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99퍼센트의 연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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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퍼센트
40퍼센트
20퍼센트
문 앞을 지키고 있는 덩치들이 해진에게 휴대폰 충전기와 새 노트북을 갖다 주었다. 인터넷을 켜자 해진은 숨통이 트이는 것 같았다.
“아, 라이브 방송도 못 봤잖아!”
유명한 탐험가가 자기 SNS 계정으로 라이브 방송을 한다고 했었는데 그것도 놓쳤다. 호텔 방의 TV는 공중파만 나와서 그가 늘 챙겨보는 탐험 관련 채널도 하나도 못 봤다. 일단 업로드 된 영상들을 확인하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영상과 관련 기사들을 찾아보다 보니 배가 고파졌다. 해진은 잠시 고민하다가, 이번에도 룸서비스로 음식 5인분을 시켰다. 대신 특별한 주문 내용을 덧붙였다. 모두 혼자 먹을 수 있게 양을 오분의 일씩 줄여달라고 말이다. 이 개자식의 돈은 쓰고 싶지만 음식물 쓰레기로 환경을 오염시키기는 싫었다.
가격은 그대로 지불하겠다고 했지만 직원은 당황하는 듯했다. 그러나 키스틸 레저의 이환 전무 이름을 대자 금세 알겠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카트에 층층이 담겨 온 음식들을 먹으며 해진은 문득, 평소였다면 지금쯤 출근해야 할 시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가운 차림에 소파에 앉아서 다섯 가지 음식을 한 입씩 맛보던 그는 뭔가를 깨달았다.
‘솔직히…… 완전 꿀인데?’
회사도 안 나가겠다, 먹고 싶은 거 마음대로 먹겠다, 이제 인터넷도 되고, 개자식이 준 카드까지 있으니 꿀이라고 봐도 되는 거 아닌가.
물론 멋대로 나가지도 못하고 아이도 낳아야 하지만…….
감금을 당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니 한숨이 나야 하는데, 해진은 아직까지 딱히 실감이 나질 않았다. 그냥 호캉스라도 온 것 같았다.
하지만 이렇게 계속 살 수는 없었다. 해진의 속에서 어떤 강력한 생존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풀어져서는 안 된다고.
‘과연 환이 씨가 아이 하나로 만족할까?’
해진의 불안감은 바로 거기에서 시작했다.
일단 계약서는 작성했다. 하지만 그는 아직도 이환에게 왜 아이가 필요한지, 왜 하필이면 자신인지 알지 못했다.
여태까지 본 환의 모습은 정말로 미친놈에 가까웠다. 아이를 하나 낳는다고 과연 자신이 벗어날 수 있을지 의심이 되었다.
집도 없애고 회사도 관두게 했다. 애초에 제게 접근한 것도 모두 계획적이었을 테다. 절대 보통 사람은 아니다.
‘아이를 낳은 뒤가 문제일지도 모르지. 지금도 이렇게 가둬두고 있는데.’
일전, 그가 러트 중에 회사까지 찾아왔을 때 저를 쳐다보던 사나운 눈빛이 파뜩 떠올랐다. 사냥감 찾은 짐승 같던 눈빛이 생각나자 몸을 떨었다.
‘아마 임신이 거의 힘들 겁니다.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겠군요. 행여 임신에 성공하더라도 유산 확률이 높을 겁니다.’
의사의 말도 떠올랐다. 대충 돈만 받고 튀어야지 생각했는데 - 아니, 사실 계약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해진 자신의 의지가 딱히 중요하게 작용하지는 않았지만 - 어쩌면 진짜 아이가 생기기 전까지 벗어나지 못할지도 몰랐다.
‘혹시 아이를 낳을 때까지 나를 괴롭히면 어쩌지?’
이환이라면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다. 섹스는 총 세 번으로 계약했지만 만약 그때까지 임신이 되지 않는다면?
‘……애초에 세 번 만에 임신이 가능하다고 굳게 믿고 있는 거 아냐?’
그러지 않고서야 계약을 그런 식으로 했을 리가 있나. 그때도 이상하다고 잠깐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니 더 이상했다. 아이가 진짜 목적이라면 임신할 때까지 관계를 갖자고 했을 텐데 말이다.
해진은 다시 생각을 정리해보았다.
이환은 제게 아이를 낳아달라고 했다. 하지만 계약서에는 임신할 때까지 관계를 맺는다는 조항이 없었다. 그저 세 번의 관계에 대한 보상만이 적혀 있었다.
왜일까? 해진 자신이 관계를 부담스러워할까 봐? 아니다. 여태 제게 한 행동을 보면 저를 위해서는 절대 아니다.
‘내 몸이 어떻게 되든 상관도 안 하는 사람인데…….’
격한 섹스 등으로 제 몸이 망가지는 걸 그가 걱정했을 리 없다. 게다가 해진의 몸이 약해서 임신이 힘들단 사실을 그가 알고 있을 가능성도 낮았다. 알았다면 계약을 하지 않았거나 다른 조건을 내걸었겠지. 그럼 결론은 한 가지였다.
‘세 번 안에 나를 임신시킬 수 있다고 확실하게 믿는 거지.’
대체 얼마나 매칭률이 높길래? 해진은 알 수 없는 불안감에 살짝 소름마저 끼쳤다. 가운 입은 팔뚝을 쓱쓱 문지르다가 고개를 저었다.
‘몰라. 어쨌든 의사는 내가 임신하기 힘들댔어.’
예전에 딱 한 번 들었던 의사의 말이 그나마 해진에게는 유일하게 믿을 거리였다. 기능엔 이상이 없다고 했지만 임신이 힘들고, 된다고 하더라도 유산한다는 그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정말 만에 하나라도 임신이 된다면.
‘아이 가지면…… 몸이 많이 망가지겠지…….’
임신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감기 한 번만 걸려도 죽을 둥 살 둥 끙끙 앓는 해진이니, 아이를 몸에 배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힘들었다. 부른 배를 안고 입덧으로 말라가는 자신을 생각하니 끔찍했다.
‘임신은 절대 안 돼.’
세 번의 성관계로 임신이 되지 않길 바라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성관계 대가를 받자마자 튀는 것이다.
‘몸이 망가지기 전에 도망치자. 할 수 있어.’
유명한 탐험가들은 아주 험한 환경에서도 살아남아 탈출했다. 그러니 도시에서 도망치는 일이야 쉬울 것이다. 하지만 혹시라도 임신이 되는 경우까지 염두에 두어야 했다.
‘임신이 된다 하더라도 초기에 도망치면 괜찮을 거야.’
배가 부르기 전에만 도망치면 된다. 물론 초기에도 많이 힘들다고는 하지만 괜찮을 거다.
‘그리고 일단 아이를 가지기만 하면 함부로 대하지도 못할 거야.’
기껏 구한 오메가가 유산이라도 되면 안 되니까. 그가 느슨해지는 틈을 타서 도망쳐도 되고. 물론 잠만 자고 바로 도망칠 수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말이다.
“나는 할 수 있어. 정신만 제대로 차리면 못 할 것 없어.”
위대한 탐험가들은 이것보다 훨씬 더 혹독한 환경에서도 용기를 가졌다.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입맛이 죄다 달아났다. 작은 그릇에 조금씩 담긴 음식들도 다 먹지 못하고 트레이를 밀친 뒤 소파에 웅크리고 누웠다.
누운 그의 시야에 테이블 위에 놓인 검은 카드가 들어왔다. 해진의 눈이 조금 가늘어졌다.
* * *
“하아…….”
환은 벌써 10분 동안 다섯 번도 넘게 한숨을 쉬고 있었다.
오늘 업무는 효율성이 제로에 가까웠다.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이유는 한 가지였다.
‘젠장. 왜 자꾸…….’
자꾸 해진의 그 말캉하고 촉촉하던 구멍 감촉이 떠올라서였다.
업무 내내 그는 허벅지가 불룩하게 불편해지는 것을 느껴야 했다. 그 조그마한 오메가 놈이 제게 무슨 짓을 한 건지 몰라도, 이렇게 몸이 이상 증세를 보이는 걸 보니 분명 요망하게 자신을 홀려놓은 게 분명했다.
이상 증세, 그래, 환은 강해진을 그렇게 정의할 수 있었다. 여태껏 정상 궤도에서 벗어난 적 없는 자신의 삶을 멋대로 뒤틀려고 하는 이. 환이 얻은 이상 증세.
그저 제 아이를 낳을 몸일 뿐인데, 왜 이렇게 자꾸 휘둘리고 신경이 쓰이는 것일까.
일이고 뭐고, 당장 호텔로 가서 다시 강해진의 그 쫄깃한 구멍을 이번에는 제대로 들쑤시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냥 계약이고 뭐고, 달려가서 다리를 벌리고 이 발기한 물건을 쑤셔 넣은 뒤 그득하게 정액을 채워줄까. 어차피 그도 원하는 것 같던데. 제 정액을 머금고 뻐끔거릴 강해진의 구멍을 상상하자 발기한 성기가 터질 것처럼 아파왔다.
“하아…….”
또 한숨. 마른세수를 한 환은 모니터를 노려보았지만 글자가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 전무님, 여섯 시입니다.
책상 위에 놓인 스피커폰이 켜지더니 박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다. 시계를 보았다. 시간이 이렇게 되었던가. 강해진 때문에 일과를 망쳤다는 생각에 또 짜증이 치솟았다.
그리고 더 황당한 것은, 짜증은 나지만 희한하게도 그 밀가루떡이 밉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 전무님?
목을 가다듬고 마이크 버튼을 눌렀다.
“퇴근하십시오. 저도 들어가 볼 테니.”
흐트러진 넥타이를 바로 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사무실 한편에 부착된 벽거울 앞에 섰다. 평소와 달리 퀭한 눈가가 시야에 들어와 인상을 구겼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면서 환은 몇 번이나 제 모습을 엘리베이터 문에 비춰 보았다. 흐트러진 머리칼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아 손으로 연달아 빗었다.
그리고 그는 깨달았다. 지금 자신이 강해진에게 보일 제 모습을 신경 쓰고 있다는 사실을.
“호텔로 모실까요?”
차에 올라타자마자 날아온 기사의 물음에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명령했다.
“아니. 내 집으로.”
그래, 당분간은 강해진과 거리가 두는 게 좋을 듯했다. 그 요망한 놈이 자신을 또 어떻게 홀려버릴지 모르므로.
그리고 어찌 된 일인지 환은 그날 밤 잠을 도통 이룰 수가 없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뜨고 있어도 계속 고 조그마한 녀석이 자꾸 아른거렸다. 그에게서 나던 독한 딸기 향의 체취도 코끝에 맴돌았다.
솔직히, 환은 돌아버릴 것만 같았다.
지금 당장 호텔로 쳐들어갈까. 그의 다리를 벌리고 구멍에 코를 박고 들이마시며 그를 한껏 괴롭혀주면 이 기분이 나아질까.
환은 결국 벌떡 일어나 발기한 제 성기를 쥐고 흔들어야만 했다. 욕실에 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구부정하게 허리를 숙인 채 이불 속에서 딱딱해진 것을 마구 흔들었다. 이불 아래에서 손이 규칙적으로 오르내렸다.
“후…….”
결국 이불에 흥건하게 사정하고야 말았다.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짓이었다. 이리저리 정액이 튀어서 잿빛 이불을 희끗하게 적셨다.
파정이 끝나고 후희 대신 현실감이 몰려들기 시작하자 환은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깨달았다. 더더욱 황당한 사실은, 이렇게 사정하고서도 아직까지 강해진을 원하는 제 몸이었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그는 더러워진 침구를 그대로 두고 거실로 나갔다. 소파에서 자는 건 딱 질색이지만 더러운 침대에서 자는 것보다야 나을 터다.
어째서 자신이 이렇게 되었을까. 환은 무언가가 자신의 근간을 긁어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단 한 번도 무너진 적 없는 견고한 제 성채가 고작 저 밀가루떡 하나 때문에 위기를 맞았단 말인가? 아니다, 그럴 리 없다.
인정할 수 없었다. 고작 강해진에게 신경이 바짝 곤두서 있는 자신을. 지금도 안달이 나서 어쩔 줄 모르는, 발정 난 개같이 변해버린 스스로를.
환은 일부러 며칠 동안 해진을 찾지 않았다. 이유를 따지자면 끝도 없이 찾을 수도 있었고, 하나도 없을 수도 있었다.
그저 제 몸을 원하는 그 요망한 녀석에게 순순히 얼굴을 들이밀어 주고 싶지 않아서였다. 절대, 절대로 자신이 강해진의 앞에서 이성을 잃는다거나 또 그때처럼 바지를 내리고 덤벼들까 걱정이 되어서는 아니었다.
그리고 굳이 호텔로 찾아가지 않더라도 강해진이 무사히 있는지는 그곳의 경호원들에게 들을 수 있었다.
요즘 들어서 뭔가를 잔뜩 주문했는지 택배가 계속 오고 있다고 했다. 아픈 곳도 딱히 없어 보이고, 밥도 한 끼마다 다섯 가지 요리를 꼬박꼬박 주문해 먹고 있다고.
‘흥, 내가 없어도 혼자 멀쩡하게 지낸다 이거지.’
건방지게도 말이다. 환은 좀 불만스러웠다. 제 밑에 깔려서 좋다고 헐떡거릴 때는 언제고 이제는 내가 없어도 멀쩡하게 지낸다니. 역시 한동안 얼굴을 비치지 않는 게 상책인 듯했다.
문제는 이환 본인이었다.
그는 한 번 맛을 보았던 강해진의 몸을 다시 입에 담고 싶어서, 손안에 쥐고 싶어서 미칠 지경이었다.
그때 무슨 일이 있어도 강해진과 몸을 맞대어서는 안 되었다. 이렇게 중독적일 줄 알았더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강해진을 생각하는 일은 꼭 몸에 나쁜 불량 식품의 맛을 되새기는 것 같았다. 그만큼 자극적이고 멈추기가 힘들었다.
생각은 몸으로도 이어져서 잦은 두통과 식욕 부진 및 소화 불량을 동반했다. 입맛을 잃은 이환은 끼니를 거르고 일에 매달렸지만, 일을 해도 해진의 달뜬 얼굴이 눈에 보이는 듯했다.
“저…… 전무님, 괜찮으십니까?”
재무팀의 월간브리핑 직후 박 비서가 조심스레 그의 얼굴을 살피며 물었다.
“뭐가 말입니까?”
“안색이 영 안 좋…….”
“뭐가 괜찮으냐고 물으신 겁니까? 제가 오메가 하나 때문에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는 모자란 놈처럼 보입니까? 아니면 그깟 조그만 놈에게 휘둘려서 일도 못 할 정도로 정신 못 차리는 멍청이로 보입니까? 제가 박 비서님 눈에는 그 정도로밖에 안 보입니까?”
박 비서는 입을 딱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환은 쯧, 하고 혀를 차고는 돌아섰다. 하여튼 상사에게 건방지기는. 자신은 이렇게나 멀쩡한데 모함을 하고 말이다. 이것도 전부 강해진의 탓이었다. 그러니 어서 일을 해치워야…….
돌아서려는 그의 머릿속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그래, 어서 해치우면 될 것 아닌가.
“박 비서님.”
“예.”
“혹시 물건 하나 구해줄 수 있습니까? 약인데.”
박 비서가 짜증과 불안함이 섞인 얼굴을 했지만, 환은 만족스레 웃었다. 그래, 그거면 되는데. 망설일 필요가 있나.
호텔에는 이환의 카드로 주문한 물건들이 하나둘씩 쌓이기 시작했다. 블루레이 플레이어와 각종 다큐멘터리 블루레이 디스크, 그리고 만화책까지.
해진은 매 끼니마다 다섯 가지 요리를 주문해서 먹었고, 호텔 요리가 지겨워지자 배달음식을 주문했다. 배가 부를 때까지 먹은 후에는 혼자 산책 대신 넓은 호텔 내부를 걷고, 탐험 관련 다큐멘터리를 보다가 잤다.
솔직히 호텔 생활은 ‘개꿀’이었다. 회사도 안 나가고 일도 안 하고, 귀찮게 구는 사람도 없으니.
‘돈이 좋기는 좋구나.’
평소에는 쇼핑몰 카트에서 백 번도 더 고민하던 블루레이 디스크를 가득 늘어놓고 있자니 기분이, 뭐랄까, 좋다기보다는 묘했다.
‘환이 씨는 연락도 없고…….’
그는 저를 이 호텔 방에 처박아두고 지금 며칠째 연락도 없었다. 해진은 그에 대한 원망을 쇼핑으로 풀기로 했다. 옷장을 가득 채울 옷을 사이즈도 확인하지 않고 샀으며, 당장 보지도 못할 VOD를 하루에 몇십만 원어치 샀다.
그러나 그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해진은 슬슬 괴로워지기 시작했다. 사람을 만나고 싶었다.
그리고 이환이 보고 싶었다. 억울하게도 말이다.
늘어져 있던 해진은 문득 든 한 가지 생각에 몸을 일으켰다. 슬쩍 대문을 열자 복도에 서 있던 덩치 두 사람이 해진을 돌아보았다.
“저,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덩치들의 기세에 아주 잠깐 겁을 먹었지만, 해진은 용기를 내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가 덩치들에게서 답변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약 세 시간이 지나서였다.
평소처럼 다섯 가지 룸서비스를 주문해서 배가 터지도록 먹은 뒤 - 주문한 대로 정말 조금씩 양을 주었지만 해진이 먹기엔 많았다 - 트레이를 내놓는데 덩치들이 그에게 다가왔다. 해진이 들기에 트레이는 몹시 무거웠지만 그들은 도와주려는 기색조차 없었다.
“전무님한테 물어보셨어요?”
“예. 안 됩니다.”
덩치들의 말에 해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네? 왜요? 그냥 쇼핑인데요!”
“전무님께서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한숨이 나왔다. 부탁한 것은 별것도 아니었다. 그냥 근처 쇼핑몰로 나가서 쇼핑을 하고 외식을 한 뒤 돌아오겠다는 게 전부였다. 그런데도 이환은 그것마저 허용치 않겠다는 것이었다.
“대체 왜 안 된대요? 이유나 들어보죠.”
덩치들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 이유 따위 없고 그냥 내가 나가는 게 싫은 거겠지.
“애당초 제가 원할 때는 마음대로 나가도 된다고 했다고요! 이야기만 하면 아저씨들 데리고 나가도 된다고 전무님이 말씀하셨어요. 그런데 왜 이제 와서 안 된단 거예요?”
여전히 침묵. 두 경호원은 이제 아예 시선을 돌리고 해진을 무시했다. 바위에 대고 말하는 기분이어서 해진은 결국 한숨을 내쉬고 도로 들어와야 했다.
소파에 드러누웠지만 기분이 영 풀리지 않았다. 나갈 수 있도록 해준다고 할 때는 언제고.
‘얼굴 한 번도 안 비치면서, 명령은 명령대로 다 하고. 아주 잘났어, 진짜.’
해진은 이환이 미웠다. 이 정도면 정말 정이 떨어지겠다, 싶었다. 그런데도 그는 아직까지도 이환이 보고 싶었다. 우습게도 말이다.
얼굴을 손으로 가리며 몸을 잔뜩 웅크렸다.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그딴 놈이 보고 싶은 걸까.
솔직히 말하면 그날 밤, 환이 제게 안겨주었던 쾌락이 자꾸 떠오르는 게 컸다.
해진은 성적인 경험이 전무했다. 그러니 그렇게 누군가의 손길과 성기를 이용해서 쾌락을 얻은 적도 처음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해진은 또 그 짓거리를 하고 싶었다. 제 구멍을 스치던 이환의 딱딱한 성기 감촉을 떠올리면 아래가 축축해질 정도였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이렇게 무언가를 갈망하거나 원한 적이 없던 해진이었다. 나름대로 인내심을 갖고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이환을 생각하면 참을성이 바닥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멍청해지는 것 같았다. 좀 갑갑한 면이 있기는 해도 머리가 나쁜 편은 아니라고 믿었는데 말이다.
“진짜, 짜증 나…….”
그는 자기 자신이 낯설었다. 이런 기분은 싫었다. 저를 이곳에 가두고 물건처럼 취급하는 성질 못된 알파 놈 때문에 자신이 망가지는 게 싫었다.
* * *
환은 지지부진한 업무에 짜증을 내면서도 주기적으로 경호원들에게 연락해 해진의 상태를 확인했다. 대답은 늘 비슷했다. 잘 먹고 잘 있다고.
그런데 해진을 찾지 않은 지 닷새째였다. 하루에 몇 번씩 전화해도 비슷한 대답을 내놓던 경호원이 처음으로 다른 대답을 내놓았다.
- 저, 사실 한 가지 이상한 게 있긴 합니다.
“뭐지?”
- 설명하기 힘듭니다만……. 직접 와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귀찮고 짜증이 나지만 하는 수 없이 가보기는 해야 할 것 같았다. 절대 걱정되어서는 아니었다.
열흘 만에 찾아간 호텔은 엉망이었다. 가장 먼저 그를 맞은 것은 거실을 빼곡하게 채운 공기청정기였다.
“대체 이게 무슨…….”
“어, 환이 씨, 오셨어요?”
해진이 그를 반갑게 맞이했다. 거실 한가운데에는 커다란 TV가 새로 놓여 있고, 그 앞에는 블루레이 플레이어와 디스크가 그득했다. 디스크 상자에는 하나같이 ‘탐험’, ‘어드벤처’, ‘서바이벌’, ‘다큐멘터리’ 같은 단어가 적혀 있었다.
“이게 다 뭡니까?”
“환이 씨 카드로 샀어요! 잘했죠?”
환은 순간 미간을 구겼다. 주고 간 카드를 마음대로 쓰라고 한 건 맞았다.
블랙카드는 일반 카드와 달라서 카드 결제 내역을 일일이 통보하지 않는다. 상이한 결제 내역이 발생하면 일시 정지가 되거나 카드 주인에게 직접 연락이 가는 방식이다. 물론 해진에게 건네준 뒤 박 비서가 아마 카드사에 따로 연락을 해두었을 것이므로 그럴 일은 없겠지만.
문제는 거실에 가득 찬 공기청정기였다. 똑같은 디자인의 공기청정기가 발 디딜 틈이 없이 빼곡하게 들어차 있는데, 어림잡아 스무 대는 넘어 보였다. 모두 가동 중이라는 사실도 환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여기 틀어박혀 있으니까 맑은 공기가 너무 그리워서요. 그래도 환이 씨가 카드 주신 덕분에 바깥 공기는 아니더라도 맑은 공기는 실컷 마실 수 있네요! 감사해요!”
해맑게 웃으며 하는 말이 진심인지 저를 욕하는 말인지 바로 구분이 가질 않았다. 돈은 아깝지 않았다. 문제는 저 밀가루떡 녀석이었다.
저는 죽을 맛인데, 그를 보지 못한 그 며칠 동안 이렇게 피골이 상접했는데 심지어 피둥피둥하게 살까지 오른 듯한 밀가루떡을 보자 울화통이 터졌다.
정작 해진은 벌써 환의 존재를 깡그리 무시하는 양 다시 TV 화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화면 속에서는 까마득한 절벽을 등반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있었다.
“……해진 씨.”
“조용히 하세요. 저 지금 다큐멘터리 보고 있잖아요.”
해진의 말에 환은 황당해서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 밀가루떡이 감히 내게 명령을 했단 말인가?
해진은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 제 쪽으로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환은 결국 그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강해진이 건방지게도 제 어깨 너머로 TV를 계속 보려 들기에 환은 테이블을 한 손으로 엎어버렸다. 위에 놓여 있던 블루레이 디스크며 과자 접시, 커피잔이 와르르 쏟아졌다.
난리가 났는데도 강해진은 겁먹은 기색이 전혀 없었다. 눈을 똑바로 뜨고 환을 노려볼 뿐이었다. 며칠 사이에 통통해진 듯한 뽀얀 뺨을 보자 갑자기 가슴 속에서 뭔가가 울컥, 치솟았다.
“이게 뭐 하는 짓입니까.”
“왜요?”
해진이 동그란 눈을 깜박, 깜박, 하며 그를 빤히 쳐다봤다. 악의는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감정이 담긴 눈도 아니었다.
“전 시키는 대로 여기 틀어박혀서 아무도 못 만나고 폐인처럼 지내고 있었는데요. 뭐 불만이라도 있으세요?”
“강해진 씨야말로 그리 말하는 걸 보니 제게 불만이 상당한 모양이군요.”
“제 불만이야 많죠. 그런데 뭐, 말한다고 들어주시나요?”
환의 눈썹이 한 번 꿈틀거렸다. 해진이 그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해진은 사실 화가 나지 않았다. 우습게도, 그는 닷새 만에 본 이환이 반가웠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우스웠다. 누구 때문에 지금 물건처럼 갇혀 지내고 있는데 그가 반갑다니. 하지만 퀭한 얼굴을 보니 안쓰럽기까지 한 것이었다.
‘……뭐야. 왜 핼쑥해.’
돈도 많고 잘난 사람이 왜 저런 꼴일까. 해진은 인상을 구기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았다. 대신 활짝 웃었다.
“이환 전무님, 지금 되게 기분 나빠 보이시네요. 혹시 저 때문인가요? 에이, 그깟 돈 몇 푼 썼다고 지금 치사하게 그러는 건 아니죠? 돈 많잖아요, 키스틸 이환 전무님.”
환의 눈썹이 다시 한 번 꿈틀, 했다. 얼굴이 말이 아닌데도 여전히 번듯하게 잘생겨서 또 어이가 없었다.
“돈이 문제가 아니잖습니까. 이 꼴로 지낼 겁니까?”
“왜요?”
“나도 이곳에 가끔 들를 텐데, 이딴 돼지우리 같은 곳에는 단 일 초도 있고 싶지 않습니다.”
“아아, 정말요? 저언혀 몰랐네요. 저 여기 처박아두고 코빼기도 안 보이셨잖아요.”
해진은 제 말에 자신이 상처 입는 것을 느꼈다. 저도 모르게 울컥, 표정마저 무너뜨렸다. 울고 싶었지만 꾹꾹 참았다. 할 말은 해야 했다.
“……여기에만 갇혀 있기 싫어요.”
이번에는 환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럴 용기가 나지 않았다.
“저를 조금이라도 생각하신다면, 아니, 제가 조금이라도 편한 환경에서 아이를 갖길 바라신다면 그에 맞는 대우를 해주세요.”
그래도 할 말은 마저 해야 할 것 같아서 또박또박 내뱉은 뒤, 해진은 그제야 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환의 표정에 놀라고 말았다. 저를 내려다보는 얼굴이 몹시 사나웠다. 마치 그때, 러트 때처럼.
“강해진 씨, 지금 상황 파악이 안 되나 본데.”
입꼬리가 뒤틀려 올라갔다. 그 비웃음에 해진의 마음이 또 아렸다.
“당신 대우는 내가 정하는 겁니다. 아직도 그걸 모르겠습니까?”
“하지만…….”
엉망으로 어질러진 바닥을 밟고 이환이 그에게 다가왔다. 거침없는 동작과 비웃는 얼굴에서 거친 위압감이 드러났다.
그가 툭, 무언가를 해진에게 던졌다. 해진이 반사적으로 그것을 받았다.
“히트사이클 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기나 해.”
이환이 던져 준 것은 알루미늄 포장지에 싸인 알약이었다.
해진은 한 손으로 알약을 쥔 채 어쩌라고, 하는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이환이 먹으라는 투로 턱짓했다.
“드십시오.”
“이게 무슨 약인데요?”
“우리의 일을 좀 더 빨리 해결해줄 약입니다.”
좀 더 빨리, 해결……? 뉘앙스가 영 이상해서 해진은 인상을 구겼다. 손에 쥔 알약을 내려다보았다. 포장지에는 아무 글자도 적혀 있지 않고, 의약회사 로고 같은 것도 없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한 알약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혹시 이거…….”
해진은 자신의 결론이 너무 비약적이었기를 바라면서, 이환에게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길 바라면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히트사이클 당기는 약……은 아니겠죠?”
“맞습니다.”
이환의 뻔뻔한 대답에 해진은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지금 이 인간이, 진심으로 말하는 거 맞나?
히트사이클을 당기는 약에 대해서는 해진도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었다. 히트사이클을 늦추는 약과는 달리 이 약은 시중에서 합법적인 유통으로 판매되지 않고 있었다. 부작용도 만만찮거니와, 범죄에 악용될 우려가 있어서였다.
일명 ‘발정제’라고 불리는 이 약은 고열과 하복부의 심한 통증, 출혈, 호르몬의 이상 등을 부작용으로 동반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해진은 자신이 이걸 먹게 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이환이 제게 이걸 먹이리라고는, 더더욱 생각하지 못했다. 그 정도로 나쁜 사람은 아닌 줄 알았는데.
해진은 손에 든 알약을 바닥으로 패대기쳤다.
“싫어요! 제가 왜 이걸 먹어요!”
“좋은 말로 할 때 드십시오. 해진 씨도 어서 이 짓거리를 끝내고 싶지 않습니까?”
그 말은 사실이기는 했다. 해진 역시 이딴 짓거리를 끝내고…… 어서 돈이나 받고 튀고 싶었다.
하지만 가뜩이나 약한 몸에 이런 불법 약을 먹었다가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제가 먹는 약이 몇 가지인지는 아세요?”
해진이 물었고, 예상대로 이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울컥, 서러움이 치솟았지만 꾹꾹 씹어 삼켰다.
“제 체질이 어떤지, 약품과 식품 중에서 어떤 알레르기가 있는지, 제가 먹는 약과 이 약이 충돌해서 부작용을 일으키지는 않을지 다 계산하고 주신 건가요?”
여전히 침묵. 이환은 그게 뭐가 문제냐는 얼굴로 해진을 빤히 응시하기만 했다. 뻔뻔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보자 기가 막혔다.
“알았어요, 먹을게요. 대신에 이환 씨도 러트 당겨주는 약 드세요.”
러트를 당기는 약 역시 부작용이 만만찮아서 정식으로 유통되지 않고 있었다. 제게 이딴 것을 먹일 생각을 했으니 그 역시 똑같은 일을 감내해야 하지 않나. 물론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자신과 저 건장한 자식은 패널티가 다르지만.
그러나 이환은 이번에도 대답이 없었다. 해진은 허망해졌다. 그 정도도 감당하지 않겠다는 건가, 이 남자는? 나쁜 건 나한테 다 몰아주고?
해진은 곧이곧대로 따를 생각이 없었다. 어깨를 한 번 으쓱, 움츠려 보였다. 너 따위 무섭지 않다는 의사가 최대한 드러나도록 눈썹을 올리고 입꼬리를 늘어뜨렸다.
“그럼 저도 안 먹어요.”
“좋은 말 할 때, 먹으라고, 하지 않습니까.”
한 음절마다 힘을 주며 하는 말이 아무리 들어도 협박조였다. 해진은 제 두려움이 얼굴로 드러나지 않길 바라며 마른침을 몰래 삼켰다.
“안 먹는다고요! 이런 약이 얼마나 위험한지 알기는 해요?”
이환이 헛웃음을 지었다. 하아,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쉰 뒤 한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올리는데, 얼굴은 초췌한데도 그 모습이 재수 없을 정도로 잘나 보여서 해진은 또 울화통이 치밀었다.
“안 먹는다고.”
“그래요!”
“그럼, 밑으로 쑤셔 넣어줄까?”
하도 황당한 물음이라 순간 그 무례함과 폭력성에 대해서는 인식하지 못하고, 그보다 ‘좌약도 된단 말이야?’ 하는 의문이 먼저 들었다.
내내 입가에 비죽이 떠 있던 웃음이 환의 얼굴에서 사라지자 해진도 뒤늦게 정신이 들었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지만 키 차이가 많이 나서 해진은 여전히 그를 올려다보아야 했다. 주눅 들지는 않았다.
“넣어봐라, 미친놈아! 내 엉덩이 어디 한 번 멋대로 벌려보기만 해라!”
오히려 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 말이 제대로 자극이 된 건지 환의 눈썹이 화를 담고 비틀렸다.
환이 그에게 손을 뻗었다. 좀 전 쏟아진 음료와 과자로 엉망이 된 바닥 위로 해진의 몸이 무너졌다. 환이 그의 다리를 우악스레 벌리고 그 사이에 자리 잡았다. 금방이라도 바지 지퍼를 내릴 기세였다.
“뭐 이런 새끼가 다 있어! 이거 놔!”
해진은 지지 않고 버둥거렸다. 커피와 과자 조각으로 몸이 엉망이 되었지만 개의치 않고 허우적거렸다. 옷이 엉망으로 젖고 뺨도 더러워졌다. 무언가에 다친 듯 손에 통증도 느껴졌다.
그러나 환은 그를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바지 단추를 풀고 지퍼를 내리는 손길이 우악스러웠다. 양쪽 다리는 그의 무릎 아래 아프게 짓눌렸다.
해진은 주먹을 되는대로 휘둘렀다. 아무렇게나 뻗은 동작에 몇 대는 환의 팔뚝에 스쳤지만 기별도 가지 않았다. 결국 바지가 거의 다 벗겨지고서야 해진은 항복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구멍에 알약이 쑤셔 들어오는 수치스러운 일은 피하고 싶었다.
“아, 알았어! 먹을게, 먹으면 되잖아, 미친 새끼야!”
그리고 당연히, 당장의 수치를 피하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그에게도 나름 생각이 있었다.
이 약을 먹고 정말로 앓아눕게 된다면, 그때 한 가지 기회가 제게 생기는 것이기도 하니까. 물론 정신이 멀쩡할 정도로만 아파야 하지만.
그의 외침에 환은 해진에게서 손을 떼었다. 해진은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상체를 일으켜 앉았다.
“내가 아프면 당신 책임이야. 알았어?”
환은 여전히 그의 말에 반응이 없었고, 익히 예상한 바였다. 해진은 더러운 바닥에서 알약을 주워들었다. 보란 듯이 포장을 까려고 하는데 환이 그것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제 손으로 포장을 뜯었다.
“입 벌려.”
“내가 먹는다니까.”
“입, 벌려.”
해진이 입을 벌리자마자 환의 손가락이 우악스레 파고들었다. 딱딱한 알약 감촉이 혓바닥을 지나 곧바로 깊은 곳에 닿았다. 자연스레 구역질이 치솟았다.
“컥……!”
“뱉으면 맞을 줄 알아라. 똑바로 삼켜.”
억지로 들어온, 제법 알이 굵은 약을 억지로 삼켰다. 눈물이 찔끔 났다. 이에 닿는 손가락을 마구 깨물었지만 이환은 꿈쩍도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안으로 쑤셔 들어왔다.
기어코 알약을 깊숙이 넣어 삼키게 만들고서야 손이 입에서 빠져나갔다. 해진은 쿨럭거리며 입가를 닦아냈다. 턱이 아팠다.
“쿨럭, 흐으…….”
“왜 사람을 꼭 귀찮게 만드는 겁니까.”
“제가 먹으려고 했는데 손 쑤셔 넣은 건 그쪽이거든요.”
해진이 눈가에 맺힌 눈물을 어깨로 닦는 동안 이환은 손수건을 꺼내 제 손을 닦았다. 표정이 꼭 못 만질 것을 만졌다는 듯했다. 해진은 어이가 없었다. 따지고 보면 제 입보다 그의 손이 더 더러운 거 아닌가?
“내일 오겠습니다. 그 전까지 이 쓰레기들, 다 치워놓으십시오.”
이환은 그대로 돌아서서 나가버렸다. 탁, 문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 환이 있던 곳에는 대신 적막이 들어찼다.
해진은 그제야 제 바지가 커피에 엉망으로 젖어 있는 것을 보았다. 긁혔는지 팔뚝에 큰 상처도 있었다. 피가 맺힌 것을 보자 기분이 이상했다. 대충 손으로 닦아내었다.
상처는 아프지도 않았다. 다만 마음이 이상했다. 아픈 것도 아니고, 슬픈 것도 아니었다.
해진은 허망했다. 자신의 첫사랑이라고도 볼 수 있는 알파가, 다정한 줄만 알았던 이환이 제게 부작용 가득한 약을 먹였다.
‘그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미친놈한테서, 내가 정말 무사히 벗어날 수 있기는 할까.
이전에는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믿었다. 아무리 지독한 놈이더라도 벗어날 구석이 있으리라 믿었다.
그런데 지금, 목에 남은 이물감을 느끼며 더러운 바닥에 앉아 있는 제 꼴을 의식하고 있자니 문득 그게 불가능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진은 상처를 치료하거나 바닥을 치울 생각도 않고 엉망인 바닥 위에 그대로 드러누워 버렸다.
힘이 점차 빠졌다. 벌써 약 기운이 도는 건 아닐 텐데, 아랫배가 묘하게 아파왔다.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던 해진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잠에서 깨어났다. 아주 심한 복통 때문이었다.
“아, 흑…….”
눈물이 맺힐 만큼 아팠다. 온몸이 축축한데 땀인지 뭔지 알 수 없었다. 온몸의 감각이 죄다 곤두서서 아랫배로 쏠리는 듯했다.
해진은 누군가를 부르고 싶었다. 그러나 누굴 불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환이, 씨…….”
유일하게 생각나는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지금 곁에 없었다.
아랫배를 찢어발기는 듯한 통증에 해진은 한참 동안 더러운 바닥에서 뒹굴었다. 이환이 나간 뒤 아무도 찾아오지 않은 호텔 거실은 그야말로 쓰레기장 같았다. 깨진 컵과 과자 조각 사이에서 해진은 마구 몸을 뒤틀었다.
“흐으, 윽……!”
꼭 살가죽을 가로로, 세로로 찢는 듯하다가 또 갑자기 송곳으로 뚫는 듯한 어마어마한 통증은 점점 더 심해졌다. 해진은 겨우 소파 위로 기어올랐다. 몸을 한껏 웅크리고 자신의 상태가 어떨지 추측해보려 했지만, 단지 견디기 힘든 고통만 몸속에 가득했다.
“아……. 흑…….”
어떡하지, 어떻게 하지. 해진은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억지로 짜내려 애썼다.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애써 끌어 내렸다. 괴로웠지만, 죽을 만큼 아프지만 진짜 죽기는 싫었다.
그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애써 소파 위를 벗어났다. 어두운 거실을 가로지르는 일조차도 힘들었다. 마치 압정 위를 걷는 것 같았다. 가뜩이나 걷기 힘든데, 자신이 사놓은 공기청정기들이 자꾸 몸에 부딪쳐서 짜증이 났다. 하지만 그 개새끼의 돈을 조금이라도 쓴 건 후회가 되지 않았다.
고작 몇 걸음 되지도 않는 거실을 마치 불어난 강물이라도 되는 듯이 힘겹게 가로지르던 해진은 결국 무릎을 꿇으며 넘어지고 말았다. 배를 힘겹게 움켜쥐었다. 다리 사이가 축축했다.
‘안 돼…….’
죽을 때 죽더라도 그 개새끼 때문에 죽을 수는 없었다. 서러움보다는 오기가 앞섰다. 죽기 전에 이환의 돈 50억은 받고 죽어야 했다. 대체 이 자식은 어디로 간 걸까. 약을 먹였으면 지켜보기라도 해야 할 거 아냐. 그것도 이렇게 부작용이 많은 약을 먹여놓고 말이야.
이를 꽉 깨물었다. 옆에 있는 공기청정기 중 하나를 붙들고 일어섰다. 땀이 비 오듯이 흘러 손까지 미끄러웠다.
힘겹게 일어선 해진은 다시 발을 내디뎠다. 기어코 걸어가 TV 받침대 위에 놓인 제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화면의 잠금을 풀고 통화 아이콘을 누르는 것도 힘들었다. 몇 번을 더듬은 뒤에야 겨우 이환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다행히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도 않고 연결되었다. 이환의 목소리에는 짜증이 묻어났지만, 그게 중요하지 않을 만큼 해진은 몹시 아팠다.
- 뭡니까.
“환……이 씨……. 저, 몸이…….”
이번에는 통증이 더 강하게 밀려왔다. 마치 내장이 압축기에 짓눌리는 듯했다. 해진은 비명을 삼키며 한 손으로 배를 움켜쥔 채 말을 이으려고 했으나 다시 주저앉아야 했다.
휴대폰을 놓치고 양손으로 배를 움켜쥐었다. 고통이 어마어마한데도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몸을 둥글게 말고 웅크렸다.
“아, 아파요…….”
이미 떨어진 휴대폰에 들리지도 않을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차라리 기절했으면 싶을 정도로 아팠지만, 약한 몸뚱이는 그조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바닥에 놓인 휴대폰 수신구에서 “강해진 씨.” 하고 다급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흘러나왔지만 해진에게는 들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냐고, 지금 가겠다고 하는 말 역시 들을 수 없었다.
해진은 숨을 한 번 크게 들이마셨다. 흐른 땀이 입으로 흘러들었다. 휴대폰을 겨우 다시 쥐고 귀로 가져왔지만 이미 전화는 꺼져 있었다.
“개새끼가, 씨발…….”
이번에는 정말로 쌍욕이 나왔다. 사람이 아프다는데, 그냥 전화를 끊어? 그러나 오기도 생겼다. 기필코 살아남아야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진통제…….”
아마 환이 갖다 준 자신의 약 꾸러미에 진통제가 있을 것이다. 히트사이클을 당기는 약을 먹은 상태에서 진통제를 먹어도 괜찮을지는 알 수 없지만, 너무 아파서 살고 싶다는 마음뿐이었다.
부엌까지 걸어가는 데에도 어마어마한 고통이 뒤따랐다. 정체 모를 장식품과 함께 선반에 놓인 약통을 집었다. 몇 번 손을 놓치고서야 진통제 두 알을 꺼낼 수 있었다. 입에 넣고 삼킨 뒤 다시 주저앉았다. 물을 마실 힘조차 없었다.
약효가 빨리 돌길 바라며 해진은 바 아래 웅크렸다. 제게 이딴 것을 먹여놓았으니 환이 찾아오기는 할 터다. 그러나 자신이 걱정되어서가 아니라, 아이를 낳을 제 배가 걱정되어서 오는 것이겠지.
해진은 생각했다. 그에 대한 마음을 딱 20퍼센트만 더 지우자고. 그러면 그만큼 덜 서러울 거라고.
다행히도 약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짝 웅크리고 있던 해진의 몸도 점차 풀렸다.
머릿속에 안개가 낀 것처럼 어지러웠다. 뿌연 이미지들이 눈앞을 둥둥 떠다녔고, 그것들은 모두 환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강해진 씨가 필요합니다.’
우습게도, 해진은 아직까지 그를 그리워하고 있었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혈혈단신으로 살아온 해진은 그런 호의와 관심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그게 모두 가짜라는 걸 알고서도 해진은 놓을 수가 없었다.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러기엔 환이 연기를 지나치게 잘했다. 아니, 해진이 그에게 너무 의미를 많이 부여한 터다.
‘잘해주지나 말지…….’
적당히 잘해줬어도 바보 같은 자신은 넘어갔을 텐데. 하긴, 생각해보면 데이트할 때의 젠틀한 모습은 그저 제게 호감을 사기 위함이었고 케이터링 업체를 통해 식사를 챙겨준 것도 제 몸뚱이가 걱정되어서였겠지.
하지만, 해진은 환이 외로워 보인다고 생각했었다.
내내 혼자였던 저처럼 그 역시 외로워 보였다. 그래서 진짜 인연이라고 믿었다. 믿을 수밖에 없었다. 제가 싸온 도시락을 남김없이 먹고 웃는 이환을 보고 있으면 말이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라앉는 배처럼 해진은 한없이 아래로 가라앉기만 했다. 자신이 바보 같았다.
자조 속에서 깜빡 잠이 들려고 할 때쯤, 도어록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진은 겨우 눈만 떴다. 통증은 온전히 사라지지 않았으나 진통제 때문에 몽롱했다.
어둠 속에서 현관 쪽의 센서등이 켜지고, 환의 모습이 드러났다. 작은 불빛도 거슬려서 해진은 눈을 찌푸렸다.
“강해진 씨?”
해진은 그제야 제 몸이 몹시 뜨겁다는 것을 깨달았다. 환의 알파 향이 코끝을 스쳤다. 가까워지지도 않았는데 그의 체취부터 코를 찔렀다.
환이 가방을 내던지듯 하고 달려왔다. 해진은 그 모습이 착각이리라 믿었다. 제게 그토록 못되게 군 이환이, 저런 표정을 지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해진의 얼굴을 감쌌다. 저를 보게 했다. 시야가 흐려서 이환의 얼굴이 두세 개로 겹쳐 보였다. 무어라고 말을 하는데 들리지도 않았다.
와중에도 해진은 이상했다. 왜 이렇게 겁먹은 표정을 짓는 거야? 억지로 약 먹일 땐 언제고…….
커다란 손바닥이 제 이마에 닿는 감촉이 낯설었다. 해진은 몽롱함과 함께 낯선, 아니, 익숙한 감각을 느꼈다. 그는 저도 모르게 환의 손목에 뺨을 비볐다. 온도 차이가 확연해 소름이 끼쳤다.
“하아…….”
이환의 냄새를 크게 들이마셨다. 매캐한 알파 향이 몸에 들어오자 놀랍게도, 통증이 지워지는 것 같았다. 해진은 깨달았다. 약 때문에 히트사이클이 온 것이었다.
아픈 와중에도 해진은 그를 원했다. 그가 저를 만져주길 바랐다. 아프고 달뜬 몸을 벗기고 이전처럼 더듬어주길 바랐다.
이렇게 되고서도 그를 원한다는 사실이 수치스럽고 싫었다. 스스로가 미웠다. 그러나 본능은 끔찍할 정도로 강했다. 해진은 울음을 꾸역꾸역 삼키며 환에게 매달렸다.
“저, 만져…… 주세요.”
이환의 얼굴이 굳는 것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반면 이환은 지금 해진의 상태를 보며 당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어렵게 구했다고 생색을 내며 약을 내밀었을 때, 박 비서는 그에게 말했었다.
‘부작용이 아주 없는 건 아닌데, 몸이 영 약하지 않는 이상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는군요.’
‘그런 애매한 말이 어디 있습니까. 어떤 증상이고, 오메가에게 어떤 해를 끼치는지 정확히 말하십시오.’
박 비서는 아주 불편하단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게, 정식으로 출시된 약이면 이런저런 임상 시험을 거쳐서 부작용도 설명서에 다 적혀 나오는데, 이건 그런 게 아니라서요.’
‘지금 그래서, 부작용이 뭔지 확실히 알지도 못하는 약을 준 겁니까?’
‘전무님이 구해 오라고 하셨잖아요? 뭐, 싫으시면, 그냥 버리겠습니다.’
도로 가져가려는 약을 억지로 박 비서의 손에서 빼앗아왔다.
그리고 환은 오래도록 그 약을 쥔 채 고민했다. 이걸 밀가루떡에게 먹여야 할까, 말아야 할까. 물론 히트사이클을 앞당겨 준다면야 바랄 게 없지만, 하지만…….
누군가를 진심으로 걱정하는 일은 환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제 몸뚱이 하나 건사하는 일만 신경 쓰며 살아온 그였다. 그런데 자신은 대체 왜 지금 그를 걱정하고 있을까.
결국 결정하지 못한 채로 호텔에 왔을 때, 말라가던 저와 달리 강해진은 잘 먹고 잘 자서 살이 올라 있었다. 호텔 거실에 가득 찬 공기청정기는 필경 제게 하는 일종의 시위였다.
‘……여기에만 갇혀 있기 싫어요.’
‘여기 있기 싫다’는 해진의 말에 환은 울컥하고야 말았다. 거기다 제 처지가 어떻다느니 하는 말에는 화까지 났다.
결국 억지로 약을 먹였지만, 이렇게까지 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멍청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매번 이랬다. 강해진과 관련되면 제대로 사고할 수가 없었다. 이 오메가 옆에 있으면 멍청함이라도 옮는 것인지.
일단은 치료를 받아야 할 테니 닥터 최를 불러야 할 터다. 박 비서에게 이야기를 하면 아마 전후 사정을 알릴 것이다.
그는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걸며 해진의 눈을 확인했다. 저를 보지 않고 자꾸 눈을 감으려는 게 아무래도 영 심각했다.
“강해진 씨, 정신 차려보십시오.”
몽롱한 눈은 환을 마주하지 못했다. 다만 커다란 손바닥에다가 뺨을 비벼대는데, 그 동작이 마치 보채는 어린아이 같은데도 지극히 음란했다.
“하읏…….”
급기야 소리까지 음란하게 낸다. 해진은 그의 손에다가 뺨을 함부로 비비적거리며 양손으로는 환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마치 더 만져달라는 투였다.
해진의 몸은 무척 뜨거웠다. 그리고 익히 아는 딸기 향이 코를 찔렀다. 그의 이 열기가 부작용 증세가 아니라, 약으로 인한 히트사이클의 증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해진이 달뜬 몸을 그에게 순순히 안겨왔다. 방금 구운 빵처럼 따뜻하고 말랑한 몸이었다. 환은 얼떨결에 그를 안아 받쳤다. 보슬보슬한 머리칼이 턱을 스쳤다.
“이, 개새끼야…….”
예상치 못한 상스러운 말에 환은 뚝 굳었다. 방금, 뭐라고?
잘못 들은 건가. 환은 제게 안긴 강해진을 내려다보았다. 따끈따끈한 몸은 그가 조금 움직여도 그 반동에 힘없이 흔들렸다. 와중에도 떨어지기 싫다는 투로 상체를 제게 비벼댔다.
“개새끼, 너는…… 흐읏, 개만도 못한, 놈이, 야…….”
해진이 그의 어깨에다 이마를 비비며 계속 옹알거렸다. 환은 기가 막혔다. 몸은 달떠서 제게 비벼대는데 입으로는 욕을 해대는 것이 같잖았다.
황당함에 아무것도 못 하고 있는데 해진이 이번에는 그의 목을 답삭, 물었다. 제 살을 작은 입술로 물고 끙끙거리는 꼴에 기가 찼다.
“흐으으……. 빨리, 흡, 뭐라도 해봐, 이 개새끼야……. 너 때문이잖아…….”
오메가의 히트사이클은 ‘발정기’라는 천박한 언어로 불리기도 한다. 환은 새삼 그 단어가 적절하다고 느꼈다. 제 허벅지에다 어느새 엉덩이를 얹고 비비기 시작하는 해진의 모습은 정말로 발정이 난 꼴이었으니.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다면 이 건방진 밀가루떡의 험한 입이었다. 와중에도 박 비서는 당최 뭘 하는 것인지 전화를 받지 않았다. 휴대폰을 아무렇게나 내던지고 해진의 머리채를 콱, 잡아당겨 제 몸에서 떼어냈다. 저를 마주 보게 했다.
“어디다 대고 욕지거리야. 상황 파악이 안 돼?”
그런데도 이 밀가루떡은 주눅 드는 기색이 하나도 없이, 외려 몽롱한 눈에 억지로 날을 세웠다.
“할 거면 빨리 끝내라고, 이 새끼야……. 이 개새끼야……! 나도 너랑 몸 섞는 거, 거북하고 싫다고……!”
이번에는 욕지거리보다 뒤이은 말에 더 화가 났다. ‘하기 싫다’는 해진의 말이 그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고작 이딴 조그마한 녀석에게 휘둘린다는 사실을 스스로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환은 결국 울컥하고 말았다.
그는 제 성기가 단단하게 발기한 것을 느끼며 해진을 번쩍 안아들었다. 체구 작은 몸은 잠깐 버둥거렸으나 환의 품을 벗어나지는 못했다.
여전히 개판인 거실을 지나 침실로 들어간 환은 그를 침대 위에 내던졌다. 쿵, 제법 큰 소리와 함께 던져진 해진은 몸을 웅크리고 달뜬 눈으로 환을 노려보았다.
“방금 한 말, 제대로 후회하게 만들어주지.”
“웃기시네……. 대사도 무슨 90년대 망한 드라마 악역 같은 걸 치고 있어……. 흐읏…….”
히트사이클로 정신도 못 차리는 주제에 헛소리는 끊이지 않는 강해진이 환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몸으로는 알파를 원하면서 감히 저를 원수처럼 노려보는 그를 짓눌러주고 싶었다.
한여름인데 호텔은 에어컨도 틀지 않았는지 몹시 더웠다. 어쩌면 해진에게서 나는 열기일지도 몰랐다.
환은 재킷 안주머니에서 가죽장갑을 꺼내 꼈다. 아무리 더워도 더러운 물을 질질 흘리는 강해진의 몸을 맨손으로 만지기는 싫었다. 그때 욕실에서야 뭐, 정신이 없어서 그랬다만. 지금은 아니니까.
재킷을 벗고 넥타이를 손으로 늘렸다. 해진이 몸을 잔뜩 웅크린 채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알아서 옷이나 벗을 것이지, 또 내가 직접 벗겨야 하나.
장갑을 다시 한 번 단단히 당긴 환이 그의 멱살을 잡듯 티셔츠를 잡아끌었다. 그대로 옷을 찢어버렸다.
“잠, 깐……!”
잠깐은 무슨. 넝마가 된 티셔츠를 내던진 환은 해진의 바지에 손을 대었다. 벨트와 버클을 푸는 손이 급했다. 벌써 그의 몸에서 새어 나오는 습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속옷과 바지를 한 번에 끌어 내려 순식간에 해진을 알몸으로 만들었다.
“흐으…….”
방은 어둡고 습하고 더웠으며, 흰 침대 위에 누운 해진은 무척 희어 보였다. 고작 며칠 전에도 몸을 맞대었지만, 이번에는, 뭐랄까……. 그 농도가 완전히 달랐다. 마치 숙성도에 따라 당도가 천차만별로 달라지는 과일처럼 말이다.
히트사이클을 맞은 그의 몸은 이전보다 더 탐스러워 보였다. 볼품없이 비쩍 마르고 허여멀겋기만 한 몸인데, 이상하게도 탐이 났다. 그에게서 나는 지독한 오메가 향 때문일까.
혹은 허리를 틀며 몸을 꼬아대는 그의 꼴이 충분히 음란해서인지도 몰랐다. 그 모습이 우스워야 하는데,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만져달라는 듯이 튀어나온 한 쌍의 유두와 미끈한 가슴은 환의 손을 유혹했다. 어둠에 반쯤 가려진 얼굴에는 평소에 볼 수 없던 색기가 뚝뚝 흘렀다.
환은 그의 다리를 벌렸다. 해진은 벌써 발기한 상태였다. 성기 끝이 반들반들하게 젖어 있었다. 투명한 프리컴이 아랫배로 거미줄처럼 흘러내리는 것을 보며 환은 그의 무릎을 접어 올리게 했다. 구멍이 훤하게 드러났다.
해진의 구멍을 제대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분홍빛으로 꼭 닫혀 있는데 어디에서 이렇게 액이 흘러나왔는지, 주변이 어둑한데도 젖은 게 확연히 보였다. 그리고 애액에는 핏기가 조금 묻어 나왔다.
‘더럽군.’
더럽고 음란해. 그리 생각하면서도 환은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이딴 구멍이 뭐라고 거의 넋을 놓고 구경했다. 그 시선을 의식하는지 꼭 닫힌 구멍에 살짝 힘이 들어갔다 풀어졌다. 안쪽이 보일 만큼 벌어지지는 않았지만 뻐끔거렸다.
“마, 만…….”
홀린 듯이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는데, 돌연 해진의 목소리가 들려 환은 눈만 들었다. 다리 사이로 해진이 고개를 들고 저를 보고 있었다. 얼굴이 새빨갰다.
“거기, 만져, 줘…….”
기어가는 목소리로 하는 요구에 기가 찼다. 지금 이 더러운 구멍을 자기더러 만지라고? 그딴 짓을 내가 왜 해야 하지?
환은 그의 말을 순순히 따라주는 대신 바지 지퍼를 내렸다. 그 어떤 애무나 전희 없이, 해진의 다리를 벌리고 그 사이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발기한 페니스를 들이밀었다. 해진이 기겁하며 몸을 뒤틀려 했다.
“잠시만, 그렇게 바로……!”
뭐라 말하려던 해진은 페니스가 쑤셔 박히자마자 뻣뻣하게 굳으며 조용해졌다. 다행인 일이다.
“으윽…….”
해진이 먹먹한 소리로 신음했다. 그의 안쪽은 벌써 흠뻑 젖어 있었다. 전희 따위는 역시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말이다. 그런데도 환의 페니스가 들어가기에는 몹시 좁았다. 뻐근할 정도였다.
“후…….”
한 번 날숨을 뱉은 환이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양쪽으로 벌어진 해진의 두 무릎을 가죽장갑 낀 손으로 단단히 쥐었다. 그대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흡, 으……!”
처음 들어간 해진의 안쪽은 축축하고 따뜻했다. 그리고 몹시 강하게 조였다. 흠뻑 젖은 것이 느껴지는데도 버거울 정도였다. 꼭 손으로 쥐어짜는 것 같았다.
허리를 앞뒤로 움직일 때마다 젖은 소리가 났다. 질퍽한 것이 새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오메가의 몸에 이렇게 물이 많은 줄 그는 처음 알았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을 쥐어짜댈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마치 입으로 빠는 것 같았다.
“……정말 난잡하군.”
그것이 환이 느낀, 해진의 안쪽에 대한 감상이었다. 허리를 앞뒤로 느리게 움직이며 해진이 풍기는 달큼한 향을 크게 들이마셨다.
“정말이지, 난잡하고, 불결해.”
그런데도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 것일까. 환은 그게 의문이었다.
청결을 최우선적인 미덕으로 생각하는 자신이, 체액이 질질 흘러나오는 오메가의 구멍에 성기를 박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니, 그 사실이 오히려 환을 흥분하게 했다.
무릎을 쥔 손으로 해진의 허벅지를 쓸어내렸다. 가죽장갑에 닿은 흰 허벅지가 여리게 떨렸다. 골반까지 금세 내려간 손은 이제 아랫배를 더듬었다. 말라빠진 이 아랫배에 정말로 자신의 아이가 들어설 수 있단 말이지. 환은 입술을 비틀어 웃었다.
“이 안에, 몇 번이나 싸줘야 아이를 가질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그 때였다. 해진의 안쪽이 그를 조르듯이 꽈악 쥐어짰다.
“……!”
갑작스러운 자극에 놀라 해진의 얼굴을 살폈다.
반쯤 풀린 눈과 붉어진 뺨, 땀에 젖어 반짝거리는 미간은 기분 좋게 구겨져 있었고 입술은 살짝 벌어져 안에 있는 붉은 혀를 비쳤다.
“하아, 흐…….”
그가 작게 내뱉는 신음을 환은 그제야 들을 수 있었다.
환의 시선은 그대로 타고 내려와 아래쪽을 살폈다. 발기한 해진의 페니스가 빳빳하게 서서 조금씩 움찔거리고 있었다.
마치 홀린 듯이 가죽장갑 낀 손으로 그것을 움켜쥐었다.
“흣!”
그대로 아래위로 두어 번 문질렀다. 그러자 해진의 페니스에서 곧바로 정액이 쏟아져 나왔다.
“아, 흐으, 으! 으응……!”
해진이 허리를 비틀며 우는소리를 냈지만 환은 손길을 멈추지 않았다. 희뿌연 액체가 사방으로 튀었다.
환은 사정하는 그를 저도 모르게 관찰했다. 달뜬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지고, 어둠 속에서도 티가 날 만큼 얼굴이 새빨개져 있었다. 벌어진 입술은 안에 뭘 넣어달라고 보채기라도 하는 듯이 보였다.
제 아래 깔려서 사정하는 해진을 보는 순간, 환은 머릿속에 있던 어떤 스위치가 턱, 켜지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가히 그가 본 광경 중에서 가장 자극적이라고 할 수 있을 광경이었다.
“침대가…… 더러워졌군.”
그 끔찍할 정도로 자극적인 모습을 본 뒤 환이 내뱉은 말은 고작 그것이었다. 어차피 자신이 여기서 잘 건 아니지만 청결에 대한 강박증은 쉽게도 거부감을 드러냈다.
오메가들이란 정말 더러운 존재라고, 환은 생각했다. 이렇게 사방에다가 물을 싸대고 흘려대니.
그런데도 왜 이렇게 자꾸만 더 그를 더럽히고 싶은 것일까. 어째서 제 손에 의해 더러워지는 꼴을 더 보고 싶은 것일까.
어느 순간부터인가 환은 허리 움직임을 빠르게 했다. 퍽, 퍽, 소리가 나도록 허리를 몰아쳤다. 촉촉하게 젖은 해진의 안쪽이 제 페니스를 감싸고 쥐어짜는 것을 만끽했다.
“으읏, 그, 만, 그만! 흑!”
해진이 울먹거리는 소리를 냈다. 환의 귀에는 들리지도 않았다. 그는 오히려 속도를 더 올려 움직였다. 살 부딪치는 소리와 흥건한 물소리가 뒤섞여 났다. 그의 몸에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페니스 기둥이 흠뻑 젖어서 애액이 뚝뚝 흐를 정도였다.
“그, 만……! 너무, 느낌, 흐으, 이상…….”
해진이 숨을 할딱거리며 애원했다. 팔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심지어 저를 때리려고까지 하기에 환은 그의 양 손목을 한 손에 가두어버렸다. 그리곤 머리 위로 손을 올리게 했다. 이대로 묶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흐으, 으…….”
급기야 해진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얼굴은 꼭 억울하다는 듯이 훌쩍거리는데, 아래쪽은 반대로 꽉꽉 조여댔다. 가뜩이나 좁은 곳이 있는 힘껏 쥐어짜대는 통에 페니스가 아플 지경이었다.
우는 해진의 얼굴 역시, 사정하는 얼굴만큼이나 자극적이었다. 환의 목덜미가 서늘해졌다.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치솟는 것을 짓누르며 단번에 페니스를 빼냈다.
“흐읏!”
어찌나 흠뻑 젖었는지, 구멍에서 빼낸 페니스 끝에 투명한 애액이 왈칵 늘어져 흘렀다. 핏기는 아까보다 많이 사라져 있었다. 환은 장갑 낀 손으로 그를 엎드리게 했다. 다소 거친 손길이었다.
영문을 모른 채 환이 손대는 대로 엎드린 해진은 뒤를 돌아보려다가 머리채를 잡혔다. 장갑 낀 손이 다소 거칠게 머리칼을 휘어잡고, 얼굴을 베개에다 짓눌렀다.
“으으, 으응…….”
와중에도 엉덩이를 쳐들고 함부로 제게 비벼대려 하는 음란함은 대체 어디서 배운 것일까. 더러운 체액으로 온통 젖은 엉덩이를 함부로 들이대지 못하도록 장갑 낀 손으로 한 대를 후려쳤다. 철썩, 젖은 살갗에 가죽이 내려치는 소리가 아주 컸다.
“아!”
해진은 울먹거리며 조금 버둥거렸지만 환의 손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얼굴이 엉망으로 짓눌린 채 우는소리를 내었으나 환은 놔줄 기미가 없었다. 짓누르는 손길이 오히려 더 억세졌다.
“질질 짜지 마. 꼴 보기 싫으니까.”
짓누른 손만큼이나 위압적으로 읊은 환은 다시 그에게 삽입했다.
“아……!”
이미 젖을 대로 젖어서 몇 번이나 그의 것을 받아들였던 구멍인데,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해진은 처음과 똑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아니, 감각이 달아올라서 오히려 처음보다 더 견디기가 힘들었다.
“흐으, 아, 으…….”
신음이 이불 위에 힘없이 흩어졌다. 머리는 짓눌린 채로 엉덩이만 쳐든 해진은 모멸감 속에서 강한 쾌락을 함께 느꼈다.
문득 그는 깨달았다. 얼굴을 파묻고 구멍만 활짝 벌린 이 수치스러운 자세뿐만 아니라, 이환이 저를 대하는 태도 역시 짐승을 다루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음을.
얼굴을 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섹스는 견디기 버거웠지만, 그보다 저를 이렇게 물건처럼, 꼭 씨받이처럼 다루는 환의 태도가 더 상처가 되었다.
뒤에서 박는 환의 허리 움직임이 점차 더 빨라졌다. 해진은 손바닥 아래 닿는 시트를 말아쥐었다. 젖은 안으로 딱딱한 살덩어리가 빠르게 밀고 들어왔다가 미끄러져 나오는 감촉이 견디기 힘들었다.
쾌락인지 고통인지 혹은 폭풍인지 모를 것이 해진의 머릿속을 곤죽으로 만들어버렸다. 해진은 어느새 또 울고 있었다.
“아, 흑, 아파, 요. 아……! 아파……! 흐으, 허엉…….”
사실 아픈 감각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지만 그리 애원하며 엉엉 울었다. 그러나 환은 멈추지 않았다.
환은 사실, 해진의 애원을 모두 듣고 있었다. 아프다는 말을 듣고는 이 짓거리를 멈춰야 한단 사실도 이성적으로는 알았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멈추지 않은 것이 아니라, 멈출 수가 없었다.
강해진의 독한 오메가 향이, 이 싸구려 딸기 향이 저를 홀리기라도 한 것 같았다. 무언가가 자꾸만 그를 빨아들였다.
“아프, 다고, 개새끼야……! 흐으, 흑…….”
그가 제게 내뱉는 상스러운 욕에도 아무 감흥이 없었다. 그에게 지금 자극을 주는 것은 오직 강해진의 몸밖에 없었다.
단것을 발라놓은 것처럼 축축하고 매끄러운 안쪽과, 발기한 채로 제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는 강해진의 페니스가 환을 끝없이 유혹했다. 환은 그것을 도저히 거부할 수가 없었다.
마치 입에 넣은 채 반쯤 깨진 사탕처럼 그를 탐할 때마다 전기가 통하는 듯 찌릿하게 쾌감이 치솟았다. 자꾸만 침이 고이고 혀를 굴릴 수밖에 없지만, 그렇다고 그대로 삼킬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발기할 대로 발기한 페니스는 해진의 안쪽을 찢어버리기라도 할 듯이 사납게 움직였다. 환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난잡하게, 더럽게 젖은 구멍을 성기로 탐하다니. 평소의 저라면 생각할 수 없을 일이다.
퍽, 퍽, 살이 부딪칠 때마다 접합부에는 애액이 흘러나와 부옇게 거품이 일었다. 몇 방울은 점성을 보이며 아래로 길게 흘러내렸다.
환은 자신의 페니스가 푹 젖은 것을 보며 일부러 더 깊이, 조금 더 깊이 넣어보았다. 강해진의 구멍은 손가락 하나는 들어갈 수 있을까 싶게 좁아 보였는데, 어떻게 이렇게 제 성기를 다 받아들이는지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다.
“흐, 흐으…….”
해진이 헐떡거렸고, 그 소리와 박자를 맞추어서 구멍 역시 옴짝거렸다. 환은 핏줄이 툭툭 불거진 제 성기가 그 구멍으로 드나드는 것을 유심히 관찰했다. 눈을 떼기가 힘들었다.
그 때, 얼굴이 짓눌린 채 꼼짝도 못 하던 해진이 어깨를 심하게 떨었다. 동시에 투둑, 툭, 무언가 천 위에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해진이 또 한 번 사정한 것이었다.
“아, 흐으, 환, 이 씨…… 제발…….”
쌍욕을 할 때에는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그제야 귀에 들어왔다. 환은 몰아치던 허리를 뚝 멈췄다.
‘……내가 왜 이러지?’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환은 좁아터진 그의 몸에서 페니스를 빼냈다. 사정하지도 않았는데 꼭 정액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애액이 길게 흘러내렸다.
젖은 침대에 해진을 바로 눕혔다. 체액으로 함빡 젖은 몸은 어둠 속에서도 반들반들하게 빛났다. 환은 장갑 낀 손으로 홀린 듯이 그 살결을 한 번 훑었다.
“흣…….”
해진이 작게 신음했다. 그 소리마저 환에게는 자극적이었다. 크게 헐떡거리던 해진의 숨소리가 조금씩 안정되었다.
목이 바짝 말라오는 것을 느끼며 그는 해진의 다리를 벌리고 다시, 이번에는 좀 더 느리게 삽입했다. 미끄러져 들어가는 감촉이 아까보다는 부드러웠지만, 여전히 좁았다. 넣자마자 밀려드는 사정감을 애써 무시하며 환은 부드럽게 허리를 움직였다.
“아, 으! 흐읏! 잠, 깐! 흐으!”
‘잠깐’이라는 그의 요구에 응해줄 여력은 없었다. 그는 그저 강해진의 모든 것을 삼키고, 빨고, 제대로 맛을 보고 싶었다.
“아, 안에, 너무, 깊…….”
해진이 우는소리로 뭐라 웅얼거렸다.
“안에, 흐윽, 너무, 깊이 들어, 와서…….”
겨우 말을 알아들은 환이 미간을 구겼다.
“…뭐라고?”
새빨간 얼굴과 제대로 뜨지도 못하는 눈, 젖은 입술, 강해진의 모습은 한눈에도 제정신으로 보이진 않았다. 그러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스스로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여기까지…… 닿는 것 같, 단, 말이야…….”
아랫배 어딘가를 손가락으로 어설프게 쿡, 찌르며 웅얼거리는 꼴을 보면 확실했다.
환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지금 누구랑 무슨 짓을 하는지 똑똑히 알아야지, 감히 저와 있을 때에 정신을 흐트러뜨린단 말인가? 괘씸했다.
그는 해진의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푹 젖은 구멍에 들어갈 때마다 쾌감이 전기처럼 사지로 뻗쳤다. 해진은 반쯤 감긴 눈으로 환을 올려다보며 할딱할딱 숨을 몰아쉬었다.
“너무…… 딱딱해……. 흐으…….”
몸을 어설프게 비틀고 끙끙거리는 꼴이 음란하기 그지없었다. 환은 현기증과 비슷한 무언가를 느꼈다. 아랫도리로 감각이 쏠렸다. 더 참기 힘들었다.
“흐으, 아, 너무, 꽉, 차서, 흐으, 아……!”
“입 좀, 후, 다물어.”
가뜩이나 참기 힘든데 꽁알거리는 것을 들어주기가 힘들어서 환은 결국 해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자 이 요망하고 같잖은 오메가는 혀를 내어서 그의 손바닥을 핥기 시작했다.
“크윽…….”
환의 허리가 앞뒤로 빠르게 움직였다. 깊이, 더 깊이 들어가기 위해 단단히 허리를 붙든 채 강해진의 몸을 탐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환은 그의 안에 사정했다. 포궁 입구에 정액이 그득하게 쏟아졌다. 넣은 채로 움직이지 않는데도 해진의 내벽이 움찔거리며 그의 것을 쥐어짰다.
“하아, 하…… 이게, 뭐, 야……”
뭐긴 뭐야. 네 배 속에 아이를 만들 정액이지.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대신 환은 조금 더 깊이 정액을 쏟기 위해 그의 허리를 위로 쳐들게 했다. 할 수만 있다면 제게서 쏟아져 나온 정액이 그의 포궁 안으로 흘러드는 광경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정액을 뱉는 내내 환은 머리털이 쭈뼛하게 설 정도로 강한 쾌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쾌감 속에서 제 성기가 부푸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노팅의 전조였다. 몸 안에 깊이 뿌린 정액이 함부로 흘러나오지 못하도록 입구를 성기로 틀어막는 알파의 본능이었다.
보통의 알파라면 아이를 가질 마음을 먹었을 때 노팅을 했을 터였다. 물론 피임 기구를 쓰더라도 섹스 중에 너무 흥분해서 노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리고 환은 자신이 두 번째에 속한다는 사실을 믿기가 어려웠다.
“……젠장…….”
화들짝 놀란 그는 성기를 단번에 빼냈다. 노팅이 시작되던 차에 페니스가 빠져나가려 하자 해진의 내벽은 빼앗기기 싫은 것을 억지로 조르듯 그의 것에 흡착했다.
“아, 아파……!”
해진이 우는소리로 외쳤다. 이번에는 정말로 아팠다. 노팅 직전의 페니스는 오메가의 포궁을 최대한 단단히 틀어막기 위해 흉기처럼 딱딱한 상태였다. 가뜩이나 해진의 몸에 들어가기 버거운 크기이니 내벽을 빠르게 스치면 다칠 수도 있었다.
그러나 환은 해진이 애원하는 목소리 따위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그는 페니스를 단번에 빼어냈다. 해진을 내버려둔 채 일어나 진저리를 치며 침대 옆의 티슈를 한 움큼 뽑아 제 성기를 닦기 시작했다. 그의 정액과 해진의 애액이 뒤섞여 흠뻑 젖은 페니스는 아직도 발기한 상태였다.
알파의 본능이라는 것은 환 자신과 거리가 멀다고만 생각했다. 짐승과 다를 바 없는, 제 몸 하나도 조절하지 못하는 머저리들이나 본능 운운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런데 환은 방금 전, 그의 몸에다 노팅을 할 뻔했다. 오로지 쾌락으로 인한 본능으로 말이다.
이전에 욕실에서 일을 칠 뻔했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만 정신을 놓고 저 더러운 구멍에다가 성기를 마구 비벼댔지 않은가. 다시 생각해도 기함할 일이다.
좀 참을성이 없을 뿐이지, 그는 자신이 제법 이성적이라고 믿고 살아왔다. 그런데 강해진은 자꾸만 제 본래 모습을 부수었다. 그것이 불쾌하고 괘씸했다.
마치 묻어선 안 될 것이 묻었다는 양 환은 제 성기를 여러 번 박박 닦았다. 와중에도 발기가 식지 않아 더 기가 찼다.
“흐으, 아…… 환이 씨…….”
누운 해진이 저를 불렀지만 환은 돌아보지 않았다. 섹스 후에 파트너에게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정도는 그도 알았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상식 따위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히트사이클 중인 오메가와의 섹스는 머릿속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을 정도로 강한 쾌감을 주었고, 그 쾌감만큼이나 강한 불쾌감 역시 동반했다. 그는 이 감정에서 최대한 빨리 벗어나고 싶었다. 제 몸을 닦는 것이 바빠서 해진이 제게 손을 뻗는 것도 알지 못했다.
“흐윽, 저, 배가…….”
기어가는 듯이 작은 목소리 역시 듣지 못했다. 환은 식지 않은 성기를 억지로 넣고 바지춤을 갈무리했다. 티슈를 아무렇게나 내던진 뒤 가죽장갑을 벗었다. 해진의 체액으로 엉망이 된 장갑 역시 쓰레기를 버리듯 아무렇게나 내던졌다.
그대로 방을 나가버렸다. 도망치는 자들이 모두 그러하듯,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해진은 불 꺼진 방, 축축한 시트 위에서 몸을 웅크렸다. 배가 몹시 아파왔다. 고통으로 움찔거릴 때마다 환이 안에 싸 놓은 정액이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아파…….”
섹스할 때에는 정신이 없어 몰랐는데, 아까와 비슷한 통증이 아랫배를 찔러댔다.
방금 나간 환을 붙잡아야 할 것 같은데, 자존심이고 뭐고 내가 지금 아프다고 애원해야 할 것 같은데 용을 써댄 탓에 팔다리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질 않았다. 온몸이 땀에 젖어 추웠다. 이불이라도 끌어다 덮고 싶었지만 그럴 힘조차도 없었다.
현관문이 닫혔는지 도어록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해진은 포기하고 눈을 감았다.
‘안아주는 건 기대도 안 했지만…….’
그래도 괜찮으냐고 한 마디는 물어볼 줄 알았는데.
첫 섹스의 마지막은 오한과 통증, 외로움으로 그득했다. 혼자서 환과의 섹스를 몰래 상상할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겉으로 다정하게 보였던 만큼 그와의 섹스 역시 다정하고 달기만 할 줄 알았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착각이었다. 이런 것일 줄 알았다면 하지 않았을 텐데. 첫 섹스가 이렇게 아프고 서러울 줄은 몰랐는데. 그리 생각하며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 * *
잠든 동안 누군가가 해진을 살피고 갔다. 해진은 그게 환이기를 바랐지만 제 몸에 닿는 손길은 능숙하고 낯설었다.
“……며칠은…… 요양…… 약도 소용…… 무조건 쉬어…….”
목소리가 띄엄띄엄 들렸다. 눈을 뜨고 싶었지만 자꾸 졸렸다. 팔에 무언가가 꽂혔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링거 주사인 모양이었다.
이환은 이번에도 저를 찾지 않았다. 정체도 모를 약을 먹여놓고, 저를 멋대로 범하고, 아픈 것을 내버려두고는 홀랑 나가버렸다. 꼭 더러운 것을 만지기라도 한 것처럼 난리를 부려대고 말이다.
이번에도 제가 죽든 말든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그럴 줄 알았다. 몹쓸, 빌어먹을, 개 같은 자식. 해진은 눈을 감은 채로 생각나는 욕을 있는 대로 퍼부었다.
“……경과를 지켜봐야겠습니다. 일단은…….”
띄엄띄엄 들리던 목소리가 점차 또렷하게 들렸다. 낯선 목소리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하는 말을 들어보면 의사인 것 같았다.
그럼 여긴 병원인가? 아니다. 그 개자식이 무려 병원까지 데려가줄 리가 없었다. 누운 침대 감촉은 익숙하고 주변에 들리는 소음이 없는 걸 보면 여전히 빌어먹을 호텔 방인 모양이었다. 해진은 확인하고 싶었지만 아직 몸에 힘이 없어서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경과를 지켜봐야겠다는 건, 지금 당장은 조치를 할 수 없단 뜻입니까?”
뒤이어 들린 목소리에 해진은 하마터면 숨을 멈출 뻔했다. 분명 환의 목소리였다. 내버려두고 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몸이 많이 약한 분이시다 보니 약이 부담이 간 것 같네요.”
“부작용 때문입니까?”
“약의 부작용 자체가 심한 건 아닙니다만, 현재로서는 상태를 지켜보며 최대한 요양하셔야 합니다.”
해진은 행여 제가 깬 것을 들킬까 싶어 숨소리까지 참았다.
‘설마 날 걱정하기라도 하는 건가……?’
잠깐 떠오른 생각을 얼른 지워버렸다. 에이, 그럴 리가 없다. 이환보다 제 팔뚝에 꽂힌 주삿바늘이 저를 더 걱정하리라고 장담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슴이 멋대로 뛰는 것은, 멍청한 머릿속이 자꾸만 기대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어떻게 해도 좋으니 제 러트 기간이 오기 전까지는 멀쩡하게 만들어 놓으십시오.”
그리고 뒤이은 말에 해진은 모든 기대를 포기하고야 말았다. 그럼 그렇지, 이 개새끼. 자기를 물건처럼 생각하고 있지 않은가.
“최대한 빨리 해결하십시오. 여기다가 더 시간 쓰기 싫으니.”
‘해결’이라는 말 역시 무슨 물건을 고쳐 놓으라는 말처럼 들렸다. 해진은 이제 속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우스울 지경이었다. 뭐 이딴 놈이 다 있어.
의사와 이환은 방을 나갔고, 해진은 문이 닫히고서야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개자식. 내가 순순히 여기 처박혀 있기만 한 줄 알았지?’
이 호텔에 저를 방치해두고 찾아오지도 않은 일은 그의 잘못인 동시에 실수이기도 했다.
사람을 호텔에다 감금한 일은 처벌을 받아야 하는 엄연한 범죄고, 섹스 후에 쳐다보지도 않고 나가버린 것은 아주 나쁜 짓이지만 해진은 일단 그가 우스웠다.
‘나를 바보로 안 거지. 멍청하게.’
해진은 눈을 감았다. 환이 가고 나서 바로 일어나고 싶었지만 무슨 주사를 놓았는지 몹시 졸렸다.
‘두고 봐라, 개새끼야…….’
속으로 야무지게 욕을 퍼부으며 해진은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닥터 최가 떠난 뒤에도 환은 거실에 한동안 앉아 있었다. 그동안 직원들이 와서 청소를 했다. 들어오자마자 거실을 빼곡하게 채운 공기청정기에 깜짝 놀란 눈치기에, 환은 한 마디를 명령했다.
“다 내다 버리십시오.”
“네……?”
“이것들 다 내다 버리라고요. 못 알아듣겠습니까?”
괜히 화가 나서 날을 세우고 있자니 직원들은 쩔쩔매며 수십 대의 공기청정기를 하나하나 밖으로 꺼냈다.
거실 청소 중에 환은 슬쩍 침실로 들어가 보았다. 해진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었다.
‘팔자 좋군.’
아프다는 것도 사실 꾀병 아닌가? 아픈데 이렇게 잘 잘 수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얼굴이 눈에 띄게 수척했기에 얼른 생각을 거두었다.
문득 제 몰골은 어떤지 궁금해서 침실 한쪽 거울을 마주했다. 강해진의 몰골과 별 차이가 없어서 우스웠다. 눈은 퀭하고 입술은 꺼슬한 티가 났으며 머리칼도 흐트러져 있었다.
사실 그는 전날 밤, 도망치듯 호텔을 빠져나왔다가 몇 시간 지나지 않아 도로 돌아왔었다.
딱히 강해진이 걱정되어서 그런 건 아니었다. 그저 기분이 좀 이상해서, 이유 모를 찝찝함 때문에, 그래, 혹시라도 제가 고른 오메가가 관계 직후에 뭐 잘못되기라도 할까 봐 그런 것뿐이었다.
그러나 돌아왔을 때 강해진은 제가 떠날 때와 마찬가지로 알몸이었고, 열이 엄청나게 났다.
욕을 씹어뱉으며 닥터 최를 전화로 부른 뒤에 환은 침실을 나가지도 못하고, 앉지도 못한 채 안절부절못했다. 서성거리는 동안에도 몇 번이나 해진의 코에다 손가락을 대고 죽지 않았는지 확인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조금 전 닥터 최가 그를 진료하고 나갔는데도 침실로 들어와 강해진을 확인하고 있으니 말이다.
‘빌어먹게 귀찮은 오메가가.’
어쩌다가 이렇게 손이 많이 가는 놈과 매칭률이 높을까. 환은 짜증이 났다. 걸려도 왜 이런 비리비리한 놈이……. 생각을 잇던 환은 서성거리던 발을 뚝 멈췄다.
‘설마, 아이를 못 낳을 정도는 아니겠지.’
그래, 그 정도라면 닥터 최가 아마 이야기를 했을 터다.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말자.
환은 다시 거울을 마주한 채 머리칼을 손바닥으로 쓸어 올렸다. 거울로 잠든 해진의 모습이 비쳤다. 저 어설퍼 보이는 몸뚱이에 제 씨가 뿌려져 있다 생각하자 또 아랫도리가 뭉근하게 반응하는 듯했다. 한 번 더 안에 제 것을 싸지르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쓸데없는 감정을 떨치기 위해 이리저리 또 서성거리던 환은 별 의미 없이 거울 아래 서랍을 열어 보았다. 비어 있을 줄 알았는데, 해진의 물건이 들어 있었다.
맨 위쪽 칸은 포장도 뜯지 않은 옷이 그득했다. 얼핏 봐도 계절감도 맞지 않고, 사이즈도 저 조그만 놈에게 맞지 않을 듯한 옷들이었다.
두 번째 칸에는 온갖 잡동사니가 들어 있었다. 필기구와 책부터 시작해서 소지품용 파우치, 가방 등 역시 절반은 포장도 뜯지 않은 것이었다. 무슨 밀가루 반죽 같은 것도 있었다. 제 친구라도 만들 셈인가.
‘카드를 줬더니 장난질을 치고 있군.’
물건 사이에 손을 넣고 뒤적거려 보았다. 일전 바에서 그가 꺼내었던 것과 비슷한, 요상하게 생긴 휴대용 나이프와 와인오프너 비슷하게 생긴 공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어차피 이곳에서 나가는 일은 불가능할 테지만, 혹시 모르니 공구들은 끄집어내어서 문을 열고 밖으로 던졌다.
“이것도 내다 버리십시오.”
청소하는 직원들이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환은 쳐다보지도 않았다.
서랍에는 다행히도 별게 없었다. 이걸 왜 샀지 싶은 물건들만 그득했다. 수영할 때 쓰는 수경이라든가, 자그마한 손전등, 휴대용 방독면 같은 것들 말이다.
‘이딴 걸 왜 산 거지?’
공기청정기도 그렇고, 고작 이런 필요 없는 물건 몇 개 산다고 내게 피해를 줄 수 있을 거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환은 픽, 입꼬리를 비틀어 웃고는 서랍을 닫았다.
닥터 최는 며칠 동안 휴식을 취하게 두면 해진이 나을 거라고 했다. 부작용에 대한 조치는 취해놓았고, 당분간은 관계를 갖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물론 환 역시 그 더러운 구멍에다가 또 성기를 처박고 싶지는 않았다. 섹스는 세 번으로 족했다. 방금 전까지도 누운 해진을 보며 그의 안에다 한 번 더 사정하고 싶다는 생각을 한 것은 기억도 하지 못했다.
어쨌거나 강해진의 목숨은 닥터 최가 알아서 붙여놓을 테고, 히트사이클의 섹스는 끝났으니 환은 이곳에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발이 떨어지질 않았다.
침실을 나가기 전, 환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해진을 돌아보았다. 세상모르고 잠든 모습을 보자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안쪽 깊은 곳에서부터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듯한 이 기분이 무엇인지 환은 알 수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것이니 알 도리가 없었다. 스스로가 낯설었다.
그리고 그는 제게 낯선 기분만을 자꾸 안기는 저 오메가가 싫었다.
* * *
[키스틸 레저, 유럽 3국 호텔 분점 동시 오픈]
화면에 뜬 뉴스 타이틀을 보며 환은 미간을 구겼다. 기사는 온통 찬양 일색으로 그득했지만 몇 가지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혐오와 분노, 기타 부정적인 감정이 가득 드러난 얼굴은 심호흡 한 번에 다시 무표정으로 변했다.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를 들고 언론대응팀을 연결시켰다.
상사의 전화를 받은 팀장은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환이 몹시 나무랐기 때문이었다.
“‘분점’이 아니라 ‘지점’ 아닙니까. 한국말도 모르는 주제에 기자를 어떻게 하는지 모르겠군요. 언론대응팀에서는 기사 확인 안 합니까? 내 눈에 띌 때까지 뭐 하고 있습니까?”
그 외에 몇 가지를 더 지시하는 내내 환은 계속 심호흡을 해야 했다. 이런 사소한 일까지 챙겨야 하다니. 도대체 이 빌어먹을 회사는 자신이 없으면 어떻게 굴러갈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일 안 하는 것들은 죄다 잘라버리든가 해야지, 원.’
최근 들어서 해외 지점이다 뭐다 일이 많아진 터라 가뜩이나 신경 쓸 게 많았다. 효율이 떨어지는 건 딱 질색인데도 밤늦게까지 안 되는 일을 붙들고 있을 때도 잦았다.
평소라면 오히려 이럴 때일수록 컨디션 관리에 집중할 텐데, 그조차 여의치가 않았다. 하루에도 몇 번씩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리고 환은 자신의 신경이 어디에 쏠려 있는지 알았다. 다만 인정하고 싶지 않을 뿐이었다.
그는 기사가 뜬 브라우저 창을 끄고 책상 위에 놓인 전화기가 아닌,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지도 않고 전화가 연결되었다. 인사도 무엇도 없이 다짜고짜 용건부터 내뱉었다.
“뭐 하고 있는지 보고하십시오.”
수신구 너머로 끙, 하고 앓는 소리가 들렸다. 하루에도 대여섯 번 전화를 받는 일이 귀찮을 만도 했다. 그러나 환이 알 바는 아니었다.
그래, 사람이 그리 쉽게 죽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환은 종일 해진의 안부를 묻는 일에 제 신경을 할애하고 있었다. 본래는 일에 쓰여야 할 관심이 그에게 가는 것이 달갑지가 않았으나 파리하게 인형처럼 누워 있던 강해진의 모습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전화를 받은 경호원은 똑똑, 문을 두드리고는 도어록을 풀었다. 해진이 거실 소파에 앉아 호텔 전화기를 쥐고 있었다.
“아, 진짜요? 원래 유명한 사람들 여기 자주 오나 봐요. 여기서 일하시면 가끔 마주치고 그래요?”
경호원과 눈이 마주쳤으나 꼭 물건을 보듯이 흘끔 바라보기만 하곤 통화를 잇는 모습이 이 침범에 익숙한 듯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처음 몇 번은 제게 사생활도 없느냐, 함부로 문 열고 들어오지 마라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으나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그냥 포기한 터였다.
“하하, 그렇죠, 저도 원래 이쪽 일 해서 힘드신 거 다 알죠. 그래도 대단하세요. 아 참, 오늘 점심 진짜 맛있었다고 셰프님께 꼭 전해주시고요.”
경호원은 다시 문밖으로 나가 휴대폰을 고쳐 쥐었다.
“……호텔 전화기로 수다 떨고 있습니다.”
한쪽 손으로 휴대폰을 쥔 채 이메일을 확인하던 환이 손을 뚝 멈추었다.
“뭐? 누구랑?”
- 여기 호텔 직원인 것 같습니다. 식사 메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쓸데없는 놈들과 시시덕거리지 말라고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했더니, 전화기로 호텔 직원이랑 수다를 떤다고.
다음에 갈 때 상대 직원이 누구인지 확실히 알아내어서 징계를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체 식당 차장과 부장은 뭘 하는 건지. 직원이 근무 중에 고객과 수다를 떨어?
“다른 특이점은 없습니까?”
- 예, 없습니다.
환은 인사도 없이 전화를 끊었다. 화면을 노려보았지만 메일 내용이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오늘은 한 번 들러야겠군.’
자꾸 얼굴을 비치면 버릇이 나빠질 텐데……. 생각을 떨치려 고개를 가로저었다. 코끝에 싸구려 딸기 향이 자꾸 감도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시각, 해진은 이제 막 친해진 데스크 담당 슈퍼바이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아까 경호원이 들어왔을 때 통화한 사람은 식당 쪽 직원이었고, 사실 해진이 좀 더 편하게 생각하는 쪽은 지금 통화 중인 데스크 쪽 직원이었다.
“아하하, 제가 수건을 너무 많이 쓰는 것 같아요……. 아휴,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편하네요. 예. 아, 그리고, 저 아래층에 엄청 유명한 분 들어오셨다던데?”
통화하는 내내 해진은 메모지 위에 무언가를 그리고 있었다. 자신이 있는 스위트룸 층과 이 바로 아래층의 스위트룸 구조였다.
“아, 맞아요, 아래층은 욕실이 반대쪽이라면서요? 그래서 그런지 밤에 누워 있으면 물소리가 들리더라고요. 아, 아뇨, 절대 불편한 건 아니고요. 네네.”
메모지 두 장을 연결해서 그리는 구조도는 겉보기에 어설펐지만 기호도 정확했고, 나름 꼼꼼했다.
“아차, 그럼 제 위층에는 아무도 없는 거네요? 스위트룸도 아니고…… 일반객실이라고 하셨던가요?”
밝은 목소리를 이어가면서도 손은 멈추질 않고 바지런히 종이 위에 선을 그어댔다.
“아, 아뇨, 그냥 담배 연기가 올라오는 것 같아서요. 착각이겠죠? 아래층인가……? 아하하. 제가 말했다고 하지 마요.”
웃는 소리를 입으로 내면서 눈에는 전혀 웃음기가 없었다. 새로 알아낸 사실에 해진은 머리털이 쭈뼛 설 만큼 흥분한 상태였다.
전화를 끊었을 때, 마침 룸서비스가 도착했지만 해진은 한 입도 먹을 수가 없었다. 아파서라거나 입맛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그는 드디어 확신할 수 있었다. 준비하고 또 준비하던 일을 실행할 수 있는 단계에 왔다고.
* * *
긴 회의를 끝낸 뒤 환은 피로로 찌든 목을 손으로 꾹꾹 누르며 복도로 나왔다. 직원들의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고 걸음을 옮겼다.
퇴근 시간을 한참 넘겼지만 오피스텔로 돌아가는 대신 제 사무실 의자에 앉은 그는 목줄처럼 갑갑하게 느껴지는 넥타이를 풀고 의자 등받이에 몸을 묻었다.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을 울렸다. 귀찮아서 받지 말까, 싶었지만 최근 들어 해외 사업 때문에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는지라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휴대폰 액정화면에 뜬 번호를 보는 순간, 환은 미간을 구겼다. 큰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절대 먼저 연락하지 말라던 제 말을 잊었을 리는 없을 텐데.
- 저, 전무님, 어, 없어졌습니다.
강해진을 감시하라고 세워둔 경호원들은 좀처럼 놀라거나 감정을 동요하는 일이 없었다. 때문에 말을 더듬는 것을 듣고 환은 조금 당혹스러웠다.
“뭐라고?”
그리고 뒤이은 말에는 정말 놀라고야 말았다.
- 강해진 씨가, 없어졌습니다.
* * *
키스틸 호텔 서울지부의 슈퍼바이저 김수철, 아니, 크리스는 입사 이후 가장 난감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비상사태야. 어서 30층부터 35층까지 점검 먼저 해. 사이렌 울리는 방은 경보기 끄고. 알았지?’
경보기를 끄는 건 불법이 아니냐고 저를 이곳에 보낸 선배에게 묻고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나지 않았다.
‘저 혼자 갑니까?’
‘30층부터는 거의 VIP들이잖아. 투숙객도 얼마 없으니까 후딱 갔다 와.’
그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32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도 이용할 수 없어서 29층부터 계속 계단으로 걸어 올라가야 했다.
아니나 다를까 32층은 31층보다 연기가 더 자욱했다. 기침을 하며 소매로 코를 가렸다. 욕을 하려던 그는 놀라운 직업정신을 발휘해 입을 다물었다. 복도에 누군가가 서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고객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어휴,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래요?”
복도에 서 있던 이는 체구가 작은 남자였다. 크리스는 친절을 숨 쉬듯 내보이라던 선배의 말을 되새기며 활짝 웃어 보였다. 비록 연기가 코로 흘러들었지만 말이다.
“별일 아닙니다. 저희 키스틸 호텔에서 주기적으로 진행하는 비상훈련입니다. 이쪽으로 따라오시겠어요?”
체구가 작은 남자는 다행히 화를 내지도, 환불 운운하지도 않고 얌전히 저를 따라왔다. 크리스는 그것만으로도 눈물이 나게 감사했다.
“고객님, 성함이랑 객실 호수가 어떻게 되시죠?”
“강호진이요. 3103호에 친구가 있어서 잠깐 놀러왔어요. 친구는 간식거리 사러 내려갔고요.”
투숙객 리스트에서 3103호를 체크하며 크리스는 기침을 했다.
“일단 훈련 방침에 따라 비상대피소에 계시면 제가 곧 안내를 해드리겠습니다.”
“네에, 네. 고생이 많으시네요.”
뒤이은 말에도 역시나 눈물이 나게 감사했다.
둘은 연기가 침범하지 않는 29층으로 가서 직원 및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크리스는 그리하려 했다.
본래 화재가 발생했을 시 엘리베이터는 절대 타면 안 되지만 30층 이상을 차지하는 VIP 고객들에게 그 수많은 층을 걸어서 내려가라고 명령했다간 어떤 사달이 날지 몰랐다.
거기다 원인을 알 수 없는 연기 때문에 갑자기 대피를 해야 하는 상황이 아닌가. 상황을 솔직하게 설명하는 대신 비상훈련 어쩌고 중이라며 거짓말까지 해야 하니.
“고객님, 헉, 헉, 조금만 기다리시면 제가 안전한 곳으로 안내를…….”
직원 및 화물용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크리스는 숨을 몰아쉬며 뒤를 돌아보았다가 그대로 굳어버렸다.
“고객님? 어디 가셨…….”
방금 전까지 제 뒤를 따라오던 체구 작은 남자 고객님이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크리스는 헐레벌떡 계단문을 열어보았으나 고객님의 기척을 찾을 수는 없었다.
‘어쩌지?’
고객님을 잃어버렸다고 했다간 그냥 잘리는 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아니, 생각해보면 친구가 있어 잠깐 왔다고 했으니 우리 고객은 아니지 않나? 내려가서 3103호 고객님께 여쭤보기로 결론을 내린 그는 다른 고객님을 찾으러 이동했다.
그 시각 강호진 고객님, 아니, 강해진은 계단실 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뒤 미친 듯이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쿵쿵쿵, 계단을 울리는 발소리에 맞추어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씨발, 봤냐? 이환 개자식아, 봤냐고!’
소리라도 한껏 지르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저 불쌍한 직원이 다시 저를 붙들러 올지도 몰랐다.
몇 칸 내려가지도 않았는데 벌써 숨이 차고 힘들었지만, 해진은 하나도 괴롭지 않았다. 도망치는 중이 아니라면 환호성이라도 빽 질렀을 터다.
‘이환 개새끼! 어디 엿 좀 먹어봐라!’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는 없었다. 키득거리는 소리가 발소리에 섞여 계단을 울렸다.
해진은 며칠 전부터 탈출 계획을 본격적으로 구체화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환풍구의 구조와 위층, 아래층이 비는지, 그리고 내부는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아보는 것이었다.
다행히도 데스크와 식당의 직원 몇몇과 전화 통화로 친해져서 근처 방에 사람이 얼마나 머무는지 정도는 쉽게 알아낼 수 있었다.
그는 호텔 내에 있는 연기 감지기를 꼼꼼하게 살폈다. 일을 시행에 옮길 때 감지기가 작동하지 않으면 안 되니까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계획해야 했다. 기회는 두 번 없을 테니.
일단 해진은 연기 감지기를 작동시키기 위해 일부러 음식을 태워보았다. 연기가 어느 정도 차야 감지기가 작동을 시작하는지 먼저 알아야 했다.
계란 세 개를 새카맣게 태우고 나서야 사이렌이 빼액 울렸다. 덩치들이 놀라서 들어오자 해진은 일부러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새카맣게 탄 프라이팬을 보여주었다.
연기를 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미리 파악해둔 환풍구로 나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일도 좀 용기를 필요로 했지만,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환풍구는 연기로 가득 차 있었기에 일회용 방독면을 미리 썼다. 눈이 매울 테니 수경까지 썼고, 휴대용 미니 손전등도 챙겼다.
아래층은 해진이 지내는 곳 절반 크기 정도의 스위트룸이 몇 개 있었다. 그중 사람이 없는 호수로 내려간 해진은 창문을 열고 수경과 손전등, 방독면을 저 멀리 다른 층 테라스로 던졌다.
밖에 인기척이 없는지 확인한 뒤 마치 길을 잃은 투숙객처럼 복도로 나갔다. 마침 친절한 직원을 만났지만, 침착하게 투숙객의 친구인 척했다.
‘예상대로 소방대원은 안 보이네.’
어리석게도, 호텔은 자체적으로 진화를 하려 들 것이다. 화재가 난 호텔이라는 멍에를 정말 두려워하니까. 직원을 이렇게 보내서 손님들을 대피시키려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해진은 기진맥진한 채로 계단을 한 층 한 층 내려갔다. 운동에 익숙하지 않은 다리는 경련을 일으키고 몹시 아팠지만 중간중간 쉬어가면서 끝까지 내려왔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CCTV에 얼굴이 찍힐 테니까. 계단실에는 CCTV가 없다는 사실 역시 직원들에게서 알아낸 정보였다.
드디어 도착한 소방대원들이 엘리베이터를 멈추게 했는지, 저층으로 내려가자 투덜거리며 계단을 내려가는 사람들이 몇몇 보였다. 해진은 그 사이에 자연스럽게 섞여서 로비까지 내려갔다.
호텔 로비는 분위기가 몹시 어수선했다. 늦게 신고를 받고 출동한 소방관들과 그들을 도로 내보내려는 매니저 이상급 간부들, 상황을 파악하려는 손님들과 최대한 그들의 주의를 돌리려 생글생글 웃으며 말을 거는 직원들까지. 덕분에 해진은 사람들 사이에 섞인 채로 얼굴을 가리고 대피할 수 있었다.
마침내 호텔을 온전히 벗어났을 때는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주먹만 불끈! 쥐었다.
대망의 탈출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일 뿐이었다.
해진은 어느새 멀어진 호텔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키스틸이라고 벽면에 적힌 글자를 보니 침이라도 뱉어주고 싶었다.
방금 전까지 들떠 있던 마음을 꾹 누르며, 해진은 차분하게 앞으로의 계획을 되짚었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자 이환의 블랙카드가 손에 잡혔다.
‘이 카드, 정지되는 데 몇 시간이나 걸릴까.’
해진은 호텔에 갇히기 전에 챙겨 왔던 자신의 체크카드를 들고 가장 가까운 ATM기로 갔다. 일전 휴대폰으로 확인한 대로 이환이 입금한 10억이 추가되어 있었다.
일단은 현금을 잔뜩 뽑았다. 여기저기 도망치는 데에 쓸 돈이라고 생각하니 눈물 나게 아까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단은 살고 봐야지.
그대로 가까운 백화점으로 가서 - 백화점의 위치 역시 미리 파악해두었다 - 가방과 갈아입을 옷가지, 그리고 도망 다니며 먹을 수 있을 간편식을 샀다. 물론 값은 모두 이환의 블랙카드로 처리했다.
직원들 중 몇몇은 카드를 알아보는 듯이 해진을 의아하게 살폈지만 해진은 결제가 되는지만 걱정했다. 다행히 빌어먹을 개자식이 아직 카드를 정지시킬 생각은 하지 못한 듯했다.
도망이 길어질 수도 있지만 물건을 많이 사지는 않았다. 이미 상하지 않을 간편식과 중간중간 필요할 생필품을 주문해서 미리 계획한 도주로에 다 주문해놓았기 때문이다. 지하철 택배 보관함이나 예전에 살던 오피스텔 건물의 택배 보관함 등 말이다.
물론 이전에 살던 오피스텔 건물을 이용하는 데에는 좀 어려움이 있었다. 누가 선물을 보냈는데 이사 전의 주소로 발송을 했다고, 그러니 택배 보관함에 호수를 표기하지 말고 넣어 두라는 말에 배송업체 직원은 좀 난감해했다.
분실되어도 절대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몇 번이고 약속을 하고, 메시지까지 보내어서 확실하게 못을 박고서야 겨우 원하는 대로 되었다. 호수별로 보관함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한 군데에 모아 두어서 다행이었다.
백화점 화장실로 들어간 해진은 옷을 벗기 전, 바지 주머니에서 종이쪽지를 꺼냈다. 여러 장으로 된 메모지는 앞으로 그가 거칠 도주 과정을 꼼꼼하게 메모해둔 것이었다.
휴대폰으로 메모해두어도 되지만, 휴대폰은 도망치다가 잃어버릴 수도 있고 충전을 못 할 수도 있으니까.
‘일단 숙소부터 찾아가야겠다.’
계단을 내려오는 것만도 너무 힘들었기에 해진은 당장 눕고만 싶었다.
해진은 새 바지 단추를 채운 뒤 블랙카드를 잠시 노려보았다. 처음 이것을 받았을 때는 돈이나 실컷 쓰면서 엿을 먹여줘야지, 했는데 생각해보니 쓰임이 많은 것이었다.
이 카드가 없었다면 아마 탈출 계획을 세우기 힘들었을 터다. 특히 숙소 쪽은 말이다.
‘이 카드로 호텔 몇 군데를 예약했더라?’
기억도 나지 않았다. 며칠 전에 수십 군데의 호텔과 모텔에 이 카드로 예약을 해두었으니, 아마 카드 내역으로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릴 거다.
‘끊기기 전까지 야무지게 써주겠어!’
옷을 갈아입은 해진은 백화점 밖으로 나왔다. 사람들 사이를 지나 밖으로 나왔다.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도주를 계획하면서, 해진은 이환이 생각보다 허술한 사람이라는 데에 좀 놀랐다.
‘가둬놓으면 뭐 해? 직접 지키지도 않는데. 밖에 지키고 있는 덩치들은 죄다 바보들이고.’
그리고 자신이 뭘 하는지 상관도 않는 이환의 태도도 웃겼다.
그의 카드로 의심을 살 물건을 수도 없이 샀다. 특히 망치 등을 비롯한 공구와 밧줄은 일부러 보란 듯이 산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곧바로 도주를 의심할 법한 버스표, 비행기표 등을 예약했는데도 환은 아무 반응이 없었다.
답은 두 가지였다. 이환에게 카드 결제 내역이 곧장 가지 않거나, 결제 내역을 보고도 아무 말을 않는 것이거나.
그 사실을 몇 번씩이나 확인한 해진은 숙박업체를 하나씩 예약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그냥 헷갈리라고 여기저기 예약했지만, 나중에는 돈 쓰는 것 자체가 재미있어서 닥치는 대로 식사니 뭐니 패키지째로 구매를 했다.
이환이 아주 바보가 아닌 이상 자기 카드로 예약된 호텔을 찾아다니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환이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라는 사실을 자기가 이미 염두에 두고 있는 것조차 알까?
아, 물론 숙박업체나 생필품만 산 건 아니었다. 기껏 얻은 블랙카드로 고작 그런 것에만 쓸 해진이 아니었다.
택시에서 내린 그는 기사에게 잠시 기다리라 하곤 지하철로 빠르게 뛰어 내려갔다. 기억해두었던 번호를 찾아 열어보았다. 자그마한 종이가방이 들어 있었다.
‘요즘은 명품도 인터넷으로 살 수 있어서 참 편하단 말이야.’
종이가방을 열자 주문해두었던 명품 시계가 보증서와 함께 무사히 들어 있었다. 여기라면 도난 위험도 적을 테다. 애초에 사람들이 이렇게 많이 다니는 지하철역에 명품 시계가 있으리라고는 아무도 생각 못 하겠지.
다시 꼼꼼하게 사물함 문을 닫고 나오면서, 해진은 괜히 자신이 첩보 영화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런 어린애 같은 기분에 취해 있을 때가 아님도 알았다.
택시에 올라타며 해진은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주먹을 불끈 쥐고 휘둘렀다. 기사가 이상하게 보았지만 상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