥔 채 천천히 그를 향해 걸었다. 가슴이 뛰고 웃음이 자꾸 새어 나왔다.
“대박이에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꾸밀 생각을 하셨어요?”
환은 대답 대신 조금 수줍어 보이는, 그러나 뿌듯함이 묻어나는 미소를 띤 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부른 배를 뒤뚱거리며 걸어 마침내 그의 앞에 도달하자 환이 그에게 꽃다발을 내밀었다. 가득 모인 탐스러운 꽃송이에 얼굴을 가져가자 달큼한 향이 코를 찔렀다.
그리고 그 때, 환이 무언가를 하나 더 내밀었다. 해진은 제 앞에 내밀어진 것을 보고 숨을 멈추고 말았다.
이환이 내민 자그마한 상자 한가운데에서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당신이 어디를 탐험하든, 어떤 오지를 걷든 그 끝에는 항상 내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해진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나와 결혼해주시겠습니까.”
해진의 마음에 무언가가 찌르르하게 번졌다. 자신이 울고 있음은 한 박자 늦게 깨달았다. 투둑, 투둑, 꽃다발 위로 눈물이 번졌다.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리고 대답했다. 어쩌면 이환이라는 사람을 맨 처음 알게 되었을 때부터 기다렸던 순간인지도 몰랐다.
그를 피해 도망 다니던 순간들이, 아픈 배를 움켜쥐고 내달리던 그 순간들이 당장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할래요, 결혼. 할게요. 하고…… 흑, 하고 싶어요.”
울먹이며 말하자 환이 몸을 일으켰다. 만삭의 그를 품에 안았다.
환의 어깨에 젖은 얼굴을 대며 해진은 제 꼴이 말이 아니란 생각을 했고, 그래서 더 눈물이 났다.
배는 부를 대로 불러온 데다 자다 나온 탓에 얼굴도 머리도 엉망이었다. 편한 티셔츠와 진흙에 젖은 슬리퍼도 부끄러웠다. 반면 눈앞에 있는 이환은 정장을 빼입고 있어 더 창피했다. 해진은 잔뜩 불러온 배를 손으로 감쌌다.
“나 좀 더 이쁠 때 프러포즈 하시지…….”
울먹거리며 말하자 환이 그를 안은 채 푸스스 웃었다.
“지금이 제 눈에는 제일 예쁩니다.”
낮게 내뱉는 목소리가 지독히도 달았다. 이환이란 놈은 제게 수많은 거짓말을 했지만, 지금만큼은 아님을 알았다.
제게 진심인 알파에게서 나는 페로몬은 무해하고 달기만 했다. 해진은 그의 목덜미에 코를 파묻고 그것을 깊이 들이마셨다.
90퍼센트
- 그러니 이번 분기에서는 좀 더 새로운 상품 개발에 주력하는 편이 아무래도…….
화면 너머에서 말을 잇던 윤 부장은 헛기침을 몇 번 했다. 그의 시선은 화면 속, 상사가 들고 있는 연분홍빛의 뜨개실에 집중되어 있었다.
이환은 지금 화상회의를 켜놓고 보고를 받는 내내 무언가를 ‘뜨개질’하고 있었다. 덕분에 화상회의에 참여한 키스틸 레저 간부들은 모두 화면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 이환에게 취미가, 그것도 자그마한 무언가를 만드는 취미가 생길 줄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터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간부 하나가 마이크를 끄는 것도 잊고 “저거 양말 맞지? 손가락만 한 양말.” 하며 옆자리 직원을 불러다 화면을 들여다보게 시키기까지 했다.
어쨌든 지금은 전무가 참석한 회의 중이니 윤 부장은 대체 들고 계신 게 뭐냐고 묻는 대신 이성을 다잡으며 말을 끝맺었다.
그리고 이환은 지금 아주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그는 대바늘을 잠시 멈추곤 제 손바닥 반의반 크기도 되지 않는 양말의 코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둘, 셋……. 아무래도 이쯤에서 코를 줄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뜨개질 책을 다시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 어, 음, 전무님?
윤 부장이 조심스레 그를 부르고서야 환은 들고 있던 바늘과 양말을 내려놓았다. 무척이나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알겠습니다. 자료는 제 메일로 보내주십시오.”
회의가 끝나고 환은 뜨던 양말을 조심스레 바구니에 옮겨 담았다. 일어나려던 그는 문득 양말 크기를 손가락으로 가늠해보았다. 발바닥이 제 검지 길이만도 못했다. 그 말도 안 되는 자그마한 크기를 확인하자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아, 회의 끝나셨습니까?”
박 비서가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와 그의 노트북을 챙겨 들었다. 털실 바구니도 함께 챙겨 들려는데, 이환이 다소 거칠게 그것을 빼앗아갔다.
그는 잠시 당황했지만 소중하게 바구니를 품에 안는 이환을 보곤 뭐라 말하길 포기했다. 그래도 요즘은 이전처럼 복도에 저를 세워 놓거나 인간 이하의 대접을 하지는 않으니 다행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몰라도 얼마 전에는 세상에, 밥은 먹었냐고 걱정해주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꼭 누가 시켜서 묻는 티가 나긴 했지만 말이다.
환이 방에 도착했을 때 해진은 눈을 감고 명상 프로그램을 듣고 있었다. 등을 침대 헤드에 기댄 채 한쪽 손은 부른 배에 얹고 느긋하게 있는 그를 보자 안도감에 웃음이 나왔다.
들어오는 기척을 읽었을 텐데도 명상에 집중하는 그가 좋았다. 해진은 이처럼 이환 본인이 아니라 스스로에게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야무지게 호흡을 하는 해진을 보고 있자니 뿌듯하기까지 했다.
-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습니다. 천천히 다시 한 번 들이마셨다가…….
그가 심호흡을 하는 동안 환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털실 바구니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는 양말을 마저 뜨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해보는 뜨개질이지만 어렵지 않았다. 그는 뭐든 빨리 배우는 편이었고, 해진을 위해서 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쉽고 즐겁게만 느껴졌다.
명상을 끝낸 해진이 눈을 뜨고 환의 모습을 확인하더니, 가뜩이나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그게 뭐예요?”
“아기 양말입니다. 해진 씨 것과 같이 세트로 뜨는 중입니다.”
“우와…….”
진심으로 놀랐는지 입까지 벌리며 감탄하는 그가 귀여워서 환은 웃음을 픽 흘렸다.
“뭘 그렇게 놀랍니까?”
“그냥…… 환이 씨가 이런 거 뜨실 줄은 상상도 못 했거든요. 뜨더라도 남들 안 보이는 곳에서 몰래 하실 거 같은데 의외로 당당하셔서…….”
“내 남편과 아이에게 신길 양말을 뜨는데, 나쁜 일도 아니고 왜 감춰야 합니까?”
박 비서를 비롯해 다른 사람들이 보내는 시선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아까 윤 부장이 끈질기게 보내던 의아하단 눈길도 말이다.
하지만 환은 구태여 제 오매가를 위해 하는 일을 감출 생각이 없었다.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무언가를 감추고 부끄러워하는 일은 스스로를 보호할 권력이 없는 이들이나 하는 짓이었다.
해진은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든다는 듯 헤실헤실 웃었다. 저 웃음을 위해서라면 양말이 아니라 지붕 덮개도 뜰 수 있을 것 같았다.
“진짜 제 거도 같이 떠주시는 거예요?”
“예. 아이 것은 분홍색, 해진 씨 것은 같은 실 흰색으로 뜰 예정입니다.”
“그럼 환이 씨 거도 세트로 떠주세요.”
능숙하게 움직이던 바늘이 뚝 멈췄다.
“……저는 필요 없습니다만.”
“에이, 그런 게 어딨어요! 하려면 패밀리룩으로 맞춰야지.”
패밀리룩……. 뜻은 알지만 낯선 단어에 환은 헛기침을 했다. 하지만 흰색 털실 양말은 정말로 제게 필요가 없었다.
“가족이잖아요.”
뒤이은 해진의 말에 환은 무언가로 머리를 두들겨 맞기라도 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가족인데 패밀리룩으로 신어야지……. 환이 씨도 하얀 양말로 꼭 신으시기예요. 분홍색도 어울릴 것 같긴 하겠다. 쿨톤이라서.”
태블릿PC를 만지작거리며 종알종알 내뱉는 해진의 말은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족’이라는 단어만 머릿속에 종처럼 뎅뎅 울렸다.
제게도 가족이 없지는 않았다. 어릴 때부터 방치된 채로 혼자 살아남으려 아득바득 애쓰는 손자를 보며 혀를 차는 조모도 가족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강해진은 달랐다. 어쩌면 남들이 가진 ‘가정’이란 것을 강해진이 제게 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가족…….”
입 밖으로 소리 내서 말하자 더 실감이 났다. 가족이라니.
식은 출산 후에 올리기로 했다. 신혼집도 함께 찾아보았다. 환은 몸이 약한 그를 위해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고르고 싶었다. 해진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지만, 조금 더 신중히 고르자고 했다. 환은 기꺼이 동의하며 서울 쪽으로도 몇 군데를 물색했다.
앞으로 자신은 강해진과 한집에서 생활을 공유하게 되리라. 식사를 함께하고 어쩌면 출근을 같이 할지도 모르지. 눈을 뜨면 해진의 모습이 늘 있을 테고, 밤에 자다 깼을 때도 옆에 누운 그를 확인할 수 있을 터다.
프러포즈를 하기 전에도 이미 생각했던 바인데 되짚으니 또 마음이 벅찼다. 누군가와 생활을 공유하는 일은 여태까지의 제게는 상상도 하지 못할 끔찍한 일이었건만.
“왜 그래요? 어차피 우리 결혼도 할 건데……. 그럼 가족 아닌가…….”
해진이 장난스레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환은 바구니를 내려놓고 그에게 다가가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잠깐 놀란 듯하던 해진이 이내 그의 목에다 얌전히 팔을 감아왔다.
숨이 한참 섞이고서야 입술이 떨어졌다. 해진은 그의 옷깃을 만지작거리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먼 산을 보았고, 환은 손을 뻗어 소파 위의 털실 바구니를 가져왔다.
“환이 씨, 제가 생각해봤는데…… 우리 애 이름 말이에요.”
요 몇 주 동안 두 사람은 아이 이름을 고민 중이었다.
환은 작명소에서 지으면 된다 했지만 해진은 직접 짓고 싶어 했다. 그리고 환은 최대한 그의 의견을 존중해 함께 이름을 고민해주기로 약속했다. 제게 작명 센스가 영 없단 사실을 깨달았지만 말이다.
“떠오른 게 있습니까?”
해진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곧바로 뱉지 않고 뜸을 들이는 걸 보니 이번에는 마음에 들거나 혹은 말하기 민망한 이름이거나 둘 중 하나일 터다.
“말해봐요.”
뜨개바늘을 도로 잡으며 보채자 해진이 배시시 웃었다.
“환이 씨랑 제 이름이랑 하나씩 따서, 아명이랑 본명 하나씩 지으면 어때요?”
“그거 괜찮군요. 이왕이면 해진 씨 이름을 딴 게 본명이면 좋겠습니다만.”
“음? 왜요?”
해진이 털실을 가져가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보들보들한 감촉이 마음에 들었는지 털 뭉치가 두 손 사이를 바삐 오갔다.
“나이 먹고서도 내 이름을 딴 이름으로 부르면 괜히 철이 안 들까 걱정되어서 말입니다.”
진지하게 말했건만 해진이 풋, 웃음을 터뜨린다.
“그 말은…… 환이 씨를 닮아서 철이 안 들까, 겁이 난단 뜻이에요?”
환은 입을 다물었다. 대답 않고 근엄한 표정을 하고선 뜨개질을 이어갈 뿐이었다.
“그럼 아명은 ‘환희’, 본명은 ‘해영’ 어때요? 둘 다 성별도 안 타고. 괜찮죠?”
비장하게 이어지던 뜨개질이 잠깐 멈췄다. 환은 해진을 마주한 채 눈을 휘어 진심으로 웃었다. 정말로 기뻤기에. 정말로 마음에 들었기에.
“좋네, 둘 다.”
시원스레 대답해주자 해진이 뿌듯하게 웃었다. 할 말이 남았는지, 털실을 주무르며 환의 눈치를 조금 보던 그가 뜸 들이다 입을 열었다.
“근데요, 아까 불러준 거…… 되게 좋은데. 또 불러주면 안 되나?”
환이 눈썹을 슬쩍 들며 그를 흘끔 보았다. 초롱초롱한 눈이 귀여워서 뭘 원하는지 알면서도 선뜻 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랬다간 또 입술을 비죽거리며 토라지겠지.
“남편이라 불러주는 게 그렇게 좋았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다. 환은 그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가, 바로 코앞에서 눈을 마주했다.
“내 남편 해진아.”
발간 얼굴이 이번엔 아예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환은 픽 웃으며 그를 놓아주곤 다시 양말을 뜨기 시작했다. 해진이 옆에서 요란하게 손부채질을 했다.
“와, 진짜…… 이거 임팩트 장난 아니네요.”
뭐가 그리 기쁜지 손부채질을 하다가 심호흡을 하다가 부산스레 굴던 해진은 옆에 앉은 환에게 팔짱을 꼈다. 시선을 슬쩍 틀자 어깨에 매달린 해진과 눈이 마주쳤다.
“우리 남편 환이 씨.”
부끄러운지 속삭이듯이 말하고는 헤헤, 웃는 그를 보니 왜 그리도 난리를 부렸는지 알 것 같았다.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구태여 감추지는 않았다.
해진의 손에서 정신없이 구르던 털실이 바구니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성인 남자 양말 한 켤레를 더 뜨려면 실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출산 예정일이 가까워지면서 해진은 병원에 입원했다. 산모의 몸이 워낙 약하니 미리 의료 시설이 갖춰진 곳에 있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전문의의 의견 때문이었다.
환은 분주하게 이것저것을 준비했다. 강해진이 아껴 마지않는 다큐멘터리 블루레이 디스크도 신줏단지 모시듯 입원실로 옮겨 놓았다.
병원에 도착하자 제 오메가가 아이를 낳는단 사실이 성큼 실감 난 환은 불안감을 숨기지 못했다. 앉아 있지도 못하고 병실을 서성거리다가 해진의 몸 상태를 살피고, 의사에게 갈지 그의 곁에 있을지 결정하지 못해 문까지 갔다가 침대로 돌아오길 반복했다.
“그냥 좀 앉아 계세요…….”
보다 못한 해진이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환은 그제야 침대 옆에 마련된 소파에 앉았다. 와중에도 다리 한쪽을 달달 떨었다.
“미안합니다. 내가 정신없게 굴었군요.”
환을 빤히 보던 해진이 무거운 몸을 옆으로 끙, 옮기더니 제 옆자리를 팡팡 두드려 보였다.
“이리 와서 앉으세요.”
환은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그가 명령한 대로 침대에 얌전히 앉았다. 해진이 그의 어깨에 상체를 기대었다. 기대오는 해진의 상체를 팔로 안는 동작이 능숙했다.
“많이 걱정되세요?”
“걱정이 안 되겠습니까? 몸에서…… 아이가 나오는 일인데…….”
제 입으로 내뱉고도 끔찍한 모양인지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해진은 웃음을 꾹 참고 그의 얼굴을 손으로 감싸 저를 보게 했다.
“환이 씨.”
이렇게 처연한 적이 없던 환의 갈색 눈동자를 마주하자 해진은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저는 아마존에 버려 놔도 생존할 수 있는 사람이에요.”
해진의 말은 허세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그러니 도망 중에도 숲속에서 멀쩡히 살아남은 것이지.
“그러니 이깟 일로 제가 위험해질 일은 없으니 걱정하지 마세요.”
덤덤한 투로 말하는 해진을 보니 조금 마음이 놓이기는 했다. 그래, 제 오메가는 마냥 연약한 이가 아니었다.
해진은 걱정 말란 투로 그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기까지 했고, 덕분에 환은 진심으로 안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뻤다. 이렇게 멋진 오메가가 제 짝이어서. 죄 많은 저를 버리지 않고 곁에 있어주어서.
그러나 해진의 장담과 달리 출산은 지독한 난산이었다.
의사들이 분주하게 오가며 환에게 상황을 알려주었다. 환은 그들이 말하는 것의 절반은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정신이 나가버렸다.
‘산부가 위험하다’는 말 한 마디가 환에게는 사형 선고처럼 들렸다. 어째서 강해진이 이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저와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가 이런 고생을 할 일이 없단 생각에까지 닿자 미칠 것 같았다. 모두 제 잘못이었다. 아프려면 제가 아파야 하는데.
분만실 앞에서 서성거리는 동안 환은 제 삶을 돌아보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해진을 괴롭힌 것 말고는 다른 사람에게 딱히 피해를 준 일도, 나쁜 짓도 하지 않았다. 가끔 이환에게 인성이 어쩌니 저쩌니 하며 수군거리는 놈들이 많긴 했지만 죄다 루저들의 비겁한 험담일 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잘못한 것은 강해진에게 나쁘게 대한 일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벌로 해진이 이렇게 고생하고 있다 생각하니 미칠 것 같았다.
종교라도 있었다면 당장 기도했을 터다. 하지만 미지의 존재에 운을 맡기는 일은 환의 방식이 아니었다. 그는 대신 의사의 멱살을 잡는 일을 택했다.
“산부가 잘못되면 그땐 당신이랑 당신 자식도 똑같이 만들어줄 줄 알아.”
언론을 두려워한 박 비서가 목숨을 걸고 만류했으나 딱히 효과는 없었다.
진통이 시작된 지 꼬박 열 시간이 지났다. 그에게는 거의 열흘 같은 시간이었다. 땀에 흠뻑 젖은 의사가 분만실에서 나왔다.
“어떻게 됐습니까?”
환이 벌떡 일어나 의사에게 다가갔다. 의사가 길게 한숨을 내뱉는 것을 보고 환은 하마터면 주먹이라도 날릴 뻔했다. 한 마디만 말이 늦었어도 정말 그랬을 터다.
“산부, 아기 모두 무사합니다.”
그날 이환은 처음으로 절대적인 무언가를 믿고 싶어졌다. 해진과 자신을 연결해준, 말과 이성으로는 표현하기 힘든 무언가를 말이다.
다른 사람의 안위가 이렇게 제게 큰 영향을 준 적은 없었다. 그러나 강해진은 달랐다. 무사하다는 말 한 마디에 환은 제 숨통이 트이는 것을 느꼈다.
온갖 것을 다 알려주다 못해 그는 이제 제 목숨마저 쥐고 흔들어댔다. 강해진은 이환이 겪은 것 중 가장 비논리적이고 멋대로에 통제불능이었으며, 동시에 가장 아름다운 세상이었다.
땀에 흠뻑 젖은 몸으로 침대에 누운 채 속도 없이 제게 히, 웃어 보이는 해진을 보는 순간 환은 처음으로 북받쳐 오르는 어떤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그가 태어나 처음 느끼는, 그러나 여태 느껴본 모든 감정 중 가장 크고 벅찬, 환희라는 감정이었다.
환은 달려가서 그에게 입을 맞췄다. 땀투성이에 얼굴이 허옇게 질린 데다 환자복이 흐트러진 강해진은 그가 본 모습 중 가장 예뻤다.
그리고 앞으로도 그는 계속 아름다울 것이다. 제 품에서 하루하루 더 예뻐지겠지. 여태껏 그랬듯이 말이다.
“숨 막혀요…….”
입술을 떼자마자 옹알거리는 그를 있는 힘껏 껴안았다. 해진에게서 나는 달큼한 딸기 향을 맡자 안도감이 들었다. 오래 떠돌다 집에 온 것 같은 안도감이었다.
* * *
아이는 여자아이였다. 아픈 곳도 없고 우량아로 건강하게 태어났다는 말에 해진은 크게 기뻐했다.
갓난아기를 안는 해진의 모습이 꽤 능숙해서 환은 조금 놀랐다. 안고 어르는 손길이 꼭 아이 여럿 키워보기라도 한 것 같았다.
“……생각보다 잘하는군요.”
“그럼요. 제가 얼마나 열심히 연습했는데.”
“연습 말입니까?”
“환이 씨 없을 때 몰래 쿠션으로…….”
아이도 아직 없는데 연습을 어떻게 했나 했더니 나오는 대답이 지극히 사랑스러웠다. 동시에 환은 제가 보지 못한 해진의 모습이 있단 사실에 억울하기도 했다.
“왜 내가 볼 때는 안 했습니까?”
“그냥, 부끄러워서…….”
웅얼거리는 얼굴이 조금 붉었다. 환은 그 뺨에다 입을 맞췄다.
“그런데 환희 말이에요, 환이 씨만 너무 빼닮은 것 같지 않아요?”
해진의 말에 환은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갓난아기는 쭈글쭈글하게 주름이 져 있었고, 눈도 뜨지 않아서 무슨 빨랫감 같아 보였다. 환의 미감으로 예쁘다는 기준에 철저하게 반대되는 외모였다. 그런 아이가 저를 닮았다니 황당했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에이, 봐요. 완전 똑같은데? 코랑 입이랑 턱이랑…… 귀도 닮은 것 같네요. 세상에, 손 큰 것도 똑같다.”
손이 크다고……? 해진의 손가락보다 작아 보이는데……. 하지만 강해진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니 환은 아무 말 않았다.
“누가 보면 환이 씨 혼자 낳은 줄 알겠어요. 와, 억울하다.”
농담조로 하는 말임은 알지만 환은 지레 찔렸다. 뭐라 받아쳐야 할지 알 수 없어 눈만 끔벅거리다가, 환은 다시 허리를 숙여 그에게 짧게 입을 맞췄다.
“수고했어요. 그리고 고맙습니다.”
그리고 얼굴을 마주한 채 눈을 휘며 웃어 보였다. 다행히 예상대로 해진은 헤헤, 소리 내어 마주 웃었다.
“환이 씨, 많이 늘었네요.”
환은 뒤이은 말이 무슨 뜻인지 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뭐가 늘었단 말입니까?”
“그런 게 있어요.”
궁금했지만 구태여 묻진 않았다. 대신 아이를 다시 내려다보았다. 해진의 말대로 저와 닮은 구석이 아주 조금 있는 듯도 했다.
“해진 씨를 닮았으면 더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저를 닮아 좋은 건 외모밖에 없었다. 아니, 이 외모조차도 때로는 귀찮을 때가 있었다.
“걱정 마세요. 성격은 절 닮을 거니까.”
해진의 말에 그제야 환은 크게 안도했다. 그래, 성격은 반드시 강해진을 닮아야 했다.
아이를 내려다보는 해진의 모습은 조금 생소했다. 그가 저 말고 다른 이에게 이런 눈빛을 보낸다는 사실이 특히 생소했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강해진이지만 애정이 담뿍 어린 저런 눈길은 제게만 주는 줄 알았건만. 제 아이가 아니었더라면 질투심마저 가졌으리라.
“환이 씨도 한번 안아보실래요?”
돌연한 물음에 환은 잠깐 당황했다.
“저, 저는…….”
“괜찮아요. 오셔서 안아보세요.”
아이는커녕 개나 고양이도 제대로 안아본 적 없던 그였다.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있자 해진이 한쪽 팔을 끌어당겼다.
태어난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은 아기는 몹시 작았다. 제 손이 닿았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을 정도로 여려 보이기도 했다. 해진은 뻣뻣한 그의 손을 끌어다 아이를 안겨주었다.
“여기, 목을 잘 받쳐주면 돼요. 네, 거기요.”
환은 어설프게나마 아이를 안아 들었다. 갓난아기는 무척 따뜻하고 꼬물거렸다.
그제야 환은 이 아이가 제 딸이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그리고 해진이 제 아이를 낳았다는 사실 역시 그제야 실감이 났다.
“환희야, 아빠 좋아? 으응, 좋아.”
어르는 투로 해진이 묻자 아이는 알아듣기라도 한 건지 자그마한 입을 쩍 벌리며 하품을 했다.
환은 이 기분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무언가 가슴 아래서 느리게 끓어오르고 있었다.
“어, 환이 씨…….”
이런 감정을, 태어나 처음 느껴보는 귀하디귀한 기분을 알려준 해진에게 어떻게 고마워해야 할까.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할까.
“울지 마세요. 우리 애기 태어난 날인데, 왜 울고 그래…….”
그 누구에게도 약한 모습을 보인 적 없던 그였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먹이 사슬의 정점에 있는, 완벽하고 모자랄 것 없는 알파.
그런 그에게 패배감과 결핍을 알려주고 그리움과 애달픔을 선사한 강해진이 있었다.
그 강해진을 가졌으니 이제 자신은 모든 걸 다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러는 해진 씨는 왜 웁니까.”
아이를 안고 있던 한쪽 손을 조심조심 뻗어 해진의 젖은 뺨을 닦아주었다.
“몰라요, 그냥 환이 씨가 우니까, 저도 그냥…….”
훌쩍거리던 해진은 아예 소리를 내어 펑펑 울기 시작했다. 환은 한쪽 팔로 그를 끌어당겨 품에 안았다.
* * *
키스틸 그룹 이환 전무의 결혼식 소식에 사람들은 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화려한 예식을 기대했다. 하지만 환은 식을 간소하게 치르기로 했다. 해진의 의견을 따라서였다.
식장에는 유 회장을 비롯해 키스틸의 간부 몇이 참석했다. 그리고 해진의 친구인 경훈도 소식을 듣고 참석했다. 오랜만에 본 경훈은 타국에서 고생을 많이 한 티가 팍팍 날 정도로 초췌했다. 잠깐 귀국한 줄 알았는데, 아예 다시 한국으로 발령이 났다고 했다.
“그래도 이번에 한국 다시 들어오고, 맡은 자리도 전보다 훨씬 좋아서 다행이지. 야, 진짜 고맙다. 네 남편 덕분에 내가 살았다!”
졸지에 갑자기 미국으로 쫓겨나게 된 것도 그 남편 때문인데, 그 사실은 완전히 잊은 듯이 보여 다행이었다.
해진은 식이 진행되기 몇 시간 전까지도 환희를 안고 있었다. 이제 제법 아이 보는 데에도 능숙해진 박 비서가 넘겨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쭈쭈, 삼촌 보고 싶어떠요. 우리 애기, 삼촌이 보고 싶어떠요?”
박 비서가 환희를 제 친조카처럼 예뻐해주어서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해진은 다시 메이크업을 점검받았다.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무려 키스틸 그룹 이환 전무의 결혼식이라는 어마어마한 직무를 맡은 데에 부담감을 느끼고 있는 듯했다. 비장한 표정에다 손이 떨리는 게 느껴져 해진은 일부러 편히 웃어 보였다.
똑똑, 대기실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리고 뒤이어 이환이 꼭 제 대기실인 듯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들어왔다.
“환이 씨! 여긴 웬일이에요. 환이 씨는 메이크업 안 받으세요?”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이환이 눈길을 한 번 보내자 메이크업 아티스트는 기겁하며 나가버렸다. 환은 그러거나 말거나 해진의 턱을 부드럽게 당겨 입을 맞췄다.
“아까 아침에도 봐놓고.”
“그래서, 해진 씨는 내가 안 보고 싶었습니까?”
“에이, 그럴 리가요.”
이번에는 해진이 그의 입술에 쪽, 입을 맞췄다.
“식전에 서로 얼굴 보면 원래 안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내가 보고 싶은데.”
해진은 저도 모르게 수긍했다. 이환이라면 그 어떤 징크스도 신경 쓰지 않을 터다. 그리고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예전이라면 두려워하고 피했을 수많은 일들이 이제는 무섭지가 않았다.
다시 입술이 부딪쳤다. 쪽, 쪽, 소리를 연달아 내며 한참 호흡을 섞고 더 뜨거워지기 전에서야 떨어졌다. 아쉬움이 남아 둘은 코끝을 부딪친 채 키스의 여운을 즐겼다.
“슬슬 시간이 된 것 같은데…….”
“그럼 나가야죠.”
해진은 아쉬웠지만 환의 손을 답삭 쥐고 먼저 그를 이끌었다.
식장은 꽃이 화려하게 핀 들판이었다. 두 사람이 행진하는 길 양쪽으로 핀 희고 붉은 꽃은 해진의 아이디어였다. 해진은 흰색, 환은 검정색으로 대비되는 턱시도는 이환의 아이디어였다.
서약을 한 두 사람이 반지를 교환했다. 그리고 입을 맞추었다.
해진은 문득 이 순간이 꿈같다고 생각했다. 불과 일 년 전만 하더라도 정말 꿈이었을지 모른다.
제 앞에서 웃는 이환은 꿈이 아니었다. 여태 그가 알던 모습과 똑같았다. 키스틸 레저의 전무이자 오만한 재벌.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정도로 준수한 외모와 그에 상반되는 답 없는 성격을 가진 알파.
그리고 자신의 완벽한 짝.
환이 그의 손을 쥐고 함께 뒤돌았다.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흐드러지게 핀 꽃이 눈앞에서 일렁거렸다.
해진은 그가 이끄는 대로 걸음을 옮겼다. 찬연하게 핀 색색의 기쁨이 둘의 턱시도를 적셨다.
* * *
여행을 떠나기 며칠 전부터 해진은 잔뜩 들떴다. 그는 하루에도 몇 번씩 환을 불러다가 조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놈의 조난, 하나만 알면 안 되나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해진이 기억하라면 기억하는 게 맞기 때문에 환은 열심히 메모까지 하며 경청했다.
“말했죠? 제일 중요한 건 체온 유지! 그러니까 옷은 웬만하면 버리지 않는 게 좋아요. 침낭도요.”
“알겠습니다.”
“그 지역이 보호 지역이라서 동물도 한두 종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이 책도 꼭 읽으세요.”
해진이 내민 포켓북을 받아 들고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해진은 뭐가 마음에 차지 않는지 한숨을 폭 내쉬었다. 안겨 있던 환희가 부우, 부, 입술 소리를 내며 손을 휘저었다.
“뭐가 또 걱정입니까?”
“다 걱정이죠. 야생이 얼마나 잔혹하고 변덕스러운지 환이 씨는 몰라서 그래요.”
이환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갔다.
“하지만 계속 가고 싶어 하지 않았습니까?”
“그쵸, 그렇긴 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