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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121화 (121/122)
  • @121화

    밀러는 그녀의 말에 혼이 달아난 사람처럼 멈췄다. 숨 쉬는 법도 까먹고선, 린느가 제게 한 말을 되짚었다. 아무리 되짚어도 뜻은 하나가 아니겠는가. 생각만으로도 몸을 구성한 혈관들이 터질 것처럼 두근두근거렸다. 그때, 폭 안겨 있던 린느가 쭈뼛거리며 품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텁.

    그의 기다랗고 탄탄한 팔이 그녀를 다시 꼭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두 사람은 그 어떤 말도 나누지 않았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서로 공유할 뿐이었다.

    * * *

    세르트 백작저에서 가장 빨리 일어나는 사람을 꼽으라면 세르트 경과 헬렌 두 사람이고, 가장 늦게 일어나는 사람을 꼽으라면 린느와 엘리자였다. 그런데, 그런 엘리자가 새벽 5시부터 일어나 화원을 누비고 다니자, 세르트 경은 앉은 자리에서 손톱을 물어뜯었다.

    아무리 린느의 결혼식을 준비한다지만 해 봐야 가족끼리 치르는 건데, 딸 결혼시키려다가 부인 잡을까 걱정스러운 것이었다.

    “부인, 뛰지 않고 다닐 순 없소? 아니, 그런 일은 저 애들을 시키시오. 굳이, 부인이 직접 뛰지 않아도 되겠구만.”

    “못 뛰시는 우리 가주께선 가만히 거기 앉아서 구경이나 하세요. 들여보내기 전에.”

    “네. 그러지요, 부인.”

    세르트 경은 검지와 엄지를 딱 맞댄 상태로 허공을 가로로 그었다. 입을 다물겠다는 그의 의지가 담긴 제스쳐였다.

    “그리고 우리 가족끼리만 하는 거 아니에요. 아무것도 모르면서.”

    “응? 우리끼리만 하는 게 아니었소?”

    “우리끼리 해도 좋지만, 그간 함께 지내 온 대공저 사용인들이 얼마나 서운하겠어요? 오고 싶은 사람들은 알아서 오라 귀띔해 놨어요. 그렇지, 메리?”

    “네!”

    “둘은 또 언제 그렇게 친해졌소? 어이가 없군.”

    “얘, 안 되겠다. 주인님을 안으로 모셔.”

    “예!”

    “아, 아니! 아니, 가만히 조용히 있을 테니 구경만 하게 해 주시오!”

    엘리자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흥, 웃으며 다시 일에 전념했다. 새벽 어스름이 가득하던 하늘에 햇살이 드리우고, 정오쯤 되자 백작저에 하나둘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세상에, 세르트 백작저는 또 분위기가 다르네요? 우리 아가씨와 닮은 저택이에요. 화사하고, 사랑스럽고.”

    “백작 부인께서 안목이 또 엄청나단 소문이 있잖아요? 그걸 우리 아가씨께서 배우셨구.”

    대공저 사용인들은 양손에 선물을 가득 들고서 백작저에 모이기 시작했다. 가령, 사람 몸만 한 상자를 들고 온 이도 있고, 자신이 직접 만든 예쁜 꽃다발을 가져온 이도 있었다. 선물 한 개 한 개가 모두 정성이 가득해, 보기만 해도 따스했다.

    그때, 백작저 본관으로 마차들이 하나둘 주차됐는데. 익숙한 얼굴들이 마차에서 내리기 시작했다. 엘리자와 함께 수다 떨던 부인들이 먼저 얼굴을 비쳤고, 그녀들은 몸에 익은 듯이 화원으로 향했다.

    “세상에, 엘리자가 그렇게 오랫동안 저택을 비웠는데 꽃들이 아직도 멀쩡하네요?”

    “세르트 경께서 엘리자를 그리워하며 꽃에 물을 줬겠지요.”

    “어머머, 하여튼 여전히 눈꼴시어 눈이 다 아프네요.”

    부인들은 호호 웃으며 서로의 팔뚝을 톡톡 치며 웃었다.

    “그나저나 초대장도 없이 와도 되려나?”

    “딸이 결혼을 하는데, 우리 저택에서 한다더라. 이런 서신을 보냈단 건, 초대한 거나 다름없는 거 아니겠어요?”

    하긴, 결혼 소식과 함께 장소, 시간까지 알려 줬으니 그 서한 자체가 초대장이나 다름없었다. 때마침, 이제 막 도착한 마차에서 루비가 홀로 내렸다. 자리에 서서 주변을 휙휙 돌아보더니, 로비에서 짐을 옮기는 메리와 딱 마주쳤다.

    “메리?”

    “루비!? 여, 여기는 어쩐 일이야? 루비!”

    두 사람은 포옹한 채로 자리에서 빙글빙글 돌며 웃었다. 인사를 마친 루비가 품에서 편지를 꺼내 메리에게 건네며 배시시 웃었다.

    “각하께서 서한을 보내 주셨거든. 그런데 조금 아쉽다. 우리 아가씨는 황궁에서 결혼식을 올려도 아쉽지 않을 텐데.”

    “대신에 쓸데없는 사람들까지 몰려와서 번잡하잖아.”

    “하긴, 그러긴 해. 아가씨는? 인사드리고 싶은데.”

    “인사는 조금 이따가 화원에서 드리자. 자, 갑시다! 화원으로!”

    메리는 한 손으로 짐을 번쩍 들더니, 다른 한 손으로는 루비 손을 휙 낚아챘다.

    * * *

    린느는 두 눈을 감고서 밀러에게 온전히 몸을 맡겼다.

    “하암… 왜 이렇게 졸린지 모르겠어요.”

    “날씨가 추워져서 그런가. 린느, 어제 내가 준 밍크 숄 마음에 들어?”

    “아, 맞다. 엄청 마음에 들어요. 엄청 따듯하고, 엄청 가볍구.”

    “그럼 오늘도 드레스 위에 그걸 입겠어?”

    “좋아요! 그런데, 대공님 실력이 날이 갈수록 늘어요. 와, 이런 건 언제 배웠어요?”

    린느는 거울 너머로 단정하게 정리된 자신의 머리를 보며 턱을 뚝 떨어트렸다. 평소보다 화려하면서도 단정한 느낌이, 꼭 황족처럼 고귀했다. 린느는 고개를 좌우로 움직이며 밀러의 실력에 감탄했다.

    “여기에 이 티아라 어때.”

    자그마한 왕관에는 한눈에 봐도 비싸 보이는 핑크 다이아몬드가 크고 작게 박혀있었다.

    “너무 과하지 않아요? 티아라는 좀…….”

    “아냐, 과하지 않아. 너무 예쁠 거 같아.”

    라고 드뷔르 마담이 말했지만. 아무튼 무얼 해도 린느는 아름다울 테지.

    그래도, 린느에게 비밀로 하는 동시에 그녀의 만족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드뷔르 마담의 도움이 절실했다. 왜냐면 드뷔르 마담은 린느의 취향과 신체 사이즈를 자다가도 읊을 만큼 해박하니까.

    그렇게 밀러는 홀로 드뷔르 의상실을 들렀다. 린느의 웨딩드레스 상담을 위해서.

    「아무래도 아가씨께선 워낙 화려하게 아름다우셔서, 무얼 입어도 귀티가 나지요. 제가 우리 아가씨라서 드리는 말씀이 아니라, 정말 그래요.」

    「그건 이미 알고 있어.」

    드뷔르 마담은 턱을 만지며 골똘히 생각에 잠긴 채로 말했다.

    「그러니, 비싼 걸 많이 달지 않는 작전으로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은 거라고 치덕치덕 얹는 것보단, 심플하면서도 억 소리 나게 비싼 걸로 포인트를 주자는 말이에요. 어차피 액세서리도 화려하고 비쌀 텐데, 드레스까지 그럴 필욘 없어요. 오히려 그런 건 촌스러워요.」

    밀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알렉스에게 턱짓했다. 그러자, 알렉스가 품에서 책자를 꺼내 테이블에 펼쳤는데. 그곳엔 블랙 광산에서 생산되는 각종 광석이 나열되어 있었다.

    「골라. 여기에 있는 거로 성에 안 차면 뭐든 다 말해. 알아서 구해다 줄 테니까.」

    「여, 영광입니다! 각하!」

    디자이너로서 이렇게 비싼 장식품을 이용해 드레스를 만들 수 있다니. 다신 없을 귀한 기회가 틀림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커리어를 걸고, 최고의 드레스를 만들어 드리겠다 약속했으며. 책자에서 가장 비싼 핑크 다이아몬드를 고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린느가 드레스를 마음에 들어 하면, 핑크 다이아몬드 1개를 구해다 주겠노라 약속까지 했다.

    그 덕분에 드뷔르 마담은 평생 쏟을 모든 열정까지 쏟아서 웨딩드레스를 완성했다. 알렉스의 말에 의하면 며칠 만에 드뷔르 마담의 얼굴이 해골처럼 쏙 빠졌다 했으니, 말 다 했다.

    부디, 그녀의 희생이 빛을 발하길. 밀러는 커다란 상자를 꺼내, 린느에게 건넸다.

    “린느, 선물.”

    잠이 싹 달아난 얼굴로 린느가 밀러를 바라봤다.

    “선물이요? 무슨?”

    “우리가 가족이 된 기념.”

    “저는 선물 준비 못 했는데……. 하긴, 준비할 틈도 없었죠. 우리 각하께서 저 몰래 이런 앙큼한 일을 꾸미셨으니까요.”

    밀러는 목소리를 가다듬는 척 시선을 피하며, 상자를 테이블 위에 올렸다.

    “기념 선물이자 사죄의 뜻이야.”

    “역시 앙큼하시네요. 선물 하나로 두 개를 기념하다니.”

    린느는 호호 웃으며, 상자 덮개를 천천히 열었다.

    “뭐길래 이렇게 크지? 으흐흐.”

    린느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양 손바닥을 간신처럼 비비더니, 헤실헤실 웃으며 덮개를 열었다. 그리고 그 상자 안에는 흰색 같지만, 옅은 핑크빛이 감도는 오묘한 색상의 드레스가 있었다. 린느의 동공이 크게 부푼 채로 흔들렸다.

    밀러는 그녀에게 마음에 드는지 묻는 대신에 그녀의 표정을 샅샅이 살피기 바빴다.

    “하, 너무, 너무 예뻐요. 너무 예쁘다, 진짜. 아까워서 어떻게 입지?”

    린느는 손바닥으로 드레스를 스치듯이 만지며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펼쳐서 보면 더 예쁠지도 몰라.”

    “하지만, 바닥에 닿으면요?”

    “내가 들어 줄게. 그럼 바닥에 닿지 않을 거야.”

    “어서 들어 주세요!”

    밀러는 어깨끈에 두 손을 걸쳐 천천히 드레스를 꺼내 줬다. 마치 유능한 의상실 직원처럼 노련했다.

    “대박, 어떡해! 너무너무 예쁘잖아! 와, 이 보석 좀 봐요! 영롱해서 별보다 빛나는데요? 미쳤어. 밀러! 사랑해요!”

    이렇게 좋아해 줄 줄 알았으면, 한 벌이 아니라 여러 벌을 주문했을 텐데. 린느가 너무 행복해하자, 밀러는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내가 입혀 줄게.”

    “엄마한테 당장 자랑할 거예요. 헬렌은 드레스에 별로 관심도 없는 애라서 모를 테니까! 메리한테도 보여 줘야지.”

    밀러의 수발을 받으며 드레스를 입는 내내 린느는 누구에게 자랑할지 웃으며 읊었다. 어차피 일일이 자랑할 틈도 없이 모든 사람 앞에서 이 드레스를 보이게 될 텐데. 밀러는 린느를 귀엽단 듯이 바라보며,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 * *

    “이 드레스 차림으로 화원에 가는 건 너무 심각한 낭비예요.”

    “그 정도는 낭비도 아니야. 그걸 낭비라 생각하게 만든 내가 잘못했어.”

    “말이 그렇게 되는 거예요?”

    “응. 내 잘못이야, 린느. 반성하는 바야.”

    린느는 화원으로 향하는 코너를 돌자마자, 눈 앞에 펼쳐진 수많은 인파에 자리에서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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