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13/16)
  • “말을 안 하니 내 마음대로 추측하는 수밖에 없겠네.”

    어디를 만져줬으면 하는지 곧바로 말하지 않으니 어쩔 도리가 있나. 하지만 이 핑계로 해진의 몸 곳곳을 맨손으로 주무를 생각을 하자 뻣뻣해진 성기에서 선액이 나오는 게 느껴질 만큼 흥분되었다.

    환은 제일 먼저 해진의 가슴을 쥐었다. 임신한 탓에 해진의 가슴이 평소보다 조금 더 부푼 것을 확인했다. 며칠 전 씻겨주었을 때도 눈치채긴 했지만, 만져보니 더 티가 나는 것이었다.

    가슴을 손바닥 전체로 부드럽게 주무르자 해진이 기분 좋게 미간을 구겼다. 살이 오른 가슴이 환의 손안에서 말랑하게 구겨졌다. 한참 가슴을 주무르던 그는 이번에는 해진의 유두를 검지와 엄지로 부드럽게 쥐었다.

    “읏……!”

    “여기 만져주는 거 좋아하던데. 여기인가?”

    해진은 대답하는 대신 눈을 꾹 감았다. 감각을 받아들이느라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 환의 눈에는 그저 사랑스러웠다.

    환은 가슴을 어루만지던 손을 살짝 떼어 이번에는 옆구리를 쓸어내렸다. 마른 몸 아래 뼈의 요철이 그대로 느껴졌다. 배만 나오고 다른 곳의 살은 더 빠진 탓이었다.

    안타까움에 쯧, 하고 혀를 차자 아래 누운 해진이 조금 움찔했다. 환은 스스로를 꾸짖었다. 그를 놀라게 하다니. 뒤늦게 해진을 달래기 위해 애써 웃어 보였다.

    “가슴이 아니라 다른 곳인가? 해진 씨가 말해주지 않으니 알 수가 있나…….”

    데굴, 구르는 까만 눈동자에도 할 수 있다면 입을 맞춰주고 싶었다. 그곳뿐만 아니라 몸 안쪽까지 모조리 다.

    이번에는 살 없는 옆구리를 쪽쪽 물고 빨았다. 해진은 상체를 뒤틀며 끙끙 앓는 소리를 냈다. 손으로는 허벅지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매우 조심스러운 손길인데도 해진은 힘들어했다.

    할딱거리는 숨소리가 금방이라도 넘어갈 것처럼 들려서 환은 입술과 손을 떼었다. 그리고 해진의 뺨을 양손으로 감쌌다. 반쯤 풀린 눈이 환을 올려다보았다.

    “괜찮습니까?”

    “하아……. 네……. 그냥 숨이 좀 차서…….”

    할딱거리며 대답하는 해진이 안쓰러웠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벌어진 입술과 파르르, 떨리는 속눈썹은 몹시도 달아 보였다.

    “힘들면 그만하겠습니다.”

    환이 진지한 어투로 선언했다. 가뜩이나 만삭이라 힘들어하는 그를 제 욕구 배출을 위해 괴롭힐 수는 없었다. 물론 지금도 제 좆은 딱딱하게 서서 강해진의 안쪽을 원하지만…… 이까짓 것, 혼자 배출하면 될 일이다.

    리조트에 온 뒤로 이미 몇 번 그런 적이 있었다. 해진은 모르겠지만 잠든 그의 모습을 보고 아랫도리가 반응해버려서 혼자 욕실에 들어가 자위를 한 적이 벌써 여러 번이었다. 이번에도 그러면 될 일이다, 생각하는데 해진이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하고…… 싶어요.”

    그리고 뒤이은 말에 환의 인내심이 한순간에 무너졌다.

    해진의 다리를 벌린 환은 그의 다리 사이에 곧바로 얼굴을 묻었다. 촉촉하게 젖은 구멍에 혀부터 들이밀었다.

    “자, 잠깐……! 아흣!”

    애원하는 목소리는 이제 들리지 않았다. 그의 다리 사이에서 흘러나오는 달큼한 맛에 홀려 혀를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없었다.

    그는 해진의 아래를 공들여 물고 빨았다. 구멍에서 흘러나오는 애액은 모조리 삼켜 마셨다. 손으로는 발기한 해진의 페니스를 어루만졌다. 기둥 끝에 흘러나온 선액의 감촉이 좋았다. 그 역시 몸이 달아올랐단 뜻이니.

    “흣, 아, 잠깐, 흑……! 그만……!”

    구멍을 정신없이 핥던 중, 해진이 내는 소리를 듣고 환은 입술을 떼었다. 오메가의 애액으로 흥건하게 젖은 입술을 혀로 핥은 그가 상체를 일으키고 해진을 내려다보았다.

    “싫어……?”

    다시 허리를 숙여 젖은 입술을 그의 허벅지에 얹었다. 부드러운 살결을 앞니로 살짝 물었다가 놓자 해진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 빨게 해줘……. 제발…….”

    환이 다시 한 번 애원했다. 고개를 살짝 들어, 불러온 배 옆으로 해진과 시선을 마주쳤다. 허락을 구하는 눈빛을 보내자 해진이 살그머니 시선을 피한 뒤 눈을 꼭 감았다.

    그것이 허락의 의미임을 눈치챈 환은 다시 그의 구멍을 핥기 시작했다. 혀를 깊숙이 밀어 넣자 해진은 자지러지며 허벅지를 달달 떨어댔다. 흘러나오는 액은 점점 더 짙어졌다. 환은 그것을 기쁘게 모두 삼켰다.

    “저, 갈 것…… 같…….”

    어느 순간 해진이 그의 어깨를 꼭 붙들며 말했다. 상체를 파닥거리는 통에 침대가 퉁퉁 울렸다. 환은 그가 절정을 맞을 수 있도록 혀를 더 깊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안쪽이 찌르르, 경련하듯 떨리는 게 혀끝으로 느껴졌다. 사정이 없는 절정이었다.

    “하아, 하…….”

    해진은 늘어진 채 숨을 할딱할딱 몰아쉬었지만 환에게는 이제 시작이었다. 그는 바지와 속옷까지 벗고 해진을 모로 눕게 한 뒤 등 뒤에서 껴안듯 나란히 누웠다. 만삭의 몸이니 배를 눕힐 수 있도록 하는 게 그나마 해진에게 부담이 덜 갈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는 해진의 다리 사이로 발기한 제 것을 들이밀었다. 젖은 입구 위를 딱딱한 기둥이 스치자 해진은 어깨를 조금 떨었다.

    “읏…….”

    그대로 성기를 처박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으나 환은 그 대신 느리게 허리를 움직였다. 젖은 입구 위를 기둥으로 연신 스치자 해진은 기분이 좋은 듯 신음했다.

    “아……. 으응…….”

    환 역시 성기에 스치는 축축하고 부드러운 감촉이 마음에 들었다. 당장이고 제 살덩어리를 꽂아 넣고 싶지만, 그랬다간 이 사랑스러운 밀가루떡 같은 제 오메가가 놀랄지도 모르니.

    축축한 해진의 구멍 위로 환의 성기가 빠르게 오갔다. 딱딱한 것이 스칠 때마다 해진은 딱 미칠 것 같았다. 일전 환의 러트 때 섹스한 뒤로 한동안 몸을 섞지 않았는데, 그 탓인지 구멍에 스치는 이환의 성기 감촉이 무척이나 자극적이었다.

    젖은 위로 딱딱한 살덩어리가 빠르게 오갔다. 금방이라도 삽입을 할 것처럼 입구를 긁었다가, 속으로 들어오는 대신 그대로 밀고 스치기만 하는 통에 해진은 안달이 났다.

    ‘그냥 넣어주지…….’

    말만 꺼내면 바로 삽입할 기세이긴 하지만 제 입으로 넣어달라고 말하기는 부끄러웠다. 일종의…… 오메가의 자존심이랄까……. 물론 이런 상황에서 자존심을 내세우는 것도 우습지만.

    그러나저러나 솔직히 기분은 끝내주게 좋았다. 구멍 위를 스칠 뿐인데도, 입구가 자극되는 것만으로도 간질간질하게 쾌감이 일었다.

    “흐으…….”

    해진은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뒤로 빼고 들썩거렸다. 이환의 것을 더 느끼고 싶었다. 이 간질간질한 기분이 좀 더 달아오르길 바랐다.

    그 심정을 읽혔는지, 환이 그의 허리를 안고 각도를 조금 바꾸어 움직이기 시작했다. 구멍 위로 미는 힘이 조금 더 강해지며 환의 귀두 부분이 그의 구멍 입구와 회음을 짓누르듯 뭉갰다.

    “아……! 거기, 좋, 아요…….”

    저도 모르게 감탄처럼 말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이환은 기다렸다는 투로 허리를 툭, 툭, 빠르게 치대며 동작을 크게 했다. 해진은 제 아래에서 액이 흥건하게 흘러나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질척할 정도로 흐른 것이 환의 성기를 흠뻑 적시는 것도 느낄 수 있었다.

    “여기가 좋아?”

    “으, 으응, 좋아.”

    솔직하게 대답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환의 어깨가 그의 머리통에 닿았다. 머리칼을 비벼대며 할딱거리자 그에 응답하듯 환의 숨결이 해진의 귓가에 뜨겁게 번졌다.

    “앞으로 나한테, 다 말해. 어디가 어떻게 좋은지. 구멍은 어떻게 쑤셔주는 게 제일 기분 좋은지.”

    “으, 응…….”

    평소라면 왜 반말이냐 쏘아붙였을 텐데, 그럴 정신도 없었다. 환이 허리를 더 빠르게 치대기 시작해서였다.

    굵직한 것이 구멍을 밀고 들어올 것처럼 아래를 연신 찔러댔다. 귀에 닿는 숨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질퍽거리는 소리도 더 커졌다. 거대한 배가 환의 움직임에 맞추어 출렁거렸다. 해진은 묘한 배덕감을 느꼈다.

    그리고 점점 더 참기가 힘들었다. 당장이라도 그의 성기를 안에 넣고 꾹꾹 조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입구를 스치는 것만으로는 이제 만족할 수 없었다.

    “……주세……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자 환이 어깨에 얹은 턱을 조금 더 들이밀었다. 위스키 향이 해진의 코를 찔렀다. 페로몬을 짧게 맡는 것만으로도 흥분감이 차올랐다.

    “응? 뭐라고 했습니까?”

    “넣, 어…… 주세요…….”

    겨우 목소리를 쥐어짜내자 환이 동작을 뚝 멈췄다. 괜히 말했나. 하지만 언제까지 이렇게 문지르기만 할 건지 알 수 있어야지…….

    부끄러워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망설이는데, 환이 그의 뒤에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꼭 커다란 짐승이 귓가에 대고 숨을 들이마시는 것 같아서 해진은 쭈뼛하게 굳었다.

    “그 말은…… 내가 더 참지 않아도 된단 뜻으로 받아들여도 되겠나?”

    이 자식이 또 반말이야. 하지만 해진은 당장 그에게 박히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에 얼른 고개부터 끄덕였다.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환의 성기가 해진의 안으로 침범했다.

    이미 흠뻑 젖은 안쪽으로 살 기둥이 파고들었다. 해진은 구멍이 찢어질 것 같은 통증과 지독한 쾌감을 함께 느꼈다. 환은 그의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곧바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으읏……! 흡!”

    질퍽한 안쪽을 파고들어 멋대로 드나드는 살 기둥에 해진의 몸도 함께 흔들렸다. 환은 해진을 단단히 감아 안고는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그가 들어오고 나올 때마다 쾌감이 어마어마해서 머리털이 설 정도였다.

    “아, 읏, 잠, 깐, 흣…….”

    품 안에 갇힌 몸을 조금이라도 움직이고 싶었지만 팔이 어찌나 강한지 꿈쩍도 할 수 없었다. 해진은 안긴 채로 제 몸 전체를 뒤흔드는 쾌감을 겨우 견뎠다. 눈앞에 플래시가 번쩍거리는 것 같았다. 아래쪽은 환의 성기를 물고 있느라 찢어질 것 같은데도 액을 흥건하게 쏟아냈다.

    해진은 제 허리를 안은 환의 팔을 꼭 붙들고 헐떡거렸다. 벌써 오르가즘인지 뭔지 모를 어마어마한 감각을 하나 지난 통에 이불이 흥건했다. 그러나 환은 이제 막 시작이라는 투로 해진의 몸속으로 바득바득 들어오며 그를 부서뜨릴 듯이 빠르게 움직였다.

    “으응, 흣, 너무, 강해요, 느, 낌…….”

    애원했으나 환에게는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그는 심지어 해진의 귓바퀴를 잘근잘근 씹기 시작했다. 이로 꾹꾹 깨무는 힘이 여간 세지 않았다.

    “아, 흑, 아, 파……!”

    그제야 환은 파뜩 놀란 듯이 그의 귀를 놓아주었다. 빌어먹게 커다란 성기는 여전히 아래에 꽂은 채였다.

    “미안합니다. 너무…….”

    말을 하다 멈춘 그가 하아, 숨을 내뱉었다. 달뜬 날숨에서 그의 인내심이 묻어났다. 허리를 껴안은 팔 역시 부들부들 떨렸다.

    “너무 좋아서, 당신이…….”

    겨우 이어진 말에 해진은 마음 어딘가가 찌르르하게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당신이 너무 좋아서…….”

    그것은 오래도록 잊고 있던, 이환이라는 자에 대한 감정이었다.

    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보다는 훨씬 느리고 부드러운 동작이었다. 그의 성기가 안으로 매끄럽게 들어왔다가 나갈 때마다 쾌감이 진득하게 몸을 훑었다. 불쾌하지도, 과하지도 않은, 알파가 오메가에게 선사할 수 있는 다디단 쾌감이었다.

    모로만 누워 있는 것을 해진이 힘들어했기에 환은 다시 그를 바로 눕게 했다. 다리를 벌리고 젖은 성기를 도로 삽입하려던 환이 문득 동작을 멈췄다. 시선이 해진의 몸을 훑었다.

    “……왜 그래요?”

    해진이 묻자 환은 그와 눈을 맞추고 살짝 웃었다.

    “그냥, 예뻐서 말입니다.”

    해진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배는 남산만 한 데다가 땀에 젖어서 엉망인 제 모습이 눈에 선한데 예쁘단 말이 아무렇지 않게 나오니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나 싫지가 않았다.

    부드럽게 그의 안으로 들어온 환은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아까보다 느긋한 동작이지만 몇 배는 더 진득했다. 해진의 아래가 어찌나 젖었는지 조금만 움직여도 젖은 소리가 적나라하게 났다.

    “으응, 읏…….”

    해진은 느긋한 오르가즘을 한 번 더 느꼈다. 찌릿, 찌릿, 구멍을 조일 때마다 가뜩이나 딱딱한 이환의 성기가 안쪽에 아프도록 배겼다. 발기한 해진의 성기에서 정액이 퓻, 퓻, 튀어 만삭의 배를 흠뻑 적셨다. 몇 방울은 시트에 튀었다. 배를 적신 정액은 옆으로 길게 늘어졌다.

    그 모습을 보던 환이 손을 뻗어 그의 젖은 배 위를 문질렀다. 움직임은 멈추지 않은 채였다. 느긋하게 움직이는 허리는 유연했고, 배를 쓰는 손길은 다정했다.

    정액 묻은 손가락을 좀 더 위로 옮긴 환은 그대로 해진의 유두를 쥐었다. 이미 딱딱하게 선 유두를 엄지와 검지로 가볍게 누르자 해진이 눈을 꾹 감으며 고개를 옆으로 젖혔다.

    환은 그의 표정과 가슴을 번갈아 관찰했다. 만삭이 되며 가슴이 커진 것뿐만 아니라 이 유두도 좀 더 탱글해진 것 같았다. 이것도 임신일지에 따로 기록을 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유두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던 손끝에 환이 힘을 주었다. 그러자 해진의 구겨진 얼굴에 조금 더 힘이 들어갔다.

    “으읏……!”

    그리고 다음 순간, 환은 제 눈을 믿기 어려웠다. 해진의 유두에서 살짝 노르스름한 색을 띤 모유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것이었다.

    해진 역시 축축한 감촉을 느끼고 눈을 떴다가 제 가슴을 보고 경악했다.

    “으, 아, 잠깐……! 이게 무슨…….”

    그러거나 말거나, 환은 거의 반사적으로 그의 유두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그대로 흘러나오는 것을 쪽쪽 빨기 시작했다.

    “자, 잠깐! 흑! 뭐 하는!”

    놀란 해진이 그의 어깨를 팡팡 때려댔으나 꿈쩍도 않았다.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해진의 유두를 빨아대며 앞니로 잘근잘근 깨물기까지 했다.

    흘러나온 모유는 환의 입안을 적시다 못해 줄줄 넘쳤다. 환은 그것을 놓치지 않겠다는 투로 게걸스레 삼키고 또 삼켰다. 해진의 가슴까지 죄다 먹어버릴 기세로 입술을 꽉꽉 눌러가며 빨아댔다. 허리는 멈추지 않았다. 질퍽한 안쪽을 여전히 느리게 들쑤셨다.

    “그만, 흣! 아!”

    ‘그만’이라고는 외쳤으나 사실 아프거나 싫은 것은 아니었다. 제 몸에서 흘러나온 것을 먹고 있는 환의 모습이 시각적으로 너무 큰 자극이어서, 유륜을 누른 입술 감촉과 유두 끝을 눌러대는 혀끝 감촉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어서 그리 말한 것이었다.

    모유가 흘러나오는 속도가 조금 느려지고서야 환은 빠는 것을 멈추었다. 가슴에서 입을 살짝 떼자 입술에 모유가 온통 허옇게 묻어 있었다. 환은 혀끝으로 그것을 핥아 삼켰다.

    “당신 몸에서 나오는 건 다 먹고 싶어.”

    그리고 이번에는 혀만 내밀어서 해진의 가슴을 핥기 시작했다. 퐁, 퐁, 느리게 솟아 나오는 유두를 한 방울씩 혀끝으로 쓸어 삼켰다.

    헝클어진 머리칼과 정욕이 뚝뚝 떨어지는 갈색 눈, 그리고 제 몸에서 흘러나온 액체를 묻히고 있는 입가까지. 환의 모습을 보며 해진은 하마터면 또 오르가즘을 느낄 뻔했다.

    다행히도 그가 허리 움직임을 멈췄다.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환은 해진의 양쪽 무릎을 쥐고 다리를 활짝 벌렸다. 그대로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몇 배는 빠른 속도였다. 그리고 몇 배는 깊었다.

    “읏! 아! 아아!”

    퍽, 퍽, 살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환의 성기가 그의 안으로 깊이 들어갔다 나오길 반복했다. 해진은 그제야 깨달았다. 여태껏 환이 저를 봐주느라 페니스를 끝까지 다 쑤셔 박지 않았음을.

    뿌리 끝까지 처박힌 페니스는 곧바로 다시 빠져나갔다가, 틈을 두지 않고 도로 들어오며 해진의 안쪽을 자극시켰다. 해진이 겁이 날 정도로 삽입이 깊었다.

    “흣, 태아, 한테, 닿으면 어쩌……! 흡! 으읏!”

    겁이 나서 한 말인데, 어째 그게 환을 더 자극한 모양인지 움직임이 한층 더 빨라졌다. 살이 부딪치는 접합부에 질퍽, 질퍽, 애액이 사방으로 튀었다. 해진의 몸에 박혔던 환의 페니스가 빠져나갈 때마다 점도 높은 애액이 밖으로 흥건하게 흘러나왔다.

    해진은 그가 안쪽 깊숙이 처박을 때마다 묘한 쾌감을 느꼈다. 그 쾌감은 요의 비슷한 것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요의보다는 훨씬 더 강했다.

    “환, 이 씨, 저, 흣, 화장, 실……! 잠깐!”

    요의가 아닌 것 같지만 그렇게라도 말해야 환이 놔줄 것 같았다. 많이 나아지긴 했어도 여전히 결벽증을 갖고 있으니……. 그러나 웬걸, 오히려 그는 더 빠르게 허리를 치댔다. 해진의 몸이 침대 위에서 뭉개지듯 흔들렸다.

    “아으, 아, 아!”

    거의 비명 같은 신음과 함께 해진이 다시 사정했다. 이번에는 정액이 아니라, 거의 묽은 물이 줄줄 쏟아져 나왔다. 당황한 해진이 제 몸에 쏟아지는 투명한 액체들을 보고 울 것 같은 표정을 했다.

    반면 환은 허리 움직임을 멈춘 채로 그 모습을 하나하나 응시했다. 묽은 물을 쏟아내는 해진의 페니스와, 그의 붉어진 얼굴과, 젖어드는 불룩한 배까지. 마치 관찰하는 듯이 적나라한 시선에 해진은 결국 시선을 피하고 손등으로 눈을 가려버렸다.

    “흑, 그만, 하라고 했잖아요…….”

    대체 이게 뭐람. 냄새가 나지 않아서 그렇지 정말 소변일지도 모른다. 섹스를 하다가 소변을 지리는 오메가라니, 스스로 생각하기에 최악이었다. 하지만 원인 제공은 이환이 했으니……. 생각을 잇던 해진이 배에 닿는 감촉에 화들짝 놀랐다.

    눈을 떠 보자 이환이 그의 몸에 얼굴을 문대고 있었다. 소변인지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액체로 흠뻑 젖은 상체에다가 뺨을 대고 비비다가, 입술로 미친 듯이 애무를 하는 게 아닌가.

    “하아……. 정말 화가 나는군…….”

    정신이 나간 듯한 그 모습에 해진의 머리털이 곤두섰다. 소똥을 맞고 다가오던 그를 보았을 때의 충격과 비슷했다.

    환이 고개를 들었다. 엉망이 된 머리칼과 얼굴을 정리할 생각도 않고, 그는 해진을 내려다보며 다시 허리를 움직였다.

    “대체…… 왜 빨리 찾아내지 못했을까…….”

    혼잣말처럼 내뱉으며 리드미컬하게 허리를 치댈 때마다 해진의 젖은 성기가 부푼 아랫배에 툭, 툭, 부딪쳤다.

    “한시라도 더 빨리…… 당신을 찾아냈어야 했는데…….”

    자신이 도망 다니던 몇 달의 시간을, 그때 저를 빨리 찾아내지 못한 것을 아직도 후회하고 있을 줄은 몰랐다. 그래서 해진은 조금 아득해졌다. 대체 이 사람은 얼마나 나를…….

    “그 시간이 아까워서…… 후우, 미쳐버릴 것 같아.”

    얼마나 나를 원하는 걸까, 싶어서.

    환이 느리게 움직이다가 해진의 밖으로 빠져나왔다. 울컥, 울컥, 쏟아진 정액이 아직 활짝 벌어져 있는 해진의 입구를 하얗게 적셨다.

    해진은 누운 채로 숨을 한참 몰아쉬었다. 온몸이 노곤하고 허리도 뻐근했다. 눈을 감고 있자니 옆으로 눕는 환의 기척이 느껴졌다.

    환의 팔이 해진의 머리 아래를 받쳤다. 해진은 자연스레 그를 향해 몸을 살짝 돌리고 누웠다. 부푼 배 위로 환의 단단한 몸이 닿았다. 해진은 그 감촉에 안락함을 느꼈다.

    어쩌면 이환이라는 사람을 잘 알기도 전에 이미 익숙해졌는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해진은 결심했다. 지금부터라도 제 알파에 대해 조금 더 알아야겠다고. 저를 속이고 이용해먹으려던 이환 말고, 제게 예쁘다고 해주는, 발 마사지를 해주는, 헤어져 있던 시간을 아까워하는 이환에 대해서 말이다.

    * * *

    날씨가 많이 쌀쌀해지며 해진의 산책도 어쩔 수 없이 줄어들었다. 걷기도 힘들거니와 조금만 앉아 있어도 발이 퉁퉁 붓고 허리가 아파서 환이 마사지를 해주어야 했다.

    환은 해진을 극진히 보살폈다. 해진이 명령만 하면 대소변이라도 받아낼 기세였다. 예전이라면 이 미친놈이 역시 아이 때문에 그러는구나, 생각했을 테지만 해진은 이제 그게 아님을 알았다.

    이환이 정성을 쏟는 대상은 아이가 아니라 강해진 본인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변한 눈빛과 진실된 손길, 제게 조심스러운 행동을 보면 그의 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다만 해진은 아직도 두려웠다. 그가 다시 제게 질리지는 않을까. 아이를 낳고 돌변하지는 않을까.

    바보 같은 생각임을 알면서도 한 번 겪은 게 있으니 거의 반사적인 두려움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전에도 이환은 그랬으니까. 제게 연인처럼 다정하게 대해주다가 갑자기 돌변해 저를 감금하지 않았던가.

    저도 사람인지라, 몇 달 동안 지극정성으로 대하는 이환을 보니 그간 쌓였던 마음이 녹기는 했다. 아니, 마음이 녹는 정도가 아니라 거의 넘어갔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였다.

    해진은 자신이 이환의 얼굴에 홀렸을지도 모른다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미디어에서도 키스틸의 이환 전무를 아이돌처럼 다룰 정도로 외모가 걸출하긴 했으니. 처음 만났을 때에도 그 잘난 얼굴이 띠는 미소에 홀랑 반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배가 불러오고, 제 발을 마사지하는 데에 시간을 투자하며 진심으로 즐거워하는 이환의 속눈썹을 보며 어쩌면 자신이 잘못 생각했는지도 모른단 생각을 했다.

    갈색 눈동자, 날카로워 보이는 눈매, 다물고 있으면 단단하게 보이는 턱뿐만 아니라 해진은 점차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의외로 말수가 적네.’

    이환은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편이었으며,

    ‘목 긁는 거 제법 귀여워.’

    곤란하면 목을 살짝 긁는 버릇이 있었으며,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계속 말해보세요.”

    이야기에 집중할 때에는 눈썹을 조금 들어 올리는 버릇이 있었다.

    “저는 조금 있다 먹도록 하겠습니다. 곧 회의라서요.”

    그는 일을 하기 전에 배가 꽉 차 있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단것을 좋아했고, 왼손 엄지를 검지에 문지르는 버릇을 갖고 있었다.

    그는 잘 때 간혹 인상을 구기곤 했고, 구겨진 미간을 살짝 누르면 주름이 좀 더 짙어졌다. 그리고 잘 때에도 손을 살짝 잡으면 손아귀에 힘을 주곤 했다. 마치 떠나지 말라는 듯이.

    그 모든 것을 하나하나 알아가며 해진이 다다른 결론은 하나였다. 이환은 의외로 평범한 알파라는 것. 그리고 제게 약하다는 것.

    이환에 대해 알아갈수록 어쩌면 그가 저를 버릴 일은 없을지도 모른단 작은 믿음이 조금씩 자라기 시작했다.

    간신히 싹을 틔우고 커지기 시작한 믿음은 이환이 저를 보며 웃어줄 때마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땀에 젖은 제 몸을 닦아주고 하루 종일 신은 양말을 벗겨줄 때마다 조금씩 더 자랐다.

    해진은 그것을 더 키우고 싶었다. 배 속의 아이를 낳고 나서도 이환과 지내고 싶었다. 이런 화려한 리조트가 아니더라도, 그가 대기업의 전무가 아니더라도. 그저 그와 조금 더 지내고 싶었다.

    어느 날이었다. 평소처럼 환은 노트북으로 일을 하고, 해진은 침대에 앉아 만화책을 읽고 있었다.

    어째 인상을 구기고 화면을 가만히 노려보는 얼굴이 평소랑 좀 달라 보여서 해진은 호기심이 일었다.

    “왜 그래요? 일이 잘 안 돼요?”

    “발표회 때 입을 옷을 골라야 하는데, 좀 마뜩잖아서 말입니다. 박 비서가 몇 개 보여주긴 했다만…….”

    “어디 봐요.”

    그가 노트북을 들고 가까이 다가왔다. 화면에는 정장 사진이 몇 개 떠 있었다. 해진은 그중 하나를 가리켰다.

    “환이 씨는 차콜 컬러가 어울려요. 블루톤 아주 살짝 들어간 차콜. 전에도 이거 비슷한 거 입었을 때 멋있던데.”

    환이 화면과 해진을 번갈아 보았다. 조금 놀랐다는 투였다. 해진이 어깨를 으쓱 움츠려 보였다.

    “왜요?”

    “……그냥, 좀 놀라서 말입니다. 해진 씨가 내 스타일까지 알아주시다니, 좀…… 감격스럽기도 하고.”

    고작 정장 하나 골라줬을 뿐인데 진심으로 기뻐하는 그를 보니 마음이 조금 쓰렸다. 해진은 그의 무릎에 머리를 대고 누워 아까 가리켰던 화면 속 정장을 다시 보았다.

    “음, 역시 괜찮네요. 저거, 저 감색은 너무 가벼워 보이고. 그쵸?”

    언뜻 대답이 없기에 머리칼을 그의 무릎에 뭉개며 위를 보자 눈이 마주쳤다.

    “지금 나한테 애교부리는 겁니까?”

    웃음을 참는 투로 묻자 해진이 슬며시 시선을 피했다. 묘하게 부끄러운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뭐…… 그렇다고 해두죠?”

    “그럼 기꺼이 넘어가 줘야겠군요.”

    이환의 손가락이 그의 머리칼을 살살 헤집었다. 손길이 좋아서 해진은 얌전히 눈을 감았다.

    “그러고 있으니 꼭 기분 좋은 고양이 같군요.”

    “고양이치곤 배가 너무 부르지 않아요?”

    “뭐 어때. 귀여우면 됐지.”

    해진이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민망해 죽겠는데, 정작 말한 본인은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낯 뜨거운 말을 참 아무렇지 않게 하는 사람이다, 생각하며 그저 픽,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환은 노트북을 옆으로 치우고 해진이 좀 더 편히 저를 베고 누울 수 있게 자세를 고쳤다. 해진은 그의 무릎에 자연스레 머리를 비비며 파고들었다. 허벅지에 뭔가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지만 애써 무시했다.

    “그나저나…… 해진 씨 출산 후에 휴가 갈 곳을 생각해뒀는데 말입니다.”

    “휴가요?”

    “아마존까지는 아직 협력 구축이 안 되었지만 네팔은 충분히 해진 씨가 원하는 여행이 가능하겠더군요.”

    해진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모습이 귀엽다는 듯이 환이 다시 한 번 웃었다.

    “가고 싶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오지탐험.”

    해진이 누워 있던 상체를 발딱! 일으켰다. 배가 그렇게 부르고도 어떻게 그렇게 날렵할 수 있는지 환이 당황할 정도였다.

    “진짜요? 정말요?”

    “부서에서 어제 연락이 왔습니다. 사실 이전부터 닦달하기는 했는데 아무래도 이것저것 신경 쓸 게 많다 보니 좀 오래 걸렸군요.”

    “완전 좋아요…….”

    거의 울 것 같은 표정을 한 해진은 환이 신이라도 되는 듯이 초롱초롱한 눈길로 그를 보았다. 이 정도로 좋아할 줄은 몰랐기에 환은 조금 멋쩍어졌다. 헛기침을 하고 말을 이었다.

    “정식 상품 개발은 아직 힘들지만, 현지 가이드와 안전 관련 계약 등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출산 후, 몸조리를 하고 나면 그곳은 가을이라 탐험에도 딱 좋을 시기라고 합니다. 장소는 개발되지 않은 숲과 산…….”

    말을 잇던 중, 해진이 그의 품에 폭 안겨왔다. 부른 배 탓에 거의 머리만 들이민 형국이었다. 환은 잠깐 굳었다가 그의 어깨를 감싸 안고 토닥여주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진짜 고마워요, 환이 씨.”

    고맙다는 말을 연신 내뱉는 해진을 토닥여주며 환은 뿌듯함에 웃었다가, 불편하게 허리를 숙이고 있는 그가 걱정되어 조심스레 상체를 도로 일으켜주었다.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사랑스러웠다. 빛나는 두 눈도 귀여웠다. 어찌나 흥분했는지 그는 숨까지 씩씩 몰아쉬고 있었다.

    “당장 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만, 일단 무사히 출산하는 것부터 생각합시다. 알겠죠?”

    엉망이 된 머리칼을 살살 쓸어주며 말하자 해진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그 모습이 하도 예뻐서 환은 결국 그의 입술에 살짝 입을 맞췄다. 가뜩이나 붉던 해진의 얼굴이 더 붉어졌다. 분위기가 묘하게 달아올랐다. 다시 입술이 가까워지려는 순간…….

    “아, 근데 저 진짜 흥분돼요. 탐험할 생각하니까, 막…….”

    해진이 불쑥 던지듯 말을 꺼냈다. 콧김까지 뿜는 모습을 보니 정말로 흥분한 듯했다. 환은 묘한 아쉬움을 느꼈으나 잔뜩 달아오른 그가 귀엽기도 했다.

    “해진아.”

    뺨을 손으로 감싸며 이름을 부르자 해진의 눈이 다른 종류의 놀라움을 담아냈다.

    “그렇게 좋아?”

    이번에는 눈에 띄게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순식간에 붉어졌다가 다시 식었다가 하는 게 귀엽긴 한데, 몸에 좋지 않을까 겁이 나기도 했다. 환은 그의 이마에 제 이마를 살짝 대었다가 떼었다.

    “이렇게 좋아할 줄 알았으면 좀 더 일찍 이뤄줬어야 했는데. 내가 못나서 이렇게 늦어버렸네.”

    “아, 아니에요……. 애기 낳고 가도 저는…… 좋아요.”

    눈앞에서 데굴데굴 구르는 눈동자를 할 수만 있으면 입에 쏙 넣어버리고 싶었다.

    “사실 조금 걱정했거든요. 아이 낳고도 환이 씨랑 계속 있어도 되나 싶기도 하고……. 그런데 이렇게 빌붙어 있기만 한 것도 영 죄송하니까……. 그리고 환이 씨가 저한테 또 질릴 수도 있는 거고…….”

    이건 또 무슨 말인가. 이번에는 환의 눈이 커졌다. 미간을 구겼다가 행여 해진이 겁을 먹을까 싶어 얼른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저는 이제 진짜 갈 곳도 없고……. 정말 혼자라서……. 원래도 혼자이긴 했지만…….”

    차라리 그 눈동자가 슬픔이나 서러움을 담아냈더라면 제 마음이 덜 아팠을 텐데, 해진은 느릿느릿하게 말을 이으며 무던한 표정을 했다.

    “이런 화려한 리조트 아니더라도, 좋은 침대랑 비싼 밥 아니더라도 괜찮아요. 그냥 제가 살던 원룸처럼…… 그런 데라도 좋으니까, 그냥…….”

    잠깐 말을 멈추고 오물거리는 입술이 오늘따라 유독 붉었다.

    “그냥 같이 지내고 싶어요. 환이 씨가 저를 계속 좋아해준다면요.”

    말을 끝낸 해진이 데굴, 눈동자를 굴리며 환의 눈치를 봤다. 환은 그를 다시 안아줄 수밖에 없었다.

    “미안합니다.”

    그리고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생각을 하게 만들어서. 당연히 그의 곁에 있어주리라 다짐한 지 오래인데, 정작 이런 고민을 하고 있을 줄은 생각도 하지 못해서.

    해진의 손이 그의 등에 닿았다. 외려 환을 위로하는 듯이 도닥여주었다.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환은 결심했다. 강해진의 마음에 남은 불신을 온전히 지우지는 못할지언정, 절대 먼저 손을 놓지는 않겠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이환은 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몹시 까다롭고 예민했다. 제 성장 과정을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결과이긴 했다. 가족의 도움 없이 혼자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나날 속에서는 남들과 다른 기준이 필요했다.

    스스로 세운 원리 원칙들은 이내 이환이라는 사람을 지켜주는 벽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만든 벽 안에서만 평화로울 수 있었다.

    그러나 강해진은 그 견고한 벽을 깨부순 최초의 인물이었다.

    그는 스스로에게 놀랐다. 그리고 해진에게 놀랐다. 강해진의 존재는 단지 제 아이를 배고 있는 오메가 그 이상이었다.

    강해진은 침입자였고, 가장 다정한 적이었으며, 동시에 다루기 까다로운 동업자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의 첫 연인이었다.

    오랜 시간 저를 지켜온 결벽증도, 남에게 생활을 공유하기를 극도로 싫어하는 개인주의적 성향도, 심지어 까다로운 식성까지 강해진의 앞에서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강해진의 앞에 서면 뼛속까지 물러지는 기분이 들곤 했다. 그는 갑옷을 잃고 무기를 내버린 패잔병이었다. 그런데도 그 사실이 싫지 않았다.

    환은 그가 저를 무너뜨리는 게 좋았다. 무너지는 기쁨이 무엇인지 환은 처음 깨달았다.

    “보드게임 좋아하세요?”

    어느 날 책 읽는 해진을 구경하던 중, 그가 환에게 물었다.

    “보드게임 말입니까? 해본 적이 없습니다만.”

    “저는 어릴 때 형제들이랑 보드게임 하면서 지내는 애들이 그렇게 부럽더라구요. 저는 같이 할 사람도 없는데 게임만 사놓고 그랬어요.”

    보드게임이 갖고 싶단 뜻인가? 환은 잠시 고민했으나 이내 그 뜻이 아님을 눈치챌 수 있었다.

    강해진과 함께 지내면서 수많은 것을 배웠다. 임산부 오메가의 건강을 관리하는 법이라든지, 혹은 오지를 탐험할 때 어떤 것을 가장 우선시해야 생존할 수 있는지 같은 것들 말이다.

    그의 기분을 파악하고 맞춰주는 것 역시 새로이 배운 것이었다. 남의 기분을 맞추는 일은 사실 환에게 익숙하지 않았다. 남들이 그의 기분을 맞춰주면 모를까. 그러나 해진과 지내면서 그는 처음으로 상대방의 의도를 읽고 기분을 헤아리는 법을 배웠다.

    그리고 지금은 보드게임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었다. 환은 그가 내민 책을 받아 들고, 바로 다음 권을 침대 아래에서 집어 건네주었다.

    “저도 어릴 때 형제 있는 다른 사람들이 부러운 때가 많았습니다.”

    “정말요? 환이 씨도요?”

    눈을 동그랗게 하며 묻는 말에 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도 외아들로 태어나 혼자 지냈으니 말입니다. 해진 씨와는 달리 심지어 친구도 없었죠.”

    해진이 작게 웃었다. 환 역시 같이 웃었다. 이런 이야기를 다른 사람과 해본 적이 없었다.

    “언제 한번 저랑 보드게임 같이 하시죠. 인원이 필요하면 박 비서나 닥터 최를 불러도 되고 말입니다.”

    “좋아요! 안 그래도 환이 씨가 좋아할 것 같은 보드게임이 생각나서요. 그게 어떤 거냐면요…….”

    해진은 재잘거리며 게임에 대해 설명을 늘어놓았고, 환은 열심히 맞장구를 치고 질문을 해가며 그의 손을 가만히 끌어당겼다. 제 것보다 훨씬 작은 손을 감싸듯이 쥐고 조물조물 마사지를 하는 동안 해진은 정신없이 종알거렸다.

    제게 몸 일부를 맡겨놓고 수다를 떠는 해진이 몹시도 사랑스러웠기에, 하마터면 그의 말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불충을 저지를 뻔했다.

    이렇도록 누군가에게 실수를 할까, 미움을 받을까 두려워하는 일 역시 그가 최초로 배운 것이었다.

    그는 제 모든 최초를 해진과 공유하고 싶었다. 마치 세상을 처음 알게 된 어린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강해진과 지내는 일은 마치 자신이 알던 세계를 새로이 배우는 것과 비슷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셰프님이 밤에 야식 만들어주셨는데 인사도 못 드렸네. 지금 계시겠죠? 전화해야지.”

    강해진은 환이 생각하기에 오지랖이 넓고 지나치게 친절했다. 전화기를 건네주자 해진은 식당에 전화를 걸어 헤실거리며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어제 음식도 맛있었다, - 심지어 입덧 때문에 두어 술 뜨지도 못해서 환은 그들을 해고하고 싶은 심정이었는데 말이다 - 추운데 감기는 안 걸리셨느냐 어쩌고저쩌고 쓸데없는 말을 하느라 셰프와 연결되기까지도 5분은 걸린 듯했다.

    “와, 셰프님, 저 진짜 그런 햄버거는 태어나서 처음 먹어봤다니까요! 지금도 군침 도네.”

    몇 입 먹지도 못한 것을 극찬하는 해진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조금 불쾌해졌다. 이렇게 사랑스럽고 귀여운 모습은 제게만 보여야 하는 것 아닌가. 남에게 잘해주는 에너지를 모두 제게만 쏟길 바랐다.

    “……뭘 그렇게 길게 이야기합니까. 그냥 대충 하고 끊지.”

    통화가 끝난 전화기를 제자리에 놓으며 뾰로통하게 말하자 해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런 말씀 마세요. 제가 직원분들께 잘 대해드려야 환이 씨한테도 좋죠.”

    그 말에 환의 마음이 누그러졌다. 강해진은 셰프뿐만 아니라 박 비서에게도, 프런트 직원에게도, 여타 다른 사람들에게도 한결같이 친절했다. 환 본인을 생각해서 그러는 거라 생각하자 내내 품고 있던 질투심이 한결 풀렸다.

    “참, 아까 책에 나와서 찾아본 건데, 이 새 어때요? 진짜 귀엽죠?”

    해진이 태블릿PC를 내밀었다. 화면에는 조막만 한 새 사진이 하나 떠 있었다. 이딴 새보다 당신이 몇 배는 더 귀엽다고 대답하는 대신 환은 긍정하는 의미로 눈을 휘며 웃었다. 이런 반응 역시 해진에게서 배운 것이었다.

    “이렇게 귀여운데 완전 포악하대요……. 같은 지역에 사는 다른 새 둥지를 막 부순대.”

    “그래요? 이제 보니 해진 씨랑 닮은 것 같은데.”

    “잉? 저랑요?”

    놀란 눈으로 다시 화면을 들여다보는 강해진이 하도 사랑스러워서 결국 환은 그의 뺨에 쪽, 소리 내어 입을 맞췄다. 발갛게 달아오르는 얼굴이 몹시 달콤해 보였다.

    환은 해진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다시 도망칠 가능성이 이제는 거의 없다 한들, 그저 이렇게 지내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욕심이 났다. 이렇게 매일 붙어 지내는 것만으론 성에 차지 않았다.

    그와 지내며 매일매일이 찬란했다. 알지 못했던 것을 새로이 배우고 그를 통해 알게 된 이 수많은 감정을 아끼고 또 아껴서 잊고 싶지 않았다. 행여 해진과 멀어지기라도 하면 이 찬란한 것들을 모두 잊을까 두려웠다.

    그는 해진에게서 받은 것을 돌려주고 싶었다. 그것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사죄의 방법인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지 한참 수다를 떨던 해진은 그대로 잠들었다. 환은 이불을 여며주고 방을 나왔다.

    내내 기다리고 있던 박 비서가 지쳐 쓰러지기 직전인 몰골을 하고 주저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뼈가 부딪쳐 우드득거리는 소리가 환의 귀에까지 들렸으나 그는 무시하고 말을 꺼냈다.

    “준비는 제대로 진행되고 있습니까?”

    “예에……. 시키신 대로 다 했습니다.”

    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 다행이군, 하는 표정으로 박 비서를 흘끔 훑어보고는 복도를 걷기 시작했다. 박 비서가 얼른 그의 뒤를 따르며 오늘의 남은 스케줄과 업무보고 몇 가지를 읊었다.

    “저, 그런데 전무님.”

    무감하게 듣고 있던 이환이 옆을 흘끔 보았다. 박 비서는 몇 시간 동안 쭈그리고 있던 다리를 퉁퉁 두드리며 잔뜩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꼭 제가 복도에서 기다려야 합니까?”

    이환의 미간이 설핏 구겨졌다.

    “내가 이동하는 동안 보고를 받는 것이 가장 효율적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뒤이은 말에 박 비서는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예에, 뭐…… 제 무릎이야 어찌 되든 효율이 제일 최고죠…….”

    힘없이 말을 읊으며 따라 걷던 박 비서의 눈이 문득 뭔가를 떠올리곤 반짝, 빛났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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