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님, 주소 불러드릴게요.”
그리고 택시를 타고 그가 도착한 곳은 예약한 호텔 중 어느 곳도 아니었다. 물론 이환이 멍청하게 자기가 예약한 호텔을 헤집고 다닐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일부러 위험을 감수하고 싶지는 않았다.
“여기 맞아요? 노블…… 에스테틱 스파?”
“네, 맞아요.”
얼마 지나지 않아 택시는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새 건물 앞에 멈추어 섰다. 해진은 ‘에스테틱 & 스파’라고 깨알만 한 크기로 쓰인 간판 아래로 들어갔다.
본래 사우나와 마사지를 합해서 두 시간짜리 코스였다. 그러나 해진은 이 코스의 열 배 되는 가격을 이미 지불했다. 조건은 하나였다. 열 시간 동안 개인룸에 있을 테니 방해하지 말 것.
개인실은 아주 호화로운 개인 욕실 같아 보였다. 해진은 들어가자마자 커다란 마사지 베드에 드러누웠다. 이곳은 이환의 카드로 예약하지 않았으니 아마 수색 후보에 두지 못할 터다.
“아, 피곤해…….”
해진은 얼굴을 구멍으로 내민 채 한숨을 내쉬었다. 마사지 베드는 얼굴 부분이 뚫려 있어서 엎드려도 숨이 막히지 않는다는 사실이야 일전에도 알았지만, 생각보다 훨씬 편했다.
여기서 휴식하며 앞으로 이동할 곳을 다시 체크해야 하지만, 해진은 사실 몸이 많이 지쳐 있었다. 당장 눈이 감기는 것을 어쩔 수가 없었다.
‘진짜 죽겠네. 이제 시작일 뿐인데…….’
그렇다. 이환에게서 벗어나는 일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왜 이렇게 지치는 것인지. 지독한 피로가 몸을 노곤하게 짓눌렀다.
일단은 열 시간이라는 휴식 시간이 있으니 활용해야 했다. 앞으로 이렇게 낮에는 잠을 자고 밤에 이동해야 하는 때가 많을 것 같으니 밤낮도 바꾸어야 하고 말이다.
해진은 빠르게 잠에 빠져들었다. 신세를 한탄하기에는 마사지 베드가 너무 편안했다.
* * *
“……그래서 근방은 모두 뒤져보았지만 강해진 씨는 찾지 못했습니다.”
말을 끝낸 박 비서는 환을 마주 보았다가, 저를 노려보는 사나운 눈빛에 슬그머니 시선을 떨궜다. 제 상사의 성격이 얼마나 더러운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박 비서는 그런 이환의 성질머리를 능글맞게 넘어가는 데에 익숙했다.
하지만 박 비서는 지금 무척 고전하고 있었다. 이유는 하나였다. 그가 이렇게 화를 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환이 들고 있던 펜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가 트레이가 아닌 책상 위에 펜을 얹어 놓은 적은 없었다.
“못 찾았다고.”
나지막한 목소리는 평소보다 오히려 차분하게 들렸으나 그건 그만큼 화가 났기 때문임을 박 비서는 짐작할 수 있었다.
“사라진, 아니, 탈출한 시간을 짐작해보자면 이미 서울을 벗어났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일단 목격자를 찾는 것을 중점으로…….”
“나한테 설명하지 마십시오.”
말이 끊긴 박 비서는 입을 다물었다. 이환이 책상에 손을 얹자 손끝에 닿은 펜이 도르륵, 짧은 적막 속에서 소리를 내며 책상 위를 굴렀다.
“설명하지 마시고, 일 해결한 뒤에 결론만 이야기하십시오.”
박 비서는 허리를 숙여 보였다.
“예.”
나가보라는 손짓이 있자마자 박 비서는 몸을 돌려 곧장 사무실을 나섰다. 질린 탓도 있지만 제 상사가 시간 낭비를 싫어한단 사실을 알기 때문이기도 했다.
문이 닫힌 뒤에도 환은 앉은 채로 한동안 굳어 있었다.
그는 지금 상황을 사실 이해하기 힘들었다. 강해진이, 그 빌어먹을 오메가가 제게서 도망쳤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어째서지?’
어째서 그가 도망친 거지?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충분했다. 호텔 스위트룸은 그딴 공기청정기로 채워 놓지만 않으면 녀석의 분에 넘치는 환경이었다. 계약서에 사인한 것은 강해진 본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해가 안 가는 것은, 감히 ‘제게서’ 도망을 쳤다는 사실이었다.
‘어떻게 감당을 하려고 그러나.’
놀랍게도 환은 지금 객관적으로 해진의 입장을 걱정하고 있었다. 아니, 이걸 걱정이라 해야 할까. 아니다. 걱정 따위가 아니었다.
환은 굴러간 펜을 집어 들었다. 펜 트레이에 얹는 대신 손에 들고 빤히 응시했다.
문득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누가 봤다면 소름이 끼쳐서 질색할 얼굴을 하고 환은 조금 더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랬다. 이건 걱정이 아니었다. 그는 단지 궁금했다. 그딴 하찮은 오메가가 자신의 화를 어떻게 감당할지.
펜을 펜 트레이 위에 가지런히 내려놓은 환은 얼굴에서 미소를 지웠다.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방금 나간 박 비서와 곧바로 연결이 되었다.
“쥐 푸십시오. 지금 당장.”
두 마디를 내뱉은 환은 전화를 끊었다.
* * *
똑똑, 똑똑. 규칙적으로 부딪치는 소리는 마치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 같았다.
해진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곳은, 이 호텔은 방음이 너무 잘되어 있어서 창문을 닫으면 빗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삭막한 곳인데.
비가 오는 날에 빗소리를 듣는 것을 좋아하는 해진이었기에 창문을 활짝 열어 놓았다가, 감시하는 덩치들이 그걸 보고 창문을 잠가버려서 억울했던 기억도 났다. 창문도 마음대로 못 여냐고 빽빽 소리를 질렀지만 덩치들은 그때도 해진을 상대조차 하지 않고 나갔었다.
다시 똑똑, 똑똑, 하는 소리가 들렸다. 해진은 그제야 자신이 호텔에서 벗어났다는 사실과 저 소리는 노크 소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고객니임…….”
조심스레 부르는 목소리에 안달이 묻어났다. 아마 한참 전부터 문을 두드리고 있던 모양이었다. 해진은 미안해져서 얼른 일어나 문을 열었다.
직원은 해진에게 시술을 조금이라도 해주겠다며 몇 번이나 권고했지만, 해진은 극구 거절했다.
나가기 전에 마지막으로 짐을 다시 챙기고 확인한 해진은 무리한 부탁을 들어주어서 고맙다며 직원에게 여러 번 인사를 하고 근처에서 몇 군데 가게를 들러 필요한 것을 구한 뒤 콜택시를 불렀다. 잠자리가 바뀐 탓인지 긴장감 때문인지 제대로 자지 못해서 피곤했지만, 한곳에 오래 머무를 수는 없었다.
택시가 도착했을 때, 이미 밖은 밤이 깊어 있었다. 뒷좌석에 몸을 묻으며 해진은 계획을 다시 되새겨보았다.
문득, 꼼꼼하게 짠 계획 대신 이환의 차가운 얼굴이 떠올랐다. 저를 물건 보듯 하던 얼굴. 마음이 아직도 아린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이제 정은 다 떨어졌으리라 생각했는데.
‘내가 할 수 있을까?’
내가 그 미친놈한테서 벗어날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대로 잡혀 있다간 애 낳는 기계처럼 평생 그 미친 새끼 씨만 받아야 될지도 몰라.’
이환이라면, 그 새끼라면 충분히 그럴 만도 했다. 저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 사람에게 순순히 아이를 낳아줄 수는 없었다.
택시 기사는 다행히도 말이 적은 사람이었다. 물건을 찾기 위해 이곳저곳 여러 군데 들렀지만 아무 말이 없었다. 해진이 현금을 미리 두둑하게 주어서인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모든 물건을 다 챙긴 뒤, 택시는 해진의 요청에 따라 서울외곽순환도로를 탔다. 해진은 아직 잠기운이 남은 눈을 감고 차체가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출발하기 전에 멀미약을 먹기는 했지만 속이 좋지 않았다. 잠드는 게 차라리 나을 텐데, 잠들 수 있을 것 같진 않았다.
택시는 어둠 속을 민첩하게 움직였다. 운전 실력이 나쁜 기사가 아니었으나 해진은 결국 잠들지 못했다. 잠을 포기하고 눈을 뜨자 도로 옆 펜스 너머로 드문드문 불 켜진 아파트 건물이 보였다.
저들은 무엇을 하고 있을까. 거실에 앉아 TV를 보고 있을까. 늦게 퇴근한 맞벌이 부부끼리 밥을 먹고 있을까. 그들은 알파와 오메가일까.
가족이란 것을 제대로 가져본 적이 드문 해진이었다. 어릴 때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는 한 번도 없었다.
그는 그래서 밖에서 보는 아파트의 불빛이 늘 부러웠다. 저렇게 불빛이 켜진 ‘집’을 갖고 싶었다. ‘원룸’이나 ‘오피스텔’ 말고.
그리고 한때는 이환과 그런 ‘집’을 가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 이제는 아니지만. 그래…… 이제는 아니었다.
그 때였다. 주머니에서 진동이 울렸다. 휴대폰을 꺼낸 해진은 액정화면을 확인하자마자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아직까지 휴대폰을 버리지 않은 이유는 바로 이것 때문이었다. 이환에게서 오는 전화를 받기 위해서.
해진은 심호흡을 한 번 하고 휴대폰 액정화면을 손끝으로 밀었다. 휴대폰을 귀에 대고서도 일부러 조금 뜸을 들였다.
- 강해진 씨.
아니나 다를까 성질 급한 이환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렇게 귀한 오메가가 없어졌는데 전화 참 늦게 하셨네요. 많이 바쁘셨나 봐요.”
수신구 너머로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난 번거로운 건 딱 질색이니까. 강해진 씨도 그럴 거라 생각합니다만.
“아, 그러세요?”
- 더 일이 커지기 전에 돌아오십시오.
해진은 흥, 하고 일부러 들리게끔 소리 내어 웃었다.
“왜요? 제가 일을 키울까 봐 겁이라도 나세요? 뭐, 신고라도 할까 봐요?”
사실 신고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누가 믿을까. 키스틸 그룹을 물려받을 이환 전무가, 거의 스타급으로 인기 많은 재벌 3세인 그가 오메가를 돈으로 사고 납치해서 아이를 낳게 한다니.
그리고 이환 정도 되는 재벌이라면 경찰 쪽에 손을 쓰는 일이야 어렵지 않았다. 그의 조모인 키스틸 회장이 이미 수어 번이나 회계 사기 및 부당합병, 주가 조작 등의 혐의에서 풀려난 것만 보아도 말이다.
유일한 증거물은 바로 계약서였다. 그러나 이 계약서마저 조작으로 몰릴 수가 있었다. 조작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면 된다지만 그때까지 이환이 저를 놔두기나 할까?
- 이해를 못 하는군요.
다시 한숨 소리. 해진은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나는 당신을 용서할 생각이 아직 있습니다, 강해진 씨. 하지만…….
검은 창문에 겁먹은 제 얼굴이 비쳤기에 해진은 시선을 떼고 앞을 보았다.
- 시간이 더 지나면 저도 그때는 장담을 할 수 없군요.
비라도 맞은 듯이 낮게 가라앉은 환의 목소리는 사실 협박보다 밀어에 가깝게 들렸다. 해진은 제 귀를 속으로 호되게 꾸짖으며 휴대폰을 반대쪽 귀로 옮겼다. 네가 뭔데 날 용서하고 자시고 하느냐고 빽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이환 전무님.”
제 목소리로 부른 그의 이름이 입에 썼다.
“전무님께서는 제게 아무것도 없으리라 생각하시나 본데, 제가 아무런 대비 없이 그냥 도망 나온 것 같나요?”
이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황했다기보다는 짜증이 났으리라고 해진은 짐작했다.
“더 이상 저 찾지 마세요. 그게 제가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말이에요.”
그리고 통화를 끊었다. 휴대폰 전원도 끄고, 유심 칩을 빼내어 손으로 부러뜨렸다.
다시 차창을 바라보았다. 가로등 불빛이 훤해서 얼굴이 비치지 않았다. 해진은 눈을 감았다.
온전히 잠들지는 못했지만 해진은 잠깐 선잠을 잤다. 기사가 저를 불러 눈을 떴을 때는 눈앞에 산이 있었다.
“정말 여기서 내리시는 거 맞아요?”
“네, 맞아요. 수고하셨습니다.”
“아니, 산밖에 없는데, 이 밤에…….”
“제가 산을 좀 좋아해서요.”
현금으로 계산을 하고 차에서 내린 해진은 눈앞에 우뚝 선 야산을 올려다보았다. 밤에 본 시커먼 산은 마치 지옥 입구라도 되는 양 음산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한숨이 났겠지만 해진은 아니었다. 그는 진심으로 가슴이 뛰는 것을 느꼈다.
‘어디 한번 해보자고. 미친놈아.’
가방을 고쳐 멘 해진은 팻말을 한 번 확인한 뒤 산으로 걸어 들어갔다.
[입산 절대 금지 - 맹수 출현지역]
* * *
해외지점 오픈 건은 그 후가 더 피곤했다. 이환의 성격상 마무리가 꼼꼼하지 못한 것, 뒷말이 나오는 것을 못 견디기 때문에 더더욱 직원들을 몰아붙이게 되었다.
평소라면 직접 비행기를 타고 다녀올 텐데, 이번에는 그러지도 못했다. 뭐, 별다른 이유는 아니었다. 자리를 비우고 외국으로 나간 그 잠깐 동안 강해진이 잡힌다면 곧바로 혼을 내주어야 할 테니까.
덕분에 그는 날이 잔뜩 선 모습을 내내 보였고, 직원들은 그가 날이 서 있는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가설을 세웠다. 애인과 갑자기 싸웠다, 저런 성격에 애인이 있을 리가 없다, 회장과 또 불화가 생긴 것이 아니냐 등등.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늦은 퇴근 후 차에 오르자마자 기사가 하는 말에 환은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아니.”
“예?”
주차장을 나오고서야 불쑥 튀어나온 두 음절에 기사는 백미러를 통해 상사의 얼굴을 확인했다. 환은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불이 켜진 빌딩들이 거슬리도록 눈부셨다.
“호텔로.”
기사는 ‘무슨 호텔’이냐고 물으려다가 그의 얼굴이 영 심각한 것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제 상사가 되묻는 것을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는 그는 머리를 굴린 끝에 일전 갔던 호텔을 향했다.
호텔에 도착했을 때는 아주 늦은 밤이었다. 경호원들은 더 이상 문 앞을 지키고 있지 않았다. 지킬 사람이 탈출했으니 말이다.
그는 카드키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현관부터 거실, 주방까지 차례대로 불이 척척 켜졌다.
안은 청소를 해놓아서 해진의 흔적이 거의 없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매캐한 연기 냄새가 났다. 천장 연기 감지기 근처에는 그을린 벽지를 떼어내고 새로 붙인 흔적이 있었다.
다행히 호텔 화재 건은 무사히 마무리가 되었다. 펜트하우스에서 숙식 중이던 고객 하나가 요리를 하다 잠깐 외출했는데, 불을 켜둔 것을 깜빡해버렸다고. 하지만 호텔의 우수한 내장재와 화재 방지 시스템 덕분에 연기만 나고 끝났다는 스토리로 말이다.
‘불도 안 났는데 연기만 이렇게 많이 난 건 처음입니다. 대체 무슨 수를 쓴 건지…….’
강해진은 제 생각보다 더 과감한 놈이었다. 호텔을 연기로 가득 채우고 소란을 틈타 탈출할 생각을 하다니. 거기까지 생각하던 환은 미간을 구겼다. 아니, 아니다. 그깟 오메가 놈 하나 지키지 못한 것들이 무능한 것이겠지.
해진도 없는 이곳에 그가 온 이유는 하나였다.
‘왜 도망친 거지?’
환은 진심으로 알 수 없었다. 강해진이 왜 도망갔는지, 그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카펫이 끝나는 지점에 이르자 또각, 구두굽이 대리석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침실은 이전과 달리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강해진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환은 그 사실에 새삼 화가 났다.
그는 침대 위를 손바닥으로 쓸어보았다.
‘어째서 이렇게…….’
어째서 이렇게 있던 자리가 아무렇지 않게 지워질 수 있을까. 강해진의 체취도, 그의 몸에서 흘러나오던 열기와 체액도 쉽게 지워질 것은 절대 아닌데.
침대 위에 걸터앉은 환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이 이렇게 틀어질 줄은 몰랐다. 쓸데없는 물건들이나 사면서 얌전히 틀어박혀 있는 줄 알았더니.
“쯧.”
혀를 찬 이환은 그의 작은 몸을 떠올렸다. 제 손 아래서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힘없이 흔들리던 작은 몸뚱이가.
‘대체 그딴 몸을 하고 어딜 싸돌아다니는 건지.’
종잇장만도 못한 몸뚱이를 가졌으면 시키는 대로 얌전히 있기나 할 것이지.
‘혹시 임신이라도 하면 그 몸뚱이로 어쩌려고.’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환은 문득 뒷목에 소름이 쭈욱 끼치는 것을 느꼈다. 단 한 번의 관계였지만 확실하게, 끝까지 했다.
그리고 그와 자신의 매칭률은 99.99퍼센트이다. 알고 있던 사실이 새삼 소름 끼치게 다가왔다. 그 말은 곧…….
위잉, 생각을 끊어놓는 진동 소리에 환은 미간을 구겼다. 휴대폰 액정화면에는 ‘박 비서’라는 글자가 떠 있었다.
- 저, 전무님.
“뭡니까.”
- 큰일 났습니다. 회장님께서…….
“돌아가셨습니까?”
올 것이 왔나. 만약 회장이 정말로 사망했다면 필경 키스틸은 생판 남에게 넘어가게 된다. 그렇다면 강해진을 데리고 하는 이 장난질 같은 것도 모두 필요가 없어지고……. 마른세수를 하는 동안 수신구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 무슨 그런 소리를 하십니까! 아니, 차라리 그런 거면 낫게요!
환은 침대에서 일어섰다. 방음이 끝내주게 잘되는 이 호텔의 적막에 숨이 막혔다.
“무슨 일인지 똑바로 말하십시오.”
- 회장님께서 알아버리셨습니다. 지금 노발대발하시고 난리도 아닙니다.
“……무엇을 알고 계신단 말입니까.”
물으면서도 사실 환은 답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일이 복잡해지는군, 짜증을 억누르며 넥타이를 손으로 잡아 늘렸다.
- 아무래도 본사로 오셔야 할 것 같습니다. 지금 당장이요.
환은 전화를 끊는 동시에 침실을 나섰다. 또각, 또각, 규칙적인 구둣발 소리가 거실 카펫에 닿는 순간 사라졌다.
현관문을 열기 전에 환은 다시 안쪽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허공을 오래 휘저었다. 무엇을 찾아야 할지 알지도 못하면서 말이다.
유 회장은 손주가 집무실로 들어오는 것을 보고도, 그가 제게 허리를 굽혀 인사해도 시선을 주지 않았다. 그가 제 앞에서 각이 잡힌 모습으로 뻣뻣하게 선 채, 특유의 오만한 표정으로 저를 빤히 보고 있을 때에도 말이다.
그녀는 들고 있던 신문 한 페이지를 모두 정독하고서야 움직였다. 먼저 창문에 얹은 다리부터 내렸다. 새하얀 정장 바지에는 먼지 한 톨 묻어 나오지 않았다. 유 회장을 곁에서 모시는 이들은 이환의 그 성격이 그냥 나온 것은 아니라고들 말하곤 했다.
“부르셨습니까, 회장님.”
참을성이 바닥난 이환이 결국 먼저 입을 열었다. 유 회장은 느리고 우아한 동작으로 신문과 쓰고 있는 안경을 차례대로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너, 정신이 나간 모양이구나.”
이환은 무슨 말씀이냐 묻거나 반발하는 대신 입을 다문 채 제 조모가 이을 말을 기다렸다.
“오메가를 호텔에 가둬뒀었다고.”
환은 숨을 들이마신 채 빠르게 머릿속으로 상황을 정리했다.
‘강해진에 대해 알고 계신 건가?’
그리고 과거형을 쓴 걸 보면 아마 도망쳤다는 사실까지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내가 직접 나서서 처리하라고 시켰다.”
그러나 뒤이은 조모의 말에 환은 내내 지키고 있던 표정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처리, 말씀이십니까.”
“언론에 알려지기라도 하면 어떻게 되겠니.”
환의 등줄기에 소름이 쭉 끼쳤다.
그녀는 지금, 해진을 직접 찾아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버리겠다 말하고 있었다.
환은 마른침을 삼켰다. 조모가 제 흐트러진 모습을 싫어한단 사실을 알면서도 평정을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는 제 조모의 성격을 알았다. 유 회장이 혼자 힘으로 키스틸 그룹을 이렇게까지 키울 수 있었던 데는 그녀의 능력뿐만 아니라 성격 역시 한몫을 했다.
사람들은 이환 전무의 성질머리가 모두 조모에서 물려받은 게 아닐까 추측했다. 그 말은 곧, 조모의 성질머리가 원본이라는 뜻도 되었다.
환은 손끝이 저릿하게 굳어오는 것을 느꼈다.
‘강해진이 죽을지도 모른다.’
심지어 그에게는 가족도, 친지도 없지 않은가. 쥐도 새도 모르게 없어진다면 찾을 사람도 없다. 자신을 제외하고 깊이 연결된 자가 없다는 사실이 편하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저린 손끝에 주먹을 말아 쥐며 환은 억지로 표정을 가다듬으려 했다. 그러나 머릿속으로 자꾸 망상이 떠올랐다.
유 회장이 고용했을 신원 모를 사람들이 강해진의 자그마한 몸뚱이에다가 마구 폭행을 휘두르고, 그것도 모자라……. 그만하자. 눈을 꾹 감았다가 떴다.
“그…… 오메가는, 제가 찾아서 해결을 하겠…….”
“빌어 처먹을 자식아, 정신을 어디다 흘리고 다니는 거야!”
결국 유 회장이 호통을 쳤다. 뒤늦게 정신이 조금 들었다. 환은 가까스로 숨을 내뱉고 입을 열었다.
“걱정 마십시오. 언론에 입을 열거나, 그런 일은 절대 하지 못할 겁니다. 그런 배짱이 없는 녀석입니다. 제가 절대…….”
“그렇다면 더더욱 깨끗하게 처리를 해야 하지 않겠나?”
유 회장은 지지부진한 것을 딱 질색했다. 강해진을 처리하겠다고 마음먹었다면, 정말 그리할 터다.
환이 말을 고르는 것을 보며 유 회장이 미간을 구겼다. 옆으로 슬쩍 기울인 얼굴에 의심이 떠올랐다.
“아니면, 문제라도 있는 거냐?”
“……큰 문제는 없습니다만, 저는 단지…….”
“똑바로 말해라, 이환!”
또다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집무실을 채웠다. 일흔 넘은 노인의 목소리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였다. 환은 자세를 고쳤다. 화장기가 없는데도 또렷하다 못해 날이 바짝 선 유 회장의 눈이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문제없습니다.”
정확한 발음으로 또박또박 말하자 그제야 유 회장은 그에게서 시선을 거뒀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은 그녀가 피곤하다는 투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제가 저지른 일이니, 제가 처리하게 해주십시오.”
어릴 때부터 조모는 변명을 싫어했고 책임감을 강조했다. 그 또래 아이들이 로봇을 갖고 놀 때 환은 그녀에게서 경영학을 배웠다. 그녀가 ‘잘못’이라 생각하는 것을 인정하고 수습하겠다 말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다행히도 유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환은 하마터면 안도의 한숨을 내쉴 뻔했다.
“매듭까지 확실히 지어라.”
‘매듭’이라는 단어에서 환은 위화감을 느꼈다.
“따로 바라시는 것이 있으십니까.”
유 회장이 의자를 반 바퀴 돌려 창문 쪽을 바라봤다. 밤이 깊었지만 근처 빌딩숲은 환하게 불이 켜져 있었다. 검은 창문에 유 회장의 모습과 제 모습이 비쳤다.
“약혼해라. 그 오메가 말고, 문제가 되지 않을 사람으로.”
환은 순간 조모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다. ‘약’자로 시작하는 단어가 자신이 알고 있는 그 단어가 맞는지 의심하던 그는, 창문을 통해서 꽂히는 눈빛을 보고서야 제가 생각하는 뜻이 맞다는 것을 깨달았다.
“안정적인 가정을 이루고 싶다고 인터뷰도 해라. 거기다 대고 소문을 퍼뜨리는 놈이 악독한 놈이 되도록.”
조모는 지독히도 계산적인 사람이었다. 그녀는 강해진이 저를 협박할 경우까지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었다.
“NX 그룹이 이전부터 선 자리를 제안해왔으니 이참에 한 번 나가봐라.”
NX 그룹은 이전부터 키스틸 건설 쪽과 기술협약을 맺고 있는 곳이었다. 환의 가슴이 내려앉았다. 조모는 지금 제게 정략결혼을 권하고 있는 것이었다.
환은 고개를 한 번 조아렸다.
“예.”
지금으로서는 한 글자짜리 대답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 * *
몇 시간 걷지도 못했는데 해진은 숨을 쌕쌕 몰아쉬었다. 사지가 부서질 듯이 아프고 관절마다 불이 붙은 듯이 뜨거웠다. 무엇보다 배가 자꾸 아팠다. 히트사이클 약의 부작용이 또 나타나는 것일까.
‘하……. 벌써 이러면 안 되는데.’
산에 들어온 지 이제 고작 이틀째였다. 벌써 몸이 따라주지 않으면 도주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길 것이다.
그래도 이 상태로 더 움직이는 것보다는 잠깐이라도 휴식을 취한 뒤에 움직이는 게 나을 터다. 해진은 바위에 걸터앉았다.
그가 걷는 곳은 인적이 전혀 없었다. 이 산 자체가 입산이 금지된 산이기도 하고, 사람이 갈 수 있게 다듬어 놓은 길은 아예 발도 들이지 않았으니까.
등산길이 아닌 산길은 보기보다 몹시 위험했다. 발을 디뎠는데 아래가 꺼질 수도 있고 독사나 독충을 만날 수도 있었다. 그나마 지금이 여름이라 다행이지, 가을에는 썩은 낙엽을 밟고 미끄러지는 사고도 종종 있었다.
‘산으로 오지 말 걸 그랬나. 그래도 여기가 몸 숨기기에는 최적인데…….’
도시는 온갖 카메라가 널려 있고 이환의 사람들이 온갖 곳을 감시하고 있을 터다. 제 유일한 친구를 미국으로 보내버리고, 월세로 들어 사는 원룸까지 빼앗아버린 악독한 놈이니 도시에서 저를 찾는 일이야 쉬울 것이다.
그러나 해진은 탐험가였다. 길이 없는 야산에서 어떻게 이동해야 하는지, 위험한 동물로부터 몸을 어떻게 보호하는지 그에게는 상식이었다.
그리고 도시의 건물을 뒤지는 건 쉽지만, 이런 야산을 뒤지는 건 전문 인력 없이는 힘드니까. 탁 트인 시야가 아니니 헬기를 동원해도 찾기가 힘들 터다.
해진은 백팩에서 작은 생수통을 꺼내 입으로 가져갔다. 통이 거의 다 비어가지만 물이야 구하면 된다. 문제는 지금 도통 말을 듣지 않는 제 몸뚱이였다.
미지근한 생수통을 이마에 대었다. 고개를 들자 투명한 물병으로 햇빛이 조각조각 반짝거렸다. 그는 생수통을 내리고 주변을 살폈다. 아직까지 이 산에서 사람과 마주친 적은 없지만, 이환이 분명 수색대를 보냈을 터다.
‘몸이 뜨거운 것 같은데…….’
해진은 온도계를 찾기 위해 가방을 뒤졌다.
주변은 고요했다. 여름 태양은 그가 앉은 그늘을 침범하지 못했으며 풀벌레들이 작게 울었다. 사람 소리나 기타 인공적인 소리는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나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이 산에 오래 있어도 안 돼. 수색대가 오기 전에 이동해야지.’
해진이 선택한 곳은 작은 산봉우리가 여러 개 있는 곳이었다. 야생 맹수가 나와서 입산이 금지된 덕에 사람들과 마주칠 일도 없고, 수색을 진행한다면 면적이 넓어서 오래 걸릴 것이다. 그리고 조금만 더 가면 절도 있다.
‘조금만 더 버티자.’
일단 며칠만이라도 버텨야 했다. 돌덩이 같은 몸을 바위 위에서 겨우 일으키며 꺼낸 온도계로 이마의 열을 재었다. 현재 체온은 38.5도였다.
“아, 생각보다는 안 높네.”
게다가 이렇게 더운 날이면 햇빛으로 인한 체온 상승도 고려해야 하고 말이다. 그늘에 앉아 있어도 줄줄 흐르는 식은땀은 물론 별개의 문제인 것 같지만 고작 40도도 되지 않는 열은 그에게 미열일 뿐이었다.
해진은 백팩을 고쳐 메고 앉았던 자리 위에 나뭇잎을 문지르고 바닥도 발로 문대었다. 걸음을 떼려 하자 현기증이 일었지만 이를 앙다물었다.
온몸이 땀에 젖었다. 바지 안쪽으로 땀이 주르륵 흐르는 게 느껴졌다. 그늘로만 다닌 데다가 그렇게 덥지도 않으니 아마 식은땀일 터다.
‘여기서 쓰러지면 안 돼…….’
기를 쓰고 걸음을 내디뎠지만 고작 다섯 걸음 정도가 다였다. 해진은 무릎을 꺾으며 바닥을 짚었다. 축축한 흙이 손을 더럽히고 돌이 손가락 사이 여린 살을 찔렀지만 해진은 일어나는 것조차 힘들어 짚은 손을 파들파들 떨었다.
겨우 몸을 도로 일으킨 그는 어쩔 수 없이 다른 바위에 걸터앉았다. 사실 아까부터 열만 나는 게 아니라 몸 전체가 엉망이었다. 특히 제일 고통스러운 곳은 아랫배였다.
‘배가 너무 아파…….’
해진은 바위에 앉은 채로 허리띠를 풀었다. 어차피 사람이 들어오는 산도 아니니 볼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옷을 벗어 확인한 그는 숨이 턱 막히는 것을 느꼈다. 바지 안으로 흐른 것은 땀이 아니었다. 속옷과 바지에 피가 흥건했다.
‘어떡하지.’
산에서 내려가 차를 타고 가장 가까운 병원에 가는 데만도 아마 한나절은 걸릴 터다. 그 병원에서 이환이 보낸 사람을 만나지 않으리란 보장도 없고 말이다.
‘생각을 하자, 생각을.’
해진은 벗은 바지와 속옷을 구겨서 비닐 봉투에 따로 담고는 도로 백팩에 쑤셔 박았다. 새 속옷과 바지를 입으면서 생각을 이어보려 했으나 머릿속이 멍했다.
일단은 진통제부터 입에 넣었다. 물 한 모금을 마시는 것도 버거웠다. 약효가 돌 때까지 조금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백팩 지퍼를 꼼꼼하게 닫은 해진은 가장 앞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물론 해진의 본래 휴대폰은 버린 지 오래였다. 이건 에스테틱 숍을 나와서 구매한 선불폰이었다. 휴대폰 전원을 켠 해진은 힘없는 팔을 들고 이리저리 뻗어보았다.
“에이, 여기도 신호가 잘 안 잡히네.”
약효가 돌 때까지 시간이나 때우려고 했는데, 아무리 IT강국이라 하지만 근처에 마을 하나 없는 야산까지 신호가 통하지는 않았다. 아쉬움에 휴대폰을 다시 끄려다가, 어느 지점에서 상단 바에 표시된 수신 작대기 표시가 한 칸 켜졌다.
“어, 어어! 잡힌다!”
해진은 얼른 인터넷 브라우저 앱을 열었다. 느리긴 해도 포털사이트가 꾸역꾸역 열렸다. 작은 화면에 한 구역씩 로딩이 되는 것을 보던 중, 눈에 띄는 글자가 보였다. 몸이 아픈 탓인지 글자도 잘 읽히질 않았다. 자꾸 흐르는 땀을 주먹으로 훔쳤다.
[키스틸 레저 이환 전무, ‘약…]
‘이환’이라는 단어를 보자마자 제대로 읽지도 않고 기사 타이틀을 눌렀다.
‘무슨 일이라도 생겼나?’
왜 갑자기 포털 사이트에 이환의 이름이 뜬 걸까. 생각해보면 유명인이라 새삼스럽진 않았다. 뭐, 키스틸 레저 쪽의 일이겠지. 워낙 큰 회사기도 하니까.
절대, 절대로 그 미친놈을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당장도 배가 아파서 죽을 지경인데, 누가 누굴 걱정해.
해진은 로딩이 되길 기다리며 희게 바뀐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나 영 넘어갈 기미가 안 보였다.
“뭐야. 또 안 터지는 건가?”
화면은 흰색에서 아무것도 로딩되지 않고 그대로 멈춰 있었다. ‘뒤로’ 버튼을 눌러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인터넷에 연결되지 않았다는 경고 팝업이 떴다. 어쩔 수 없이 휴대폰을 끄면서도 조금 아쉬웠다.
“뭐, 보나 마나 사지 멀쩡하게 내 걱정은 하나도 안 하고 잘 살고 계시겠지.”
원래 그런 놈이니까. 해진 자신을 직접 찾으러 오지도 않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다시 배가 아파왔다.
“개새끼…….”
아무리 생각해도 아랫배를 찌르는 이 통증은 히트사이클 약의 뒤늦은 부작용이 맞는 듯했다. 하혈을 심하게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울분을 삼키며 아픈 배를 부여잡았다. 땀이 어찌나 많이 나는지 티셔츠도 푹 젖을 지경이었다.
‘이러다 나 죽는 거 아냐?’
덜컥 겁이 났지만 그딴 생각은 하지 않기로 얼른 마음을 고쳐먹었다.
‘웃기지 마. 보란 듯이 살아남을 거야.’
꼭 살아남아야지. 살아남아서 이환에게 엿을 먹여줘야지. 몸을 잔뜩 웅크리며 두 팔로 배를 감쌌다.
약효가 돌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려던 그는 묘한 소리를 듣고 굳었다. 다행인 점이라면 사람 소리가 아니라는 것이었고, 불행인 점이라면 소리의 주인공이 무척 위험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그의 상식이 맞다면, 이 거친 숨소리의 주인공은…….
불길한 예감을 안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소리가 들리는 곳에는 거대한 멧돼지가 해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 * *
NX 그룹 신 회장의 딸 신아연은 알파도, 오메가도 아닌 베타였다. 즉 다시 말해 결혼을 한다 해도 이환과는 아이를 낳기가 몹시 힘들었다. 그러나 유 회장은 환에게 말했었다. 제 유전자가 담긴 아이를 데려와야만 회사를 물려줄 것이라고.
그 사실을 적시하자 유 회장은 이환에게 말했다.
‘그것까지 내가 알 바는 아니지. 네 약혼이지 않나?’
즉, 다시 말해서 파혼을 했을 때 기업 간의 여파까지 모두 자신이 책임지라는 뜻이었다. 강해진이 도망친 것도, 그로 인해 생길 여파도 모두 제 탓이니 말이다.
“신아연 씨와 스케줄 잡았습니까?”
“예. 이번 주 토요일 12시, 키스틸 호텔 1층 카페로 정해졌습니다.”
환의 물음에 박 비서가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복도를 걸으며 벗어 내민 재킷 역시 익숙하게 받아 들었다.
“우리 호텔 카페라. 괜찮군.”
키스틸 호텔의 1층 카페는 한쪽 벽이 모조리 통유리로 되어서 안이 훤히 비쳤다. 박 비서는 일부러 그곳을 선택한 것이었다. 어차피 두 사람의 만남을 곧 공표할 테고, 그 전에 ‘두 사람의 자연스러운 만남’에 대한 소문을 퍼뜨려두는 게 자연스러우니까.
집무실에 들어온 환은 뒤를 돌아보았다. 함께 따라 들어온 박 비서에게 용건이 있냐는 눈짓을 했다. 박 비서가 조금 뜸을 들이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신아연 씨의 프로필을 준비할까요?”
데이트를 하기 전에 미리 상대 쪽에 대해 파악하고 있는 것이 좋을 것 같아 한 질문이었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이환은 무슨 개소리냐는 얼굴로 박 비서를 바라봤다.
“밀가루떡 놈이나 빨리 잡아 오십시오.”
그가 말하는 ‘밀가루떡 놈’이 누구인지 알아채는 데에는 다행히도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보고 드릴 것이 있습니다.”
권태롭던 이환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박 비서는 때를 놓치지 않고 얼른 말을 이었다.
“근처 산으로 들어간 듯하다고 합니다. 수색대를 보내어서 본격적으로 수색 시작 중입니다.”
기뻐할 줄 알았건만, 이상하게도 환의 얼굴은 여전히 ‘그래서 어쩌라고.’라고 말하고 있었다. 박 비서는 자세를 고치고 고개를 조아렸다.
“……경과 있으면 보고 드리겠습니다.”
이환이 귀찮다는 투로 물러가란 손짓을 했다.
박 비서가 나간 뒤, 이환은 자리에 앉아 절전 모드로 돌아간 모니터를 켰다. 포털 사이트에 접속하자 메인 화면에 제 이름이 보였다.
[키스틸 레저 이환 전무, ‘약…]
잘린 제목을 클릭했다. 새로 넘어간 창에서 커다란 글씨로 제목의 뒷글자까지 보였다.
[키스틸 레저 이환 전무, ‘약진을 위해 구조조정 불사할 것’]
최근 키스틸 레저 인사과는 매우 바빴다. 기존에 있던 이들이 모두 물갈이되어서였다. 유 회장의 짓이었다. 그녀는 이환과 친밀한 간부들을 잘라내고 제 사람으로 채울 것을 명령했다. 반발도 하긴 해보았다.
‘그 오메가 때문입니까? 아무 일도 없었고 그 녀석 혼자서 난리 부리는 거라고 몇 번을 말씀드려야…….’
‘벌써 소문이 퍼지고 있다. 네가 수습할 테냐?’
유 회장의 말로는 얼마 전 모임에서 이환의 이야기가 나왔다고 했다. 요즘 이름 모를 오메가와 호텔에서 동거하는 게 사실이냐는 둥, 그 오메가가 임신한 채로 도망을 친 게 사실이냐는 둥.
평소에 이환이 다른 이들과 교류를 하지 않은 탓도 컸다. 이환 정도 또래에다 비슷한 재력과 명망이 있는 이들은 모두 저들끼리 친분 아닌 친분을 쌓고 있으니.
‘나는 내 손주가 그 정도로 얼빠진 놈이 아니라고 믿지만, 과연 다른 사람들도 그럴지 모르겠구나.’
‘제가 수습하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무리 내 손주지만 나 역시 영 못 미덥구나.’
‘회장님.’
‘일은 직원들에게 맡기고 당분간 몸 사려라.’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결과, 그나마 쓸 만하게 키워 놓았던 키스틸 레저의 간부들을 모조리 잃고 말았다. 언론대응팀에 알아서 대강 일을 처리하라 해두었더니 약진이니 뭐니 하는 저딴 기사나 내보내고 있고 말이다.
‘이게 다 그놈 때문이다.’
이가 갈렸다. 그 조그마한 오메가 놈 때문에 도대체 손해 본 게 얼마인가. 그는 모니터에서 눈을 떼고 의자 등받이에다 몸을 깊이 묻었다.
아마존 탐험이니 뭐니 하며 온갖 다큐멘터리를 보고, 이상한 만능칼 같은 것을 들고 다니는 놈이었다. 겨우 한주먹짜리 몸뚱이라 해도 좀 불안하기는 했다.
특히 산으로 들어갔다면 더더욱 찾기 힘들겠지. 도시에서야 사람만 풀면 금방 잡을 테지만 말이다. 이환은 턱을 매만지며 산을 아예 없애버리려면 무슨 허가가 필요한지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허가를 받지 못해도 할 거지만.
‘제 발로 오게 만드는 방법이 없으려나.’
녀석이 알아서 찾아오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어쨌든 지금은 회사를 안정화시키는 게 제일 중요했다. 약진이니 구조조정이니 저딴 단어를 함부로 쓰는 기사부터 밀어내야 할 터다.
한숨을 길게 내쉰 환은 책상 위 스피커폰을 눌렀다. 박 비서가 피곤에 찌든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넥타이를 잡아 늘리던 환은 문득 컬러가 마음에 들지 않아 얼굴을 구겼다.
- 예에, 또 무슨 일이십니까. 아까 말씀하시지…….
“기사, 최대한 빨리 준비하십시오.”
- 예? 무슨 기사 말씀이십니까?
환은 의자에서 일어서며 돌아섰다. 벽면 거울에 제 모습이 비쳤다. 흐트러진 구석 하나 없이 완벽한데도 어딘가 묘하게 초췌해 보여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 약혼 관련 기사 말입니다.”
만지작거리던 넥타이가 풀려 바닥으로 스르륵, 떨어졌다.
* * *
해진이 즐겨 보는 탐험 다큐멘터리는 대부분 외국에서 촬영하고 제작된 것이었다. 때문에 한국의 환경과는 좀 차이가 있었다. 하지만 한국에서 탐험할 때에 필요할 몇 가지 상식은 그도 알고 있었다.
이를테면 야생에서 멧돼지를 만났을 때 나무로 피해야 한다는 것 말이다. 일전에 읽었던 책에서 나무 아래 멧돼지가 있고 사람은 굵은 나뭇가지에 겨우 매달려 있는 그림도 설명과 함께 봤던 기억이 있었다.
그래서 해진은 지금 나무 위에 있었다. 봤던 그림처럼 힘들게 매달려 있는 게 아니라, 편하게 앉아 있다는 점이 다르지만 말이다.
물론 등산 장비를 이용해서 나무줄기에다 단단하게 로프를 묶어 놓아서 몸이 떨어질 염려가 없기도 하지만, 공격을 할 줄 알았던 멧돼지가 얌전히 있는 까닭이 더 컸다.
“돼지야, 이것도 하나 더 줄까?”
해진이 사과를 꺼내 보이자 멧돼지가 커다란 코를 들고 궥궥, 소리를 내었다.
“자, 하나 더 줄게.”
그가 사과를 아래로 던지자 멧돼지가 입을 벌리고 잽싸게 받아먹었다.
“오오, 잘 먹네.”
해진은 어느새 멧돼지와 친해졌다. 물론 이 짐승은 처음엔 해진을 죽이려 들었다. 해진이 나무로 잽싸게 올라가자 한참 동안 주변을 맴돌고 씩씩거리다가 나무줄기를 이마로 쿵쿵 받기까지 했다.
화가 잔뜩 난 멧돼지를 달래기 위해 일단 가방에 있던 과일을 던져보았는데, 우습게도 그게 먹혔다. 멧돼지는 심지어 더 달라는 듯이 나무줄기에 매달려 앞발을 긁어대기까지 했다.
“이제 없어! 나도 먹어야지.”
해진이 휘휘 손을 내저었지만 멧돼지는 여전히 해진을 올려다보며 도망칠 생각을 않았다. 해진이 손과 발을 동시에 열심히 내저었다.
“가! 없어!”
멧돼지는 그러나 아예 나무 아래에 철퍽 주저앉아 버렸다. 마치 해진이 사과를 더 던져 주기까지 기다리겠다는 투였다. 해진은 한숨을 쉬며 나무줄기에 몸을 기대었다.
“그래, 뭐, 해보자. 넌 거기서 주지도 않을 사과나 기다리고, 난 여기서 낮잠이나 자든가.”
그래도 해열제가 통해서 아까보다는 몸 상태가 나은 게 다행이었다. 얼마나 갈지는 모르지만 당장은 하혈도 그쳤고 말이다.
‘병원에 가보는 게 좋을 텐데…….’
하지만 몸 상태가 이렇게 된 이유를 말하려면 불법으로 제조된 히트사이클 약을 먹었다고 말해야 하고, 그러면 조사가 들어갈지도 몰랐다.
“하, 진짜 개새끼…….”
새삼 또 욕이 나왔다. 눈물도 나올 것 같았지만 꾹 참았다.
‘난 울지 않아. 그 개새끼한테서 완전히 벗어나기 전까지는.’
가방을 힘줘 끌어안는데, 갑자기 멧돼지가 벌떡 일어나더니 어딘가로 도망을 쳤다.
“야, 어디 가? 벌써 포기하냐?”
오랜만에 친구라도 생겼나 싶었는데, 조금 서운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서운함은 곧 불길함으로 바뀌었다. 저 멧돼지가 부리나케 자리를 벗어나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이곳이 위험하다고 판단해서였다.
멧돼지의 천적은 사람 말고는 거의 없었다. 설마 이 야산에 호랑이나 곰이 있지는…… 않겠지……?
그리고 뒤늦게 해진의 귀에도 작게 소리가 들렸다. 공사 소리 비슷한 것이 멀리서 어렴풋이 울렸다. 가방을 등에 단단히 멘 뒤 나무줄기에 묶은 로프를 쥐고 조금 더 높은 나뭇가지로 이동했다.
아슬아슬하게 선 채로 손차양을 하고 내다보니 저 멀리 크레인 같은 것들이 있었다. 공사라도 하나.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쌍안경을 꺼내었다. 쌍안경 렌즈에 눈을 대는 순간, 해진은 거대한 철망 같은 것을 보았다.
‘저거…… 혹시…….’
믿지 못해 잠깐 눈을 떼었다가, 다시 확인했다. 거대한 철망과 안전모를 쓰고 철망을 철봉 사이에 설치하는 사람들, 그리고 작지만 희미하게 보이는 ‘키스틸’이라는 글자. 결론은 하나였다.
그 미친놈이, 산 전체에 거대한 울타리를 치고 있었다.
‘미친 새끼가……!’
이환이 자기를 찾기 위해 수색대를 풀 거라고는 당연히 짐작했다. 그러나 산에다 울타리까지 치리라고는 생각 못 했다.
해진은 자신이 본 것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쌍안경을 들었다. 장비가 꽤 많았다. 트럭에 키스틸 로고가 박힌 걸 보면 이환이 보낸 사람들이 확실했다. 그리고 그들이 설치하고 있는 건 아무리 봐도 울타리가 맞았다. 고속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낙석방지망보다 훨씬 더 높고, 전깃줄로 추정되는 검은 선도 보였다.
‘설마 전기울타리?’
진짜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닐까? 내가 모르고 손이라도 대면 어떡하려고? 해진은 소름이 쭉 끼쳤다.
일단 나무줄기에 묶은 로프를 풀었다. 혹시 멧돼지가 다시 돌아오지는 않을지, 혹은 다른 위험한 야생 동물은 없는지 주변을 여러 번 살핀 뒤에야 조심조심 나무를 내려왔다. 발길은 이미 정해놓은 곳을 향해 움직였다.
‘울타리를 쳐서 나를 산에 가두기라도 하려는 모양인데, 참 무식하다, 진짜.’
나갈 길을 차단하고 수색을 하려는 모양이지. 어쨌든 동시에 산의 모든 방면에다 동시에 울타리를 칠 수는 없을 테니, 반대쪽으로는 수색대가 오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렇게 가운데로 몰아넣을 계획이겠지만 해진은 쉽게 잡혀줄 생각이 없었다.
“날 너무 우습게 보셨다, 이환.”
혼잣말을 하며 걸음을 옮겼다. 다시 배가 아파왔지만 이깟 것쯤 견딜 수 있었다.
그는 그대로 씩씩하게 산을 이동했다. 몇 시간 동안 쉬지도 않았다. 쉴 시간도 없었다.
날씨가 꽤 더웠다. 걸을 때마다 땀이 줄줄 흘렀다. 건강한 사람이 맨몸으로 걸어도 힘들 날씨인데 무거운 짐까지 메고 상태 안 좋은 몸으로 걷고 있으니 효율이 떨어짐은 어쩔 수가 없었다.
숨이 턱까지 찼으나 해진은 멈추지 않았다. 여기서 멈추면 밤이 되기도 전에 포위당할 거다.
그는 걷고 또 걸으며 주머니에 넣어둔 거울을 한 번씩 만지작거렸다. 어머니의 유품이자 이환과의 인연이 시작된 그 거울이었다.
엄마가 지금 제 모습을 보고 있다면 뭐라고 할까. 그러게 왜 그런 알파를 만났느냐고 나를 질책하실까.
아니, 해진이 기억하는 엄마는 그렇게 모질지 않았다. 아마 자신을 꼭 안아줄 것이다. 엄마에게 말하지 그랬느냐며, 같이 해결하자고 하겠지. 엄마를 생각하자 괜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처음 이 거울을 받으려고 이환을 만났을 때만 하더라도 이런 상황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해진은 스스로를 꾸짖었다. 그의 사악함을 알아보지 못한 과거를 꾸짖는 게 아니었다.
그는 지금도 이환을 보고 싶어 하는 자신을 꾸짖고 있었다.
처음 제대로 마음을 준 사람이었다. 해진에게는 첫사랑이나 마찬가지였다. 내내 혼자 외롭게 살았던 해진이었는데 말이다. 그러니 이 지경이 되어서도 못 놓는 것이었다.
‘정신 차려, 강해진. 코앞에서 내가 죽어도 눈 깜짝 않을 놈이니까.’
그런데도 해진은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만에 하나라도 내가 그의 아이를 낳는다면. 혹시라도 그렇게 되면 이 관계가 달라질 가능성이…… 있을까?
다시 말해서, 그가 제게 다시 마음을 줄 일은 없을까?
‘자기 아이를 가진 오메가를 함부로 대하진 않겠지.’
그의 목적이 아이를 낳게 하는 거라고 그랬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때뿐이겠지. 이환은 자신을 감금하고, 부작용이 많다는 약을 억지로 먹게 하고, 친구와 직장과 집까지 앗아갔다.
아이를 낳은 뒤의 신변을 보장해줄지 장담할 수 없었다. 마음을 주기는 개뿔. 비밀을 유지한답시고 저를 죽이지 않으면 다행이다.
목표치의 절반은 왔을까. 해진은 숨이 턱 끝까지 찬 채로 드디어 쉬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일단 근처를 살폈다. 다행히 인적도 없고, 짐승의 기척도 없는 듯했다.
해진은 한숨을 폭 내쉬고 바위 위에 앉았다. 아까부터 다시 배가 아파오고 있었다. 어쩌면 심상찮은 병에 걸렸는지도 몰랐다. 힘없는 손을 겨우 움직여 배낭에서 진통제를 꺼내려다가 관두었다. 진통제는 움직임과 감각을 둔하게만 만들었다. 적어도 이 산을 벗어날 때까지는 약 없이 버텨야 했다.
땀에 푹 젖은 티셔츠를 갈아입고 싶었지만 어차피 걸으면 또 젖을 거라 꾹 참고 다시 일어섰다. 아니, 정확히는 일어서려 했다. 아랫배를 후벼 파는 듯한 통증에 인상만 구기며 도로 앉았다. 엉덩이에 축축한 감촉까지 느껴졌다. 또 하혈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몸에 힘이 안 들어가…….’
그 때였다. 잠깐 쉬는 동안 느끼지 못했던 기척이 근처에서 느껴졌다. 여러 군데였다.
‘뭐지?’
멧돼지는 아니었다. 이렇게 조심스러운 기척이라면 호랑이처럼 사냥을 제대로 할 줄 아는 육식 동물일 텐데, 하나가 아니니…….
조심스레 주위를 살피던 해진은 나무 사이로 스치는 인영을 보았다. 저를 찾아온 수색대와 벌써 마주친 모양이었다.
‘내가 여기서 잡힐 것 같아?’
그는 뻣뻣한 다리를 억지로 움직여 튀어 오르듯 달리기 시작했다. 방금 전까지 고통으로 일어서지도 못했지만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이 그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그것도 거의 초인적인 속도로. 그리고 그와 거의 동시에 사방에서 사람들이 뛰쳐나왔다.
“잡아!”
해진은 사람들 사이의 빈틈을 찾으며 가방 겉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각기 다른 양쪽으로 던졌다.
던진 물건은 땅에 닿자마자 펑, 하고 꽤 큰 소리를 내며 검붉은 연기를 터뜨렸다. 연기는 순식간에 사방으로 퍼졌고, 들이마신 사람들은 괴로워하며 재채기와 기침을 몹시 했다. 후추와 고춧가루 등을 섞어서 해진이 직접 만든 폭탄이었다.
어느새 방독면을 꺼내 쓴 해진은 쓰러진 사람들 사이로 달리기 시작했다. 눈물 콧물을 흘리며 뒹굴던 사람들 중 몇몇이 겨우 일어나 해진을 잡으려 했으나 이미 늦었다. 해진은 그 작은 몸으로 거의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 달렸다.
“사진, 사진이라도 찍어. 빨리!”
쓰러진 사람 중 하나가 외쳤고, 해진이 반사적으로 돌아보았다.
‘사진?’
찰칵, 소리와 함께 검은 연기 사이로 플래시가 터졌다. 불빛에 정신이 든 해진이 다시 앞을 보고 달렸다.
해진은 미친 듯이 달리며 머릿속으로 생각을 이었다. 그가 향하고 있는 곳은 아까 멧돼지가 달려간 방향과 정확히 일치했다. 물론 이 정도 인파라면 녀석도 도망칠 가능성이 있지만, 일종의 도박이었다.
“돼지야, 형아 왔다!”
일부러 크게 소리를 질렀다. 녀석이 흥분해서 덤벼들기를 바라서였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 멀리서 아까 보았던 멧돼지가 나타났다. 해진은 근처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가장 높아 보이는 나무를 향해 무언가를 휙, 던졌다. 갈고리였다.
나무에 걸쳐진 갈고리에는 긴 로프가 걸려 있었다. 암벽 등반 장비를 해진이 직접 개조해서 만든 것이었다. 이걸 만드느라 꽤 고생했다. 여러 번 실패하기도 했고, 덩치들 눈에 띄지 않게 매번 환풍구 위에다 숨겨두느라 어깨가 빠지는 줄 알았다.
호텔에 갇혀 있는 동안 제 블랙카드로 이것저것 구매해서 이런 걸 만들고 있었다는 걸, 이환은 짐작이나 했을까? 아마 못 했을 거다. 그러니까 멍청하게 자신이 도망칠 때까지 놔둔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통쾌했다.
로프를 힘껏 움켜쥔 그가 장비에 달린 손잡이 같은 것을 당기자 로프 길이가 빠르게 줄어들며 해진의 몸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가 나무 위로 올라가는 동안 땅에 남은 대원들은 멧돼지를 보고 혼비백산했다.
“미친, 저게 뭐야! 진짜 멧돼지야?”
“피해, 피해! 나무로 올라가!”
멧돼지가 기겁할 만한 기세로 덤벼들었다. 수색대원들은 전경들이 쓸 법한 방패 같은 것을 들고 물러나거나 서둘러 나무 위로 올라갔다. 해진은 나무 위에 매달려 그들이 대피하는 것을 보고서야 다시 움직였다.
‘저 정도면 멧돼지한테 죽지는 않겠네.’
생판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혹시라도 저 때문에 멧돼지한테 옆구리를 꿰뚫리거나 하는 모습을 봤다면 죄책감에 시달렸을 텐데, 장비랑 대처하는 법을 보니 그래도 나름 전문가들을 데려온 모양이었다.
“천천히들 오세요. 몸 사리시고.”
그는 가방 겉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바닥에다 후두둑, 뿌렸다. 탁구공 사분의 일 정도 되는 크기의 구슬 여러 개가 주변 땅을 채웠다. 별것 없어 보이지만 이런 험한 길에는 제법 위험한 요소로 작용했다. 자칫 밟고 넘어졌을 때 근처의 나뭇가지나 바위 하나도 위협이 되니까. 나뭇잎 아래 깔린 것을 못 보고 밟을 수도 있고 말이다.
멧돼지의 궥궥, 하는 거친 울음소리와 사람들의 비명이 점차 멀어졌다. 해진은 부디 저 사람들이 환에게 전해주길 바랐다. 자신이 얼마나 진심을 다해 도망치고 있는지 말이다.
도망은 계속되었다. 해진은 절대 멈추지 않았다. 배는 계속 찢어지는 것처럼 아팠고 더위 때문에 땀이 흘러 지쳤지만 결코 쉬지 않았다. 아주 잠깐 서서 바지 위에 다른 바지를 덧입은 것이 전부였다. 하혈한 피가 허벅지를 축축하게 적셨기에 혹시라도 피를 흘려 흔적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바지를 두 겹이나 입으니 더위는 다섯 배 정도 더해진 느낌이었다. 운동화 끈을 단단히 묶고 다시 걸으면서 문득 해진은 생각했다. 이환은 알고 있을까. 이렇게 제 몸 상태가 안 좋은 것을.
‘내가 아프단 사실을 알면 직접 올까?’
그러나 부질없는 생각임을 깨닫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 * *
“그래서 이번 저희 상품개발2팀에서는 랜드오퍼레이터(현지 협력사)와 연계하여 현지의 다양한 콘텐츠를 단시간에 즐길 수 있도록…….”
개발2팀의 팀장이 열을 올리며 설명을 이어가고 있었으나 환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강해진이 들어간 것으로 추정되는 산을 다 틀어막아서라도 잡아내라 했다. 사기업이 임야에다가 공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허가가 필요했지만, 그깟 것 이환에게는 알 바가 아니었다.
‘목숨만 붙여서 데리고 와.’
그게 이환의 유일한 조건이었다. 강해진이 어떻게 되든 상관없으니까, 자기 눈앞에 목숨만 붙여서 데리고 오라는 것. 어차피 필요한 것은 녀석의 구멍과 거기 연결된 포궁 말고는 없었다.
환은 지금 느끼는 이 기분이 무엇인지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그는 언제부터인가 강해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처음에야 신경이 쓰여서 그랬다지만, 그를 생각하는 때가 점점 잦아지더니 이제는 깨어 있는 내내 강해진을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 아침에도 그랬다. 환은 눈을 뜨자마자 강해진을 떠올렸다. 심지어 제 아래에 깔려서 헐떡거리며 신음하던 모습을 말이다.
아침마다 있는 정직한 몸의 반응이라기에는 지나치게 딱딱해진 페니스를 느끼며 환은 속으로 욕을 씹었다.
어째서 강해진이라는 놈은 눈앞에서 사라지고서도 저를 괴롭히는 것일까. 지금 당장 머리채를 잡아챌 수도, 그 더러운 구멍을 혼쭐낼 수도 없는데.
원활한 출근 준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자위를 해야 했다. 발기한 상태로 출근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나 제 몸의 가장 은밀한 부위를 만져서 무언가를 분출하는 행위는 그에게 있어 아직 익숙하지도, 달갑지도 않았다.
환은 자신의 페니스를 만지며 강해진의 달뜬 모습을, 그가 내뱉던 신음을 떠올렸다. 딱 한 번 들어가 보았던 그의 젖은 구멍 안쪽을 떠올렸다. 잔뜩 흥분해서 조이던 감촉을, 축축하고 말캉한 그 감촉을 애써 떠올렸다.
‘그를 당장 만지고 싶다.’
한창 페니스를 문지르던 중,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환은 새삼 스스로에게 놀랐다. 그리고 자신이 느낀 감정의 프로세스를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지금 당장 강해진을 안고 싶어 미칠 것만 같은 그 기분을, 그는 결코 이해할 수 없었다.
피티가 끝나고서도 이환이 아무 말 없자 개발2팀 팀장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전무 앞에서 직접 하는 피티라며 야심 차게 준비했는데 정작 전무는 뭐라도 씹은 것 같은 표정으로 책상만 응시하고 있으니.
“전무님.”
보고 있던 간부 하나가 결국 조심스레 환을 불렀다. 환은 한참 지나서야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돌아버리겠군.”
“예?”
테이블을 둘러싸고 앉은 여남은 명의 간부들이 저들끼리 눈치를 봤다. 방금 한 피티가 전무를 화나게 했다면 당장 대책을 세워야 했으나, 그를 화나게 한 원인을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무슨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다른 간부가 조심스레 다시 물었지만, 환은 여전히 묘한 표정을 하고 - 간부들의 눈에는 아주 화가 난 듯이 보였다 - 테이블 어딘가를 응시할 뿐이었다.
“정말이지 못 참겠어.”
팀장은 이제 거의 울 것 같은 얼굴을 했다. 몇몇 간부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마침내 환이 일어섰다. 간부들도 따라 일어섰다.
“발표한 대로 개발 진행하십시오. 자료는 내 메일로 보내고.”
팀장은 그의 말에 기뻐해야 할지 어째야 할지 몰라 당황했다. 환은 사람들을 두고 먼저 회의실을 나섰다. 박 비서가 옆으로 따라붙었다.
“전무님, 수색대원 중 한 명이 찾아왔습니다. 진척이 있었다고 하는데, 만나보시겠습니까?”
이환이 그를 돌아보았다. 다소 사나운 기세에 박 비서는 잠깐 흠칫하였지만, 이내 침착하게 휴대폰을 꺼내 곧바로 연락을 취했다.
수색대원은 붉은 기가 채 가시지 않은 눈을 하고 왔다. 산에서 곧바로 달려왔는지 흙투성이에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는 이환을 보자마자 하소연을 했다.
“아니, 무슨 일반인이 최루탄을 갖고 다닙니까? 산길은 어떻게 그렇게 잘 알고요? 저희 팀, 진짜 죽을 뻔했습니다.”
후추와 고춧가루로 만든 폭탄을 그대로 맞고 멧돼지에게 죽을 뻔하고서도 수색대는 포기하지 않았다. 곧바로 해진을 뒤쫓아 갔다. 그러나 해진 역시 만만찮았다. 그는 프로급의 수색대원들을 낭떠러지에 가까운 내리막길로 유인하고, 일부러 다른 쪽으로 기척을 내기까지 했다.
한참 설명하다가 환의 눈치를 보던 대원이 머뭇거리며 휴대폰을 내밀었다. 액정화면에는 해진의 사진이 떠 있었다.
박 비서와 대원이 잠시 대화를 주고받는 동안 환은 해진의 사진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사진 속의 강해진은 방독면을 쓰고 있어 얼굴 반 이상이 가려져 있었지만 놀란 표정은 알아볼 수 있었다. 가뜩이나 큰 눈이 더 커다래져서 카메라를 쳐다보는 게 꼭 토끼 같았다.
사진을 보는 순간 환은 숨을 멈춰버렸다. 자의가 아니라, 말 그대로 숨이 턱 막혔다. 그는 사진 속의 해진이 진짜라도 되는 듯이 멍하니 손을 뻗어 액정화면을 더듬었다. 따끈따끈하고 말랑하던 해진의 감촉은 당연히 느껴지지 않았다.
해진이 도망친 뒤로 내내 갖고 있던 감정이 그의 속에서 꿈틀거리며 존재를 알렸다. 억누르려 했으나 마침내 한계점에 다다른 것처럼, 끓는 냄비처럼 덜걱거리며 요란하게 그를 뒤흔들었다.
그 감정은 처음 해진과의 매칭률을 보았을 때 느낀 것과 조금 비슷했다. 반드시 손아귀에 넣어야 직성이 풀리겠다는, 일종의 소유욕 말이다.
그러나 그것과는 결이 완전히 달랐다.
“건강 상태는 어때 보였습니까?”
“많이 지쳐 보였고…… 어디가 아픈 것처럼 보였습니다.”
박 비서가 대원에게 묻고, 대원이 대답했다.
“어떻게 아파 보였습니까?”
“그, 그게, 피를 흘리고…… 있었습니다. 앉아 있던 바위에 피가 묻어 있더군요.”
환은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이 감정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저를 괴롭히는지.
어째서 하루 종일 그를 생각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는지.
“역시 내가 직접 찾으러 가야겠습니다.”
내내 듣고만 있던 이환이 마침내 선언했다.
* * *
수색대원들의 기척이 더 느껴지지 않는 때가 지나서도 해진은 계속 달렸다. 배에 지독한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한 건 더 이상 그들이 자신을 못 찾는다는 확신이 들 때였다. 잔뜩 곤두선 긴장감이 가라앉으며 그 자리를 대신 통증이 메웠다.
아픈 배를 움켜쥔 채로 비틀비틀 걸으며 해진은 나침반을 확인했다. 방향은 정확했다.
‘조금만 더 가면…….’
돌덩어리 같은 다리를 억지로 움직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다행히도 해진이 찾던 것이 나왔다. 저 멀리 기왓장으로 만든 지붕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향을 태우는 냄새도 은은하게 났다. 그가 찾아온 곳은 깊은 산속의 작은 절이었다.
“도착……했다…….”
절 뒷마당, 자그마한 텃밭에 도착하자마자 해진은 풀썩 쓰러졌다.
꿈속에서까지 해진은 이환에게서 도망을 쳤다. 자신의 뒤를 바짝 쫓아오는 이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해진은 가방에서 온갖 것을 꺼내 던졌다. 그러나 생각하고 있던 것들은 안 나오고 요상한 것들만 손에 잡혔다. 인형이나 꽃 같은 것들 말이다.
‘미친놈아! 꺼져! 꺼지라고!’
그러나 해진은 개의치 않고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것이나 그에게 던졌다.
‘절대 네 새끼는 안 낳을 거야! 미친놈아!’
이환이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다가왔다. 해진은 울고 싶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위협적으로 뻗어왔다.
‘지금 배 속에 있는 그 아이도 낳지 않겠단 말입니까?’
뒤이은 이환의 말에 해진은 그를 피해야 한단 사실도 잊고 우뚝 굳었다.
‘……뭐……?’
이환이 그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당신, 내 아이를 가졌지 않습니까.’
뭐라는 거야, 이 돌아버린 새끼가……. 내 배에 뭐가 있다고? 해진은 반사적으로 아랫배를 더듬었고, 제 배가 비정상적으로 불룩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안 돼. 비명을 지르고 싶었으나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불룩해진 배가 점점 더 부풀었다. 끔찍했다.
이환이 씩 웃었다. 그 잘난 얼굴에 주먹이라도 꽂아주려 팔을 휘둘렀지만 눈앞의 환은 신기루처럼 형체가 없었다.
마구 주먹을 휘젓던 해진은 겨우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 낯선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머리카락이 하나도 없는, 나이 지긋한 남자였다.
“아이고, 좀 괜찮아요? 무슨 꿈을 그리 사납게 꾸셔.”
해진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짙은 향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법복을 입은 대머리 남자는 아마 승려일 터다. 그 말인즉, 무사히 절에 도착했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해진은 모른 척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
“절이에요. 텃밭에 쓰러져 계시던 걸 데려왔어요.”
모두 해진이 지도를 보며 계획한 대로 착착 진행되고 있었지만 그는 일부러 머리를 짚고 혼란스러운 척을 했다. 몸을 일으키려 하자 스님이 그를 부축해주었다.
“좀 마셔요.”
건넨 물을 마시며 해진은 최대한 공손하고 겁을 먹은, 그리고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물론 겁을 내는 건 가짜 표정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 미친놈만 생각하면 몸이 떨릴 정도니까.
해진은 아직 멍한 정신을 집중해 주변을 다시 찬찬히 둘러보았다. 스님이 딱히 의심스러워 보이진 않았고, 누가 몰래 지켜보는 기척도 없었다. 들고 온 가방도 벽 한쪽에 얌전히 놓여 있었다.
하긴, 만약 수색대가 저를 찾았다면 이미 자신은 SUV 뒷좌석 같은 곳에 팔다리가 묶인 채로 누워 있겠지. 아, 이건 좀 오버인가.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해진이 고개 숙여 인사하자 승려는 손을 내젓고 쯧쯧, 혀를 찼다. 얼굴에 동정심이 보였다.
“아니, 거참, 병원은 안 된다고 중얼거리는 것도 모자라서 몸에다가 글자까지 써 놓았으니, 이건 뭐, 병원엘 데려가고 싶어도 방도가 있나.”
승려의 말에 해진이 하하, 어색하게 웃었다. 혹시 몰라서 배에다가 ‘병원에는 데려가지 말아주세요’라고 커다랗게 써놓길 잘했다 싶었다. 정신이 없을 때 병원에 갔다가 혹시라도 이환 쪽 사람이 자기를 발견할 수도 있으니까.
양손으로 컵을 쥔 채 물을 홀짝거리고 있자니 승려가 이번에는 조금 미심쩍은 표정을 했다.
“산길 따라서 등산 온 것도 아니고, 갑자기 뒤뜰 텃밭에 나타난 걸 보면 저 험한 산을 그냥 걸어왔단 건데……. 누구한테 쫓기기라도 하는 거요?”
해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아주 심각한 표정을 하고 시선을 떨궜다. 여전히 느껴지는 눈초리에 조금 더 얼굴을 구겼다. 울음을 참는 것처럼 입술을 꽉 깨물자 그제야 승려가 시선을 거뒀다.
“뭐, 말하기 싫으면 말고.”
다행히도 승려는 더 묻지 않을 것 같았다. 역시 절을 선택하길 잘했다 싶었다. 예로부터 절이나 성당 같은 종교 시설은 사연 많은 도망자들의 안식처가 아니었던가.
“감사합니다. 저, 혹시…… 여기서 하룻밤만 신세를 져도 괜찮을까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묻자 승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거, 사연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몸 나을 때까지만이라도 지내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연신 고개를 숙였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감사한 마음만은 진심이었다.
“몸조리 천천히 하시고 배고프면 말해요.”
“저, 잠시만요, 스님.”
해진이 얼른 가방을 더듬어 무언가를 하나 꺼냈다. 이환의 블랙카드로 주문했던 명품 시계였다.
일부러 망설이는 척, 아니, 결의를 다지는 척 머뭇거리다가 불쑥 케이스째로 내밀었다.
“이건 제 돌아가신 형님이 아끼던 유품인데…….”
승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해진은 때를 놓치지 않고 승려의 손에다 케이스를 쥐여주었다.
“이거라도 받아주세요. 희사할 돈은 없지만 이건 드릴 수 있어요.”
새 명품을 그냥 준다면 당연히 의심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적당한 스토리가 있으면 갑자기 주어진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돌연 닥친 행운이라고 생각할 뿐이지.
“형님 유품을 이렇게 마음대로 줘도 돼요?”
“돌아가신 지 한참 됐는걸요.”
형은 개뿔. 이건 뇌물입니다.
“그래도 귀해 보이는데, 허 참…….”
“받아주셔야 마음이 편할 것 같습니다.”
어차피 제 돈으로 산 것도 아니거든요.
“저, 대신, 혹시 아주 무섭게 생긴 사람들이 여기 누가 찾아왔는지 물으면 모른다고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승려는 미심쩍게 해진을 보다가 이내 측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조건을 붙여야 사람들은 의심하질 않는다. 시계가 비싼 것임을 알아봤는지 며칠 더 머물러도 되고 욕실은 어디에 있으니 편히 쓰라는 말도 덧붙였다. 문이 닫히고서야 해진은 안도했다.
시간이 조금 지난 뒤 해진은 살며시 방 밖으로 나가 보았다. 자신이 좀 전까지 누워 있던 곳은 아마 스님들이 생활하는 곳인 듯했다. 인적도 없고 고즈넉해서 마음이 편해졌지만, 긴장감을 늦출 수는 없었다.
그는 욕실로 들어가 가장 먼저 머리 탈색부터 했다. 대학 다닐 때도 탈색은 해본 적 없었는데, 미친놈한테 쫓겨 다니느라 생전 처음 노란 머리를 하게 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물론 산에도 개울이 있었으니 거기서 감았으면 좋았을 테지만, 하수 처리가 없는 곳에서 머리를 감으면 물과 그 주변 환경을 심각하게 오염시키니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도망 다니는 처지라도 지킬 건 지켜야지.
마지막으로 머리를 감은 뒤 수건으로 말리며 거울을 보았다. 젖은 노란색 머리칼이 낯설었다.
어쩌면 머리색 말고 다른 것들도 많이 바뀌어야 할지 모른단 생각이 들었다. 살아남으려면 말이다.
해진은 딱 하룻밤만 절에 머물렀다. 며칠 더 있어도 될 듯한 분위기였지만 수색대가 금방 절에 도착할 테고, 슬슬 이동할 시간도 되었다. 미리 예약해둔 이동수단도 곧 올 테고 말이다.
스님은 해진이 떠나기 전에 나물전과 강냉이, 삶은 옥수수, 믹스커피 등을 챙긴 보따리를 안겨 주었다. 머문 방을 청소도 하고 밭일도 조금 도와드리며 아주 슬픈 사연이 있는 것처럼 굴었더니 저를 가엾게 본 모양이었다. 의심하는 기색은 이제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보따리를 품에 꼭 안고 여러 번 허리 숙여 인사하고서 해진은 절에서 내려왔다. 혹시라도 수색대를 만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다행히도 예약한 곳까지 금세 도착할 수 있었다.
절에서 내려오는 하산길은 해진이 온 곳과 달리 사람들의 출입이 허가되어 있는 등산길이었다. 등산복을 입고 삼삼오오 모인 사람들 사이에 자연스레 섞인 해진은 등산로 코스 옆에 마련된 간이주차장에 도착했다.
타고 가야 할 차를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일반 등산객들의 중형차, 소형차 사이에서 단연 눈에 띄었다. 해진은 리무진 관광버스 쪽으로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그때 전화드렸던 마루투어 강해진입니다.”
물론 이 버스 역시 해진의 돈이 아닌, 이환의 블랙카드로 미리 예약해둔 것이었다.
마루투어 이름을 팔아먹었으니 왜 다른 관광객이 없느냐고 기사가 물었지만, 해진이 대답하지 않자 더 묻지 않았다. 회사에 사정이 있겠거니 생각한 모양이었다.
“일단 서울로 가주세요.”
서울로 가는 동안 해진은 가장 뒷자리에 편히 누워 잠을 청했다. 꿈도 없이 실로 오랜만에 청하는 단잠이었다.
* * *
이름 모를 새가 머리 위로 울며 지나갔다. 소리 나는 곳을 올려다보는 환의 얼굴에는 날이 잔뜩 서 있었다. 손에 권총이 쥐여져 있었더라면 쏘았을 기세였다.
그는 지금 몹시 불쾌했다. 누가 건드리기라도 하면 소리라도 지를 수 있을 것 같았다.
산의 흙먼지가 슈트와 구두에 엉겨 붙고 어디선가 소똥 냄새 같은 것도 났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았다. 그의 조급함은 30년을 넘게 이어온 결벽증마저 이기고 있었다. 그러나 그는 조급함을 억누른 채 문명인답게 기다렸다.
이환의 시선이 향한 곳에는 박 비서가 승려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박 비서 역시 상사를 급하게 따라 나오느라 정장 차림 그대로였다. 덕분에 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손수건으로 얼굴을 훔치고 있었다.
시선을 거둔 이환은 문득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보통 남자보다 크고 각이 져 있는 손은 귀한 도련님의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이 손으로 수많은 일을 해냈다. 욕을 하고 저밖에 모른다고 비난하는 이들도 많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손아귀에 일단 들어온 것은 절대 놓치지 말아야 한다는 게 그의 신조였다.
그래, 그뿐이었다. 그저 손아귀에 들어온 제 소유물을 잃어버려서, 그래서 화가 나는 것뿐이다.
“저, 아무래도 다른 곳으로 간 것 같습니다. 여긴 안 왔다는데요.”
승려와 이야기를 나누던 박 비서가 눈치를 보며 말했다가, 이내 환의 불붙은 눈빛을 피해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럼 어디로 갔단 말입니까.”
어조가 없는 목소리. 주변이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데다 몹시 더운데 그의 목소리만은 서늘했다. 박 비서는 알고 있었다. 이게 제 상사가 날뛰기 직전 징조라는 사실을.
“저기요, 저희도 지금 개고생하고 있거든요?”
그러나 수색대를 맡은 이 젊은 청년은 이환 전무에 대해 잘 몰랐다. 키스틸 이환이라는 사람이야 워낙 연예인급으로 유명하니 알겠지만, 그 성질머리에 관한 소문까지는 들은 바가 없는 모양이었다.
이환은 생각에 잠겨 있느라 정작 남자의 말은 듣지도 않고 있었다. 박 비서가 말리려 했으나 남자는 뿌리치고 턱을 쳐들며 외려 더 화를 냈다.
“민간인이래서 가격 낮춰서 진행해드리고 있는 건데, 최루탄 쏘고 멧돼지 유인하는 거 보니 민간인 아닌 것 같거든요?”
박 비서는 이제 남자를 말리는 걸 포기하고 오히려 슬그머니 도로 멀어졌다. 괜히 저까지 휘말리기 싫어서였다.
“그 쥐새끼 같은 놈, 제가 잡아드릴 테니 페이나 다시 협상하죠.”
이크. 박 비서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생각에 잠겨 있던 환의 시선이 그제야 남자를 향했다.
“지금 뭐라고 했지?”
이환은 키가 몹시 컸다. 어깨도 넓은 편이고, 자세도 곧았다. 그리고 굉장히 사나운 눈매를 갖고 있었다. 똑바로 선 채로 노려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겁을 먹었다. 남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렇잖아요. 그 페이로 어떻게 그런 쥐새끼 같…… 히익!”
멱살이 잡힘과 동시에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환의 눈에 순식간에 불이 붙어 있었다.
“서, 선생님, 제가 많이 올려달라는 건 아니고, 진정하시고…….”
“누구더러 감히 쥐새끼라는 거지?”
남자의 얼굴이 혼란스레 구겨졌다. 페이 올려달란 말이 문제가 아니라, ‘쥐새끼’라는 멸칭이 문제임을 그제야 깨달은 듯했다.
환의 기세에 눌린 남자가 입을 벙긋거렸다. 지켜보던 박 비서가 저러다 기절하지 않을까, 걱정할 때가 되어서야 환은 남자를 내던지듯 놓아주었다.
“손끝 하나라도 다친 채로 데려오기만 해봐. 녀석이 입은 상처의 딱 백배로 돌려줄 테니.”
“그제는 목숨만 붙여서 데려오라면서요…….”
한 마디를 덧붙였다가 또 날이 선 눈빛에 어쩔 수 없이 입을 다물었다.
“저기요, 그런데 그 친구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에요?”
지켜보고 있던 수색대원 중 하나가 참지 못하고 환에게 물었다. 박 비서는 환이 저 남자의 멱살까지 잡을까 싶어 긴장했지만, 다행히 환은 말 꺼낸 남자를 쳐다보기만 했다. 눈빛만은 여전히 사나웠다.
“누구인지가 중요합니까?”
“우리도 대부분 특공대 출신이고, 웬만한 의뢰는 다 쉽게 넘기거든요. 그런데 이렇게 당하고 찾기도 어려운 경우는 처음이에요. 정말 대단한 분입니다.”
환의 눈썹이 한 번 꿈틀거렸다. 박 비서는 조금 놀랐다. 얼핏 보면 아까와 똑같이 사나운 무표정이지만 오래 그를 모신 박 비서는 환의 얼굴을 읽을 수 있었다.
‘설마 저거…… 지금, 자랑스러워하는 표정인가?’
자기 오메가가 없어졌다고 성질머리를 있는 대로 부리고 요즘은 밥까지 못 먹는 양반이, 그 오메가를 칭찬하는 말 한 마디에 기뻐한단 말인가?
박 비서는 자기 눈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러나 뒤이은 이환의 물음은 박 비서의 짐작에 쐐기를 박기에 충분했다.
“뭐가 어떻게 대단합니까?”
“온갖 방법으로 다 따돌리고, 흔적까지 착실하게 지워가면서 이동하고 있어요. 진짜 환장하겠습니다.”
실제로 강해진은 수색대를 놀라운 속도로 따돌리고 있었다. 흔적과 냄새까지 지워버리는 통에 방향조차 잡기가 힘든 정도였다. 대원들이 우는소리를 하는 이유가 다 있었다.
“혹시 빨리 찾아야 하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습니까? 저희가 알면 좋을 정보라든가…….”
그의 말에 환은 천천히 시선을 틀었다. 산 어딘가를 보는 그의 얼굴에는 이제 노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아련하기까지 했다.
“……임신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네?”
대원들은 기겁했고 박 비서도 놀라서 기침을 터뜨렸다.
“시간 남아돕니까? 빨리 이동 안 하고 뭐 합니까.”
이환이 밴에 올라타며 재촉했다. 방금 전까지 아련하던 얼굴은 어디로 가고, 다시 성질머리 더러운 이환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제게도 손짓을 했기에 박 비서는 얼른 달려가 밴의 맞은편 자리에 착석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엉덩이만 좌석에 붙이고 곧바로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 슈트를 입은 긴 다리 아래, 흙으로 더러워진 몇백만 원짜리 옥스퍼드화를 제 손수건으로 깨끗하게 닦아주기 시작했다. 박 비서는 새삼 이 상황이 놀라웠다.
‘더러운 걸 이렇게 질색하는 양반이 어떻게 산길은 이렇게 열심히 다니신대. 발도 아플 텐데.’
박 비서 본인도 지금 구두를 신고 같이 돌아다니느라 발가락이 깨질 것 같았다. 수색대와 보조를 맞춰 다니느라 몸도 지치고, 정장을 입은 채로 이 더위에 산을 다니느라 땀도 뻘뻘 흘렸고 말이다.
그런데도 환은 아프거나 피곤한 내색을 조금도 하지 않고 있었다. 슬그머니 시선을 들자 무뚝뚝한 얼굴을 한 환이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늘 보던 얼굴인데도 희한하게 그 모습이 조금 낯설었다. 어떤 정체 모를 것이 제 상사에게 덧씌워진 듯했다. 마치 귀신이 씐 것처럼 말이다.
시선을 읽은 환이 그를 돌아보았다.
“뭘 봅니까?”
성질머리는 여전한 걸 보니 어디 머리가 잘못된 것 같진 않아 다행이라 해야 할까.
이환은 그 뒤로도 몇 시간 동안, 밤이 깊을 때까지 수색대를 따라다녔다. 수색대가 휴식을 하려 들자 지금 앉을 기분이 드냐며 몹시 꾸짖었다.
심지어 야간수색에는 직접 나서기까지 했다. 박 비서를 비롯한 이들이 말렸지만 그는 슈트에 옥스퍼드화 차림으로 산길을 걸어 다녔다.
거의 녹초가 된 상태로 박 비서는 문득 생각했다.
자신의 상관이 저렇게 무언가에 매달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새벽까지 수색이 진행되었다. 근처 산을 샅샅이 뒤졌지만 수색대는 해진의 흔적조차 찾지 못했다. 참담한 결과였다.
“마을로 내려가는 길은 아까 여기, 절 아래쪽으로 등산로가 있고요, 다른 길은 없습니다. 모조리 산입니다.”
야영지에서 지도를 펼쳐 놓고 수색대장이 환에게 설명을 해주었다. 새벽이 지나 벌써 해가 뜨고 있었다.
“그런데 등산로에서는 목격했다는 사람이 없잖아요. 그럼 아직 등산로 쪽으로 내려간 적이 없단 이야긴데…….”
“아예 가서 죽치고 있을까요? 벌써 우리가 온 것만 해도 나흘째인데, 슬슬 내려올 거 같습니다.”
“저도 등산로에서 기다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사람이 그렇게 오랫동안 산에 있을 순 없어요. 뭔 자연인도 아니고.”
수색대원들끼리 의견을 교환하는 동안 환은 지도를 내려다보았다. 과연 사찰로 올라오는 등산로 말고는 모두 숲이었다. 환은 손바닥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옆쪽 산으로 갔을 겁니다. 내가 장담합니다.”
환의 말에 수색대원들이 그를 돌아보았다. 다리를 꼬고 팔짱을 끼는 모습에서 자신감이 한껏 드러났다.
“녀석은 제 오메가이기 때문에 제가 잘 압니다. 아직은 서울로 가지 않을 겁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