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16)

“그러게 말입니다. 이렇게, 강해진 씨와 단둘이, 밀실에 갇히다니.”

허리만 조금 숙이면 얼굴이 닿을 정도로 거리가 가까웠다.

“마침 마감 시간인 데다 이곳은 VVIP 프라이빗룸이라 절대 직원이 먼저 문을 두드리지 않지요. 직원들이 퇴근하고 나면 바깥 출입문까지 잠기겠군요. 우리가 이곳에 있단 사실을 아무도 모른 채 말입니다.”

환은 눈을 그윽하게 내리깔고 강해진의 뒤쪽 벽을 한 손으로 짚었다.

“심지어 내일과 모레는 이 바의 휴일입니다. 지금 갇히면, 꼬박 사흘 동안 여기 있어야 한단 뜻이지요. 이 바의 오픈 시간은 오후 여덟 시이고 말입니다.”

VVIP 프라이빗룸에 들어간 고객을 직원들이 모를 리 없으며, 내일은 휴일이 아니고 네 시 반 오픈이지만 구태여 사실대로 말할 필요는 없을 터다. 강해진의 얼굴에 당혹감이 드러났으나 오히려 상체를 더 가까이 들이밀었다.

“요약해서 말하자면…… 우린 지금 아주 위험한 상태에 처했다고 봐야겠군요.”

강해진의 목울대가 아래위로 한 번 꿀꺽, 오르내렸다. 요리조리 굴리는 눈동자를 잡아다 제게 고정시키고 싶었다. 어딜 감히, 나를 앞에 두고 다른 곳을 보는 거지? 환은 갈증을 느끼며 그에게 조금 더 가까이 몸을 붙였다.

“어떻습니까? 저와 함께 이곳에 갇히게 되다니……. 정말 짜릿하고 흥분되는 일이 아닙니까?”

환은 제 얼굴과 몸이 어떤 평가를 받는지 아는 만큼, 제 목소리도 얼마나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들리는지 알았다. 대외 인터뷰를 대비해 몇 번이나 목소리를 녹음해서 들으며 발성 연습을 반복했으니까. 일부러 한껏 음색을 낮춰 말한 뒤, 끈적한 적막이 순리처럼 뒤따랐다. 음악마저 끊긴 이 좁은 방에 숨소리만 들리는 듯했다.

가만히 듣고만 있던 해진이 발개진 얼굴을 두 번 끄덕끄덕했다.

“네, 진짜로 흥분돼요.”

됐군. 환은 기쁘게 웃으며 다른 한쪽 팔도 뻗어 그의 어깨 위 벽을 짚으려 했다. 이제는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출구는 죄다 닫혀 있고, 반대쪽으로 난 창문은 열 수도 없는 강화 유리벽이다.

그런데 강해진이 그 발개진 얼굴을 하고 쏙, 그의 팔 아래로 몸을 숙여 빠져나가는 것이 아닌가.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이런 상황을 위해서! 늘 갖고 다니는 게 있어요!”

“……예?”

강해진은 잔뜩 흥분한 모습으로 가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콧구멍은 넓어지고 눈은 커다래져서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았다.

환은 당혹스러웠다. 이게 아닌데. 술이…… 덜 깬 건가?

“걱정 마세요! 제가 열 수 있어요!”

“……강해진 씨, 잠깐 진정하시고…….”

“찾았다!”

강해진이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고 코 평수를 더 크게 넓히며 다가왔다. 심지어 어깨를 들썩거리며 씩씩거리기까지 했다. 그의 손에는 다용도 나이프와 비슷한 것이 들려 있었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훨씬 크고 복잡해 보였지만 말이다.

“제가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항상 대비를 해왔거든요. 이럴 줄 알았어! 이런 사고가 저한테도 생길 줄 알았다고요!”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 지른 해진이 그를 손으로 밀쳤다. 어찌나 힘이 센지, 환은 저도 모르게 옆으로 넘어질 뻔했다.

강해진은 나이프인지 뭔지에서 이상한 기구를 척척 펼쳐 들더니 문손잡이를 꼼꼼하게 살폈다.

“레버형이네요. 아마 이 안쪽에 잠금쇠가 있을 거예요. 여기를 열려면 래치를 빼야 해요.”

무슨 말인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그가 지금 이 문을 열 수도 있단 불안감이 파뜩 들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이 빌어먹을 오메가가 쓸데없는 짓을 하지 못하도록 묶기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환은 넥타이를 손으로 늘리며 다른 손으로는 앞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쓸어 넘겼다. 동그란 머리통을 요리조리 움직이며 헛짓을 계획하는 강해진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해진 씨,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취하셨으니 일단 저한테 편히 기대셔서 휴식을…….”

“아 좀, 기다려봐요!”

……심지어 짜증까지 내다니. 환은 너무 황당해서 할 말을 잃어버렸다. 그냥 확 머리채를 잡고 옷을 찢어버릴까 하는 생각까지 드는 것이었다. 정작 강해진은 자신이 화를 낸 줄도 모르는 듯이 다시 문손잡이를 살피는 데에 집중했다. 이제는 아예 기구로 들쑤시기 시작한다. 환은 마지막 남은 인내심을 끌어내어 입을 열었다.

“그러다 다치실까 겁이 납니다. 그냥 제 곁에서 좀 기다려보시는 게 어떨까요.”

“이런 기회가 왔는데 그냥 날릴 수는 없어요! 남의 손에 고장 난 문을 직접 딸 기회가 얼마나 있겠어요? 게다가 이런 위험한 상황에서요!”

다시 한숨이 났다. 환은 포기하고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그렇습니까…….”

“네. 여기 레버만 풀면 바로 고칠 수 있으니까 조금만 기다려보세요.”

씩씩하게, 정말 흥분한 듯한, 술이 다 깬 듯이 보이는 해진은 정말로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문짝을 뜯어내려 하고 있었다. 환은 테이블 위 남은 와인을 병째로 들고 벌컥벌컥 마셨다.

“그런데 해진 씨는 어떻게 그런 것까지 다 아십니까?”

뭐 어디 풀숲 같은 데서 식물즙 짜는 법이나 아는 것 아니었나. 문 따는 법까지 아는 줄 알았으면 이딴 짓은 하지 않았지.

“저는 언제나 위험에 대비하거든요. 그게 바로 탐험가의 자세예요.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상태에서 늘 긴장하면서 살아야 해요.”

“그렇습니까…….”

한숨이 나왔다. 이 녀석이 정말로 문을 딸까. 아무리 잡지식이 많다 해도 문을 딸 정도는 아니지 않을까. 대충 하다 포기하겠지, 생각하면서도 환은 그의 만능 칼인지 무엇인지가 문손잡이를 뜯어내는 것을 불안하게 바라봤다.

“조금만 기다려요. 래치가 걸렸네요. 이것만 고치면 해결돼요!”

“뭐라고요?”

환이 황망하게 물었다. 강해진은 이미 반 이상 뜯어낸 문손잡이를 멋지게 고치고 있었다. 그럼 아이를 만든다는 계획은 이번에도 실패군.

“정말 고칠 수 있단 말입니까?”

“다 고쳤어요!”

자포자기한 투로 묻자 곧바로 대답이 날아왔다. 강해진은 자랑스럽다는 투로 문을 활짝 열어 보였고, 환은 한숨을 삼키고 미소 지었다.

“제가 환이 씨를 구해드렸어요!”

뿌듯하단 투로 말한 강해진은 칭찬을 바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 퍽이나 자랑스럽겠군. 환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제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정말 흥분되는 시간이었어요.”

헤헤, 소리 내서 웃은 강해진은 그의 팔에 들러붙어 팔짱을 꼈다. 환은 뿌리칠 힘도 없어서 그냥 그가 매달리도록 내버려두었다. 바깥에서 지나가던 직원들이 부서진 문과 예정보다 지나치게 일찍 나온 그를 보고 당황한 표정을 지었고, 환은 괜히 애꿎은 직원들만 노려보았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매너는 지켜야겠기에 환은 모든 것을 포기한 심정으로 해진을 집까지 데려다주었다. 물론 운전은 박 비서를 시켰다.

하필 그날따라 야경이 유독 보기에 괜찮았다. 환은 팔꿈치를 차 문에 기댄 채로 스쳐 지나가는 가로등과 사람들을 구경했다. 그러다 문득 어두운 곳에 들어섰을 때, 창문에 이쪽을 보는 해진의 얼굴이 비쳤고 눈이 마주쳤다.

환이 고개를 돌리자 해진은 화들짝 놀라며 시선을 피했다. 차 안이 어둑했지만 그의 얼굴이 달아오른 것이 확연히 눈에 띄었다.

‘왜 시선을 피하지? 내가 꼴도 보기 싫다는 건가?’

건방진 강해진이 제 시선을 피하니 불쾌할 만도 한데, 이상하게도 환은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오히려 뭐랄까…….

환은 입을 가리며 헛기침을 했다. 한참 전에 마신 와인이 뒤늦게 올라오는지 얼굴이 뜨거웠다.

이상하게도 그날따라 강해진의 집으로 가는 길이 짧았다. 박 비서는 쓸데없이 운전을 빨리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원룸 근처에 도착했다. 먼저 내려서 차 문을 열어주고,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려는데 문득 강해진이 손목을 잡아끌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행위였기에 환은 그대로 끌려갔다.

쪽, 소리가 먼저 들렸고 그다음으로 볼에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환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는 예상치 못한 것을 싫어했다. 제 계산에서 벗어나는 것은 언제나 질색이었다. 그래서 환은 강해진이 싫었다. 언제나 제 예상과 다르게 구니까. 조금 파악했다 싶으면 다시 색다른 모습을 보여서 저를 당황케 만드니까.

“환이 씨, 오늘 정말 즐거웠어요.”

어둡고 지저분한, 아주 불결한 골목에 서서 저를 보는 강해진은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동그란 눈을 순하게 휘어 웃는 모습이 멍청해 보였다.

환은 온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을 느끼며 간신히 입꼬리를 틀어 올렸다. 표정 관리가 되질 않았다.

“……저도 즐거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강해진은 바보처럼 “헤헤.” 소리 내서 웃고는 돌아서서 건물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는 그 자리에 한참 서서 건물을 올려다보며 기다렸다. 창문으로 불이 켜진 걸 확인하고서야 다시 차에 올랐다.

오피스텔로 돌아가는 내내 환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술을 너무 많이 마신 탓이었다. 그리고 강해진의 돌발행동 탓이었다. 감히 내게 입술을 들이대다니. 그것도 방금 전까지 와인을 마신 입술을 말이다.

‘불결하기 짝이 없군……!’

하지만 귀찮았기에 구태여 뺨을 닦지는 않았다. 괜히 뒤를 한 번 돌아보았지만 강해진이 사는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세큐리티 업체는, 어떻습니까?”

“일전에 말씀하신 대로 베타 요원들만 배치해 뒀습니다. 강해진 씨가 불편해하지 않도록 조용히 감시…… 아니, 근무하고 있고요.”

저 멍청한 밀가루떡 놈이 무슨 사고를 칠지, 발정 난 몸으로 어디를 싸돌아다닐지 모르니 세큐리티 업체를 통해 몰래 지켜보라고 일러두었다. 다행히도 강해진은 굉장히 재미없는 인생을 살고 있었기에 위험한 곳은 딱히 드나들지 않는 듯했다. 그래도 모를 일이다.

“특별한 일이 생기면 곧바로 제게 연락하십시오.”

박 비서는 대답 않고 대신 백미러를 통해 환을 흘끔 바라봤다.

“왜, 뭐요?”

“……아닙니다.”

어쩐지 그가 웃는 것 같았지만 강해진을 신경 쓰는 것만으로도 피곤했기에 환은 잔소리 않고 좌석에 몸을 묻었다.

* * *

환은 언제나 자신이 이성적이고 냉철한 자라고 믿어왔다.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는 생식에 문제가 없는 건강한 알파였고 따라서 러트는 주기적으로 왔지만, 그때마다 큰 변화는 없었다. 냉철함을 유지하는 데에 큰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왜 몸 상태가 이런지 환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젠장…….’

욕을 씹어 삼키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현기증에 휘청거렸다. 이렇게 지독한 러트는 처음이었다. 여태껏 증상이 와도 미미하게 열감만 느껴질 뿐이었지, 이렇도록 고열을 동반한 적은 없었다. 고열만 있다면 다행일 터다. 지금 그는 지독한 성적 흥분까지도 함께 느끼고 있었다.

‘대체 내 몸이 왜 이런 거지?’

자신의 몸을 컨트롤하지 못하다니. 그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일이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육체를 마음대로 다루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더 환장할 노릇은, 몸이 오메가인 강해진을 찾고 있다는 점이었다.

여태까지 누군가를 이렇게 원한 적도 처음이었다. 그것이 마음이든, 육체이든.

병원에 가면 억제제를 처방해 주겠지만, 몸을 컨트롤하지 못해 약의 도움을 받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어떻게든 버텨볼 요량이었다. 평소의 이환이라면 결코 하지 않을 비이성적인 판단이었다. 그 역시 강한 러트의 부작용이었으나, 그조차 알지 못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컵을 꺼내 물을 따르려는데, 손이 떨려 놓치고 말았다. 유리잔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이 조각났지만 여전히 머릿속이 흐렸다.

박 비서에게 연락해 몸이 좋지 않아 출근하기 힘들다고 말해두었다. 그리고 환은 저도 모르게 강해진의 전화번호를 휴대폰에서 찾았다.

이렇게 비이성적인 상태를 하고 오메가에게 연락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그 역시 알았다. 그러나 이미 손은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통화연결음이 세 번 울리는 동안 인내심이 바닥났다. 욕이 튀어나왔다. 빌어먹을 놈 같으니. 뭐가 그렇게 귀한 몸이라고 내 전화가 세 번이나 울릴 동안 안 받는 거지?

- 여보세요, 전무님?

마침내 강해진이 전화를 받았다. 속삭이듯 자그마한 목소리였다. 환은 조급함을 억누르며 욕실로 걸어갔다.

“해진 씨, 후우, 접니다. 지금 좀 만나야겠습니다.”

- 네? 지금요?

“예. 지금 당장 말입니다.”

- 무슨 일 있으세요? 괜찮으세요?

만나자면 만날 것이지 조그만 놈이 하여튼 말은 쓸데없이 많다. 환은 욕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확인했다. 눈가는 퀭하고 입술은 말라붙어 있었다. 고작 하루 만에 얼굴 꼴이 말이 아니었다.

“별일은 없습니다. 다만 만나야겠습니다.”

강해진 씨가 필요합니다. 제 몸에 필요합니다. 러트 온 씨를 받아줄 당신 포궁이 필요합니다. 라는 말은 차마 하지 못하고 헝클어진 머리칼만 신경질적으로 쓸어 올렸다.

- 아프신 건 아니죠?

“아닙니다.”

정말로 귀찮은 오메가군. 환은 휴대폰을 내던지고 싶은 것을 참느라 손에 힘을 잔뜩 주었다. 숨이 몹시 찼다.

“해진 씨, 하아, 지금…….”

- 제가 일하는 중이라서……. 조금 이따 연락드릴게요. 죄송해요!

곤란한 어투로 말을 다다다 뱉어내더니 돌연 전화가 뚝 끊겼다. 환은 황당함에 말도 하지 못한 채 입만 뻐끔거렸다. 한참 지나서야 휴대폰을 세면대 옆에 내려두고는 수도꼭지를 틀었다. 강해진이 선물한 휴대폰 케이스의 강아지들이 저를 비웃는 듯했다.

“빌어먹을 놈이, 후우, 감히 내 전화를 먼저 끊고…….”

고작해야 제 아이를 낳는 것 말고는 쓸모도 없을 조그마한 놈이, 감히 제 전화를 먼저 끊었다는 데에 분노가 치솟았다.

‘당장 해결해야겠어. 이대로 계속 이놈에게 휘둘릴 순 없다.’

이미 시간을 너무 많이 끌었다. 그는 본래도 인내심이 그리 많은 성격은 아니었다. 본래 성질대로라면 지금쯤 벌써 강해진을 임신시키고도 남았어야 했다.

생각해보면 제 성격으로 여태까지 비위 좋게 강해진에게 맞춰준 것만으로도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러나 그보다 더 황당한 것은 이렇게까지 누군가를 원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환은 정말로 그가 필요했다. 그것도 지금 당장.

* * *

해진은 오늘도 바쁘게 하루를 보냈다. 특별히 자기 기획서를 브리핑하기도 했다. 반응은 뜨거웠다. 칭찬도 잔뜩 받았다. 팀장은 해진을 보고 ‘그냥 네가 팀장 하라’는 농담까지 했다. 기분이 좋아진 해진은 팀원들에게 커피를 한 잔씩 돌렸다.

오후가 되었을 때, 졸음도 깰 겸 잠깐 쉬려고 복도로 나온 해진은 기겁하고야 말았다. 이환 전무가 복도 한가운데에 떡하니 서 있는 게 아닌가.

“어? 환이 씨?”

환은 평소처럼 멀끔한 모습이 아니었다. 머리칼은 빗어 넘기다 말아서 흐트러져 있고, 넥타이도 없이 입은 와이셔츠는 구겨져 있었으며 안색도 파리했다.

“세상에. 얼굴이 왜 이래요? 괜찮아요?”

“……전화를 안 받으셔서 왔습니다.”

다가서려던 해진은 반사적으로 멈칫했다. 코를 찌르는 위스키 향 때문이었다.

‘알파 향이…….’

러트 기간이구나. 환의 체취는 평소보다 훨씬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숨 쉬는 것만으로도 독한 술을 마신 것처럼 아찔했다.

“잠깐 이야기를 하고 싶어 왔습니다.”

“무슨 이야기요? 그런데 정말 괜찮으세요?”

늘 당당하고 멋있던 이환 전무였다. 그런데 그는 지금 해진의 앞에서 살짝 달아오른 데다 엄청 퀭한 얼굴을 하고, 곤란해 보이는 표정을 지은 채로 서 있었다. 러트가 이렇게까지 사람을 다르게 보이게 하다니. 해진은 놀라기까지 했다.

“대체 제 전화는 왜 끊으신 겁니까.”

“그야 일하는 중이어서…….”

변명하는데, 순간 환의 갈색 눈이 사나운 기색을 띠었다. 그가 그런 표정을 짓는 것을 해진은 처음 보았다. 제게 화가 난 것 같지는 않은데, 뭐랄까, 아주 조급해 보였다. 심지어 숨까지 거칠게 몰아쉬고 있지 않은가.

러트란 곧 알파의 몸이 성적으로 흥분하는 시기이고, 그때 알파들이 인내심을 잃기도 한단 사실이야 당연히 해진도 알았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해진은 별생각 없이 그를 바라보다가 왼쪽 허벅지쯤을 보고 화들짝 시선을 떼었다. 잠깐 스치듯이 보았지만, 지나치게 커서 어색할 정도였지만, 분명 성기가 발기해 있었다. 세상에, 저게 뭐람. 저 모습을 하고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

“해진 씨.”

정작 환은 자신의 발기한 성기 따위는 신경도 쓰지 않는 듯이 한 걸음 더 다가왔다. 해진은 주변을 살폈다. 그를 저 상태로 복도에 세워둘 순 없었다.

시선을 어디로 둬야 할지 몰라 주변을 살피는 척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청소 도구들이 있는 창고 쪽으로 그를 이끌었다.

“이, 일단 따라오세요.”

창고 문을 열고 들어간 해진은 불을 켜고 문을 잠갔다. 좁은 공간에 그의 알파 향이 가득 찼다. 괜히 데리고 들어왔나, 잠깐 후회했지만 여기 말곤 눈을 피할 마땅한 곳이 없었다. 불뚝하게 선 성기의 윤곽이 어찌나 큰지 눈을 옆으로 돌려도 자꾸 보였다.

“저, 환이 씨, 환이 씨가 제 애인이고, 저한테 중요한 사람인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일하는데 갑자기 찾아오시면 제가 곤란해요. 아무리 환이 씨가 제 상사나 비슷한 위치이시긴 하지만…….”

“강해진 씨.”

환이 진지한 얼굴을 하고 그에게 바짝 다가왔다. 가뜩이나 좁은데 몸이 거의 맞닿을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이 몹시 사나웠다. 늘 친절하기만 하던 이환이 아니었다. 해진은 그가 자신을 해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특히나 저…… 저 살짝 맛이 간 눈빛을 보면 말이다.

‘눈이 이상해……!’

마른침을 꾹 삼키고 양손을 들어 보였다.

“저, 환이 씨, 제가 보기엔 환이 씨가 지금 좀, 아니, 아주 많이 흥분하신 것 같아요. 일단 제가 러트 약을 사 올 테니까…….”

환이 그의 손목을 쥐었다. 화들짝 놀라서 손을 빼내려 했지만 그의 힘이 너무 셌다. 아무리 봐도 이 눈동자는 진짜 맛이 간 눈동자였다. 이대로 있다간 무슨 일이라도…….

“제 아이를 낳아주십시오.”

환의 말과 함께 적막이 갑작스레 들어찼다. 해진은 그가 내뱉은 말을 곱씹느라 눈을 두 번 크게 깜박거렸다.

“제 정자로 해진 씨의 몸에 아이를 만들고 싶습니다. 부탁드립니다. 아니, 이건 명령입니다.”

해진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람? 정자로 뭐? 와중에도 그의 눈빛은 지독히도 짙었다.

‘러트 때문에 그런 거야. 진심이 아니실 거야.’

민망함을 억누르며 다른 손으로 그의 어깨를 꾹 밀어냈다. 그래도 환의 몸은 밀릴 기미조차 없었다. 오히려 더 가까이 밀고 다가왔다.

“환이 씨, 일단 차근차근 이야기를 해요.”

“지금 당장, 해진 씨의 몸에 제 정자를 넣어야겠습니다.”

보통 다른 알파들도 성적으로 끌린단 말을 이런 식으로 하나? 해진은 혼란스러웠다. 환은 막무가내였다. 이제는 아예 손을 제 와이셔츠 안으로 밀어 넣으려 했다.

“자, 잠깐만요!”

“거부하지 마십시오.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참았는지 아십니까?”

거친 숨결이 해진의 귓가를 자극했다. 환이 그의 몸을 상체로 짓누르고 씹어 삼킬 듯이 목을 애무했다.

“자, 잠깐, 환이 씨……!”

그가 돌연 해진의 턱을 쥐었다. 코끝이 맞닿았다. 화난 맹수 같은 눈동자가 눈앞에서 번뜩거렸다. 그야말로 인내심이 완전히 바닥난 짐승 같았다.

“어디 한 군데 부러지고 싶지 않으면 닥치고 가만히 있어.”

방금 뭐라고……? 해진은 제 귀를 의심했다. 환이 자신을 협박했다니, 듣고도 믿기질 않았다. 하지만 턱을 쥐고 있는 손힘과 사나운 눈빛에서 매너나 다정함이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가 다시 해진의 목덜미를 탐했고, 해진은 애무에 머리털이 쭈뼛 서는 것을 느끼며 옆으로 손을 뻗어 더듬었다. 아무것이나 집히는 대로 쥐고 있는 힘껏 휘둘렀다.

퍽! 소리와 함께 환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해진은 방금 그를 후려친 빗자루를 양손으로 고쳐 쥐었다.

“정신 차리세요! 저랑 아이를 만들고 싶으시다면 최소한의 예의와 순서를 지키시란 말이에요. 이건 성폭력이에요. 범죄라고요!”

“범죄?”

환이 엄지로 입가를 쓸었다. 늘 단정하던 머리칼은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고, 방금 해진에게 맞은 탓에 입가가 벌겠다. 입술에 피까지 맺힌 것을 보자 해진은 눈곱만큼 미안해졌다. 하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범죄죠! 제 동의도 없이 힘을 이용해서 몸을 맞대고! 애무하고! 그 매너 좋던 환이 씨가 갑자기 제게 성폭력을 행사하시다니, 정말 실망이네요!”

“지금 실망이라고 했나?”

환이 비죽이 웃었다. 허, 하고 헛웃음을 흘리는 옆모습에 해진은 아주 조금 움찔했다. 하지만 빗자루를 더 꽉 움켜쥐었다.

“그래요! 실망이에요! 하다못해 우린 뽀뽀도 안 했는데! 어? 물론 제가 부끄러워서 피한 건 있지만! 여하튼! 러트가 그렇게 심하면 집에서 요양을 하셔야죠!”

우렁차게 또박또박 소리 질렀지만 환은 전혀 주눅이 들지 않았다. 다시 저를 향한 눈빛이 아까보다 한층 더 사나워서, 해진은 저도 모르게 얼어붙었다.

“순서라.”

커다란 손이 해진의 뒷덜미를 붙들었다.

“그렇게 순서를 챙기고 싶다면 순서대로 해주지.”

그리고 환의 입술이 그의 입술에 맞닿았다.

해진은 숨을 멈췄다. 입술을 파고드는 혀의 감촉이 낯설었다. 입속으로 파고든 혀가 치열을 훑었다. 사나운 동작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혀가 환의 날카로운 송곳니에 스치고 피 맛이 돌았다.

겨우 환을 밀친 해진은 들고 있던 빗자루로 다시 그를 후려쳤다. 그도 모자라 곧바로 뒤이어서 복부를 손잡이로 콱! 찔렀다.

“컥……!”

환의 허리가 훅 꺾였다. 그는 배와 허리를 짚은 채로 고통스럽게 숨을 몰아쉬다가 고개를 들고 해진을 노려보았다. 방금 자신이 해진에게서 얻어맞았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는 눈치였다.

“정신 좀 차리라고요!”

해진이 소리를 빽 질렀다. 환은 몸을 세우고 헝클어진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완전히 맛이 가 있던 눈동자가 이제야 좀 제정신을 찾았다. 그러나 어마어마한 분노가 묻어났다.

“지금 날 때린 건가?”

짜증 섞인 물음에 해진은 다시 화가 났다. 동의도 없이 덮치려고 한 게 누군데. 심지어 여기는 회사라고! 빗자루를 있는 힘껏 휘두르자 환이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래! 때렸다, 왜! 저 만나고 싶으면 정신 좀 차리고 오세요!”

환이 뭐라고 더 말하기 전에 해진은 얼른 문을 열고 나갔다. 그리고 냅다 사무실로 달렸다. 설마 일하는 책상까지 따라오진 않겠지.

“해진 씨? 무슨 일 있어?”

팀장이 물었지만 해진은 뭐라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유리벽 너머만 흘끔흘끔 보며 혹시라도 환이 쳐들어오지 않을까 눈치만 봤다.

다행히도 그날 퇴근하기 전까지 환이 다시 모습을 보이는 일은 없었다. 그날만은 말이다.

* * *

동의 없는 스킨십에 화가 나기도 했지만, 해진은 솔직히 그가 좀 걱정되었다. 물론 오메가의 히트사이클이 가져오는 고통보다야 러트가 좀 덜하다고는 하지만 어제 봤던 환은 정말 제정신이 아닌 것처럼 보였다.

‘많이 아프신 걸까…….’

심지어 그때 이후로 연락도 한 번 없었다. 창피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 매너 좋은 환이 씨가 도대체 왜 그렇게 변했을까? 아무리 러트라곤 하지만, 그것만이 문제가 아닌 것 같았어.’

그는 조심스레 휴대폰으로 ‘러트 증상’을 검색해보았다. 그러자 여러 가지 러트 증상이 검색 결과로 나왔다. 그중에는 ‘경미한 착란 증세’도 있었다. 알파 중에서 무려 1퍼센트나 이 증상을 느낀다고 하니 꽤 큰 비율이었다.

해진은 사실, 조금 상처받았다. 언제나 매너 좋고 다정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던 그렇게 돌변해서 제게 덤벼들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놀란 마음은 그대로 충격과 상처가 되었다.

“휴우…….”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서 다음 날, 해진은 퇴근하자마자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찾아가는 데에는 아주 큰 용기가 필요했다. 전날 그가 제게 덤벼들던 것이 떠올라서였다. 하지만 그가 괜찮은지 확인해야 했다.

정작 문을 두드렸을 때, 이환은 화가 난 듯한 얼굴로 그를 맞이했다.

“뭡니까?”

‘안녕하세요.’도 아니고 ‘웬일이십니까?’도 아니고 ‘뭡니까?’라니. 해진은 하도 황당해서 하마터면 또 한 대 그를 칠 뻔했다.

“이야기 좀 해요.”

화를 억누르며 말하자 환이 들어오란 투로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환의 집에는 온통 위스키 향이 꽉 차 있었다. 어찌나 독한지 숨쉬기도 힘들 정도였다. 해진은 그 자극적인 향에 코를 살짝 가리며 안으로 들어갔다.

환은 그에게 차를 권하거나 앉으라는 말도 하지 않았다. 해진은 속이 상했지만, 그의 모습이 하도 엉망이어서 원망할 수도 없었다. 말끔하고 빈틈없던 평소 모습은 어디 가고, 머리칼은 다 헝클어졌으며 눈 밑이 시커멨다.

조심스레 소파 끝에 엉덩이를 대고 앉은 해진은 서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환은 표정을 굳히고 있지만, 그답지 않게 불안해 보였다.

“환이 씨가 어제 말씀하신 것 말이에요, 아이를 낳자는 이야기요.”

어렵사리 입을 열었으나 환은 선 채로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조금 무서웠지만, 해진은 용기를 내었다. 어제처럼 또 덤벼들면 주먹으로 때리지 뭐.

“물론 진심이 아니신 걸 알아요. 환이 씨가 그런 말을 하실 분이 아니란 사실도 알고요. 하지만 저는 아직 환이 씨와 관계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진심입니다.”

끼어든 환의 목소리에 해진이 고개를 들었다. 환이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릎 위에 얹은 두 손이 거칠어 보였다.

“실망시켜 드려 죄송하지만, 그건 제 진심입니다. 저번에 처음 이야기를 꺼냈을 때도, 어제도.”

긴장감 때문인지 입이 말라왔다. 지금 이 남자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람.

“저는 해진 씨와 아이를 만들고 싶습니다. 아니, 해진 씨가 낳을 제 아이가 필요합니다.”

아직 제정신이 아닌 걸까? 그리 생각하기에는 환의 표정이 하도 올곧았다.

“하지만…….”

“그러니 이제 더 미루지 말고 할 일을 합시다.”

할 일이라면 그렇고 그런 걸 뜻하는 건가? 해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 역시 이환과 이런저런 스킨십을 해보고 싶기는 했다. 하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아이라니, 임신이라니! 달콤하고 꿈결 같은 첫날밤을 꿈꿨는데.

“저랑 사랑을 나누고 싶으신 거예요, 아이를 만들고 싶으신 거예요?”

조심스레 물었다. 그가 차라리 대답하지 않길 바랐다. 그러면 멋대로 생각할 수라도 있으니까.

“……그 두 가지의 차이점은 무엇이지요?”

그러나 환은 퀭한 눈에 의문을 담고 되물었다. 기가 찼다. 몸에 힘이 빠지고 머릿속이 하얘지는 것 같았다. 이것도 러트 때문인가?

“혹시…… 아이를 만들려고 저랑 만난 거예요?”

“말이 빨리 통해서 좋군요.”

“환이 씨…….”

어안이 벙벙했다. 제 앞에 앉은 남자가 정말 이환인지도 알 수 없었다. 이환이 튼 입술을 혀로 핥고는 조급함이 묻어나는 투로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지금 저는 러트 중이며, 강해진 씨가 눈앞에 있는 것만으로도 아주 큰 자극이 됩니다. 솔직히 참기가 힘들군요.”

‘큰 자극’이라는 말에 해진은 저도 모르게 이환의 다리 사이를 슬쩍 보았다. 허벅지 한쪽이 어마어마하게 불룩했다. 도저히 못 본 척을 할 수 없는 크기지만 슬그머니 시선을 돌렸다.

“그러니 선택을 하십시오. 저와 이 자리에서 아이를 만들 것인지, 다음 기회에 하실 것인지.”

“제가 준비되면, 아니, 제가 원할 때 진도를 나간다는 선택지는 없나요?”

환은 대답하지 않았고, 외려 무슨 말이냐는 투로 빤히 마주 보았다. 해진은 어이가 없어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가신다는 뜻입니까? 알겠습니다. 다음으로 미루죠.”

심지어 한술 더 뜬다. 어제처럼 환이 제게 덤벼들까 봐 가방을 가슴 앞으로 가리고 문 쪽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정작 환은 덤덤하게, 그러나 며칠 사이에 피폐해진 얼굴로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는 듯이 척척 다가와 문을 열어주었다.

“아무래도 우리, 환이 씨의 러트가 끝난 뒤에 만나는 것이 좋겠네요.”

그래, 다 러트 때문이다. 해진은 그리 생각하며 문을 나섰다. 밖으로 두 발을 내딛자마자 쾅, 하고 등 뒤에서 문이 닫혔다. 상처 입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다스렸다.

* * *

환의 러트는 일주일가량 지난 뒤 끝났다. 해진은 주말에 혼자 집에서 여행 에세이를 읽다가 그의 전화를 받았다.

- 해진 씨, 만나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습니다.

군더더기 없는, 배우처럼 멋진 목소리. 해진은 그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벌써 상처가 나은 것만 같았다.

해진은 그가 제게 사과하리라고 생각했다. 무례하게 추행하고 아이를 낳아달라는 헛소리를 한 데 대해서 말이다. 그래서 데이트 요청을 받아들였다. 진지하게 사과한다면 용서할 의향이 충분히 있었다.

다시 만난 날에 환은 아주 멋진 모습을 하고, 거대한 꽃다발까지 들고 왔다. 해진은 자기 상체만 한 꽃다발을 받으며 무척 감동했다.

“너무 예뻐요! 베고니아는 먹을 수도 있어서 조난 상황에 아주 유용한 꽃이에요! 피로도 회복시켜 주고, 염증에도 좋거든요.”

커다란 베고니아꽃에 코를 파묻은 해진이 신이 나서 말했다. 환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가 이전처럼 너무나 근사했기에 해진은 안심했다.

“저, 일전에는 제가 조금 성급했습니다. 해진 씨와 좀 더 이야기를 나누었어야 하는데 말입니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정중했다.

“아니에요. 그냥 러트가 너무 심하셔서 그런 건데요, 뭐. 다음부터 조심해주세요.”

물론 두 번 이상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절대 용서하지 않겠지만 말이다. 환이 뿌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아이를 낳아주시는 대신, 해진 씨께 적절한 보상을 드리고자 합니다.”

뒤이은 말에 해진은 굳고야 말았다.

“……네……?”

“원하시는 게 있으시거든 편히 말씀하십시오. 최대한 맞춰드리죠.”

마음이 쿡쿡 아렸다. 제게 이렇게 대하는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사람 많은 카페에서 눈물이 나려는 것을 꾹 참고 행여 자신이 모르는 뭔가가 있을까, 환의 표정을 살폈다. 그러나 그는 평소보다 오히려 더 다정해 보였다. 그래서 해진은 더 상처를 받았다. 왜, 평소와 같은 얼굴로 그런 말을 하는 거야. 여태까지 다정했던 것도 다 가짜였을까?

“도대체 환이 씨는 우리가 무슨 관계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울음을 참고 묻자 이환은 당황한 듯이 미간을 구겼다.

“그야, 저와 강해진 씨는 아주 친밀한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환이 그에게 손을 뻗었다. 손목을 붙든 그가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달래는 듯한 얼굴이었다.

“해진 씨는 절차를 중요하게 생각하시니, 원하신다면 혼인 신고부터 진행하는 것도 상관없습니다. 편하신 대로 모두 맞춰드리죠. 아이만 낳아주십시오.”

항상 순하고 착하다는 평가만 듣고 살아온 해진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도저히 분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손목을 거세게 뿌리치고 일어섰다. 이환의 당황한 눈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니 새끼는 너 혼자 낳아라, 이 미친놈아!”

들고 있던 베고니아 꽃다발을 잘난 면상에 던져주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꽂히는 것을 무시하고 그대로 돌아서서 나갔다.

건물 밖으로 나간 그는 씩씩거리며 거리를 빠져나갔다. 가뜩이나 날도 더운데, 버스 정류장까지는 한참을 걸어야 했다.

한참을 걷던 그는 뒤를 돌아보았다. 카페 건물이 작게 보였지만 여전히 이환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제가 오래 걸으면 숨이 차고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이환 역시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태워준다는 말 한 마디도 않았다. 떠올려보니 오늘 그가 제게 한 말 중에는 사과 비슷한 것도 없었다. 애초에 사과를 하려고 부른 게 아니라는 뜻이었다.

“……잡지도 않냐…….”

설움이 뒤늦게 밀려들었다. 참으려 해도 눈물이 자꾸 났다. 흐릿해지는 눈가를 주먹으로 연신 훔쳤다.

“나쁜 새끼.”

결론은 그것이었다. 이환은 사실 나쁜 새끼였다. 섹스 때문에 저를 만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바보 같은 제 잘못이 제일 컸다.

멍청한 강해진 같으니라고. 해진은 스스로를 꾸짖고 또 꾸짖었다. 그럴수록 마음의 상처는 더 커졌다.

17퍼센트

카페에서 개소리를 듣고 뛰쳐나온 그날과 그 이튿날에 연달아 환에게서 연락이 왔지만 해진은 일방적으로 받지 않았다. 받을 수가 없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상담이라도 받고 싶지만 그럴 수조차 없었다. 뭐라고 한단 말인가. 키스틸의 이환 전무가 자기한테 다짜고짜 애를 낳아달라고 했다고? 아무도 믿지 않을 거다.

‘나도 실감이 안 나는데, 뭐.’

해진은 한숨을 길게 내쉬고 침대에 드러누웠다. 누렇게 바래고 얼룩진 원룸 천장이 원망스러워 보였다. 병가를 내고 집에 틀어박혔지만 내일은 또 일을 하러 가야 했다. 그러나 해진은 일상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해진은 환이 좋았다. 그의 근사한 미소도 좋고, 저를 보는 갈색 눈동자도 좋고, 그에게서 풍기는 부드러운 향수 냄새도 좋았다.

어쩌다가 이렇게 좋아하게 되었을까.

그렇게 생각하자 괜히 서러워졌다. 마음은 잘못이 없는데.

“아아…….”

베개를 얼굴 위에 얹고 의미 없는 소리를 내던 중, 머리맡에 놔둔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혹시라도 업무 관련 내용일까 봐 슬쩍 액정화면을 확인했다. 이환 전무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내일 제 사무실로 오십시오. 어제는 경황이 없어 이야기를 제대로 하지 못한 듯합니다. 다시 설명할 기회를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의 얼굴이 연상되는, 반듯한 문장들을 보며 해진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메시지를 삭제하려다가 ‘확인’ 버튼 앞에서 멈칫했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까?’

아이를 낳자고 하는 것도, 뭔가 사연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러고 보니 섹스가 아니라 자꾸 아이를 낳자고 하는 것도 이상하고 말이다.

‘그래, 일단 이야기를 들어봐야겠어.’

한 번 정도는 더 이야기를 들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환과 이렇게 관계를 끝내기 싫었다. 그러기에는 이미 마음을 너무 많이 빼앗겨버렸다. 하지만……. 해진은 답장 버튼을 눌렀다.

[나중에 제가 연락드릴게요.]

메시지를 보내 놓고 불을 껐지만, 잠이 오지는 않았다.

‘내가 환이 씨에 대해서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었을까?’

사실 이환이라는 사람은 다정하지도, 매너 있지도 않고 그냥 좀 많이 이상한 사람이라면?

보통 사람이라면 아무리 애인 사이라도 다짜고짜 애부터 낳아달라고 하지는 않는다. 러트 때야 잠깐 정신이 나간 탓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게 아니었다.

해진은 몸이 약하고 아직 나이도 젊은 편이었지만, 오랫동안 혼자 산 탓에 눈치는 조금 있는 편이었다. 그는 자신이 타고난 탐험가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생존본능이 누구보다 뛰어나다고 믿고 있었다.

마치 짐승에 비견할 만한 자신의 생존본능은 끝없이 말하고 있었다. 이환을 피하라고. 이환은 위험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가장 큰 문제가 있었다.

‘나는 환이 씨가 싫지 않은데…….’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이환이 좋았다. 가족도 없이 혼자 살아온 해진이었다. 친구 말고 알파로서 저를 그렇게 대한 사람은 이환이 처음이었다. 한 알파의 오메가 짝으로 데이트를 한 것도 처음이고 말이다. 그가 보여준 다정함에 더 의지하고 싶은데, 이제 와서 경고를 보내는 제 본능이 밉기까지 했다.

심지어 해진은, 그가 그토록 아이를 원한다면 낳아줄 의향까지도 있었다. 하지만 그의 머릿속 한구석에서는 무언가가 끝없이 해진에게 경고하고 있었다.

그와 자는 순간, 그에게서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허엉…….”

생각을 잠깐이라도 멈추고 싶었다. 우는소리를 내며 베개에 고개를 묻었지만 이환의 잘생긴 얼굴이 자꾸 눈앞에 동동 떠다녔다. 그를 좋아하는 마음과 그에게서 도망쳐야 한다는 본능이 끝없이 싸우고 있었다.

베개에 얼굴을 비비며 침대 위에서 헤엄치듯 허우적거리던 중,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친구 경훈이었다. 이불을 차며 일어나 스탠드 불을 켰다.

“야, 너 오랜만인 것 같다?”

오랜만의 통화인데 경훈은 곧바로 대답하지 않고 뜸을 들였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휴대폰을 반대쪽 손으로 옮겨 쥐었다.

- 해진아.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왜 그래?”

- 나 갑자기 미국으로 발령이 났어.

“뭐?”

하나밖에 없는 친구 놈이 갑자기 외국으로 간다니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게다가 해진과 달리 그에게는 오래 만난 여자친구도 있었다. 놔두고 멀리 떠나야 하니 마음이 영 안 좋겠지.

“지금 만날까? 술이나 사줄게.”

해진은 대충 옷을 껴입고 경훈이 사는 동네까지 찾아갔다. 경훈은 지친 기색이 역력했다. 술을 따라주는 동안에도 한숨을 푹푹 내쉬는 게 아닌가.

“여자친구한테도 할 말이 없다, 진짜. 걔도 회사 다니니까 같이 가자고도 못 하고.”

“진짜 어떡하냐……. 인사팀이랑 이야기는 해봤어?”

“해봤지. 근데 막무가내야. 윗선에서 다 결정났나 봐.”

경훈이 마른세수를 하고는 잔을 단숨에 비웠다. 해진은 그의 빈 잔에 술을 반만 따라 주었다.

“천천히 마셔. 근데 너는 발령 안 나는 부서 아니었어? 갑자기 무슨 일이래? 윤경훈 일 잘한다고 소문나서 갑자기 일복 터진 건 아니고?”

“그러면 다행이게? 그게, 여러 가지로 복잡해.”

안주로 나온 야채 튀김을 조금씩 갉아 먹으며 해진은 경훈이 말을 잇길 기다렸다.

“갑자기 우리 회사 주인이 바뀌었거든. 일방적으로 매각이 되었다나 봐. 나야 경영 쪽은 잘 모르는데, 들어보니 뭐 막을 수도 없었던 모양이더라고.”

“세상에…….”

“그러더니 우리 부서 간부들도 바뀌고, 나도 영 알지도 못하는 부서로 배치된 거야.”

술을 단번에 들이켠 경훈이 다시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나더러 미국으로 가라고 하네. 황당하지 않냐?”

억울해하는 친구를 보고 있자니 해진도 화가 치솟았다. 불의를 보면 언제나 참기 힘들던 해진이었다. 갉아 먹던 야채 튀김을 앞접시에 내던지며 핏대를 세웠다.

“야, 진짜 너무한다! 그런 경우가 어디 있냐? 도대체 어떤 새끼가 그렇게 개판으로 운영을 하는 건데? 너네 회사 먹은 데가 어딘데?”

경훈이 자작을 하며 힘없이 고개를 내저었다.

“키스틸 레저라고 하더라.”

친구의 대답에 해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너 TV에 자주 나오는 그, 이환 전무 알지? 그 사람이 적극적으로 합병 추진했다던데. 나 미국으로 발령 배치한 것도 그 인간이라고 하더라. 대체 뭘 믿고 날 배치한 건지 모르겠어. 내 경력 보면 그럴 수가 없는데.”

경훈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씹어 먹던 야채 튀김이 속을 콕콕 찌르는 듯했다. 왜 하필이면 그일까. 왜 하필이면 자신의 유일한 친구에게……. 겹친 우연에 소름이 끼치는 듯했다.

“씨발, 나 토익도 400점대인데…….”

중얼거리는 경훈에게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넬 수가 없었다. 그저 우연이겠거니,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미적지근하게 켕기는 부분이 있어서였다.

해진은 남은 야채 튀김을 다시 갉아 먹기 시작했으나, 아무 맛도 느낄 수 없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새 상품 개발 시즌이 맞물려서 회사에서는 복잡한 생각을 이을 새가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아이디어 회의를 하고 기획서를 뜯어고치느라 정신이 없어 이환에 대한 생각도, 경훈에 대한 걱정도 출근한 동안에는 할 여력이 없었다.

그러나 퇴근하면 다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지금처럼 환을 마냥 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확실히 이별을 고하든지, 아니면 대체 무슨 대단한 사연이 있어서 애를 낳아달라고 하는지 들어보든지. 그리고…… 하필이면 하나뿐인 제 친구, 경훈을 미국으로 발령시킨 이유는 뭔지.

한숨을 푹 내쉰 해진은 원룸 근처 편의점에서 콜라 1.25리터짜리를 하나 샀다. 보통 사람이라면 맥주캔을 사겠지만, 그는 몸이 약해서 술을 자제하는 편이었다. 콜라를 마시면 조금 취하는 기분이 들었기에, 그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커다란 페트병을 옆구리에 끼고 빌라 건물로 들어가려던 중, 해진은 문득 남자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겠지만 어쩐지 얼굴이 좀 익숙했다.

‘저 사람, 예전에 봤던 세큐리티 업체 사람 같은데…….’

아니겠지. 착각일 것이다. 애써 고개를 가로젓고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를 끝낸 해진은 좋아하는 탐험 프로그램을 보며 콜라를 배부를 때까지 마셨다. 카페인이 들어가자 조금 취기가 오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힘든 환경 속에서 열심히 탐험하는 사람들을 보니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페트병을 삼분의 일 정도 비웠을 때 휴대폰이 울렸다. 혹시 이환인가, 긴장했는데 그가 아니라 집주인이었다.

‘엥? 방세도 제때 냈고, 집에 이상도 없는데.’

이상하다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는데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 건물이 통째로 넘어가게 되어서요. 허물고 거기다 다른 걸 짓는다나 뭐라나.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세요? 그럼 저는 어떡해요?”

- 미안하게 됐어요.

쉽게 말해 당장 방을 빼야 한다는 소리였다. 이런 법이 어디 있나. 집주인도 미안해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부동산에 대해서는 잘 몰라도 집주인 역시 당혹스러운 상황에 처한 듯했다.

당장 방을 구하는 것도 문제고, 이사 비용이나 기타 여러 가지 걸리는 게 많았다. 가뜩이나 요즘 일이 바쁜 시즌이라서 집을 보러 다닐 시간도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가족이나 친척이 있다면 잠깐 얹혀살겠지만 말이다. 유일하게 있는 친구 경훈도 여자친구 명의로 된 집에서 동거 중이라 신세를 지기가 면구스러웠다. 게다가 녀석의 상황도 상황이니.

자신이 혼자라는 사실이 실감 나자 갑자기 해진은 조금 서러워졌다. 나름대로 씩씩하게 잘 살았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상황에 처했을 때 도움을 청할 사람이 하나 없다는 게 쬐끔 슬펐다. 페트병을 손에 들고 그대로 벌컥벌컥 콜라를 들이켰다.

“이게 웬 날벼락이야…….”

부동산 어플을 켜서 이리저리 살펴보던 해진은 한숨을 푹 쉬고 휴대폰을 내던졌다. 일단 당장 내일 출근을 해야 하니 잠부터 자야 했다.

침대를 정돈하며 가글을 하던 해진은 문득 든 한 가지 생각에 잠깐 굳었다.

‘환이 씨가 오피스텔 이야기를 하긴 했는데…….’

며칠 전에 바에서 갇힐 뻔한 때 말이다. 그때 환이 자기 소유 오피스텔로 들어오라고 했었지. 하필 시기가 공교롭게 맞물린 게 영 희한했다. 지금 원룸보다 훨씬 넓고 시설도 좋다고 했지. 하지만 우연이 겹쳤을 뿐이겠지.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해진은 가글을 뱉었다.

손을 씻고 나온 해진은 휴대폰에 부재중 전화가 떠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환이었다. 메시지도 하나 와 있었다.

[갈 곳이 없으실 텐데, 그냥 제 오피스텔로 들어오시죠. 이사는 내일 출근해 계시는 동안 해놓으라고 하겠습니다.]

경악하며 휴대폰을 내던졌다.

“어, 어떻게 알았지?

설마 우연이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문득 든 생각에 집주인에게 다급히 전화했다. 신호음을 기다리는 동안 손이 덜덜 떨렸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입속으로 되새기면서도 깊은 본능이 경고음을 빽빽 울려대고 있었다.

그리고 집주인의 대답은 그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 어, 그 뭐야, 키스틸 레저라고, 여행사에서 매입을 했어요. 그러고 보니 총각도 여행사 다닌다고 했었지? ……여보세요?

인사하는 것도 잊고 그대로 휴대폰을 떨구었다. 해진의 시선은 마룻바닥에 꽝꽝 소리 내며 떨어진 휴대폰을 보는 대신 허공을 멍하니 향했다.

‘환이 씨가 나를 내쫓았다고……?’

설마. 아니겠지. 아니야. 아무리 환이 씨가 좀 미친 것 같기는 해도, 이 정도로 상식이 없지는 않을 거야. 키스틸 레저의 다른 사람이 한 일이겠지. 하지만 이환이 총책임자고…… 내가 이 건물에 사는 걸 뻔히 알잖아? 하지만 그렇지 않고서야 내가 쫓겨날 상황이란 사실을 어떻게 알았단 말이야?

휴대폰을 도로 집었다. 이환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그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해진은 누운 채로 그가 보낸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아무리 봐도 글자가 달라지지는 않았다. 휴대폰을 끄고 이불을 덮었다. 잠이 오지 않아 말똥말똥한 눈으로 천장을 올려다봤다.

그의 탐험가다운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이미 범의 아가리 속에 들어와 있으니, 포기하라고.

다음 날, 해진은 일단 평소처럼 출근했다. 다시 몇 번이나 환에게 전화를 했지만 받지 않았다. 아무리 이상한 사람이라고 해도 설마 내 동의 없이 멋대로 짐을 옮기진 않겠지……. 생각하며 스스로를 안심시키려 했으나 도무지 일에 집중이 되질 않았다.

그리고 저녁이 되었을 때, 귀가한 해진을 맞은 것은 텅 빈 집이었다.

“이게 무슨…….”

도어록 비밀번호도 안 알려줬는데, 도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치솟는 화를 겨우 다스리며 이환에게 전화하려는데, 텅 빈 원룸 창문 너머로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밖을 내다보자 이환이 밖에 차를 대고 서 있었다. 저기는 주차 금지 구역인데.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미치셨어요!”

창문을 활짝 열고 빽 소리를 질렀다. 해진의 고함 소리가 빌라 건물 사이로 쩌렁쩌렁 울렸다. 정작 이환은 뻔뻔하기 그지없는 삐딱한 자세로 서서는 가까이 오란 손짓을 했다. 손바닥을 위로 한 채 검지를 까딱까딱하는 동작을 보자 한숨이 나왔다.

팔을 걷고 씩씩거리며 뛰어 내려갔다. 미친놈 아니냐고, 지금 뭐 하는 짓이냐고, 당장 경찰에 신고할 거라고 쏘아붙이려던 해진은 환의 얼굴을 마주하자 말문이 막혔다.

“저와 함께 가시죠.”

손을 내밀어 보이는 이환은 재수가 없을 정도로 멋있었다. 핏이 완벽한 정장을 빼입은 모습이 오늘따라 더더욱 잘생겨 보였다. 해진은 소리를 지르지 못하고 어금니만 바득바득 깨물었다. 제 억울한 심경을 아는지 모르는지, 이환은 그 재수 없을 정도로 잘생긴 눈썹을 한 번 꿈틀하더니 더 재수 없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곳에 계속 계시면 제 사유지를 무단점거하고 계신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니 제 말을 들으세요.”

“도대체…….”

체한 듯이 명치가 갑갑했다.

“도대체 저한테 왜 이러시는 거예요?”

이환이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었다. 얼핏 평소와 비슷해 보이지만, 해진은 이번에는 한 가지를 더 알아볼 수 있었다. 그것은 집착이었다.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제가 강해진 씨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화가 나는데, 그의 무례함에 대한 화보다는 그의 얼굴을 마주하고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한 화가 더 컸다.

허무함으로 몸에 힘이 빠졌다. 해진은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가 누구인지 이제는 알 수 없었다.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흐어엉…….”

경악에 가까운 황당함과 놀란 마음에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마음을 준 사람이 미친놈이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해진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일어나십시오, 해진 씨. 이렇게 우신다고 해서 상황이 바뀌진 않습니다.”

이환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어조는 이전처럼 다정하기 그지없는데, 눈빛이 이상했다. 정말 미친놈 같은 눈빛이었다.

“어차피 당신은 저를 못 벗어납니다. 포기하고 이만 제 손을 잡으세요.”

뒤이은 말에 다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해진은 그대로 팔을 뻗어 그의 손을 잡는 척했다가, 앉아 있던 다리를 냅다 뻗어 그의 발목을 찼다.

“컥……!”

그가 고꾸라지는 것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내달렸다. 뒤도 보지 않고 무작정 뛰었다. 어두운 골목이 무서웠지만 해진의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저 알파에게서 최대한 도망치라고. 지금 잡히면 돌이킬 수 없을 거라고.

“강해진 씨!”

뒤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해진은 더 속도를 내서 달렸다. 심장과 폐가 약해서 이렇게 격하게 달려서는 안 되는데도 그에게 잡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 역시 해진이 가진 본능에 의한 판단이었다.

‘내가 순순히 잡힐까 봐?’

누구보다 더 위험에 대비된 해진이었다. 상대는 저보다 우월한 알파지만 어둠을 이용하면 따돌릴 수 있으리라 판단했다. 그는 가장 어두운 골목으로 내달렸다. 이환은 포기하지 않고 끈질기게 달려왔다.

다행인 점이라면 이 동네 지리를 이환보다 더 잘 안다는 점이었다. 꼬불꼬불한 골목을 복잡하게 달리고 있자니 어느새 제 등 뒤로 따라오는 이환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해진은 멈추지 않았다. 지쳐서 더 달릴 수 없을 때까지 달렸다.

그렇게 얼마나 뛰었을까. 마침내 그가 자신을 따라오지 못한다고 확신하고서야 해진은 달리는 것을 멈추었다.

“허억, 헉…….”

어릴 때부터 격한 운동은 해본 적이 없는 그였다. 놀란 몸이 경련하듯 들썩거리고 가슴과 옆구리가 지독히 아팠다. 혹시라도 그가 따라오지는 않았을지, 주변을 한참 살피고서야 해진은 바닥에 주저앉을 수 있었다.

“흑…….”

숨이 조금 제 속도를 찾고 나자 울음이 터지기 시작했다.

해진은 서러웠다. 태어나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깊이 마음을 주었고,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가족처럼 의지해도 되겠다고 처음으로 생각했는데.

건물 사이로 파고든 어둠이 낯설었다. 그는 눈물을 훔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혹시라도 이환이 주변을 탐색할까 싶어, 해진은 건물 속으로 들어가 층계참에 서서 기다렸다. 휴대폰은 껐다.

그리곤 약 20분이 지난 뒤에야 조심스레 건물을 나왔다. 혹시라도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몇 번이고 다시 확인하고선 걷기 시작했다.

‘어디로 가지…….’

그는 조난 상황에 대한 정보는 빠삭하게 통달했지만, 도시 안에서 사람에게 쫓길 때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잘 알지 못했다. 특히나 제게 아이를 낳아달라고 떼쓰는 알파에게서 도망치는 법은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하아…….”

한숨이 나왔다. 그래도 지갑과 휴대폰, 보조배터리는 있어 다행이었다. 내일은 평일이고, 이런 일이 생겼어도 일단 출근은 해야 하니 어느 곳에서든 잠을 자야 했다.

해진은 가장 가까운 찜질방으로 갔다. 수면실에 누워 있어도 잠이 오질 않아 고생했다. 저를 오만하게 내려다보던 이환의 얼굴이 눈앞에 동동 떠다녔다.

더 억울한 점은 이런 꼴을 당하고도 이환의 잘생긴 얼굴이 밉지가 않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딴 미친놈에게 홀랑 반한 것 같은데, 벗어날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일단 내일 생각하자!’

눈을 질끈 감고 몸을 웅크렸다. 당장 중요한 건 내일 출근이니까.

다음 날 해진은 입었던 정장 그대로 출근했다. 그리고 평소보다 더 열심히 일했다. 개인적인 연애사 때문에 일에 지장이 가는 것은 프로답지 못한 일이니까. 회의 시간에는 열정적으로 의견을 냈고, 팀원들 커피 심부름도 했다. 옷을 갈아입지 못해서 찝찝한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오후가 되었을 때였다. 어딘가 다녀온 팀장이 아주 면구스러운 얼굴을 하고 해진의 자리로 다가왔다.

“저, 해진 씨, 급하게 출장 좀 가줘야겠는데.”

“출장이요? 저 곧 미팅 나가야 하잖아요.”

“윤희 씨가 대신 갔다 올 거야. 출장부터 갔다 와. 급한 일이라면서 해진 씨를 딱 지목했어.”

하는 수 없이 파일을 급하게 백업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데 저 어디로 가요?”

“키스틸 레저 본사.”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데이트는 항상 밖에서 했으니 그가 일하는 전무실에 찾아간 것은 처음이었다. 이환의 전무실은 그의 오피스텔만큼이나 깔끔했다. 먼지 한 톨 없어 보여서 발 딛기가 면구스러울 정도였다.

“앉으시죠, 해진 씨.”

소파에 어색하게 앉는 동안 환이 커피를 내렸다. 고소한 커피 향이 전무실 가득 퍼졌다. 해진은 제 긴장감을 느낄 수 있었다.

“설탕 필요하십니까?”

“아뇨.”

커피잔을 테이블에 둔 환이 넥타이를 손으로 정리하며 맞은편에 앉았다. 그의 어깨 너머로 벽 한쪽을 차지하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무엇을 그렸는지 알 수 없게 검고 흰 네모만 가득했다.

“제가 설명을 미처 제대로 못 드린 것 같습니다.”

“……무슨 설명이요?”

환이 자세를 고쳤다. 그의 얼굴이 멀쩡해 보여서 사실 해진은 조금 서운했다. 저는 어제 잠도 제대로 못 잤는데.

“저는 해진 씨의 의견을 존중합니다.”

“아, 그러세요?”

“그리고 제가 원하는 바를 해진 씨가 주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충분히 그럴 능력이 되시는 분이니까요.”

반들반들한 이마가 환한 불빛에 반사되었다. 해진은 그 이마를 손바닥으로 때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억지로 입을 열었다.

“원하는 바라고 하시면…… 아이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이야기가 빨라서 좋군요.”

다시 한숨이 나왔다. 해진은 스스로를 꾸짖었다. 이야기를 들어보겠다고 생각한 제가 바보였지. 환은 제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뻔뻔하기 그지없는 얼굴을 하고서는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마치 정말로 거래처를 대하는 듯이 말이다.

“그럼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해보죠. 해진 씨가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든 편히 말씀하시면…….”

“환이 씨.”

해진이 그의 말을 끊었다.

“지금은 오후 한 시예요. 적어도 밥은 먹었느냐고 물어보는 게 순서 아니에요?”

그러나 환은 외려 그게 뭐가 중요하냐는 투로 그 잘난 눈썹을 들어 보였다.

“밥은 드셨습니까?”

한숨이 나왔다. 환에게보다 스스로에게 더 화가 났다. 도대체 난 이런 사람이 뭐가 좋다고……. 그는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쿡쿡 쑤시는 통증을 참으려 입술을 깨물었다.

“대체 아이가 왜 필요한데요? 그것부터 좀 설명해주세요.”

묻고 싶은 건 수도 없이 많았지만 제일 궁금한 건 그것이었다. 환은 미간을 조금 구기며 턱을 만지작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설명 드리기가 곤란하군요.”

“저보고 아이를 낳아달라고 하시면서, 이유는 말 못 하겠다는 건가요?”

“연인 사이에 모든 것을 다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요.”

기가 막혀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해진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알지 못하는 사연이 있으리라 생각했다. 최대한 그에게 맞춰주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아니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보장해드리죠.”

그래, 어디까지 하나 들어는 보자 싶어서 해진은 고개를 들고 그를 마주 보았다.

“……뭘 보장하는데요?”

“아이만 낳아주신다면, 그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겠습니다.”

마음이 다시 쑤셨다. 어떤 것도 요구하지 않겠다는 그의 말이 말할 수 없이 서운했다. 연애를 제대로 해본 적 없는 해진이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연인이란 그런 게 아니었다. 요구나 조건 같은 것을 따지는 사이가 아니란 말이다.

마른세수를 하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 모금도 대지 않고 식어가는 커피잔에는 불빛이 동그랗게 앉아 있었다. 단것을 잘 못 먹는다는 사실을 몇 번이나 이야기했는데도, 그는 제게 설탕을 넣을 거냐고 물어봤다.

“제가 싫다면요?”

“좋아하실 만한 제안을 드려야겠지요. 말씀드렸다시피 조건은 최대한 맞추어서…….”

“됐어요.”

해진이 커피잔을 들었다. 아직 뜨거웠지만 벌컥벌컥 들이켜고 챙강, 소리 나게 내려두었다.

“환이 씨, 아니, 전무님. 저는 당신의 아이를 낳기 싫습니다.”

환의 잘난 눈썹이 한 번 꿈틀, 했다. 맨 처음 만났을 때처럼 해진은 아주 조금 그가 두려웠지만, 티가 나지 않도록 애써 표정을 굳힌 채로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연인도 그만하고 싶습니다.”

환의 눈이 커졌다. 믿기 힘들다는 표정이었다. 해진은 무시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앞으로 저한테 연락하지 마세요.”

그대로 돌아서려는데, 뒤에서 환이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사과를 하더라도 절대 받지 않아야지, 꾹꾹 다짐하는데 웬걸, 돌려세우는 손짓이 거칠었다.

“어딜 갑니까? 제 이야기 안 끝났습니다.”

뭐 이런……. 해진은 제 성격이 조금만 더 불같았다면 필경 그의 얼굴에 침이라도 뱉었으리라 믿었다.

“제가 편의를 봐드릴 때 받으시는 편이 좋을 겁니다. 강해진 씨를 생각해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편의요?”

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와중에도 그의 모습이, 손짓이 우아해 보여서 해진은 억울했다. 차라리 미워 보인다면 나았을 텐데.

제 흔들리는 마음을 알았을까. 환이 어깨를 붙든 손을 부드럽게 팔뚝으로 쓸어내렸다.

“강해진 씨, 이것만 미리 알려드리고 싶군요. 저는 목적을 위해 수단을 가리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 손길이 하도 다정해서, 해진의 화가 어느새 조금씩 누그러졌다.

“그리고 지금 저의 가장 큰 목적은 바로 당신이 제 아이를 낳게 하는 것입니다.”

“도대체 왜…….”

반발하려던 해진이 입을 다물었다. 팔뚝을 타고 손목까지 내려온 손길 때문이었다.

“저는 정말로 해진 씨가 필요합니다. 아주 절실하게요.”

그의 저음이 하도 진지해서 저도 모르게 마음이 누그러졌다. 해진은 어금니를 꼭 깨물었다가, 어렵사리 다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제가 필요한 게 아니라 아이가 필요하신 거잖아요…….”

자신은 아이를 낳기 위해서 필요한 거겠지. 그가 미웠다. 화도 났다. 뿌리치고 나가면 될 텐데, 그런데 왜 그럴 수가 없을까.

손목으로 내려온 환의 손가락이 그의 손바닥을 살짝 건드렸다. 그저 손끝이 닿았을 뿐인데 찌릿했다.

“자세한 이야기를 모두 해드릴 수는 없지만, 저는 해진 씨를 해치려고 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손바닥을 건드리던 손끝은 그대로 벌어져 이번에는 해진의 손을 깍지 껴 쥐었다. 그리고 그대로 힘을 주는가 싶더니 해진의 몸이 휘청거리며 끌려갔다. 얼굴이 가까워졌다. 꼭 키스를 할 것 같은 분위기였으나 해진은 소름이 끼쳤다.

“그러니 내가 정말로 당신을 해치려 들기 전에, 내 말을 들으란 말이야.”

코앞에서 숨결과 함께 속삭인 말은 명백한 협박이었다. 이전처럼 그를 후려치고 도망칠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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