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11/16)

어느새 환은 강해진이 제 아이를 배었다는 것을 기정사실화하고 있었다. 그는 운전을 하며 섹스할 때 보았던 강해진의 배를 떠올렸다.

하얗고 매끈한 피부와 살이 없어 오목하게 꺼지던 아랫배, 자그마한 배꼽, 그리고 그 바로 아래 투명한 액을 끝에 달고 흔들리던 페니스까지.

그는 아랫도리가 금세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강해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자극이 되었다.

아니, 자극이 되는 정도가 아니었다. 운전대를 잡은 채로도 그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결국 차선을 바꾸다 실수를 했다. 상대 운전자가 창문을 열고 온갖 욕을 다 퍼부었으나 환의 귀에는 앵앵거리는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만이 가득했다.

그는 강해진이 필요했다.

대충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서 차를 세운 환은 운전석을 뒤로 젖히고 처치 곤란한 긴 다리를 핸들 위로 올렸다. 좁고 불편했지만 강해진은 저보다 더 힘들고 불편한 밤을 보내고 있으리라 생각하자 몸보다 마음이 더 불편했다.

그는 억지로 눈을 감았다. 내일은 다시 흥신소에게 연락을 돌려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부디 강해진의 밤이 편하기를 빌었다.

“에취!”

그 시각, 재채기를 한 해진은 새로 옮긴 펜션에 딸린 개인 사우나룸에서 목욕을 즐기고 있었다. 새로 마련한 태블릿PC로 제일 좋아하는 탐험 다큐멘터리를 시청하면서.

“아, 감기 걸리면 안 되는데.”

거품을 잔뜩 풀어 놓은 욕조에서 느긋하게 몸을 일으키며 이만 잠자리에 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거품목욕도 좋지만 감기에 걸리면 이동하기도 힘들어지니까 말이다.

안 그래도 요즘 몸 상태가 이상했다. 갑자기 몸이 춥거나 미열이 생기질 않나, 가슴이 욱신거리질 않나, 소변도 평소보다 더 자주 마려운 것 같고 말이다.

체온이 내려가지 않게 가운을 입고, 꼼꼼하게 머리를 말리는 동안 그는 콧노래를 불렀다. 어쩐지 오늘은 기분이 좋았다.

“새로 산 에센스 발라봐야지!”

펜션에서 이곳 특산물로 만들었다며 주인이 강력하게 추천한 바디 에센스도 향이 끝내주게 좋았다.

옛날에는 이런 것도 다 사치품이라고 생각해서 쓰다 남은 로션이나 팔꿈치에 바르고 말았는데, 이건 제 돈으로 산 게 아니니 하나도 아깝지 않았다.

해진은 푹신하고 깨끗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창문 쪽으로 몸을 젖히자 달이 보였다. 뷰도 좋은 방으로 잘 골랐다.

처음 이환에게서 전화를 받았을 때는 불안했는데, 이제는 아니었다.

‘진짜 추적했으면 이동 중에 붙잡혔어.’

해진은 이전에 있던 펜션에서 산을 가로질러 이곳으로 왔다. 솔직히 이번에야말로 잡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웬걸, 죽어라 도망치는데도 쫓아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완전 엉뚱한 곳 헤매고 있는 거 아냐?’

뭐, 그러면 오히려 잘된 일이다. 어쨌든 오늘도 무사히 넘겼으니 다행이고 말이다. 해진은 복잡하게 생각 않기로 하고 눈을 꼭 감았다. 그리고 꿈도 없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환은 며칠이 지나서야 자신이 엄한 곳을 뒤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에게 연락이 온 곳은 흥신소도, 병원도 아니었다. 이곳에서 20km나 떨어진 곳에 있는 펜션이었다.

해진이 갈 만한 숙소는 모조리 연락을 해두라고 박 비서에게 단단히 일러두길 다행이었다.

헬기가 착륙한 곳에서 주변 도시에 있는 모든 펜션, 모텔, 호텔, 기타 숙박 시설에는 다 ‘키스틸 레저’라는 이름으로 연락이 갔을 터다. 한국에서 제일 큰 레저 회사가 ‘협조’를 요청하는데 감히 거부할 숙박업체는 없을 터다.

그리고 뒤늦게야 ‘그분인 것 같다’며 펜션 주인이 연락을 준 것이었다.

환은 연락을 받자마자 그곳으로 튀어갔다. 그리고 당연히 강해진을 찾을 수는 없었다. 펜션 근처는 죄다 숲이었다.

“저는 바로 연락드린 거예요. 그렇게 갑자기 뭐, 사람 찾아내라고 그러면, 저희도 좀 당황스럽죠.”

주인장이 귀찮음과 불편함을 토로하며 눈치를 보는 동안 환은 펜션 밖으로 펼쳐진 숲을 응시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기서 제일 가까운 다른 숙박 시설이 어디 있습니까?”

* * *

여름에 산을 이동할 때 동물만큼이나 무서운 게 벌레였다. 한국에는 그래도 위험한 독충이 많지는 않지만 조심해야 했다.

때문에 해진은 긴 옷을 입고 있었다. 땀이 조금 났지만 그래도 오늘은 해가 맑지 않아서 걷기에 괜찮은 날씨였다.

하필이면 고생을 해도 이런 계절에 고생을 하나, 생각하자 아주 잠깐 서러워졌지만, 억지로 나쁜 생각을 할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걸음을 이었다.

‘그 새끼한테서 도망친 것만 해도 대단한 거야.’

해진은 자신감을 갖기로 했다. 이제 이 여정도 얼마 남지 않았다.

잊혀질 때까지 어디 시골에 박혀서 지내는 것도 방법이지만, 죽은 사람처럼 지내기는 싫었다. 내가 뭘 잘못했다고.

‘외국으로 갈 거야.’

그는 조금 더 도망치다가 외국으로 떠날 예정이었다. 이 나라에서 언제까지고 불안에 떨며 숨어 살 생각은 없었다.

‘두고 봐라. 이환이 살고 있는 이 땅, 내가 반드시 뜨고 만다.’

해진은 잠시 걸음을 멈추고 위를 올려다보았다. 역시 미리 확인해둔 대로 작은 건물 하나가 보였다.

이번에 선택한 곳은 펜션이 아니라 산속 고시원이었다. 속세와의 인연을 끊으면서까지 공부가 절실한 사람들이 머무는 곳이 있다는 사실은 여행사를 다닐 때부터 알았다. 이제 슬슬 돈도 아껴야 하니 매번 개인 욕조가 딸린 방에서 잘 수는 없었다.

꼭 고등학교 때 왔던 수련원처럼 생긴 건물이지만 그것보다는 훨씬 더 깔끔했다. 이 건물에서 사는 듯한 고양이들이 해진을 제일 먼저 맞았다.

해진은 단기간으로 예약을 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뒤 잠깐 전화를 빌렸다. 본래라면 쓰지 않았을 터다. 숙소의 전화번호를 그대로 띄우는 건 나 좀 찾아오라고 소리 지르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그러나 이번에는 좀 달랐다.

- 여보세요.

차분하면서도 또렷한,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여인의 목소리. 해진은 숨을 한 번 들이마신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유창숙 회장님.”

역시나 상대방 쪽에서는 선뜻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였다.

- 누구시지요?

“저는 강해진이라고 합니다. 손주분과 개인적인 악연이 있는데, 혹시 아십니까?”

다짜고짜 꺼낸 말에도 유 회장은 당황하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웃었다.

- 이름은 모르지만 누군지는 알겠군. 그런데 내 번호는 어떻게 알았지요?

“다 방법이 있습니다.”

사실 그다지 어렵지는 않았다. 예전에 이환의 휴대폰에 있는 번호를 몰래 본 거니까. 해진은 전화기를 고쳐 쥐며 긴장한 마음을 감추려 몰래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제가 누군지 아신다면, 그게 중요한 건 아닐 텐데요.”

다시 웃음소리. 압박면접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괜히 떠오른 해진은 등에 식은땀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이미 저질렀으니 여기서 물러설 순 없었다.

이렇게 들이대는 이유가 있었다. 유창숙 회장은 지금, 이환과 자신의 관계를 대충이라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아마 이 사달이 났으면 회사의 높은 분 귀에도 들어갔으리라는 해진의 짐작이 맞았다. 일전에 환이 유창숙 회장에 대해 ‘자신의 조모는 제 주변의 모든 것을 통제하려 든다’ 했던 말을 그는 기억하고 있었다.

- 계속 말해봐요, 들어줄 테니.

다행히도 유창숙 여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저는 이환 전무님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습니다. 회장님께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 내가 왜?

“당연히 그편이 키스틸 그룹에도 좋을 테니까요. 전무님과 제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가 퍼지는 것을 회장님께서도 원치 않으실…….”

- 무슨 이야기를 하든, 그게 퍼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역시나 짐작했던 반응이었다. 명색이 키스틸 회장인데, 순순히 이야기를 들어줄 거라 믿진 않았다.

“지금도 손주분은 저를 찾고 계시는데요.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이번에는 잠깐의 침묵.

“키스틸 호텔 화재경보기, 제가 울린 겁니다. 회장님께도 보고가 들어갔는지 모르겠지만요. 32층이랑 31층 연결되는 환풍로에 연기가 찼을 겁니다. 경보가 울린 곳은 3201호, 펜트하우스 거실에 부착된 차동식감지기고요.”

해진은 빠르게 말을 쏟아내었다. 귀하게 얻어낸 틈을 놓칠 수는 없었다.

“그 방 곳곳에 아직도 제 지문이 찍혀 있을 겁니다. 사람들이 믿고 안 믿고가 중요한가요? 제가 지금도 도망치고 있는데 말입니다.”

잠깐 숨을 골랐다. 해진은 TV에서나 보던 키스틸 회장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썼으나 잘 기억나지 않았다.

“저는 협박을 하는 게 아닙니다, 회장님. 그저 사소한 도움 하나만 요청하고 싶어서 연락드렸습니다.”

여전히 수화기 너머는 답이 없었다. 전화가 끊긴 건 아닐까, 싶어 전화기 본체에 있는 화면을 확인했다. 다행히 통화 중으로 표시되어 있었다.

- 그 사소한 도움이 뭐죠?

들리는 목소리에 해진은 겨우 안도했다.

“그냥 이 나라를 뜰 수 있는 비행기표면 됩니다.”

그리고 다시 침묵. 이제 전화기를 빌려준 고시원 주인도 해진 쪽을 흘끔흘끔 보고 있었다. 그냥 포기할까, 지금이라도 그냥 비굴한 쪽으로 노선을 바꿀까, 고민하던 중에 뜻밖의 질문이 날아왔다.

- 임신했나요?

해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숨이 막혔다.

“……제 안전을 위해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 강해진 씨를 가장 깨끗하게 ‘처리’할 수 있는 방법이 뭔지 잠깐 생각해봤어요.

눈치 빠른 해진은 회장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원한다면 저 하나쯤은 아무렇지 않게 치워버릴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하지만 자기 손 더럽히느니 외국으로 보내는 게 그쪽도 편하지 않을까?

- 아이를 가졌다고 말했으면 도왔을 텐데, 안타깝네요.

……뭐? 반대가 아니라?

해진은 의아했다. 무슨 드라마 같은 상황을 생각한 건 아니지만, 보통 이런 상황에서는 근본도 없는 오메가가 사생아를 낳게 할 수는 없다느니 하는 반응이 나와야 하지 않나?

심지어 이환은 다른 사람이랑 약혼까지 했지 않은가.

“비행기표 하나면 됩니다. 어려울 거 없지 않습니까. 한국에 다시 오는 일 없을 겁니다.”

해진은 울고 싶은 기분까지 느꼈다. 구남친 - 그 개새끼를 구남친이라고 불러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 에게 쫓기면서 구남친 할머니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이 뭐같은 상황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

몇 시간 같은 몇 초가 지난 뒤, 수화기 너머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 나한테 와서 이야기를 좀 해보는 건 어때요.

“이야기라 하시면…….”

- 우리 손주가 도통 나한테는 연애 이야기를 안 해서.

이건 또 무슨……. 해진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그래, 순순히 비행기표를 주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직접 행차하시는 경우까지는 생각했는데 오라고 하니 당혹스럽기도 했다.

이환은 자신을 찾고 있고, 회장은 둘의 관계에 대해 알고는 있지만 손을 쓰고 있지는 않다는 게 해진의 판단이었다. 유창숙 회장 정도 되는 사람이 직접 개입했다면 자신은 이렇게 도망치지도 못했을 테니까.

그리고 지금 회장은 제게 직접 찾아오라 말하고 있었다.

‘갔다가 잡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지는 거 아냐?’

오라고 한다고 호랑이굴로 직접 들어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해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안타깝지만 아시다시피 제가 쉽게 움직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어서요. 회장님 의견은 잘 알겠습니다.”

- 아깝네요. 손주 놈 홀린 얼굴이나 구경하려고 했는데.

……뭐라고? 뭘 홀려? 의문을 갖는 사이에 전화는 끊어졌다. 자신이 잘못 들었으리라고 판단한 해진은 뒤통수를 긁으며 고시원 주인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혹시나 싶어 미리 예약을 하지 않고 왔기 때문에 단기간 머무는 방이라도 찾기가 어렵다며, 주인은 조금 기다려달라고 했다. 그동안 해진은 로비에 앉아 땀을 식혔다.

고시원은 산속의 고요함을 강조하는 만큼 아주 한적했다. 세상에 급한 일이라곤 하나도 없어 보이는 고양이들이 배를 드러내고 그늘에 누워 잠을 청하고, 건물 근처에는 녹음이 깔려 덥지도 않았다. 보아하니 사람도 별로 없어 보였다. 다행인 일이었다.

‘비행기표를 구할 다른 방법을 생각해봐야겠는데.’

첫 번째 계획이 어그러졌으니 이제 다른 방법을 생각해보아야 했다. 마루투어 팀장에게 부탁하는 방법도 있을 테지만 아무래도 위험하긴 했다.

“하아…….”

마른세수를 하던 손이 문득 뚝 멈췄다. 고시원 주인과 눈이 마주쳤는데 티가 나게 시선을 피하는 것이 아닌가. 해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카운터 쪽으로 걸어갔다.

“저, 혹시 무슨 문제라도…….”

“아, 죄송합니다. 잠시만요.”

해진의 눈치를 잔뜩 보던 직원은 깜짝 놀라며 들고 있던 휴대폰을 화닥닥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본 해진의 머릿속에 경보가 울리기 시작했다.

뭔가가 이상했다. 도망쳐야 한다.

낌새를 눈치챘는지 고시원 주인이 해진에게 진정하란 투로 손을 들어 보였다.

“저, 잠시만 기다리세요. 금방 안내해드릴게요.”

어딘가로 메시지를 보내는 듯이, 카운터 아래로 다급하게 무언가를 만지작거리는 모습을 보니 분명했다. 이환이 미리 이곳에도 손을 써둔 것이다.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말이다.

해진은 주변을 눈으로 빠르게 훑었다. 누군가 매복한 흔적은 아직까지 없는 듯했다. 그러나 더 기다릴 수는 없었다. 해진은 일부러 환하게 웃어 보이며 다가갔다. 고시원 주인이 흠칫 놀라며 또 휴대폰을 감췄다.

“아무래도 생각을 좀 더 해봐야 할 것 같네요. 다음에 다시 오겠습니다.”

“네? 방 바로 안내해드릴게요, 잠시만요!”

붙잡으려는 걸 보니 보상이라도 두둑이 준다고 했나 보다. 해진은 이를 갈며 백팩을 멨다.

‘이런다고 내가 도망 못 갈 줄 알아?’

저기요, 하고 부르는 주인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해진은 밖으로 나섰다. 그대로 길이 아닌 숲으로 내달렸다.

숲속으로 뛰어가며 해진은 앞으로의 계획을 생각했다. 이곳에 머물지 못했을 때 갈 곳도 생각해두기는 했지만 사실 그다지 내키지는 않았다.

숲속은 찌는 듯이 덥고, 해진은 목이 말랐다. 고시원에서 물이라도 받아올걸, 뒤늦게 후회가 되었다.

한참 걷던 해진은 일부러 고시원에서 온 방향의 반대로 걷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이환이나 수색대가 고시원 주인의 말을 듣고 수색을 할까 싶어서였다.

이렇게 뛰쳐나온 게 한두 번도 아닌데, 이상하게 오늘따라 서러웠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요 며칠 동안 이렇게 기분이 오락가락한 적이 많기는 했다. 호화로운 욕조 속에 기분 좋게 있다가도 갑자기 우울해지고, 이렇게 살아남아서 뭐 하나 싶은 생각에 눈물까지 줄줄 흐르기도 했다.

심지어 입맛도 오락가락했다. 갑자기 뭔가가 먹고 싶어서 기껏 어렵게 식당을 찾아내거나 음식을 구해 오면 갑자기 헛구역질이 나면서 방금 전까지 먹고 싶던 게 꼴도 보기 싫어지기도 했다.

원인을 알 수 없었지만, 아마 스트레스 때문이리라고 해진은 짐작했다.

‘다 이환 그놈 때문이야.’

그래, 다 이환 때문이었다. 그 자식만 아니면 제 인생이 이따위로 망가질 일도 없을 테니. 또 서러움에 눈물이 났다. 흐른 눈물을 손등으로 쓱쓱 닦으며 해진은 길을 옮겼다. 물도 별로 없는데 벌써 수분을 낭비해서는 안 되었다.

‘괜찮아.’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나 눈물은 도무지 멈추질 않았다. 결국 해진은 어깨가 들썩일 정도로 울면서 걸어야 했다. 앞이 잘 보이지 않고, 이런 산길에서는 넘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번 흐르기 시작한 눈물은 도무지 멈추질 않았다.

“흑, 흐윽……. 개새끼…….”

이환을 상대로 욕을 해봐도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그는 사실, 이제 이환이 야속하거나 밉지 않았다. 단지 귀찮을 뿐이었다.

그를 떠올리며 미워하려고 해도 그 어떤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제 인생에서 빨리 꺼져줬으면 싶기만 했다.

꺽꺽거리는 울음과 줄줄 흐르는 눈물 콧물에 반해 씩씩한 걸음으로 열심히 숲속을 헤쳐 나가던 해진은 문득, 갑자기 밀려드는 아랫배의 통증에 인상을 구겼다.

‘아, 왜 하필 지금…….’

지금은 아프면 안 되는데.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흐윽…….”

도움을 요청할 사람도 없고, 심지어 병원도 갈 수 없었다. 버텨야 했다. 그러나 해진의 다리는 통증을 이기지 못하고 파르르 떨렸다.

* * *

고시원에 뒤늦게 도착했을 때, 이미 해진은 떠난 뒤였다. 환은 해진이 떠났다는 곳으로 곧바로 내달렸다. 정장에 구두 차림이었으나 아무 상관 없었다.

“강해진 씨!”

숲에 대고 외쳐도 역시나 강해진에게서 대답이 돌아올 리 없었다. 이딴 식으로는 그를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라면 다니지도 않을 흙길을, 미끄럽고 위험한 산비탈을 미친놈처럼 마구 내달리던 이환은 숨이 턱 끝까지 차서 도저히 더 달릴 수가 없을 때가 되어서야 멈추었다.

주변이 핑핑 도는 듯했다. 강해진이 방금 스쳐 지났을지도 모르는 나무와 나무 사이를 비척거리며 살폈다. 사방에서 강해진의 발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한시라도 빨리 찾아야 하는데. 사실 이환의 머릿속에는 이제 아이 따위 안중에도 없었다. 강해진만 멀쩡히 있다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는 넥타이를 풀어 숲의 흙바닥에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4백만 원짜리 재킷도 아무렇게나 던져버리고 계속 걸었다. 강해진이 어디로 갔을지 짐작도 못 하면서 말이다.

숲은 무척 더웠다. 날씨도 날씨거니와 열을 내서 더 후끈했다. 와이셔츠는 단추를 풀어 팔꿈치까지 걷고, 그래도 열이 식지 않아서 목 언저리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이런 더위 속에 걷는 것은 평소의 환이라면 딱 질색이었다. 땀이 나고, 불쾌하고, 비위생적인 야외에서 감염의 위험까지 무릅써야 하지 않나. 그러나 오늘만은 그런 것 따위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강해진은 지금 저보다 더 고생하고 있을 터다. 이렇게 더럽고 위험한 숲을 혼자서 헤매고 있을 거란 말이다. 자그마한 밀가루떡 같은 놈이 낑낑거리면서 쏘다니는 꼴을 상상하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한참 걷던 이환은 자신이 너무 숲 깊이 들어왔음을 깨달았다. 뒤를 돌아보니 다행히도 떠나온 고시원이 보였다. 길은 잃지 않은 모양이었다. 강해진도 길을 잃거나 하지 않아야 하는데. 산에서 맹수라도 만나면……. 아아!

끔찍한 생각에 환은 스스로를 꾸짖으며 마구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답지 않게 너무 흥분했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강해진을 찾으려면 일단 저 혼자 숲을 헤매서 될 일이 아니었다. 어서 흥신소들과 연락을 취하고, 산속을 수색할 수 있는 팀도 다시 불러야 할 터다. 그는 억지로 이성을 유지하며 고시원 건물이 보이는 쪽으로 걸었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엄지로 꾹꾹 눌렀다.

막막하고 갑갑했다. 강해진은 지금 거의 목숨을 걸고 도망치고 있다. 그 조그마한 몸으로, 심지어 임신을 했을지도 모르는 상태로.

대체 왜?

“내가 싫어서…….”

얼떨결에 혼잣말을 내뱉은 환은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그에게 빌었어야 했다. 잘못했다고, 당신에게 심하게 대했다고.

아직도 강해진에게 사과 한 마디 하지 않았음도 그제야 깨달았다.

불현듯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작은 해일처럼 들썩였다. 몰아치고 휘돌며 이환의 마음을 일그러뜨리고, 잠식했다.

이환은 제자리에 선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앞이 보이지 않고 막막했다. 이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이런 좌절감은, 처음이었다.

스스로 자랑하던 이성은 사라지고 감당하기 힘들 감정만이 정신없이 그의 속에서 들끓었다.

강해진이 자신을 이렇게 만들었다. 이렇게 이성을 놓고 웃긴 몰골을 하고 숲을 헤매게 만들었다. 환은 고통스러웠다. 제 우스운 모습 때문이 아니었다.

어쩌면 다시 강해진을 못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게 그는 가장 고통스러웠다.

어쩌면 그에게 영영 용서를 받지 못할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서.

그때 보았던 무심한 눈처럼, 그 밀가루떡 녀석이 앞으로도 저를 그렇게 볼까 봐.

애써 숨을 고른 환은 다시 걸음을 이었다. 그러나 몸속에 들끓는 좌절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 * *

또다시 숲으로 사라졌을 강해진을 찾기 위해 환은 흥신소들과 다시 연락을 취했다. 수색대는 일부러 고용하지 않았다.

강해진을, 자신의 오메가를 짐승처럼 포획하고 싶지는 않았다. ……이미 그의 미움을 있는 대로 다 사놓고, 이제 와 무슨 소용인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말이다.

덕분에 수색은 무척 느려졌다. 어쩔 수 없었다. 다시 강해진을 만났을 때, 그의 미움을 더 사고 싶지는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수색에 진전이 없지는 않다는 거였다. 문제는 해진의 이동 속도를 쫓아가기가 어렵다는 점이었다. 겨우 단서를 찾아서 따라잡았나 싶으면 이미 달려간 곳에는 해진이 사라진 뒤였다.

그렇게 몇 주가 흘렀다. 이환은 업무도 안중에 없이 강해진만을 찾아 헤맸다.

덕분에 박 비서가 죽을 맛이었다. 그의 옷을 챙겨주려고 서울에서 달려오는 내내 박 비서는 이번에야말로 사직서를 내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상관이 심적으로 불안정하고 개인적인 고통에 시달릴 때에 곁을 떠나는 건 인간적으로 못 할 짓인 것 같긴 하지만, 그에게서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던 나날을 떠올리면 아직도 이가 갈렸다.

여태까지 키스틸 레저 전무의 비서로 계속 근무한 이유는 오직 돈 때문이었지만, 최근의 업무과중은 국내에서도 탑 수준에 드는 월급으로 상쇄가 되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리고 최근에 자동차 할부가 끝났다는 점도 그의 용기에 한몫을 했다.

품에 안은 사직서를 마치 대검이라도 되는 듯이 든든하게 생각하며 차에서 내린 박 비서는 이환 전무를 만나면 곧바로 사직 의사를 밝히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의 몰골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버렸다.

“……전무님? 꼴이…….”

평소라면 ‘꼴’이라는 단어는 감히 전무 앞에서 절대 꺼내지 못할 표현일 테지만 그 정도로 박 비서는 충격을 받았다. 이환은 정말로 ‘거지 꼴’을 하고 있었다.

이환은 그에게서 와이셔츠를 받자마자 차 운전석에 들어가 갈아입었다. 박 비서가 얼른 조수석에 올라탔다.

뒤이어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옷가지들, 양말을 차례대로 척척 받으면서 박 비서는 그래도 제 상사의 성질머리가 바뀌진 않았음에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이환은 그가 건네준 새 옷을 입고는 차에 달린 백미러를 보며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 모습을 옆에서 박 비서가 흘끔흘끔 훔쳐보았다.

며칠 면도를 하지 않았는지 꺼슬하게 오른 수염 자국, 허옇게 부르튼 입술, 헝클어진 머리칼.

지독한 결벽증으로 사람을 돌아버리게 만드는 제 상사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괜찮으……십니까?”

결국 조심스레 묻자 이환은 뭘 그런 걸 묻느냐는 투로 박 비서를 노려보았다. 잠도 못 잤는지 흰자위는 시뻘겋게 충혈된 상태였고, 가뜩이나 진한 쌍꺼풀은 세 겹이 되어 있었다.

상사의 몰골에 적잖게 충격받은 박 비서는 품에 고이 넣어 온 사직서를 그만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는 충격을 상쇄하지 못한 채로 몇 가지 보고를 했고, 환은 그가 가져온 서류들을 읽은 뒤 서명했다. 모두 이메일로 미리 안내를 받았던 사항들이었다. 대충 읽어 넘겼지만 말이다.

박 비서는 중요한 이슈 몇 가지를 설명했지만 이환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일 따위는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당장 강해진이 어느 산에 배를 움켜쥔 채로 쓰러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아주 끔찍한 상상을 스스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강해진이 사라진 지 이제 한 달 하고도 2주나 지나 있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집 없이 지내기에 너무 긴 시간이었다.

흥신소 중 일부는 일을 포기했다. 환이 어마어마한 보상을 제시했음에도 말이다. ‘이거 때문에 다른 일을 전혀 못 한다’는 게 포기의 이유였다. 죄다 쓸모없는 쓰레기들이었다. 어차피 강해진은 제 손으로 찾아낼 것이었다. ……하지만 어떻게?

“하아, 씨발…….”

갑자기 튀어나온 욕에 이번 분기 매출을 읊던 박 비서가 뚝 멈추었다. 이환의 표정이 말이 아니었다.

“저……, 전무님, 조금이라도 쉬시는 게 어떠십니까. 댁에도 한동안 안 들어가셨지 않습니까.”

“방금 말한 거, 이메일로 전송해주십시오.”

“……이미 보내드린 건데…….”

작게 변명했지만 환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가보라고 손짓을 하려던 환은 문득 든 한 가지 생각에 미간을 좁혔다.

“회장님은 어떠십니까?”

“뭐, 별말이 없으십니다. 아직까지는요.”

다행인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라면 마음을 먹는 순간 강해진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릴 수 있었다. 조모보다는 자신이 먼저 해진을 찾아야만 했다.

* * *

그로부터 몇 주의 시간이 더 흐른 뒤였다.

이환은 예상치 못한 곳에서 해진을 다시, 만났다.

강해진과의 매칭률을 확인한 뒤로 이미 그에 대한 온갖 사항을 다 조사했다. 당연히 생모에 관해서도 조사를 했었다.

그의 생모는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 사실은 강해진의 입으로도 들었었다. 그리고 나중에 조금 더 조사하면서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당시 사고는 그의 부모가 같이 당했는데, 모친이 조금 더 오래 살아 있었다고 했다.

그리고 회생의 가망 없는 모친을 직접 간병한 것도 강해진이었다고 했다. 당시에는 ‘이 정도로 가족에 목말라 있다면 아이를 낳아서 직접 키워주는 것까지 가능하겠군.’ 하는 생각밖에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해진을 찾아다니면서, 그는 다른 생각을 했다. 강해진은 가족이라곤 하나도 없는 고아였다. 친척들도 없어서 부모를 잃은 뒤로는 내내 혼자 지냈다고 했다.

가장 마지막까지 강해진의 가족이었던, 그 여인이 어쩌면 해진을 찾을 수 있는 단서를 주지 않을까 하는, 지극히 비이성적인 생각이 든 것이었다.

그녀가 입원했던 병원 근처는 강해진이 마지막으로 발견된 곳과 그다지 멀지 않았다. 그리고 주변에는 축사가 많았다.

축산농가가 대부분인 듯한 작은 마을에 홀린 듯이 갔다가, 소똥 냄새가 지독하게 나는 어느 곳에서 환은 해진을 발견했다.

해진은 축사 건물 옆에서 제 몸뚱이만 한 부대 자루를 나르고 있었다. 가느다란 팔로 자루를 드는 모습을 멀리서 보는데도 낑,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가뜩이나 마른 편이던 몸은 어쩐지 더 마른 듯하고, 기억 속의 해진보다 훨씬 더 유약해 보였다. 머리칼은 염색을 도로 했는지 다시 검정색이었다. 저를 피하기 위해서겠지.

그토록 찾던 강해진이 저곳에 있었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환은 선뜻 다가갈 수 없었다.

환은 두려웠다. 그때처럼 강해진이 제게 그런 표정을 지을까 봐. 꼭 모르는 사람처럼, 그런 눈빛을 할까 봐.

당장 달려가서 그의 손목을 잡아채고, 이딴 곳에 있지 말고 나와 함께 돌아가자고 말해야 했다.

그런데 발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뭐란 말인가.

환은 스스로를 호되게 꾸짖었다.

‘지금 다가가지 않으면 또 놓칠지도 모른다.’

강해진을 다시 놓치는 일만은, 그것만은 어떻게든 피하고 싶었다.

환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용기를 죽어라 쥐어짜낸 적은 처음이었다. 한 걸음, 한 걸음씩 살얼음을 내딛듯 다가갔다.

부대 자루를 나르던 해진이 마침내 그를 발견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환은 걸음을 멈췄다.

“해진 씨.”

다급했다. 재빨리 한 걸음을 다가서며 손바닥을 내밀어 보였다.

“……도망가지 마십시오, 제발.”

해진은 다행히도 돌아서서 달리거나 하지 않았다. 다만 땡그란 눈으로 환을 바라보았다. 환이 도망가지 말란 말을 해서라기보단, 환의 모습을 보고 적잖게 놀란 눈치였다.

그제야 환은 제 꼴이 엉망이란 사실을 되새겼다. 꺼슬한 얼굴에 뭐라도 바르고 나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강해진을 오랜만에 보는데 이런 꼴이라니…….

마른세수를 한 환은 입술을 더듬으며 말을 한참 골랐다. 와중에도 해진의 일거수일투족에 바짝 신경이 쏠렸다.

허벅지 옆으로 늘어져 있던, 먼지가 잔뜩 묻은 손이 움찔, 하고 떨리자마자 환은 가슴이 내려앉는 것을 느꼈다.

“제발.”

다시 한 번 애원의 말을 내뱉었다.

환은 여태 살면서 누군가에게 애원한 적이 없었다. 비즈니스 관계에서도, 혹은 드물게 다른 관계라 할지라도 그가 ‘애원해야’ 하는 존재는 없었다.

그래서 환은 누군가에게 빌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지 못했다. 다만 강해진의 손가락 끝, 발가락 끝이 움직이는 방향 하나에도 신경이 곤두서서 미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눈앞의 그가 또 사라질 것 같아서. 한 번 놓쳤던 그때처럼, 모르는 사람을 보는 듯한 표정을 하고 멀어질 것 같아서.

“잠깐만, 잠깐이면 됩니다. 이야기만 하게 해주십시오.”

“……무슨 이야기요.”

오랜만에 듣는 강해진의 목소리가 몹시 반가웠다. 그래, 자신은 누군가를 이렇게 진심으로 반가워해본 적도 없었다. 환은 그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다는 충동을 느꼈다.

“강해진 씨에게…….”

제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 말고, 강해진의 목소리를 더 듣고 싶었다.

“사과를,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이 말을 해야 할 때였다.

“당신에게 내 잘못을 빌 기회를 주십시오.”

시선을 떨구고 싶었으나 강해진을 마주하고 싶기도 했다.

당장 달려가고 싶었으나 이곳에 서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처음 배운 모순이 환의 발목을 당겨댔다. 그는 제 몸이 땅속으로 파고드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놓았다.

“그거면 됩니다. 진심입니다.”

약 3미터. 두 사람이 떨어진 거리 사이에 적막이 차올랐다. 그리고 갑자기 축사 안에서 소 한 마리가 ‘음무’ 우는 소리를 내어 적막을 깨뜨렸다.

와중에도 환의 시선은 여전히 해진에게 붙박여 있었다. 그는 허벅지 옆에서 움찔거리는 해진의 손가락과 빠르게 깜박이는 그의 두 눈을 보았다.

그리고 한숨을 내뱉고 살며시 열리는 입술을 보았다.

“……이제 와서 무슨 사과를 한다고요.”

뒤이은 강해진의 말에는 어조가 없었다. 아니, 지친 듯이 들리기도 했다.

“저는 전무님한테서 사과받고 싶지 않아요. 이미 그럴 때는 지났어요.”

‘때가 지났다’는 말에 환의 마음이 바삭바삭 부서졌다. 그는 입이 바짝 마르는 것을 느꼈다. 안달이 나는데, 눈앞에서 쏟아지는 물을 보는 것 같은데 손바닥조차 뻗을 수가 없었다.

“그냥 저는 전무님이 저를 내버려두셨으면 좋겠어요. 이렇게 찾아오지 마시고요.”

굳건하게 서 있던 해진의 발이 돌아섰다. 환은 덜컥 겁이 나서 한 발자국을 떼었다가, 제 동작 하나가 해진에게 위협이 되지는 않을까 싶어 다시 바로 섰다.

정작 해진은 무덤덤하게 걸어 축사 안쪽으로 들어갔다. 환은 망설이고, 또 망설이다가 축사 입구까지만 걸어갔다.

해진은 입구에 선 환을 신경 쓰지도 않고 부대 자루 같은 것을 집어 들고는 여물통에 쏟아부었다. 그 동작이 제법 능숙해 보였다.

축사 안에는 양쪽으로 소가 꽉 차 있었고, 해진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다. 이곳에서 얼마 동안 지낸 걸까. 고무장화를 신고 더러운 옷차림에도 전혀 개의치 않는 강해진의 모습에서 그가 얼마나 고생을 했는지 모조리 드러나는 듯했다.

“……해진 씨.”

이름 한 번을 내뱉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했다. 환은 빈주먹을 쥐었다 펴며 그가 여물통을 다 채우고 저를 바라볼 때까지 기다렸다.

“아직도 계셨어요?”

무덤덤하니 제 쪽을 한 번 쳐다본 해진은 이번에는 거대한 갈퀴 같은 것을 가지고 와서는 소 우리 안쪽 바닥을 긁어냈다. 지독한 냄새가 진동하는데도 해진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오늘은 몇 명을 데려왔는지 모르겠지만, 저를 지금 당장 납치해서 데려간다고 해도 저는 또 도망칠 거예요.”

무시무시한 말을 내뱉으면서도 역시나 표정에는 변화가 없었다.

“또 붙잡으셔도 또 도망칠 거고, 세 번, 네 번, 수십 번이 되어도 저는 계속 도망칠 거예요. 그렇게만 아세요.”

“저 말고는 아무도 없습니다. 오늘은 정말로, 사과를 하고 싶어서 온 겁니다.”

환이 우리 안쪽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해진이 갈퀴를 움직이던 손을 느리게 했다. 환은 그 변화에 긴장하며 아주 느리게 다시 한 걸음을 더 들어왔다.

지독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정체 모를 물질이 구두에 질퍽하게 밟혔으나 상관없었다.

“말했잖아요. 사과받고 싶지 않다고요.”

이번에는 조금 날이 선 목소리다. 갈퀴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날 선 해진의 반응에 환 역시 긴장감을 늦추지 않았다. 갈퀴를 꽉 움켜쥔 강해진은 당장이라도 이 축사를 뛰쳐나가 순식간에 제 눈앞에서 사라질 것만 같았다.

그리고 환은 강해진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사람이란 사실을 이제 알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너무 늦은 말이지만,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었다.

“미안합니다.”

설령 그가 다시 제 눈앞에서 사라진다 하더라도, 이 말은 해야 했다.

“미안합니다, 강해진 씨.”

자신이 할 수 있는 한 가장 깊은 무게를 담아 한 음절씩 진중하게 내뱉었다. 이것으로 조금이라도 강해진이 제 고통을 알아주었으면 했다. 그를 찾으러 다니는 지난 시간 동안 얼마나 미칠 것 같았는지, 얼마나 괴로웠는지, 그래서 얼마나 후회하고 있는지…….

강해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환은 당황스러웠다. 좋지 않은 징조로 보였다.

“……웃기고 있네.”

그 곱상하기만 하던, 바보같이 헤실헤실 웃기만 하던 강해진의 얼굴이 독기를 담고 일그러졌다.

“사과? 미안해?”

환은 그제야 깨달았다. 강해진은 지금, 저를 경멸하고 있었다.

“할 거면 내 인생 망치기 전에 진작 했어야지, 이제 와서 뭐? 숨어서 조용히 살려는데 기어코 찾아내서는 미안하다고? 그딴 말은 적어도 그 좆같은 호텔에다가 나 가두기 전에, 아니, 그 좆같은 약 나한테 처먹이기 전에 했어야지, 씨발!”

다다다 말을 쏟아낸 해진이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환은 그가 내뱉은 말이나 저를 보는 독기 어린 눈빛보다는 들썩거리는 저 자그마한 체구가 더 신경 쓰였다. 저러다가 또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강해진 씨. 잠깐 진정하시고…….”

“씨발, 너나 진정해, 개새끼야!”

그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기세가 나오는지, 빽 소리 지르는 것을 보고도 그에게 다가갈 수는 없었다.

해진은 혼자서 심호흡을 한 번 하더니 갈퀴를 반대쪽 손으로 옮겨 쥐었다. 잔뜩 화가 난 얼굴도 가라앉았다.

“내 인생 망칠 대로 다 망쳐놓고 사과 운운하지 마세요. 빡쳐서 돌아버릴 거 같으니까, 그냥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요.”

이번에는 한결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환은 굳은 채로 서서 해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눈앞에 있는 강해진은, 자신이 아는 강해진과 다른 사람 같았다.

저를 보며 멍청하게 웃고, 제게 온갖 마음을 다 주고, 제 몸 아래 짓눌려서 헐떡거리던 그 하찮은 오메가가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강해진은 이제 저에 대한 증오마저도 남지 않은, 제 사과 따위는 필요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다만 제게서 벗어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그가 환에게는 낯설었다.

문득 환은 극심한 공포를 느꼈다.

그와의 관계를, 아니, 강해진이라는 사람을 되돌릴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공포.

이대로 물러날 수는 없단 생각이 들었다. 조심스레 한 걸음을 더 내디뎠다. 다시 갈퀴를 움직이려던 해진의 눈에 바짝 날이 섰다.

“오지 마세요.”

“해진 씨, 내가 해진 씨의 고충을 이해는 하지 못하지만, 진심으로…….”

“저. 임신했어요.”

환은 숨을 멈추었다.

……방금, 뭐라고…….

“가까이 오면 네 애새끼랑 같이 뒈져버릴 거야.”

해진이 갈퀴를 무기처럼 고쳐 쥐었다.

환은 해진을 보며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눈조차도 깜박이지 못하고 굳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면서 해진은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이상하다는 생각은 사실 아까 마주쳤을 때부터 했다. 그렇게 자기 관리 철저하고 깔끔 떠는 놈의 꼴이 엉망이잖은가.

‘그래 봤자 하나도 안 불쌍하지만.’

천하의 이환이다. 제 인생을 이렇게까지 조져놓은 놈이다. 저 하나 죽는다고 눈 깜짝할 놈이 아니지만, 아이라면 어떨까.

그가 그렇게 목숨 거는 아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않을까.

그리고 해진의 판단은 옳았다. 굳어서 아무 말도 못 하는 저 꼬락서니를 보니 말이다.

사실 되는대로 내지르기는 했지만, 정말로 임신을 했는지 확신할 수는 없었다. 다만 지난 얼마간의 제 몸 상태를 생각해보면 가능성이 있을지도 몰랐다.

해진은 굳은 환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물러났다. 이환이 제정신으로 돌아오기 전에 어서 수단을 강구해야 했다. 마침 소 한 마리가 또 ‘무우’ 하고 울었다. 울음이 들린 쪽을 보던 해진은 문득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가까이 오지 말라고, 분명히 말했어.”

멍한 환을 보며, 한 손으로는 갈퀴를 잡은 채로, 해진은 소 우리 안쪽으로 손을 넣었다. 그리고 바닥에 쌓인 소똥을 한 움큼 집어 제 몸에 발랐다.

저 개자식은 섹스할 때도 제 몸에 닿는 게 싫어서 장갑을 끼던 놈이었다. 그 정도로 결벽증이 심하니 이 꼴을 보고도 다가오진 않을 터다.

멍하던 환의 눈빛이 조금씩 돌아오기 시작했다. 해진은 짐작했다. 아마 저 자식은 돌아서서 욕을 하며 나가고, 곧 대기 중일 다른 사람들이 뛰어 들어올 거라고.

‘괜찮아. 잡혀도 다시 도망치면 돼.’

몇 번이고 잡혀도 몇 번이고 도망칠 거란 말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두려움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환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해진은 경악했다.

그가 저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깨달은 듯한 얼굴을 하고.

“오, 오지 말라고!”

해진은 소똥을 한 움큼 더 집어서 이번에는 제 얼굴과 머리까지 치덕치덕 발랐다.

그러나 환은 걸음을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얼마짜리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 구두로 구정물을 질퍽질퍽 밟아가며 해진을 똑바로 마주한 채 거리를 좁혀 왔다.

이게 아닌데. 그 결벽증에 찌든 미친놈이 저 하나 잡자고 이럴 리가 없는데. 해진은 이제 소똥을 집어다 그에게 던지기 시작했다.

“꺼져! 꺼지라고!”

슈트 위에 정통으로 맞은 소똥이 질퍽하게 뚝뚝 흘러내리는데도 환은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이번에는 해진이 고장 난 듯 굳어버렸다.

마침내 코앞까지 다가온 이환이 저를 껴안았을 때에는, 거의 기절할 지경이었다.

“아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이게 아닌데.

“나는 그저, 당신이 더 이상 고생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꿈일지도 모른다. 이환이 소똥투성이의 저를 안고 이렇게 절절한 목소리로 속삭이다니. 그래, 현실이 아닐 거다. 여물을 주다가 잠깐 졸았나 보다…….

해진은 머릿속이 핑 도는 것을 느꼈다. 축사 일이 힘들어서 며칠 무리를 한 탓일까. 아니면 충격 때문일지도 몰랐다.

뭐가 되었든 지금, 이 자식을 밀쳐내야 하는데……. 생각은 요원하고 몸은 뻣뻣했다.

“흐으…….”

“해진 씨?”

반사적으로 그의 옷깃을 틀어쥐었다. 쓰러지면 안 돼, 다짐이 무색했다.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해진은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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