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9.99퍼센트의 연인 3 (완결)-1화 (12/16)
  • < 3권에서 계속 >

    99.99퍼센트의 연인 3 (완결)

    목차

    63퍼센트

    77퍼센트

    90퍼센트

    외전 01

    외전 02

    외전 03

    외전 04

    외전 05

    외전 06

    63퍼센트

    닥터 최는 제 상사의 성질머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 오메가와 제 상사의 관계도 대충이나마 알고 있었다.

    때문에 ‘아이는 무사하다’고 말했을 때 이환의 반응을 보고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보다 강해진 씨는, 어떻습니까?”

    아, 하고 작게 깨달은 소리를 낸 닥터 최는 고개를 끄덕였다.

    “몸이 좀 많이 약해져서 그렇지, 크게 심각한 곳은 없습니다.”

    “심각한 곳은 없다면, 심각하지 않은 곳은 있단 말입니까? 똑바로 말하십시오.”

    ……성질머리하고는. 닥터 최는 그가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해야 하며 스트레스에 취약한 상태이며, 영양 상태도 좋지 않으니 한동안 케어가 필요하다는 말을 줄줄이 읊었다.

    “전에 진찰할 때도 말씀드린 거지만, 본래 몸이 약한 타입입니다. 임신한 상태에서는 각별히 조심해야 할 건 당연하고요.”

    그리 말한 뒤 진찰 도구를 챙겨 나가려던 닥터 최는 순간 환의 얼굴을 보고 조금 더 놀랐다. 글쎄, 제 상사가 무려 슬퍼하는 표정을 짓는 게 아닌가.

    찔러도 피는커녕 물 한 방울도 안 나올 것 같던 이환이 침울한 얼굴을 하고 오메가를 내려다보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몰라도, 닥터 최는 더 이상 엮이고 싶지 않았기에 서둘러 방을 벗어났다.

    환은 누운 해진의 얼굴을 오래도록 내려다보고 있었다.

    축사에서 데려온 뒤로 그는 한 번도 눈을 뜨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도 닥터 최는 그에게 심각한 곳이 없다고 한다.

    제 얼굴이 보기 싫어서, 제 옆이 싫어서 눈을 뜨지 않는 걸까.

    얼마나 싫었으면 몸에 소똥을 바르면서 오지 말라고 소리를 질러댈까……. 환은 소똥을 얼굴에 바르던 강해진을 다시 떠올리고 조용히 진저리를 쳤다. 당연히 소똥 때문은 아니었다.

    ‘강해진이 나를 혐오하고, 경멸한다.’

    그냥 싫어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제 사과도 받지 않을 정도로 그 미움이 어마어마한 모양이었다.

    “후우…….”

    한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강해진을 데려온 뒤로 한시도 쉬지 못했으니 잠을 못 잔 게 아마 스무 시간은 되어갈 터다.

    머리가 핑핑 돌고 입에서는 단내가 나는데 환은 쉴 수가 없었다. 쓰러진 해진의 곁에서 조금이라도 눈을 떼었다간 그때처럼 도망칠 것 같았다. 아니, 강해진이라면 정말 그리할 터다.

    눈을 감은 강해진의 얼굴은 정말로 잠들었는지, 그때처럼 잠든 척을 하고 있는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뭐든 상관없었다.

    “……당신이 무사했으면 한다는 말은, 진심입니다.”

    그가 듣고 있지 않아도, 마찬가지로 상관이 없었다.

    “그게 내 곁이 아니라도 말입니다.”

    해진의 눈꺼풀이 미미하게 떨리기 시작했으나 환은 그의 얼굴이 아닌, 침대 위에 놓인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하지만 내 곁이 지금 강해진 씨가 가장 안전한 곳이라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또 한 번 길게 한숨을 내뱉은 환은 양손을 무릎 위에 깍지 낀 채로 상체를 숙였다. 몸이 몹시 피곤했으나 그보다는 머릿속이 더 어지러웠다.

    일단 해진을 데려오기는 했지만, 앞으로가 문제였다. 여태까지 죽어라고 도망친 그가 언제 다시 뛰쳐나갈지는 아무도 몰랐다. 잡히면 도망칠 거라던 해진의 말은 절대 허세가 아니었다.

    문제는 그가 제 손아귀에서 또 벗어났을 때, 그때는 유 회장으로부터 보호해줄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떨군 시선을 조금 들자 해진의 손이 시야에 들어왔다. 곳곳에 상처가 난데다 부르트고 손톱도 깨져서 엉망이었다. 그 손을 차마 잡을 수가 없었다.

    “내가 밉고 원망스러운 걸 압니다. 하지만 당분간은…… 안전을 위해서라도 이곳에 있어야 합니다.”

    거기까지 말했을 때, 시야에 들어온 해진의 손이 미미하게 움찔거렸다. 의식이 돌아온 모양이었다. 반색하며 일어난 환은 차마 해진의 얼굴을 만지지도, 그를 껴안지도 못한 채 눈으로만 바삐 그를 살폈다.

    “괜찮으십니까?”

    말을 꺼내자마자 환은 후회했다. 괜찮기는. 안색이 지금도 다 죽어가는데.

    해진은 인상을 있는 대로 쓰며 잠에서 깨어났다. 많이 괴로운 듯이 보였다.

    “어지러워…….”

    “약 기운 때문일 겁니다. 물을 좀 마셔보십시오.”

    저를 뿌리치거나 소리를 지르거나 난동을 피우면 어쩌나 걱정한 것과 달리 다행히도 해진은 얌전히 그가 주는 물을 받아 마셨다. 그리고 주변을 살폈다.

    “……내 집입니다.”

    어디인지 궁금해할 것 같아 말했는데 해진은 그럴 줄 알았다는, 혹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한 표정으로 환을 마주했다. 감정이 없어 보이는 강해진의 얼굴이 환은 여전히 낯설었다.

    “안전을 위해서라는 건, 무슨 뜻이에요?”

    해진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잡혀 와서 당혹스럽고 제가 여전히 꼴 보기 싫을 텐데도, 가장 먼저 꺼낸 말이 해진 자신의 안위와 관련된 말이라서 환은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한숨을 작게 내쉬고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환은 해진에게 모든 이야기를 다 했다. 왜 그에게 접근했는지, 아이가 왜 필요한지. 99.99퍼센트의 매칭률과 그 모든 사실을 있는 그대로 다 털어놓았다.

    막상 이야기를 꺼내자 말을 이어가기는 생각보다 쉬웠다. 해진은 덤덤한 얼굴로 조용히 환의 이야기를 들었다.

    신아연과 만난 이야기를 할 때 환은 이유를 알 수 없게 잠깐 긴장했지만, 정작 해진의 얼굴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당신 말대로 임신한 게 맞다는 이야기를 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긴장할 때는 유 회장이 해진을 찾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였다.

    “설령 출국하는 데에 성공하더라도 유 회장은 해진 씨를 찾아낼 겁니다.”

    해진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역시 예상대로 출국을 염두에 두고 있던 모양이었다. 모르는 나라에서 제대로 된 비자도 없이 아등바등 살아갈 강해진을 생각하자 환은 다시 마음이 갑갑해졌다.

    “대체 무슨 대책으로 무작정 한국을 나가려 한 겁니까? 제대로 된 비자도 없이 오래 체류할 수도 없을 텐데.”

    저도 모르게 울컥 화를 내버렸다. 심각하게 듣고 있던 해진의 얼굴이 금세 뾰로통해졌다.

    “누구 때문에 도망치려는 건데요, 내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어쨌든, 알겠어요. 외국으로 나가도 내가 위험하다는 거잖아요. 한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위험하고.”

    “방법은 하나입니다.”

    유 회장은 키스틸의 이름에 누가 되는 자가 있다면 어떻게든 치워버릴 사람이었다. 설령 그게 친손자라 하더라도.

    “강해진 씨가 내게 적대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은 채로, 내 곁에 있으면 됩니다.”

    해진의 시선이 천천히 아래로 떨구어졌다. 방금 전까지 뾰족하게 날 서 있던 눈이 힘없이 처진 것을 보자 또 마음 한편이 바삭바삭 부서지는 듯했다.

    “미안합니다.”

    환이 말했다. 그는 해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기가 힘들었지만, 눈을 피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정작 눈을 맞추지 않은 쪽은 해진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만 싶었다. 이 미친놈이 축사까지 찾아오기 전만 해도, 사실 희망이 있을 거라고 믿었다. 지금 생각하니 바보 같지만 말이다.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없으니 마루투어의 팀장에게라도 연락을 해서 어떻게든 비행기표를 마련해보려 했다. 외국으로 나가서 오래 있을 것도 아니고, 관광비자가 다 될 때까지만 버티다가 돌아와서 상황을 보고 다시 계획을 짜려 했다.

    그런데 이 빌어먹을 자식이 기어코 저를 찾아내서, 기껏 한다는 말이 미안하단다.

    해진은 또 그 소리냐고, 어차피 사과해도 받아주지도 않을 거라 말하려고 처져 있던 눈을 들고 그를 쏘아보았다.

    그리고 저를 보는 이환의 얼굴을 마주하자 할 말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미안합니다. 이 말을 꼭 해야 했습니다.”

    그가, ‘그 이환’이 제게 사과를 하고 있다. 진심을 가득 담아서. 받아주지 않으면 눈물이라도 당장 쏟아낼 것 같은 얼굴로.

    해진은 그 사실이 낯설었다. 그때는 정신이 없어서 몰랐지만, 지금 제게 사과하는 환의 모습은 거의 충격적이기까지 했다.

    ‘이게 정신이 나갔나…….’

    원래도 미친놈인데 더 정신이 나가면…… 나는 완전 망한 거 아닌가? 해진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인상을 구겼다.

    “사과 그만하세요. 보기 싫으니까.”

    ……보기 싫다는 말은 너무했나, 쥐꼬리만큼 후회를 하는데 웬걸, 이환이 정말로 입을 싹 다무는 게 아닌가.

    헛소리를 더 하면 그땐 소리라도 지르려고 했는데, 헛소리는커녕 이환은 얌전히 앉아서 그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그 모습이 마치…….

    ‘꼭 명령 기다리는 강아지 같네…….’

    라고 생각한 해진은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미쳤나 봐. 강아지는 무슨. 개새끼겠지.

    “저, 물이나 좀 더 주세요.”

    한술 더 떠서 이번에는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물컵을 즉각 갖다 바치는 게 아닌가. 심지어 그냥 건네주는 것도 아니고, 해진의 입까지 들이밀었다.

    “제가 마실게요……!”

    한 마디를 하자 이번에는 또 얼른 손을 치운다.

    해진은 물을 홀짝이며 슬그머니 환의 눈치를 보았다. 시선은 제게서 떨어질 줄 모르고, 몰골은 눈이 퀭하고 뺨은 홀쭉해서 말이 아니었다.

    아주 조금, 인간이 인간에게 가질 수 있는 연민이 쥐똥만큼 올라왔다.

    “……잠은 좀 잤어요?”

    이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해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좀 주무세요.”

    그러나 퀭한 눈에 담긴 불안감은 지워질 줄을 몰랐다. 아마 저 때문이리라고, 해진은 짐작할 수 있었다. 도망이라도 갈까 봐 그러나 보지.

    “도망 안 갈게요. 주무세요.”

    물론 이 미친놈의 옆에 있는 것은 싫지만, 그렇다고 또 도망갔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지는 건 더더욱 싫었다. 이환의 말대로라면 유 회장은 충분히 저 하나쯤 없앨 수 있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일단은 이환의 말대로 당분간은 여기 틀어박혀 있는 수밖엔 없었다. 물론 이 개자식이 좋아서 붙어 있는 건 절대 아니지만.

    여전히 침울한 표정을 하고 있던 이환이 느리게 입을 열었다.

    “나를…….”

    피곤함이 뚝뚝 묻어나는, 힘이 하나도 없는 목소리다.

    “나를 마음껏 싫어해도 되고, 내게 욕을 퍼부어도 되고, 나를 때려도 됩니다. 다만 이번만큼은, 이곳에서 나가지 말아주십시오.”

    느리게 이은 말투는 명징하고, 그 내용도 명확했으나 자신감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았다. 해진은 문득 그가 자신을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굳은 해진의 얼굴을 의식한 것인지, 이환이 다소 안달이 난 투로 자세를 고쳤다.

    “아니, 말을 정정하죠. 당신은 이곳에 갇혀 있는 게 아닙니다. 가고 싶은 곳은 얼마든지 가도 됩니다. 다만 도망치지만…… 말아달란 겁니다.”

    힘겹게 말을 뱉은 환이 쩍쩍 갈라진 입술을 혀로 핥았다.

    “절대 강해진 씨를 또 감금한다거나, 그런…….”

    “알아요.”

    듣다 못한 해진이 그의 말을 끊었다.

    “제가 도망치면 전무님께서 저를 보호하지 못한다는 뜻이잖아요. 이해했어요.”

    그제야 환의 얼굴에 안도감 비슷한 것이 옅게 떠올랐다.

    “어차피 제 배 속에 있는 아이도 필요하실 테고, 저도 이 몸으로 나다니긴 힘들겠죠. 걱정 마세요.”

    첫 마디에 이환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었으나 해진은 그것까지는 보지 못하고 도로 침대에 누웠다.

    이불을 끌어당기는 손목이 하도 힘이 없어 보여서 손을 뻗은 환은 미처 그에게 닿지 못하고 빈주먹을 쥐었다.

    “……전 좀 더 잘게요……. 걱정 말고 전무님도 좀 쉬세요…….”

    작아진 목소리에 뒤이어 숨소리가 느려졌다. 그제야 환은 참았던 숨을 길게 내쉬었다. 자신이 숨을 참고 있는지도 알지 못했다.

    강해진이 누워 있는 곳은 그의 침대였다. 다시 말해, 그가 자신의 공간 중에서 가장 청결하게 생각하는 곳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당연히 제집 침대에 타인을 눕히는 행위는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호텔이면 모를까.

    그러나 지금 제 침대를 침범한 강해진을 보고 있자니 그딴 것은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그는 다만, 강해진에게 제 침대가 불편하지는 않을지 따위나 생각하고 있었다.

    다행히도 해진은 다시 잠에 빠져드는 듯이 보였다. 저보다 작은 어깨가 규칙적으로 오르내리는 것을 오래도록 보던 환은 침대 아래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았다. 그리고 벽에 관자놀이를 대고 졸기 시작했다.

    해진이 잠깐 눈을 떴을 때, 이환은 슈트 차림 그대로 - 다행히도, 아니, 당연하게도 자신이 소똥을 던졌던 그 슈트는 아니었다 - 벽에 몸을 기댄 채 졸고 있었다.

    ‘거참, 편하게 누워서 자지, 궁상은…….’

    아무리 보아도 이환의 모습이 좀 낯설었다. 이렇게 저답지 않은 궁상을 떨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뭐, 사람이 그동안 바뀌어봤자 뭐가 바뀌겠어.’

    고작해야 일 년도 되지 않았는데.

    해진은 다시 몸을 모로 하고 누워 눈을 감았다. 방이 어찌나 고요한지, 이환의 숨소리까지 들렸으나 애써 무시했다.

    * * *

    이왕 환의 집에서 지내기로 했으니, 해진은 이곳에 익숙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건강은 몰라도 적응력에는 자신이 있는 해진이었다. 하지만 ‘이환과 지내는 일’은 도통 익숙해지질 않았다.

    아침에 일어나면 언제나 이환의 모습이 보였다. 어떤 때에는 벽에 기대어서 졸고 있는 모습이기도 했고, 어떤 때에는 테이블 앞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는 모습이었다.

    “몸은 좀 어떻습니까?”

    환은 잠에서 깬 해진에게 다가와 그 커다란 손을 뻗어서는 이마에 손을 얹고 체온을 체크했다.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남아 있지 않다고는 하지만, 서늘하고 커다란 손이 닿는 감촉만은 좋았다.

    “조금이라도 안 좋으면 바로 이야기하십시오.”

    속삭이듯 낮게 말하는 목소리. 제 배 속에 아이가 잘못될까 봐 그러는 것일 테지. 해진은 별말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배 속의 아이를 챙기는 그를 보며 서운해할 필요도 없었다. 서운함은 상대방에게 조금이라도 기대가 남아 있을 때에나 가지는 감정이니까.

    이전에 잠깐 왔을 때도 느낀 거지만, 환의 집은 으리으리한 걸 떠나서 썰렁했다. ‘무서우면 전화하라’고 말하던 때가 떠올라서 해진은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 닭도리탕을 먹으면서 이환이 제게 아이를 낳아달란 말을 처음 했지. 농담인 줄만 알았는데. 개자식.

    이환은 깨어난 해진에게 새 옷과 먹을 것을 갖다 주고는 필요한 것이 없는지, 가고 싶은 곳은 없는지 재차 물었다.

    “일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원하시는 건 편하게 다 이야기하십시오. 강해진 씨가 바라는 것이라면 제힘으로 모두 해결 가능하니 말입니다.”

    오만함은 여전한 걸 보니, 이환은 이환이다 싶었다.

    “제가 아마존에라도 같이 가자고 하면 어떡하시려고요?”

    곧바로 굳어버리는 얼굴을 보니 조금 웃겼다.

    “됐어요. 그냥 먹을 거, 입을 거나 챙겨줘요. 제 블루레이랑 노트북도 돌려주시고요.”

    필요한 건 그것밖에 없었다. 즐겨보는 탐험 다큐멘터리와 제 평범한 입맛에 맞는 평범한 음식.

    “다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 뻔뻔한 자식이 뭐라고?

    “……그걸, 다 버렸다고요?”

    황당해서 되묻자 이환의 눈썹이 한 번 사납게 꿈틀거렸다.

    “다시 사주면 될 것 아닙니까.”

    “한정판도 있단 말이에요!”

    “그것도 다시 사면 되는 것 아닙니까?”

    정말 돈이면 다 해결된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이환은 며칠 뒤, 해진이 적어준 목록대로 약 세 박스 정도 되는 블루레이 디스크를 가지고 왔다. 한정판을 포함해서 말이다.

    일전 키스틸 호텔에 갇혀 있을 때처럼, 해진은 하루 종일 좋아하는 다큐멘터리나 책을 보는 것으로 시간을 보냈다. 다른 점이 있다면 곁에 이환이 있다는 것이었다.

    전에도 몇 번 보았던 박 비서라는 사람이 간혹 찾아와서 이환과 일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누곤 했다.

    그리고 이환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해진의 곁을 지켰다. 즉, 다시 말해 집을 벗어나지 않았다.

    시간이 남아도나, 했지만 그것도 아닌 모양이었다. 안경을 쓴 채로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계속 누군가와 통화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거참, 도망 안 간다니까 사람 말 못 믿네.’

    물론 두 번이나 도망가긴 했지만, 지금은 사정이 다르잖은가. 저도 죽고 싶진 않았다.

    억울하게도 이환은 여전히 멋있었다. 특히나 은테 안경을 끼고, 와이셔츠 소매를 반쯤 걷은 채로 모니터를 들여다보는 모습은 이전보다 더 멋있어 보였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팔뚝에 돋은 힘줄과 넓은 가슴, 각진 어깨 라인을 봐도 더 이상 설레지는 않았다. 조각품이나 그림 같은 것을 보고 감탄하는 것과 같은 이치랄까.

    일하는 그를 멍하니 보고 있으면 시선이 맞닿곤 했다. 그러면 이환은 늘 똑같은 질문을 했다.

    “필요한 것 있습니까? 아니면 나가고 싶은 곳이라도?”

    해진은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또 ‘아마존’이라고 대답하면 질색할 거면서, 하는 생각을 속으로만 하며 말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침묵 속에서 각자의 하루를 보내었다.

    이환은 생각보다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데이트할 때의 모습은 그가 꾸며낸 것일 테니, 아마 지금 눈앞에 있는 그의 모습이 진짜 이환에 좀 더 가까울 터다.

    그리고 적어도, ‘자신을 감금할 의사는 없다’는 환의 말은 사실처럼 보였다.

    하루는 낮잠을 자다가 저녁때가 되어서야 잠에서 깨어났다. 맛있는 냄새에 침실에서 나가보니 환이 요리를 하고 있었다.

    보통 요리사가 직접 와서 밥을 해주고 가거나 완성된 요리가 트레이 같은 것에 담겨 오곤 했기 때문에 그 모습이 조금 낯설어서 주방 입구에 선 채로 등을 구경했다.

    와이셔츠 위에 앞치마를 맨 등은 움직일 때마다 근육이 조금씩 꿈틀거렸고, 날개뼈의 움직임은 근육의 움직임보다 조금 더 컸다.

    요리를 하는 환의 등을 보던 해진은 문득 깨달았다. 이 광경이, 자신이 잠깐이나마 상상했던 그와 자신의 모습에 한없이 가깝다고.

    하지만, 그럼 뭐 해. 이제는 그에게 아무 감정도 없는데.

    “일어났습니까?”

    환이 그를 돌아보았다.

    “웬일로 직접 요리를 하세요?”

    “요리도 오래 하지 않으면 감을 잃어버리게 마련입니다. 저는 잊는 것을 싫어하고 말입니다.”

    이환다운 대답이라고 해진은 생각했다.

    “거기, 식탁 위에 있는 양파 좀 집어주시겠습니까?”

    해진은 식탁 위에 있는 양파를 집으려 걸음을 내디뎠다. 그 때, 참기 힘들 정도로 강한 구역질이 돌연 올라왔다.

    “우욱……!”

    입을 틀어막으며 허리를 꺾자 이환이 국자를 내던지고 달려왔다. 해진이 손을 내저어 보였다.

    “괘, 괜찮아요. 그냥…… 우욱!”

    “괜찮긴 뭐가 괜찮습니까. 기다리십시오. 닥터 최를 부를 테니.”

    뭘 의사까지 불러. 이 자식은 입덧이 뭔지도 모르나……. 해진은 다시 올라오는 구토를 억지로 참아보려 애썼으나 결국 또 우욱, 소리를 내며 구역질을 했다.

    “해진 씨!”

    무슨 죽을병 걸린 사람이라도 보듯 기겁을 하며 달려온 환은 해진에게 손을 뻗었다가, 이내 빈주먹을 쥐었다.

    ‘씨발, 결벽증은 여전하네.’

    그럼 그렇지. 사람 안 바뀐다니까. 해진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어요……. 휴지나 갖다 줘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환은 얼른 티슈와 물을 가져왔다. 그리고 놀랍게도, 손수 해진의 입가를 닦아주는 것이 아닌가. 방금 전까지는 손도 대지 못하더니. 해진은 놀라서 그의 손을 밀어내는 것도 잊었다.

    “좀 괜찮습니까?”

    코앞에서 묻는 얼굴에는 걱정이 뚝뚝 묻어났다. 해진은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괜찮아요.”

    구토의 원인이 음식 냄새 때문인 것 같아 일어서서 거실로 나갔다. 주방 쪽으로 시선을 한 번 주자 환이 얼른 달려가 반쯤 열려 있던 주방 창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소파에 몸을 기대앉았다. 환이 다가와 담요를 덮어주었다.

    “닥터 최를 호출해놨습니다. 금방 올 테니 조금만 버텨보십시오.”

    “그냥 입덧 같은데…….”

    아무리 생각해도 단순 입덧인 것 같은데, 뭘 이렇게 난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다시 구역질이 밀려드는 걸 보니 좀 심하기는 했다.

    “왜 강해진 씨는 아직도 내 말을 안 듣습니까!”

    양손에 각각 티슈갑과 물컵을 든 환이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해진은 어이가 없어서 빤히 올려다보았다.

    “지금 저한테 화내신 거예요?”

    딱히 뾰족하게 물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이 미친놈이 제게 언성을 높이다니, 양심이 정말로 없는 건가 싶어 놀라움에 물은 것이었다.

    환은 해진의 물음과 동시에 뻣뻣하게 굳더니, 이내 시선을 피했다. 그러더니 늘 날이 서 있던 눈꼬리가 축 처지는 게 아닌가.

    “……그런 뜻이 아닙니다.”

    어라. 해진은 잠시 구역질도 잊고 축 처진 이환을 멍하니 구경했다. 잘난 맛에 사는 놈이 제 한 마디에 끙끙거리는 모습이 제법 봐줄 만했다.

    그러나 즐거움도 잠시, 다시 구토감이 밀고 올라왔다.

    “우욱…….”

    러그에 토하기라도 하면 어쩌나 싶어 힘없는 몸을 도로 일으켜 화장실로 가려는데, 환이 그를 소파에 도로 앉혔다.

    “그냥 편하게 토하십시오. 내가 치울 테니.”

    ……아무래도 이환이 이상해진 게 분명했다.

    요리하던 닭도리탕을 죄다 치우고 환기를 한참 시키고서야 해진은 겨우 구역질을 멈췄다. 금방 온다던 닥터 최가 곧바로 도착하지 않아서 환은 있는 대로 성질을 부렸다.

    “아무래도 잘라버리고 다른 의사를 구해야겠습니다. 이딴 식으로 환자를 능멸하는 놈은 의사 자격도 없지.”

    “딱히 능멸한 것 같진 않은데요…….”

    정작 토한 내용물도 없는데 힘이 다 빠져서 해진은 소파에 늘어져 누웠다. 환이 앉을 자리가 없었지만 그딴 건 해진이 알 바 아니었다.

    이환은 물을 갖다 주겠다, 담요를 더 갖다 주겠다 하며 부산스레 굴었다. 날이 덥지도 않은데 담요를 몇 겹으로 쌓아주고서야 멈추었다.

    그리고 무언가 찾기라도 하는 듯이 거실을 왔다 갔다 했다. 해진과 눈이 마주치면 시선을 피했고, 말이라도 걸어보려 하면 도망치듯 주방까지 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할 말 있어요?”

    참다못한 해진이 묻자 이환은 턱을 매만지며 생각에 잠겼다. 무슨 말인지 몰라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와중에도 날카로운 턱선과 긴 손가락이 제법 근사했다. 속은 몰라도 거죽은 확실히 봐줄 만했다. 그래서 저도 홀라당 넘어간 거 아니겠나.

    “……앞으로 강해진 씨의 건강을 어떻게 관리해야 할지 고민 중입니다.”

    “무슨 뜻이에요?”

    어쨌거나 해진은 그가 원하는 대로 아이를 낳아줄 생각이었다. 이전에야 이 미친놈이 저를 애 낳는 도구로 쓸 거라 생각해서 도망쳤지만, 이제는 어쩔 수도 없잖은가.

    “물론 강해진 씨의 몸이 워낙 약하니 위험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 방안을 섬세하게 강구해야 하는 만큼…….”

    “알아듣기 쉽게 이야기하세요.”

    환이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해진 씨가 원한다면, 아이를 지우는 게 어떻겠냐는 말입니다.”

    무슨 말인지 단번에 알아듣지 못했다가, 이해하자마자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이제 와서…… 애를 지우라고요?”

    죽어라 도망치다가 결국 붙잡혀서, 이제는 방법이 없으니 낳아야겠다고 결심했는데, 이 개자식이 무슨 헛소리야.

    환이 가까이 다가왔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던 그가 팔짱을 끼고 한숨을 내쉬었다. 갑갑하단 투였다.

    “강해진 씨의 몸에 무리가 간다면 고려해볼 수 있는 방안 중 하나란 뜻입니다.”

    “내가 이거 때문에 인생 다 조졌는데…….”

    “강해진 씨.”

    말을 잘못 꺼냈음을 깨달은 환이 뒤늦게 그를 달래보려 했으나 해진의 귀에는 이미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럼 여태 제가 한 고생은 뭐란 말인가.

    “그런데 이제 와서 지우라고……. 이게 무슨 개소리야…….”

    보다 못한 환이 결국 담요 밖으로 빼꼼 나와 있는 해진의 손목을 쥐었다. 다소 억센 손길에 패닉하던 해진의 눈이 날을 세웠다.

    “해진 씨, 이참에 분명히 해두겠습니다.”

    낮게 깔리는, 쥐고 있는 손만큼이나 힘 있는 목소리. 해진이 동그란 눈을 깜박, 깜박, 하며 제 앞에 몸을 낮추고 앉은 환을 마주했다.

    “저는 강해진 씨에게 이제 뭔가를 강요할 생각이 조금도 없습니다. 다만 건강을 생각하면 고려해 볼 수 있지 않나 하는 것뿐입니다.”

    ……원래 이런 눈빛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하는 말보다는 올곧기 그지없는 눈빛에 홀려 해진은 멍하니 그를 마주했다.

    “지금 제게 중요한 건 아이가 아니라 강해진 씨라는 점 역시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낯선 그가 낯선 말을 하고 있었다. 그가 진짜 연인이었다면 달콤하기 그지없을 말이리라.

    “……왜요?”

    그러나 해진은 물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축사로 저를 찾아온 뒤부터 이환은 좀 이상했다. 제 몸뚱이가 필요하니까 일단은 숙여주는가 보다, 싶은 짐작이 무색할 정도로 말이다.

    이환이 양손을 해진의 얼굴 쪽으로 뻗어왔다. 무릎을 꿇은 채였다.

    뺨을 감쌀 것처럼 다가온 환의 손은 닿기 직전에 멈추었다.

    아주 잠깐, 해진은 그의 얼굴이 슬퍼 보인다고 생각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다.

    “나도 모르겠습니다.”

    환이 다시 손을 거두었다.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쨌든, 섣불리 결정할 문제가 아닌 만큼 닥터 최와 함께 상의를 해보면 좋겠군요. 저는 전적으로 강해진 씨의 의견을 따를 테니 그리 아십시오.”

    오만한 말투는 여전했다. 사람을 내려다보는 듯한 자세도. 그러나 어째서일까, 해진은 그의 눈빛만은 달라졌다 생각했다. 긴 속눈썹과 날이 선 눈매는 여전히 똑같은데.

    “……서재에 있을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십시오.”

    환은 서재로 들어갔고, 해진은 거실 소파에 누운 채로 몸을 웅크렸다.

    바람이 제법 부는지 전면창 바깥으로 멀리 보이는 은행나무 가지가 크게 흔들렸다. 이 오피스텔은 주변이 본래 한적하기도 하고, 방음이 잘되어서 주변 소음은 전혀 들리질 않았다.

    이제 완연한 가을이었다. 담요를 여러 겹 덮어도 덥지 않고, 선선한 기운이 발끝부터 느껴지는 걸 보니 말이다.

    ‘처음 도망 다닐 땐 여름이었는데…….’

    그동안 배 속에 생긴 무언가가 죽지 않고 여태 버텼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해진은 깊게 생각하지 않으려 했다. 일단은 무사히 아이를 낳는 것만 생각해야지, 싶었다.

    끌어당긴 담요에서는 환의 체취가 났다. 어쩌면 여기서 오래 지내야 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서재 문을 닫은 환은 의자에 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괜히 말했나.’

    하지만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하는 저 조그만 몸뚱이를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이환은 고등 교육을 받은 성인이며, 임신을 한 오메가의 몸이 어떻게 바뀌는지 기본적인 상식 정도는 있었다. 당연히 그의 구토가 입덧으로 인한 현상임도 알았다.

    그러나 알면서도 강해진이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자마자 판단이 서지 않는 것이었다. 이성은 어디로 가고 그 자리를 강해진이 대신 채운 것만 같았다.

    “하…….”

    한숨과 조소를 섞어 내뱉으며 환은 노트북을 켰다. 메일을 확인하고, 각 부서로부터 온 보고서를 하나씩 다운로드받아 열었지만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행여 기분이라도 상할까 그의 몸에 손도 대지 못해 빌빌거리는 자신이 웃겼다. 이전에는 제가 먼저 더럽다며 닿지 않으려 했는데 말이다.

    강해진이 이대로 영영 저를 미워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자신이 어린아이 같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미움받을 짓을 하지나 말지. 멍청한 스스로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

    엄지와 검지로 미간을 꾹꾹 누른 환은 다시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어쨌든 회사는 제대로 굴러가게 만들어야 했다. 강해진과 태어날지도 모르는 아이를 위해 최상의 조건을 마련해주려면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환은 문득 한 가지를 떠올리고 박 비서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리 리조트들, 지금 비울 수 있습니까?”

    * * *

    닥터 최와 함께 온 산부인과 전문의는 해진의 몸을 좀 더 진찰해본 뒤 아이를 지우는 게 많이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의견을 조심스레 내놓았다.

    산모의 몸이 본래 건강하면 모를까, 지금 상태로는 난산이 아닌 이상에야 그냥 출산하는 게 수술보다 오히려 더 안전하다는 거였다.

    의사의 말이 끝나자마자 환은 해진에게 의견을 묻는 눈빛을 보냈다. 해진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저는…….”

    해진은 입술을 달싹거리며 오래 뜸을 들였고, 환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그냥 낳고 싶어요.”

    어차피 잡혀 온 거, 해줄 거 해주고 받을 거 받자는 마음이 컸다. 그리고 사실…… 막상 임신을 하자 아이를 없애고 싶지 않았다.

    모성애 같은 감정도 아니고, 형태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세포 덩어리를 동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해진은 끝까지 해보고 싶었다.

    어차피 이환 때문에 망친 인생이라면, 아이를 낳는 것만이 망친 인생을 조금이라도 되돌릴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뭘 해도 위험한 몸이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아이를 낳다가 죽을 수 있다면, 반대로 아이를 지우다가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약해빠진 몸이었다.

    그러나 이왕 이렇게 된 인생인데 후회 않을 만큼은 발버둥 쳐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환은 꼼꼼하게 몇 가지를 더 물어보았다. 해진의 건강 상태나 산모가 주의해야 할 점, 식이관리 등을 물어보고 심지어 어떤 것은 메모까지 했다.

    ‘내 참, 애가 그렇게 중요한데 뭐 하러 지우니 마니 말을 한 거야?’

    이렇게 호들갑을 떨 거면서 말이다. 하여튼 웃기는 놈이다.

    의사가 떠나고 해진은 다시 다큐멘터리나 보려고 했다. 이환의 거실은 이제 해진의 차지가 되었고, 가장 큰 소파에 드러누워 제법 큰 볼륨으로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어도 환은 잔소리를 하지 않았다.

    블루레이 플레이어 전원을 켜고 익숙하게 소파에 눕는데, 환이 가까이 다가와 뭔가를 내밀었다.

    “뭐예요?”

    “아무래도 도시는 환경이 좋지 않고, 제가 해진 씨를 케어할 시간을 좀 더 벌기 위해 이쪽으로 이동하는 게 어떨까 싶어서 말입니다.”

    그가 내민 것은 키스틸 산하의 리조트 안내 팸플릿이었다. 해진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종이를 받아 들었다.

    “손님들 많으면 오히려 시끄러워서 정신없지 않을까요? 저야 뭐, 어디든 상관없지만…….”

    “이미 다 내보냈습니다.”

    “……네?”

    키스틸이 운영하는 콘도와 리조트는 전국에 여러 개 있었고, 모두 성수기가 아닌 때에도 예약을 잡기 힘들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그런데 거기 손님들을…… 다 내보냈다고?

    “어디든지 강해진 씨가 원하는 지점으로 고르십시오. 이미 다 깨끗하게 비어 있습니다.”

    ‘미친놈인가…….’

    여름이 이제 끝났으니 성수기는 끝났다지만, 돈 안 벌 건가, 이 사람은. 물론 키스틸 레저가 리조트만 하는 것도 아니고, 서울에 있는 호텔이랑 얼마 전에는 해외에도 지점을 내긴 했다지만.

    “……제가 가고 싶지 않다고 하면요?”

    묻자 그 선택지는 생각지 못한 모양인지 눈을 한 바퀴 데굴, 굴린 이환은 이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미간을 구겼다.

    “왜 가고 싶지 않습니까?”

    “당연히 가고 싶지 않을 수도 있죠. 아무리 천국이라도 내가 싫으면 그만인데.”

    해진의 말에 환의 눈이 커다래졌다. 마치 충격을 받은 듯한 표정이었다. 뭔가를 깨달은 표정 같기도 했다.

    “뭐, 그래도 지내기에 편할 것 같긴 하네요.”

    기껏 손님들까지 쫓아내고 비웠다는데 안 가겠다고 하는 것도 좀 그렇고, 이 기회가 아니면 또 언제 호화롭게 지내보겠나 하는 생각도 사실 있었다. 기분 전환도 될 것 같고 말이다.

    “배불러오면 어디 놀러 가기도 힘들긴 할 텐데. 이참에 가죠 뭐.”

    “준비하라고 이르겠습니다.”

    돌아서며 휴대폰으로 전화를 거는 환은 어째 조금 들뜬 듯이 보였다.

    해진은 작게 한숨을 내쉬곤 다시 누워 블루레이 플레이어 리모컨을 들고 플레이 버튼을 눌렀다. 마카로니 펭귄이 뒤뚱거리며 걷는 장면이 82인치 화면에 가득 찼다.

    * * *

    며칠 지나 해진은 오랜만에 외출을 했다. 이환이 리조트에 가기 전에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하자고 해서였다.

    물건이야 사람 시켜서 구매하면 되지 않나, 생각했는데 환이 그를 데려간 곳은 마트 따위가 아니라 옷을 파는 부티크였다.

    “그동안 옷도 변변찮게 못 입고 다녔을 것 아닙니까. 이참에 새로 몇 벌 장만하는 게 어떨까 싶어서.”

    ……네 돈으로 비싼 옷 잘 사 입고 다녔다고, 몇 벌은 아직도 네 방에 있는데 보지 못했느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해진은 꾹 참았다.

    환은 해진에게 온갖 종류의 옷을 다 입혀볼 셈인 모양이었다. 당장 입을 일이 없을 정장을 비롯해서 구두와 액세서리까지, 매장에 비치된 옷은 죄다 한 번씩 입어보게 했다. 그걸로도 모자라 몸 곳곳의 사이즈까지 책정했다.

    “얼굴이 워낙 희셔서 뭐든 잘 어울리시네. 그런데 누구예요? 나한테 소개는 안 시켜줄 건가? 전무님이 누구 데려온 건 처음이잖아.”

    나이를 짐작하기 힘든, 숍 주인으로 보이는 남성이 해진과 눈을 맞춘 채 환에게 물었다.

    “……제가 보호하고 있는 사람입니다.”

    오래 생각하던 환이 대답을 얼버무렸다. 해진은 그 대답이 어쩐지 이환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적절하다고도 생각했다. 우리는 연인도 아니고, 다만 계약으로 이루어져 있다가 조금 뒤틀린 사이일 뿐이니.

    ‘그러고 보니 계약 조항들은…… 어떻게 되는 거지.’

    환의 러트에 맞추어 관계를 갖는다는 조항이 문득 떠올랐다. 계약상 세 번의 성관계 중 이행이 완료된 성관계는 사실상 한 번밖에 없었다.

    “코발트블루는 너무 경박해 보이고, 아무래도 이 컬러가 좋을 것 같군요.”

    환은 해진이 입을 맞춤 정장을 주문하는 중이었다. 마음에 드느냐, 색은 어떤 색이 좋으냐 하는 물음은 한 번도 제게 하지 않고 그저 자신의 판단으로 모든 것을 주문하는 환은 이전에 해진이 아는 독단적인 모습 그대로였다.

    그럼에도 환은 확실히 변했다. 최근 몇 주 동안의 행보를 보면 변했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 이환은 해진에게 무척이나 지극정성이었다. 직접 요리를 해서 갖다 바치지를 않나, 밤새도록 제 곁을 지키지를 않나.

    심지어 어느 날에는 자다 눈을 떴는데 이환의 모습이 있었다. 침대에서 - 분명 이 침대도 이환의 침대가 분명했다 - 조금 떨어진 곳에 웅크리고 앉아서 잠든 그의 모습은 해진에게 다소 충격을 주었다.

    그 자존심 세고 답 없는 놈이 찌그러진 개뼈다귀처럼 쭈그리고 있는 꼴을 볼 때마다 해진은 조금 우스웠다.

    ‘이렇게까지 안 해도 도망 안 가고 애도 낳아줄 건데…….’

    생각을 잇던 중, 주인과 대화를 나누던 환이 그를 돌아보았다. 마침 하품을 길게 하던 해진이 입을 딱 닫았다.

    “피곤합니까?”

    “아뇨, 그냥 조금 졸려서…….”

    “안 되겠군요. 집으로 돌아갑시다.”

    괜찮은데, 하고 말을 덧붙였으나 환은 손을 내밀었다. 잡으라는 뜻인가? 손잡는 것도 싫어해서 소독제까지 바르던 인간이 의외네, 생각하며 손을 내미는 순간 이환의 손은 그의 손바닥을 지나쳤다.

    불쑥 밀고 들어온 환의 손은 그대로 해진의 등을 감쌌다. 다른 손은 해진의 허벅지 아래로 파고들었다.

    “잠깐……!”

    보는 눈도 개의치 않고 해진을 안아 든 환은 그대로 부티크를 나섰다. 거리로 나가자마자 해진은 제 얼굴을 가렸다. 이 자식은 수치도 모르나 봐.

    “저 걸을 줄 알거든요?”

    “아직 절대적으로 안정을 취해야 한다 했습니다.”

    안정은 개뿔이. 이렇게 번쩍번쩍 드는 것에 놀라 애가 떨어질 지경이었다.

    해진을 소중한 짐짝처럼 조수석에 앉힌 환은 곧장 운전석을 열고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기사를 데리고 나오지 않은 게 좀 의아했다.

    “먹고 싶은 것은 없습니까?”

    해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먹으면 또 입덧이나 할 것 같았다. 환이 상체를 뻗어 해진의 안전벨트를 채워주었다. 해진의 코끝에 환의 귀가 닿을 듯이 가까웠다. 그에게서 좋은 냄새가 났다. 해진이 잊고 있던, 익숙한 향이었다.

    ‘위스키 향…….’

    한때는 이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러나 지금은 별 감흥이 없었다. 알파의 페로몬이니 그래도 어느 정도 반응이 있어야 하는데. 임신을 한 상태여서 그런가.

    “피곤하면 눈을 조금 붙이십시오. 도착하면 깨우겠습니다.”

    피곤하지 않다고는 했지만 막상 등받이에 머리를 대니 조금 졸린 듯하여 해진은 눈을 감았다.

    집에 도착하자 환은 해진을 태웠던 것처럼 몸소 그를 안고 내렸다. 잠깐 잠들었던 해진은 “제가 걸어도 되는데…….” 웅얼거리며 환의 가슴에 얼굴을 비볐다. 저를 내려다보는 시선이 유독 짙은 것은 알지 못했다.

    해진을 안고 들어온 환은 조금 머뭇거렸다. 뭔지는 몰라도 망설이는 기색이었다.

    “그냥 내려주세요. 제가 침대까지 걸어갈게요.”

    말하자 여전히 망설이던 환은 해진을 슬그머니 내려놓았다. 하여튼 웃긴 놈이라니까. 그대로 침실로 들어가려는데, 환의 말이 그를 붙잡았다.

    “……씻지 않고 그대로 잘 겁니까?”

    “뭐, 더러운 곳 갔다 온 것도 아닌데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고 돌아보니 웬걸, 환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어 있는 게 아닌가.

    ‘이 자식, 결벽증은 아직도 못 고쳤네.’

    알겠다고, 씻으면 되지 않느냐고 말하려는데 이환이 그의 손목을 덥석 쥐었다.

    “제가 씻겨드리겠습니다.”

    혼자 씻어도 되는데…… 말할 새도 없이 환이 그를 다시 번쩍 안아 들었다. 이건 뭐, 바닥에 발을 못 딛게 할 셈인가.

    환은 욕조를 몇 번이고 닦은 뒤에 물을 받으며 온도를 꼼꼼하게 맞추었다. 해진의 손을 끌고 와서 직접 물에 닿게 하며 뜨겁지는 않은지 재차 물어보았다.

    해진은 좀 부끄러웠다. 이미 할 거 다 한 사이에 알몸 보이는 것쯤이야 그렇게 부끄럽지는 않지만, 그 이환이 저를 씻겨준다는 사실이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애도 아니고, 목욕 시중이라니…….

    “왜 이렇게 저한테 잘해주시는 거예요?”

    속옷까지 모두 벗은 뒤, 물에 들어가기 직전에 해진이 물었다. 손은 저도 모르게 아랫배를 가리고 있었다. 이 아이 때문이겠지, 알면서도 묻는 자신이 우스웠다.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환의 대답은 의외였다.

    “나도 내가 왜 이런지 모르겠습니다. 왜 자꾸…….”

    걷은 와이셔츠 소매 끝이 조금 젖어 있었다. 그의 흐트러진 모습이 아직도 해진에게는 낯설었다. 제 앞에서 말을 잇지 못하는 저 얼굴도.

    “왜 자꾸 당신에게 신경이 잔뜩 쏠려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지, 나도 모르겠습니다.”

    ……그야, 내 약한 몸으로 유산이라도 할까 걱정이 되는 것이겠지.

    해진은 그리 대답하는 대신 욕조 안으로 들어갔다.

    이환은 누군가를 씻기는 데에 몹시 서툴렀다. 해진은 자꾸 얼굴에 튀는 비누 거품을 열심히 손으로 닦아내야 했다.

    그럼에도 그를 밀치거나 할 수 없는 까닭은, 그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까지 노력하고 있어서였다.

    콧등과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보니 그가 참으로 애쓰고 있단 생각이 들었다. 평생 목욕 수발을 받았으면 받았지, 절대 누굴 씻겨준 적 없을 이가 제 앞에서 이러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하기도 했다. 그렇게 불안한가,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다.

    제 팔 위를 열심히 오가는 손목을 살짝 붙들었다.

    “걱정 마세요.”

    환이 무슨 말이냐는 투로 해진을 마주했다.

    “아이는 무사히 제 배 속에서 나올 테니까 걱정 마시라고요.”

    순간 환의 얼굴이 굳었다. 내뱉을 말을 고민하는지 입을 한 번 벌렸다가 닫은 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좁은 욕조에 그의 한숨 소리가 낮게 울렸다.

    “내가 지금 아이 때문에 이러는 걸로 보입니까?”

    “……그럼요?”

    잘난 미간을 꾸욱 구긴 그가 다시 짧게 한숨을 내뱉더니 샤워볼을 내려놓곤 손을 내밀었다.

    “됐으니 나와서 앉아봐요. 다리도 닦아줄 테니.”

    해진은 순순히 물에서 나와 욕조 테두리에 걸터앉았다. 언제 마련했는지 바닥에는 미끄럼방지 발판이 있었다. 온통 시커멓고 장식 하나 없이 넓기만 한 욕실에 하얀 고무판은 도통 어울리지 않는 소품이었다.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환은 놀랍게도 제 정장 바지 위에 해진의 발을 얹게 했다. 비싼 옷 다 젖을 텐데, 나중에 얼마나 저를 탓하려고 이러나 싶어 얼굴을 빤히 보는데, 신기하게도 딱히 불쾌한 표정이 아니었다.

    그사이 익숙해졌는지 환의 손길은 조금 능숙해져 있었다. 제 발을 꼼꼼하게 닦아주는 손길이 간질간질해 좋았다. 눈을 살짝 감고 온몸에 힘을 풀고 있자니 무릎까지 올라왔던 손이 느려지더니 어느 순간 멈추어버렸다.

    왜 손길이 멈추었나 싶어 반쯤 감았던 눈을 떴다. 이환이 벌게진 얼굴로 손을 멈춘 채 눈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왜요?”

    해진이 묻자 심지어 화들짝 놀라는 게 아닌가.

    “……아닙니다. 그…… 나머지는 해진 씨께서 직접 닦으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래요, 뭐.”

    갑자기 왜 마음이 바뀌었는지 알 수 없지만, 원래도 이환은 변덕이 심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러려니 하고 샤워볼을 받아 들었다. 이환은 엉거주춤하게 조금 허리를 숙인 채로 욕실을 나갔다. 수건으로 하체를 가리는 동작이 어색했다.

    ‘허리라도 아픈가…….’

    고개를 갸웃한 해진은 그가 두고 간 샤워볼로 하체를 마저 닦았다. 밖에서 뭔가 소리가 들렸지만 별일 아니겠거니 싶었다.

    * * *

    환은 해진을 데리고 약속한 리조트로 갔다. 미리 지시해둔 대로 리조트는 깨끗하고 인적 없이 조용했다.

    “우와……. 영화에서 보던 대저택 같은 거 혼자 쓰는 기분이에요.”

    여행사에서 일했으니 리조트에 많이 다녔지만 손님 없이 비어 있는 곳은 처음 와보는 해진이었다.

    “키스틸 호텔의 음식이 입맛에 맞았다고 들었습니다. 해진 씨가 특히 좋아하시던 셰프도 레스토랑에 늘 대기 중일 테니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 말씀하십시오.”

    “네? 저야 좋긴 한데……. 호텔은요?”

    “한국에 셰프가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걱정 마십시오. 호텔 레스토랑 따위보단 해진 씨 식사가 더 중요하지 않습니까.”

    해진은 속으로 경악했다. 저러다 호텔 말아먹는 거 아닌가, 뭐, 말아먹는대도 이미 평생 먹고살고도 남을 만큼의 돈이야 벌어놨겠지만.

    문득 배가 조금 당기는 느낌이 들어 아랫배에 손을 얹었다.

    ‘하긴, 누가 누굴 걱정할 때야.’

    누구 때문에 이 몸뚱이에 임신해서 개고생하는 나 자신이나 걱정해야지……. 건물 안으로 들어가는데 환이 그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살폈다.

    “괜찮습니까? 어디 안 좋습니까?”

    “아뇨, 그냥 좀 배가 당기는 기분이…….”

    “닥터 최!”

    해진의 말을 듣자마자 뒤를 돌아보며 빽 소리 지르는 목소리에 해진은 반사적으로 귀를 막았다. 참 내, 누가 보면 죽을병에라도 걸린 줄 알겠다.

    닥터 최와 산부인과 전문의가 몸 상태를 파악한답시고 한바탕 로비에서 난리를 부리고서야 해진은 방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환은 방에 들어오자마자 곳곳을 꼼꼼하게 살폈다. TV 위며 창틀을 손끝으로 쓸고 확인하는 꼴이 역시 결벽증은 어디 안 간다 싶었다.

    해진이 보기에는 깨끗하고 정리도 잘되어 있는데, 기어코 또 직원들을 불러다가 어디를 닦아라 무엇을 치워라 명령하는 통에 해진은 맘 편하게 쉴 수도 없었다.

    “저, 그냥 좀 조용히 쉬고 싶은데…….”

    보다 못한 해진이 조심스레 말을 꺼내자 그제야 직원들을 들볶는 일을 멈추었다. 키스틸 레저가 아니라 마루투어에 취직한 게 천만다행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리조트 생활은 호화롭고 편했다. 블루레이까지 모조리 설치해두어서 해진은 하루 종일 실컷 탐험 다큐멘터리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해진이 다큐멘터리를 보며 늘어져 있는 동안 환은 노트북으로 일을 했다. 가끔 박 비서와 회의를 한다고 로비로 나가기도 했다.

    문제는 입덧이었다. 리조트에 오고서도 해진의 입덧은 그치질 않았다. 일반적인 산부들은 슬슬 입덧이 끊길 시기인데, 간혹 이렇게 오래 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약한 몸뚱이가 평균치에 미친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해진은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먹을 것만 봐도 구역질이 치밀어오르는 고통은 그러려니 할 수가 없었다. 환은 그가 구역질을 할 때마다 불같이 화를 내며 의사를 욕했다.

    그나마 키스틸 호텔에서 왔다는 셰프가 요리한 음식은 조금이나마 먹을 수 있었다. 새 모이만큼이긴 하지만 그거라도 못 먹었으면 죽었을지도 모른다. 우스웠다. 갇혀 있을 때 먹은 음식이 저를 살리다니.

    “천천히 드십시오. 또 먹고 싶은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하고.”

    “……초콜릿……. 다크 말고 밀크…….”

    “알겠습니다. 바로 가져오라고 하죠.”

    이환을 종처럼 부려먹는 일이 아주 조금 즐거워서, 입덧의 고통을 잊을 때도 있었다.

    몸이 좀 괜찮아지면 침대에 다시 누워 다큐멘터리를 봤다. 환은 그가 걸어 다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물 한 모금도 침대에서 마셔야 했다. 산책을 하고 싶다고 하면 번쩍 안고 나가려 했다.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하지만 그래도 불안한 모양이었다.

    다행히 감촉이 끝내주는 토퍼 위에 누워 있다 보면 위통과 식도통이 좀 나아지고 기분도 괜찮아졌다.

    ‘한량이 따로 없네.’

    환은 그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고 쉬는 데에만 집중하라 했지만, 그리고 먹는 게 없어서 조금만 걸어도 어지럽고 힘들기도 했지만, 하루 종일 하는 것 없이 먹고 누워서 놀기만 하니 좀 면구스럽기는 했다.

    ‘일거리 도울 거 있음 달라고 할까…….’

    급기야는 그런 생각마저 드는 것이다. 어차피 자기도 여행사에서 일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회의를 하러 나간 환이 오늘따라 도통 들어오질 않고 있었다.

    ‘몸이 좀 안 좋다고 했는데.’

    오늘 아침에 그의 안색이 영 안 좋아 보이기에 물었더니 감기 기운이 조금 있다고 했었다. 그러게 무리해서 일을 하더니만……. 나쁜 놈이라도 쥐꼬리만큼 걱정이 되기는 했다.

    아침부터 서둘러서 회의를 한답시고 창백한 안색으로 나가더니, 오후가 다 되었는데 여태 소식이 없었다. 그렇게 제 곁에 붙어 있지 못해서 안달인 양반이 말이다.

    해진은 시간을 확인한 뒤, 보고 있던 만화책을 덮고 일어났다.

    가을이 깊어가서 제법 날씨가 쌀쌀했다. 티셔츠 위에 재킷을 걸친 해진은 썰렁한 복도를 지나 로비로 내려갔다. 손님이 아무도 없는데도 직원은 있었다.

    카운터에 멍하니 앉아 있던 직원이 해진을 보고 벌떡 일어섰다. 표정이 능숙하게 바뀌는 걸 보니 제법 오래 일한 모양이었다.

    “고객님, 필요하신 것 있으세요?”

    “전무님 어디 가셨어요?”

    “아, 이환 전무님이요? 다이닝룸 쪽으로 가신 것 같던데요.”

    해진은 고맙다고 말한 뒤 발길을 돌렸다. 레스토랑 근처도 손님이 없어서 해진의 발소리가 울릴 정도였다. 환의 지시가 있었는지, 다행히도 음악이 은은하게 흘러나오고 대낮인데도 불을 환하게 켜놓아서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는 없었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늘은 레스토랑 쉬는 날이라고 했는데.’

    환의 지시 때문에 두 사람이 먹을 것을 만드느라 고생하던 셰프와 레스토랑 직원들이 오늘은 휴일을 맞이했다고 했다. 그럼 아무도 없는 레스토랑에서 이환은 뭐 하는 거람.

    “전무님?”

    사람이 아무도 없는 레스토랑의 한구석에 환이 앉아 있었다. 이마를 짚고 있는 모습이 멀리서 보아도 조금 심각해 보였다.

    해진은 살그머니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기척을 들은 환이 뒤를 돌아보았다. 해진은 그의 안색을 보자마자 기겁했다. 눈은 퀭하고 입술은 말라붙어서, 아침보다 상태가 훨씬 더 안 좋아 보였다.

    “전무님, 괜찮으세요?”

    “가까이 오지 마십시오.”

    다가가려는 해진에게 환이 손을 들어 보였다. 해진은 반사적으로 멈칫했다가, 다시 한 걸음을 내디뎠다.

    “많이 아파 보이세요. 최 박사님 모셔 올까요?”

    “오지…….”

    환이 말을 잇지 못하고 미간을 구겼다. 멀리서 봐도 그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워 보였다. 여전히 이 자식이 벌을 받았으면 좋겠고, 여전히 밉지만 그래도 해진은 조금 걱정되었다.

    “어디가 아파요? 병원 가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얼굴이 말이 아닌데.”

    몇 걸음을 더 내디딘 해진은 저도 모르게 소매로 코를 막았다.

    ‘……위스키 향…….’

    며칠 전에 목욕할 때 맡았던 것보다 훨씬 강한 알파 향이 온 레스토랑에 차 있음을 그제야 느꼈다. 아니, 자신이 들어와서 환의 알파 향이 짙어졌는지도 몰랐다.

    그때처럼 괜찮을 줄 알았는데, 임신이 안정기에 접어든 탓인지 해진의 몸도 페로몬에 반응했다. 가슴이 뛰고 아래쪽이 간질간질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해진은 그가 왜 가까이 오지 말라 했는지 깨달았다. 환은 러트를 맞은 것이었다.

    환은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꼴이었다. 해진은 숨을 참으며 가까이 다가섰다. 어쨌든 사람이 살고는 봐야지. 와중에도 일을 하려 했는지 테이블 위에는 노트북이 켜져 있었다.

    “저한테 팔 두르세요.”

    독한 알파 향이 숨 쉴 때마다 해진을 자극했다.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그의 팔목을 쥐려는데, 외려 해진의 손목이 환에게 붙들렸다.

    환의 손은 무척이나 뜨거웠다. 잡힌 손목이 타는 듯했다. 손을 뿌리치면 될 테지만 페로몬에 온몸이 짓눌리는 것 같아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 없었다. 그에게서 나는 위스키 향도 더 독해졌다.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

    환의 말에 해진이 눈을 들었다. 소름이 쭉 끼쳤다. 눈이 완전히…… 맛이 갔는데?

    잡힌 손목이 당겨졌다. 해진의 상체가 환을 향해 기울었다. 얼떨결에 환의 목에 코를 묻은 해진은 코끝에 닿는 짙은 페로몬에 저도 모르게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꼭 취한 것 같았다. 그의 페로몬이 위스키 향이라 더더욱 그리 느껴지는지도 몰랐다. 환에게 안긴 해진은 정신없이 그에게 몸을 비비고 목에다 코끝을 비벼댔다.

    환의 손이 그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다. 손이 뜨거워서 흠칫 놀랐다. 거부감보다는 안달이 났다.

    그런 해진을 읽었는지 환의 손길도 점점 다급해졌다. 여기가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리조트 내 레스토랑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도 못한 것 같았다.

    매칭률이 높다는 것은 어쩌면 단지 임신과 태아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닐지도 모른다고, 해진은 문득 생각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이 개새끼의 페로몬이 이렇게 좋을 리가 있을까.

    “하아…….”

    연신 들이마시기만 하던 숨을 힘겹게 내뱉었다. 환이 그의 등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하는 동작에서 미약하게나마 자제심이 느껴졌다.

    해진은 그가 저를 이곳에서 덮치기라도 할까, 여기서 옷이라도 벗길까 조금 겁이 났다. 그러나 웬걸, 환은 해진의 옷을 벗기기는커녕 크게 심호흡을 하더니 그와 눈을 마주쳤다.

    ‘동공…… 색깔 옅다…….’

    갈색 눈이 예쁘다고는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까이서 본 적은 없었다. 홀린 듯이 환의 두 눈을 구경하던 중 해진의 한쪽 뺨이 그의 커다란 손바닥에 감싸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입술이 다가왔다.

    환의 입술이 해진의 입술을 부드럽게 짓누르고 열었다. 이내 혀가 파고들어 해진의 입 안쪽을 부드럽게 훑었다.

    혀와 혀가 맞부딪쳤다가 얽히고, 치열을 한껏 유린했다가, 다시 정신없이 얽혔다가, 호흡을 참아가면서 키스는 오래도록 이어졌다.

    해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온몸이 노곤하게 풀릴 정도가 되어서야 자신이 이환과 키스를 하고 있단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환의 움직임은 느리지만 집요했다. 호흡을 빼앗기는 듯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머리가 띵했다. 환이 입술을 떼었다.

    “하…….”

    키스가 본래 이렇게 정신이 없는 스킨십이었던가. 달뜬 숨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힘겨운데 그 숨마다 환의 알파 향이 묻어나니 딱 죽을 지경이었다.

    호흡이 겨우 조금 진정되나 싶을 때 환이 그를 번쩍 안아 들었다.

    “잠깐……!”

    해진을 안은 환은 그대로 레스토랑을 나섰다. 엘리베이터 앞까지 순식간에 도착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에 들어가서야 환은 해진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다시 입을 맞추었다.

    “읍…….”

    허리는 팔에 단단히 가둬지고, 허공에서 허우적거리던 손도 붙들렸다. 다시 입속을 파고드는 혀는 아까보다 훨씬 더 과감하고 뜨거웠다.

    일전 이환이 러트를 겪던 때가 떠올랐다. 그때 이 미친놈은 아랫도리를 발딱 세우고서 제 회사까지 찾아와 저를 추행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미친놈인 건 마찬가지인데, 이번에는 뭐랄까…….

    ‘왜 이렇게 안달이 났지…….’

    그땐 몸만 잔뜩 달아올라서 저 말고 어떤 오메가든 상관이 없단 투로 덤벼들었었는데, 지금은 좀 달랐다.

    갈구심. 해진은 이환의 거듭된 키스에서 느껴지는 낯선 무언가를 그렇게 정의하고 싶었다.

    어느새 해진은 방으로 돌아와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왔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복도를 지나 현관까지 오고서도 이어진 입맞춤은 침대에 도착하자 턱을 타고 몸으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쪽, 쪽, 소리를 내며 살갗에 부딪치는 입술도, 옷을 벗겨내는 손길도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환의 아래 깔린 채로 할딱거리던 해진이 그 버거움을 견디지 못하고 겨우 입을 열었다.

    “잠, 깐만요…….”

    할 거 다 해본 사이기는 해도 지금 이환은 러트가 온 알파였다. 맨 허벅지에도 느껴지는 단단한 남성에 해진은 겁부터 났다. 그와의 첫 섹스가 서럽고 아프던 기억이 있던 것도 컸다. 그런 짓거리는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기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내뱉은 제 애원 따위 무시하리라 생각했는데, 의외로 환은 동작을 뚝 멈췄다. 그리고 벌게진 얼굴로 해진을 마주했다.

    “저, 씻어야 할 것 같은데…….”

    결벽증이 있는 놈에게는 가장 좋은 변명거리이리라. 당장 어젯밤에만 해도 리조트의 위생 상태에 대해 불쌍한 직원에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던 그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해진의 마지막 기대는 부서졌다. 이환이 다시 그의 몸에 입술을 묻는 것이었다.

    “흐으……!”

    정말로 체취가 많이 날 텐데, 환은 그딴 것 개의치도 않는다는 투로 해진의 온몸을 물고 빨기 시작했다. 그가 알던 이환이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 자식이 드디어 머리가 돌아버렸나.

    “그렇게 너무, 읏, 세게…….”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해진은 입에서 나오는 대로 웅얼거리며 환을 억지로 밀치려 했다. 그러나 환은 꿈쩍도 않았다.

    조금씩 아래로 내려가던 환의 입술은 심지어 허벅지 안쪽과 해진의 은밀한 곳까지 스쳤다. 발기한 페니스에 환의 곧은 콧대가 스쳤을 때에 해진은 기겁했다.

    “지금 어디 입을 대는 거예요!”

    진짜 미쳤나 봐. 그러거나 말거나 환은 그의 페니스 주변에 꼼꼼하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심지어 냄새를 맡는 듯이 숨을 크게 들이마시기까지 했다. 해진은 경악했다.

    “전무님…….”

    하체를 움직이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가만있지도 못한 채 뻣뻣하게 얼어붙어 있자 환이 그제야 입술을 떼고 상체를 위로 가져왔다.

    눈은 여전히 퀭하고 입술은 말라붙어 꼴이 말이 아닌데도 이환은 여전히 잘생겨 보였다. 해진은 그 잘난 모습에 감동하기보다는 조금 억울했다. 왜 이 자식은 러트 중에도 잘났을까.

    “안 됩니까?”

    다 갈라진 목소리로 환이 물었다.

    “당신 몸 구석구석 죄다 입 맞추고 싶은데.”

    길고 예쁜 손이 해진의 가슴 위를 쓸었다. 온 신경이 쏠려서 손이 아니라 짐승의 꺼슬꺼슬한 혀끝이 스치는 것 같았다.

    “입 맞추게 해줘.”

    제게 부탁하는 환의 얼굴은 다소 무고해 보였다. 해진은 그래서 화가 났다.

    “제발…….”

    덧붙이는 말이 절절했다. 언제 또 이환이 제게 비는 소리를 들어보겠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사실, 갈라진 채로 내뱉는 환의 저음은 제법 섹시하게 들렸다. 그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 때문인지도 몰랐다. 혹은 제 몸을 훑어내리는 길고 곧은 손가락의 감촉 때문인지도.

    환이 그의 손을 쥐고 입에 가져갔다. 그리곤 해진의 손가락을 입술에 대고 훑듯이 스쳤다. 쩍쩍 갈라지고 다 말라붙은 입술 같은데, 이상하게도 감촉만은 끝내주게 부드러웠다.

    멍하니 올려다보는 해진의 시선을 허락으로 읽었는지, 환은 다시 그의 몸 곳곳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어깨와 가슴, 옆구리, 그리고 어떤 곳은 유독 오래 머물렀다.

    환은 해진의 몸 곳곳에다가 자국을 남기고 있었다. 해진은 이제 그에게서 벗어나길 포기했다. 아래 깔린 채 몸을 바르작거리며 차라리 코끝에 닿는 페로몬을 한껏 들이마셨다.

    “흐으…….”

    이전에는 애무고 뭐고 무식하게 들이박기 바쁘던 양반이, 오늘은 웬일로 이렇게 입질을 해댈까.

    환의 입술은 해진의 허벅지 사이를 공들여 애무한 뒤, 천천히 더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었다. 손으로는 해진의 허벅지를 슬슬 쓸며 혀끝으로는 그의 다리 사이, 고환 아래 회음부를 핥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혀끝은커녕, 제 손길도 씻을 때 말고는 닿지 않는 곳이었다. 씻지도 않은 몸에 코를 들이밀고 냄새를 맡는 것도 모자라서 이환은 이제 그의 아래쪽을 핥기 시작했다.

    억울한 점이 있다면 그는 손가락만큼이나 혀도 끝내주게 잘 쓴다는 점이었다. 회음을 정성 들여 핥는 촉촉하고 따뜻한 감촉에 해진은 조금씩 몸이 녹았다.

    “으응, 으…….”

    몸이 꼬이고 민망한 소리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어느새 흐트러진 환의 포마드 헤어가 흘러내려 해진의 페니스를 간지럽혔다.

    해진은 상체를 살짝 들고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회음에서 고환을 타고 올라온 입술이 결국 페니스를 답삭 물었다.

    “흡……!”

    혓바닥이 기둥을 부드럽게 얽고 핥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성기만 물렸는데도 온몸이 다 그의 입속에서 녹는 것만 같았다.

    이환은 혀끝을 세워 해진의 기둥을 긁듯이 핥아 올리고, 입천장에 힘을 주어 귀두 부분을 강하게 압박했다가, 다시 입 전체를 써서 페니스 전체를 자극시켰다. 금방이라도 사정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입에 싸면 난리를 부리겠지. 욕을 할지도 모른다. 해진은 이 개자식에게 엿을 먹이고 싶기도 했지만, 이 개자식에게서 욕을 듣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니 입에다 쌀 마음은 없었다.

    “처, 천천히…….”

    애원했지만 환의 혀는 더 사납게 해진의 것을 빨아댔다. 정말로 사정할 것 같았다. 해진은 급기야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콩콩 때리기 시작했다. 환은 꿈쩍도 않았다.

    “아, 으…….”

    해진은 이제 정말로 참기가 힘들었다. 쾌감이 아래쪽으로 쏠려 더 버틸 수가 없었다. 정말 빼내야 하는데…… 안달을 내던 중, 급기야 발기한 성기에서 반응이 오기 시작했다. 사정이 시작된 것이었다.

    “으읏! 흡! 흐으……!”

    남의 입에 정액을 싸본 적은 처음이었다. 하필이면 그 상대가 웬수 같은 결벽증 놈이다. 분명히 욕을 퍼붓고 난리를 부리겠지. 그땐 제 몸을 만진 장갑까지 버리고 갔지 않은가.

    각오하며 살며시 눈을 떠 보았다. 그러나 이환은 욕을 하지도, 난리를 부리지도 않았다. 꿀꺽, 그의 목울대가 한 번 오르내렸다.

    ‘……꿀꺽?’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몇 초의 텀이 지나고야 깨달았다. 해진이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미, 미쳤어요? 그걸 왜 먹어요?”

    “……입에 들어와서……. 딱히 맛은 없군요.”

    환이 여상한 투로 입가를 닦았다. 불쾌해 보이지는 않았다. 해진은 그가 완전히 맛이 간 게 아닐까 싶었다. 제가 아는 이환이라면 절대 제 정액을 마실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뭐, 단맛이라도 나는 줄 알았어요? 정액인데.”

    놀란 마음을 억누르며 겨우 말했다. 환이 그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서 자세를 고쳤다.

    “해진 씨에게서는 단맛이 나니까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환이 좀 미친 것 같았다. 원래도 미친놈이지만, 지금은 좀 다른 의미로…….

    “아……!”

    해진은 또 한 번 경악했다. 그가 제 구멍에 덥석 입술을 가져와서였다.

    “흣, 잠깐……!”

    환의 입술이 꼭 닫힌, 그러나 젖기 시작한 구멍을 오물거리며 애무하기 시작했다. 해진은 쾌감과 수치심에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누군가가 제 음부에 이렇게 입술을 묻은 적은 처음이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무려 이환이.

    환이 닫힌 구멍 위로 정성스레 입을 맞추길 여러 번,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그만 일어나달라고 말하려 상체를 든 해진은 그와 눈이 마주쳤다.

    눈만 치켜뜬 채로 구멍에 입술을 비비는 이환의 갈색 눈과 마주치자 몸이 굳었다. 완전히 맛이 간 눈동자에서 탐욕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하아…….”

    그가 해진의 아랫도리 냄새를 깊이 들이마셨다. 마치 꽃에 코를 파묻기라도 한 것처럼 정신없이 입술과 코끝을 그의 음부에 비벼댔다. 쉴 새 없이 문질러지는 콧날과 입술 때문에 해진도 잔뜩 흥분했다.

    그렇게 한참 동안 해진의 냄새를 들이마시더니 살짝 입술을 떼고 중얼거리는 말이 가관이었다.

    “이거 봐, 여기서도…… 단내 나잖아.”

    낮은 목소리에 숨결이 구멍에 간질간질하게 닿았다.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다음 순간, 해진은 제 아래로 무언가가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이환이 그의 아래에 혀를 밀어 넣기 시작한 것이었다.

    “읏……!”

    이미 젖은 아래쪽으로 혀끝이 파고들어 조금씩 안을 녹여갔다. 뻣뻣하게 굳어 있던 해진의 몸도 천천히 풀리기 시작했다.

    이환의 혀는 무척이나 꼼꼼했다. 제 냄새가 아주 대단한 향기라도 되는 듯이 깊이 들이마셨다가 내뱉으며 헐떡거리는 숨결이 아래쪽으로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신기한 일이었다. 이렇게 정신이 없는데 어떻게 감각만은 선명할 수가 있을까. 제 아래쪽을 핥고 빠는 환의 부산스러운 숨결이, 미친 듯이 파고들어 안쪽을 헤집는 혀끝이 모두 선명하게 느껴졌다.

    “으응, 후으으…….”

    해진의 신음 역시 조금씩 짙어져 콧소리를 내었다.

    환에게서 제대로 애무를 받아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물론 제 밑에 코를 박고 미친 듯이 핥고 빠는 이걸 애무라고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하아, 미치겠군…….”

    미치겠는 건 내가 미치겠다, 이 자식아. 기분이 좋은 것과는 별개로 아랫도리가 죄다 먹히는 것 같아서 창피하고 부담스러웠다. 특히 냄새에 집착하는 게…….

    ‘왜 이렇게 숨을 들이마시고 그래……. 창피해 죽겠네.’

    이런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환은 한참 더 코를 묻고서야 얼굴을 떼었다. 얼마나 숨을 들이마셨는지 잘난 얼굴이 시뻘겠다.

    ‘이제…… 끝난 건가?’

    그러나 뒤이어 제 두 다리를 활짝 벌리는 손길에 해진은 이게 끝이 아니라 시작임을 깨달았다. 환이 그제야 와이셔츠와 바지, 속옷을 차례대로 벗어 던졌다.

    상대는 러트가 온 알파였다. 그 사실을 새삼 깨닫자 제 위에 올라탄 이환이 사람보다는 짐승처럼 보였다.

    이 인간이 정말로 제 몸에 닿기도 싫어 진저리 치던 놈이 맞나. 아무리 봐도 믿기지 않았다. 반쯤 정신이 나간 얼굴을 하고 저를 내려다보는 표정에서 갈구심이 뚝뚝 묻어나는 게, 당장이라도 뭔가를 빌 것 같았다.

    환의 손이 그의 아랫배를 살짝 쓸었다.

    “안정기에 들었으니 성관계를 가져도 된다고는 했다만…….”

    하아, 하고 숨을 내뱉은 환은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래도 네 몸을 생각하면 나 하고 싶은 대로 박아댈 순 없겠지.”

    아뇨, 괜찮은데. 해진은 하마터면 그리 대답할 뻔했다. 그에게서 나오는 페로몬에 이미 몸이 절어버린 것 같았다.

    환은 바지 지퍼를 내리고 마침내 거대한 성기를 꺼냈다. 해진은 몽둥이 같은 그것을 보고 마른침을 삼켰다. 공포와 기대감이 동시에 들었다. 어쨌거나 그는 오메가였고, 발정이 온 알파를 보고 반응하는 것은 당연했다.

    흠뻑 젖은 입구에 환의 성기가 제대로 자리했다. 이전과 달리 환은 무척이나 조심스러웠다. 그의 입구를 성기 끝으로 부드럽게 문지르는 동작은 가히 정성스럽기까지 했다.

    바짝 안달이 난 성기는 입구를 뭉근하게 밀고 들어왔다가, 다시 슬며시 나왔다가, 또 안을 느리게 침범하며 간질간질하게 성감을 키웠다. 귀두 끝이 스칠 때마다 소름이 쭉쭉 끼치도록 좋았다.

    해진은 반쯤 들어온 그의 성기를 저도 모르게 조여댔다. 이것을 당장 제 몸 깊숙이 넣고 흔들어주었으면 했다. 젖은 구멍에서는 벌써 애액이 흥건하게 흘러나와 환의 성기가 빠져나갈 때마다 굵직한 거미줄을 만들어냈다.

    “흐으으…….”

    애원하는 티를 내며 허리를 조금 들어 올렸다. 각도가 달라지니 기분이 좋아서 아래쪽이 더 꽉 조여들었다.

    “하아, 해진 씨.”

    이환의 미간이 구겨졌다. 입술을 씹었다가 놓는 동작에서 조급함이 묻어났다.

    이전에 급하게 하던 섹스와는 차원이 달랐다. 러트를 맞은 환은 페로몬을 아낌없이 내뿜었고, 해진은 그것을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잔뜩 흥분했다.

    아래쪽이 어찌나 흠뻑 젖었는지, 그가 움직일 때마다 찌꺽거리는 소리가 아주 크게 났다. 애액이 회음을 타고 축축하게 흘러내리는 것도 느껴졌다. 귀두로 입구를 자극시키는 것뿐인데도 절정에 다다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환이 속도를 조금씩 붙였다. 해진의 몸이 조금씩 더 격하게 흔들렸다. 살살 한다고 하지 않았나……. 달뜬 눈으로 위를 보자 초점 없는 환의 눈과 마주쳤다. ……그냥 맛이 갔구나.

    느릿하게 귀두 쪽만 들어갔다가 나오던 기둥도 이제 거의 절반 정도를 들이밀었다가 나오길 반복했다. 젖은 소리는 점점 더 짙어졌다. 해진은 당장 절정에 다다를 것 같은 것을 겨우 참았다.

    “흐읏, 으응……. 아……! 아!”

    느긋함이 조금씩 사라지고 동작이 조급해짐에 따라 해진의 신음도 진득해졌다. 그는 자신이 이런 소리를 낼 수 있는지 처음 알았다.

    “으으응……. 흐읏! 아아! 천, 천히!”

    이 빌어먹을 알파 놈은 역시 성격이 이상한 게 분명했다. 그러니 천천히 하라고 하면 더 빨리 움직이지.

    이환은 해진의 허벅지를 양손으로 단단히 붙든 채 빠르게 허리를 치댔다. 절반쯤 드나드는 듯하던 페니스도 이제 거의 끝까지 들어오는 것 같았다.

    버겁고, 어지럽고, 눈앞에서 폭죽이 터지는 듯 산만했다. 온갖 감각이 아래쪽에서 들끓었다. 해진은 그제야 깨달았다. 이게 일반적인 오메가와 알파의 정상적인 섹스임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조금 서러웠다. 이 개자식이 그때는 저를 얼마나 막 대했는지 실감이 나서였다.

    그리고…… 변덕이 일면 다시 제게 그딴 식으로 대하겠지.

    눈을 꾹 감았다. 그러자 감각이 몇 배는 더 강해진 듯했다.

    해진은 언제 이 미친놈이 제 좋을 대로 저를 다룰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제 몸을 물건처럼 내던지고 더럽다며 욕을 할 것 같았다.

    와중에도 그의 알파 페로몬에 반응하는 자신이 싫었다. 몸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르고 머리털이 쭈뼛하게 설 정도로 기분이 좋은 게 난감할 정도였다.

    그가 또 저를 함부로 다룰까 두려워하는 것과 그의 페로몬에 몸이 뜨거워지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이환은 끝내주게 섹스를 잘했다. 물론 다른 사람과 해본 적이 없으니 비교 대상이 있지는 않지만.

    한참 움직이던 이환이 돌연 허리를 멈췄다. 후우, 낮게 내뱉는 숨소리가 침대를 타고 해진의 등까지 저릿하게 울렸다.

    “……자꾸 이렇게 조이면…… 못 참는데.”

    내가…… 조였다고……? 아니, 애초에 그쪽이 참긴 뭘 참았다고……. 생각할 틈도 없이 안쪽으로 뭉근한 쾌감이 들이닥쳤다.

    “흐윽……!”

    이환의 페니스가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와중에도 쑤셔 박는 동작에서 그가 아직 자제하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아니, 그는 거의 필사적으로 참고 있었다. 제 양쪽 허벅지를 붙든 손길과 꾹 감았다가 뜨는 눈, 구겨진 미간에서 느낄 수 있었다.

    안쪽을 부드럽게 긁으며 들어갔다가, 다시 빠져나오고, 그 잠깐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곧바로 다시 들어오며 이환의 페니스는 해진의 안쪽을 연신 자극했다.

    환의 시선이 해진의 몸을 훑었다. 그가 제 아랫배를 쓸어 손끝을 들어 보이고서야 해진은 자신이 어느새 사정한 것을 깨달았다.

    배를 적신 정액이 환에게도 일종의 기폭제가 된 모양이었다. 환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단단한 근육이 자리한 가슴이 곧게 펴졌다.

    숨을 들이마신 환은 그대로 몸을 조금 떨었다. 역시 몸 관리는 끝내주게 잘했다고, 와중에도 해진은 그의 상체를 보고 감탄했다.

    그리고 그 감탄은 길지 못했다. 환이 제 허리 아래 팔을 넣더니 상체를 일으킨 것이었다. 졸지에 삽입 각도가 달라지며 안쪽으로 압박감이 밀려들었다.

    “흡…….”

    해진의 몸이 환의 무릎 위에 안착했다. 반사적으로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른 해진은 조금 겁이 났다. 이제 저번처럼 멋대로 굴려고 하는 걸까…….

    환의 손이 제 뒤통수에 닿았을 때, 해진은 그가 제 머리채라도 잡을까 흠칫 떨었다. 그러나 웬걸, 커다란 손바닥은 여린 식물을 감싸는 듯이 부드럽게 해진의 머리통을 끌어당겨 환의 어깨에 안착하게 했다.

    뒤이어 해진의 귓바퀴에 환의 숨소리가 닿았다.

    “……하, 미치겠네.”

    아까부터 뭐가 자꾸 미치겠다는 건지. 섹스하다 미치는 사람은 웬만해선 없다고 말하려던 해진은 또 한 번 놀랐다. 제 어깨를 감싼 환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전무님?”

    살짝 불러봤지만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했다. 환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해진의 어깨를 붙든 채 아래서 위로 천천히 올려 치기 시작했다. 다시 전무님, 하고 부르고 싶은데 말은 나오지 않고 신음만 연신 터졌다.

    “흑, 으읏……!”

    환은 해진의 팔뚝을 연신 쥐었다가 놓았다가 했다. 아플 정도로 꽉 쥐었다가 해진이 아픈 티를 내기도 전에 제풀에 놀라 화들짝 놓았다가, 다시 못 참겠다는 듯이 꽉 쥐길 반복하는 손길에서 갈구심이 묻어났다.

    “……싶어…….”

    환이 그의 귀에 무어라 다시 속삭였다.

    “흣……. 네……?”

    “더 세게…… 박고 싶어…….”

    숨소리 섞인 목소리는 어쩐지 인내심이 바닥난 듯이 들렸다. 해진을 안은 채로 밑에서 위로 올려 치는 동작은 사실 아까보다 훨씬 느리기는 했다. 정말로 참고 있는 건가, 하지만 안정기라서 괜찮다고 하긴 했는데…….

    환이 그의 상체를 감싸듯 안고는 다시 침대 위에 눕혔다. 와중에도 허리는 계속 뭉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는 해진의 뺨과 목에 연신 입을 맞추며 조금씩 허리 움직임 속도를 더해 갔다. 딱딱해진 유두에 환의 손가락이 닿았다. 검지와 엄지로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굴리자 해진은 숨을 할딱할딱 몰아쉬며 흥분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환의 동작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해진은 반사적으로 깨달았다. 이 자식, 드디어 고삐를 놓았구나……. 그럼 그렇지. 제 팔자를 탓하며 밀려오는 쾌감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해진의 두려움과 달리 퍽, 퍽, 소리가 나도록 강하게 박아대는 동작은 다섯 번을 이어지지 않고 뚝 멈췄다.

    왜 갑자기 멈춘 거지? 해진은 감았던 눈을 뜨고 위를 보았다. 환의 얼굴이 제 코앞에 있었다. 끝내주게 잘나긴 잘난 얼굴을 보자 괜히 더 억울해졌다.

    그리고 환은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시선을 내린 채 해진의 몸을 보고 있는 듯했다. 그가 입술을 깨물었다가 놓았다.

    “……씨발…….”

    돌연 욕을 내뱉은 환이 다시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해진이 숨을 들이마셨다.

    “흡……!”

    이번에는 여남은 번 이어졌다. 그 짧은 여남은 번의 동작 동안 해진의 몸은 누가 쥐고 뒤흔드는 것처럼 격하게 흔들렸다. 쾌감이 온몸을 꿰뚫을 듯이 사납게 치솟았다.

    “하아, 하…….”

    다시 뚝, 동작을 멈춘 환이 몸 전체를 부르르 떨었다. 해진은 반쯤 반사적으로 아래를 조였다. 고작 여남은 번의 움직임으로 해진은 한 번 더 사정했다. 그 사실이 해진의 자존심을 조금 무너뜨렸다.

    움직임을 멈춘 것을 보니 환 역시 사정하려나, 싶었는데 환의 성기는 사정을 하는 대신 부풀기 시작했다.

    “잠, 깐만요, 흣, 전무님……. 이게 무슨…….”

    해진은 사실 이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이환이 노팅을 시작한 것이었다.

    후우, 들이마시는지 내뱉는지 구분되지 않는 숨소리가 해진의 귓가를 뜨겁게 했다. 해진은 제 안에서 부풀기 시작하는 살덩어리를 느끼며 거의 본능적인 공포를 느꼈다.

    “아, 으…….”

    “……잠시만…… 후, 미안합니다…….”

    안쪽의 압박감이 점점 더 강해졌다. 살을 찢어버릴 기세로 커지기 시작한 환의 성기는 해진의 안에서 조금씩 움찔, 움찔, 떨렸다. 환의 몸도 덜덜 떨리고 있었다.

    “미안합, 니다. 잠깐, 만, 이대로…….”

    미안하면 다냐, 이 자식아. 욕이라도 퍼붓고 싶은데 그보다 엉엉 울고 싶은 심정이 더 컸다. 아프기도 아프거니와 제 밑에서 커지고 있는 그의 성기가 무서웠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환은 움직이지는 않았다. 다만 온몸을 떨며 해진의 안에서 버티고 있었다. 연신 움찔거리는 걸 보니 참고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아니, 거의 필사적인 인내심을 짜내고 있는 듯했다.

    환의 성기는 조금씩 더 커졌다. 느낌 탓인지 몰라도 더 딱딱해지는 듯도 했다. 아래를 채운 어마어마한 감각에 결국 해진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흐윽, 아, 아파요…….”

    울먹거리는 소리를 듣자마자 환이 화들짝 놀랐다. 그는 얼른 해진을 마주하곤 커다란 손바닥으로 뺨을 감쌌다. 어떻게 달래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눈치 없는 아래쪽이 더 부풀었다. 해진은 더 울상을 지었다.

    “아, 흑……. 아파…….”

    사실 아픈 것과는 조금 다른 감각이었다. 쾌감이 꽉 들어차서 통증보다는 기분 좋은 게 더 컸다.

    그러나 두려움은 별개였다. 일전에 이환이 노팅을 할 뻔하다가 커진 성기를 억지로 빼낸 기억이 있어서 더 겁이 나는 것도 있었다.

    이환은 어쩔 줄을 모르며 해진의 몸 곳곳을 손으로 더듬었다. 지금 거기가 문제가 아닌데, 생각하면서도 당황하는 이환이 해진은 조금 우스웠다.

    “……미안합니다. 지금, 후, 빼겠습니다.”

    “네? 잠깐만요……! 아악!”

    안에서 잔뜩 커진 것을 빼려 하니 이번에는 정말로 아팠다. 환은 동작을 멈추고 다시 쩔쩔맸다.

    “미안합니다. 나도 모르게…….”

    와중에도 성기는 더 커지고 있었다. 해진은 이제 정말로 울고 싶었다. 흉흉하게 아래를 채운 이환의 성기도 야속하고, 이걸 무서워하는 자신도 우스웠다.

    움직이지도, 그렇다고 커진 것을 빼내지도 못한 채 이환은 심호흡을 한 번 길게 하곤 코앞에 있는 해진을 마주했다. 그가 한 손을 들어 해진의 머리칼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해진 씨.”

    “흐윽…….”

    그리고 해진의 코끝에 쪽, 입을 맞추었다.

    “나는 해진 씨를 아프게 할 생각이 없습니다.”

    예전에는 개소리라고 치부했을 말일 텐데, 진중하기 그지없는 눈을 마주하니 진심으로 들렸다. 해진은 젖은 눈을 깜박였다. 환의 손이 그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그러니 마음 편하게 가지고, 힘을 조금만 빼봐요.”

    하지만 그게 마음대로 되나……. 무식하게 커다란 걸 쑤셔 박고는 크기까지 부풀려 놓은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해진은 뾰로통하게 입을 다물었다.

    환이 그의 뺨과 목에 다시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부드럽고 느린 동작이지만 무척 섬세했다. 온몸이 녹는 것 같은 애무였다.

    일전의 섹스는 해진에게 수치심과 우울만을 주었다. 아무리 성에 무지한 해진이지만, 이환이 저를 함부로 다루었다는 사실 정도야 쉽게 알 수 있었다.

    이환에게 제 존재는 딱 그 정도라고 생각했다. 그냥, 아무렇게나 다루어도 되는 오메가. 그 이상은 아니리라 믿었다.

    그래서 해진은 지금 더 화가 났다. 제게 다정한 애무를 퍼붓는 이환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렇게 할 줄 알면서 하지 않았던 거니까.

    이렇게 다정하게 대할 수 있으면서 제게 상처를 주었으니까.

    이번에는 다른 의미로 눈물이 났다. 그가 제게 다정하다는 사실이 너무 서럽고 슬펐다. 진작 이렇게 해주지. 상처는 줄 대로 다 줘놓고.

    해진의 훌쩍거리는 소리를 듣고 환이 다시 그의 얼굴을 마주했다. 이번에는 입술을 맞대었다. 부드러운 키스가 이어졌다.

    혀를 섞으며 환은 해진의 어깨와 팔을 손바닥으로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울먹거리는 해진이 숨이 차지는 않는지 확인하는 듯 입술을 떼었다가 다시 맞붙이길 반복했다.

    거대하게 커진 이환의 성기가 부담스럽던 것도 잠시, 해진의 아래쪽이 조금씩 긴장을 풀기 시작했다. 흠뻑 젖은 아래에서 환이 부푼 성기를 조금 더 깊이 밀어 넣었다. 그리고 아주 느리게, 동작 하나마다 정성을 들여 움직였다.

    밀착한 몸 사이로 무언가가 전해지는 듯했다. 해진은 그게 무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여태까지 환이 제게 주었던 모멸감과 상처와는 완전히 다른 것임은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이환이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 것처럼, 저 또한 이환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말로 전하지 못하는 무언가가 제게 흘러들고 있는지도 몰랐다.

    갈색 눈이 코앞에서 해진을 마주하곤 눈빛의 깊이를 더했다. 이환이 움직임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미안합니다.”

    그는 몇 번이나 제게 미안하다 말했다. 듣기 싫을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축사에서 만난 이후로 그의 사과는 모두 진심으로 들렸다.

    그리고 지금은 더더욱.

    해진은 괜찮다거나 됐다고 말하는 대신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이환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다시 입술이 닿았다. 성급하지 않은 키스가 두 사람 사이를 채웠다.

    환이 다시 느리게 움직였다. 행여 해진을 다치게 할까, 그의 양손은 해진을 만지지 못하고 시트만 찢어버릴 듯이 말아 쥐었다.

    노팅한 성기가 마침내 그의 깊은 곳에 정액을 뿌렸고 그와 비슷한 때에 해진도 한 번 더 사정했다.

    환은 사정하고서도 입술을 떼지 않았다. 짙은 키스가 오래도록 이어졌다.

    섹스가 끝난 뒤 노곤하게 늘어진 해진을 이환이 안아 들었다. 욕실로 들어가는 그에게 매달린 채 해진은 칭얼거렸다.

    “그냥 자고 싶은데…….”

    “말이 됩니까? 온갖 체액을 다 뒤집어쓰고 그 꼴로 잔다고요?”

    내 정액 먹은 놈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하여튼 저놈의 결벽증은……. 해진은 꿍얼거리면서도 딱히 환을 뿌리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환은 욕조 물을 틀고 해진을 안에 앉혀준 뒤 목욕 용품을 꺼내었다. 이번에도 저만 씻겨주고 가버릴 기세이기에 해진은 욕조 한쪽으로 비켜 앉으며 물을 가리켰다.

    “그냥 같이 들어와요. 욕조도 큰데.”

    설마 결벽증 때문에 이것도 싫어하려나. 싶었지만 다행히도 이환은 조금 망설이다 욕조 안으로 들어왔다.

    둘은 나란히 겹쳐 앉았다. 해진이 그의 어깨에 뒤통수를 대고 노곤한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감싸는 온수의 감촉도 좋았고, 뒤에 닿는 환의 몸도 좋았다.

    문득 해진이 뒤를 돌아보았다. 이환의 벗은 상체가 물에 반쯤 잠겨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알몸을 제대로 본 적은 처음이었다.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떡 벌어진 가슴과 단단해 보이는 어깨가 탐이 났다.

    기대었던 상체를 아예 돌린 채 대놓고 몸을 감상하자 이환이 그를 보며 픽, 웃었다.

    “내 몸이 그렇게 마음에 듭니까?”

    “……뭐, 객관적으로 보기 좋은 몸이기는 하네요.”

    저 몸에 짓눌려보고 싶다며 몰래 야한 상상까지 한 적도 있으니 말이다. 보기 좋은 작품을 감상하는 것처럼 가슴과 어깨를 찬찬히 훑자 이환이 욕조 옆을 쥐고 일어섰다.

    “마음껏 감상하시죠, 그럼.”

    “아니, 그렇다고 일어날 것까진 없는데, 어우, 부담스럽게…….”

    물이 좌악, 쏟아지며 이환의 젖은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가운데에서 자기주장을 펼치는 우람한 살덩어리가 유독 눈에 띄었다. 어디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난감하면서도 끝내주는 몸매가 눈앞에 있으니 또 시선을 떼기가 어려워 해진의 두 눈이 요리조리 바삐 굴러갔다.

    “그건 왜 또 섰는데요? 난 아무 짓도 안 했는데.”

    “지금 해진 씨가 쳐다보고 있지 않습니까.”

    “쳐다보기 전부터 서 있었거든요?”

    투덜거리면서도 해진은 여전히 환의 몸에서 눈을 떼지는 못했다. 복근은 늘씬하고 허벅지는 근육 사이마다 골이 패서 군살이 하나도 없었으며, 각진 무릎마저 깎은 듯이 멋있었다.

    흠잡을 곳이 없는 몸이었다. 확실히 제가 보는 눈은 있었구나, 싶어 뿌듯하기까지 한 것이었다.

    정신없이 몸을 구경하느라 해진은 이환의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미처 눈치채지 못했다. 그가 슬그머니 몸을 다시 접으며 욕조로 들어왔을 때는 조금 아쉬움마저 느꼈다.

    두 사람은 마주 본 채로 잠시 침묵했다. 습기와 열기가 찬 욕조에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 들렸다.

    단둘이 있는 때야 흔하지만 이렇게 지척에서 마주 본 채로 침묵하고 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보통은 이환이 노트북을 붙들고 있거나, 해진이 다큐멘터리를 보고 있었으니.

    해진은 어색함을 무마하려 헛기침을 했다.

    “전에 잡지에서 봤는데요, 알파와 오메가 커플 사이에서 구강성교를 경험해본 사람은 63퍼센트밖에 안 된대요.”

    “의외군요.”

    기껏 생각난 게 섹스와 관련된 이야기라서 좀 난감했는데, 다행히도 환은 무던히 대답해주었다.

    “그쵸? 생각보다 더 많을…….”

    “더 적을 줄 알았는데.”

    뒤이은 말이 엇갈려 환과 해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를 마주했다.

    “그렇지 않습니까? 어디 더러운 오메가 구멍에다 입을 대고 빤단 말입니까.”

    정색하며 하는 말에 해진은 어이가 없었다.

    “……아까 제 거 빠셨잖아요. 제 거도 더러워요?”

    “해진 씨는 다릅니다.”

    “뭐가 다른데요?”

    보나 마나 대답 못 하겠지, 했는데 이환은 특유의 뻔뻔한 표정을 하곤 느긋한 동작으로 욕조에 등을 기대곤 잘난 저음으로 설명을 늘어놓았다.

    “강해진 씨는 내가 선택한 오메가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보통 사람이 아니죠. 일반적인 오메가가 내 짝이 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까?”

    와, 정말 개소리를 그럴싸하게 한다, 생각하며 해진은 혀를 내둘렀다. 생각이 얼굴로 드러났을 텐데도 이환은 해진의 반응 따위 개의치 않는다는 투였다.

    “그러니 강해진 씨도 좀 자부심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나 같은 알파와 거의 완벽에 가까운 매칭률을 가진다는 것에 대해 말입니다.”

    심지어 자랑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해진은 여전히 그가 개소리를 한다고 생각했지만, 어쩐지 마음이 조금 눅눅해지는 기분이었다. ‘평범한 오메가가 아니다’라는 말 때문일까.

    저는 특별할 것 없는 생을 여태 지내왔다. 고아라고는 하지만 머리가 굵어서 부모를 잃었고, 이후로는 성인답게 제 살길 찾아서 나름대로 잘 지냈다. 이환이 아니었더라도 모아둔 돈도 소액이나마 있고 말이다.

    그렇게 평범하게 지내다가 갑자기 이환을 만났고, 여기까지 왔다.

    그는 자신이 아직도 평범하다고 생각했다. 이환과 매칭률이 높은 오메가이건 아니건 간에 여전히 강해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평범한 사람일 뿐인데.

    달라진 건 이환과 저의 관계뿐이지, 해진 자신이 아니었다.

    혼자 고개를 숙인 채 생각을 잇는 중, 환의 손이 뻗어와 그의 손목을 쥐었다.

    “물론 당신의 그 가치가 내가 한 잘못에 대한 변명이 되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해진은 고개를 들었다. 예쁘다고 생각했던 이환의 갈색 눈이 저를 담아내고 있었다. 그와 시선이 맞닿는 순간 놀랍게도 모든 생각이 다 지워졌다.

    이렇게 올곧은 시선을 그가 준 적이 있던가. 주변에 저만 존재한다는 듯이 다정하고, 따뜻한…….

    환의 다른 손이 해진의 턱을 쥐었다. 얼굴이 가까워지고, 입술이 맞닿았다. 강압적이지도 일방적이지도 않은 키스가 이어졌다.

    조심스러운 환의 숨결을 느끼며 해진은 문득 이 입맞춤이 꼭 첫키스 같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상상했던,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첫키스 말이다.

    * * *

    리조트 생활은 편하고 아늑했다.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늦어도 한 시간 안에는 코앞에 대령이 되었고 전면창 밖으로는 가을을 맞아 화려해진 숲이 펼쳐져 있었다.

    해진은 숲에서 뛰어놀고 싶었지만 환이 극구 반대했다. 그가 요구하는 모든 것을 다 들어주는 환이었지만 숲으로 들어가는 것만은 절대 금지했다.

    “이제 안정기에 들어서기도 했고, 운동도 적당히 해줘야 된다고 했단 말이에요.”

    “위험천만한 숲을 들쑤시는 게 어째서 운동입니까? 리조트 내부 공원을 산책하는 것으로도 운동은 충분합니다.”

    “아, 그 쥐똥만 한 공원…….”

    시큰둥하게 맞받아치는데 순간 환의 표정이 굳었다. ‘쥐똥만 하다’는 말에 상처를 받은 모양인지 그답지 않게 눈썹까지 늘어뜨리며 시선을 떨구는 게 아닌가.

    “아, 알았어요. 그럼 대신 앞으로 내가 내킬 때 그냥 혼자 산책할래요. 전무님 일도 많은데 매번 방해하고 싶지 않거든요.”

    “하지만…….”

    뭐라 말을 덧붙이려는 환의 얼굴에 대고 손을 마구 휘저었다.

    “끝, 끝! 이걸로 합의 본 거예요?”

    혼자 마무리를 지은 해진은 빠른 걸음으로 토도도, 침대로 달려가더니 이불 속에 쏙 들어가 버렸다. 남겨진 환은 어쩔 수 없이 한숨만 내쉬었다.

    여전히 입덧 때문에 고생하고 있긴 해도 해진은 건강했다. 아이도 문제없이 자라고 있다고 했다. 리조트에는 산모에게 부족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걱정거리도 없어야 마땅하다만, 환은 자꾸만 마음이 쓰였다.

    축사에서 그를 찾아내어 데려온 이후, 두 사람의 생활은 얼핏 보면 예전과 다를 바 없이 보이기도 했다. 그러니까, 본인이 강해진을 제 호텔에 감금하기 전 연인 행세를 하던 예전 말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달랐다. 그 점이 찌꺼기처럼 둘 사이에 고여 있었다. 아니, 어쩌면 환에게만 고여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진심을 다해 그에게 몇 번이고 사과했다. 그리고 해진은 아직까지 단 한 번도 그에게 ‘괜찮다’, ‘용서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었다.

    ‘내가 사과한다고 해서 강해진이 반드시 받아줄 의무는 없다.’

    환은 알고 있었다. 제 잘못은 잘못이고, 해진이 저를 이제 와서 받아들이는 게 사과보다 더 어려운 일인 줄도 이제는 알았다.

    하지만 욕심이 자꾸 생기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일을 하다가 몇 번이고 그가 있는 쪽을 바라보지만 마주치지 않는 눈길을 느낄 때, 혹은 화상회의 때문에 오랫동안 곁을 비웠다가 돌아와도 마치 잠깐 화장실에 다녀온 것과 마찬가지로 저를 대할 때.

    강해진은 더 이상 제가 좋아서 헤실거리며 웃던 오메가가 아니었다. 그는 더 이상 제게 있어 약자가 아니었다. 강해진에게는 약점이 없었다.

    그리고 이환의 약점은 어느새 강해진이 되어버렸다.

    자신이 강해진의 전부가 되는 것은 바라지도 않았다. 그러나 아주 조금이나마 지분을 차지하고 싶은 마음은, 그것조차도 욕심일까.

    강해진을 이전처럼 되돌릴 수 없단 사실을 알았다. 둘의 관계 역시 되돌아가진 않을 터다. 그러므로 이것은 제 개인적인 욕심일 뿐인데, 알면서도 욕심을 내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래서야, 꼭 투정하는 어린애 같군.’

    부모는 어릴 때 잃었고 외조모는 단 한 번도 그에게 애정다운 애정을 준 적이 없으므로, 이환은 누군가에게서 애정, 혹은 정을 갈구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서 스스로가 낯설기도 했다. 강해진의 눈길 한 번, 손짓 한 번에 애가 타는 자신이.

    ‘아니, 어린애가 아니라 그냥 개인가.’

    아니다, 자신이 개라면 강해진이 예뻐해주기라도 하겠지……. 그는 마음씨가 고운 만큼 동물도 좋아하니까…….

    그래,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강해진이 키우는 개가 되기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러면 시시때때로 강해진이 저를 쓰다듬고 예뻐해줄 테니.

    환은 침대 쪽을 흘끔 바라보며 노트북을 덮었다. 웅크리고 누운 강해진이 침대 위 자그마한 언덕처럼 솟아 있었다.

    박 비서가 간부 화상회의에 참석하라고 닦달한 지 벌써 20분이 지났으니 이제 슬슬 레스토랑으로 내려가 보아야 할 것 같았다. 저 사랑스러운 것을 두고 말이다.

    방에서 나가기 싫다……. 출근하기 싫어하는 직원들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환은 드레스룸에서 화상회의에 참석하기 적당한 정장으로 갈아입은 뒤 다시 침실로 돌아왔다.

    노트북을 파우치에 넣어 옆구리에 낀 뒤 침대 쪽으로 다가갔다. 동그랗게 솟은 해진 쪽으로 손을 뻗었다가, 다시 거두었다.

    “……잠깐 회의하러 다녀오겠습니다. 필요한 게 있으면 직원들을 부르세요.”

    야무진 강해진은 제가 없어도 알아서 직원들을 잘 부려먹었다. 먹고 싶은 것을 요구하고, 필요한 것을 갖다 달라고 하고 말이다. 물론 고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먹다가 갑자기 입덧이 돋아 웩웩거릴 때마다 안타까워서 미쳐버릴 지경이지만.

    환은 떨어지지 않는 걸음을 억지로 떼어 방을 나섰다. 힘없이 터덜터덜 걸어 사람 없는 레스토랑에 도착한 환은 노트북을 켜고 화상회의에 참석했다.

    한 시간이면 끝날 줄 알았던 회의는 두 시간을 넘겼다. 회의에 잔뜩 집중하다 노트북을 닫고 나서야 환은 해진이 그리웠다.

    나가기 전, 레스토랑 주방 한구석에서 할 일 없이 졸고 있는 셰프에게 해진이 좋아할 간식을 몇 가지 주문한 환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돌아갔다.

    평소처럼 해진이 방에 있으리라 생각하며 문을 열었다. 그러나 그의 모습이 보이질 않았다.

    “해진 씨? 욕실에 계십니까?”

    욕실 문을 두드려보았지만 답이 없었다. 문을 살짝 밀어보니 안은 텅 비고 불이 꺼져 있었다.

    ‘……어디 갔지?’

    로비로 나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역시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휴대폰을 보다가 제 모습을 발견하곤 벌떡 일어난 프런트 직원에게 다가갔다.

    “강해진 씨 어디로 갔는지 압니까?”

    “좀 전에 공원 쪽으로 가셨습니다.”

    아, 산책을 간 모양이었다. 혼자 다닐 수 있게 해달라고 하더니, 그렇게 나랑 걷는 게 싫었나. 입이 쓴 것을 느끼며 그는 공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공원에 들어서도 해진의 모습이 곧바로 보이질 않았다. 환은 겁이 나기 시작했다.

    ‘설마, 또…….’

    또 그가 도망쳤을까 봐, 저 숲으로 내달렸을까 봐 덜컥 걱정이 되었다. 그에 대한 원망보다는 걱정이 앞서서 눈앞이 캄캄했다.

    “해진 씨.”

    목소리도 떨렸다. 손도 덜덜 떨렸다. 막막함에 가슴까지 갑갑해져 올 무렵, 공원 구석에 서 있는 해진의 모습이 보였다.

    인기척을 읽은 해진이 돌아보았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환은 우습게도 눈물이 터지고야 말았다.

    해진은 몹시 당혹스러웠다.

    혼자 방에 틀어박혀 있기가 지겨워서 잠깐 산책을 나왔다. 가을이라 쌀쌀하기도 하고 해서 옷도 제대로 챙겨 입고, 편한 신발을 신고 말이다.

    정원은 제법 괜찮게 꾸며놓았다. 가을이 되자 온갖 단풍이 색색이 물들어서 굉장히 예뻤다. 일전에 일을 하면서도 키스틸 리조트는 조경이 매우 잘되어 있다는 특색을 기록해두었던 게 기억났다.

    ‘나무도 종류별로 잘 심어놨고…… 병충해도 없어 보이네.’

    해진은 동물만큼이나 식물에 대해서도 나름 조예가 있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 조예를 바탕으로 내린 결론은 ‘역시 키스틸은 키스틸이다.’였다.

    그는 이환에 대한 생각을 하지 않았다. 아이에 대한 생각도 하지 않았다. 다만 아무 생각 않고 걷기만 했다. 생각을 하지 않고 걸었다는 것만으로도 제법 괜찮은 산책이었다.

    대충 10분 정도 걸었을까. 기척이 들려서 돌아보았더니 이환이 서 있었다.

    무려 눈물이 그렁그렁 달린 눈을 하고서.

    그 이환이 울고 있다는 사실을 바로 납득하지 못해서 해진은 멍하니 몇 초를 서 있었다.

    또르륵, 눈물방울이 이환의 잘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또르륵?’

    해진은 그제야 제 눈앞의 그가 눈물을 흘리고 있음을 제대로 인식하고 경악했다.

    “헐? 전무님? 괜찮으세요?”

    드디어 이환이 미친 건가. 요새 계속 제정신 아닌 듯한 모습을 보이긴 했다. 그런데 제 앞에서 눈물까지 보일 정도라니……. 이거, 심각한 거 아닌가. 해진은 키스틸 그룹의 존망까지 진지하게 걱정하며 한 걸음을 다가섰다.

    “왜 울고 그러세요. 사람 무섭게…….”

    “아, 실례했습니다.”

    이환은 조금 놀라더니 눈물을 쓱쓱 닦곤 돌아섰다. 본인이 운 줄도 몰랐던 눈치였다. 어쩐지 그대로 보내면 안 될 것 같아서 해진은 얼른 따라붙어 팔뚝을 쥐었다.

    “괜찮으세요?”

    웬수 같은 놈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제 배 속 아이의 아빠라는 자각이 있어서일까. 혹은 도통 보이지 않는 모습을 보여서일까. 마음이 쓰여서 붙들었더니 환은 새빨개진 눈을 하고 그를 돌아보았다. 그리곤 말없이 해진을 응시했다.

    “……전무님?”

    이전에는 확실히 보인 적 없는 표정이었다. 눈물과 함께 눈에 가득 고인 것이 무엇인지, 해진은 알 수 없었다. 다만…… 이 인간이 안타까웠다. 비록 제 인생을 이렇게 망쳐놓은 놈이지만. 그래도 아주 조금은.

    “무슨 일이신지 모르겠지만……. 앗!”

    어쭙잖은 위로라도 건네려는데 이환이 그를 끌어당겨 안았다. 숨이 막히지 않을 정도로만 꼬옥 안은 품이 꽤 따뜻했다. 외려 해진이 위로를 받을 정도로 말이다.

    환의 팔에 힘이 더 들어갔다. 해진은 조심스레 손을 들어 그의 등 위에 얹었다.

    ‘엄청 떨고 있네…….’

    무엇이 이 남자를 이렇게 두렵게 만드는 걸까. 국내의 내로라하는 실력 있는 기업가인 그를.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

    해진이 그의 등을 손으로 살며시 토닥여주었다. 왠지 오늘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괜찮아요.”

    뭔지는 몰라도 괜찮다고, 그리 위로를 건네야 할 것 같았다.

    “해진 씨.”

    “네, 네?”

    왜 이렇게 목소리를 쫙 깔고 말을 해. 사람 부담스럽게.

    “나를 미워해도 좋습니다. 당신의 미움쯤이야 얼마든지, 내가 감내해야 할 부분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뒤이은 말은 또 무슨 뜻이람. 해진은 그에게 안긴 채 어깨 위로 내민 눈을 또륵 굴렸다.

    “다만 나를 떠나진 말아주십시오.”

    목소리가 절절했다. 울음이 섞인 듯도 했다. 환은 그를 안은 채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제발, 떠나지만 말아주십시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해진 씨를 위해서입니다. 혹시라도 당신이 내 시야가 닿지 않는 곳에서 잘못되기라도 하면, 그땐 나는…….”

    환은 말을 잇지 못하고 다시 떨기만 했다. 겁을 잔뜩 먹은 짐승처럼 달달 떨고 있는 알파가 이제는 정말로 안쓰러웠다.

    그래서 대답해줄 수밖에 없었다. 설령 아직 그에게 가졌던 마음이 돌아오지 않았다 해도.

    “……안 떠나요. 걱정 마세요.”

    환의 팔이 그를 보듬었다. 해진을 꽉 껴안은 채 그는 오래도록 떨었다. 해진은 새삼 그의 품이 제법 크다는 것을 실감했다. 가을바람이 제게 닿지 않을 정도로 따뜻하고 넓은 품이었다.

    77퍼센트

    ‘너무 사람이 없는 것도 이상하고 어색하다’는 해진의 말을 듣고 오래 고민한 환은 다시 리조트를 개방했다. 다만 임신 중인 제 오메가가 최대한 안정을 취하게 하기 위해서 VIP 고객들에게만 예약을 일부 허한 것이었다.

    아이들이 야외 풀에서 헤엄을 치고, 연인들이 레스토랑에 앉아 있는 것을 보니 해진도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공원에 앉아 있다 보면 손님들이 해진에게 말을 걸기도 했다. 해진은 특히 아이들에게 친절했다. 그리고 이환은 해진이 다른 사람과 이야기하는 것을 영 탐탁잖게 여겼다. 귀찮은 손님들을 다시 모조리 내쫓고 싶었으나 해진이 좋아하니 어쩔 수가 없었다.

    가을이 끝나가면서 해진의 배도 조금씩 불러왔다. 입덧은 여전히 그를 괴롭혔고 설상가상으로 허리까지 몹시 아팠다.

    이환은 해진이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제공했다. 산부인과 전문의는 항상 리조트에서 대기 중이었고, 해진이 좋아하는 셰프도 계속 레스토랑에서 근무했다. 필요한 것은 말만 하면 대부분 몇 분 이내로 대령되었다.

    특히 리조트 호텔 루프에서 하는 식사는 끝내주게 좋았다.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광활한 자연이 펼쳐져 있고, 공기도 맑았다. 날씨가 점점 추워졌기 때문에 이곳에서 식사하기 위해서는 환의 잔소리를 감당해야 했지만 말이다.

    조금 걷기라도 하면 호들갑을 떨며 번쩍번쩍 안아대서 해진을 기겁하게 만드는 환 덕분에, 해진은 사람이 하루에 다섯 발자국도 걷지 않고 살아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제 옷을 갈아입혀주고 먹을 것을 챙겨주는 환의 모습을 보며 해진은 생각했다. 어쩌면, 이 사람도 꽤 변했는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청결 문제로 직원들을 닦달하고 박 비서에게 성질을 부리는 걸 보면 여전한 것 같기도 했다.

    유창숙 회장이 리조트로 찾아온 것은 가을의 막바지쯤, 정원의 낙엽이 거의 다 질 때쯤이었다.

    리조트는 발칵 뒤집혔다. 계열사 전무가 상주하는 것만도 돌아버릴 지경인데, 이제는 아예 기업의 오너가 방문한다니 비상사태가 아닐 수 없었다.

    긴장한 건 해진도 마찬가지였다. 유창숙 회장은 그에게 여전히 좀 찝찝한 존재였다. 물론 여태까지 아무 말이 없었던 걸 보면 딱히 저를 해치려고 오는 것 같진 않았지만 말이다.

    “정말 괜찮을까요……?”

    “걱정 마십시오. 제가 그렇게 두지 않을 겁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해진 씨를 지킬 겁니다.”

    “아니, 뭐, 그렇게 비장할 건 없고요…….”

    ……아무래도 저보다는 이환이 몇 배는 더 긴장한 눈치였다. 마치 적장과 대면하기 전의 무장 같은 단호함마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리고 유창숙 회장을 대면했을 때 해진은 왜 그가 그렇게 긴장했는지 알 것 같았다.

    가을에 어울리지 않는 올화이트 바지 정장을 입고 나타난 회장은 해진을 보자마자 선글라스를 빼며 씩 웃더니 말했다.

    “생각 이상으로 귀엽네.”

    해진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한 뒤 마주 웃었다.

    “생각 이상으로 실물이 미인이십니다.”

    회장은 마음에 든다는 투로 깔깔 웃었지만 이환은 긴장을 풀지 못한 채 뻣뻣하게 앞서 걸었다.

    ‘손이랑 발 같은 쪽 나가는 거 말해줘야 하나…….’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라 조금 재미있기도 했다.

    레스토랑을 폐쇄하고 앉은 세 사람은 한동안 침묵을 했다. 회장은 해진을 빤히 관찰하듯 바라보았고, 해진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피하지 않았으며, 이환은 해진의 옆에 앉은 채로 허공을 보았다. 은은한 쇼팽 곡조만 세 사람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채웠다.

    어른과 눈싸움을 하는 것은 아주 버릇이 없는 짓이기에, 해진은 회장과 눈이 마주치는 내내 적당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저를 빤히 관찰하는 시선이 너무 적나라하긴 해도 그다지 악의가 느껴지진 않았다.

    “하실 말씀 있으시면 하십시오.”

    그러나 의외로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이환이었다.

    “잘 지내고 있나?”

    시선은 여전히 해진에게 고정한 채로 회장이 말했다. 해진은 본인이 대답해야 하나, 잠깐 고민하다가 옆에 있는 환을 흘끔 바라보았다. 이환은 대답하지 말라는 듯 상체를 앞으로 내밀며 두 팔꿈치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손을 가볍게 깍지 꼈다.

    “강해진 씨는 이곳에서 출산 후까지 계속 저와 지낼 겁니다. 의사 표명을 이미 분명히 밝혔습니다. 문제 될 건 없습니다.”

    꼭 브리핑을 하는 듯한 말투였다. 회장의 미간이 구겨졌다.

    “쟤는 말을 못 하나? 왜 쟤가 할 말을 네가 대신 하는 게냐?”

    해진이 얼른 끼어들었다.

    “불편함 없이 잘 지내고 있습니다. 전무님께서도 많이 도와주시고요. 그리고…… 아이도 건강합니다.”

    말끝에는 방긋, 웃는 것까지 잊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회장의 표정이 좋지 않아서 조금 긴장했다.

    이환이 다시 상체를 의자 등받이에 기대더니 돌연 테이블 아래로 해진의 손을 꾹 쥐었다. 해진은 조금 놀랐지만 겉으로 내색 않았다.

    “회장님께서 걱정하시는 것처럼 강해진 씨가 다시 도주하거나 할 일은 없을 겁니다.”

    제법 비장하기까지 한 환의 말에 그제야 회장의 얼굴도 조금 풀렸다.

    “그거 다행이구나.”

    “제 오메가는 제가 책임지겠으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든 부디 재고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번에는 그녀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의아함을 표하는 동작마저 우아해서 제스처를 구경하던 해진은 감탄까지 했다.

    “내가 무슨 생각을 했다고? 뭐, 데려가서 어디 쥐도 새도 모르게 파묻기라도 할까 봐?”

    정곡을 찔린 환이 뺨을 움찔거렸다. 그 모습을 보고 유 회장은 시원스레 소리 내어 웃었다.

    유 회장의 웃음소리가 어찌나 시원한지, 해진은 하마터면 따라 웃을 뻔했다.

    그녀는 한참을 시원하게 웃더니 어느 순간 뚝, 멈추고 다시 환을 보며 미간을 구겼다. 언제 웃었냐는 듯 근엄함을 순식간에 되찾는 모습을 보고 해진은 유 회장이 조금 멋있다고 생각했다.

    “너, 이 할미를 도대체 평소에 어떻게 생각하는 거냐?”

    “……꼭 없애버릴 것처럼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환이 억울한 투로 반박하자 유 회장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깊이 기대곤 팔짱을 꼈다. 시선이 다시 해진에게 닿았다. 눈빛에 은근히 힘이 들어가 있어서 해진은 괜히 물을 마시는 척 눈길을 피했다.

    “뭐, 통제가 힘든 경우에는 최악의 경우로 어디 멀리 보내버릴 생각까지는 했다만, 아이를 뱄다는데 어떻게 그러겠나. 사람의 도리가 있지.”

    유 회장은 느긋했으나 환은 갑갑해 죽겠다는 투로 마른세수를 했다.

    “그래서 빌어먹, 아니, 난감하게 엉뚱한 사람과 스캔들까지…… 일부러 냈는데…….”

    하아, 묵직한 한숨을 토해낸 환은 앞에 놓인 물컵을 단번에 들이켰다. 제 몫의 물이 모자라자 해진이 쥐고 있던 컵까지 빼앗아가 벌컥벌컥 마셨다.

    졸지에 손이 비어버린 해진은 옆에 앉은 그를 황망히 바라보았다. 잔을 빼앗긴 것보다 이환이 제가 마시던 물을 마셨단 사실이 더 황당했다.

    “아, 그래, 신아연 그 친구 말이 통하고 시원시원해서 좋더구나.”

    정작 유 회장은 느긋하게 앞에 놓인 차를 들이켰다.

    “두 사람이 잘 지내고 있는 걸 보니 내 마음이 놓이네. 이제 신경 끌 테니 묻어버리니 뭐니 하는 걱정은 하지 말고 잘들 지내봐.”

    무서운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리 말하는 유 회장은 정말로 이환의 할머니처럼 인자하게 웃고 있었기에 해진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을 놓았다.

    “태교 잘하고,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요. 내 손주 놈이 괴롭히면 직통 전화로 나한테 이르고.”

    “네, 잘 알겠습니다.”

    “대답이 시원시원해서 좋군.”

    유 회장이 입꼬리를 틀어 픽 웃었다. 해진은 와중에도 그녀의 여유로움이 멋있어 보여서 슬그머니 미소를 지었다.

    “해진 씨는 왜 웃습니까? 지금 이게 웃깁니까?”

    환이 버럭 화를 내자 해진은 아예 눈까지 휘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래도 잘 해결된 것 같아서 다행이네요, 뭐. 저 어디 묻어버리지는 않으신다잖아요.”

    진심이었다. 죽기 싫어서 내내 도망쳤고, 죽기 싫어서 이환의 곁에서 아이를 낳겠다고 결심했는데 위험요소가 사라지니 순수하게 기쁠 수밖에 없었다.

    “억울하지도 않습니까?”

    “왜요? 필요한 거 있으면 다 말하라고 하시잖아요. 전무님도 얼른 이 기회에 말해요.”

    “하아……. 천하태평이로군…….”

    갑갑한 것은 이환 혼자인 듯했다.

    유 회장은 몇 시간 있지도 않고 리조트를 떠났다. 오너가 있으면 직원들이 불편해한다는 이유를 들면서도 로비의 소파 위치라든가 외벽의 상태 등을 지적해 이환을 몇 시간 더 늙게 만들었지만 말이다.

    회장을 배웅한 뒤 두 사람은 정원을 조금 거닐었다. 환이 재킷을 벗어 주었지만 해진은 춥지 않다며 거절했다.

    정원을 걷는 내내 해진은 환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요즘 들어 그가 저를 빤히 쳐다보는 일이야 많았지만, 이번에는 조금 결이 달랐다. 시선이 느껴져 마주 보면 슬그머니 눈을 피하는 게 꼭 죄인 같았다.

    “하실 말씀 있으면 하세요.”

    해진이 부추기고도 한참 지나서야 환은 어렵사리 입을 떼었다.

    “……혹시…… 떠날 마음이 생겼는지…… 걱정을 좀, 했습니다.”

    “네? 제가 왜요?”

    리조트 밥도 맛있고, 난방도 잘되고, 블루레이도 있고, 부족한 것 하나 없는데 자신이 여길 왜 떠난단 말인가. 해진은 고개를 옆으로 갸웃갸웃 기울였다. 헛기침하는 환의 얼굴이 영 어두웠다.

    “이제 강해진 씨가 제 곁에 구태여 있어야 할 이유가 없어졌으니…….”

    뒤이은 말을 선뜻 이해하지 못했다가, 침울한 그의 얼굴을 보고서야 그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알 것 같았다.

    “유 회장님이 저 어디 묻어버리진 않는다고 하셨으니까, 이제 전무님의 보호가 필요 없지 않느냐, 이 뜻인가요?”

    환은 대답하는 대신 다소 뚱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맞구나. 해진은 어쩐지 웃음이 나올 것 같은 것을 꾹 참고 시침을 떼었다.

    “뭐, 회장님이야 그리 말씀해주시니 다행이지만, 앞으로 좀 더 두고 봐야겠죠? 제가 위험할지 아닐지는…….”

    농담 삼아 한 말인데, 흘끔 옆을 보니 환의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이쯤에서 관둬야 하지만 괜히 장난기가 발동했다.

    “그렇잖아요. 저도 바보 아니거든요. 아이 낳으면 소문 퍼질 수밖에 없고, 그럼 전무님과 제 관계도 언젠가는 밝혀지기 마련인데……. 저는 재벌 집안 아들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요.”

    처음엔 장난으로 시작한 말인데, 어쩐지 물꼬가 트이고 나니 괜히 제 신세를 한탄하고 싶기도 하고, 제 처지가 좀 서럽기도 했다.

    “워낙 유명한 분의 오메가다 보니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것도 많을 테고, 저도 앞으로 어째야 할지 이런저런 걱정이 많네요. 에이, 전무님이랑 연애하는 줄 착각할 때는 이런 생각도 안 했는데.”

    괜히 그때가 떠올라 하하, 하고 쓴웃음을 내뱉었다.

    “그땐 왜 이런 생각도 못 했나 몰라요. 착각에 빠져서 정신이 영 없었나 봐. 전무님께서 저한테 잘해주시던 거 죄다 연기인 줄도 모르고 마냥 좋아하기만 했지 뭐예요. 바보같이. 하하하.”

    걷던 해진은 그가 따라오지 않는 것을 깨닫고 돌아보았다. 환은 아까보다 몇 배는 더 창백해진 얼굴을 하고 서 있었다.

    이환의 얼굴로 보기에는 낯선 표정이지만, 어떤 감정인지는 대충 알아볼 수 있었다. 죄책감과 미안함 같은 것들. 와중에도 고개를 숙이거나 하지는 않는 게 지극히도 이환다웠다.

    “……전무님?”

    이환은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성큼, 멀어진 거리를 좁혀오는 기세에도 해진은 당황하지 않고 그를 빤히 마주 봤다. 키 차이 때문에 목을 꺾어야 했다.

    “미안하다는 말은 이제 더 하지 않겠습니다. 해진 씨에게 하는 사과는 지금까지도 모자라지만, 그것만큼 중요한 게 있군요.”

    “중요한 거요?”

    환은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가뜩이나 판판한 가슴이 호흡을 담고 펴졌다. 얼굴은 어찌나 결연한지 해진은 조금 움찔했다. 무어라고 말하려 입까지 벌린 환은 다시 딱, 입술을 닫아버렸다.

    “왜요? 말씀하세요.”

    “……아닙니다. 생각해보니 지금 이 자리에서 말할 게 아닙니다.”

    내 참, 싱겁긴. 말할 자리라는 게 따로 있나. 입술을 비죽 내밀고 돌아서려는데 환이 그의 손목을 살짝 붙들었다.

    “다만 한 가지는 미리 약속드리죠. 해진 씨가 위험할 일은 앞으로 없을 겁니다.”

    올곧은 눈을 보니 어쩐지 해진은 그의 말을 또 홀랑 믿어버리고 싶어졌다. 그때처럼 설령 속는다 해도 말이다.

    “행여 저를 떠나는 일이 있어도, 해진 씨의 안위는 제가 끝까지 지켜드리겠습니다.”

    ‘끝까지’라는 말에 방점이 찍혀 있었다. 문득 궁금했다. 그가 말하는 ‘끝’이란 언제일까. 아이를 낳을 때까지일까. 해진은 대답 대신 쓰게 웃어 보였다. 괜히 손으로 아랫배를 만져보았다. 이제 티가 날 정도로 볼록했다.

    해진이 먼저 걸음을 떼었고, 환은 그의 옆에서 나란히 걸었다. 바람이 불자 단풍들이 부대꼈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낙엽 냄새가 났다.

    출산 예정일은 한겨울이라던데, 너무 추운 날은 아니었음 좋겠다고 해진은 생각했다.

    “저, 그리고 혹시…….”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해진은 다시 환을 돌아보았다. 얼굴이 살짝 붉어져서는 그답지 않게 표정이 좀 굳어 있었다.

    “네?”

    이환은 헛기침을 몇 번이나 했다. 얼굴이 벌게져서는 선뜻 이야기를 꺼내지 못하는 게, 대체 무슨 중대한 말을 하려고 그러나 싶어 해진은 불안하기까지 했다.

    “괜찮으시다면, 이전처럼…… 다시 이름을 불러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작 그가 꺼내 놓은 말은 별것도 아니었다. 뭘 이런 걸로 그렇게 뜸 들였나. 하지만 나무라기에는 이환의 얼굴이 제법 진지했다.

    “알았어요, 환이 씨.”

    못 들어줄 것도 아니라 냉큼 불러주었더니 뻣뻣하게 굳어 있던 환의 얼굴이 꼭 불 앞의 얼음처럼 사르르 녹았다. 순식간에 날 선 눈매를 풀고 묘한 미소까지 지어 보이는 걸 보고 해진은 픽, 웃음을 흘렸다.

    새삼 이환이 많이 변했단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더 변할지도 모른단 생각도 들었다.

    그에게 느끼는 감정이라곤 미움조차 남지 않았다고 믿었는데, 이렇게 제 한 마디에 풀어지는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둘은 대화 없이 공원을 좀 더 걸었다. 마침 사람이 없어 낙엽 밟는 소리만 고요했다. 두 사람의 손등이 나란히 흔들리며 서로를 스쳤다.

    * * *

    배 속 아이와 해진의 몸에는 이상이 없다고 들었지만, 해진은 여전히 극심한 피로와 입덧에 시달렸다. 보통 배가 불러오면 입덧도 나아진다는데 몸이 약해서인지 그렇지도 않았다. 배가 불러오니 몸이 힘든 것도 더해져 딱 죽을 맛이었다.

    거기다 뒤늦게 온 임신 우울증 때문에 해진은 혼자 멍하니 앉아 있는 때도 많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앉아 가을이 온 창밖을 내다보고 있자면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되나, 아이를 낳다가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쩌나, 애 낳고 나서는 뭐 하고 사나, 하는 생각들.

    그가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을 때마다 환은 안절부절못하며 옆에서 이것저것을 갖다 바쳤다. 먹을 것과 입을 것, 심지어 그렇게 좋아하는 다큐멘터리를 틀어주어도 해진은 무덤덤했다. 딱 돌아버릴 지경이었다.

    “해진 씨, 산책이라도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옷을 따뜻하게 입고…….”

    “괜찮아요.”

    “그럼 간식이라도 내오겠습니다. 혹시 먹고 싶은 거라도…….”

    “괜찮아요.”

    강해진은 ‘괜찮아요’ 외엔 말을 못 한다는 듯이 그의 모든 호의를 거절했다. 차라리 이전에 도망 다닐 때처럼 제 돈을 야무지게 쓰면서 스트레스라도 풀면 좋으련만, 돈을 쓰는 일에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배는 불러오는데 입덧 때문에 제대로 먹지도 못해서 얼굴은 말라가고, 환은 그런 해진을 보며 지독한 죄책감을 느꼈다. 제 아이를 안 가졌으면 강해진이 이리도 고생할 일은 없을 텐데. 모든 것이 제 탓이었다. 하지만 지금 와서 돌이킬 수도 없으니.

    뭘 해주면 좋겠느냐고, 말만 하라고 부추기고 싶었지만 어쩐지 강해진이 ‘당신만 없으면 될 것 같다’는 대답을 할 것 같아 환은 그러지도 못하고 그에게서 한 발짝 떨어진 채 발만 동동 굴렀다.

    그는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해진의 상태를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이었다. 몸을 씻겨주면서 보이는 흔적들이나 그의 얼굴에서 드러난 기분들 같은 것을 하나하나 메모해 두었다가 나중에 산부인과 의사에게 전해주곤 했다. 해진 역시 산모 일기를 쓰기는 했지만 기록의 정성도는 환의 것이 더 높았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환은 해진의 기분 전환을 위해 따뜻한 물에다가 아로마 오일을 풀고 직접 해진의 앞에 꿇어앉아 족욕을 시켜주었다. 향긋하고 따뜻한 물이 발에 닿으니 기분이 좋은지 내내 침울하던 해진의 얼굴도 조금 활기가 도는 듯했다.

    불룩한 배를 감싼 손은 가뜩이나 작은데 이전보다 더 앙상해진 듯해서 마음이 영 쓰렸다. 뺨도 홀쭉하고 말이다. 오동통한 밀가루떡 같던 해진의 뺨이 늘씬해진 것을 볼 때마다 저걸 어떻게 다시 찌우나 하는 생각에 한숨만 푹푹 났다.

    환은 정성스레 발을 닦아주며 그의 발목과 복사뼈, 발꿈치를 꼼꼼하게 문질렀다. 해진의 발은 제 것보다 훨씬 작아서 안타까울 정도였다.

    “이렇게까지 해주실 필요는 없는데…….”

    아무래도 발을 맡기는 게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제 손안에서 꼬물거리는 발을 입에 넣고 싶은 충동이 문득 들었으나 환은 꾹 참았다.

    “그런 말 마십시오. 체중이 급격하게 늘어난 임산부는 발 관리를 잘해줘야 합니다.”

    “딱히 힘들진 않아요……. 별로 걷지도 않고.”

    턱을 긁으며 조심스레 말하는 강해진은 몹시 사랑스러웠다. 환은 속으로만 웃으며 그의 발꿈치를 부드럽게 주물렀다. 어찌 된 발인지 손에 걸리는 각질도 하나 없이 부드럽고 말캉했다. 또다시 이 말캉한 것을 입에 넣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방에만 있는 게 갑갑하진 않습니까? 요즘은 산책도 잘 안 나가려 하고.”

    “괜찮아요.”

    또 괜찮다는 말. 환은 설핏 미간을 구겼다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그래, 강해진이 제일 좋아하는 것을 주면 될 것을.

    “……탐험, 하러 가죠. 출산하고 몸조리 다 끝난 다음에 말입니다.”

    그제야 해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정말요?”

    “예.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해진이 일하던 곳 같은, 키스틸 레저 계열사나 협력 여행사 같은 곳에서 대충 패키지여행을 찾아도 될 테지만 강해진이 원하는 것은 아마 그게 아닐 것이다. 이왕 가는 거라면 제대로 가야겠지.

    “출산 예정일 이후라면 저도 그때쯤은 시간이 꽤 납니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준비해보죠.”

    “환이 씨도 가시려고요?”

    해진이 조금 놀란 투로 물었다.

    “그럼 제가 같이 가야지, 그 위험한 곳에 강해진 씨 혼자 간단 말입니까?”

    “완전 생존력 떨어지실 거 같은데…….”

    뒤이은 말에 환은 아주 조금 상처를 받았다. 조모 덕분에 밑바닥부터 꾸역꾸역 올라온 제게 생존력이 떨어진다니. 하지만 강해진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그 결벽증에 하루는 버티시려나…….”

    뒤이은 말에 어쩐지 정곡이 찔려 헛기침을 했다. 해진은 그런 그를 빤히 보다가 핼쭉, 웃었다.

    “농담이에요. 저도 혼자 가는 것보다 훨씬 든든하죠.”

    웃는 해진이 하도 예뻐 보여서, 환은 저도 모르게 손을 멈추었다. 작은 발이 제 손에서 꼬물거리고서야 자신이 해진의 얼굴을 멍하니 구경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괜히 헛기침을 하곤 다시 그의 발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양손으로 꾹꾹 누르고 살을 밀며 본격적으로 마사지를 했다. 해진을 위해서 미리 배워둔 것이었다. 애써 습득한 보람이 있게 해진은 눈을 감으며 나른하게 신음했다.

    “아, 좋다……. 나른하네…….”

    “앞으로도 종종 이렇게 족욕과 마사지를 해드리죠. 이래 봬도 제가 악력은 있는 편 아닙니까.”

    “진짜요……? 흐아……. 최고다…….”

    거의 늘어져서 흐물흐물해지는 해진을 보며 환이 픽 웃음을 흘렸다. 뿌듯하기도 했다.

    “그렇게 좋습니까? 매일 해드려야겠군요.”

    “으음……. 족욕이 좋은 게 아니라, 환이 씨가 제 발을 만지니까 뭔가…… 나른하게 좋네요……. 충족감도 들고…….”

    “충족감이요?”

    해진은 반쯤 상체를 기울인 채 검지로 관자놀이를 긁으며 고민하더니 조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 뭐라고 해야 하나……. 예전의 환이 씨는 이렇게 제 발을 만져줄 사람으로는 안 보였으니까요?”

    환은 해진의 말을 이해했다. 꼿꼿한 저를 이렇게 부려먹는 게 즐겁다고 지금 말하고 있는 거였다, 이 요망스러운 오메가가 말이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그는 그게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더 즐겁게 해주고 싶었다.

    “발뿐만 아니라 다른 곳도 다 만져줄 수 있습니다. 해진 씨가 원하기만 한다면.”

    말을 뱉고 나니 어쩐지 좀 뉘앙스가 이상한가, 싶어 슬쩍 고개를 들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강해진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환은 속으로만 씩 웃었다. 이렇게 표정을 못 감춰서 어쩌나.

    “무슨 생각을 했길래 그렇게 얼굴이 빨개집니까?”

    “무, 무슨, 제가 뭘요?”

    당황하며 쏘아붙이는 게 꼭 화내는 햄스터같이 하찮고 귀여웠다. 저 새빨개진 얼굴을 한입에 넣고 빨아버리면 싫다고 난리를 부릴까.

    “제 말을 듣고 멋대로 상상이라도 했습니까?”

    “제가 변태인 줄 아세요? 제가 멋대로 환이 씨가 제 속살 주무르는 상상이나 하는 사람으로 보여요?”

    제 입으로 실토하는 것을 보니 참으로 사랑스러웠다. 환은 소리 내서 웃고 싶은 것을 참고 해진의 발을 놓았다.

    일어서서 옆에 놓인 수건으로 손을 닦는 동안 해진은 소파 위에 앉은 채로 그의 눈치를 봤다. 요리조리 눈을 굴리고, 제 쪽을 흘끔 봤다가 얼른 시선을 피하는 것을 보니 빨리 저것을 입에 넣고 싶은 생각만 들었다.

    “일전에 내가 말했죠.”

    그가 해진을 번쩍 안아 들었다. 해진은 끽, 하는 사랑스러운 소리를 내며 얌전히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나는 해진 씨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그게 뭐든 내어줄 수 있는 사람이라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올려다보는 해진을 안은 채 환은 침실로 향했다. 만삭의 몸인데도 해진은 여전히 가벼웠다.

    “그러니 상상만 하지 말고 입으로 말을 하십시오. 그게 고작 제 몸뚱이에 한한 것이라면…… 당장이라도 내어줄 수 있으니.”

    나름 진지하게 이야기를 했는데, 해진의 표정이 이번에는 영 좋지 않았다. 어색하게 웃는 얼굴에 난감함마저 드러났다.

    “환이 씨는 진짜 손발 오그라드는 말을 어쩜 그렇게 잘하시……!”

    뭐라고 더 쫑알거리기 전에 입을 맞췄다. 품에서 얼어붙은 해진을 살며시 침대 위에 내려놓은 환은 키스를 이어가며 그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바지를 벗기고 허벅지와 허리를 손으로 쓸어내리자 뻣뻣하게 얼어붙어 있던 해진의 몸이 조금씩 긴장을 푸는 게 느껴졌다. 굳어 있던 입술도 찬찬히 풀렸다.

    긴 입맞춤을 끝내고 입술을 턱으로 옮긴 환은 정성을 들여 해진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턱과 목을 쪽, 쪽, 소리 나게 물고 빨며 반쯤 벗겨진 해진의 바지를 온전히 끌어 내렸다. 그의 몸에서 달큼한 딸기 향이 났다. 아이를 가지고 만삭이 되었는데도 이 향기가 그대로인 게 신기했다.

    해진의 드로즈까지 모조리 벗겨낸 환은 몸을 조금 더 아래로 끌고 내려와 이번에는 그의 불룩한 배 위에 입을 맞췄다. 만삭이라 팽팽하게 부푼 배는 곳곳에 살이 트고 핏줄이 돋아 있었지만 환의 눈에는 곱기만 했다.

    그다음으로는 허리와 장골을 물고 빨았다. 어느새 빳빳하게 발기한 해진의 페니스가 얼굴에 스쳤다. 그때마다 해진은 화들짝 놀라며 떨었다. 당장이고 이것을 입에 넣고 싶은 제 심정도 모르고 말이다.

    몸을 일으켜 해진의 티셔츠까지 벗겨낸 환은 제 드레스셔츠도 벗었다. 벌써 흐트러진 해진을 내려다보자니 만족스러운 웃음이 어쩔 수 없이 흘러나왔다.

    “내 손이 어딜 주무르는 상상을 했길래, 아까 그렇게 얼굴이 붉어진 겁니까?”

    “……몰라요.”

    대답하지 않을 셈인가. 저 머리통에 든 상상이 엄해봤자 제 욕정보다는 못할 테니 상관없지만, 대답을 않겠다고 하니 괜히 심술이 났다.

    그는 해진의 몸 곳곳에 쪽, 쪽, 소리 나게 입 맞추며 손으로도 애무를 이어갔다. 제 아래서 바르작거리는 몸뚱이가 만족스러웠다. 바짝 달아오른 채로 제 손길 하나마다 떠는 그가 귀여웠다.

    한참 하던 애무를 멈추고 고개를 들자 새빨개진 얼굴이 보였다. 환은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말해봐, 응?”

    그러자 가뜩이나 붉은 얼굴이 한층 더 빨개졌다.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서 환은 결국 다시 입을 맞췄다.

    키스를 하며 손으로 그의 다리 사이를 탐했다. 해진은 조금 떨었지만 그를 밀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달아오른 몸을 살살 꼬며 기대라도 하는 듯이 달뜬 눈을 하곤 저를 올려다보는 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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