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10/16)

병원으로 가는 그 짧은 시간이 환에게는 몇 시간처럼 길었다. 기사에게는 도대체 몇 시간이나 걸리느냐고 삼십 초마다 한 번씩 화를 냈다.

강해진을 붙잡았다. 그것도 도망치는 걸 잡은 게 아니라 호텔 근처에서, 쓰러진 채로 발견되었다.

이환은 그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찾기가 힘들던 강해진이, 어째서 호텔 근처에 있었을까.

‘제 잘못을 알아서 뒤늦게 빌러 온 건가?’

이환은 콧방귀를 꼈다. 이제 와서 용서를 빈다고 내가 쉽게 받아주리라고 생각하나 보군. 정말 미련하기 그지없는 오메가다.

‘제대로 혼쭐을 내주지.’

굳게 결심했지만 어째서인지 손이 자꾸 떨렸다. 차 안에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숨이 턱턱 막히고 이유 모르게 갑갑해져 왔다.

결국 이환은 병원을 200미터 남겨두고 차에서 뛰어내려 8차선 도로를 가로질러 달리기 시작했다. 저를 향해 울리는 클랙슨 소리와 쏟아지는 욕설을 무시하고, 그야말로 미친놈처럼 병원 건물 쪽을 향해 일자로 달렸다.

조금이라도, 일 초라도 늦으면 그를 다시 놓칠 것만 같았다. 다시 강해진을 잃을 생각을 하자 눈앞이 깜깜했다. 졸도라도 할 것처럼 막막한 기분이 들었다.

이환이 헐떡거리며 도착했을 때 해진은 응급실 구석 침대에 링거 주사를 꽂고 누워 있었다. 의식은 없었다.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해진을 보자마자 뚝 멈췄다. 할 말이 많았는데, 제대로 혼을 내주어야 하는데, 아무 말도 생각나지 않았다.

그는 ‘두려웠다’. 그것 말고는 이 감정을 표현할 길이 없었다.

강해진이 눈앞에 있는데, 드디어 찾았는데, 그가 행여 잘못된 것이 아닐까 싶어 두려웠다.

멍하니 서 있던 차에 마침 간호사가 해진의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환은 마른침을 삼키며 어렵사리 걸음을 떼었다.

“상태 어떻습니까? 심각합니까?”

간호사가 링거액을 조절하며 그를 흘끔 보았다.

“보호자 되세요?”

환은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이 강해진의 보호자일까.

“보호자 모셔오세요.”

미처 대답할 틈을 놓친 사이에 간호사는 말을 툭 던져두고 그대로 사라졌다.

환은 그제야 누운 강해진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고생을 했을 텐데 못난 구석은 보이지 않고 그의 얼굴은 여전히 뽀얬다. 아니, 오히려 더 창백해 보이기까지 했다.

반면 새카만 머리칼은 무슨 짓을 했는지 노랗게 탈색이 되어 있었다. 몇 군데는 탈색이 덜 되었는지 얼룩덜룩한 갈색이었다. 옷 꼴도 말이 아니었다.

몇 주 동안 만져보지도 못한 제 오메가가 코앞에 있었다. 그것도 다 죽어가는 상을 하고서. 환은 이 사실이 제게 충격으로 다가왔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가슴에서 어떤 커다란 덩어리가 떨어진 것 같았다. 숨이 턱 막히고 눈앞이 흐려지는 이 감정이 무엇인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강해진을 만나면 알 수 있으리라 믿었는데. 이렇게 뻗어 있어서야.

‘도망을 칠 거면 몸이라도 좀 제대로 챙길 것이지.’

아픈 강해진을 보니 꽉 막혀오는 이 기분이 그저 갑갑함일 뿐이리라 생각하며, 그는 누운 강해진 쪽으로 허리를 숙였다. 조심스레 얼굴 쪽으로 손을 뻗었다.

여전히 여려 보이는 뺨에 손끝이 닿기 직전, 눈 감은 해진의 미간이 움찔했다. 동시에 환은 손을 뚝 멈췄다.

빈주먹을 쥐며 손길을 거두었다. 꼭 박물관 같은 곳에서 만져서는 안 되는 귀한 것에 손을 대었다가 들킨 것처럼 수치스러웠다. 그를 만지려 했던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저답지 않은 행동이라고 환은 생각했다.

“하아…….”

한숨이 절로 나왔다. 이런 꼴로 돌아올 줄 알았다면 더 빨리 찾았어야 했는데. 스스로를 책망했다.

마음이 번잡스러웠다. 강해진을 찾을 때에는 감히 도망친 죗값을 치르게 해주겠다고만 생각했는데, 누운 그를 보니 그런 생각은 하나도 들질 않았다.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강해진의 얼굴이 아닌, 이불 옆에 가지런히 놓인 손을 쥐었다. 미미하게 온기가 느껴졌다. 그 희미한 온기에 안도하며 환은 비로소 인정해야 했다.

그는 강해진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그것도 몹시.

그리움, 회한, 그런 것은 환에게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그딴 것은 제대로 사는 데에 방해만 될 뿐이다. 혈육도 없이 자랐고 친구를 가져본 적도 없는 그는 누구를 그리워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환은 지금 해진의 앞에서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으로 약의 쓴맛을 보고 당혹스러워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 말이다.

환은 사실 낯선 것은 싫어하지 않았다. 배우는 일도,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할 의향이 있었다. 그가 싫어하는 것은 비효율성과 쓸데없는 군더더기였다.

강해진은 제게 필요한 존재였다. 그러니 이 지독하게 거슬리는 감정 역시 필요하다면 배울 의향이 있었다. 그를 곁에 꽁꽁 묶어두고서라도 말이다.

“……나는.”

환이 조심스레 혼잣말을 꺼냈다.

“두 번 다시는 당신을 잃지 않을 겁니다. 알겠습니까?”

눈을 감은 채 누운 그가 듣고 있는지도 알 수 없지만 입 밖으로 말을 꺼낼 수밖에 없었다.

생전 처음 가져보는 이 감정이 스스로 인정하기 싫을 만큼 커져 있었다. 물이 넘치듯이 그것을 밖으로 꺼내는 것은 제 의지와 상관이 없었다.

그리고 환은 누운 강해진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창백하게 핏기가 다 빠진 얼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원래 이렇게 입술이 붉었던가?’

환은 자신이 해진의 얼굴도 잘 기억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본래도 필요한 사람이 아니면 일부러 얼굴을 기억하지 않으니까.

몇 주 만에 본 강해진은 그의 기억 속에 남아 있던 흐릿한 이미지가 아니었다. 속눈썹은 붙이기라도 한 것처럼 길고, 뺨은 몹시 부드러워 보였으며 콧대는 오뚝했다. 턱선도, 입술선도 몹시 고왔다.

‘이런 얼굴을 내가 왜 기억 못 하고 있었지?’

그는 황당하기까지 했다. TV에서 보더라도 기억에 남을 정도로 예쁜 얼굴이었다. 새삼 제 오메가와 아이를 낳는다면 제법 괜찮은 얼굴이 나올 것 같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멍하니 해진을 보고 있던 그는 문득 이러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딴 싸구려 병원 말고 대학 병원으로 옮겨야 했다. 아니, 그냥 제 오피스텔로 해진을 데려가도 될 터다. 치료는 닥터 최가 하면 되니까.

겨우 찾은 강해진이 혹시라도 잘못되지 않도록 한시라도 빨리 제 오피스텔에 가두어놔야 했다. 이러다 다시 도망이라도 간다면, 그때는…….

원무과에 가 있는 박 비서에게 전화를 걸려고 휴대폰을 꺼내는데, 마침 전화가 오고 있었다. 그러나 발신자는 박 비서가 아니었다.

미간을 구긴 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꼭 꿈에서 깬 것 같은 불쾌한 표정으로 응급실을 나섰다.

“예, 회장님.”

환의 걸음 소리가 온전히 멀어지고 나서야 해진은 실눈을 떴다.

그는 누운 채로 아주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폈다. 이환이 없음을 몇 번이나 확인한 뒤에 슬그머니 상체를 일으키고 링거 주사를 뽑았다.

침대에서 내려오자 현기증이 돌았지만 이대로 있을 수는 없었다. 주변을 기민하게 살피며 나갈 길을 확인했다.

이환은 전화를 끊고 싶은 충동을 꾹 참았다. 상대방이 유 회장이 아니었더라면 정말로 끊었을 터다.

- 신아연은 잘 만났고? 매너는 잘 지켰니?

“제가 어린아이입니까.”

시큰둥한 말에 수화기 너머 유 회장이 조소하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쓸데없는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급한 용건이 있으신 게 아니면 이만 끊겠다고 말하려던 순간, 주변을 살피던 그의 눈에 문득 익숙한 등이 휙, 지나가는 게 보였다.

“……?”

- 듣고 있니?

유 회장이 재촉했지만 더 듣고 있을 여력이 없었다. 어떤 이상한 예감이 그의 뒷덜미를 스쳤다.

인사 한 마디 없이 전화를 끊은 환은 익숙한 등이 사라진 곳으로 달렸다. 설마, 아니겠지. 아니겠지. 속으로 몇 번이나 스스로를 다잡았지만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불길함으로 온몸의 신경이 찌릿하게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막 환자 하나가 응급실로 들어오는 바람에 시야가 가려졌다.

‘어디로 갔지?’

그가 사라진 곳에 살짝 열린 계단문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다. 환은 거의 본능적으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위쪽 계단에서 발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환은 계단을 달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해진 씨?”

추측한 이름을 크게 내뱉자 마치 반응하듯 위에서 타박타박 올라가던 발걸음이 갑자기 빨라졌다. 동시에 이환의 등에도 소름이 쭉 끼쳤다.

강해진이, 다시 도망치려 하고 있었다. 제 손에서. 단 몇 분 만에.

“강해진 씨!”

그 역시 속도를 내어서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5층 정도를 올라갔을까.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을 정도 거리까지 좁혀졌다. 그때서야 올라가던 이가 고개를 돌렸다. 눈이 마주쳤다. 강해진이 맞았다.

도망가지 말라고, 제발, 내 손에서 벗어나지 말아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환은 실감이 나질 않았다. 내가 어떻게 너를 찾았는데.

그리고 그 때 강해진이 무언가를 던졌다. 펑, 하는 소리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다. 무척 맵고 독했다.

“이게 무슨……!”

소매로 코를 가렸지만 기침이 심하게 났다. 해진은 그사이에 다시 계단을 뛰어 올라가고 있었다. 환은 뒤늦게 해진을 쫓아갔다. 눈물과 콧물이 나서 엉망이었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단순하지만 긴박한 추격전은 계단이 끝날 때까지 이어졌다. 옥상에 도착하자마자 환은 어마어마한 바람에 넘어질 뻔했다. 굉음이 귀를 먹먹하게 했다.

아직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시야 너머, 헬기 한 대가 옥상에 착륙해 있었다. 그리고 강해진이 그쪽으로 달리고 있었다.

‘안 돼.’

발버둥 쳤으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눈이 매워서 제대로 뜰 수도 없었지만 그는 바득바득 바닥을 기었다. 고작 저 오메가 하나를 잡겠다고, 그 이환이 옥상 바닥을 개처럼 기기 시작했다.

“해진, 씨…….”

그러나 해진이 헬기에 올라타기까지 그가 이동한 거리는 고작 몇 미터였다.

아주 잠깐, 문이 닫히기 직전 눈이 마주쳤다. 환의 흐린 시야로도 그의 표정을 알아볼 수 있었다.

강해진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 어떤 감정도, 심지어 두려움마저도 보이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남처럼 보고 있었다.

본래 저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이었던가. 환은 멍청하게도, 그가 떠나는데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었다.

헬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멀어진 뒤에야 그는 분노에 찬 채로 괴성을 질렀다.

해진은 멀어지는 건물 옥상을 내려다보았다. 옥상 위에 선 이환의 모습이 작게 보였다. 땅을 짚은 채 망연하게 엎드린 그가 좀 낯설었다.

‘하아……. 조금만 늦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

다행히도 헬기가 제시간에 정확히 와주어서 도망칠 수 있었다. 아니었으면 저 미친놈에게 붙잡혀서 지금까지의 노력이 죄다 허사가 되었을 것이다.

해진은 한숨을 내쉬고는 헤드폰을 꼈다. 헬기 소리가 줄어들자 뒤늦게 긴장이 풀리고 몸에 힘이 빠졌다. 계단을 뛰느라 무리한 다리도 아프고, 배도 은근하게 아파왔다. 몸이 덜덜 떨렸다.

‘개자식. 내가 순순히 잡혀줄 줄 알고?’

내가 어떻게 도망을 쳤는데. 물론 해진은 이렇게 자신이 길에서 쓰러져 붙잡힐 가능성도 염두에 두었다. 시기가 조금 빨랐지만 말이다.

창밖을 내다보자 서울 시가지가 멀어지고 있었다. 그는 가방을 껴안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 헬기 렌털 비용 역시 이환의 블랙카드로 미리 결제해둔 것이었다. 민간 회사에서 헬기 렌털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해진은 처음 알았다.

결제 내역은 ‘명품 AS 서비스’로 되어 있을 것이다. 이것만큼은 렌털 회사 이름이 남거나 하지 않도록 각별히 부탁했기 때문이었다. 렌털 회사를 알게 될 경우 이환이 이동 경로를 조사할 수도 있으니까.

물론 예약할 당시에는 키스틸 전무 이환의 이름을 마음껏 팔아먹었다. 전무님께서 조심스레 움직여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 말하면 이 헬기 대여 회사뿐만 아니라 보통 열에 아홉은 목소리를 낮추곤 했다.

쓰러진 직후, 앰뷸런스에 실려 가며 해진은 간신히 헬기 회사에 전화를 할 수 있었다. 자신이 가게 될 병원의 옥상으로 지금 당장 출동해달라 말하고서야 다시 정신을 잃었다.

사전에 ‘긴급 시 즉각 출동 가능할 것’을 조건으로 건 게 다행이었다. 이런 사건이 있을까 봐 대비해서 대여한 것이니.

병원 건물은 이제 손톱보다도 더 작게 보일 만큼 멀어졌다. 이환의 모습도 구분할 수 없었다. 자꾸 아래쪽을 보니 멀미가 날 것 같아서 해진은 똑바로 앉았다. 속이 조금 안 좋기는 해도 아직은 버틸 만했다. 아니, 버텨야만 했다.

* * *

병원이 한바탕 뒤집혔다. 이환이 있는 대로 성질을 부리며 병원 직원들을 괴롭혀서였다.

그는 고등 교육을 받았고 상식이 있는 지성인이지만 그 지성은 잠시 기능을 잃어버렸다. 강해진 때문에 사고가 굳어버린 탓이었다.

“환자 관리를 어떻게 하길래 의료진들이 보는 앞에서 제 발로 걸어서 나간답니까? 그것도 ‘응급’ 환자가 말입니다.”

‘응급’에 방점을 찍어 말한 환은 제 말에 다시 속이 터졌다. 그랬다. 강해진은 무려 응급한 상태였다. 그런데도 지금 병원에 처박혀 있지 않고 도망을 친 것이었다.

환이 구둣발로 원무과 데스크를 꽝! 찼다. 어찌나 세게 찼는지 데스크에 쩍, 금이 갔다. 말리려고 달려온 의사를 단번에 제압해 데스크 위에 짓누른 그는 어금니를 갈며 말했다.

“당장 찾아내.”

누구 하나 정말로 잡아 죽일 것 같은 흉흉한 기세에 아무도 감히 그를 말리지 못했다.

한바탕 소동이 일고 박 비서가 뒤늦게 달려와서야 겨우 그를 말렸다. 그러고도 이환은 화가 풀리지 않아 씩씩거렸다.

병원에서는 강해진의 상태를 제대로 알려주지 않았다. 그것이 환을 더 화나게 했다.

보호자가 아니면 알려줄 수 없다는 말에 자신이 보호자라고, 그냥 제게 다 말하면 된다고 했지만 원무과 직원의 단 한 마디 물음에 환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환자분과 무슨 관계 되세요?’

그는 그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강해진과 자신이 무슨 관계인지, 그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연인이나 그 비슷한, 그런 낯간지럽고 쓸모없는 관계는 아니었다. 그렇다고 친구라 칭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뭐란 말인가.

대답을 망설이는 것을 보고 원무과 직원은 ‘환자분 보호자가 아니면 자세한 말씀을 드릴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화가 치솟았던 것이다.

‘빌어먹을…….’

회사로 가는 차 안에서도 그는 분노를 참지 못해 턱이 얼얼하도록 어금니를 깨물고 있었다. 머릿속은 온통 강해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한 가지 이상한 사실이 있었다. 어이가 없게도, 이 지경이 되고서도 그는 강해진이 밉지가 않았다.

황당한 일이었다. 바로 며칠 전까지만 해도 이 빌어먹을 오메가 놈을 잡아다 제대로 혼을 내주겠다고 벼르고 있었건만.

지금 녀석 때문에 입은 손해만 해도 얼마인가. 쓸데없이 산에 울타리를 쳤다가 벌금을 물고, 수색대를 꾸리고, 일까지 내팽개치고 그를 찾으러 다녔다.

그리고 다시 그를 잃어버린 지금, 환은 강해진 당사자에게는 전혀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아파서 누워 있던 그 힘없는 모습만, 자그마해서는 한 손에 들어올 것 같던 그 얼굴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저렇게 도망치다 정말 잘못되기라도 하면…….’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는 강해진을 ‘걱정’하고 있었다.

정말 몸이 안 좋다면 지금 당장 치료를 받아도 모자랄 판인데, 무려 헬기를 타고 도망갔다. 대체 어디서 난 것일까. 강해진이 쓴 블랙카드의 내역을 직접 샅샅이 훑었지만 헬기 대여와 관련된 목록은 없었는데.

환은 넥타이를 풀어 차 바닥에 아무렇게나 던졌다. 어떻게 해야 그를 찾을 수 있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그가 제 카드로 예약한 호텔은 진작 연락을 다 취해놓았고, 다른 결제 내역도 다 확인했지만 딱히 단서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가 아프다.’

강해진이 아프다는 사실을 상기할 때마다 체기처럼 가슴 안쪽이 쿡쿡 쑤셨다.

‘그를 보호해야 한다.’

환은 문득 제 품이 아닌 다른 곳에서 쓰러지는 강해진을 떠올렸다. 그것만으로도 피가 거꾸로 치솟는 듯했다.

“박 비서님.”

차 앞쪽 조수석에 앉아 있던 박 비서가 뒤를 돌아보았다.

“내 스케줄, 다 취소하십시오.”

그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지만 환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강해진을 찾으러 갈 겁니다. 제가 직접.”

* * *

강해진이 쓴 카드 내역서는 딱히 건질 만한 게 없었다. 고작해야 쓸데없는 물건들을 구매한 내역들이었고, 카드로 예약해둔 호텔이나 모텔에서는 전혀 연락이 없었다.

수십 군데의 흥신소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따금 강해진으로 추정되는 사진 따위를 보내오기는 했지만 개중 절반은 강해진이 아니었고, 나머지 절반은 찾아갔을 때 이미 강해진의 흔적이 사라진 뒤였다.

물론 다른 결제 내역들도 모두 꼼꼼하게 확인하라고 이르긴 했다. 물건일 경우 배송 주소를 체크하라고도 했다. 대부분은 서울 내 지하철역 보관함, 혹은 편의점이었다. 그리고 환이 직접 찾아갔을 때에는 모두 강해진이 물건을 가져간 뒤였다.

한 가지 바뀐 점이 있다면, 그는 더 이상 강해진에게 화를 내지 않았다. 화를 내고 싶어도 화가 나지를 않았다.

불편한 기색 한 번 없이 그저 묵묵하게 해진의 자취를 찾아다니는 제 상사의 모습이 박 비서의 눈에도 낯설었다. 그 성질머리 더러운 그가 병원에서 난동을 피운 이후로는 한 번도 화를 내지 않았으니 말이다.

카드 회사를 통해 실제 거래처 목록을 받기까지는 시간이 오래 걸렸다. 보통 카드가 아니다 보니 그쪽에서도 내부적으로 처리해야 할 게 많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결국 강해진이 타고 간 헬기 대여 업체를 찾아냈다.

헬기 업체에서 알려준 강해진의 행선지는 경기도 외곽 지역이었다. 박 비서에게는 회사로 돌아가라 이른 이환은 수색대나 운전기사 없이 혼자 차를 끌고 출발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박 비서가 물었다. 제 상관은 구두에 먼지 한 톨 묻는 것도 싫어할 정도로 결벽증이 심하고 입맛도 더럽게 까다로운 자가 아니던가. 혼자 낯선 곳을 헤매다가 화병이라도 얻지 않을까 조금 겁이 났다.

그러나 이환의 표정은 여느 때와 별다를 바 없이 멀쩡했다.

“내가 연락하기 전까지는 귀찮게 먼저 연락하지 마십시오.”

성질머리도 여전하고 말이다.

혼자 차를 몰고 강해진이 있을, 혹은 지나갔을 것으로 추측되는 마을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제대로 된 호텔이 없었다. 위생 상태가 의심스러운 모텔에 묵기는 싫었기에 환은 차라리 제 차에서 몸을 구기고 자는 쪽을 택했다.

박 비서의 말대로 다른 사람을 시켜 찾을 수도 있었다. 지난번 수색대는 해진에게 완패했지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수색대를 시켜도 된다. 혹은 흥신소들에게서 연락이 올 때까지 기다려도 될 터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상하게도 직접, 그것도 혼자 나서고 싶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강해진과 마침내 다시 마주치는 순간, 그 순간에 자신이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독대를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그와 다시 마주쳤을 때 무슨 말을 건네야 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당연하게도 헬기가 도착한 마을에는 강해진의 흔적이 더 보이지 않았다. 이미 벗어난 뒤인 모양이었다.

이환은 갑갑함을 참고 근처에서 끈질기게 수소문을 했다.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얼굴을 맞대고 똑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일은 정말로 지겨웠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보았던 강해진의 모습이, 저를 무심하게 보던 그 얼굴이 떠오르면 가슴 한편이 먹먹해지고 제 지겨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그는 심지어 아픈 몸을 이끌고 도망치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아프기만 한 몸이 아닐지도 모른다.

“혹시 그 남자를 보신다면 이 번호로 바로 연락 주십시오.”

그리고 평소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말까지 덧붙였다.

“부탁드립니다.”

그는 괴로웠다. 강해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몹시 고통스러웠다. 마지막에 저를 보던 그 눈빛을 떠올리면 더더욱 괴로웠다.

어째서 사람 하나를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숨이 막히고 갑갑해질 수 있는지, 그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환은 천천히, 그러나 꼼꼼하게 그의 행적을 찾았다. 노란 머리에 덩치가 작고 예쁘장하며 피부가 흰 사내를 본 적이 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은 환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그도 그럴 것이 논밭과 축사가 대부분인 이 동네에는 젊은 인구가 별로 없어 보였다.

아픈 몸이니 병원에 있을지도 모른단 생각이 들어서 이 근처의 병원은 모조리 수소문을 했다. 그러나 환자의 정보는 알려줄 수 없다는 말로 쫓겨나기 일쑤였다.

“보호자분이세요?”

그 질문만 들으면 이상하게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보호자가 맞다고 겨우 거짓말을 해도 - 그는 그 단어가 너무나 기만적이라고 생각했다 - 환자 본인의 동의가 필요하다는 말을 듣고 물러나야 했다.

차에서 지내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제대로 씻지 못하는 것도 괴로웠다. 성에 차는 스파를 찾기는 불가능해 보였다. 박 비서에게 연락해서 근처에 괜찮은 숙박업체를 찾아내게 하고 새 옷도 보내달라 했지만 그조차도 여의치 않았다.

그리고 문득 환은 그런 생각을 했다.

강해진은, 이렇게 불편하기 짝이 없는 생활을 하고 있단 말인가? 어째서?

키스틸 호텔의 펜트하우스와 룸서비스는 세계적으로도 알아주는 수준을 갖추고 있었다. 자신이 제공한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이런 생활을 할 정도로, 자신이 싫은 것인가.

“하아…….”

한숨이 나왔다. 운전석에 앉은 환은 다소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고 운전석 핸들에다 이마를 대었다.

애초에 처음부터 잘못된 관계였는지도 모른단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아이를 낳게 하려고 그에게 접근한 것부터, 호텔에 가둔 것까지.

어디가 어떻게, 왜 잘못되었는지는 몰라도, 고칠 방법조차 알 수 없어도 그저 잘못되었다는 생각만 가득했다. 머릿속이 맞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삐걱거렸다.

강해진을 되찾아야 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그가 지금 아프니까. 아픈 몸으로 이 빌어먹게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까. 그 약해빠진 조그만 몸으로 말이다.

게다가…… 임신을 했을지도 모르니까.

사실 아이야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강해진만 무사하다면 괜찮았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곰팡이 핀 더러운 모텔 같은 곳에서 끙끙 앓는 강해진의 모습이 벌써 기정사실화되어 있었다.

문득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란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강해진은 저보다 못한 환경에서 고생하고 있으리라. 환은 운전대를 제대로 쥐었다. 시동을 막 걸려던 때, 연락이 왔다. 의뢰를 해놓았던 흥신소 중 한 곳이었다.

- 강해진 씨 선불폰 번호 알아냈습니다.

환의 가슴이 뛰었다.

그 시각, 해진은 푹신하고 깨끗한 이불에 둘러싸인 채 오랜만에 단잠을 자고 일어났다.

오늘 들어온 펜션은 시설이 제법 호화로웠다. 이동하기가 좀 불편하고 너무 산속 깊은 곳에 있어서 일반인들에게 선호되는 곳은 아니지만, 해진처럼 숨어 다니는 사람에게는 딱 알맞았다.

“몸 좀 담가야지.”

기지개를 켜며 일어난 그는 콧노래를 부르며 커다란 침대에서 일어섰다. 깨끗한 카펫을 맨발로 사뿐사뿐 밟고 걸어가며 벽에 걸린 60인치짜리 TV를 켠 그는 널찍한 방 한쪽에 놓인 월풀에 미온수를 받았다.

방 한쪽을 차지한 전면창 너머로는 숲의 전경이 펼쳐져 있었다. 건물 하나, 사람 하나 보이지 않고 나무만 아득하게 펼쳐진 광경은 해진의 마음을 편하게 했다.

월풀에 몸을 담근 채로 이 아름다운 뷰를 실컷 구경할 수 있는 게 이곳의 가장 큰 장점이었다. 마루투어에서 기획을 하며 자료를 찾다가 우연히 본 곳인데, 그때는 자신의 월급으로 도저히 갈 수 없어 우울했었다. 이렇게 오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물론 지금 이곳을 예약하는 데에 쓴 돈은 모두 이환의 카드로 산 명품을 전당포에서 헐값으로 바꾸고 받은 돈이었다.

광대한 자연을 마주한 채 이리저리 스트레칭을 하고 있는데, 마침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문한 조식 서비스가 온 모양이었다. 문을 열어주자 직원이 트레이를 들여 주었다.

인사를 하고 직원을 보낸 해진은 트레이에서 토스트와 잼, 우유를 들고 월풀로 갔다. 월풀 옆 선반에 음식을 두고는 가운을 벗고 욕조 안으로 쏙 들어갔다.

“아아, 좋다…….”

비록 도망 다니는 신세지만 이럴 때는 기분이 좋았다. 어차피 금방 이동해야 하니 즐길 건 다 즐겨야지, 싶기도 하고 말이다.

토스트에 잼을 바르며 해진은 이환을 생각했다. 사실, 요즘 들어 그를 떠올리는 기간이 점점 뜸해지고 있었다. 도망치는 일에 집중한 탓이겠지.

이환이 더 이상 제게 호의적인 감정이 없다는 사실은 호텔에 갇혔을 때부터 알고 있었다. 다만 실감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우습게도 그가 다른 사람과 약혼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야 그 사실이 실감 났다.

‘나는 처음부터 아무것도 아니었어.’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관계이기는 했다. 변변찮게 지내는 고아 오메가가 이환 같은 대기업 전무 알파를 만나서 평범하게 연애를 하다니. 그 사실을 실감하고 나자 오히려 덤덤해지는 것이었다.

원래 불가능한 인연이었고, 원래 틀어질 인연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잠깐이나마 이환을 좋아했던 마음도 닦아낸 것처럼 깨끗하게 지워졌다. 그는 더 이상 슬프지 않았다.

‘약혼이고 나발이고 제발 나 더 이상 찾지나 말았으면 좋겠네.’

싸가지 없는 놈. 결벽증이 그렇게 심한데 연애를 제대로 할 수나 있으려나? 그 여자랑도 손잡고 나서 나한테 했던 것처럼 소독제 바르고 그러는 거 아냐?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려 월풀 안으로 몸을 깊이 잠갔다. 머리끝까지 들어가기 직전, 휴대폰이 울렸다.

‘……뭐지? 아무도 번호 모르는데.’

본래 갖고 있던 휴대폰은 처리한 지 한참 됐고, 저건 비상용으로 갖고 다니는 선불폰이었다. 불안감 속에서 해진은 욕조를 나와 휴대폰을 확인했다.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이환의 번호로.

[접니다. 이야기를 좀 했으면 합니다.]

“이야기 좋아하시네.”

에이, 번호가 털렸으니 이제 이 휴대폰도 못 쓰겠네. 콧방귀를 끼고 메시지를 지우려는데 연이어 몇 통의 메시지가 더 왔다.

[지금 어딥니까.]

[몸이 안 좋다고 들었습니다. 치료를 받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몸이 안 좋다니? 내가? 아무래도 이 개자식이 수를 쓰는 것 같았다. 더 볼 필요도 없으니 차단하고 휴대폰을 끄려고 했다.

[만나는 게 싫다면 음성통화라도 하게 해주십시오.]

[부탁합니다.]

“……어라.”

그 자존심 세고 고고한 이환이 ‘부탁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해진은 눈을 꾹 감았다가 뜨고는 다시 글자를 확인했다.

그리고 바뀌지 않은 글자를 보며 결론 내렸다. 아마 직원에게 시켜서 보냈을 거라고. 지금쯤 그 직원은 아마 엄청 깨지고 있겠지. 그 새끼가 저한테 ‘부탁’이라는 걸 할 리가 없으니까.

빠른 손동작으로 이환의 메시지를 지운 뒤 휴대폰을 끄려는데, 이번에는 전화가 왔다. 해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 전화를 받아도 될까. 어차피 밥만 먹고 여기서 나갈 거라 추적한다고 해도 쫓아올 수는 없을 터다. 저 산을 타고 도망칠 거라서 오는 길에 마주칠 리도 없고 말이다.

해진은 마른침을 삼키고는 천천히 액정화면으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전화를 거절하는 빨간 버튼 대신, 연결시키는 초록색 버튼을 밀었다.

“…….”

전화를 받기는 했지만 선뜻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서 침묵했다.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도 없었다.

예전이라면 겁에 질려서 전화를 끊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했을 테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급한 건 저쪽이라는 사실을 그는 알고 있었다.

- 강해진 씨.

오랜만에 듣는 이환의 목소리는 조금 쉬어 있었다. 역시나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해진은 그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리며 다시 월풀 안으로 들어갔다. 잠깐 물에서 나왔다고 피부에 닭살이 돋쳐 있었다.

- 몸은 좀 괜찮습니까?

뒤이은 물음에 해진은 월풀로 들어가던 동작을 뚝, 멈췄다. 절대 이환이 물을 만한 말은 아니었다.

“내 몸이 어떻든 전무님께서 무슨 상관이에요? 이제 그쪽 아이를 강제로 낳을 일도 없는데.”

아이 이야기는 혹시라도 통화를 듣고 있을 사람이 있기를 바라며 일부러 꺼내었다. 경찰이든 누구든, 이환이 자신을 가둬두고 강제로 아이를 낳게 했다는 사실을 믿지 않더라도 말이다.

- 강제로 낳을 필요 없습니다.

그리고 뒤이은 대답은 해진이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잠깐 할 말을 잃었다. 애초에 제게 접근한 이유가 아이 때문인데, 지금 저를 찾는 것도 아이를 낳게 하기 위해서일 텐데, 이제 와서 낳을 필요가 없다니.

그러나 이것 역시 그가 부리는 수작일 뿐이라고 생각하자 다시 머릿속이 맑아졌다. 이환은 그런 놈이었다. 저를 홀리는 연기 정도야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 놈.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어떤 말도 믿어서는 안 되었다.

“전화 괜히 받은 것 같네요. 저는 전무님과 할 말 없으니 저 찾지 말고 열심히 사세요. 잘못한 거 부디 벌 다 받으시고요.”

- 해진 씨.

다급하게 부르는 제 이름도 전혀 반갑지 않았다. 이 저음으로 듣는 제 이름에 설레었던 적이 전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말이다.

“제 이름도 부르지 마세요. 듣기 싫습니다.”

- 제발, 끊지 마십시오.

뒤이은 말에 해진은 휴대폰을 귀에서 떼다 말고 멈칫했다.

- 부탁합니다. 끊지 말아주십시오.

그 이환이 제게 또다시 ‘부탁’하고 있었다. 해진은 휴대폰을 귀에서 떼고 액정화면에 뜬 번호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옆에서 경찰이나 다른 사람이 대사라도 적어주고 있나? 그러나 그렇다기엔 이환의 목소리가 제법…… 절절했다.

그러나 아무리 절절하다 해봤자 이환은 이환이다. 뉘우친다고 해서 죄가 사라지는 게 아니듯이, 지금 강해진에게 이환은 저를 감금했던 알파일 뿐이었다. ‘좋아했던’ 알파가 아니라.

해진은 욕조 물로 얼굴을 한 번 축였다. 창밖으로 새가 날아가는 게 보였다. 느긋하게 욕조 벽에 몸을 기대며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토스트토 한 입 베어 물었다.

“어차피 추적하셔도 소용없어요. 이 휴대폰 버릴 거고, 저 지금 여기서 나갈 거거든요.”

- 그런 게 아닙니다. 추적 중인 것도 아니고, 그저…….

“그저 뭐요?”

잠깐의 침묵이 이어졌다. 해진은 그 침묵에도 개의치 않고 잼 바른 토스트를 먹고 우유를 마셨다. 맛있는데, 하나 싸달라고 할까 생각도 하면서.

- 그저 강해진 씨를 만나고 싶습니다.

힘없는 목소리는 축 처진 어깨와 아래로 떨군 눈빛을 연상케 했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진짜 이환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낯설었다. 본래 이렇게 자신감 없이 말할 사람이 아닌데. 잠깐 고심하던 해진은 그러나 어렵지 않게 결론을 내렸다.

‘……이 새끼, 수 쓰네.’

이전에도 이환의 다정한 얼굴과 말투에 속았었지. 그 연기에 한두 번 속았던 거야 어쩔 수 없었다지만, 세 번 속을 거라 생각했으면 오산이었다. 내가 바본 줄 아나.

“저는 만나기 싫은데요? 만날 이유도 없고요.”

- 얼마면 됩니까.

뒤이은 말에는 기겁할 수밖에 없었다. 미쳤나, 이 새끼가. 어디서 한 세대는 지난 드라마 대사를 읊고 있어. 먹던 토스트가 체할 것 같았다.

“억만금을 줘도 당신 보기 싫으니까 연락하지 말고, 찾지도 마세요.”

그대로 전화를 끊은 해진은 휴대폰 전원을 끈 뒤 욕조 안으로 빠뜨렸다.

다리 사이 욕조 바닥에 잠겨 있는 휴대폰을 노려보던 해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다시 몸을 깊숙이 담갔다.

생각을 떨치려 했으나 마지막으로 들었던 그의 목소리가 자꾸 귀에 어른거렸다. 절절한 목소리로 제게 애원하는 이환은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

그러나 해진은 이내 몸을 감싸는 온기에 집중했다. 너무 뜨겁지 않게 적당히 식은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자니 근육이 풀리며 생각도 줄어들었다. 절절하던 이환의 목소리는 금세 머릿속에서 지워졌다.

전화가 끊긴 액정화면을 환은 한참이나 멍하니 내려다보고 있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다시 통화 버튼을 눌렀으나 상대방의 전화기가 꺼져 있다는 멘트만 흘러나왔다.

환은 그것을 몇 번이나 반복하고서야 강해진이 자신의 통화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는 수 없이 메시지를 보냈다.

[원하는 대로 다 주겠습니다. 얼마든 상관없으니.]

[잠깐 대화할 시간만 내주십시오.]

[강해진 씨.]

[정말 잠깐이면 됩니다.]

[계약서 수정도 원하는 대로 가능|]

……마지막 메시지는 보내지 않았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왜인지 보냈다간 역효과가 날 것 같았다.

환은 메시지가 차례대로 발송된 것을 확인한 뒤 차 안에 꼼짝도 않고 앉아 오매불망 강해진의 답장을 기다렸다. 답장이 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는 사실, 마지막에 보았던 강해진의 표정이 아직 실감 나지 않았다. 항상 제 앞에서 바보 같은 표정만 짓던 그가 어째서 저를 모르는 사람처럼 바라보았을까. 그럴 리가 없었다.

‘강해진은 아직 나를 좋아한다.’

조금만 잘 대해줘도 멍청하게 웃으면서 기뻐하던 놈이 아닌가. 당연히 지금도 마찬가지일 터다. 다만 이환은 그를 잡을 방법을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그를 붙잡을 수 있을지, 감도 오지 않았다.

다루기 쉬운 녀석이라고 생각했다. 몇 번 웃어주고 밥 좀 같이 먹어줬다고 헤실거리면서 제가 남편이라도 되는 듯이 굴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이렇게 다루기가 힘든 것일까.

환은 운전석에 몸을 깊게 묻은 채로 눈을 감았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온몸의 관절이 삐걱거리는 듯했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렇게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강해진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이 휴대폰을 버린다더니, 정말인 모양이었다.

‘……어쩐다.’

막막했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를 다시 붙잡을 수 있을까. 그가 평생 가지지도 못할 만큼의 돈을 안겨준다 하면 어떨까. 아니, 아니다. 환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금 전만 해도 억만금을 준다 해도 자신을 만나기 싫다고 하지 않았던가.

하지만 막상 눈앞에 돈을 안겨주면 제아무리 강해진이라 해도 달라지지 않을까……. 그러나 환은 이내 강해진이 도망친 시점은 자신이 10억을 준 이후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더 받을 수 있는데도 도망쳤지 않은가.

‘돈으로 안 되면, 어떻게 해야 하지?’

갑자기 공포심이 밀려들었다.

여태껏 강해진을 찾기만 하면 붙잡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모른다. 심지어 돈을 아무리 많이 쓰더라도 말이다.

돈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게 있다는 사실은 환에게 적잖은 충격을 주었다.

특히나 강해진 같은 부류는, 돈이나 몇 푼 퍼주면 금세 헤벌쭉해지는 족속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그는 지금 자신이 싫다고 한다. 제 돈도 싫다고 한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사실이 무너지자 환은 다른 방안을 떠올릴 수 없었다.

누군가가, 아니, 도망친 강해진이 귓가에 대고 말하는 것 같았다. 당신이 살아온 삶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어쩌면 생전 처음으로 실패할지도 모른다고.

“젠장…….”

이제 인정해야 하는지도 몰랐다.

‘강해진은 더 이상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부정하기 싫었던 명제를 떠올리자 헛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어디선가 소음이 들렸다. 뒤이어 ‘호박나이트크럽’이라고 커다랗게 쓰인 트럭 한 대가 요란한 트로트를 울리며 다가왔다. 환은 운전대를 쥐었다. 오늘도 이 빌어먹을 차에서 자야 하니 최대한 조용한 거리로 피신해야 했다.

이 동네는 빌어먹게 무슨 거리마다 술을 처먹고 고함을 질러대는 남자들이 있었다. 몇몇은 환의 차가 어마어마하게 비싼 것을 알아봤는지 대놓고 다가오며 만지려고 들기까지 했다.

혹시라도 저런 놈들이 강해진에게 치근덕거리기라도 한다면. 거기까지 각이 닿자 환의 뒷덜미에 소름이 쭉 끼쳤다.

멍청한 강해진 같으니라고. 제 옆에 딱 붙어 있으면 이런 일은 없을 텐데. 뭐 하러 도망을 쳐서 이런 개고생을 하는지 환의 이성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병원은 다니고 있으려나.’

저를 무슨 불한당 보듯 하던 이 동네 병원 직원들에게 강해진의 사진과 인상착의를 알려주기는 했지만, 지금 녀석이 도망친 패턴을 생각하면 병원에도 가지 않았을 확률이 있었다.

‘임신 초기에는 안정이 중요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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