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6)
  • 오늘 이환은, 정말로 무서웠다. 러트 때보다도 더. 그때는 제정신이 아닌 티가 났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이환은 맨정신으로 제게 협박하고 있었다. 그래서 두려웠다. 멀쩡하게 제정신인 이환이 이렇게 포악하고 위협적일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으니까.

    등줄기에 식은땀이 서늘하게 흘렀다. 머리털이 비명을 지르듯 곤두섰다. 그의 생존본능 역시 날카롭게 곤두섰다.

    이환이 그의 턱을 쥐고 얼굴을 들게 했다. 키 차이가 실감 났다.

    “나는 인내심이 본래 부족한 사람입니다. 당신에 한해서 많이 참았단 사실을 알려드리죠. 더 시간을 끌다가는 나도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으니 더 기다리게 하지 마십시오.”

    눈앞에서 맹수가 입을 벌리고 있는 게 이런 기분일까. 말문도 막힌 채 해진은 그저 눈만 겨우 깜박였다. 코앞의 이환은 표정 없이 저를 응시하고 있었다. 꼭 먹잇감의 상태를 살피는 것처럼.

    “선택하십시오. 돈을 받고 내 요구를 들어줄 겁니까, 아니면 내 인내심을 바닥나게 만들 겁니까?”

    선택의 여지는 사실 없었다. 겨우 입술을 떼었다.

    “……돈, 얼마 줄 건데요?”

    눈앞에 있는 짐승의 얼굴이 비죽이 뒤틀렸다. 오늘 처음으로 감정을 보이는 듯했다.

    “제 조건 맞춰준다면서요. 일단 그쪽에서 먼저 제시해보시든가요.”

    해진은 말을 내뱉어 놓고 잠깐 후회했다.

    ‘너무 나갔나?’

    하지만 어차피 저쪽도 헛소리를 하고 있는데, 자기라고 헛소리를 못 할 건 없단 생각이 들었다. 돈이 그렇게 많은 사람이니 얼마를 제시할지도 솔직히 궁금하기도 했다.

    환은 입술을 비틀어 웃은 채로 해진을 놓아주었다. 숙였던 상체가 물러나자 해진의 숨통이 겨우 트였다.

    그는 집무실 한편의 찬장 문을 열고 위스키병과 잔을 꺼냈다. 술을 따르자마자 단숨에 들이켜는 그의 옆모습을 해진이 말없이 지켜보았다. 구김 하나 없이 완벽한 매무새의 와이셔츠와 넥타이, 목 끝까지 채운 단추와 커프스는 금욕적이지만 술을 삼키느라 크게 꿀렁거리는 목울대는 무언가를 억누르고 있는 듯이 보였다.

    탁, 소리와 함께 빈 잔이 책상 위에 놓였다. 환은 바지 주머니에 손을 꽂고 서서 해진을 마주했다.

    “임신 진단을 받으면 10억, 출산 후 40억을 드리죠.”

    해진의 눈이 저도 모르게 커졌다. 도합 50억. 어마어마한 숫자다.

    “……제가 당신 말을 어떻게 믿죠? 정말 주실 건가요?”

    “강해진 씨께서 동의하신다면 계약서를 작성할 겁니다.”

    아이를 낳는 대가로 금전을 지불하겠다는 내용의 계약서라니, 생각만 해도 끔찍했지만 그래도 해진으로서는 믿기가 힘든 금액이었다. 그가 부른 금액은 전세 대출금을 일시에 갚고도 한참 남았다. 아니, 전세는 무슨, 평생 써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딱 한 가지, 해진의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어릴 적부터 몸이 약한 그는 자주 병원에서 검진을 받았는데, 하루는 의사가 그에게 말했다.

    ‘기능에는 이상이 없습니다만……. 아마 임신이 거의 힘들 겁니다.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겠군요. 행여 임신에 성공하더라도 유산 확률이 높을 겁니다.’

    당시 해진은 의사의 그 말에도 딱히 충격을 받거나 슬퍼하지 않았다. 어차피 몸에서 제 기능을 하는 곳이 별로 없는데, 아이를 낳지 못한다고 해서 딱히 충격받을 이유도 없었다.

    그 사실이 이렇게 뒤늦게, 아주 뜬금없는 상황에서 제 발목을 잡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해진은 제 생각이 표정으로 드러나지 않도록 얼굴을 굳혔다.

    “한 번 자는 데에 10억, 그리고 출산 후 50억은 어떤가요?”

    이환의 눈이 이채를 띠었다. 입술 끝이 말려 올라갔다. 즐겁다는 투였다.

    “섹스는 세 번, 회당 10억, 강해진 씨의 히트사이클과 저의 러트 각각 한 번씩, 그리고 히트사이클과 러트가 겹치는 때 한 번, 도합 세 번으로 하죠. 그리고 출산 후 20억을 드리겠습니다. 더 이상의 흥정은 힘듭니다.”

    해진은 생각을 잇는 척하며 턱을 쥐었다. 그러나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30억을 받고 그대로 튀면 되는 거 아닌가?

    “그렇게 하죠.”

    대답하자 환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런데 해진은 무언가 이상하다 여겼다.

    ‘만약 세 번 했는데 임신이 안 되면 어쩌지?’

    뭐, 어차피 잠만 세 번 자고 튈 생각이니 오히려 제게는 좋은 조건이지만.

    “계약서가 준비되면 연락드리죠.”

    “대신 섹스 전에는 저와 합의를 해주세요.”

    한 마디를 얼른 덧붙였다. 그가 여태 보여온 태도를 보면 꼭 붙여야 할 조건이었다. 환은 미간을 설핏 구겼다. 모르긴 몰라도 심기가 불편해 보였다.

    “그 정도 배려는 해주시리라 생각해요.”

    이제는 그의 연인도 뭐도 아닌 이상한 관계가 되겠지만. 그래도 그 정도 배려는 해주겠지. 다행히도 이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마치 기꺼이 베푼다는 듯한 투였다.

    “뭐, 그렇게 하지요.”

    무슨 대단한 것이라도 해준다는 듯이 턱을 쳐들고 선언한 이환은 척척 걸어와 해진을 지나쳐 전무실 문을 열어 보였다. 이만 꺼지라는 뜻이렷다.

    해진은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아렸다. 하루 전만 해도, 아니, 몇 시간 전만 해도 그는 제 연인이었다.

    “계약서가 준비되면 바로 드리겠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는 제 앞에서 계약서를 운운하고 있다. 심지어 아이를 대가로 돈을 준다는 내용의 계약서.

    ‘혹시 애초에 저를 만난 게 이것 때문이에요? 맨 처음에 엄마 거울 돌려준다며 만나자고 했던 것도요?’

    묻고 싶었지만 차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해진은 브리프케이스 손잡이를 꾹 쥐며 회사에 돌아가서 팀장에게 외근 보고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아 참.”

    문이 한 뼘 정도 열렸을 때 그가 해진을 불렀다.

    “앞으로 강해진 씨는 저와 함께 생활하게 되실 겁니다.”

    하마터면 얼굴이라도 후려칠 뻔했다.

    “방법이 없지 않습니까? 지내시던 곳이 그렇게 되었으니.”

    문이 코앞에서 닫히지 않았더라면 정말 그리했을 터다. 대신 해진은 닫힌 문을 있는 힘껏 발로 찼다. 쾅! 소리는 경쾌했지만 뒤이어 발에 어마어마한 통증이 찾아와 후회했다.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아팠다.

    ‘개새끼…….’

    그랬다. 이환은 개새끼였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그렇게 다정하고 매너 있는 알파가 이렇게 미친놈일 줄이야.

    “강해진 씨, 저희를 따라와 주십시오.”

    복도에 서 있던 시커먼 남자 하나가 해진에게 말했다. 해진의 덩치 두 배는 될 법한, 꼭 조폭 같은 생김새였다.

    “저 회사로 복귀해야 하는데요. 데려다주실 건가요?”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해진을 빤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해진은 얌전히 그를 따라가는 수밖에는 없다고 판단했다. 뭐, 어차피 도망칠 생각도 없기는 했다.

    시커먼 남자가 해진을 데리고 간 곳은 키스텔 레저 소유의 호텔이었다. 해진도 와본 적이 있는 곳이지만 업무상으로 딱 한 번 와보았고, 그땐 팀원들과 함께 이곳 회의실에서 키스틸의 부장과 미팅을 한 게 다였다.

    엘리베이터가 한참을 올라갔다. 해진은 바깥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투명한 바깥으로 내려다보이는 서울 시가지가 아득했다. 그는 와중에도 엘리베이터가 고장 나서 멈췄을 때의 대처법을 머릿속으로 떠올리고 있었다.

    “내리시죠.”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어둑한 복도가 드러났고, 그 앞에는 제법 커 보이는 문이 하나 있었다. 시커먼 남자가 해진에게 말없이 카드 하나를 내밀었다. 해진은 얼떨결에 받아 들었고, 남자가 탄 엘리베이터 문이 도로 닫히기 시작할 때 이 카드가 저 문을 여는 카드키란 사실을 깨달았다.

    방은 정갈하고 몹시 넓었다. 아니, 방이라고 부르기가 면구스러울 정도였다. 제일 먼저 보이는 곳은 바닥에 대리석이 깔린 거실이었다.

    ‘와, 뭐야.’

    함께 지내게 될 거라 해서 그때 보았던 이환의 집에서 살겠거니 생각했는데, 여긴 이환의 집보다 몇 배는 더 넓어 보였다. 물론 그의 집도 으리으리했지만.

    해진은 거실에 놓인 검은 소파 위에 슬쩍 걸터앉았다. 가구도 죄다 새것으로 보여서 엉덩이를 대고 앉기가 면구스러웠다.

    “휴…….”

    앉고 보니 지금 상황이 조금 실감 났다. 아깐 대체 무슨 정신으로 그렇게 말했을까? 그리고 뒤늦게 걱정도 되었다. 임신을 하기 힘든 몸이란 사실을 들키면 어떡하나.

    하지만 당장 회사까지 관두고 그의 괴롭힘을 피해 도망칠 수는 없었다. 차라리 당분간은 얌전히 잡혀 있는 게…….

    “흑…….”

    생각을 잇던 해진이 결국 울음을 터뜨렸다.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죄를 지은 것도 없고 착하게 살았는데. 이게 무슨 날벼락 같은 일이란 말인가. 그가 잘못한 것이라고는 이환이 좋은 사람이라 착각하고 멋대로 마음을 준 것밖에 없었다.

    “흑, 흐윽……. 개새끼가…….”

    주먹으로 눈물을 훔치며 훌쩍거려도 마음이 풀리지는 않았다. 서러움만 더 커졌다. 눈물 젖은 손을 낡은 정장 바지에 쓱쓱 닦았다. 와중에도 비싸 보이는 소파에 눈물을 묻힐까 긴장하는 자신이 우스웠다.

    하지만 해진은 금세 울음을 그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표정이 순식간에 결연해졌다. 이렇게 울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자신이 지낼 이곳의 구조와 주변을 당장 파악해두어야 했다. 탈출 계획은 빨리 세울수록 유리하니까.

    이환이 회사에다가 이야기를 어떻게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연락이 올 때가 지났는데도 팀장에게서는 문자 메시지 한 통 없었다. 한창 일을 하고 있어야 할 시간에 으리으리한 호텔 한가운데 앉아 있자니 기분이 영 이상했다. 즐거워야 마땅하지만 불안하기도 했다.

    넓은 거실 소파 위에 앉은 해진은 TV 채널을 의미 없이 돌리며 생각을 이었다.

    ‘설마 회사에다 쓸데없는 이야기는 안 했겠지.’

    그래도 이환이라는 사람은 대외적으론 그렇게 몰상식하지 않았다. 누가 상상이나 할까. 키스틸 레저의 이환 전무가 오메가에게 돈을 주고 아이를 낳아달라 한다니.

    ‘……그런데 애를 낳고 싶어도 매칭률이 높아야 하는 거 아닌가?’

    뒤늦게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해진 본인의 몸이 약한 것을 떠나서 알파와 오메가는 매칭률이 맞아야 임신도 쉬웠다. 그 사실을 이환이 모를 리 없고 말이다.

    ‘설마.’

    해진은 조금 소름이 끼쳤다. 매칭률 테스트에 필요한 DNA야 얼마든지 구할 수 있을 터다. 그렇게 같이 붙어 다녔는데.

    이환과 자신의 매칭률이 문득 궁금해진 것은 단순한 호기심 그 이상이었다. 단순히 운이 나빠서 자신이 환에게 붙들린 것은 아닐 터다.

    ‘저는 정말로 해진 씨가 필요합니다. 아주 절실하게요.’

    일전 환이 했던 말과 그의 날 선 눈빛을 떠올리자 소름이 오소소 끼쳤다. 해진은 벌떡 일어나 다시 곳곳을 살폈다.

    해진이 있는 곳은 거실이 하나, 방이 두 개, 욕실이 두 개, 주방, 발코니가 있는 펜트하우스였다. 높이가 까마득한 창문 밖으론 나갈 수가 없고, 유일한 출구인 현관 밖 복도에는 그를 데려다주었던 남자와 또 다른 남자, 총 두 명이 버티고 서 있었다. 둘 다 해진의 덩치 두 배는 되어 보이는 거구였다. 즉, 당장은 나갈 방도가 없어 보였다.

    시간이 지나자 배가 고파왔다. 망설이던 해진은 슬그머니 전화기를 들었다.

    ‘어차피 내가 돈 내는 것도 아닌데.’

    신호가 가는 동안 브로슈어를 뒤적이며 몇 가지 메뉴를 추렸다.

    “네, 룸서비스 주문하려고요.”

    해진은 무려 5인분이나 되는 룸서비스를 주문했다. 주문한 메뉴는 해진의 취향보다는 가격을 철저히 우선시했다. 도착한 음식을 꾸역꾸역 먹었지만 그릇의 반의반도 비지 않았다.

    부른 배를 안고 그대로 침대에 드러누웠다. 와중에도 ‘일 안 해서 좋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우스워 조금 웃다가, 해진은 그대로 잠에 빠져들었다. 쌓인 피로가 갈아입지 못한 정장 안으로 퀴퀴하게 뭉치는 듯했다.

    그는 꿈에서 이환에게 쫓겼다. 약한 몸뚱이는 평소보다 더 느렸다. 허우적거리며 발버둥을 치는데도 뒤에서 따라오는 이환과의 거리가 점점 더 좁혀졌다.

    ‘오지 마! 오지 말라고! 미친놈아!’

    ‘저는 강해진 씨가 필요합니다.’

    꿈속의 이환이 팔을 붙드는 순간, 해진은 깨어났다. 그리고 그는 눈을 뜨자마자 굳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모를 이환이 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흐이이아아아악!”

    해진은 하마터면 기절이라도 할 뻔했다. 눈앞에 있는 이환은 정작 무덤덤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제 몸 위에 올라탄 그를 똑바로 노려보며 물었으나 이환은 대답도 않고 꿈쩍도 않았다. 해진은 내심 살짝 두려웠다. 설마…… 아냐, 그 정도로 양심이 없으려고. 분명히 합의하에 관계를 가지겠다고 약속하지 않았던가. 약속이라는 게 아직 의미가 있다면 말이다.

    다행히도 이환은 조금 더 해진을 관찰하는 눈으로 쳐다본 뒤에 몸을 일으켰다.

    “잡혀 온 와중에도 잘 잔다 싶어서, 구경 좀 했지.”

    이젠 존댓말을 할 생각도 없는 건가? 해진은 인상을 설핏 구기곤 함께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두리번거렸지만 휴대폰이 보이지 않았다.

    “몇 시예요?”

    “그건 알아서 뭐 합니까?”

    이번엔 또 존댓말인 건 둘째 치고 그 대답의 내용 때문에 입이 딱 벌어졌다. 지금 뭐라고 한 거지, 이 자식이.

    “앞으로 강해진 씨는 여기서 생활하면서, 내가 일어나랄 때 일어나고, 먹으랄 때 먹고, 내가 자랄 때 자면 됩니다.”

    해진의 눈이 불만을 가득 담고 가늘어졌다.

    “회사는요?”

    “회사가 지금 중요합니까? 그깟 거, 안 다닌다고 죽는 것도 아닌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환은 또라이가 맞았다. 그리고 자신은 이 또라이 놈에게 붙잡힌 것이고. 하지만 해진은 두려워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아무리 어려운 조난 상황에서도 살아남은 탐험가들처럼, 이 미친놈에게서 벗어날 방법은 분명 있을 것이다.

    “환이 씨의 지금 그 말씀은, 저는 이제 회사도 못 나간다는 건가요?”

    “내가 먹을 것과 잘 곳을 주는데 회사가 왜 필요합니까?”

    그리 반문하는 이환의 얼굴은,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었기에 해진은 잠깐 망연해졌다.

    이환이 방을 나가는 것을 보고 해진은 반사적으로 그를 따라 나갔다. 환은 주방으로 가서 잔에다 식수를 받았다. 조리대처럼 보이는 곳에 이상한 수도꼭지 같은 것이 있더라니, 거기서 식수가 나오는 줄 해진은 처음으로 알았다.

    “그럼 환이 씨의 허가 없이는 전 여기서 나가지 못한단 뜻도 되나요?”

    환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뭘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투로 빤히 바라보았다.

    “그건 감금 범죄인데요.”

    뾰족하게 말하자 빤히 마주한 얼굴이 픽, 웃음을 흘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잘 알아둬요, 강해진 씨.”

    딸깍, 유리잔이 대리석으로 된 조리대 위에 소리를 내며 놓였다. 해진은 무시하기 힘든 압박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환의 얼굴에서 웃음이 지워졌다.

    “내가 하면 범죄가 아니야. 그게 무슨 짓이든.”

    해진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뭔 개소리야. 범죄는 범죄지.’

    안 잡힌다고 범죄가 죄가 아니게 되나? 하여튼 진짜 개소리 어워드가 있으면 그가 우승하리라 확신할 수 있었다.

    환은 그를 두고 주방을 나가버렸고, 해진은 그의 뒷모습을 흘끔, 한 번 본 뒤에 새 컵을 꺼내서 그가 한 대로 물을 따라보았다. 그가 물을 마시면서도 하도 폼을 잡기에 얼음같이 찬 냉수가 나올 줄 알았는데 미지근한 정수라서 살짝 김이 빠졌다.

    거실로 나가자 복도에 서 있던 덩치들 중 하나가 막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덩치는 해진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캐리어 하나를 바닥에 눕혀 열고는 물건들을 꺼내었다. 사이즈가 조금 큰 가방에서 이런저런 물건들이 나왔다. 환의 것으로 추정되는 슈트와 책, 기초화장품 같은 것들이었다.

    이환은 거실에 서서 덩치가 자신의 물건들을 하나하나 나르는 것을 감시하듯 지켜보고 있었다.

    키가 크고 풍채가 좋은 그는 그저 서 있는 것만으로도 위압감을 풍겨댔다. 이전까지 그는 제게 위압적인 모습을 그다지 보이지 않았다. 항상 다정하던 환이 아니었던가.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해진은 또 잠깐 서러워졌지만 마음을 다잡았다.

    “저도 제 물건들이 필요해요. 가져다주세요.”

    제게 말도 않고 이사를 강행했으니 물건들이 어딘가에 있을 텐데, 적어도 이 스위트룸에는 제 물건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환은 그저 속 모를 얼굴을 하고 해진을 응시하기만 했다. 표정 없는 얼굴에 해진은 울화통이 치밀었다.

    “급하단 말이에요! 저 약도 갖고 다니는 거 다 떨어지면 새로 처방받으러 가야 하거든요?”

    몸이 약한 자신은 하루에 먹는 약만도 한 주먹은 되었다. 혹시 모를 상황을 대비해 언제나 하루치 정도의 약은 소지하고 다니지만, 그 말은 곧 내일 아침이 되면 먹을 약이 다 떨어진다는 뜻도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약은 가져다주세요. 안 먹으면 위험하다고요.”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 시끄럽게 굴지 마십시오.”

    어마어마하게 무서운 표정이었지만, 무섭기보다는 어이가 없어서 말문이 막혔다. 약을 못 먹으면 목숨이 위험해지는데, 시끄럽게 굴지 말라니?

    정작 환은 제가 내뱉은 말 따위 신경도 쓰지 않는다는 얼굴로 휴대폰을 꺼내 들여다보았다. 인상을 팍팍 써대는 걸 보니 업무 관련이거나, 안 좋은 기사가 떴거나 한 모양이었다. 그와 데이트를 할 때 가끔 저런 표정을 지어서 물어보면 그렇게 답한 기억이 났다.

    “환이 씨, 그거 아세요?”

    환이 대답 대신 그에게로 시선을 흘끔 주었다.

    “알파 - 오메가 사이 부부들 중 무려 17퍼센트가 ‘무슨 일이 있어도 아이를 절대 낳지 않겠다’고 한대요.”

    멀끔하게 굳어 있던 눈썹이 해진의 말에 한 번 꿈틀, 했다. 무슨 헛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보통 육아가 힘들어서, 그걸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은 희생이 있어서라고 해요.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는 생각해보셨나요?”

    덩치가 두 사람 옆에서 계속 물건을 정리하고 있었지만 해진은 말을 이었다. 어차피 저쪽도 저를 없는 사람 취급하는 것 같으니, 뭐.

    이환이 휴대폰을 주머니에 도로 넣으며 고개를 옆으로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걸 왜 내가 생각해야 합니까?”

    느긋하다 못해 무료해 보이는 얼굴로 그가 물었다.

    “아이에게 핏줄을 제공한다고 해서, 내가 꼭 그 아이를 키우고 아이의 미래를 걱정해야 한다는 법이라도 있습니까?”

    “하지만, 그래도 자기 자식이잖아요. 어릴 때부터 보호자가 애정을 가지고 보살피는 것이 아이의 정서에도 좋으니…….”

    “그건 내 알 바 아니고.”

    칼로 자른 듯한 대답에 잠깐 아연실색했다.

    “당신에게도 알 바가 아닙니다, 강해진 씨.”

    그의 주머니 속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고, 해진은 할 말을 잃은 채로 멍하니 서 있다가 그가 전화를 받는 것을 보며 소파에 힘없이 앉았다. 그래, 그가 아이에게 그렇게 신경 써줄 리가 없지. 그리고 산모인 자신에게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자 소름이 쭉 끼쳤다.

    ‘아냐, 아이 낳을 때까지는 함부로 못 대할 거야.’

    게다가 매칭률 좋은 오메가가 흔한 것도 아니잖아. 해진은 스스로를 다잡으며 환 몰래 주먹을 꾹 쥐었다.

    ‘나를 이렇게까지 데려온 걸 보면 둘 중 하나겠지. 나와 매칭률이 아주 높거나, 혹은 매칭률 높은 오메가가 별로 없었거나.’

    그러니까 이환이 저를 해치지는 않을 것이었다. 그렇게 생각해도 두려움은 쉽사리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 지금 바로 가지. 아니, 괜찮아. 바쁜 것 없어.”

    어느새 덩치는 밖으로 나갔는지 모습이 보이질 않았고, 환도 전화를 이어 받으며 현관 쪽으로 걸었다.

    가느냐고 물으려고 했지만 환은 그를 돌아보지도 않고 현관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소파에서 반쯤 일어나려던 해진은 다시 풀썩, 힘없이 엉덩이를 주저앉혔다.

    “……그래도 좀 더 있다가 갈 줄 알았는데…….”

    대체 저 자식에게 뭘 기대했담. 스스로를 꾸짖은 해진은 소파에 모로 누웠다.

    ‘그나저나 왜 회사에서는 연락이 없지?’

    해진은 시간을 확인했다. 내일 발표도 하려면 팀장에게서 자료를 받아야 했다. 다행히 아직 퇴근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휴대폰에 저장된, 팀장 직속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지 않고 연결되었다.

    “아, 팀장님. 저 강해진입니다. 그, 내일 발표할 이슈 중에서요…….”

    - 해진 씨, 안 그래도 전화하려고 했는데. 도대체 무슨 일이야?

    “네?”

    - 오늘 외근 나가서 큰 실수라도 했어? 갑자기 상부에서 지시가 내려왔어.

    “무슨 지시요?”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한다. 해진은 마른침을 삼켰다.

    - 해진 씨, 이제 우리 사무실로 출근 못 해. 키스틸 레저 쪽에서 인원충원으로 강력하게 해진 씨를 요구했어.

    듣지 않아도 뻔했다. 해진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두통을 느끼며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저를…… 요구했다고요?”

    - 응. 내일부터 키스틸 전무실로 출근해. 이런 경우가 어디 있느냐고 강력하게 항의해봤는데, 알잖아. 사실상 키스틸이 우리 회사 상부나 마찬가지고…….

    “하아…….”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회사 따위가 뭐가 중요하냐 하던 그의 말은 협박조를 떠나 아예 진심이었다. 해진은 다시 한 번 막막해졌다.

    소파 위에서 몸을 잔뜩 웅크렸다. 가지런하고 반들반들한 대리석 바닥에 형광등 불빛이 차게 반사되어 눈이 아렸다. 지나치게 넓은 거실이다. 혼자 있기에는 더더욱 말이다.

    인수합병 건은 언제나 머리를 아프게 만든다. 환은 장장 다섯 시간에 걸친 회의를 끝낸 뒤 녹초 상태로 사무실을 나섰다.

    “오피스텔로 모시겠습니다.”

    운전기사의 말에 환은 긍정의 의미로 말없이 있다가, 문득 무언가가 떠오른 듯 감고 있던 눈을 떴다.

    “……아니, 호텔로.”

    상관의 말에 기사는 알겠다는 한 마디만 하곤 운전대를 쥐었다. 환은 다시 눈을 감았다.

    도착했을 때 스위트룸 복도를 지키고 있는 덩치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보고를 해왔다.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서는 성에 차지 않는 성격이기에 환은 카드키로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은 온통 컴컴했다.

    ‘불도 켜지 않고…….’

    쯧, 혀를 차고 스위치를 눌렀다.

    거실을 지나 침실로 들어가자 침대 위에 웅크리고 누운 작은 인영이 보였다. 침실 불을 켜도 이불 안으로 동그랗게 솟은 형태는 움직일 줄을 몰랐다. 환은 괘씸했다. 나와서 재깍재깍 왔느냐고 인사도 하지 않고. 없는 사람 취급당한 게 몹시 불쾌했다.

    “잘 시간으로는 이르지 않습니까?”

    그래도 여전히 대답이 없기에 어깨를 쥐고 흔들었다. 그제야 해진이 우웅, 하는 소리를 내며 뒤척였다.

    “몇 시부터 잔 겁니까?”

    “몰라요…….”

    말하는 목소리가 어째 힘이 하나도 없다. 환은 덜컥 겁이 났다. 이러다 기껏 구한 오메가에게 탈이 나기라도 하면 안 되니.

    “어디 아프기라도 한 겁니까?”

    얼굴 절반까지 덮고 있는 이불을 억지로 끌어 내리고 이마를 손으로 짚었다. 열기가 후끈하게 느껴지긴 하는데, 잠 때문인지 몸이 안 좋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픈 건 아니에요. 그냥 우울하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웅얼거리는 목소리에는 여전히 힘이 하나도 없었다. 해진이 이불을 끌어당겼다.

    “손대지 마세요……. 저 내버려둬요…….”

    환은 다시 괘씸한 이불을 당기려다 허공에서 손을 멈췄다. 머릿속으로는 계산식이 빠르게 지나갔다. 몸이 아프지 않다니 뭐, 문제가 없기는 한데, 이렇게 시름시름 앓다가 몸까지 아파오면 그땐 좀 귀찮아지지 않을까.

    하지만 환은 우울한 사람의 우울감을 어떻게 해소시켜주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우울은 그와 거리가 먼 감정이었다. 분노하면 분노했지, 가라앉는 것은 그의 스타일이 결코 아니니. 게다가 이 오메가에게 전전긍긍하면서 봉사할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내일이 되면 괜찮아지겠지.’

    환은 이 보잘것없는 오메가를 보기 위해 시간을 낭비한 자신을 꾸짖으며 침실을 나섰다. 오피스텔로 가기에는 시간이 아깝지만, 그렇다고 불결하게 그와 한 침대를 쓸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는 일단 욕실로 향했다.

    그리고 그는 욕실에 들어가는 순간, 무언가 아주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아랫도리가 불룩하게 반응해 있던 것이었다.

    ‘빌어먹을…….’

    대체 왜 갑자기 몸뚱이가 반응한 것인지, 환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길이 없었다. 호텔에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멀쩡했다. 아니, 애초에 제 몸은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자주 반응하지 않았다. 그런 천박한 몸뚱이가 아니었다.

    환은 우뚝하게 솟은 제 성기를 내려다보며 난감함에 한참을 서 있었다. 결국 방법은 하나였다.

    ‘젠장, 젠장!’

    이가 바득바득 갈렸다. 자신이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사춘기 때에도 몇 번 해본 적이 없는 자위행위를, 더럽고 야만적인 인간들만 하는 짓을 어째서 자신이 해야 한단 말인가.

    자존심이 상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기운 좋게, 그 어느 때보다도 딱딱하게 선 것을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속으로는 욕을 수십 번도 더 퍼부었다. 이 모든 게 강해진의 탓 같았다. 제 몸이 이따위가 된 것도, 자신이 이런 짓을 하게 된 것도 모두 강해진 때문이다. 그렇게 생각하자 화가 솟구쳤다. 황당한 것은, 화가 솟구치는 만큼 흥분감도 함께 강해진다는 점이었다.

    “하아…….”

    심지어 신음까지 내뱉으며 환은 자신의 발기한 성기를 아래위로 빠르게 문질렀다. 머릿속으로는 침대에 누워 있던 강해진의 얼굴을, 그리고 아까 잠깐 스쳤던 그의 체취를 떠올렸다.

    ‘내가 미친 게 아니라, 저 오메가가 문제인 거다.’

    저딴 음란한 얼굴을 하고 남의 침대에 무방비하게 누워 있는 꼴이라니. 자신이 미친 게 아니라고 환은 몇 번이나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래 봤자 기분만 더 더러워졌지만.

    “후우, 하, 하아…….”

    환의 상상은 점점 더 음란해졌다. 이제는 아예 제 성기를 강해진의 입에 물리는 상상까지 했다. 목구멍 깊숙이 밀어 넣었다가 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건방진 오메가 놈. 히트사이클만 되면 내 좆을 달라며 헐떡거릴 테지.’

    그날이 오기만 하면 저 하찮은 오메가를 제 다리 사이에 두고 정신을 못 차리게 만들어줄 것이다. 이 수모를 모조리 갚아줄 것이다. 환은 어금니를 꽉 깨물고 집중하였으나 억울하게도 도통 감각이 치솟질 않았다.

    “크윽…….”

    너무 세게 문질러서 표피가 아플 정도인데, 사정감은 들지 않고 찝찝한 욕정만 그득해 배출될 기미가 도통 없었다. 그는 제 성기를 강해진에게 물리고 머리채를 잡은 채 거칠게 쑤셔 박는 상상을 했다. 그러자 조금 반응이 올 듯…….

    벽을 짚기 위해 몸을 옆으로 돌리던 그가 뚝 멈췄다. 샤워부스 밖, 막 문을 열고 욕실로 들어온 듯한 강해진이 멍한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이, 이…….”

    이환의 인생에 이런 수치심은 단 한 번도 느낀 적이 없었다. 평생 손에 꼽을 만큼 해본 자위행위를, 하필이면 이 같잖은 오메가에게 들키다니.

    붉으락푸르락해진 얼굴이 아주 우습게 일그러지는 것도 알지 못한 채, 환은 한 손으로 발기한 성기를 - 그의 성기는 놀랍게도 이 상황이 되어서도 건강함을 자랑하였다 - 움켜쥐고 다른 손으로는 해진을 손가락질했다.

    “당장 안 나가?!”

    멍하게 서 있던 강해진이 그제야 화들짝 놀라 한 걸음을 뛰듯이 뒤로 펄쩍 물렸다.

    “제, 제, 제가 왜요! 오줌 누러 왔단 말이에요!”

    당돌하게, 제법 똘망한 눈을 뜨고 그리 소리 지르는 강해진을 보자 참고 있던 무언가가 울컥, 치솟았다. 환은 성기를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거대한 살 몽둥이가 퉁, 하고 흔들리는 것에 해진의 시선이 주목되는 것은 개의치 않고 그대로 성큼성큼 걸어왔다.

    “말로 할 때 나가.”

    “싫어요! 오줌 누고 나갈 거예요!”

    씩씩거리며 변기 쪽으로 걸어가려던 해진은 옆으로 걸음을 떼자마자 중심을 잃고 몸을 휘청거렸다. 환이 반사적으로 그에게 손을 뻗었다.

    “이봐.”

    발기한 알몸인 것을 잊은 그가 해진을 안아 받치려 했고, 해진은 다급히 그에게서 거리를 벌렸다. 등 뒤에 욕조가 닿아 하마터면 또 넘어질 뻔했으나 이번에는 양손으로 욕조를 무사히 짚었다.

    “괜찮아요. 그냥 환이 씨 때문에 넘어질 뻔한 거예요.”

    시선을 이리저리 헤매며 강해진이 말했다. 와중에도 ‘환이 씨 때문에’라는 말에 힘을 또박또박 주었다.

    붉어진 강해진의 얼굴을 빤히 보던 환이 천천히 표정을 굳혔다.

    “……어이.”

    이 수치심을 어떻게 떨쳐내야 속이 시원할까. 이 보잘것없는 빵떡 같은 오메가를 앞에 두고 당한 수모를, 어떻게 갚아야 할까. 환의 눈매가 일순간 서늘해졌다.

    “그쪽이 책임져.”

    해진의 입이 딱 벌어졌다. 얼굴에 핏기가 가시듯, 홍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뭘 책임져요?”

    식은 얼굴로 해진이 물었다.

    “그쪽 탓이니 그쪽이 책임을 져야 하지 않겠나.”

    “뭐라고요?”

    해진의 황당한 눈길이 그의 알몸을 위에서 아래로 훑었다. 근육이 빼곡하게 들어찬, 조각도로 세심히 손질한 듯한 완벽한 몸 한가운데에 흉기 같은 것이 아직도 우뚝하게 서 있었다. 완벽한 몸에 어울리게 완벽한 조형을 자랑하는 성기였다. 와중에도 해진은 그의 성기 크기에 놀라고, 그 예쁜 모양새에 놀랐다. 제 것보다 훨씬 예쁜 것 같았다.

    그리고 흉흉하게 선 물건과 달리 이환의 얼굴은 멀쩡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멀쩡한 게 아니라 뭐랄까…….

    ‘완전히 맛이 갔잖아!’

    환이 또 한 걸음을 가까이 다가왔다. 바짝 곧추선 성기에 몸이 닿기라도 할까 봐 해진은 기겁하며 이번에는 옆으로 피했다. 이환이 몸을 틀었다. 형광등 아래 그의 눈빛이 사납고 차갑게 번뜩거렸다.

    “모두 너 때문이다.”

    해진은 더 참을 수 없었다. 이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발딱 세운 성기나 좀 치우고 말하든가!

    ‘뭐 이딴 미친 새끼가 다 있어! 이 변태 싸이코 바바리야!’

    소리를 질러야 했지만 해진은 그러지 않았다. 덩치 좋은 알파에게서 느껴지는 위압감 때문이 아니었다. 두려워서, 겁이 나서, 위협을 느껴서도 아니었다.

    그는 이 와중에도 아름답기까지 한 이환의 몸에 감탄하고 있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해진도 성인인 오메가로서 알파와의 뜨거운 밤을 상상해본 적이 없지 않았다. 게다가 몇 번이나 혼자 탐을 냈던 바로 그 이환의 몸이 눈앞에 있지 않은가. 심지어 거추장스레 벗길 것도 없이, 성적인 흥분을 명백하게 띤 채로 말이다.

    해진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곧추선 성기 쪽으로 자꾸 눈길이 갔다. 탐스러운 알파의 성기를 탐내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오메가의 본능이었다.

    더 다가오려는 환에게 손바닥을 내밀어 보이고, 그가 뭐라 말하기 전에 얼른 입을 열었다.

    “그, 계약! 계약상으로는! 지금 하면 안 되기는 하는데!”

    이환이 눈을 가늘게 떴다. 무슨 수작이냐는 얼굴이었다.

    “그건 너도 싫지 않다는 뜻인가? 잘됐군. 이걸로 합의는 끝났다.”

    이환의 손이 뻗어왔다.

    “아, 아니, 그건 맞는데, 자, 잠깐만요, 히트사이클과 러트 각각 한 번씩! 그리고 겹칠 때 한 번! 그때가 아닌…… 때에도, 조항을 추가해야 할……!”

    미처 말을 끝내기 전에 그가 해진의 손목을 붙들었다. 순식간에 코앞까지 얼굴이 들이닥쳤다.

    “오늘은 네 더러운 구멍에는 안 박을 테니 걱정 말고 입이나 다물어.”

    차게 식은 눈동자가 해진을 삼킬 듯했다. 구멍에는, 안, 박는다고? 해진의 의문은 금세 풀렸다.

    그가 해진의 바지 버클을 풀며 뒤를 돌게 했다. 이 스위트룸에는 적당한 잠옷이 없었고 가운을 입기는 싫었기에 해진은 여태 정장 차림이었다. 싸구려 정장이지만 나름 아껴 입은 옷이 욕실 바닥에 구겨져 나뒹굴었다.

    “잠깐…….”

    속옷도 함께 끌려 내려갔다. 양쪽 허벅지가 환의 손에 붙들렸다. 뒤이어 해진은 다리 사이를 침범하는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다. 맞붙은 허벅지 사이로 굵직하고 뜨끈한 살덩어리가 쑥, 밀려들었다.

    “흑!”

    구멍에는 안 박겠다더니 이런 짓을 할 줄은 생각도 못 했다. 해진은 사회생활에 있어 순진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성적인 면에 있어서는 문외한에 가까웠다. 물론 알파와 오메가가 어떻게 결합하고 어떤 식으로 서로에게 성적인 쾌락을 선사하는지 정도는 알았다. 그러나 이런 방식은…….

    “자, 잠깐, 만요.”

    욕조를 짚은 채 엉거주춤 엉덩이만 뒤로 뺀 자세가 부끄러워서 해진은 이 행위를 잠깐이라도 멈추고 싶었다. 수치스러웠다. 그에게 엉덩이를 드러내고 있어서가 아니었다. 제 페니스 역시 발기하고 구멍은 젖기 시작해서였다.

    알파의 몸에 오메가가 반응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므로 부끄러울 이유는 없었다. 그러나 해진은 이렇게 제대로 된 관계가 아닌데도 몸이 반응하는 것이 싫었다. 이 미친놈에게 홀딱 넘어가서 벌써 젖기 시작하는 아래가 수치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억지로 몸을 앞으로 빼려 했지만 그런다고 허벅지 사이로 묵직하게 자리 잡은 성기를 뺄 수는 없었다. 오히려 자극하듯이 문지르기만 하는 형국이 되었다. 바르작거리는 게 마음에 들지 않는지 그가 허벅지 붙든 손에 힘을 꽉 주었다. 아플 정도였다.

    “다치기 싫으면 얌전히 있어. 사람 돌아버리게 만들지 말고.”

    귓가에 닿는 목소리는 꼭 저를 삼키기라도 할 것 같았다. 익숙한 향이 코끝에 스쳤다. 위스키의 스모크 향. 그의 알파 향기. 러트가 아니니 독하지는 않았으나 흥분한 해진에게는 충분히 자극적이었다.

    다리 사이로 들어온 환의 성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의 살이 맞나 싶게 딱딱하고 뜨거웠다. 해진의 아래 역시 아까부터 젖어 있었다. 그의 성기가 구멍 위를 스칠 때마다 해진은 딱 미칠 것 같았다. 혼자 자취방에서 몰래 아래 구멍을 만지며 자위한 적이야 그도 있지만, 남의 살이 닿는 것은 또 완전히 달랐다.

    ‘너무…… 자극적이야…….’

    딱딱하고 뜨거운 성기 감촉이 여린 허벅지에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제대로 된 섹스도 아닌데 이렇게 감각이 드셀 줄은, 그리고 이렇게 기분이 좋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동시에 해진은 속상하기도 했다. 삽입은 아니지만 첫 관계를 이렇게 욕실에서, 갑작스럽게, 소변을 보러 왔다가 맺을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환에게 가지는 기대감은 이제 바닥을 치고 있지만, 침대에서 첫 관계를 가지는 정도야 바랄 수 있지 않을까.

    환은 해진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꽉 부여잡고는 앞뒤로 조금 더 빠르게 움직였다. 마찰열 때문인지 욕실 안이 더운지 땀이 나기 시작했다. 미끄러지는 살갗 사이로 습기가 차는 것이 이환의 몸에서 나온 선액인지, 혹은 제 몸에서 나온 애액인지도 구분이 가지 않았다. 무게감이 등에 실리는가 싶더니 귓가에 뜨거운 숨이 스쳐 해진은 움찔, 떨었다.

    “후우, 다리에 힘 좀 줘봐.”

    “주, 주고 있어요…….”

    실은 서 있기도 버거웠다. 금방이라도 앞으로 넘어질 것 같은데 그는 속도 모르고 허리를 더 빨리 치대기만 하니 해진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환의 입김이, 뜨거운 숨결이 귓가를 끝없이 간질였다.

    “하아, 하…….”

    허벅지 사이를 쉴 새 없이 오가는 살덩어리만도 충분히 자극적인데, 귓바퀴에 연신 닿는 뜨거운 숨은 더더욱 그를 무방비하게 만들었다. 해진은 꼭 그에게 갇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제 몸을 붙들고 있는 손 때문이 아니었다. 제 뒤에 바짝 붙은 뜨거운 알파의 몸이, 강건하고 완벽하기까지 한 그 몸이 저를 짓누르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위압적이었다.

    쑥, 쑤욱, 허벅지 사이로 그의 성기가 밀고 들어왔다가 다시 빠져나가는 것이 여실하게 느껴졌다. 이 성기가 언젠가 제 몸속에다 정액을 뿌릴 거라고 생각하자 머리털이 쭈뼛하게 섰다.

    “흣…….”

    결국 해진의 입에서도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는 욕조를 겨우 붙잡은 채 허리를 반쯤 숙이고, 젖은 엉덩이를 내밀며 할딱거렸다. 그의 성기가 제 구멍에 좀 더 스치길 바랐다. 조금 더 자극을 느끼고 싶었다.

    “후우, 어디서, 감히, 후. 너 따위가 감히.”

    환의 목소리가 귓가에 연신 뜨겁게 퍼졌으나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실 이 미친놈이 뭐라고 지껄이는지 이제 해진은 상관없었다.

    그는 제 구멍에서 애액이 흘러나와 그의 성기를 착실히 적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축축해진 성기는 해진의 허벅지 사이를 드나들며 그의 다리도 적셨다. 어마어마한 열기가 해진의 몸을 휘감았다.

    해진은 어느새 허리를 묘하게 뒤틀어가며 그의 성기가 제 구멍에 조금 더 기분 좋게 닿도록 몸을 비볐다. 흠뻑 젖은 아래로 딱딱한 요철이 스치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환의 성기가 워낙 묵직하게 굵은 터라 그의 구멍뿐만 아니라 회음을 스치고 고환까지 건드렸다.

    “하으, 하, 아아…….”

    삽입이 없는, 유사 성행위도 이 정도인데 진짜 섹스는 어떨까. 해진은 딱딱한 그의 귀두 끝이 제 구멍을 스치는 것을 느끼며 일부러 살짝 허리를 들었다.

    좀 더 적나라하게 벌어진 구멍에 이환의 귀두 끝이 들어갈 듯 들어가지 않을 듯 아슬아슬하게 미끌거렸다. 어찌나 흠뻑 젖었는지 움직일 때마다 찌꺽거리는 소리가 났다. 애액의 점성이 점점 더 짙어지는 것은 해진도 느낄 수 있었다.

    “흐응…….”

    그의 귀두 끝이 구멍을 쑤시고 들어올 듯 말 듯할 때마다 겁이 났지만 동시에 차라리 그가 구멍에 넣어줬으면 싶기도 했다.

    꼭 압박자위를 하듯이 허리를 슬그머니 움직이던 어느 순간, 해진의 시야가 훅, 뒤로 젖혀졌다. 머리채를 잡힌 것이었다.

    “히익……!”

    몹시 아팠다. 와중에도 멈춘 허리 움직임이 아쉬웠다. 환이 얼굴을 바짝 맞붙여왔다.

    “이게 지금, 멋대로 허리를 움직여?”

    화가 잔뜩 난, 참을성이 바닥난 목소리다. 해진은 숨을 들이마신 채로 굳었다. 사냥당하는 기분이었다.

    환은 그의 머리채를 움켜쥔 채로 사납게 허벅지 사이를 들쑤셨다. 젖은 아래로 감각이 온통 몰렸다. 환은 다른 손으로 아예 해진의 페니스를 움켜쥐었다.

    “히익, 잠, 깐!”

    누구 손에 성기를 쥐여준 적 없는 그였다. 수치심에 버둥거렸지만 그도 잠시였다. 환의 손은 해진의 손보다 훨씬 컸으며, 손아귀 힘도 몇 배는 강했다. 그의 손이 해진의 페니스를 아래위로 거칠게 쓸어내렸다. 발기한 페니스를 그에게 쥐여주고 있는 것이 말할 수 없이 창피한데도 해진은 몹시 흥분했다.

    “으응, 아, 아! 거기, 안, 돼, 흐윽!”

    환은 커다란 손으로 그의 발기한 페니스를 강하게 아래위로 쓸어내리면서 엄지로 귀두 끝을 문질렀다. 요도 입구를 압박하는 힘에 해진은 자신이 요의를 갖고 이 욕실로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기억해냈다. 이 지독한 분출감이 요의인지 사정감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으읏, 아, 아, 잠깐, 만요. 흐응, 나, 나올 것, 같!”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