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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120화 (120/122)
  • @120화

    “오, 오셨니? 오셨어?”

    “네! 오셨습니다!”

    사용인의 대답에 희비가 갈렸다. 세르트 경은 다 죽어 가는 표정으로 마른침을 삼켰고, 헬렌은 묘한 표정으로 바뀌더니 이내 웃음을 지었다. 엘리자는 말할 것도 없이 행복에 겨워 호호 웃으며 로비 바깥까지 나갔다.

    “어째… 너희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거 같지 않느냐?”

    “언니 때문이겠죠. 사실 아버지도 좋으시죠?”

    “오랜만에 린느를 보니 좋기야 하지.”

    “오랜만이라기엔 얼마 전에도 함께 계시지 않으셨어요?”

    “설마 내 병간호 하던 때를 말하는 게냐? 아휴, 그때 이후로 못 봤으니 오랜만은 오랜만이지.”

    “그럼 대공 각하는요? 사실, 조금 불편하시죠?”

    “음.”

    세르트 경은 끙 앓더니, 내가 왜 그걸 대답해야 하냐며 새침하게 굴었다.

    “우린 딱 불편하다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는 사이가 아니겠느냐? 각하께서 열 일을 제치고 내 병문안을 와 주셨으니 말이다. 큼흠. 네 약혼 놈보단 나아. 훠얼씬.”

    “약혼남이거든요? 자꾸 놈이라 하지 마세요. 입버릇 돼요.”

    “놈이 되기 싫으면, 알아서 잘하란 뜻이야. 이건 내 딸의 반려 모두에게 해당하는 말씀이지. 내게 암만 잘해 봐야 너희한테 못 하면 다 소용없어.”

    이에, 헬렌은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목을 쭉 빼며 바깥을 살폈다. 조용하던 백작저 입구에서 기분 좋은 웃음소리가 울리더니, 이내 세 사람이 함께 백작저로 들어섰다.

    “대공 각하!”

    세르트 경이 밝게 웃으며 상체를 들썩이자, 밀러는 곧장 세르트 경의 두 손을 꼭 잡았다. 마치 오랜 전우와 마주친 것처럼 웃음꽃이 만발했으니. 이를 지켜보던 헬렌은 눈을 크게 뜨며 어이없다며 웃음을 지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불편하시다더니 엄청 좋아하시네, 뭐.’

    헬렌은 그들을 보며 숨어서 웃었다. 행복한 웃음이었다.

    * * *

    넓디넓은 정찬실에 온 가족이 모여 앉았다. 상석에는 당연히 밀러가 앉아야 했으나, 밀러는 강제로 세르트 경을 공주 안기로 안아 들어, 상석에 떡하니 앉혔다.

    “백작저에 유세하고자 온 게 아닙니다. 불편하시더라도 조금만 참으세요.”

    “아, 아니 가, 각하. 저, 저는……!”

    “그래도 불편하시다면, 제 마음 편 하고자 권하는 거라 생각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밀러의 입에서 ‘부탁’이란 말이 나오자, 세르트 경도 더는 반항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맞아요, 아버지. 그냥 앉으세요. 아버지는 아직까진 상석이 더 어울리고 편해 보이세요.”

    “린느…….”

    린느가 나서서 한마디 얹어 주고서야, 세르트 경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를 고쳐 앉았다. 그제야, 밀러도 린느 곁에 다가와 의자를 직접 꺼내 앉았다. 백작저 사용인들은 숨도 쉬지 못하고 손끝만 떨었다.

    “갑작스러운 방문인데도 이렇게 반겨 주셔서 너무나 감사합니다.”

    “가, 감사라니요! 새벽에 오셔도 저희는 늘 반가운 마음뿐입니다! 아, 아니, 새벽엔 길이 어두우니, 아침에 오셔도 좋습니다!”

    밀러는 가볍게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새벽엔 길이 어둡긴 하죠. 아침엔 또 바람이 차가워서 린느에겐 위협적이기까지 합니다.”

    열심히 스테이크를 썰어 먹던 린느가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밀러를 바라봤다.

    ‘갑자기? 갑자기 아침 바람이 내게 위협적이라구?’

    때마침 다른 사람들도 걱정스레 린느를 바라봤다. 헬렌은 잘게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지었고, 엘리자는 이때다 싶어 말을 이었다.

    “하긴, 린느가 저를 닮아 추위에 약해요. 그런데도 꼭 옷을 저렇게 춥게 입으니 걱정이 앞서지 뭡니까?”

    “맞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무작정 따듯하게 입으라며 강요하고 싶진 않습니다. 한데, 백작저는 무척이나 따듯한 듯해 마음이 편하군요. 외풍 걱정도 없을 만큼.”

    “아유, 외풍이라뇨. 제가 외풍에 아주 예민해서 백작저는 따듯해요. 그렇죠?”

    엘리자가 자연스레 세르트 경에게로 질문을 던지자, 세르트 경은 눈동자를 좌우로 살피며 어색하게 웃었다.

    “뭐, 뭔진 모르겠다만 맞소. 부인의 말이 다 맞고말고.”

    이럴 땐 일단 무조건 맞다고 해 주는 게 상책이지. 세르트 경은 따듯한 스프를 마시며 엘리자의 눈치만 살폈다. 엘리자와 밀러 사이에 어정쩡하게 끼느니, 모든 일을 엘리자에게 맡기는 편이 낫겠지. 세르트 경은 자연스레 대화에서 빠졌다.

    “그래서 저도 전문가를 불러왔습니다. 아시다시피 대공저는 워낙 오래된 건물이라 외풍이 심해서 말입니다. 다음 주부터 보수 공사에 들어갈 것입니다.”

    “네? 보, 보수 공사요? 잠깐, 대공님?”

    “그대에게 미리 말을 하지 못해 미안해. 하지만 인부를 최대한 많이 쓰려면 땅이 얼기 전에 시작해야 하거든.”

    밀러는 린느와 손등을 포개며 웃었다. 그것도 잠시, 잘 짜인 연극처럼 밀러가 세르트 경을 향해 말을 돌렸다.

    “그리고 오늘은 밤이 늦어 백작저에서 묵을까 합니다. 괜찮을는지요.”

    “아주 괜찮습니다. 괜찮고 말고요!”

    세르트 경은 기다렸단 듯이 곁에 있던 사용인들에게 베개와 이불을 린느가 쓰던 방에 두라며 거들었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린느는 다급하게 엘리자와 세르트 경을 바라봤지만, 소용없었다.

    “음? 왜 그러니, 린느? 갑자기 할 말 있는 사람처럼 쳐다보고 그러니?”

    엘리자는 작게 썰은 스테이크를 입에 넣으며 시치미를 뗐다. 이어서 세르트 경을 바라봤지만, 세르트 경은 이미 수프 그릇과 입을 맞출 것처럼 시선을 피하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었으니. 마지막으로 남은 건 헬렌뿐이었다.

    “헬렌?”

    “하긴, 어제 언니랑 잠깐 마주쳤는데 옷차림이 너무 추워 보이긴 했어요. 게다가, 겨울이 오면 외풍이 더 심해질 테니, 어서 보수 공사를 맡기는 게 맞죠. 각하께서 정말 우리 언니를 엄청 사랑하시나 봐요. 낭만적이어라.”

    약혼남과 대화할 때도 이렇게 성의 있게 대화해 본 적이 없건만. 헬렌은 자신의 미래를 위해 최선을 다해 귀여운 아첨을 떨었다. 뺨을 이루는 근육이 잘게 경련을 일으키고, 눈꺼풀을 바르르 떨며 웃더니, 포크와 나이프도 내려놓고 양손을 잡아 흔들었다.

    그러자, 평소 헬렌에 대해 너무나 잘 아는 이들이 넋을 빼고 그녀를 바라봤다. 그들의 놀란 시선에 헬렌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하… 내가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그래도 밀러의 추천서까지 받으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밀러는 부드럽게 웃으며 헬렌의 말에 공감해 줬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따 차를 마시며 전해 줄 말이 있습니다.”

    헬렌은 눈을 깜빡이며 밀러를 바라보더니, 주위를 바라봤다. 제게 할 말이 있다고 말하는 밀러의 말에 놀란 눈치였다.

    “제, 제게 말씀이신가요?”

    “코앞에 인재가 있는데 모른 척할 수가 있어야죠. 태자 전하께서 영애를 찾으십니다. 다음 주, 귀족법 시험이 끝나는 대로 입궁 준비를 하세요.”

    “허.”

    “그날부터 업무를 보실 수도 있으니 미리 준비해 두는 게 좋을 겁니다.”

    헬렌의 눈매가 반달을 그리더니, 평생 지은 웃음 중에서 가장 달콤한 웃음을 지었다.

    “평생 각하께 입은 은혜는 잊지 않을게요! 절대, 절대!”

    “그게 헬렌 양의 실력이니 제게 감사할 거 없습니다.”

    린느는 취뽀의 현장을 보며 감탄에 찬 탄성을 뱉었다.

    ‘헬렌 기분 진짜 좋겠네. 와, 입궁이라니. 저러다 황태자의 수행원 되는 거 아니야? 미친. 너무 멋있는데?’

    두 자매는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싱긋 웃었고, 그들의 눈빛엔 축하와 감사가 가득해 따스했다.

    * * *

    “그러니까, 뭔가 필요해지면 설렁줄을 잡아당기면 됩니다. 아주 쉽죠? 여기 2층은 모조리 싹 다 비워서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푹 쉬시면 됩니다. 린느, 잘 자렴! 헬렌과 네 아버지도 자러 갔으니 너도 어서 쉬렴. 그럼 이만.”

    쿵.

    엘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문까지 닫아 준 후에야 자리를 떠났다. 떠난 자리에 멈춰서서 린느는 멀뚱거리더니, 나직이 중얼거렸다.

    “8시인데 아버지랑 헬렌이 벌써 자러 갔다고요? 어머니도 참.”

    린느는 휙 돌아 밀러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벽걸이 선반에 홀린 듯이 서 있었다. 선반 위로는 자그마한 액자와 보석함, 그리고 텅 빈 하트 모양의 약병이 있었다.

    “오늘 아침까지 사용한 방처럼 깨끗해. 그대를 향한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끝이 안 보일 지경이군. 내가 그들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주인을 잃은 방을 이렇게 깨끗하게 유지하며, 세르트 경은 홀로 린느를 얼마나 그리워했을까. 감히 상상이나 할 수 있을지. 밀러는 마음 한편이 묵직하게 아렸다. 그때 린느가 그의 두툼한 손을 잡아끌었다.

    “누가 보면 제가 전쟁터라도 나간 줄 알겠네요. 저희 아버지 그렇게 약골 아니에요. 다른 귀족이었으면 좋다고 저 같은 말썽꾸러기 처분한 셈 치고 연락도 끊었을걸요?”

    “그것들이 정상이 아닌 거지.”

    “세상엔 정상이 아닌 사람들이 많더라구요.”

    린느의 말에는 많은 게 내포되어 있었다. 이를 모를 리가. 밀러는 말없이 그녀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싸며 꼭 안았다.

    “난 그대에게서 매번 배우기만 해. 행복도, 사랑도, 가족애도.”

    가족애란 말에 린느의 눈동자가 뻣뻣하게 움직였다. 상념이 서로 얽혀 갈 때쯤, 린느는 그 상념을 잊기 위해 눈을 질끈 감고 그의 허리를 끌어당겼다.

    “아직 가족애는 저도 잘 몰라요. 부모님께 받아 보긴 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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