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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119화 (119/122)
  • @119화

    눈치 빠른 황태자가 선수를 쳤지만, 밀러는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지난 연회에 큰일이 일어나지 않았습니까? 하여, 제 부인께서 결혼식은 가족끼리 올리고 싶다 해서 말입니다.”

    “하아…….”

    황태자는 상체에 실은 힘을 쭉 빼며 뒤로 퍽 누웠다.

    “내 이럴 줄 알았지. 놀랄 만했소. 감히 대공저에서 그런 소란이 일었으니, 아무리 패기로운 친우라 해도 놀랄 수밖에 없지.”

    게다가 섀르넌까지 나타나 묘하게 행동했으니, 그날 린느가 감내해야 할 몫이 얼마나 컸을지. 황태자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다.

    “대신에 아이가 생기거나 태어나면 내가 제일 먼저 대부가 될 테니, 나중에 딴말하기 없는 거요. 알겠소?”

    아이라는 말에 밀러의 금빛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아이…….

    “당분간은 계획이 없으나, 만에 하나 생긴다면 그리하지요.”

    “뭐, 뭐라, 뭐라 하셨소? 만에 하나?”

    황태자는 질겁한 얼굴로 말까지 더듬었다. 그는 당혹감에 푹 젖은 눈을 몇 번이나 꿈뻑거리더니 어이가 없단 듯 헛웃음을 내비쳤다.

    “대공, 설마 그 말을 내 친우에게도 한 건 아니겠지? 아무리 패기로운 사람이래도, 그런 말이면 상처받을 게 뻔하건만.”

    밀러는 이맛살을 접어 가며 눈을 크게 떴다. 어울리지 않게 순진한 얼굴로 당황하자, 황태자가 한숨과 함께 말했다.

    “아이의 아버지가 그런 식이라면, 아이를 갖고 싶던 마음도 싹 달아나겠소. 함께 아픔을 짊어 주진 못할망정, 그 외 것들은 모조리 부담해 줘야 할 게 아니오?”

    “오해이십니다. 저는 그런 뜻으로 말한 게 아닙니다. 다만, 아시다시피 아이를 키우다 보면 부부 사이가 나빠질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럴 부부 사이면 아이가 없어도 나빠지기 마련이오. 핑계지.”

    “……그런 겁니까?”

    “그걸 말이라 하시오? 부황께선 지금도 황족끼리만 있을 땐, 모후의 이름을 부르십니다. 물론, 그게 모든 걸 말할 순 없지만, 또 모든 게 되기도 하오.”

    “…오늘 가르침은 잊지 않겠습니다, 전하.”

    “그리고 한 가지 더 얹자면, 절대 아이에 대해 먼저 언급하진 마시오. 괜히 그 말이 또 상대에겐 부담일 수도 있으니. 오롯이 그녀에게 몫을 맡기시오. 나처럼 후사가 급한 게 아니면.”

    황태자는 어딘가 씁쓸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루에 7번씩 태자궁에 들러, 국혼을 서둘러 달라 오열하는 관료들 때문에 무척 지친 얼굴이었다.

    “이 역시 잊지 않고 새기겠습니다, 전하.”

    “그대가 부럽소.”

    저도 모르게 본심이 툭 나왔다. 이에, 황태자는 서둘러 하하 웃으며 말을 돌렸다.

    “부황께선 아직 한창이시고, 내 아우들도 한창이건만. 그것들은 툭하면 죽는소리를 하며 이 제국이 곧 멸망할 것처럼 구는 게 우습지 말이오. 그러니,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 갈 것이오. 내가 어디 그것들 좋은 짓 시켜 줄까. 떼로 몰려다니며 울 시간에, 하나라도 더 나은 안건을 발의하면 좀 좋소?”

    “인재들이 부족하십니까?”

    “아아, 말도 마시오. 내가 그대와 같은 인재가 둘이면 행복하다 하지 않았소.”

    밀러는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나지막이 말문을 열었다.

    “아카데미 정치학과 외교학에서 수석 졸업한 인재를 알고 있습니다만.”

    “가문이 문제요?”

    “문제 될 게 없는 평범한 백작가의 귀족입니다.”

    파벌 나누기를 좋아하는 귀족이 아닌가. 밀러가 파벌에 문제가 없다 확언을 했으니, 인재를 마음 놓고 등용할 수 있을 터. 황태자는 자세를 고쳐 앉아 말했다.

    “내가 요즘 신경 쓸 일이 많아, 아카데미 쪽은 손도 대지 못했었소. 한데, 그런 인재를 홀로 알고 있었다니. 아카데미 수석 졸업이라니! 당장, 데려와 보시오!”

    “조만간 학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서류와 부가 서류까지 구비해 전하께 보내겠습니다.”

    그의 말에 황태자는 하하 웃으며 한결 표정이 느슨하게 풀렸다. 집무실 한편에 탑처럼 쌓인 일감을 나눌 수 있겠다 여기며, 그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곧 있으면 저녁 시간인데, 함께 하시겠소. 대공?”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아아, 그렇지, 참. 내 패기로운 친우를 홀로 식사하게 둘 수야 없지. 대공, 다음에는 그 인재와 꼭 함께 오시오. 내가 눈이 닳도록 기다릴 테니.”

    두 사람은 시선을 맞춘 채 환하게도 웃었다. 눈과 입은 웃고 있었지만, 밀러의 시선은 벽에 걸린 시계에 향해 있었다.

    “그럼, 배웅해 줄 테니 일어나시오. 이러다가 저녁 식사도 못 하겠소.”

    황태자는 일부러 짓궂게 웃으며 장난치더니, 이내 곧 걸음을 서둘렀다. 덕분에 여태까지의 배웅 중에서도 가장 짧은 배웅이었다.

    “각하, 세르트 백작저로 먼저 가 계시겠습니까? 아가씨께서 그렇게 하시는 게 어떠시냐는 연락을 보내셨습니다.”

    황궁에서 대공저로 가는 길에 세르트 백작저가 있으니, 린느가 그를 배려한 게 분명했다. 밀러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인사드리러 가는 길인데 그렇게 할 순 없지. 무조건 대공저로.”

    밀러는 그 말만 남겨 두고 마차에 유연하게 올라탔다.

    * * *

    린느는 본관 로비 벽난로에 앉아 몸을 따듯하게 녹였다. 간간이 차가운 바람이 로비에 들어오면, 이 거대한 벽난로는 가차 없이 냉기를 앗아 갔다.

    ‘이러니 그날도 넋을 놓고 잠들었지.’

    노곤노곤하니 잠도 오고……. 배도 고프고……. 린느는 드레스 레이스를 만지작대며 입술을 뾰로통하니 내놨다.

    “그냥 내가 먼저 백작저에 가 있는 게 낫지 않아? 굳이 여기까지 또 와서 같이 출발하는 건 너무 비효율적이야.”

    “각하께선 비효율 따윈 안중에도 없으세요. 무려 아가씨와의 약속인걸요?”

    안나가 장작불을 불쏘시개로 쑤시며, 다정하게 그녀의 투정을 받아 줬다.

    “그리고 처음 인사드리는 자리이니, 함께 출발하시는 게 맞지요.”

    “그래도 피곤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잠도 못 자고 아침 일찍 황궁을 갔는데…….”

    요즘 밀러가 잠든 모습을 제대로 본 적이 있던가? 그의 건강을 걱정하는 것만큼 의미 없는 일이 없다는 걸 알지만, 린느는 걱정을 삭일 수 없었다.

    “아가씨, 설마 각하의 체력을 걱정하시는 건 아니시죠?”

    “하지만, 요즘 거의 잠들지 못했어요. 저야 오후까지 잤으니 괜찮지만요.”

    안나는 불쏘시개를 내려놓더니 손을 탈탈 털었다. 그리고는 그 다정한 눈웃음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각하께서 병을 앓기 전까지는 하루에 3시간 이상 주무시지 않는 분이셨습니다. 늘 학문과 책을 가까이 두셨거든요.”

    “세 시간이요? 사람 맞죠?”

    “그러니 아가씨께서 크게 걱정하실 것도 없으십니다. 혹, 수면시간이 적다 여기시면 각하께 아가씨께서 직접 말씀드리는 것도 방법이겠죠.”

    “오…… 안나 님은 역시 똑똑하세요.”

    알렉스와 안나 그리고 집사장까지. 이 대공저 안살림 실세라는 세 사람이 돌아가며 잔소리를 얹었지만, 밀러는 수면 시간을 늘리지 않았다. 하지만 그 고집도 이젠 끝이다 이거다.

    “제가 오늘부터는 적어도 5시간은 주무시라 할게요. 그리고 적응되면 8시간씩 꼬박꼬박 재울 테니, 걱정 마세요!”

    “나서서 그리 해 주신다니 제가 마음이 개운합니다.”

    “그럼요. 세상에, 3시간이라니요? 지금은 젊으니 괜찮지만, 앞자리 수 바뀌어봐요, 아무리 대공님이어도 무리일 거예요.”

    “…음. 글쎄, 그건 잘 모르겠지만 확실히 수면 시간이 적긴 합니다.”

    그때 등 뒤로 다급한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린느.”

    나지막한 밀러의 목소리가 로비 본관을 무겁게 울렸다. 입궁할 때 차려입은 예복 차림의 밀러가 뛰어와 린느에게 닿았다. 그의 널찍한 어깨에 달린 금빛 견장이 마구 흔들렸다.

    “많이 기다렸지?”

    “아니요? 많이 기다리진 않았어요.”

    “다행이야.”

    그는 당연하단 듯이 왼손으로 그녀의 핸드백을 들고, 린느에겐 자신의 오른팔을 내어줬다. 거기에서 멈추지 않고, 그는 고개를 틀어 안나에게 눈짓했다. 그러자, 안나는 고개를 짧게 끄덕이며 자리를 비웠다.

    “태자 전하께선 잘 지내시죠?”

    “응. 조금 골머리를 앓고 계시긴 하다만, 그분은 늘 골머리를 앓고 사시는 분이니까 괜찮아.”

    린느는 그의 대답에 크게 웃으며 맞다며 맞장구를 쳤다.

    “결혼식도 우리끼리 한다 하니, 아주 앓는 소리를 하시더군. 휴가 잘린 보좌관처럼 말이야.”

    “그 정도면 우리, 주기적으로 대공저에서 연회를 열어 드려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 조만간 귀족법 시험일이니, 그때 맞춰 함께 입궁해 인사드리는 건 어때?”

    “좋죠! 그럼, 그날은 대공님 혼자 시험 보고 오세요. 전 태자 전하와 수다 떨며 기다릴게요.”

    그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가 마차에 탈 수 있도록 손을 잡아줬다.

    “고마워요.”

    “이 정도로 뭘.”

    가볍게 쥔 그녀의 손등 위로 입을 맞춘 후에야 손을 떠나보냈다. 린느가 드레스를 정리하며 자리에 앉자, 밀러는 안나가 가져온 밍크 숄을 그녀의 어깨와 등에 감쌌다.

    * * *

    저녁 시간이 가까워지자 세르트 경은 안절부절못하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반면, 엘리자는 신나게 드레스를 휘날리며 진두지휘했다.

    “음, 저 꽃병에는 붉은 꽃보단 조금 더 옅은 붉은 꽃이 어울리지. 안 그래요?”

    붉은 게 다 거기서 거기 아니었어? 세르트 경은 당황한 얼굴로 눈동자를 굴리다가, 끝내 고개를 끄덕였다. 헬렌은 그런 세르트 경 곁에 서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각하께선 그 꽃병에 무슨 색 꽃이 꽂혀 있는지 기억도 못 하실걸요? 그렇죠, 아버지?”

    “……어? 어으응.”

    두 사람 사이에 껴서 세르트 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또 끄덕였다. 부러진 다리 때문에 두 사람에게서 도망가지도 못하고, 앉은 채로 고개만 끄덕이자니 병이 날 지경이었다.

    “어머니, 이 정도면 충분하다 못해 넘치거든요? 이게 그만 돈 바르시고, 얌전히 기다리자구요. 네?”

    “두 부녀 아주 딱딱 맞지? 낭만이 없어.”

    엘리자는 어서 린느가 와서 자신의 편을 들어 줘야 한다며 투덜거렸다. 그때, 사용인이 백작저 로비를 관통하며 뛰어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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