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3/16)

주말 데이트는 보통 드라이브로 시작해서 서울 외곽을 돌아다니곤 했다. 나름 관광레저 회사의 전무라서 그런지 이환은 온갖 경치 좋고 분위기 좋은 곳을 다 꿰고 있었다. 다른 오메가와 데이트를 많이 해본 걸까, 하는 쓸데없는 생각까지 들게 만들 정도였다.

그래도 오래 걸으면 힘들어하는 자신을 배려하는지 항상 차를 타고 이동했다. 절대 오래 붙들고 있지 않고, 밤이 늦기 전에 데려다주는 것도 제 몸이 약한 것을 알기 때문이리라.

그날도 이환은 그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환이 데려가주는 곳은 어디든 근사했지만, 그날은 유독 더 근사했다.

남산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호텔 루프탑은 처음 와보는 곳이었다. 밥을 먹으러 가자기에 고작해야 레스토랑 정도라고 생각했는데, 호텔의 루프탑을 아예 싹 비워버리고 가장 전망 좋은 자리에 단둘이 앉았다. 아예 다른 의자와 식탁까지 치워버린 상태라서 어색함도 없었다. 마치 처음부터 두 사람을 위해 만들어진 공간 같았다.

메인디시가 나오고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포크와 나이프를 내려놓은 이환이 갑자기 입을 닦더니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 것이 아닌가. 해진은 한창 고기 맛에 심취해 있었기에 개의치 않고 열심히 입을 오물거리며 나이프를 놀렸다.

“저는 해진 씨를 만난 뒤부터 늘 운이 좋다고 생각했습니다.”

스테이크를 씹느라 대답하지 못하고, 대신 눈만 동그랗게 떴다. 이환은 헛기침을 한 번 하고는 말을 이었다.

“해진 씨처럼 완벽한 매칭…… 아니, 완벽한 사람을 만나게 된 것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행운이니까요.”

저도 부족한 점이 많은데 너무 과찬이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대답을 선택하기에는 입에 든 스테이크가 너무 맛있었다. 해진은 면구스러운 표정으로 스테이크를 한 점 더 입에 밀어 넣고 오물오물 꼭꼭 씹었다.

“저는 그래서 이 행운을 더더욱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습니다. 이왕이면 법적인…… 형태로 이뤄진 약조를 한다면 좋겠지만, 흠, 그건 너무 이르니 차치하고. 오늘은 한 가지 제안을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해진은 그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역시 스테이크는 미디움웰던이 최고라고 생각했다. 씹을 때마다 고소하게 퍼지는 육즙이 침샘을 자극하고, 부드러운 고기는 어금니에 닿자마자 녹아버리는데 정말 끝내주게 맛있었다.

“강해진 씨, 저와 정식으로 교제해주시겠습니까?”

해진이 그제야 오물거리던 입술을 뚝 멈추었다.

눈앞에는 이환이 그답지 않게 얼굴을 붉히며 그를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언제 꺼냈는지 거대한 꽃다발을 든 채로 말이다.

꿀꺽, 입에 든 고기를 삼킨 해진이 멍하니 그 꽃다발과 이환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어, 저…….”

이환이 일어서서 그의 자리로 왔다. 그의 옆에서 무릎을 꿇고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 모습이 해진의 눈에 꼭 슬로 모션처럼 보였다. 야경 불빛 덕분에 환의 주변에 화려한 효과까지 더해졌다.

늘 스스로를 보잘것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몸도 약하고, 병치레도 많이 하고, 체구도 작은 나약한 몸뚱이를 지닌 평범한 사람. 그런데 지금, 자신이 마음에 담은 알파가 저를 향해 꽃을 내밀며 고백하고 있었다. 마치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이라도 되는 듯이 바라보며 말이다.

해진이 천천히 손을 뻗어 그가 내민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그리고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럴게요.”

긴장감 가득하던 이환의 얼굴에도 비로소 웃음이 퍼지기 시작했다.

“정식으로 만나요, 우리!”

해진이 발딱 일어나 무릎 꿇은 그에게 폭 안겼다. 환은 얼떨결에 그를 마주 안은 채로 뻣뻣하게 굳었다가, 어색하게 등을 토닥여주었다.

꿇은 자세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불편해진 환이 억지로 몸을 일으키고서야 해진은 그를 놓아주었다. 상기된 얼굴을 하고 헤실헤실 웃던 그는 환이 도로 앉으라고 손짓하자 힘이 빠진 투로 털썩, 의자에 앉았다. 그러고서도 스테이크를 마저 먹겠다는 일념으로 나이프와 포크를 꼬옥 쥐었다.

“너무 기뻐요, 정말로요. 저, 사실, 많이 고민했거든요. 저처럼 평범한 사람이 환이 씨 같은 분이랑 이렇게 가까이 지내도 될지…….”

“그런 생각 마십시오. 해진 씨야말로 제가 본 사람 중에 가장 특별합니다.”

해진의 선한 눈동자가 감동으로 물들었다.

“어쩜, 환이 씨는 이렇게 말씀도 곱게 해주시고…….”

뿌듯하게 웃은 이환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었다. 양팔을 팔걸이에 얹고 야경을 슬쩍 둘러보는 그의 표정에 거만함이 묻어났으나 해진의 눈에는 그조차 멋져 보였다.

“요리, 마음에 드십니까?”

어느새 스테이크를 입에 밀어 넣은 해진이 거세게 고개를 끄덕였다. 환은 그럴 줄 알았다는 투로 입꼬리를 틀어 웃었다.

“이 레스토랑, 선물로 드리죠.”

“네? 미치셨어요?”

저도 모르게 험한 말을 내뱉고는 얼른 입을 가렸다.

“아, 아니, 죄송해요. 말이 헛나왔네요. 너무 과한 선물이라서요.”

그가 부자라는 사실이야 한국인이라면 대부분 알 테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사귄 지 하루 만에 무슨 호텔 레스토랑을 선물로 준단 말이야. 받을 수 없었다. 해진은 결연한 표정으로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정 선물을 주시고 싶으시면, 저도 환이 씨한테 같은 수준으로 보답하고 싶어요. 제가 보답할 수 있는 것으로 주시면 받을게요.”

환이 픽 웃음을 흘렸다. 졌다는 투였다.

“알겠습니다. 해진 씨께 부담이 가는 선물은 강요하지 않겠습니다.”

기다란 손가락이 와인 잔을 쥐었다. 잔을 기울이는 동작이 우아하기 그지없다. 해진은 홀린 듯이 그 모습을 보았다. 이환의 모습이 꼭 명화 같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저의 연인이시라면 높아진 가치에 익숙해지셔야 할 겁니다. 그리고 제게 있어서 돈은 해진 씨보다 더 가치 우위가 낮은 것이니, 그것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해진은 그 말에 진심으로 감동했다. 돈이 최고인 세상에서 돈을 버느라 지금도 아등바등하는 자신이었다. 그러니 돈보다 자신이 더 중요하다는 환의 말은 해진을 감동케 하기에 충분했다.

“그거 정말…… 듣기에 달콤한 말이네요.”

“오늘은 더 강요하지 않겠습니다만, 선물은 저의 진심임을 알아주십시오. 해진 씨가 제 돈을 써주시는 것이 저의 큰 기쁨입니다.”

여전히 우아하기 그지없는 그 모습에 해진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네. 익숙해지도록 노력할게요!”

환이 흐뭇한 투로 웃었다. 해진도 그를 마주한 채 배시시 웃었다. 그는 속으로 다시 한 번 다짐했다. 이 멋진 남자의 넘쳐나는 돈을 펑펑 써주는 데에 꼭 익숙해지고야 말겠다고!

* * *

강해진과 연애 관계를 맺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아직 아이를 낳은 게 아니니 안심할 수 없었다.

슬슬 인내심이 바닥나던 중, 설상가상으로 사건이 터졌다. 유 회장이 키스틸 그룹의 계열사 중 하나인 키스틸 솔루텍을 매각하겠다고 나선 것이었다. 환은 회장을 직접 찾아가 반대했다.

“솔루텍은 현재 레저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 우리 계열 호텔, 리조트, 모든 숙박 시설 냉난방 시스템을 맡고 있지 않습니까. 매각하게 되면 레저에 타격이 옵니다.”

유 회장은 인사도 없이 쏘아붙이는 손자를 슬쩍 쳐다보더니 양쪽 발을 책상에 척척 차례대로 겹쳐 올리고 의자에 몸을 파묻었다.

“네가 지금 내 앞에서 경영을 논하는 거냐?”

“솔루텍은 아니지만 레저는 제 것 아닙니까. 제 계열에 타격이 온다면 아무리 회장님이시라도 저도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습니다. 그리고 어째서 이런 결정이 저 없이 진행되었는지도 이해 못 하겠습니다. 저는…….”

“너는 솔루텍의 대주주가 아니지.”

유 회장이 두 발을 바닥에 내리고 팔꿈치를 책상에 기대었다. 나이에 비해 형형한 빛을 띠는 눈동자로 제 손자를 꿰뚫듯 훑어보았다.

“솔루텍은 지금 파는 게 이득이다. 의논 다 끝난 일이고.”

무심히 말한 그녀는 시선을 모니터로 옮겼다.

“그리고 애초에 내 회사를 내가 어떻게 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냐. 그렇게 억울하면 합법적으로 절차 거쳐서 물려받든가.”

뒤이은 말에 환은 한 번 더 기가 막혔다.

“……오메가와 아이를 데려오기 전까지는 물려주지 않으실 거라 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잘 아네.”

결국 환은 아무 소득 없이 회장실을 나와야 했다. 짜증이 솟구쳤으나 반발할 수가 없었다.

담배나 술이라도 하면 좋겠건만, 평소에 몸을 해치는 것은 단 하나도 하지 않았기에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선 운동 말고 답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벤치프레스를 죽어라 하며 땀을 흘렸다.

저 늙은이에게서 정당한 유산을 받아오려면, 결론은 하나였다.

‘서둘러야겠군.’

하루라도 빨리 강해진을 임신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환의 고민은 이제 한 단계를 더 올라섰다. 연인이 되기는 했지만 아이는 어떻게 낳게 한다. 제대로 된 연애를 해본 적이 없으니 보통 연인들이 어떻게 침대에 들어가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하지만 어려울 건 없었다. 뭐, 보나 마나 돈으로 대충 꼬셔서 자빠뜨리면 되겠지.

‘돈으로 안 되는 건 없다.’

모호함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 바로 돈이었다. 강해진이라고 해서 다를 바 없을 터다. 그래, 강해진 본인의 입으로도 직접 말하지 않았던가? 돈이 제일 중요하다고.

99.99퍼센트의 매칭률을 보이는 오메가에게 쓰는 돈은 전혀 아깝지 않았다. 아이를 낳아 조모에게 바치면 몇천 배로 돌려받을 테니 말이다. 그리고 강해진이 돈을 써봤자 얼마나 쓰겠나. 먹는 것도 꼭 햄스터가 햅씨 빠는 것처럼 적게 먹는데. 외제 차도 한 번 타본 적 없겠지.

그래서 환이 선택한 첫 번째 미끼는 바로 외제 차였다.

샛노란 바탕색에다 보닛에 검은 줄이 두 개 그려진 이 스포츠카는 가격이나 성능 면에서 ‘최고급’이라고 불릴 수준은 아니었다. 그러나 할리우드 영화에서 로봇 캐릭터로 몇 번 등장한 데다 눈에 띄는 디자인 덕분에 대중성은 높았다.

다시 말해 강해진이 ‘어, 이 차!’ 하며 알아볼 수 있는 모델이었다. 적어도 환의 계산으로는 그러했다. 하지만 막상 차를 몰고 나왔을 때 해진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와, 이거 무슨…… 꿀벌같이 귀여운 차네요. 장난감 같다.”

일그러지는 강해진의 얼굴 표정은 명백한 ‘민망함’을 나타내었다. ‘어떻게 이딴 차를 타고 다니지? 부끄럽지도 않나?’ 하고 말하는 듯했다.

환은 가슴속에서 불처럼 치솟는 화를 꾹 억눌렀다. 이 유명한 스포츠카를 모른단 말인가? 무식하군. 면구스러움을 감추곤 선글라스를 내리고 웃어 보였다. 첫 단추부터 틀어졌지만 여기서 포기할 환이 아니었다.

“타십시오. 오늘은 특별히 제 차고를 보여드리죠.”

해진은 주변에 사람이 없는지 눈치를 보며 옆좌석에 탔다. 환은 일부러 차 루프를 활짝 열고 달렸다. 남들은 없어서 못 타는 차인데, 강해진이 주제를 좀 알고 기뻐하길 바랐다. 그러나 이번에도 해진의 반응은 그의 예상과 달랐다.

“좀 춥지 않아요?”

“예, 안 춥습니다.”

이제 여름인데 대체 뭐가 춥단 걸까. 얼른 대답하자 해진의 안색이 나빠졌다.

“오늘 낮에도 미세먼지가 많다던데…….”

옷깃을 여미는 건 저 보라고 일부러 그러는 걸까.

“요즘 매연이 아주 심하다던데…….”

꿋꿋이 도로를 달렸다. 행인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해진은 조수석에 앉은 채로 스르륵, 몸을 낮추었다. 엉덩이가 좌석 앞쪽으로 하도 빠져서 그대로 차 바닥에 앉을 기세였다. 환이 한쪽 손으로 그의 어깨를 붙들어 일으켰다.

“위험합니다. 안전벨트 잘 매시고 똑바로 앉으십시오.”

해진은 울상이 된 채로 제대로 앉았지만 이마를 긁는 척하며 얼굴을 가렸다. 어이가 없었다. 지금 나를 창피해하는 건가? 감히 이 나를?

“콜록, 콜록!”

급기야 기침까지 해대는 것을 보고 어쩔 수 없이 환은 루프를 닫아야 했다. 그제야 해진의 얼굴이 편해졌다.

“정말 친절하시네요, 환이 씨는.”

해사하게 웃는 얼굴을 보자 할 말이 달아났다.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둘은 환이 사는 건물의 주차장으로 갔다. 그가 가진 자동차는 모두 열한 대인데, 개중 열 대가 외제 차였다.

“차가 이렇게 많으면 헷갈리지 않으세요?”

“천만에요. 용도에 따라 다르게 씁니다.”

주차장으로 들어가며 환이 핸들을 꺾었다. 관리인에게 차 키를 던져주고 주차시킬 수도 있지만, 어디선가 주차하는 남자의 모습이 아주 매력적이라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일부러 직접 뒤를 돌아보며 한쪽 팔로 핸들을 움직였다.

“용도요?”

“간혹 대외 활동을 갈 때 휠체어를 실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엔 시설이 갖춰진 저 밴을 사용하지요.”

“오, 혹시 환이 씨 봉사 활동도 하세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곳이 두세 군데 있습니다. 정기후원만으로는 부족하지요.”

사실 거짓말이다. 봉사 활동을 직접 가는 건 환 본인이 아니다. 박 비서를 통해 사람들을 보낸다. 어차피 키스틸이라는 이름만 붙으면 되니까. 몸을 쓰는 힘든 일은 직접 할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해진은 벌써 제 말에 넘어간 듯이 보였다. 초롱초롱하게 빛나는 눈을 보니.

이 정도면 시작이 괜찮았다. 환은 일부러 한껏 멋을 부리며 핸들을 꺾어 주차를 시도했다. 목선이 드러나게 뒤를 바라보며 어깨는 넓어 보이도록 판판하게 폈다. 한쪽 팔은 해진이 있는 조수석의 등받이를 둘렀다. 해진의 시선이 느껴졌다.

‘흥. 마음껏 보고 감탄하라지. 네 녀석이 곧 아이를 낳아줘야 할 몸이니까.’

모든 면에서 완벽한 알파를 만나는 게 얼마나 행운인지, 이 조그마한 오메가는 알까? 환은 속으로만 웃으며 핸들 쥔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오늘따라 주차가 마음대로 되질 않았다. 단번에 자리를 찾질 못하고 바퀴를 몇 번이나 헛돌렸다. 세 번 정도 왕복하자 슬슬 핸들 쥔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옆에서 지켜보던 강해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디스플레이 화면을 검지로 콕 가리켰다.

“그냥 후방 카메라 켜세요. 차도 좋은 거 같은데.”

누굴 바보로 아나, 이 조그마한 놈이……. 누구 좋으라고 일부러 이 짓을 하고 있는데. 하지만 환은 스스로를 매너 있는 데이트 상대로 연기 중이었기에 억지로 웃어 보였다.

“제가 강해진 씨의 매력에 홀려서 잠깐 생각을 놓고 있었군요. 부디 제 부족한 모습에 실망하시지 않았길 바랍니다.”

얼른 궤변을 늘어놓자 밀가루떡 같은 강해진은 좋다고 헤실헤실 웃는다. 하여튼 다루기 쉬운 녀석이다.

환은 후방 카메라를 켜며 문득 차 뒷좌석 쪽을 돌아보았다. 사실, 가능하다면 오늘 이곳에서 일을 해치우기 위해 뒷좌석을 깨끗하게 청소해놓았다. 조수석 앞 서랍에는 소독제와 러브젤도 들어 있었다.

이왕이면 히트사이클에 해치우는 것이 임신 확률을 높일 테지만, 그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도 많이 참은 것이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이 짓거리를 끝내고 싶었다.

‘집에서 하는 것보단 차에서 하고 차를 버리는 게 낫겠지.’

그 더러운 짓거리를 자기 집에서 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차에서 하고 차를 내다 버리는 게 나았다.

주차를 끝내자 강해진이 안전벨트를 풀려 했고, 환은 계획대로 그를 향해 상체를 기울였다. 안전벨트를 쥔 손 위에다 제 손을 겹쳐 쥐었다. 손은 씻고 나왔겠지? 구역질이 났지만 애써 코앞에서 웃었다.

“제가 해드리죠.”

아니나 다를까 강해진이 얼굴을 붉히며 웃는다. 안전벨트가 톡, 짧은 금속음을 내며 풀렸다. 환은 그를 마주 본 채로 상체를 조금 더 숙였다. 조금 더, 조금만 더…….

“아 참, 환이 씨.”

……빌어먹을 밀가루떡. 환의 바닥난 인내심이 관자놀이로 불거졌다. 애써 틀어 올린 입 끝이 파르르 떨렸다.

“왜 그러십니까?”

“저, 그때 주셨던 넥타이요, 감사하게 잘 쓰고 있어요. 우리 팀장님이 저보고 그 넥타이 어울린대요.”

지금 그게 중요한가? 환은 여태 안전벨트를 쥔 손에다 힘을 꽈악 주었다.

“그거 정말로 다행이고 기쁘군요.”

“그쵸? 헤헤. 우리 이제 내려요. 차 구경시켜주세요.”

“……구경하고 싶습니까?”

해진이 눈을 동그랗게 치켜떴다. 무슨 뜻이냐 반문하는 얼굴이었다.

“저한테 자랑하려고 차고까지 데려오신 거 아닌가요?”

하여튼 발칙하기 그지없는 오메가다. 환은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 올려 웃었다.

“부끄럽게도 들켰군요. 물론 제 컬렉션을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좀 더 편한 데이트를 위해서라는 것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해진 씨가 제 차 중에서 어떤 걸 제일 편해하시는지 알고 싶으니까요.”

“전 아무거나 타도 괜찮아요. 환이 씨만…… 옆에 있으면요.”

수줍게 얼굴을 붉히는 강해진은 아주 조금 귀여웠기에, 환의 뭉개진 자존심이 쥐꼬리만큼 회복되었다.

“저는 해진 씨를 위해서 얼마라도 투자할 수 있습니다. 걱정 마시고 필요한 것이나 갖고 싶은 게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하지만…….”

“제가 가진 건 돈밖에 없습니다. 돈으로 강해진 씨의 편의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지출할 용의가 있지요. 그게 제 기쁨이니까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대로 궤변을 줄줄 늘어놓고 있자니 강해진이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감동한 기색을 보였다. 환은 생각했다. 역시 단순한 녀석이라고. 아이가 이 멍청한 놈의 머리를 닮으면 안 되는데.

찰칵, 소리와 함께 안전벨트가 풀렸다. 환은 얼른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으로 걸어와 문을 열어주었다.

“뒷좌석에도 한 번 타보시겠습니까?”

“뒷좌석엔 왜요?”

해진이 그가 내민 손을 붙잡고 차에서 내렸다. 환은 그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해 잠깐 망설였다.

“그야…… 뒷좌석에도 타야 할 일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전 뒤에 타면 멀미하는데…….”

멋쩍은 대답에 화가 치밀었다. 하여튼 눈치라고는 죄다 말아먹은 놈이로군. 이쯤 되면 신체 접촉 빈도를 늘리자는 의도로 알아들어야 하지 않나? 환은 어색함에 넥타이만 고쳐 맸다. 속 타는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해진은 헤실헤실 웃으며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환이 씨, 그런데 혹시 노란색 좋아하세요?”

“아닙니다.”

“저는 노란색 좋아하는데.”

어쩌라는 거지? 노란 차를 타고 왔다고 지금 아직도 시위하는 건가? 아니면……. 환은 입가에 경련이 이는 것을 느꼈다.

“갖고 싶으시다면 이 차, 선물로 드리겠습니다.”

어차피 얼마 하지도 않는다. 강해진이 낳아줄 아기로 벌어들일 돈에 비하면 그야말로 푼돈이다. 이 정도 투자는 기꺼이 할 수 있었다. 환은 자신이 뼛속까지 기업인이라고 자부했다.

그러나 해진은 민망한 기색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을 하고 얼른 손을 내저었다.

“헉, 아니에요.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어요.”

갖고 싶어서 쫑알거린 주제에 이제 와서 빼기는 뭘 뺀담. 환의 미간이 구겨지기 직전, 해진이 차고 어딘가를 가리켰다.

“저, 이거 말고 저기 저거로 주세요. 이건 타고 다니기 좀…….”

이번에는 어쩔 수 없이 얼굴이 굳을 뻔했다. 해진이 가리킨 차는 이 노란 차보다 열 배는 더 비쌌다. 알고 이러는 건가?

‘이런 요망한…….’

다른 의미로 입꼬리가 절로 올라갔다. 해진이 눈치를 보며 머리를 살짝 긁었다.

“아, 제가 너무 앞서 나갔죠? 죄송해요…….”

“아닙니다. 편히 타고 다니십시오. 박 비서를 통해서 전달해드리겠습니다.”

“그, 그럼 감사히 받을게요.”

적어도 삼세번은 거절할 줄 알았건만. 환은 한숨을 삼키며 활짝 웃었다.

차고에 있는 차에 한 번씩 탑승을 시켜주며 환은 키스틸이 얼마나 튼튼한 재무 구조를 갖고 있고 얼마나 뛰어난 기업체인지 자랑을 늘어놓았다. 당연히 그 키스틸을 책임지고 있는 자가 자신이라는 사실도 몇 번이나 강조했다. 그런데도 강해진은 딱히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저 차 구경에 정신이 팔려서 “와, 멋있네요.” 하고 적당히 감탄만 할 뿐이었다.

“참, 그거 아세요? 트렁크에 갇혔을 때, 뒷좌석이랑 트렁크가 연결되어 있을 경우에는 쉽게 탈출할 수 있어요. 뒷좌석 시트를 밀면 되거든요.”

차 트렁크 쪽을 매만지던 해진이 말했다.

“그렇습니까? 그건 몰랐군요.”

“네. 그렇지 않더라도 트렁크 안에 야광으로 빛나는 레버가 달려 있으면 그걸 당기면 자동으로 열려요. 일반적인 차에는 거의 다 있어요.”

“어떻게 그런 걸 다 알고 있습니까?”

“말씀드렸잖아요. 저 원래 그런 데에 관심 좀 많거든요.”

야외 조난이나 탐험 관련으로 상식이 제법 있단 사실은 알았지만 트렁크 탈출법까지 알고 있을 줄은 몰랐다.

“트렁크에 갇히실 일은 없으실 겁니다, 아마.”

“환이 씨가 지켜줄 거니까요?”

방긋 웃으며 묻는 말에 환은 순간 말문이 막힐 뻔했지만, 특유의 기지를 발휘해 이를 드러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럼요. 바로 그거죠. 제가 있으니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진짜 든든해요!”

다행히도 강해진은 제 망설임을 눈치채지 못한 듯 환히 웃었다.

“해진 씨는 이상형이 있습니까?”

슬슬 갑갑해진 환이 물었다. 계획대로라면 지금쯤 뒷좌석에서 열심히 아이를 만들고 있어야 하는데. 대체 이 밀가루떡 같은 놈은 왜 이렇게 깐깐한지.

“글쎄요, 이상형은 딱히 없는 것 같은데……. 우와! 이거 엄청 멋있네요!”

와중에도 강해진은 제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차를 구경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환은 재깍재깍 차 문을 열어주고 내릴 때에는 손을 내밀어 잡아주었다. 머릿속은 어떻게 해야 이 밀가루떡을 자빠뜨리고 아이를 만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찼다.

물론 저도 하고 싶어서 하는 건 아니었다. 섹스는 정말로 불결한 행위니까. 남의 살을 물고 빨고, 음부에 성기를 넣는다니. 생각만 해도 끔찍하지만…… 끔찍한 일일수록 빨리 해치우는 게 낫다.

“이상형이 딱히 없다니 다행이군요.”

“그런가요? 우와, 이것도 엄청 멋있어요!”

열린 운전석에 앉아 핸들을 잡은 채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그에게 한 걸음 가까이 다가섰다. 해진은 여전히 차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실컷 시스템을 만져보던 해진이 운전석에서 일어나려다가 멈칫했다. 환의 몸이 시야를 가득 가로막고 있었다. 환은 선 채로 눈만 내리깔아 그를 내려다보았다. 내내 즐겁기만 하던 해진의 얼굴에 그제야 의아함이 떠오른다. 환은 문득 깨달았다. 그가 한참 동안 저를 마주 봐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그냥 차고 뭐고 확 다 팔아버릴까, 하는 생각이 괜히 들었다.

“하하, 저기 저 차도 보고 싶네요.”

어색하기 그지없는 어투로 꿍얼거리며 해진이 일어섰다. 그러나 환은 비켜주지 않았다. 시야의 높이 차이가 크게 났으나 허리를 굽히거나 턱을 숙이지조차 않았다.

“환이 씨……?”

강해진의 눈에 두려움이 설핏 비쳤다. 환의 가슴 속에서 어떤 것이 느리게 끓기 시작했다. 그게 무엇인지 환은 알지 못했다. 불쾌감일까? 조급함일까? 아니면…….

환이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일어나려던 해진을 도로 앉히고 제 몸도 운전석에 함께 밀어 넣었다.

“자, 잠깐만요!”

“강해진 씨.”

뽀얀 턱을 붙들었다. 손가락 두 개로 잡아도 충분할 정도로 해진의 얼굴뼈는 가늘었다. 두려움 반, 당혹감 반 섞인 해진의 눈을 마주하자 또 정체 모를 무언가가 몸속에서 끓었다.

“우리 관계를 좀 더 돈독하게 해줄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만.”

턱을 쥔 채로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환은 제 얼굴이 외부에서 어떤 평가를 받는지 익히 알았다. 현 사회의 일반적인 미적 기준을 가진 자라면 자신의 얼굴을 그 기준으로 삼으리란 사실 역시 알았다. 그의 눈매가 조금 가느다래졌다. 그러나 눈빛은 타올랐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 저는…… 잘…….”

얼굴이 더 가까워졌다. 숨결이 섞였다. 환은 그에게서 나는 옅은 딸기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조금만 더……. 입술이 맞닿기 직전에 해진이 그의 어깨를 턱! 붙들었다.

“잠깐만요!”

해진이 급작스레 상체를 빼는 통에 딸기 향도 그만큼 멀어졌다. 환은 마지막 남은 인내심마저 바닥나는 것을 느꼈으나, 지금 와서 일을 그르칠 수는 없었기에 꾹 참았다.

“저, 저, 화장실, 가고 싶어요.”

벌게진 얼굴로 하는 말에 한숨이 푹 나왔다. 화장실? 이 상황에서? 제정신인가? 환은 애써 화난 표정을 지우고 운전석에서 몸을 빼냈다. 한 걸음 물러난 채로 손을 내밀자 해진은 멋쩍어하면서도 순순히 손을 잡고 일어났다.

오피스텔 안에 있는 욕실로 안내하면서 환은 두통이 이는 것을 느꼈다. 관자놀이를 꾹 누르며 소파에 앉았다.

‘어쩐다, 저걸…….’

계획보다 너무 늦어졌다. 유 회장이 아직 건강하긴 하지만, 나이가 나이인 만큼 건강이 완벽한 상태는 아니었다. 정말 최악까지 가정한다면 제게 상속을 하기 전에 사망할 수도 있었다. 한시가 급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저 밀가루떡 같은 놈은 도대체 뭐가 문제인지 얼굴 들이대는 것만으로도 기겁을 한다. 먼저 손도 덥석덥석 잡아놓고 말이다.

마른세수를 하고 몸을 소파 등받이에 기대었다. 아무래도 작전을 좀 바꿀 필요가 있는 듯했다.

그 시간에 해진은 찬물로 세수를 연거푸 하고 있었다. 그래도 열기가 도통 식질 않았다.

‘어떡해, 미쳤나 봐!’

방금 전, 코앞까지 가까워졌던 환의 얼굴과 그윽한 눈빛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숨이 차고 얼굴이 자꾸 붉어졌다. 해진은 양손으로 뺨을 찰싹찰싹 때렸다.

‘아까 분위기 좀 이상했는데……. 꼭…… 입이라도 맞출 것처럼…….’

착각이 아니었다. 조금만 더 가까웠으면 진짜 입술이 닿을 거리였다.

해진은 연애 경험이 없었다. 그러니 보통 연인들이 사귄 지 얼마 만에 입을 맞추고 얼마 만에 그보다 더한 스킨십을 하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친구 경훈이한테 그런 걸 물어보기도 민망하고 말이다.

‘괜히 밀어냈나?’

그래도 아깐 너무 부끄러웠다. 괜히 키스를 못해서 그에게 실망이라도 안겨줄까 봐 겁도 나고 말이다. 해진은 조심스레 입을 가리고 킁킁, 숨을 뱉어 냄새를 맡아보았다. 입 냄새는 안 나서 다행이다. 하지만 마음의 준비는 아직 필요했다.

손을 닦던 해진은 아까 보았던 환의 눈빛을 다시 떠올렸다. 이유 모르게 어깨가 떨렸다.

‘뭔가 무서웠어…….’

이환은 다정하기 그지없는 사내였지만, 아까는 아주 조금 무서웠다. 아니, 좀 많이 무서웠다.

‘아닐 거야. 그렇게 다정한 분이.’

해진은 스스로를 꾸짖었다. 자기가 아는 이환은 절대 제게 해를 끼칠 사람이 아니었다.

한참 지나서야 해진은 욕실에서 나왔고, 다행히도 환은 평소처럼 매너 있고 다정한 모습을 보였기에 해진 역시 마음 놓고 방실방실 웃었다.

그날 환은 해진에게 자기가 사는 건물을 구경시켜 주었다. 선심 써서 넓고 깨끗한 침실까지 보여주었으나 그 침대 위에 해진을 자빠뜨리는 일은 하지 못했다. 좀 전에 놀란 토끼처럼 굴던 강해진의 얼굴이 자꾸 떠올라서 조급하게 굴 수가 없었다. 혹시라도 요 작은 놈이 겁을 먹고 도망치면 안 되니까.

심지어 먹고 싶은 게 있냐고 물으니 닭도리탕이 먹고 싶대서 박 비서를 시켜 재료를 사 오게 하고 요리까지 직접 해주었다.

“환이 씨, 이렇게 넓은 집에서 사시면 안 무서우세요?”

닭도리탕을 먹던 중 해진이 물었다.

“무서울 게 뭐가 있습니까? 방범도 잘되어 있고, 제 몸 하나쯤은 지킬 수 있습니다.”

“너무 썰렁하잖아요. 저라면 자다가 무서울 것 같아요.”

해진은 야무지게 닭고기 살점을 손에 들고 꼭꼭 씹어 먹었다. 그 모습이 좀 비위생적으로 느껴졌지만 환은 별말 않았다. 대신 물티슈를 건네주었다.

“자다가 무서우면 저한테 전화하세요. 제가 와드릴게요.”

살코기를 떼어 먹던 해진이 말했다. 환은 저도 모르게 잠깐 표정을 굳혔다가, 억지로 웃었다.

“그거, 든든한 말씀이군요.”

자그마한 체구에 산책만 해도 헐떡거리는 놈이 와서 뭘 하겠다고. 아이를 만들러 올 거라면 환영하겠지만 말이다.

마음속으로 한껏 비꼬면서도 환은 기분이 이상했다. 가슴 한편이 눅눅해지는데 이게 불쾌감인지 뭔지 알 수 없었다. 알 수 없어서 더 이상했다. 그런데 화는 나질 않았다.

밥 위를 움직이던 젓가락이 문득 느려졌다. 눈만 들어 맞은편에 앉은 해진을 살폈다. 살코기를 뜯는 데에 집중하느라 콧잔등에 주름이 져 있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좀 더 나가볼까.

“밤에 제 침실로 찾아오실 수 있단 말은, 저와 한 침대에 드실 수도 있단 뜻으로 해석해도 되겠습니까?”

환의 물음에 해진이 고개를 들었다. 한눈에도 당황한 티가 났다. 이내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다.

“저, 그게…….”

우스웠다. 평소에는 그리도 맹랑하더니, 왜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갑자기 쑥맥이 되나. 게다가 먼저 이곳에 오겠다고 말을 꺼낸 건 본인이면서.

“해진 씨.”

“네, 네?”

한 손에 젓가락을 든 채로, 여상한 얼굴을 한 채 환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눈앞의 강해진을 짝으로서 평가하는 듯 다시 한 번 훑은 그가 말을 이었다.

“저는 해진 씨가 제 아이를 낳아주셨으면 합니다.”

“미친……!”

해진이 입을 동그랗게 벌리고는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욕을 뱉었다는 자각도 없는 듯했다. 꼭 일시 정지라도 시킨 듯이 뚝 멈춘 채로 약 5초 정도 있던 해진은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하하!”

한눈에도 어색한 웃음이었다. 들고 있던 닭 뼈를 내려놓은 그가 손을 휘휘 내저었다.

“농담도 참. 저 깜짝 놀랐잖아요.”

농담이 아니라고 말하기에는 강해진이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가뜩이나 약해빠진 녀석이 제집에서 거품 물고 기절이라도 하면 곤란하니 환은 아무 말도 않았다. 강해진은 혼자서 뭐라고 꽁알거리며 고기를 계속 씹었지만 꼴을 보니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제가 원래 닭고기 엄청 가리거든요. 닭 껍질 기름기를 싫어해서요. 그런데 환이 씨는 어쩜 이렇게 맛있게 낳으셨, 아니, 만드셨어요? 하하.”

말을 애써 돌리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오늘은 더 이야기를 잇기가 어려울 듯했다.

해진이 그의 밥그릇 위에 고기 한 점을 툭, 얹어 주었다. 그래도 상식은 있는지 먹던 젓가락은 아니고 국자를 써서 다행이었다.

“환이 씨는 요리도 잘하시고. 정말 완벽하세요.”

충격을 스스로 상쇄하려는 듯 억지로 헤실헤실 웃는데, 그 얼굴을 보니 가슴이 어쩐지 더 눅눅해졌다. 환은 애써 그를 마주 보며 웃었다. 계획을 대대적으로 수정하겠다고 다시 한 번 다짐하며 말이다.

그날 밤, 환은 박 비서에게 따로 은밀히 연락했다.

“강해진의 사생활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조사해주십시오. 특히 성적 취향 위주로.”

- 성적 취향이요?

박 비서가 한숨을 푹 내쉬며 물었다.

“하드디스크를 털어서라도 조사하십시오.”

- 그거 범죄인 건 아시죠?

“어떤 알파에게 성적 끌림을 느끼는지, 아니, 어떤 스타일의 상대방과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흥분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거사를 치르려면 판이 마련되어 있어야 한다. 몸뚱이는 있으니 분위기만 잡히면 된다. 그는 제 몸이 강해진의 취향에서 벗어난다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다. 전문가를 통해 철저하게 관리한 완벽한 몸이다. 이 몸이 취향이 아니라면 애초에 미적관념이 없는 것일 터다.

- 시도는 해보겠습니다만 혹시 걸릴 것 같으면 전 바로 빠질 겁니다. 그런데 그런 걸 알아서 대체 뭘 하시게요?

“시간을 너무 많이 끌었거든요. 제 인내심이 슬슬 바닥날 것 같아서 말입니다.”

“으윽.”하고 질색하는 듯한 박 비서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환은 무시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의 입가에는 벌써 승리의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깟 오메가, 앞으로 열흘 안으로 자빠뜨려줄 수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그 시각, 해진은 마침 샤워를 하고 나온 촉촉한 몸으로 컴퓨터 앞에 앉았다. 달칵, 달칵, 마우스를 몇 번 클릭해서 들어간 깊은 경로 안쪽, ‘스페셜 컬렉션’이라고 적힌 폴더를 클릭하는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꿀꺽, 침을 삼키며 해진은 폴더 안에 있는 영상 중 하나를 더블 클릭해 열었다. 이 순간은 그가 하루 중 가장 기다리는 시간이었다.

「아마존_999일_생존기_12회.mp4」

바로 외국 유명 탐험가들의 실제 생존일기를 보는 시간이다.

영상을 틀자마자 꼬질꼬질한 남자가 단백질을 섭취하기 위해 벌레를 어떻게 잡을지 설명하기 시작했다. 해진은 아주 진지한 얼굴로, 아니 잔뜩 흥분한 얼굴로 어떤 벌레가 단백질이 많고 잡기 쉬운지 눈여겨봤다.

‘정말 대단해! 진짜 흥분된다!’

탐험가가 독충에 물릴 뻔했을 때는 저도 모르게 손톱까지 물어뜯으며 몰입했다. 그렇게 약 40분 남짓한 영상이 끝날 때까지 해진은 단 한 번도 눈을 떼지 않았다.

12회 영상은 편집된 부분이 조금 많아서 아쉬웠다. 이왕이면 그 보라색 애벌레가 무슨 맛인지도 알려주면 좋았을 텐데. 그리고 이 탐험가는 장비가 좋아서 분명히 나무를 쪼갤 때 윙택틱이라는 유명한 나이프를 사용했을 것인데, 그 과정을 자세히 보여주지 않은 것도 아쉬웠다. 뭐, 나중에 나이프 사용법을 따로 검색해보면 되니까 크게 상관은 없었다.

해진은 영상 파일을 조심스레 클릭해서 키보드의 컨트롤+X 키를 눌렀다. 그리고 ‘대흥분’ 폴더로 파일을 옮겼다.

“아, 정말 재미있었다. 다음 편은 내일 봐야지.”

해진의 하루 중 가장 즐거운 시간이 그렇게 끝났다. 그는 기분 좋게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 누웠다. 꿈에서는 저도 아마존을 신나게 헤집고 다니길 바라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는 이환을 떠올렸다. 제게 고백하던 이환의 모습을.

‘같이 갑시다, 아마존.’

정식으로 교제해달라는 말보다 그 말이 훨씬 더 설렌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해진의 심장은 언제나 그런 쪽에 반응했으니까. 아마존, 사막, 절벽등반, 해저 잠수, 조난, 생존 같은 것들 말이다.

‘특수 요원처럼 입은 환이 씨 보고 싶다…….’

딱 달라붙는 티셔츠에다 하네스도 차고, 허리 옆에는 나이프랑 로프도 차고, 군화 같은 부츠도 신고 말이다. 분명히 멋있겠지. 지금도 멋있는데. 그 탄탄한 팔뚝으로 직접 나무를 베고 뗏목 노를 젓는 환을 생각하자 가슴이 뛰었다. 해진은 이불 속에서 몸을 꿈지럭거리며 혼자 숨죽여 웃었다.

호텔 관리자에게 실컷 잔소리를 하느라 지쳐 있던 오후, 박 비서가 지친 얼굴을 하고 전무실로 왔다. 귀찮게 굴면 바로 쫓아내려 했는데, 다행히도 박 비서는 반가운 소식을 들고 왔다.

“강해진의 개인 컴퓨터를 좀 조사해보았습니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말을 이어보란 투로 눈짓했다.

“좀 위험한 거 좋아하는 것 같더라고요. 조난 상황이라든가, 뭐 그런…….”

심드렁한 박 비서의 말에 환의 눈이 빛났다. 조난 상황, 그래.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저, 사실 오지탐험이 꿈이거든요.’

눈을 빛내며 말하던 그 멍청한 얼굴이 떠올랐다. 고작 공원 한 바퀴도 중간중간 쉬지 않고는 다 걷지 못하면서 그딴 꿈을 꾼다고 했지. 주제도 모르는 오메가였다.

그러나 바로 그게 강해진을 흥분시킬 수 있는 포인트였다. 식물의 물을 어쩌고 하며 설명하던 것은 하나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 흥분해서 떠들어대던 것은 기억이 났다.

그리고 위험한 상황에 처했을 시에는 심장 박동이 증가해서 함께 있는 상대방에게 호감을 느끼는 것으로 착각한단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여태껏 진도가 나가지 않아 갑갑해 미칠 지경이었는데, 이제 슬슬 해결이 될 것 같았다.

환은 제법 철저하게 계획을 세웠다. 데이트 코스를 평소처럼 멋지게 잡아놓고, 마지막은 키스틸 호텔 지하의 영국식 바(Bar)로 정했다. 이곳에는 문을 잠글 수 있는 프라이빗룸이 있었다. 적당히 술을 마시게 한 뒤 문손잡이가 고장 난 것을 알게 되면, 분명 강해진은 흥분할 것이다.

술잔을 기울이며 환은 최대한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끌었다.

“참, 해진 씨, 지내시는 원룸 말입니다, 제가 조금 알아보니 여러 가지 안전 문제가 있더군요.”

“안전 문제요?”

“예. 가스 배관도 엉망이고, 방범 시설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듯합니다. 굉장히 위험한 건물입니다.”

세큐리티 업체를 통해 알아본 바에 의하면 사실 배관도 큰 문제는 없고, 방범 시설은 모든 건물이 그렇듯이 기본적인 시설만 갖춰져 있었지만 구태여 강해진에게 설명할 필요는 없을 터다. 그런데 이 밀가루떡 놈은 상황의 심각성도 모른 채 땡그란 눈을 굴리며 심드렁한 반응을 보이는 게 아닌가.

“뭐, 그게 심각한 건가요? 어차피 원룸이 다 거기서 거기인데…….”

“심각하지요.”

환은 사뭇 진지한 표정을 지으며 그를 향해 상체를 좀 더 가까이 가져갔다.

“제 소유의 오피스텔이 하나 있습니다. 마루투어와도 가깝고, 지금 사시는 원룸보다 훨씬 괜찮을 겁니다. 가구도 모두 마련되어 있습니다. 이쪽으로 이사를 오시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아, 물론 그 오피스텔의 마스터키는 환 자신도 갖고 있을 예정이긴 한데, 그 사실이야 뭐 천천히 말해도 될 터다.

“어, 저도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은데요. 아직 살고 있는 집 계약 기간도 남았고…….”

“그건 제가 처리해드리지요.”

몇 마디를 더 설득했지만 해진은 쉽게 넘어오지 않았다. 빌어먹게도 고집이 센 밀가루떡이었다. 어쩔 수 없이 술이나 더 마시라고 잔이나 채워주었다.

그리고 그날, 환은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 밀가루떡과 제대로 술을 마셔보는 건 처음이라는 사실을. 그 말인즉 강해진의 술버릇을 처음으로 본단 뜻도 되었다.

“헤헤, 환이 씨, 어쩜 이렇게 잘생기셨어요?”

밀가루떡은 술이 조금 들어가기 시작하자 실없이 웃으며 자꾸 추근거렸다. 세균 가득한 손으로 자꾸 제 팔을 건드리는 게 짜증 나서 슬쩍 밀쳐도 자꾸 들러붙어댔다.

“해진 씨, 많이 취하신 것 같습니다. 슬슬 집에 가시는 게 어떨까요.”

“싫어요……. 난 환이 씨랑 있고 싶은데…….”

입술을 비죽거리며 투정 부리는 게 아주 조금, 쥐꼬리만큼 귀엽기는 했다. 하지만 짜증이 더 났다.

“진정하시고, 일단 일어나시죠.”

“싫은데! 난 환이 씨랑 있을 건데!”

확 그냥 한 대 때리고 싶은 것을 꾹 참고 강해진을 들고 안다시피 했다. 문가로 걸어가는 그 잠깐 동안에도 강해진은 꼬물거렸다. 환은 완벽한 방음을 자랑하는 문짝을 가만히 노려보았다. 심호흡을 한 번 한 뒤에 비장한 투로 문고리를 붙들었다.

미리 다 이야기해두었다. 강해진과 함께 이곳에 들어오자마자 일부러 문손잡이를 고장 내고, 적어도 세 시간 동안은 절대 고치지 말라고. 그리고 그 시간 동안은 안에서 무슨 소리가 들리든 관여하지 말라고. 직원들은 다소 떨떠름해했지만 상사의 명령이니 어쩔 수 없이 들어야 했다.

“해진 씨, 제게 편히 기대십시오.”

문손잡이를 쥔 환은 입가에 떠오르는 비틀린 미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후응, 환이 씨…….”

강해진이 그의 팔뚝에 함부로 얼굴을 비벼댔다. 평소라면 소름이 끼쳤을 테지만 그는 지금 기분이 좋았기에 용서할 수 있었다.

“걱정 마십시오, 해진 씨. 제가 댁까지 무사히 모셔다드리지요.”

거짓말이 술술 나왔다. 집은 무슨. 오늘 이 오메가의 몸에 제 유전자를 확실히 심기 전까지는 보낼 생각이 없었다. 한쪽 팔로 그를 안고 문손잡이를 비틀었다. 혹시 멍청한 직원 놈들이 실수라도 했다면 죄다 해고해버릴 셈이었다. 철컥, 하는 소리가 들렸으나 문은 미동도 않았다. 오케이. 벌써 섹스라도 한 것처럼 뿌듯해졌다.

“아, 진짜, 누구 애인인지 정말…… 잘생겼다!”

와중에 강해진은 옆에 삐딱하게 서서 제 얼굴을 보며 연신 감탄해댔다.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뭐 이렇게 호들갑인지. 물론 그의 미적 감각이 특이하지 않아 다행이긴 했다. 이 얼굴을 보고 감탄하지 않는다면 그야말로 재앙이 아닌가.

“환이 씨, 얼굴 만지게 해주세요…….”

“잠시 똑바로 서보십시오, 해진 씨.”

“우으…….”

해진이 억지로 눈을 떴다. 환은 그의 어깨를 양손으로 쥔 채 짤짤 흔들었다.

“우리 이제 큰일 났습니다! 정신 차려보십시오. 아무래도 이 방에 갇힌 것 같습니다.”

일부러 과장스럽게 말했다. 그러자 해진의 눈이 돌연 커다랗게 뜨였다.

“네? 뭐라고요?”

“문이 밖에서 잠긴 모양입니다. 두드려도 연락이 없군요.”

“정말요?”

해진이 눈을 비비더니 환의 등 뒤에 있는 문을 바라보았다. 손을 뻗어 손잡이를 당겨보았지만 역시 열리지 않았다.

그리고 뒤이은 해진의 반응은 역시 예상대로였다.

“헉, 정말 큰일 났네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눈빛이 반짝이는 것이 분명 흥분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술도 깨고 있는 모양이지.

“큰일이군요. 휴대폰도 마침 배터리가 다 되어서 켤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제 휴대폰을 쓰세요.”

하여튼 눈치라곤 없는 놈이군. 해진이 가방을 뒤졌지만 환은 느긋하게 서 있었다. 그럴 줄 알고 그가 화장실에 다녀오는 사이에 휴대폰을 감춰버렸다. 지금쯤 저 바깥 직원 중 하나가 보관하고 있을 것이다.

“어? 이상하네. 휴대폰이 안 보여요…….”

“화장실 가실 때 떨어뜨리신 것 아닙니까? 나가면 제가 찾아보라고 직원들에게 말하겠습니다.”

해진이 다시 돌아와 문손잡이를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당연히 꿈쩍도 않았다.

“그나저나 큰일이네요. 이렇게 갇히다니.”

그가 턱을 쥐고 사뭇 진지하게 말했다. 와중에도 눈은 반짝였다. 누가 봐도 안타까워하거나 겁먹은 기색은 아니었다. 기쁨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길 바라며 환은 슬며시 강해진 쪽으로 다가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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