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와, 서울이다!”
해진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숨을 한껏 들이마셨다. 매연 냄새가 반갑기까지 했다. 곧바로 기침을 하지 않았더라면 정말 그랬을 터다.
며칠 산에서 맑은 공기만 쐬고 왔다고 기관지가 많이 약해진 모양이었다. 쿨럭쿨럭, 요란하게 한바탕 기침을 한 그는 찔끔 나온 눈물을 소매로 닦고는 바로 앞에 있는 건물로 들어갔다. 며칠 산에서 고생한 몸을 쉬게 해줄 시간이었다.
가격대가 좀 있는 에스테틱 숍은 가게만큼이나 직원들 역시 조용한 편이었다.
해진은 ‘피곤해서 잠들 수도 있는데, 그럼 시간 될 때까지 깨우지 말고 그냥 나가달라’는 요구까지 미리 해두었다.
직원들은 의아해하는 눈치였지만, ‘제가 야근이 많아서 쉴 시간이 없네요.’라며 지친 기색을 보이자 더 묻지 않았다.
아마 이환은 자신이 아직까지 산에 있을 거라 생각할 터다. 서울로 왔다고는 생각 못 하겠지. 아니, 어디 있는지 짐작조차 못 할 거다.
제 생각을 하고는 있을까? 아마 수색대에게 맡겨두고 일이나 하고 있겠지. 화만 좀 내고 신경도 안 쓸 거다.
심지어 이 에스테틱 숍은 키스틸 레저 건물에서 5분도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등잔 밑이 어둡다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자기 건물 근처를 수색할 생각은 절대 안 할 테니까.
아, 물론 이환이 이 숍에 들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에 여기로 온 것이었다. 일전 사이가 좋을 때, 그러니까…… 자신과 이환이 아직도 ‘연인’일 때 이환이 피부 관리는 집에서 받는다고 말한 적 있었다.
해진은 전문가가 해주는 경락 마사지를 받으며 그때의 이환을 떠올렸다. 바로 어제처럼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었다. 넥타이 없는 와이셔츠에 짙은 회갈색의 헤링본 재킷.
그리고 저를 보고 웃던 웃음. 그 입꼬리와 긴 속눈썹.
문득 눈물이 날 것 같았지만 그는 꾹 참았다. 다 과거 일이었다. 이제는 의미 없는.
‘어차피 다 가짜였어.’
모두 저를 속이기 위해 보여준 가짜 모습이었다. 그러니 기억할 필요도, 그리워할 필요도 없었다.
진짜 모습은 제게 약을 먹이고 자신이 아파도 손끝 하나 돌보지 않던, 섹스 중에도 제 몸이 더럽다는 듯이 장갑을 끼던 모습이었다.
그게 이환이었다. 맨손으로 제 몸도 만지기 싫어하는 놈.
그러나 어떤 진실은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만으로도 상처가 되는 법이었다.
해진은 꾹 감고 있던 눈을 뜨고 직원에게 쓰게 웃어 보였다.
“저, 죄송한데 제가 너무 피곤해서요……. 시간 다 될 때까지 혼자 쉬어도 될까요?”
직원은 당연히 그래도 된다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문이 닫힌 뒤, 해진은 마사지 베드에 모로 웅크리고 누웠다. 손으로 배를 감싸보았다. 다행히 통증은 이제 없었다. 히트사이클 약의 후유증이 이제야 다한 모양이었다. 언제 또다시 아플지 모르지만 어쨌든 다행이었다.
그는 금세 잠들었다. 꿈도 꾸지 않고 푹 잤다. 산에서는 잠을 잘 때마다 앞으로의 계획과 머릿속의 지도를 떠올리느라 제대로 잠에 들질 못했다. 서울로 온 지금도 아주 안심할 수는 없지만, 한고비를 넘겼으니 자연스레 긴장이 풀릴 수밖에.
그러나 일어났을 때는 생각보다 딱히 몸이 편하질 않았다. 잠도 잘 자고, 방금 전까지 마사지를 받았는데도 말이다. 잠자리가 바뀐 탓일까.
마사지 베드에서 일어나 직원에게 가운을 건네는데 민망할 정도로 큰 하품이 나왔다.
‘왜 이렇게 찌뿌드드하지…….’
몸살이라도 난 걸까? 아니다. 몸살 감각은 아니었다. 해진은 자기 몸이 얼마나 약한지 잘 알고 있었기에 도망치는 와중에도 아주 철저하게 컨디션을 관리해왔다.
“고객님, 안색이 너무 안 좋으세요. 조금 더 쉬시겠어요?”
축 처져 있으니 보다 못한 직원이 물었다. 해진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 아뇨. 그냥 감기 기운이 좀 있네요. 원래 잘 걸려요, 괜찮아요.”
그제야 직원은 쓰게 웃어 보였다.
에스테틱 숍을 나온 해진은 곧바로 택시를 타고 순회를 돌기 시작했다. 무슨 순회냐 하면, 서울 곳곳 공용 사물함에 미리 주문시켜 놓은 명품들을 회수하는 일이었다.
이환의 블랙카드로 미리 주문해 놓은 명품은 대부분 지하철 사물함이나 편의점 같은 곳에 있었다. 그는 택시를 계속 갈아타며 비교적 가격이 싼 편인 명품들을 하나씩 회수했다. 그리고 회수를 할 때마다 곧바로 전당포에 들렀다.
명품을 취급하는 전당포 중에서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물건만 보는 곳이 제법 있었다. 요즘처럼 위험한 세상에도 말이다.
“어머니 병원비로 써야 하는 돈인데, 글쎄, 형이 이걸 사버렸지 뭐예요……. 보시다시피 한 번도 안 낀 새 제품이에요.”
물론 간단한 인적 사항 정도는 대부분 요구하기 때문에, 적당한 사연을 만들어내어야 했다.
“그래서 말인데요……. 혹시 이름 안 적고 가도 될까요? 형이 알면 저 진짜 죽음이에요. 형이 깡패거든요.”
“그럼 저희가 보증료를 따로 떼어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아휴, 당연히 괜찮죠. 얻어맞는 것보다야 낫죠.”
보증료는 개뿔. 가격 떨어진다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것이다. 해진에게는 전혀 상관없었다. 어차피 해진 본인의 돈으로 산 것도 아니니까.
사실 전당포에게는 이득일 것이다. 새 제품을 후려친 가격에 구매할 수 있고, 기록도 남기지 않으니. 물론 그들도 장물일 위험을 감수하는 거지만, 해진은 제 순한 이미지 덕에 딱히 의심을 하지는 않으리라 믿었다.
초고가 명품 대신 가격대가 중간대인 브랜드만 골라서 산 것도 오히려 팔기가 비교적 더 쉽기 때문이었다. 이환의 의심을 피하기 위한 이유도 있었고 말이다.
“그게, 전 애인이 사준 건데…… 어디에도 기록 안 남기고 처분하고 싶어서요.”
“아버지 유품인데 삼촌이 조용히 처리하라고 해서요. 집안 사정이 좀 복잡해요.”
“두 시까지 방세 입금 안 하면 집주인이 고소한대요. 일단 돈부터 주시면 안 될까요?”
여러 가지 레퍼토리를 짜내다 보니 해진은 자신이 연기를 해도 성공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다.
물론 몸이 약해서 트레이닝을 받고 밤샘 촬영을 하거나 사람들과 부대끼며 연습하기는 힘들 테지만 말이다. 지금 당장도 한여름에 감기 기운 때문에 식은땀을 줄줄 흘리고 있었다.
“저, 고객님, 괜찮으세요?”
“하하, 네. 괜찮아요. 제가 몸이 좀 약한데 아직 약을 안 먹어서 그래요.”
이번에는 거짓말이 아니었다. 사실 감기 기운도 감기 기운이지만, 늘 먹는 약들 중 하나가 떨어진 상태였다. 처방을 받으려면 항상 가던 병원에 가야 하는데, 이환이 그 병원에 이미 사람을 심어두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서울 곳곳에 뿌려둔 명품을 돈으로 바꾸는 데에 일주일이 넘게 걸렸다. 한군데에서 몽땅 바꿀 수는 없었다. 포장만 뜯은 새 명품을 여러 개 갖고 있으면 의심을 살 테니까.
이동은 주로 밤에 하고, 잠은 낮에 에스테틱 숍에서 마사지를 받으며 잤다. 덕분에 피부는 끝내주게 좋아졌다.
날이 더운데 돌아다니다 쓰러지지 않도록 - 워낙 몸이 약한 탓에 어릴 때부터 여름에 쓰러진 적이 많았다 - 지열이 높은 오후에는 대형상가 서점 같은 곳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사실 해진은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지쳐서 딱 죽을 지경이었다. 약을 먹었는데도 감기 기운은 도통 떨어질 기미가 없었다. 날이 더운데도 계속 으슬으슬하게 춥고 자주 어지러웠다.
‘병원에 가봐야 하나…….’
감기 때문이 아니라 약을 받기 위해서라도 가긴 해야 했다. 물론 늘 가던 병원 말고 다른 병원을 가야겠지만, 약을 쉽게 처방받을 수 있을지…….
해진은 전당포에서 받은 돈을 몇 번이고 확인한 뒤 지하철 화장실을 나왔다. 더운데도 모자를 푹 눌러쓰는 것을 잊지 않았다.
어깨에 멘 백팩 끈을 양손에 꼭 쥐고 계단을 걸어 올라가던 중, 해진은 돌연 현기증에 멈춰 섰다. 하마터면 계단을 구를 뻔했다.
‘몸이 자꾸 왜 이러지…….’
이틀 넘게 전당포를 돌아다니느라 피곤하기는 해도 컨디션 관리를 위해 휴식도 충분히 취했는데 이상하게 피로가 풀리질 않았다.
‘설마.’
히트사이클 약 부작용이 그새 또 나타나는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쌍욕이 거의 반사적으로 나올 뻔했다. 공공장소가 아니었다면 ‘이환 개새끼’라고 소리를 질렀을지도 몰랐다.
더위 탓인지 저조한 컨디션 탓인지 모를 땀을 손등으로 닦은 뒤 해진은 다시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상황에 걸맞지 않게 갑자기 허기를 느꼈다.
‘아, 순댓국 먹고 싶다.’
와중에도 식탐은 있다니 참 자기 몸이지만 희한했다. 게다가 순댓국은 해진이 잘 먹지 않는 음식 중 하나였다. 너무 뜨겁기도 하고, 소화 기관이 약한 해진이 먹기에 부담스럽기도 하고 말이다. 아마 날이 덥고 피곤해서 몸이 보양을 원하는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역을 나가자마자 ‘순대국’이라고 쓰인 간판이 보였다. 해진은 서둘러서 걸었다. 식당으로 들어가려던 그는 그러나 문 바로 앞에서 뚝 멈춰 섰다. 갑작스럽게도,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우욱…….”
막상 순댓국 냄새를 맡자 속이 뒤집어지는 것 같았다. 그는 입을 가린 채로 도망치듯 식당 앞을 벗어났다. 걷는 중에도 헛구역질을 했다. 행인들이 저를 쳐다보았기에 해진은 모자 쓴 얼굴을 더 푹 숙였다.
‘무슨 변덕이 이환 성질머리보다 더 더럽냐.’
만난 동안 성질이 옮기라도 했나. 황당함에 헛웃음이 났다.
몸도 쉬게 할 겸, 배도 채울 겸 해진은 가까운 프랜차이즈 카페로 향했다. 샌드위치와 커피를 들고 가장 구석 자리에 자리 잡은 해진은 에어컨 바람에 오들오들 떨며 가디건부터 꺼내서 어깨에 걸쳤다.
‘……지금쯤 뭐 하고 있으려나.’
샌드위치를 씹다 말고 해진은 문득 이환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런 자신이 우스웠다. 뭐 하고 있긴. 일이나 하고 있겠지. 부하들한테 저 잡으라고 시켜놓고 말이다. 와중에도 그를 생각하는 자신이 한심해서 한숨을 푹 내쉬었다.
시간이나 때울 겸 그는 선불 휴대폰을 꺼내 켰다. 카페 와이파이를 연결시킨 뒤 포털 사이트에 접속해 며칠 동안 보지 못한 탐험가들의 블로그나 확인할 셈이었다.
포털 사이트 메인에 커다랗게 뜬 이환의 사진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
참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미운데, 아직도 억울하고 서러운데, 막상 사진을 보니 기분이 묘했다.
해진은 홀린 듯이 그의 사진을 검지로 눌렀다. 화면이 바뀌고, 사진에 눈이 팔려 읽지도 않은 기사 제목이 그제야 보였다.
[키스틸 이환 전무, NX 그룹 회장 첫째 딸 신아연과 열애 시작?]
다른 손에 들고 있던 샌드위치가 툭, 툭, 테이블과 해진의 무릎을 거쳐 바닥까지 떨어졌다.
* * *
지친 수색대원들은 걷는 내내 뒤를 흘끔흘끔 돌아보았다.
이환은 그들의 뒤에 바짝 붙어 따라오고 있었다. 전문가가 아닌 것치고는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아니, 속도뿐만인가. 그는 무려 정장에 구두를 신고 지금 산길을 며칠째 헤매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면 하지 않을 짓이었다.
벌써 며칠째 수색대원은 이 산을 샅샅이 뒤지고 있었다. 그러나 강해진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수색에 실패했으니 이만 철수하자고 했지만 이환은 하산을 거부하고 있었다.
‘어떻게든 찾아야 한다.’
그 역시 이성으로는 알았다. 강해진을 완전히 놓쳤으므로 찾으려면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러나 동시에 그는 인정할 수 없었다. 자신이 강해진을 놓쳤다는 사실을. 강해진을 다시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제 소유인 줄 알았던 그를 손에서 잃어버렸다는 사실을.
땀에 푹 젖은 슈트를 며칠째 갈아입지 못한 상태였다. 흙먼지 때문에 얼굴은 더러워지고,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해서 눈가는 퀭했으며 머리칼은 떡이 져서 말도 아니었다. 평소의 이환이라면 질색할 꼴이었다.
뿐만 아니라 몸도 몹시 피곤했다. 무리한 무릎은 삐걱거리고 발목은 걸을 때마다 욱신거렸다. 구두에 갇힌 발가락이 다 부르트고 피가 나는데도, 온몸이 힘든데도 멈추지 않는 까닭은 단 하나뿐이었다. 인정하기가 싫어서.
“……저기…… 전무님.”
박 비서가 그를 불렀다. 평소라면 귀찮다며 화를 내거나 무시했을 테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아무래도 돌아가셔야 할 것 같습니다.”
이번에야말로 박 비서의 말이 옳기 때문이었다.
환은 억지로 제 이성을 끌어 올렸다. 강해진은 이 산을 벗어났을 확률이 높다. 그를 붙잡을 확률을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서는 지금 철수하고, 그가 갔을 곳을 다시 추려야 했다. 고집을 부려서 될 일이 아님을 그도 알았다.
흙 위를 걷던 더러운 구두가 뚝 멈췄다. 함께 걷던 수색대원들도 그제야 멈췄다. 환은 어금니를 깨물었다. 입이 열리기까지는 시간이 더 필요했다.
“철수하겠습니다.”
수색대원들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하산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이환은 넥타이를 풀어 재킷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었다.
그러나 이환은 강해진을 포기할 수 없었다. 이대로 그를 잃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단지 99.99퍼센트의 매칭률을 보이는 오메가라서가 아니었다.
무언가가 이환의 마음속에서 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소리를 내면서 덜걱, 덜걱, 구르고 있었다.
이환은 그게 몹시도 거슬렸다. 그러나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제 안에서 끝없이 소리를 내는 이게 무엇인지, 그 빌어먹을 오메가 놈을 다시 만나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을 알기 전까지 그는 강해진을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40퍼센트
이환은 서울로 돌아가서도 쉬지 않았다. 그는 박 비서에게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강해진이 있을 곳을 찾아내라고 했다.
“전무님, 경찰 쪽에서 아무래도 주시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박 비서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럴 만도 했다. 강해진을 찾는답시고 열흘이 넘게 온갖 곳을 들쑤시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경찰의 도움을 받을 수는 없었다.
“얼마를 써도 상관없으니 찾아내기만 하십시오. 소문 새어나가지 않게 조용히 입막음시키고.”
“예. 아 참, 그리고…… 오늘 약속 있는 거…… 아시죠?”
이번에는 더 조심스레 물었다. 이환은 그가 말하는 약속이 뭔지 짐작했지만 대답하지 않았다.
“한 번 미룬 약속이라 이번에는 꼭 가셔야 합니다.”
산을 쏘다니느라 신아연과의 약속을 까맣게 잊고 있었다. 박 비서가 알아서 조정한 모양이었다.
“벌써 기사까지 떴습니다. 제가 검수도 직접 했고요.”
뒤이은 말에 환이 미간을 구겼다.
“무슨 기사 말입니까?”
“신아연 씨와의 기사가 오늘 나왔습니다. 산에 있던 때에 검토 부탁드렸던 그 기사입니다만…….”
“아.”
환은 뒤늦게 기억을 떠올렸다. 그래, 그러고 보니 강해진을 찾느라 돌아다니던 때 박 비서가 신아연과의 기사가 떴다며 보여준 기억이 났다.
내용은 예상했던 바와 똑같았다. NX의 장녀 신아연과 이환이 열애 중이라는 것. 떡밥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으니 기사를 최대한 빨리 보내는 데에 그도 동의했었다.
기사가 뜬 걸 유 회장이 보면 안심하기도 할 테고 말이다. 유 회장이 안심하면 강해진은 당분간 안전할 것이다.
“……기사 내리라고 할까요? 이미 포털 메인에 다 떴을 텐데요.”
“아니, 아닙니다. 됐습니다.”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고, 박 비서는 그제야 안심한 투로 허리를 숙여 보이고 환의 오피스텔에서 나갔다.
환은 소파에 털썩, 주저앉아 마른세수를 했다. 뒤늦게 며칠치의 피로가 몰려드는 듯했다.
기사까지 미리 냈지만 그는 신아연을 만나기가 싫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약속 따위에 나가기가 싫었다.
당장 강해진을 찾는 데에 총력을 쏟아도 모자랄 판이었다. 이 넓은 한국에서 그 조그마한 오메가 놈이 어디를 싸돌아다니는지 감도 오지 않는데. 그리고…….
‘……정말 임신했을지도 모른다.’
그냥 강해진을 생각해도 머리가 아파오는데, ‘임신한’ 강해진을 생각하자 숨이 턱 막힐 지경이었다.
‘감히 내 아이를 배에 넣고 멋대로 싸돌아다녀?’
절대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자신의 아이를 가진 채로 함부로 싸돌아다니는 강해진이라니. 잡히면 제대로 응징해주리라 다짐했다.
화를 내면서도 이환은 어쩔 수 없이 더러운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는 제 조모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 유 회장은 키스틸 그룹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것이다. 즉, 다시 말해 강해진이 위협이 되는 존재라고 판단한다면 언제든지 그를 없앨 인물이었다.
NX 그룹의 신아연과 만나는 이유도 그 때문이 아닌가. 강해진이 혹시라도 키스틸 이환 전무가 자신을 감금했니 어쩌니 하는 소문을 퍼뜨릴 때를 대비해서 말이다.
그러나 이환은 문득 의문을 가졌다. 그게, 의미가 있을까.
환은 자신이 그런 추문과는 관계가 전혀 없으며 앞으로 평범한 베타를 만나 가정을 이룰 계획임을 보여주기 위한 목적만으로, 고작 그 이유 때문에 신아연과 결혼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말하자면 이것은 아주 일시적인 효과만을 보여주는 궁여지책일 뿐이었다.
또한 환의 생각으로는 강해진이 쓸데없는 소문을 퍼뜨릴 것 같지는 않았다. 그 정도로 간이 큰 녀석은…….
생각을 잇던 그가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넥타이를 매던 손을 뚝 멈춘 채로 환은 거울 속 자신을 응시했다.
‘강해진이 겁이 없던가?’
강해진에 대해서 이미 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철저하게 뒷조사를 했는데, 이상하게도 지금은 그를 하나도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어쨌거나 유 회장이 강해진을 해치도록 놔두지 않으려면 신아연을 만나는 시늉이라도 해야 했다. 환은 처음 만나는 상대에게 실례가 되지 않을 정도로만 단정히 하고 나갔다.
신아연은 단발머리가 잘 어울리고 키가 아주 컸다. 환을 보자마자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이는데, 그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졌다.
“자기소개는 할 필요 없겠죠?”
다짜고짜 인사 대신 던진 신아연의 말에 이환은 당황하지 않고 그저 입꼬리를 틀어 웃어 보였다.
맞은편에 앉은 이환은 직원이 갖다 준 냉수를 한 모금 들이켠 뒤 앉은 채로 다리를 꼬았다.
“왜 여기 나온 겁니까?”
그리고 신아연에게 물었다. 그의 의도는 명백했다. 유 회장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신아연의 의도는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빙긋이 웃고는 몸을 기대어 앉았다. 생김새만큼이나 웃는 얼굴도 시원시원했다.
“저희 회장님은 완고하신 편이세요. 딸에 대한 편견도 심하시죠.”
NX의 회장은 유 회장만큼이나 뻣뻣한 사람이기는 했다. 그리고 신아연은 이환과 달랐다. 그녀는 이환처럼 악착스럽게 반항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더 편견을 가지실 테고요. 그뿐이에요.”
웃고 있었지만 그녀의 얼굴에는 지루함이 묻어났다.
“그리고 혹시 알아요? 우리 아버지가 아니라, 유 회장님께서 정말로 저를 마음에 들어 하실지.”
당신이랑 무슨 관계가 될 마음은 추호도 없다고 말하려던 환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대신 표정 관리를 했다.
이곳은 탁 트인 전면창 바로 옆이고, 아마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자들이 두 사람의 사진을 찍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마 내일이나 모레쯤, 혹은 빠르면 오늘 저녁에 기사가 하나 더 뜨겠지. 두 사람의 열애 확인, 키스틸 호텔 1층 카페에서 당당하게 데이트 어쩌고 하는 캡션이 사진 아래에 붙은 채로 말이다.
“그래서 말인데요.”
신아연이 커피 한 모금을 살짝 들이켜며 말했다.
“이환 씨 역시 저한테 그렇겠지만, 저는 이환 씨 개인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어요. 하지만 우리가 서로 도울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뭘 원하십니까?”
환은 그녀를 마주한 채로 웃어 보였다. 너무 환하지 않게, 데이트를 하고 있는 두 남녀의 모습으로 적절하게 보일 정도로만. 신아연 역시 커피잔을 들며 적당히 웃어 보였다.
“회장님께 저, 소개시켜 주세요. 저도 집안만 믿을 수는 없어서요.”
“어렵지 않죠. 잘 맞을 거란 생각도 드는군요.”
“그럼 다행이죠. 저희 집안사람들, 갑갑해서 말이 안 통하는데.”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은 신아연이 양손으로 무릎을 감싸 쥐었다.
“그런데, 한 가지 여쭤봐도 돼요?”
환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이환 전무님은 왜 나오셨어요?”
뒤이은 물음에 환은 조금 망연해졌다. 유 회장이 시켜서 나왔다고 대강 둘러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렇게 말하기가 싫었다.
환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가 뱉었다. 그리고 단어를 오래도록 공들여 골랐다.
“……구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말입니다.”
‘구한다’는 단어를 제 입으로 뱉고 나니 위화감이 들었다. 누가 누구를 구한단 말인가?
내가 강해진을? 자신은 그를 가두어두고 아이를 낳게 하기 위해 강제로 계약까지 하게 만들었다. ‘구한다’는 말에는 어폐가 있었다.
그러므로 환은 자세를 고치고, 혼란스러움이 밖으로 드러나지 않길 바라며 말을 고쳤다.
“아니, 되찾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말입니다.”
* * *
해진은 액정을 밀며 새로고침을 하고 또 했다. 그러나 화면에 뜬 기사는 바뀔 줄을 몰랐다.
혹시나 해서 다른 기사들도 찾아보았다. 신아연과 이환, 열애, NX 그룹과 키스틸 그룹……. 한정된 단어들을 조합해 이리저리 검색하자 몇 가지 기사가 더 나왔다. 처음 보았던 기사와 내용은 별다를 게 없었다.
신아연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어보았다. NX 그룹 회장의 딸이라는 것은 기사를 보고서야 알았다. 그리고 그녀가 이환과 ‘열애’ 중이라는 이 사실을, 해진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꺼진 휴대폰을 휴대용 배터리와 연결시킨 뒤 해진은 머리를 싸맸다. 이것은 예상하지 못하게 생긴 변수이니 대책을 생각해야 할 텐데,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 있어?’
미처 생각이 정리되기 전에 해진은 화가 났다. 기사마다 꼭 들어가 있는 ‘열애’라는 단어를 볼 때마다 가슴이 꽉 막혔다.
그러나 문득 해진은 자신이 화를 내도 되는지 의문이 들었다.
어차피 자신은 이환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 처음부터 말이다. 연인이었던 적이 있기는 했지만, 그건 저 혼자의 이야기였다. 이환은 자신을 연인으로 생각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을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이환과 연인이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와의 기억은, 그가 제게 잠시나마 다정하게 대해주었던 짧은 시간들은 모두 해진에게만 있었다.
해진은 그 사실이 견디기 힘들도록 버거웠다. 좋은 기억이라는 것이 이토록 버거운 무게를 갖고 있음을 그는 처음 깨달았다.
그리고 해진은 또한 깨달았다. 이대로 만약 이환이 저를 찾지 않는다면, 만약 자유를 얻는다면, 그리고 자신이 이환을 잊어버리기로 결심한다면.
제 기억 속에만 존재하는 ‘좋은 사람’인 이환이 영원히 사라지는 거라고.
남은 샌드위치를 입에 욱여넣은 해진은 트레이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페를 나온 해진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계획에 없던 이동이었다. 본래대로라면 예약해둔 이동수단이 올 때까지 만화방에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지금 거기 가면 안 된다는 사실을. 제 발로 잡히려고 환장하는 꼴이었다.
그러나 머리로 알아도 몸이 어쩌지 못하는 감정이 간혹 있었다. 이를테면 ‘사랑’이라거나.
잠시 멈춰 서서 위를 올려다보았다. 멀리서도 훤히 보이는 행선지의 간판이 맑은 여름 하늘 아래 번뜩거렸다.
[키스틸 호텔]
키스틸 호텔은 서울에서 가장 이용자가 많다고 알려진 12차선 도로를 끼고 있었다. 서울역에서도 그리 멀지 않은 이 호텔은 명실상부한 지역의 랜드마크였다. 그 말인즉, 주변 유동 인구도 어마어마하게 많다는 뜻이었다.
사람이 많고 호텔 주변인만큼 이환의 사람 역시 많을 것이다. 밖을 내다본 호텔 직원이 저를 알아볼지도 몰랐다. 그럼 아마 곧바로 이환에게 보고를 할 터다. 그럼에도 해진은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멈출 수가 없었다.
조금 전 보았던 기사를 해진은 혼자 곱씹었다. 호텔로 오는 그사이에 기사가 몇 개 더 떠 있었다. 해진은 그중에서 한 기사를 오래도록 공들여 읽었다.
[키스틸과 NX의 인연, 결혼까지 이어질까.]
[이환과 신아연 둘 다 공개적으로 교제를 밝힌 적이 없다. 이번이 처음이다. 그 사실만으로도 두 사람의 관계가 상당히 진지하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다.]
‘추측은 개뿔.’
해진은 휴대폰 액정화면을 끄고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아까부터 머리가 몹시 아팠다. 가뜩이나 신경이 예민해진 몸으로 땡볕 아래를 걸었으니 아플 만도 했다.
내가 도망가서 새로운 오메가를 찾은 걸까. 신아연이 오메가인지 알파인지 해진은 알지 못했다. 기사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이제 이환에게 자신은 필요치 않은 모양이었다.
해진은 문득 배를 만져보았다.
‘……만약 내가 임신이라도 했더라면…… 그 여자랑 만날 일도 없겠지.’
하지만 만약 아이를 가진다면 제 건강이 위협받을 수도 있었다. 이환 그 미친놈이 아이 하나로 만족할지도 확신할 수 없고 말이다.
신호가 바뀌었고, 해진은 조금 비장한 마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넜다.
“아까 저기, 이환 아냐?”
“그게 누군데?”
“왜, 그, TV에 자주 나오는 키스틸 그룹…….”
횡단보도 반대쪽에서 걸어오던 이들이 부산스레 말을 주고받았다. ‘이환’이라는 단어에 해진은 거의 반사적으로 모자를 더 깊이 눌러썼다. 그가 마침 근처에 있는 걸까? 자기 호텔에 한 번씩 들르니 그럴 수도 있었다.
하지만 해진은 이상하게도 무섭지가 않았다. 그를 마주칠 수도 있다는 공포보다 오히려…… 그는 방금 읽은 기사들이 더 무서웠다.
문득 걸음을 멈추고 옆을 보았다. 쇼윈도에 제 모습이 비쳤다. 노랗게 탈색한 머리칼과 산을 쏘다니느라 약간 그을린 얼굴이 낯설었다.
다시 모자를 푹 눌러쓴 해진은 걸음을 이었다. 목이 몹시 타고 다리도 아팠다. 그러나 다시 걸었다.
12차선 도로를 달리는 차 소리에 숨이 막혔다. 모자 아래로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해진은 문득 자신이 뭐 하러 여기에 왔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나서 뭐, 그 여자랑 결혼할 거냐고 물어보기라도 하게? 잡히면 어쩌려고.’
만약 그게 사실이면 해진은 진심으로 축하해줄 마음까지 있었다. 그래, 잘 생각했어요, 돈으로 오메가 살 생각하지 말고 수준에 맞는 사람이랑 행복하게 지내세요. 그렇게 좋아하는 아이도 많이 낳으시고.
‘젠장, 왜 이렇게 떨려.’
그러나 몸은 그렇지를 못했다. 호텔이 가까워질수록 손발이 후들거리고 숨이 몹시 찼다.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해진은 그것이 반사적인 두려움 때문이라고 믿었다. 곰을 몰라도 곰과 마주치면 두려움을 느끼는 것처럼, 이환에게 붙잡힐까 봐 무서워서라고 말이다.
지금이라도 돌아서서 이곳을 벗어나면 해결될 문제였다. 아직 저를 따라오는 사람도 없고, 호텔은 조금 더 가야 하니까.
하지만 어찌 된 연유인지 해진은 돌아설 수가 없었다.
그는 제 눈으로 확인이라도 하고 싶었다.
정말 그 개새끼가 다른 사람이랑 결혼하는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한 걸음, 한 걸음, 호텔에 가까워졌다. 날씨가 몹시 덥고 땀이 줄줄 흐르는데도 해진은 한기를 느꼈다. 그는 양쪽 팔을 감싸 안으며 가까운 가게 앞에 섰다. 쇼윈도에 비치된 옷을 구경하는 척하며 옆을 흘끔흘끔 보았다.
키스틸 호텔 1층에는 카페가 있다. 한쪽 면이 전면창으로 되어서 안이 훤히 내다보였다. 마루투어에 있을 때 해진은 그게 좀 의아했다. 호텔 이용객들이 많이 이용하는 카페인데, 프라이버시를 위해 전면창은 피해야 하는 게 아닌가 하고.
그리고 해진은 그 전면창 안에서 벌어지는, 결코 알고 싶지 않던 누군가의 프라이버시를 보고야 말았다.
이환이 어떤 여자와 마주 보고 앉아 있었다. 여자의 얼굴은 해진도 알아볼 수 있었다.
‘……신아연이네.’
그리고 이환이 웃었다. 정말로 환하게.
이환이 그렇게 웃는 모습을, 해진은 본 적이 없었다. 연인인 척하던 그때에도 제게 저렇게까지 웃어준 적은 없었다.
‘…….’
들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하지도 못한 채 해진은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그래, 저 남자는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었지.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벅찰 정도로 멋진 사람이었지.
저렇게 아름다운 사람이, 모두가 사랑할 것 같은 사람이 저를 그렇게 대했다는 사실이 해진은 새삼 서러웠다. 그리고 또 한 번 깨달았다. 이환은 제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있다는 걸.
두 남녀는 무슨 즐거운 이야기를 하는지 마주 본 채로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눈빛이 섞이는 모습도, 마주 보고 앉은 자세도 자연스러웠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지낸 듯이 말이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이환이라는 놈은 본래부터 글러먹었다. 알고 있었다. 알고 있는데도, 해진은 지금 자신이 왜 우는지 알 수 없었다.
순간 이환이 자세를 고쳐 앉으며 시선을 이쪽으로 향했다. 화들짝 놀라 몸을 숨기며 손등으로 눈물을 닦아냈다.
‘왜 이래, 꼭 처음 상처받는 것처럼.’
이미 다칠 대로 다쳐서 아픈 것도 모를 거라 생각했는데. 이 약해빠진 몸으로 산을 내달리면서 다 내다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해진은 눈물을 연신 닦아낸 뒤 다시 호텔 쪽을 돌아보았다. 이환은 이쪽을 쳐다본 적도 없다는 듯이 다시 신아연과 대화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그에게 자신이 ‘없는 존재’가 되었을까.
아니, 애초에 ‘강해진’이라는 사람이 이환에게 있기는 했는지 모르겠다.
그저 아이를 낳을 오메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겠지. 그에게 사람인 적이 있었을까. 아니, 저렇게 웃어줄 만큼 중요한 무언가인 적이 있기는 했을까.
해진은 자꾸 흐르는 눈물을 닦고 또 닦으며 스스로를 다잡으려 애썼다. 그러나 눈물이 멈추질 않았다.
“흐읍, 흑…….”
우는소리가 새어 나오자 행인들이 해진을 흘끔흘끔 바라보았다. 그는 얼굴을 가리고 옆으로 비켜섰다. 이러다 정말로 들킬 수도 있었다.
있던 정이 정말 다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닌 모양이었다. 다칠 곳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이 너덜너덜해지는 기분이었다. 이환의 웃음이, 그 환한 얼굴이 자꾸만 해진의 마음을 겁박하듯 때려댔다.
돌아서면서 해진은 결심했다. 자신의 안에만 남아 있는, 세상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좋은 이환’을 완전히 지워버리겠다고.
어차피 환상일 뿐이었다. 제멋대로 좋아하고, 제멋대로 좋은 사람인 줄 알았다. 그리고…… 제멋대로 모든 마음을 줬다.
그러나 이제는 정말로, 진심으로 잊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얼굴을 닦고 걸음을 옮겼다. 머리가 아팠지만 괜찮았다. 괜찮…….
“……아.”
눈앞이 핑, 돌았다. 머리가 아팠지만 그보다 배가 더 아팠다. 아픈 곳을 손으로 움켜쥐었지만 살이 다 빠진 배는 손에 잡히지도 않았다.
‘하필 지금이야…….’
지금은 아프면 안 되는데. 그러나 발이 앞으로 나가질 않았다.
“아, 씨발…….”
어마어마한 통증과 함께 해진은 쓰러지고 말았다.
그 시각, 이환은 신아연과 대화를 슬슬 마무리해야겠다 생각 중이었다.
신아연과의 대화는 별게 없었다. 그녀는 노골적으로 키스틸 그룹에 발을 들이고 이득이 될 만한 것은 모두 갖겠다는 의사를 표현하고 있었다. 이환은 딱히 거슬리지 않았다. 유 회장과 연결만 시켜주면 제게는 관심도 보이지 않을 여자였다.
“정말, 억지로 웃는 것도 힘드네요. 이만하면 사진도 많이 찍었겠죠?”
그녀가 너스레를 떨며 핸드백을 챙기던 중, 환은 문득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이상했다. 불길한 기분이 혀처럼 몸을 훑는 듯했다. 그리고 돌연 가슴이 꽉 막혔다.
그는 예감이나 육감 같은 것을 믿지 않았다. 믿을 것은 자신의 몸뚱이, 그리고 몸뚱이로 번 돈뿐이지. 그러나 이상하게…… 마음이 돌연 아팠다. 당혹스럽고 불쾌한 기분이었다. 원인도 알 수 없었다.
“왜 그러세요?”
신아연이 물었다. 눈치는 더럽게 빠르군. 환은 억지로 웃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그분 생각하세요?”
‘그분’이 누구인지 알아듣지 못해 환은 저도 모르게 표정을 굳혔다.
“아까 말했던, 구해주고 싶은 사람.”
눈치가 빠른 만큼 오지랖도 넓은 모양이었다. 환은 노골적으로 드러나려는 적대감을 억지로 감추고 손바닥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그는 강해진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싫었다. 아니, 떠올리기가 싫었다.
서울로 돌아오고부터 강해진을 떠올리기만 하면 기분이 이상해졌다. 방금 전처럼, 자신이 믿지도 않고 알지도 못하는 무언가가 자꾸만 몸속에서 굴러다니는 듯했다.
자신이 파악하지 못하는 낯선 것은 딱 질색이었다. 환은 그래서 강해진을 생각하는 일이 불편했다. 감히 제 손을 떠나고서도 저를 괴롭히는 그가 괘씸했다.
“슬슬 일어나시겠습니까?”
“네, 뭐, 그러죠.”
다행히 분위기는 파악하는 모양이었다. 신아연을 에스코트하기 위해 일어서는데 밖에서 대기 중이던 박 비서가 뛰어왔다. 어찌나 서두르는지 테이블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경박스러운 그 동작에 환이 미간을 구겼다.
박 비서는 말을 곧바로 내뱉으려다 신아연의 눈치를 한 번 보고는 입에서 목적어와 주어를 잘라냈다.
“차, 찾았습니다.”
그리고 그 한 마디만으로도 이환은 그가 누굴 찾았다고 말하는지, 단번에 알아들을 수 있었다.
이유 모르게 거북하던 마음이 쿵,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졌다. 환은 그것을 주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카페를 달려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