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6)

그 시각, 환은 인수합병 건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짜증을 누르느라 머리가 다 아플 지경이었다.

“저, 전무님. 식사하실 시간입니다.”

박 비서가 피곤 가득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제야 환은 잊고 있던 어떤 존재를 떠올렸다.

“강해진 씨와 스케줄 잡았습니까?”

“예. 좀 전에 메시지 발송했습니다.”

박 비서는 환의 휴대폰을 조심스레 책상 위에다 올려놓았다. 놓인 휴대폰을 환이 아주 불만스러운 투로 노려보았고, 박 비서는 조금 삐뚤어진 각도를 똑바로 고친 뒤 얼른 재킷 안주머니에서 소독제를 꺼내 위에다 뿌렸다. 그제야 상사의 얼굴에서 불만이 사라진다.

“그래요. 그리고 점심은 패스하지.”

박 비서가 나간 뒤 환은 다시 머리를 싸매고 상대 기업의 부채 현황을 비롯한 각종 사항이 정리된 표를 들여다보다가 미간을 손으로 꾹 눌렀다.

그리고 그는 다시 그 오메가를 떠올렸다.

오메가와 알파의 매칭률은 DNA 샘플을 갖고 진행한다. 물론 두 사람 모두의 동의도 있어야 하지만, 이환 정도 되는 위치의 사람이라면 상대방의 동의서 따위는 생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오메가와 자신은 99.99퍼센트의 매칭률을 기록했다. 가히 기록적인 퍼센트였다. 아이를 갖기만 하면 그 어떤 유전병 없이 건강하게 태어날 확률인 것이다.

강해진은 약해 보이는 오메가였다. 꼭 생긴 건 주무르다 만 밀가루 반죽처럼 허여멀겋게 생겨서는, 줏대도 없이 헤실헤실 웃는 얼굴이 제법 우스웠더랬다.

‘아이만 낳게 하면 된다.’

물론 강제로 낳게 할 방법도 있기는 했다. 좀, 아니, 많이 비윤리적이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왕이면 일을 깔끔하게 처리하고 싶었다. 괜히 멀쩡한 사람 들쑤셨다가 말썽이 생기는 것보다 낫겠지. 그리고 제 조모가 오메가까지 데려오라고 했으니 말이다.

만나서, 아이를 낳게 하고, 보상금을 넉넉히 안겨준 뒤, 조모에게 오메가를 보여주고, 재산을 받자마자 깔끔하게 헤어진다. 그것이 환의 계획이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결혼이고 연애고 주기적인 성관계고, 그런 건 말도 안 된다.

그저 처음에 좀 잘해주다가 아이를 낳으면 보상을 해주겠다 말하면 아마 좋아서 침을 질질 흘리겠지. 입고 있는 싸구려 정장과 반들반들하게 닳은 슈트케이스를 보면 그러고도 남을 놈이다.

게다가 조사 결과, 가족도 없이 혼자 벌어서 월급으로 근근이 살아간다고 했으니. 저렇게 가난한 놈들은 돈이면 환장하지 않나. 흙탕물에서 뒹구는 불쌍한 오메가를 구제해주는 것이다.

환은 책상 위 거울을 보며 넥타이 매무새를 정리하고 깨끗이 빗어 넘긴 포마드헤어를 확인했다. 방금 전까지 인수합병 문제로 짜증이 머리끝까지 차 있었는데, 지금은 불쾌감은 온데간데없고 미소가 떠 있었다.

콧노래까지 부르며 가뜩이나 깔끔한 얼굴을 몇 번이고 점검하던 중, 박 비서가 돌려놓고 간 휴대폰이 진동을 울렸다.

「강해진」

화면에 뜬 글자를 보고 그의 미간이 다시 구겨졌다. 잠시 고민하다가, 전화 받기 버튼을 눌렀다.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었다. 어차피 내 아이를 낳으려면 개고생을 해야 할 텐데.

“강해진 씨, 반갑습니다.”

- 어, 안녕하세요. 바쁘신데 제가 괜히 전화한 건 아니죠……?

알면 전화를 하지 말았어야지, 하는 말이 목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별말씀을요. 마침 저도 해진 씨에게 전화를 하고 싶었습니다.”

- 정말요?

“그럼요. 저는 거짓말을 못 하는 성격입니다.”

수화기 너머에는 수줍게 웃는 목소리가 들리고, 마주한 거울 속 제 얼굴에는 섬뜩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 미소가 흐트러지지 않도록 유지한 채 말을 이었다.

“특히 오메가 앞에서는 더더욱 거짓말을 못 합니다. 알파들이란 원래 그렇거든요.”

-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왠지 부끄럽네요. 식사는 하셨어요?

“바빠서 못 했습니다. 강해진 씨는 꼭 챙겨 드십시오. 귀한 몸이지 않습니까.”

‘귀한 몸’이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방점을 찍었다. 제 아이를 낳아줄 몸이니 당연히 귀한 몸이긴 하지.

- 저, 사실 그날 밤에 한잠도 못 잤어요.

“저런, 제가 혹시 강해진 씨의 잠을 빼앗아간 겁니까?”

걱정이 듬뿍 묻어나는 말투는 진심이었다. 잠을 안 자거나 해서 괜히 몸을 해치면 골이 아파질 테니까.

- 그냥…… 좀 설레서요. 이런 적이 처음이라…….

그래, 동정이란 사실은 환 역시 알고 있었다. 더럽게 여기저기 구멍을 내주고 다니는 것보다야 훨씬 건강하고, 아이 낳기도 쉽겠지. 생각해보면 운이 좋은 편이다. 이런 오메가와 무려 99.99%의 매칭률을 보이다니.

“저 역시 처음입니다. 그러니 부끄러워 마십시오.”

이렇게 매칭률 높은 오메가는 처음이지.

강해진은 귀찮게도 그 뒤로 무려 2분 동안이나 수다를 떨어댔다. 환은 입가에 경련이 이는 것을 참으며 대충 예, 예, 하고 맞장구를 쳤다. 그 정도야 해줄 수 있었다. 사업상 만나는 사람들이 이 밀가루떡 같은 놈보다 몇 배는 더 재수 없고 더러우니까.

아이를 낳도록 설득할 수 있을 때까지만 잘 대해주면 된다. 그뿐이었다.

그러니 다음 데이트를 준비하는 일도 어려울 게 없었다. 더러운 영감들과 미팅을 하는 것보다야 몇 배는 쉬운 일이다.

* * *

친구 윤경훈은 해진이 알파와 데이트를 한다 하니 깜짝 놀랐다.

“야, 네가 웬일이냐? 평생 수절할 것처럼 살더니만.”

“내가 언제? 알파들이 나한테 관심이 없었던 거지.”

“과연 그럴까?”

윤경훈이 눈을 곱게 흘기며 씩 웃었다.

“내 주변에 알파야 많았어. 보통 나를 오메가 취급 안 해서 그렇지. 너도 알다시피 나는 향도 약하고, 히트사이클도 거의 없다시피 하니까. 말하자면 번식에 탈락된 개체처럼 말이야.”

해진은 테이블을 톡, 톡, 두드리며 또박또박한 어투로 말했다. 윤경훈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좀 심한 말이다, 야…….”

“화를 내는 게 아니야.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해. 오히려 히트사이클로 고생 안 해서 좋지. 좀 서운할 때야 많지만, 내가 이렇게 태어난 걸 어째.”

면구스러워하는 윤경훈의 표정을 마주한 채 해진은 괜찮다는 투로 웃었다.

“너 연애한다니까 좋기는 한데, 조심하긴 해라. 알파들 중에서 오메가 데려다가 나쁜 짓 하는 놈들이 없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돈 노리고 덤비는 놈들도 있는 거 알지? 이건 걱정돼서 하는 말이다, 인마.”

돈을 노리고 덤벼들다니. 물론 그런 알파들이 있기는 했다. 알파들이 오메가를 대상으로 저지르는 범죄는 항상 있으니 윤경훈의 걱정이 이해가 가기도 했다. 제 친구의 얼굴은 전에 없이 심각했다. 덕분에 그 대상이 무려 키스틸의 이환 전무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두 번째 데이트는 미리 약속한 대로 카페에서 만남을 가졌다. 해진은 오래 고민하다가 편하게 입고 나왔는데, 환 역시 니트에 청바지를 입은 편한 차림이었다. 마음이 통했나 싶어 두근거렸다. 물론 그의 니트 핏은 저와 비교할 게 아니었지만.

‘흰 니트를 입었는데 왜 이렇게 몸이 좋아 보여…….’

초여름에 어울리는 얇은 흰 니트는 오히려 티셔츠보다 그의 몸매를 더 적나라하게 드러내었다. 전에도 느낀 거지만 가슴 근육이 장난 아니었다. 어깨는 왜 이렇게 단단해 보여. 모르긴 몰라도 전문적으로 트레이닝 같은 것도 받겠지. 그러지 않고서야 나올 수 없는 몸이다.

해진은 괜히 제 자그마한 체구가 부끄러웠지만,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그를 마주 보며 대화를 이었다.

‘나는 당당한 오메가야. 알파인 이 사람이 먼저 데이트 신청을 했고.’

다행히 해진이 부끄러워할 새도 없이 환은 그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그렇게 매너가 좋은 알파는 처음이었다.

“이렇게 또 만나게 되니 즐겁고 영광입니다.”

목소리는 또 어찌나 좋은지. 성우나 배우 뺨치는 음색은 들을 때마다 가슴이 찌르르해졌다.

“저야말로 영광이에요.”

“오늘, 저랑 저녁 드셔줄 거죠? 전에 약속하셨잖습니까. 저와 함께 식사해주시겠다고.”

“그럼요. 당연하죠. 저, 그런데 점심은…… 자주 거르세요?”

통화 중에 밥을 먹지 않았다는 말이 떠올라 물었더니 아니나 다를까 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워낙 일도 많고 정신도 없어서 말입니다. 제 끼니 하나 챙기기가 쉽지 않군요.”

“밥 안 드시고 과자나 드시고 그럼 안 돼요. 밥 대신 커피랑 디저트 같은 거나 드시는 거 아니에요?”

환은 정곡이 찔린 표정으로 입을 잠시 벌렸다가 닫았다. 해진이 그럴 줄 알았다는 투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에휴, 못 살아.”

그리곤 들고 있던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해진은 당당히 가슴을 펴고 환을 마주했다.

“사무실 여기서 걸어서 20분 거리죠?”

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키스틸 레저 사무실과 해진이 다니는 마루투어는 그리 멀지 않았다.

“저랑 같이 밥 먹어요. 제가 도시락 싸드릴게요.”

순간 환의 얼굴에 떠오른 날카로운 반감을 해진은 알아보지 못했다. 해진은 그가 다만 저를 부담스러워한다 생각하며 환의 손목을 덥석 쥐었다.

“걱정 마세요. 저 요리는 제법 잘해요. 혼자 오래 살았거든요. 맛있는 도시락 매일 싸드릴게요. 같이 먹어요.”

잡힌 손목을 내려다보는 눈매에 날이 잔뜩 서 있었으나 해진은 여전히 그가 그저 부담스러워한다고만 생각했다.

“어차피 저 혼자 살아서 식재료도 많이 남아요. 사양하지 말아주세요.”

초롱초롱하게 눈을 빛내자 그제야 환은 슬그머니 손목을 빼내며 미소 지었다.

“사실 저는 사업상 약속이 많아서 점심을 같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해진 씨의 이 자그마한 손으로 열심히 도시락을 싸주셨는데, 기껏 먹지 못하게 되는 일이 생길까 겁이 나는군요.”

“아…….”

해진은 멋쩍게 볼을 긁었다. 그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그래, 전무님은 만나는 사람도 저보다 훨씬 많겠지.

“하지만 해진 씨가 만든 도시락은 언젠가 꼭 먹어보고 싶군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먼저 요청해도 되겠습니까?”

뒤이은 말에 어마어마하게 감동한 해진은 고개를 다섯 번 연달아 빠르게 끄덕였다. 그와 함께 도시락을 먹을 생각에 즐거워진 해진은 환이 테이블 아래에서 냅킨으로 손목을 박박 닦는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환은 그날도 종일 해진에게 다정하게 대해주었다. 해진은 그와 있는 것이 즐거웠다. 여유롭게 지어 보이는 미소도, 커다랗고 곧은 손도, 낮은 음색을 내는 목울대도, 티 하나 없이 깨끗한 니트도 모두 좋았다.

이렇게 잘생긴…… 아니, 다정한 알파라면 뭐든 다 내줄 수도 있을 것 같은 생각마저 드는 것이었다.

사실 이렇게 한 사람의 오메가로서 알파와 데이트를 제대로 한 적도 처음이었다. 여태까지 마주친 알파들은 저를 이렇게 대해주지 않았으니까.

“혹시 커피가 입맛에 안 맞으십니까?”

한창 대화를 이어가던 중 환이 물었다. 해진의 앞에는 생크림을 반도 떠먹지 않은 비엔나커피가 놓여 있었다. 이 카페에서 가장 유명한 메뉴가 아인슈패너라며 환이 주문해준 것이었다.

“아뇨, 괜찮아요. 맛있는데요.”

“입맛에 맞지 않으시면 새로 주문하겠습니다. 이곳의 에스프레소 콤파냐도 괜찮은 편인데, 한번 드셔보시지요.”

뒤이은 말에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 주문 안 해주셔도 괜찮아요. 단 커피를 오랜만에 먹으니까 잘 안 들어가서요. 제가 입이 짧은 편이라……. 사실 단 걸 많이 먹으면 속이 아파요.”

단 걸 많이 먹으면 탈이 난단 말은 사실이었다. 시그니처 메뉴라면서 그가 추천해주기에 딱히 거절하기도 뭐하고 해서 아무 말 않았었다. 단 커피가 몸에 받지 않다뿐이지 싫어하는 건 아닌데, 돈을 아끼느라 아메리카노만 먹다 보니 쓴 커피 맛에 길들여진 모양이다.

환이 표정을 굳히며 직원을 부르려 들었던 손을 내렸다.

“이런, 제가 멋대로 주문을 했군요. 죄송합니다.”

“괜찮아요. 맛은 있어요. 진짜로요.”

그의 얼굴에 정말로 미안함이 묻어났기에 해진은 얼른 손을 내저었다. 그러나 환은 스스로를 꾸짖는 표정을 하곤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나가지요. 괜찮으시다면 조금 걸으시는 게 어떠십니까? 소화에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러나 해진에게 말을 걸 때에는 다시 지극히 다정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해진은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느끼며 그를 따라 일어섰다.

둘은 근처 공원을 천천히 오래 걸었다. 환이 스스로에 대한 이야기를 꽤 많이 해주어서 해진은 기분이 좋았다. 그도 어릴 때 부모를 잃었다는 사실에 해진은 약간의 동질감을 느꼈다. 그의 조모인 키스틸 회장이 손자에게 쉽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고 현장직부터 다니게 시켰다는 말에는 존경심마저 들었다.

“그런 사연이 있는 줄은 상상도 못 했어요.”

“공식 석상에선 꺼낸 적 없는 말이니까요. 창피하지 않습니까. 할머니에게 잡혀 사는 손자라니.”

그가 웃었고, 해진도 따라 웃었다.

공원은 여름답게 눈부셨다. 배롱나무에는 진분홍색의 꽃이 흐드러지게 펴 있고 분수는 작은 무지개를 만들어냈다. 산책 나온 강아지가 해진을 보고 꼬리를 흔들며 달려와서 해진은 손을 흔들며 “안녕.” 인사해주었다.

얼마 걷지 않아 공원 내부의 작은 매점이 나왔다. 쉬었다 가자는 환의 말에 해진은 기꺼이 그러자고 했다. 가뜩이나 약한 체력에는 이 긴 산책이 힘들던 차였다.

“마실 것 드시겠습니까?”

“아, 저는 그냥 옥수수수염차나 물 같은 게 좋을 것 같아요.”

환은 캔커피와 옥수수 수염차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어쩐지 검지와 중지로 카드를 쥔 모양이 이상했다. 꼭…… 카드를 주목해달라는 듯했다. 크기는 보통 카드와 똑같고 무늬가 거의 없는 새카만 색인데, 번뜩거리는 게 고급스러워 보였다. 부자들은 역시 카드도 좀 특이한 걸 쓰네, 하고 해진은 생각했다.

“2천9백 원입니다.”

페트병을 받아 든 해진은 활짝 웃으며 고맙다고 인사했다. 환의 표정이 어째 조금 떨떠름해 보였지만, 제가 피곤해서 착각했겠거니 생각했다.

음료수를 든 두 사람은 매점 앞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여름이라 나무 사이에 풀벌레들이 꽤 꼬여들었다. 해진은 문득 이 짧은 침묵을 깨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색하지는 않지만, 그와 더 많은 대화를 하고 싶었다.

“환이 씨, 그거 아세요?”

환의 부드러운 시선이 그를 마주 보았다.

“산에서 조난당했을 때, 물을 구하려면 저런 나뭇가지 끝에다가 비닐 봉투를 묶어 두면 돼요. 특히 햇빛이 많이 비치는 나뭇가지로 골라서요.”

환이 놀란 얼굴을 했다.

“정말입니까? 처음 안 사실이군요.”

“모든 식물은 물을 갖고 있거든요. 잎 뒷면으로 식물의 수분을 방출시키는 거예요. 신기하죠?”

“신기하군요. 해진 씨는 참 대단하십니다. 어떻게 그런 걸 다 알고 계십니까?”

아는 것이라곤 여행 관련 상식이나 오지탐험과 조난 대처에 관한 것밖에 없는데, 그는 키스틸 레저의 전무이므로 저보다 여행에 대해서는 훨씬 더 잘 알 터였다. 그래서 알고 있는 조난 관련 상식을 끄집어냈더니 이환은 진심으로 감탄하는 표정을 지으며 저를 보고 있었다. 해진은 조금 감동했다.

“저, 사실 오지탐험이 꿈이거든요. 몸이 약해서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말이에요.”

“오지탐험이라면…… 아마존이나 사막 같은 미개척지를 다니는 걸 말합니까?”

“네, 맞아요. 사실 오지라는 말이나 미개척지라는 표현은 서구중심주의적인 표현이지만요.”

“그렇군요. 맞는 말씀입니다. 그런 용어들은 주의를 해야지요.”

따뜻하게 웃는 이환은 여름 햇살만큼이나 아름다웠다. 해진은 문득 생각했다. 저런 얼굴을 갖고 살면 어떤 기분일까? 매일 아침 거울을 보면서 감탄하지 않을까?

“해진 씨는 정말 용감하시군요.”

실없는 생각 사이로 그의 목소리가 불현듯 파고들었다. 해진은 그의 침범이 싫지 않았다.

“제가……요? 전 그냥 몸도 약하고 해서…… 어차피 이런 상식, 써먹을 일도 없을 거예요. 이런 몸으로 탐험 같은 건 불가능하거든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환의 목소리가 어쩐지 확신에 차 있어서 해진은 말을 뚝 멈추었다.

“해진 씨, 잘 들으세요.”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사람을 믿게 만드는 듯한 매력이랄까, 혹은…… 위압감이라고 해야 할까?

“해진 씨께서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그냥 제게 말씀하시면 됩니다. 그럼 모두 해결될 겁니다.”

해진은 저도 모르게 그를 빤히 마주한 채로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저랑 있으면 불가능한 일은 없습니다. 그 사실을 기억하세요. 평범한 알파와 저의 차이점이니까요.”

어쩌면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이렇게 멋있게 할 수 있을까? 해진은 감탄하느라 입을 벌릴 뻔했다. 뒤이어 씩 웃어 보이는 환의 얼굴을 보자 용기가 용솟음쳤다.

“그, 그럼, 저랑 아마존 탐험 가요!”

불쑥 말을 내뱉자 환이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해진은 금세 후회했다.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담.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수습할 말을 짜냈다.

“그러니까…… 워크숍 겸…… 키스틸 레저의 새로운 상품 개발을 위한 협력 워크숍이요. 어차피 저희 마루투어랑 협약 관계니까, 제가 기획서 쓰고 저희 팀장님께 말씀드려서 잘하면…….”

열심히 말하던 해진이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이 어느새 시뻘게졌다. 무릎을 보고 있어도 환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날 뭐라고 생각할까. 분명히 바보 같아 보이겠지.

“죄송해요……. 이야기를 들으니까 너무 흥분이 되어서요…….”

탐험과 관련된 일은 언제나 그에게 흥분을 가져다주었다. 얌전하고 꼼꼼한 성정의 해진이지만, 드물게 탐험 관련 이야기만 들으면 이렇게 들뜨곤 했다. 그를 흥분시키는 유일한 소재였다. 그래도 그렇지 이제 막 호감을 얻기 시작한 상대에게 아마존에 같이 가자는 말은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했다.

“저, 제가 방금 드린 말씀은 잊어주시…….”

“같이 갑시다, 아마존.”

돌연 끼어든 환의 말에 해진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농담일까? 헛소리를 한 저를 놀리는 것일까? 라고 생각하기엔 환의 얼굴이 몹시 진지했다.

“저도 해진 씨와 함께 아마존에 꼭 가고 싶습니다.”

그 말이 해진에게는 최고의 고백으로 들렸다. 세상에는 수많은 고백의 종류가 있지만, 이렇게 그를 설레게 하는 고백은 절대 없을 거라고 확신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정말이세요……?”

“정말입니다.”

환이 힘줘서 대답하자 해진은 활짝 웃었다.

“그 말씀, 절대 무르시면 안 돼요!”

“……당연하지요.”

아주 잠깐, 환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은 미처 보지 못했다.

공원 한 바퀴를 마저 다 돌았을 때 해진은 숨이 차서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약한 몸이 고작 산책 좀 했다고 힘들어하는 것이었다.

“괜찮으십니까, 해진 씨? 입술이 파랗습니다. 땀도 흘리고 계시는군요.”

해진은 면구스러움에 어색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괜찮아요.”

“괜찮기는요. 어서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주차 여기서 멀리 하시지 않으셨어요? 환이 씨 혼자 힘들게 걸어가시는 건 싫은데…….”

근처 벤치에 저를 앉힌 환이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사람을 안심시키는 미소다.

“제 걱정은 마십시오, 해진 씨.”

차가 있는 곳까지 그 혼자 달려가리라 생각한 해진의 예상과 달리 환은 휴대폰을 꺼내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박 비서님, 여기 공원 천사분수 근처입니다. 동쪽 입구로 차 좀 가지고 오십시오.”

할 말만 하고 전화를 딱 끊어버리는 그의 모습은 어딘가 차가워 보여서 좀 낯설었다. 그러나 해진을 마주한 채 보이는 미소만은 여전히 달았다.

환은 그 달콤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해진을 살피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지병을 갖고 계시거나 하지는 않으신지요.”

“그건 왜…….”

혹여 제 몸이 약해서 싫다 할까, 돌연 겁이 난 해진은 반사적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환이 여전히 달콤한 얼굴로 그를 마주했다. 뺨이라도 쓸어내릴 것 같은 표정이었으나 손을 대지는 않았다.

‘절대 먼저 손을 대지 않는다니, 역시 매너 하나는 끝내준다니까.’

해진은 생각했고, 환은 매끈한 입술을 열었다.

“왜긴 왜입니까. 당연히 걱정이 되어서 물어보는 겁니다.”

올곧은 말에 해진은 잠시나마 그를 의심한 것을 후회했다.

“몇 가지 병을 갖고 있긴 한데, 그렇게 심한 건 아니에요. 약한 비염이 있고 알레르기 한 열 가지 정도랑…… 심장이랑 폐가 약한 편이고요. 연골도 선천적으로 약해서 오래 걸으면 안 좋아요. 딱히 큰 병은 없고 그냥 그 정도예요.”

“……그거 정말 다행이군요.”

환의 떨떠름한 표정은 알지 못한 채 해진은 혼자 말을 이었다.

“사실 저, 지하철이나 버스 타는 것도 너무 힘들어서 집도 회사에서 가까운 곳으로 옮긴 거거든요. 저희 회사 근처에 월세 엄청 비싼 거 아시죠? 저는 그래서 전세 대출 받았는데, 확실히 월세보다 더 이득인 것 같기는 해요. 이자가 월세보다 더 싸니까…….”

한참 조곤조곤 떠들다 뒤늦게야 제 말만 너무 했다 싶어 아랫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아, 죄송해요. 환이 씨는 이런 돈 이야기 전혀 관심 없으실 텐데……. 집 걱정 같은 것도 없으시고. 그래도 저 엄청 뿌듯해서 자랑하고 싶었거든요. 제 나이에 자기 힘으로 전셋집 얻는 거, 절대 쉬운 거 아니거든요!”

물론 제 눈앞의 이 남자에 비할 바가 아니겠지만, 해진은 또래에 비해 나름대로 모아놓은 돈도 꽤 있는 편이고 형편이 어렵지도 않았다. 회사에서 받는 각종 인센티브만 해도 상당하니까.

“이런 이야기, 재미없으시죠?”

혀를 쏙 내밀고 멋쩍게 웃었으나 환은 불편한 기색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외려 부드럽게 웃어 보였다.

“재미없지 않습니다. 돈이 우리 삶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란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다행이에요. 좀 걱정했거든요. 혹시라도 환이 씨가 저를 속물이라고 생각하시지 않을까 싶어서…….”

“절대 아닙니다.”

제법 진지하게 못 박듯 해준 대답에 다시 안심했다.

“사실 어릴 때 부모님 돌아가신 이후로…… 믿을 건 돈밖에 없더라구요.”

아무리 건실한 모습을 보여도,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소용없었다. 혼자 사는 세상은 언제나 무서웠다. 정글에서는 철저한 대비가 생존율을 높이고, 산에서는 조심성이 생존율을 높인다. 그리고 이 사회에서 생존율을 확실히 올릴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돈밖에 없었다.

“돈이 곧 힘이에요. 특히 저처럼 빽 없는 사람은요.”

조금 씁쓸한 심정으로 말한 뒤 환의 눈치를 살짝 보았다. 다행히도 환의 표정은 여전히 부드러웠다.

“어쩌면 저와 강해진 씨 사이에는 공통점이 있는지도 모르겠군요.”

말이라도 그렇게 해주어 고마웠다. 돈 부족함 없이 살았을 그가 금전적인 문제에서 저와 비슷할 게 뭐가 있단 말인가. 해진은 눈을 휘며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한 번 살짝, 쥐었다 놓았다.

“환이 씨는 정말 친절하시네요.”

이환은 아주 잠깐 당황하는 듯이 보였다가, 이내 표정을 풀었다.

5분도 지나지 않아 누군가 운전한 환의 차가 도착했다. 한사코 사양했으나 환은 그를 꼭 집에 데려다주고 싶다고 했다.

“박 비서, 오후 스케줄 취소해주십시오. 지금은 강해진 씨를 안전하게 댁까지 모셔다드리는 것이 가장 급선무니까요.”

“저, 오후 스케줄 이미 없습니다만…….”

“몇 번을 말합니까! 당장 취소해요!”

운전석에 앉은 박 비서라는 사람이 아주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해진은 면구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저 때문에 스케줄을 취소하다니.

“저, 전무님, 그렇게까지 해주시지 않아도 돼요. 저 때문에 스케줄을 취소하시다뇨.”

“괜찮습니다. 제가 그러고 싶어서 그러는 거니까요.”

환의 얼굴에서 웃음기는 사라졌으나 그 따스한 저음이 해진을 편하게 해주었다.

“참, 그리고 공원에 계단 죄다 없애라고 해요.”

“전무님, 저거 시에서 운영하는 거라서요…….”

“기부금 주면 시키는 대로 할 겁니다. 계단 깨끗하게 없애고 걷기 쉽게 만드십시오. 중간에 벤치도 좀 더 추가시키고.”

“하아……. 일단 통화는 해보겠습니다…….”

“앞으로 강해진 씨와 자주 산책할 곳이니 불편함이 없게 만들어야겠습니다. 아시겠습니까?”

“아이고, 예에, 예에에.”

시의 재산을 아무렇지 않게 언급하는 그가 굉장히 멋있다고 해진은 생각했다. 이환은 저와 달리 아주 당당하고 추진력도 강한 사람인 것 같았다.

“정말 멋있으세요, 환이 씨.”

수줍음을 무릅쓰고 말했다. 환이 갑자기 무슨 말이냐는 듯한 표정을 하고 해진을 마주했다.

“환이 씨는 돈을 쓰실 줄 아는 분 같아요. 그래서 정말 멋있으세요.”

오랫동안 가족도, 뒷받침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살아온 해진에게 있어 돈은 곧 권력이었다. 그가 보기에 이환은 권력을 제대로 사용하는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막상 말을 꺼내놓으니 속물처럼 보이진 않을까 걱정됐지만 다행히도 이환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해진 씨의 칭찬을 들으니 제가 굉장히 대단한 사람이 된 것 같군요.”

“저야말로 대단한 분이랑 데이트…… 하고 있어서 너무 기뻐요.”

붉어진 얼굴을 감추려 시선을 내린 해진은, 문득 그의 허벅지가 제 허벅지와 닿아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와 거의 동시에 환이 닿은 허벅지를 얼른 떼어내는 것이 아닌가. 마치 화들짝 놀란 듯이 말이다. 해진은 속으로만 웃었다.

‘은근히 수줍음이 많으시다니까.’

이렇게 허벅지가 닿는 것만으로도 깜짝 놀라서 움츠리다니 말이야.

불편한 마음이 조금 풀어지기는 하였으나 여전히 미안하기는 했다. 해진은 눈치를 보며 앉은 자세를 고쳤다. 나란히 놓인 다리 굵기 차이에 또 부끄러워졌다.

“전무님.”

“이환이라고 불러주십시오.”

“환……이 씨, 여쭤볼 게 있어요.”

해진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운전석에 타인이 있는 게 조금 신경 쓰였지만, 어차피 환과 가까운 사람 같아 보이니 괜찮겠지 생각하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한테 이렇게 잘 대해주시는 이유가…… 혹시 따로 있으신가요?”

자신은 보잘것없는 일개 여행사 사원이었다. 능력이 제법 있다고는 하지만 그는 곧 그룹 하나를 승계받을 재벌이고, 자기는 평범한 보통 사람 아닌가. 이환이 제게 이렇게까지 해주는 데에는 이유가 있으리라 생각했다.

환은 그러나 그 어떤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당신이 힘들지 않길 바라니까요.”

해진은 그 말을 곧바로 알아듣지 못했다. 눈을 깜박거리고 있자니 환은 살짝 웃으며 관자놀이를 긁었다. 수줍은 티를 내는 그 동작마저도 해진이 보기에는 우아하기 그지없었다.

“저도 설명하기 힘들군요. 뭐라고 표현해야 할까요. 그저…… 저와 있는 순간에는 계속 해진 씨가 행복하기만 바랍니다.”

표현 하나하나가 좋았다. 이 남자를 만나기 위해 여태 고생한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해진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한 물로 젖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살며시 시선을 피했다. 그를 더 마주하고 있기가 힘들었다. 더 오래 마주하고 있다가는 제 몸이 끓어 넘칠 것만 같았다.

이동하는 동안 노을이 졌다. 집 근처까지 가는 동안 해진은 온몸을 간질간질하게 하는 어떤 감정 속에 푹 빠져 있었다. 옆에 앉은 환의 존재가 엄청 크게 느껴졌다. 아니, 옆에 있는 그가 자신을 삼키고 있는 것만 같았다.

아주 옅은 위스키 향이, 환의 알파 향이 코끝을 애무하듯 간질였다. 해진은 숨을 참고 싶었으나 너무나 유혹적인 그 향을 모두 들이마셨다.

차가 멈춰 서자마자 환이 가장 먼저 내렸다. 그는 해진이 내리기 편하도록 문을 열어주기까지 했다.

“혹시 다음 주 주말, 시간 괜찮으십니까?”

설득력 강한 저음으로 묻는 말에는 시간이 괜찮지 않아도 괜찮게 만들겠다 말하고 싶었지만, 간신히 정신을 차린 해진은 면구스럽게 미소 지었다.

“저…… 다음 주 동안은 아무래도 좀 뵙기가 곤란할 것 같아요.”

작은 목소리로, 그러나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한 말에 내포되어 있는 바를 환 역시 충분히 알아들었으리라 믿었다. 알파와 오메가 사이에 오가는 이런 대화의 주제는 언제나 하나로 귀결되니까. 바로 히트사이클.

해진은 히트사이클 증상이 심한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왕 관계를 이어나갈 것이면 이런 사실은 알파에게 알리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리고…… 아주 드물지만, 알파와 만난 뒤로 히트사이클 증상이 심해지는 경우도 있다곤 하니까 말이다.

역시 말을 알아들은 것인지, 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몸 추스르시고, 편해지시면 연락 주십시오.”

그의 얼굴이 몹시 덤덤했기에 해진 역시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골목 쪽으로 걸어가는 내내 환의 시선은 올곧게 그를 향하고 있었다. 뒤를 흘끔 돌아보자 환이 한쪽 손을 들어 보였다. 시력이 좋은 편이 아닌데도 나머지 손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삐딱하게 선 그 모습은 또렷하게 보였다.

돌아서 골목 안까지 걸어가면서도 환의 시선이 계속 느껴졌다. 꼭 그가 바로 등 뒤에 있는 것처럼 말이다. 어둑해진 골목에 저 혼자만 빛을 안은 듯했다.

해진은 열감을 간직한 채로 잠들었다. 그리고 지독할 정도로 현란한 꿈을 꾸었다.

깨어났을 때 꿈 내용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열기가 느껴졌다. 해진은 끙끙 앓으며 문득 깨달았다. 히트사이클의 예정 일자가 일주일이나 앞당겨졌음을.

그리고 이번에는 여태까지 겪은 것과 차원이 완전히 다른 증세를 동반하고 있다는 것도.

* * *

강해진을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동안 환은 그가 잡았던 손목을 소독제로 박박 문질러 닦았다. 맞닿았던 허벅지에도 소독제를 잔뜩 뿌렸다. 그래도 찝찝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어딜 내 몸에 씻지도 않은 손을 대는 것인가. 생각할수록 짜증이 났다. 구역질이 치밀었다.

“아직 멀었습니까?”

“차가 좀 밀리네요. 정 급하시면 내려서 뛰어가시겠습니까?”

박 비서의 느긋한 대답에 환은 이를 아득 갈았다. 빨리 온몸을 비누로 박박 문질러 닦고 싶었다.

아쉬운 대로 다시 소독제를 손에 뿌리며 그는 문득 생각했다. 섹스는 이것보다 더 역겨울 텐데. 어쩐다.

‘빌어먹을…….’

이런 불쾌감은 처음이었다. 강해진과 닿은 곳마다 홧홧하게 뜨겁고 자꾸 몸에 열이 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하얀 찹쌀떡 같은 얼굴, 특히 동그란 볼과 새카맣고 건방져 보이는 눈동자가 자꾸만 떠오르는 것이었다.

왜 자꾸 그 오메가가 생각나는 것일까. 그는 생각할 것이 많았다. 인수합병 건만 해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다. 강해진 따위에게 쓸 신경머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환은 계속 그를 생각했다. 그를 생각하는 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불쾌했다.

솔직히, 오메가를 유혹하는 일이 이렇게 거북할 줄은 몰랐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그 밀가루떡같이 생긴 오메가가 저를 그렇게 좋아하게 될 줄은 몰랐다. 대충 호감을 얻은 뒤에 일을 진행하려 했는데, 강해진이라는 오메가는 고작 몇 번 만나놓고 꼭 저를 남편 보듯 하는 게 아닌가. 오메가들은 원래 이렇게 멍청한가? 정말로 저 멍청한 유전자에게 제 씨를 빌려주어도 되는 것인가?

머리가 아파왔다. 들러붙는 것은 질색이었다. 아이고 뭐고 죄다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환은 모든 것을 갖고 싶었다. 조모가 시키는 대로 손주를 안겨주고 키스틸을 모두 제 손에 넣을 것이었다. 제 손에 들어오지 못한 것은 항상 그를 미치게 했다. 소유욕은 언제나 그의 원동력이 되어주었다.

차창 밖으로 불빛들이 스쳤다. 환은 문득 생각했다.

‘골목 안까지 지켜볼 걸 그랬나.’

그 더러운 동네는 골목 안이 꽤 어두웠단 말이지. 밀가루떡 같은 놈을 딱히 걱정하는 건 아니었다. 기껏 힘들게 찾은 오메가에게 흠집이라도 생기면 곤란해지니까, 그저 그뿐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몸을 박박 닦고 나올 때까지도 환은 자꾸 그 어둑한 골목을 떠올렸다. 몇 번이나 휴대폰을 집었다가 도로 내려놓길 반복했다. 그리고 새벽 두 시가 다 되어서야 메시지를 발송했다.

[잘 도착하셨습니까? 좋은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강해진에게서 답은 오지 않았다. 환은 휴대폰을 쥔 채로 침대에서 뒤척였다. 새벽 세 시, 네 시가 될 때까지 기다렸으나 여전히 휴대폰은 묵묵부답이었다.

눈을 감고 누웠으나 강해진의 뺨이, 저를 보던 눈빛이 자꾸만 떠올랐다. 체구는 또 어찌나 작던지, 그렇게 작은 몸으로 아이를 가질 수는 있을까. 오메가를 잘못 고른 것은 아닐까. 심지어 산책 조금 했다고 입술이 파리해지지 않았던가. 몸이 약해서 회사 근처로 집을 옮겼다고도 했고.

“쯧.”

환은 혀를 차며 한쪽으로 돌아누웠다. 이상하게도 그와 닿았던 허벅지가 다시 저릿해서 혹시 균이라도 묻은 것은 아닌가, 항균 물티슈를 꺼내 다시 한 번 박박 닦았다.

너무 늦은 시간에 메시지를 보냈다는 사실은 동이 트고서야 깨달았다. 그답지 않은 실수였다. 심지어 하찮은 놈에게 이런 실수를 하다니.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나고 불쾌했다. 그는 찬장에서 위스키를 꺼내 잔에 따랐다. 단숨에 삼켰다. 시간은 벌써 새벽 다섯 시였다. 이렇게 잠을 못 이루고 밤을 새는 것도 그답지 않은 일이었다.

‘젠장…….’

일단은 매일 이어지는 스케줄대로 따라야 했다. 그는 늘 하던 것처럼 건물의 체육관으로 가서 땀에 흠뻑 젖을 때까지 운동을 했다. 평소처럼 가벼운 실내 수영으로 마무리한 뒤 샤워를 하고, 오피스텔 층으로 돌아와 커피를 곁들인 토스트를 먹었다.

그는 휴대폰 액정화면을 확인했다. 아무 알림도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감히 내 메시지를 무시해?’

와그작, 토스트를 씹던 그의 눈썹이 사납게 비틀렸다. 가뜩이나 성급한 성미가 불붙었다. 느린 건 딱 질색이었다.

출근해서 일을 하는 오전 내내, 환은 이 건방진 오메가를 어떻게 혼내줄지 고민하였다. 어찌나 화가 나는지 일에 집중을 하지 못할 정도였다.

그는 휴대폰을 빤히 노려보면서 몇 번이나 집어 들었다 다시 내려놓길 반복했다.

‘이게 무슨 짓인지…….’

무슨 연유든 간에 제 생활이 흐트러지는 것은 끔찍할 정도로 싫었다. 더러운 바닥이나 불결한 음식만큼이나 싫었다. 그렇기에 환은 종일 잔뜩 날이 서 있었다. 보고를 하러 왔던 한 부장은 이유도 모른 채 그의 날 선 시선과 차가운 무시를 받아야 했다.

한잠도 자지 못했기 때문에 피로가 어마어마했다. 전무실에 있는 소파에서 잠깐 잠을 청할 수도 있을 테지만, 그러기가 싫었다. 회사에서 흐트러지는 것은 딱 질색이니까.

그리고 환은 인정하기 싫기도 했다. 그 자그마한 오메가에게 자신이 종일 신경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오후가 지날 때까지도 강해진에게서는 연락이 오지 않았다. 이해하기가 힘들었다. 메시지를 확인했으면 답을 주는 게 예의가 아닌가? 예의도 밥 말아먹은 오메가인가?

하지만 환은 상식 있는 알파이므로 전화해서 따지는 대신, 그에게 메시지를 한 번 더 보내었다.

[바쁘신 모양입니다. 연락이 되지 않아 걱정스러우니 확인하는 대로 전화 부탁드립니다.]

아무래도 골목 안까지 같이 걸어갔어야 했을까. 간밤에 보았던 그 어둑한 골목이 자꾸 떠올랐다.

메시지를 보낸 지 10분도 지나지 않았을 때, 그는 결국 휴대폰을 다시 집어 들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정말이지 짜증 나는 오메가군……. 감히 내가 먼저 전화를 걸게 만들다니.’

그러나 어찌 된 일인지 강해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다시 걸었지만 마찬가지였다. 환은 화가 잔뜩 난 채로 액정화면을 노려보았다.

‘나랑 장난하자는 건가?’

이번에는 마루투어에 전화를 해보았다. 직원과 바로 연결하기 위해서는 절차가 필요하다는 말에 키스틸의 이환 전무라는 사실을 밝히고, 급한 용무가 있으니 당장 바꾸라 명령하자 상담원은 그제야 잠시만 기다리라 말했다. 대기음을 듣는 동안에도 천불이 일어서 넥타이를 잡아 늘였다가 다시 고쳐 매길 반복했다.

- 저,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죄송합니다만 오늘 강해진 사원은 출근하지 않았습니다.

뒤이은 상담원의 말에 환은 뚝 굳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 오늘 병가를 낸 것으로 확인됩니다.

……병가? 얼마나 몸이 아프면 병가를 내는 것이지? 어릴 때부터 감기나 기타 잔병치레는 해본 적이 없던 환에게는 이해하기 힘든 단어가 바로 병가였다. 그는 전화를 끊고 처리해야 할 업무 몇 가지를 검토했다.

‘만약 큰 병이라도 있다면…….’

기껏 아이를 갖게 했는데 병이 있어서 못 낳게 되면 어쩌나. 낳다가 변고를 당해서 아이를 못 구할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럼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된다.

모니터를 노려보던 그는 어금니를 으득, 씹곤 스피커폰을 켰다.

“강해진 씨 자택 주소가 어떻게 됩니까?”

귀찮은 것 역시 질색이지만, 연락이 안 되니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제발 사고 치지 말라는 박 비서의 말을 무시하고 그는 차를 끌고 강해진의 집까지 갔다. 운전대를 잡은 그의 얼굴은 분노로 붉으락푸르락했다.

‘내가 제대로 교육을 시켜주지.’

만나서 뭐라고 할지, 뭐라 혼을 낼지 아무 계획도 없으면서 환은 그저 무작정 액셀러레이터를 밟았다. 그저 이 하찮은 오메가를 마주한 채로 화를 내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했다.

“강해진 씨, 문 열어보십시오.”

벨을 누르고 문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안에서는 답이 없었다. 문을 부수고 들어가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모기만 한 목소리가 들렸다.

“누구세요오…….”

“이환입니다. 걱정되어서 왔습니다. 문 열어보십시오.”

사실은 짜증이 솟구치다 못해서 온 것이지만, 뭐 중요한 것은 아니니. 문이 빼꼼히 열렸다. 밀가루떡 같은 강해진의 얼굴이 드러났다. 몸이 정말로 안 좋은 것인지 오늘은 빨간 밀가루떡이다.

“환이……씨……?”

강해진의 얼굴에 놀란 기색이 묻어난다. 환은 혹시라도 이 자그마한 놈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싶어 얼른 문틈을 밀고 반쯤 억지로 들어왔다.

“괜찮으십니까?”

해진은 뒤로 물러났다. 가뜩이나 좁은 방이라 몇 걸음 만에 등이 벽에 닿았다.

“저, 환이 씨, 여기 계시면 안…… 되는데…….”

“제가 있지 못할 곳은 없습니다. 강해진 씨의 곁이라면 더더욱 말입니다.”

제 입으로 대사를 뱉으면서도 환은 황당했다. 사업상 어쩔 수 없이 거짓말을 좀 해야 할 때가 있다지만, 이렇게 하찮은 놈에게도 술술 거짓말이 나오다니.

“괜찮으십니까? 병원은, 다녀오셨습니까?”

“아, 아뇨……. 아픈 게 아니라서…….”

안색을 살피려 좀 더 가까이 다가가자 해진은 가뜩이나 작은 덩치를 한껏 움츠리며 오지 말란 투로 손을 내밀어 보였다. 환은 문득 코끝을 스치는 단내를 느꼈다.

‘이게 무슨…….’

숨이 턱 막힐 정도의 단내다. 정신이 아찔할 지경이다. 이런 향은 처음이었다. 간신히 고개 저어 정신을 차렸다.

“아픈 게 아니라니, 무슨 말씀이십니까.”

“히트사이클이 조금 일찍…… 왔어요…….”

해진이 기침을 쿨럭, 했다. 그제야 환은 이 향기의 정체를 깨달았다. 오메가 향이구나. 그러나 냄새의 종류가…….

‘딸기 향…….’

그래, 리조트 호텔 로비에서 처음 만났을 때 이 남자의 향기는 이런 냄새를 갖고 있었지. 그때는 이렇게 자극적이지 않았지만 말이다.

오메가의 향기는 몇 번 맡아보았으나 착향료같이 자극적이고 몹시 달콤한 이런 향은 처음이었다. 꼭 아이들이 먹는 과자 냄새 같았다. 아니, 아이스크림 냄새 같기도 했다. 아니, 아니, 시럽이 들어간 감기약 같기도. 뭐든 확실한 건 너무나 자극적이어서 정신이 나갈 것 같단 사실이었다.

“……억제제는, 드셨습니까.”

차라리 정신을 놓고 싶은 것을 참고 겨우 물었다.

“먹었는데 소용이 없어요. 이렇게 히트사이클 증상이 심한 적이 없었는데…….”

해진은 곤란하다는 투로 말했으나, 환은 그 이유를 알았다. 매칭률이 어마어마하게 높은 알파와 오메가가 만나면 히트사이클 증상이 갑자기 커지는 경우가 있다고, 매칭 전문 업체에서 말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알파의 러트 증상 역시 마찬가지였다.

환은 숨을 참으며 금방이라도 끊어지려는 이성을 억지로 버텼다. 당장 눈앞의 저 밀가루떡을 잘근잘근 씹어 먹고만 싶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하나도 남김없이 말이다.

저 싸구려 티셔츠를 갈가리 찢고 뼛속까지 으득으득 소리 내어 삼켜버리면 이 기분이 좀 나아질까. 지독한 갈증에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으나 그는 꾹 참고 손짓했다.

“괜찮을 겁니다. 일단 누우십시오.”

목소리가 쩍쩍 갈라져 나왔다. 해진은 그러나 제 말을 듣고는 있는 건지 따끈따끈해 보이는 몸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나대었다.

“하지만 손님이 오셨는데 어떻게 누워 있어요. 방도 엉망이고, 잠시만요, 이것만 좀 치우고…….”

눈앞에서 갓 구운 딸기 케이크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참지 못한 환은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저도 모르게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해진의 딸기 향이 술처럼 자극적이었다.

어깨를 쥐고 제 쪽으로 끌어당기자 작은 몸뚱이는 종잇장처럼 딸려왔다. 졸지에 따끈한 얼굴이 그의 가슴팍에 안겼다.

“누워 있으라잖습니까, 내가.”

힘도 없으면서 버둥거리려는 강해진을 찍어 누르듯 침대에 앉혔다. 겁도 없이 저를 젖은 눈으로 초롱초롱하니 올려다보기에, 환은 그의 어깨를 짓눌러 침대에 눕게 만들었다. 졸지에 그의 위에 올라탄 꼴이 되었다.

강해진은 상황을 파악하려는 듯이 멍하니 저를 올려다봤다. 해진의 얼굴 양옆으로 손을 짚고 빤히 응시해주었다. 강해진은 아직도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이 안 되는 모양이었다. 이 멍청해빠진 눈을 보면 말이다. 감히 저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주기 위해 하체를 짓누른 채로 턱을 쥐었다.

“잠자코 계십시오. 제가 지금 참고 있으니.”

뭘 참고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 말을 알아먹길 바라며 그리 말했다. 그제야 멍청하기만 하던 눈동자가 요리조리 구르더니 포기를 담아낸다.

“죄송해요, 환이 씨……. 기껏 와주셨는데…….”

그리고 뭐라고 더 중얼거렸지만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어이없게도 해진은 그의 밑에 깔린 채 스르륵 눈을 감았다. 그대로 잠에 곯아떨어진 듯했다.

“후…….”

환은 몸을 일으켜 침대 옆에 앉았다. 그제야 정신이 조금 드는 듯했다. 그러나 원룸에 가득 찬 딸기 향은 여전했다. 누운 그에게서 억지로 시선을 떼고 방을 살폈다.

좁아터진 원룸에 몇 되지도 않는 세간살이, 그마저도 형편없이 낡고 싸구려 티가 나는 것들. 청소는 그래도 나름…… 깨끗하게 하고 사는 모양이었다. 책상 위를 손끝으로 슬쩍 문질러 묻어 나오는 게 없는지 확인하곤 흠, 고개를 끄덕였다.

“우응…….”

잠꼬대를 하는지 강해진이 뭐라 웅얼거리는 소리에 화들짝 뒤를 돌아보았다. 냄새가 조금 더 짙어졌다. 어쩔 수 없이 코를 틀어막아야 할 정도였다. 아니, 코를 막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강한 향도 향이거니와 티셔츠 옷깃 위로 보이는 강해진의 목덜미와 이불 밖으로 꼬옥 말아 쥔 손에 자꾸 시선이 갔다.

꼭, 뭐랄까…… 식욕과 비슷한 욕구가 치솟았다. 언뜻 화와 구분이 가지 않았다. 당장 저 옷을 찢고 냄새의 근원을 찾기 위해 그의 몸 곳곳에다 코를 처박고 싶었다. 상상하면서도 깜짝 놀랐다. 아주 비위생적이고 아주 야만적인 행위가 아닌가.

‘히트사이클 1일 차가 이 정도라면…….’

1일 차는 가장 증상이 약한 날이다. 그런데도 이 정도로 냄새가 짙다니. 만약 성교라도 하게 되면 도대체 얼마나 이 향이 짙어질지…….

그리고 그 때였다. 환은 제 손목에 닿는 감각에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강해진이 제 손목을 쥐고 있었다. 심지어 끌어당기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마치 만져달라는 듯이.

“몸이…… 뜨거워…….”

환의 사고가 뚝 멈췄다. 그다음 이어진 행동은 그의 의도가 아니었다.

손이 멋대로 나갔다. 몸이 멋대로 가까워졌다. 오메가를 원하는 알파의 본능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었다.

지독한 단내는 후각뿐만 아니라 머릿속까지 자극했다. 환은 오직 한 가지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 눈앞의 오메가를, 강해진을 제 입에 넣고 멋대로 빨고 굴리고 삼켜버리고 싶었다.

손이 옷 속을 파고들었다. 강해진이 직접 입으로 말한 것처럼, 그의 몸은 몹시 뜨거웠다. 손이 델 것 같았다. 환은 숨을 참았다. 잠든, 히트사이클의, 무방비한 오메가에게는 해선 안 될 짓이란 사실은 까맣게 잊은 채로 손을 느리게 움직였다.

“하아…….”

강해진이 작게 신음했다. 그 신음마저 귀에 지독히 달았다. 그의 속살은 몹시 부드러웠다. 손끝이 닿는 곳마다 햇빛에 달궈진 고운 모래를 만지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좀 더 그를 만지고 싶었다. 미칠 듯이 부드러운 이 살갗을 입에 넣고 강하게 빨아 맛을 보고 싶었다. 그의 속으로 깊이, 더 깊이 들어가고 싶은 욕망이 손끝을 더 거칠게 만들었다.

강해진은 괴로워하는 듯도 하고 기분이 좋은 듯도 한 오묘한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구겼다가 펴길 반복했다. 그 얼굴을 보자 지독한 갈증이 일었다.

느끼는 얼굴을 더 자세히 보기 위해 허리를 굽혔다. 손은 점차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강해진의 숨결이 가까워졌다.

“흐읏!”

돌연 터져 나온 그의 신음에 환은 화들짝 놀라며 허리를 폈다. 검지가 그의 유두를 누르고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지금 내가 무슨…….’

손을 빼냈으나 열기는 쥔 듯이 남아 있었다. 다행히도 강해진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으나, 미간을 기분 좋게 구긴 채 작게 신음했다.

“으응, 더…….”

신음 사이에 섞인 말에 그는 제 귀를 의심했다. 지금, 더 만져달라고 하는 것인가? 그도 그럴 것이 눈 감은 강해진의 표정은 음란하기 짝이 없었다.

‘젠장……!’

번개라도 맞은 것처럼 머리가 띵했다. 환은 그대로 돌아서서 방을 뛰쳐나왔다.

차에 도착한 그는 시동을 걸고 숨을 쌕쌕 몰아쉬었다. 핸들을 잡으려다가, 자신이 운전할 상태가 아니란 사실을 깨닫기까지 1분이 넘게 걸렸다.

“대체 이게 무슨…….”

제 다리 사이를 내려다본 환은 분노에 가까운 당혹감을 느꼈다. 앞섶이 터질 것처럼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고작 저 싸구려 딸기 향 때문에 자신의 고고한 성기가 이렇게 커졌단 사실에 첫 번째 충격을 받았고, 자는 사람을 함부로 추행 - 물론 요망한 강해진이 제 손목을 끌어당긴 것은 있지만 필경 제정신이 아니었기에- 했다는 사실에 두 번째 충격을 받았고, 이 정도로 흥분한 적이 없다는 데에 세 번째 충격을 받았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불쾌하군! 정말 불쾌해!’

태어나 처음 느껴본 성욕은 그에게 당혹감과 불쾌감, 그리고 형언하기 힘든 갈구심을 안겼다. 분명 제 것이지만 제 것이 아닌 듯이 끓어오르는 이것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환은 이를 바득바득 갈며 운전대를 잡았다. 운전하는 내내 제 몸에서 딸기시럽 냄새가 나는 것 같아서 더더욱 불쾌했다. 뭉개진 자존심을 밟으며 한참 달렸지만 화가 풀리지는 않았다.

그는 회사로 가는 대신 집으로 향했다. 도착하자마자 욕실에 틀어박혀 온몸을 비누로 박박 씻었다. 세 번 정도 비누칠을 했을 때에야 그는 터질 듯이 발기한 제 성기를 어떻게든 해결해야 한단 사실을 깨달았다.

환이 생각하기에, 자위행위는 성적으로 미숙한 이들만 하는 것이었다. 아니, 애초에 아침에 해면체로 피가 쏠리는 자연스러운 것 말고 쓸데없이 야한 생각 등을 해서 발정이 나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건 짐승이나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그러나 환은 당장 회사에 복귀해 해야 할 일이 쌓여 있었고, 이 몸 상태로는 집중하지도, 효율을 내지도 못한다는 사실을 뻔히 알았다. 결국 그는 제 발기한 성기를 움켜쥐었다. 그리고 아래위로 흔들기 시작했다.

“흣…….”

좀 전 보았던 강해진의 목덜미가,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자그마한 손이 떠올랐다. 속살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도 열이 오른 그의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흥분이 되었다.

“후우, 하…….”

강해진을 상상하면서 자위행위를 하고 있는 자신이 낯설기 그지없었다. 열여섯 살 이후로 제 몸을 만져본 적이 처음이었다. 그에게 있어 자위행위는 비위생적이고 비이성적인 행위일 뿐이었다. 심지어 다른 사람을 상상하며 성기를 만지는 일은, 더더욱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도 멈출 수가 없었다. 몸속에 가득 찬 흥분이 마구 출렁거리는 것 같았다.

그 조그마한 오메가를 한입에 삼키고 쪽쪽 빨고 싶었다. 싸구려 딸기 향을 폐부 가득 삼킨 채 숨을 참고 싶었다. 희한한 욕구였다. 그를 온전히 삼키고 싶은 동시에 망가뜨리고 싶기도 하고, 제 밑에 굴복시키고 싶기도 했다.

‘빌어먹을 오메가가!’

저를 이렇게 만든 것은, 이런 비위생적인 행위를 하게 만든 것은 강해진이며 모두 강해진의 탓이다. 그 요망하고 자그마한 손으로 제 몸을 함부로 더듬어 달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 생각하며 환은 분노에 찬 손동작을 더 빨리했다.

몇 번 문지르지도 않았는데 그는 사정하고 말았다. 흰 정액이 이리저리 튀었다.

‘더럽군! 아주 더러워!’

한 번의 사정으로는 페니스가 식지 않아서 또 한 번을 흔들었다. 두 번째에는 정액의 양도 많아서 샤워부스 안에 희끗한 얼룩이 이리저리 묻었다. 환은 그것이 제 몸에서 나온 체액이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이렇게 더러운 기분이라니!’

얼른 물로 부스 안을 씻어냈지만 찝찝함은 가시지 않았다. 청소업체에 연락해서 특별히 샤워부스 안을 소독해달라고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자위행위를 하고도 화가 풀리지는 않았다. 자그마한 오메가에게 휘둘리는 기분이 좋을 리 없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그의 분노는 오후가 되어 강해진에게서 연락을 받고서는 쉽게도 풀려버렸다.

[그ㅡ냐가시게해소 죄성해요ㅠㅠ 담에ㅔ제가 대접핡게오]

오타투성이의 메시지를 보자마자 하도 하찮고 우스워서 씨익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정말 불쾌하군! 감히 나한테 이딴 오타투성이의 메시지를 보내?’

하지만 주제에 잘못한 걸 알고는 있다 생각하니 화가 쥐꼬리만큼 풀리는 것이었다. 환은 휴대폰을 내던지는 대신 답장 버튼을 눌렀다.

[미안해할 필요 없습니다. 몸조리 잘하십시오.]

전화를 해서 이 찹쌀떡 같은 놈이 밥은 챙겨 먹었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는 한 회사의 전무이며 언제나 할 일이 많았다. 그래서 대신 박 비서에게 일러두었다. 강해진이 끼니를 함부로 거르지 않도록 케이터링 업체에 연락해 강해진의 집에 보내라고 말이다. 물론 알파 직원은 절대 보내서는 안 된다는 말도 다섯 번이나 덧붙였다. 그리고 박 비서가 ‘아주 황송해하며 먹더라’며 보고를 해오고서야 안심했다.

“사진도 보내십시오.”

- 예? 사진이요?

“확실히 먹었는지, 먹고 있는 사진을 찍어서 보내란 말입니다.”

- 여보세요? 왜 전화가 갑자기 안 들리지. 어? 카메라까지 고장이 났나? 참 이상하네……. 제가 다시 전화드리겠습니다, 전무님.

안타까운 일이었다.

* * *

히트사이클에 알파와 같은 공간에 있었다. 뭐, 그건 처음도 아니었다. 대학교 때도 히트사이클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알파들 사이에 끼어서 수업받은 적도 있고, 러트가 온 알파들에게 약을 챙겨준 적도 있고.

하지만 모두 증상이 심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상대방은 대부분 해진이 베타인 줄 알 정도였으니까. 그런데 이번에는 페로몬을 풀풀 풍기며 한 공간에 있었다. 심지어 옆에서 태평하게 잠들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이환은 제게 손끝 하나 대질 않은 듯했다. 자고 있어서 확실치는 않지만 깨어났을 때 옷도 그대로였고 하니, 자고 있는 제게 손을 대지 않은 게 분명했다. 그리고 제가 아는 환은 자고 있는 오메가를 더듬거나 할 파렴치한 놈이 아니니까. 분명히 곁에서 지켜주다가 떠났겠지. 그 얼마나 매너 있는 행동인지!

‘환이 씨랑 정식으로 만나고 싶다…….’

그렇게 잘생기고 매너 있는 알파가 애인이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한 가지 조금 찝찝한 것도 있기는 했다. 이환 전무가 제게 지나칠 정도로 잘해준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썸 타는 사이라지만…… 이렇게 직접 케이터링까지 보내주시고.’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심지어 경호업체까지 와서 집 근처에 경보 시설을 달고, 교대로 한 사람씩 현관 앞을 지키고 서 있기까지 했다. 모두 베타들이었다.

“저, 그런데, 왜 저희 집을……. 저 훔쳐갈 것도 없는데요…….”

“강해진 씨의 히트사이클이 끝날 때까지 알파가 접근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명령입니다. 히트사이클이 끝나시기 전에는 출근하지 마시고 쉬게 하시라는 말씀도 함께 전하셨습니다.”

“그래도 출근은 해야 하는데요…….”

“이미 이환 전무님께서 휴가를 다 처리해두셨다고 하셨습니다.”

“네에? 전 진짜 괜찮은데……. 그리고 이렇게 집 앞을 지키고 계시니까 불편해요.”

“안 됩니다. 이미 비용을 선불 받았으니 경호 서비스를 받으셔야 합니다.”

그가 부자라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하지만 아직 정식으로 만나는 사이도 아닌데 보통 이렇게까지 해주나?

‘누가 이렇게 챙겨준 적이 있어야지…….’

원래 가족이 없기도 하고, 친구들도 다들 털털한 성격이라 이렇게 다정다감하고 꼼꼼하게 챙김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다른 알파들도 관심 있는 오메가들에게 이렇게까지 해주는지 알 길이 없으니, 이렇게 주는 대로 받아도 될지 면구스러웠다.

‘내가 이렇게 이 사람한테 의지해도 되는 걸까?’

꼭 가족처럼, 연인처럼, 이렇게 기대도 될까?

제게 이렇게 잘해주는 사람은 처음이라서 자꾸 마음이 동하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고민은 잠깐이었다. 누워 있자니 졸음이 솔솔 밀려들기 시작했다. 그는 달뜬 몸을 한껏 웅크리고 눈을 감았다.

해진은 그날 밤 이환 전무가 나오는 꿈을 꾸었다. 꿈에서 이환은 무려 벗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말이다.

‘환이 씨, 벗고 계시면 감기 걸려요.’

비록 알파 앞의 오메가라지만 남의 벗은 몸을 보고 달려들 정도로 분별이 없진 않았다. 그게 꿈속이라고 해도 말이다. 해진은 어른스럽고 당당하게 다가가 제 겉옷을 벗어 그에게 덮어주려 했다. 그러나 꿈속의 이환이 그의 손목을 붙들었다.

‘나랑 자고 싶지 않습니까, 해진 씨?’

말의 내용은 깜짝 놀랄 만한데, 해진은 이상하게도 놀랍지가 않았다. 부끄럽지도 않았다. 그는 오히려 당당하게 가슴을 펴고 대답했다.

‘네, 자고 싶어요.’

조금도 창피해하지 않고, 얼굴도 붉히지 않고 해진은 또박또박 대답했다. 환이 특유의 다정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해진은 심지어 한 마디를 덧붙였다.

‘환이 씨랑 섹스하고 싶어요!’

그리고 옷을 벗지도 않았는데 순식간에 해진 역시 알몸이 되었다. 환이 그에게 손을 뻗는 순간, 해진은 잠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열일곱 살 이후로 해본 적 없는 몽정을 했음을 깨달았다. 지독한 열기가 방 안을 습하게 데우고 있었다.

히트사이클 내내 해진은 지독한 죄책감에 시달렸다. 환과 연락을 할 때마다 그날 밤 꾸었던 꿈이 떠올라서 미칠 것 같았다.

‘사귀지도 않는 사람을 상대로 그런 꿈을 꾸다니…….’

정말, 정신 나간 게 아니고서야! 스스로를 엄하게 꾸짖었다. 얼굴은커녕 목소리를 들을 자신조차 없었다.

그러나 환은 끈질기게도 그에게 메시지를 보내왔다.

[오늘은 좀 괜찮으십니까?]

[식사를 챙겨 드십시오.]

[걱정이 되는군요. 연락 부탁드립니다.]

열 때문에 조금 답장이 늦는다 싶으면 어김없이 전화가 걸려왔다. 해진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겨우 전화를 받았다.

“저어, 진짜 괜찮아요, 환이 씨…….”

- 너무 힘드시면 병원에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제가 모시러 가겠습니다.

“아, 안 돼요!”

얼굴 볼 면목이 없어서 얼른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긴 한숨이 흘러들었다.

- 아무래도 제가 무리한 요구를 했군요. 히트사이클 중이신 오메가가 낯선 알파와 함께 있기는 쉽지가 않죠.

“그, 그건 아니에요.”

- 죄송합니다. 제가 무례했습니다. 저는 괜찮으니 쉬십시오.

“저, 끊지 마세요.”

사실 당신한테 섹스하고 싶다고 소리 지르는 꿈까지 꿨단 말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꿈에서 한 그 말이 진심이라는 사실은 더더욱 말할 수 없었다.

“조금만 더…… 저랑 통화해주세요.”

또한 궁금하기도 했다. 그가 안아주면 어떤 기분일까. 키스는 어떻게 할까. 애무는 어떤 식으로 해줄까.

‘분명히 엄청 매너 있게 해주겠지?’

섹스는 어떨까.

불쑥 튀어나온 생각을 누를 수가 없었다. 해진은 마른침을 꼴깍 삼키곤 몸을 돌아누우며 반대쪽 귀로 휴대폰을 옮겼다. 귀에서는 계속 환의 목소리가 들렸다.

- 저는 해진 씨가 조금 더 편해진다면 뭐든 좋습니다. 그러니 뭐든 불편해 마시고, 제가 필요하시거든 부디 편하게 말씀해주십시오.

그가 보고 싶었다. 통화로는 부족했다. 환의 손길이 제 몸에 닿길 바랐다.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얼마나 뜨거울까.

“후읏…….”

통화 중이라는 사실도 잊고 작게 신음을 흘렸다. 히트사이클 때문에 몸도 뜨겁고, 자꾸 그날 밤 꿈속에서 보았던 환의 알몸이 떠올랐다.

- 해진 씨?

환이 저를 부르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람. 해진은 영상 통화가 아니라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목을 가다듬었다.

“아, 열 때문에요. 죄송합니다.”

- 많이 심각합니까? 직접 얼굴을 보고 싶은데 영상 통화로 전환해도 되겠습니까?

“절대 안 돼요!”

물론 옷도 다 입고 있지만…… 그렇지만……. 그래도 소리 지른 건 너무했나, 후회하던 차에 귓가에 웃음소리가 들렸다.

- 해진 씨는 가끔 저를 당혹스럽게 만드시는군요.

“……그런가요.”

옷소매를 말아 쥐고 얼굴을 베개에 파묻었다. 정말 영상 통화를 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 칭찬입니다. 저를 당혹스럽게 하는 것은 별로 없으니까요.

뒤이은 말에 붉어진 웃음을 헤헤, 흘렸다. 해진은 목을 가다듬었다. 그에게 물어볼 게 있었다.

“저, 환이 씨한테 이야기할 거 있어요.”

- 편히 말씀하십시오.

“저…… 아시다시피 제가 몸이 많이 약한 편이거든요. 그래서 환이 씨랑 데이트도 오래 못 하고……. 입이 짧아서 맛있는 거 사주셔도 많이 못 먹고요.”

수화기 너머 환은 잠시 침묵했다. 말을 이으라는 뜻인 것 같아 해진은 휴대폰을 꾹 쥐고 베갯잇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환이 씨가 저 때문에 갑갑하지는 않을까…… 걱정도 했거든요.”

환의 낮은 웃음소리가 작게 들렸다. 해진은 그게 비웃음이 아니라고 믿었다. 이환은 저를 비웃을 사람이 아니니까.

“하지만 저는 환이 씨랑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어요. 환이 씨랑 있으면 즐겁거든요. 환이 씨도 그러셨음 좋겠어요.”

그리고 다시 짧은 침묵.

- 걱정 마십시오. 우린 더 친밀해질 겁니다. 지금보다 더, 훨씬 더 말입니다.

낮은 목소리가 해진의 귀를 간질였다. 환의 목소리는 정말로 섹시했다. 히트사이클인 그에게 몹시 자극적일 정도로.

“……정말 그렇게 될까요?”

다정하고 멋진 이환과 지금보다 더 친해진다니. 생각만 해도 떨렸다. 그는 제 심장 소리가 들리기라도 할까 수화기를 살짝 손으로 가렸다.

- 제가 반드시 그렇게 만들 겁니다.

힘 있게 깔린 목소리가 좋아서 해진은 몸을 더 웅크렸다. 그러면 방금 들은 그의 목소리를 제 안에 저장할 수라도 있다는 듯이.

1퍼센트

둘은 해진의 히트사이클이 다 끝난 뒤에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사실 환은 이제 슬슬 인내심이 줄어들고 있던 차였다. 연애고 뭐고, 저 하찮은 오메가에게 도대체 언제까지 맞춰줘야 한단 말인가. 그는 한 회사의 전무였고, 언제나 할 일이 많은데 강해진에게만 신경을 쏟아부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99.99퍼센트의 매칭률을 보이는 오메가를 또 언제 구한단 말인가. 여태 오메가를 찾지 못해서 고생했던 일을 생각해보면 괜히 겁을 줬다가 일을 그르치는 것보단 좀 굽히는 게 나을 터다.

두 사람은 일주일에 최소 두세 번 정도 만났다. 그리고 아주 평범한 알파와 오메가의 데이트를 했다. 공원을 산책하고, 함께 밥을 먹고, 영화를 보고, 일상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환이 씨는 어제 뭐 했어요?”

“그냥 혼자 집에 있었습니다.”

“친구라도 만나지 그러셨어요.”

“혼자 있는 게 편합니다. 아, 그때 서점에서 같이 샀던 그 책은 어떠셨습니까?”

이환은 이미 강해진에 대해 대부분의 정보를 파악한 상태였다. 대학 동창들과는 아주 가끔 연락하고, 주기적으로 만나는 친한 친구는 한 명. 친척은 없으며 회사 사람들과는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편.

“저, 어제 집에서 그 책 읽으면서 환이 씨 생각했어요! 거기도 주인공 직책이 전무로 나오거든요.”

그리고 제법 저를 좋아하는 듯하며, 다루기가 쉬웠다. 멍청한 얼굴을 마주한 채로 몇 번 웃어주면 껌벅 넘어가는 티가 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강해진이 요리를 아주 잘해서 그가 만든 도시락이 먹기에 나쁘지 않다는 것과, 조잘거리는 걸 보고 있으면 아주 조금 귀엽기는 하다는 정도일까. 하지만 워낙 몸이 약한 탓에 조금만 걸어도 할딱거렸다.

그리고 강해진은 정말이지 건방진 오메가였다. 만나면 만날수록 그 생각은 점점 더 강해졌다.

“솔직히 돈으로 안 되는 거 없다고 생각하시죠?”

갑자기 뜬금없이 자신이 부자라는 사실을 꼬집으며 그리 묻질 않나.

“환이 씨는 명령하는 입장에 익숙하신 것 같아요.”

팔짱까지 끼고 저를 평가하질 않나.

“저, 비싼 거 먹어도 돼요?”

심지어는 지갑까지 털어먹으려 했다. 입도 짧은 주제에 식탐은 컸다.

“와, 이거 맛있겠다. 헉, 그런데 진짜 비싸네요……. 아니, 그래도 완전 맛있을 거 같은데…….”

제 눈치를 보면서 꽁알거리는 모습은 꼭 쥐새끼 같았다. ……하수구에 돌아다니는 쥐새끼 말고, 그나마 좀 깨끗한 햄스터 같은 것들 말이다.

가장 괴로운 것은 바로 스킨십이었다. 남의 살갗이 닿는 것은 딱 질색인데, 이 빌어먹을 밀가루떡 같은 놈은 자꾸 손을 은근슬쩍 스치는 게 아닌가.

한 번은 놀라서 반사적으로 그의 손을 뿌리친 적이 있었다. 어디서 뭘 만지고 왔는지 모를 더럽고 자그마한 손을 자꾸 제 손에 비비적거리다니. 저도 모르게 손을 빼내며 표정을 굳히자 강해진은 상처받은 밀가루떡이 되었다.

“제가…… 더러워요?”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 같은 얼굴을 보니 덜컥 겁이 났다. 이대로 이 오메가를 잃어버릴 수는 없었다.

“아닙니다. 그럴 리 있겠습니까? 제가, 제 몸이 더러워서 그런 겁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제 손에 소독제를 좀 바르겠습니다.”

애써 웃으며 소독제를 덕지덕지 바르고, 손을 먼저 잡으며 일부러 그의 손에도 소독제를 묻혔다.

언제까지 이 짓거리를 해야 할까……. 생각하면 막막해서 한숨만 났다. 조금만 더 친해지면 될 것이다. 그러면 이 더러운 놈에게 적당히 비용을 제시하고 그 대가로 아이를 출산하라 요구하면 된다.

하지만 환은 그 ‘조금만’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와 진지하게 연애를, 아니, 그 비슷한 것이라도 해본 적이 없으니 알 리가 있나.

사실, 환은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느라 제대로 된 친우조차 만들지 못했다. 저와 비슷한 위치에 있는 이들은 모두 경쟁자일 뿐이었고, 저보다 수준 낮은 이들은 상대하기 싫었다. 생판 모를 남을 믿는, 멍청한 사람들이 어떻게 교류하는지 알 턱이 없었기에 연기도 쉽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걱정이 되는 점이 있었다. 이 강해진이라는 놈이 너무나 약해빠졌다는 것이었다. 산책을 조금 하면 숨이 차서 헉헉거리고, 걸핏하면 두통약을 입에 밀어 넣었다.

“괜찮으십니까?”

하고 물으면 강해진은 눈을 휘며 웃어 보였다.

“네. 별거 아니에요. 자주 이래요.”

“……자주?”

“몸이 좀 약해서요. 정말 별거 아니에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그냥 심장 좀 약하고 뼈 약하고 폐가 안 좋아서 조심해야 하는 정도밖에 없어요. 큰 병은 없답니다.”

……저딴 몸으로 아이를 낳을 수는 있을까? 속이 터지는 것도 모르고 강해진은 소리까지 내서 “헤헤.”하고 웃었다.

밀가루떡 같은 강해진은 제 갑갑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끔 이렇도록 그의 속을 뒤집어지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그에게 절대 필요 없는 물건을 선물한다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환이 씨랑 어울릴 것 같아서요. 귀엽죠?”

환은 휴대폰 케이스에 그려진 강아지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내가 개 같다는 건가?

“저도 커플로 샀어요! 짠!”

해진이 내민 휴대폰에는 그가 방금 준 것과 거의 흡사한 디자인의, 그러나 강아지 대신 병아리가 그려진 케이스가 끼워져 있었다. 환은 시선을 들어 그를 마주 보았다. 무해하기 그지없는 얼굴이 저를 보며 생글, 웃는다.

“……정말로 고맙군요.”

딱히 이 조그마한 밀가루떡 같은 놈이 좋아서 받는 건 아니었다. 그저 좀 맞춰주면 더 말을 잘 들을까 싶어 받는 것뿐이었다. 해진은 헤실헤실 웃으며 액정필름조차 붙이지 않은 그의 휴대폰에다 강아지 케이스를 씌웠다.

“제가 이런 거, 귀여운 거 잘 찾아요. 앞으로 찾으면 종종 선물할게요. 환이 씨 은근히 귀여운 거 좋아하시잖아요. 그쵸?”

“제가 말입니까?”

“그래서 저 좋아하시는 거 아니에요?”

뻔뻔하기까지 하다. 이런 뻔뻔한 밀가루떡은 처음이었다. 환은 강아지 케이스가 끼워진 휴대폰을 들어 보이며 이가 보이게 활짝 웃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역시 해진 씨는 영특하십니다. 귀엽고 다정한테 영특하시기까지 하다니, 정말로 매력적이시군요.”

영혼을 꾹꾹 눌러 담아 칭찬하자 멍청하게 웃는 꼴이라니. 한숨이 다 났다.

“그럼 빨리 시금치 반찬도 드세요.”

해진이 앞에 놓인 그의 도시락 반찬통 속, 유일하게 남은 시금치 반찬을 턱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공원 벤치에 앉아 도시락을 먹는 일도 이제 지겨웠다. 특히 자신이 싫어하는 나물 반찬을 먹는 일은 정말로 지겨웠다. 레스토랑을 하나 사서 이곳 공원에 갖다 놓으면 어떨까. 그럼 둘 다 편할 텐데.

대충 둘러대려고 해진을 보는데, 이번에는 그냥 넘어갈 것 같지 않다. 조그맣고 무해하던 얼굴이 어느새 엄한 한문 선생처럼 변해 있다.

환은 억지로 웃으며 남은 시금치 반찬을 한입에 밀어 넣었다. 그제야 해진이 다시 만족스레 웃었다.

두 사람의 회사가 가까워서 일주일에 한 번, 점심시간이면 공원에서 만나 도시락을 먹었다. 해진의 팀장이 정기 출장을 가는 날 말이다. 하지만 일개 사원이 이렇게 멋대로 자리를 비워도 되는 것일까? 환은 짐짓 걱정하는 투로 물어보았다.

“저야 물론 해진 씨가 해주신 귀한 음식을 맛볼 기회가 있어 몹시 기쁩니다만, 저 때문에 혹시라도 해진 씨가 회사에서 빈축을 사실까 걱정이 됩니다.”

“어, 환이 씨, 모르셨구나. 저 저희 팀 실세예요.”

당당하기 그지없는 말에 환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해진 씨가, 실세라고요.”

“그럼요. 팀장님 다음으로 저예요. 걱정 마세요. 이렇게 일주일에 한 번 잠깐 점심시간에만 빠지는 건데, 뭐라고 하는 사람이 이상한 거죠. 저는 절대로 업무와 일정에 지장이 가는 행동은 하지 않아요.”

강해진이 마루투어의 뛰어난 인재라는 건 객관적인 사실이기는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화가 났다.

‘그래? 아무리 내가 좋아도 업무와 일정에 지장이 갈 정도로 좋아하는 건 아니다, 이거지……. 아주 건방지군.’

불편한 심기를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그가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환은 억지로 마음을 다잡았다. 귀여운 척한다고 다인 줄 아나.

“그리고 사실, 환이 씨가 좋아해주셔서 더더욱 이렇게 해주고 싶어요.”

“하하, 저를 위해서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

“외로워 보여서요.”

뒤이은 말에 환은 그만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얼굴을 굳혔다.

“무슨…….”

“환이 씨, 정말로 외로워 보여요.”

눈앞의 밀가루떡이 뭐라고 하는지 도저히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어색하게 입꼬리를 틀어 올려 웃으려 했지만 입가에 경련만 났다. 더러운 오메가가 제 손을 덥석 쥐었지만 뿌리칠 수 없었다.

“그래서 제가 계속 같이 있어주고 싶어요.”

지금 장난하느냐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지만 꾹 참았다. 강해진은 절대 장난하는 표정을 짓고 있지 않았다. 그는 웃고 있지도, 눈살을 구기고 있지도 않았지만 어쩐지 슬퍼 보였다. 아니, 어쩐지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살면서 그렇게 저를 쳐다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환은 불쾌감을 억누르느라 어금니를 앙다물어야 했다. 제 표정이 아주 가관일 텐데도, 강해진은 조금의 놀란 기색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더 불쾌했다.

그리고 그날 환은 해진이 선물한 강아지 케이스를 세 번이나 소독했다.

케이스를 박박 문질러 닦으며 그는 이를 아득바득 갈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화가 났다.

‘제깟 게 뭐라고.’

어디서 감히, 나한테 외로우니 뭐니 말을 해. 제깟 게 뭐라고.

* * *

해진은 사실 환을 만날수록 한 가지 고민이 깊어졌다.

‘왜 나랑 정식으로 만나자고 하질 않지?’

그렇다고 먼저 고백하기에는 여러 가지 걸리는 면이 많았다. 그는 자신의 상사나 마찬가지고, 게다가 어마어마하게 돈이 많으니까.

‘꼭 돈 보고 만나려는 것 같잖아.’

해진은 절대 그의 돈을 보고 만나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환이 진심으로 좋았다. 그리고 그를 챙겨주고 싶었다.

이환 전무는 해진이 보기에 아직 아이 같은 면이 많았다. 물론 대기업의 전무답게 일에서는 말할 필요도 없이 프로페셔널하지만, 뭐랄까, 이환이라는 개인 자체는 그렇지 않았다. 어딘가 많이 서툴러 보였다. 저를 대하는 얼굴에 늘 다정한 웃음을 띠고 있어도, 언제나 제게 잘 대해주어도 그런 티가 났다.

애정을 받아본 적 없는 동물은 사람이 손을 내밀면 날카로운 반응을 보인다. 저를 해치려는 줄 알기 때문이다. 환이 딱 그러했다. 마치 한 번도 쓰다듬을 받아본 적 없는 사냥개같이 말이다.

“휴우…….”

한숨을 내뱉고 베개에다 얼굴을 파묻었다. 해진은 환과 조금 더 가까워지고 싶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서툰 것은 그도 마찬가지니까.

친구 윤경훈은 그냥 먼저 고백해버리라고 해진을 종용했다. 정말 돈을 보고 만나는 게 아니라면 그도 알 거라면서 말이다. 하지만 말이 쉽지, 고백이라는 게 그렇게 쉬운가……. 그리고 경훈은 자기가 만나는 상대가 이환 전무라는 사실도 몰랐다.

그렇게 고민을 거듭하던 중, 급기야 올 것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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