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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118화 (118/122)
  • @118화

    “소백작님.”

    “라밀라? 어서 이리 앉으세요.”

    라밀라는 전보다도 더 여유로운 표정으로 린느 곁에 차분히 앉았다.

    “소백작님 덕분에 대공저에 서관 화원도 이토록 예쁘다는 걸 알게 됐어요. 아시다시피, 동관 화원이 서관 화원보다 본관이랑 가까우니까요.”

    “맞아요. 한적한 서관 화원도 충분히 매력적인 거 같아요.”

    린느는 본능적으로 라밀라와의 이별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하이레니아 가문이 몰락하며, 가신들조차 멸문을 코앞에 두고 있지 않은가. 린느는 그 상황을 읽고서, 이로써 락센이 라밀라에게 위협이 되지 않는다 여겼다.

    그리고 락센이 더는 위협이 되지 않는 한, 라밀라가 대공저에 숨어 있을 이유도 없으니 라밀라의 이별은 이미 예고된 거나 마찬가지였다.

    “소백작님, 저 오늘 떠나요.”

    “루비도 함께 떠나겠죠?”

    라밀라는 고개를 끄덕이며, 젖은 눈을 애써 숨겼다. 슬프거나 기쁘다기보단, 린느에게 고마운 마음에 감정이 크게 벅차오른 탓이었다.

    “백작저로 가기로 했어요.”

    “백작저?”

    “락센이 어제 아침에 죽었다더군요. 그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저는 아직 락센 가의 백작 부인이니 가 봐야겠죠.”

    “…….”

    죽은 사람을 두고 이렇다 저렇다 말을 붙이고 싶진 않았으나, 린느는 못내 그의 죽음에 안도했다. 더는 라밀라가 쫓기며 살지 않아도 된다는 데서 비롯된 안도였다.

    “그럼 락센 가의 가주로 가시는 건가요?”

    “네. 태자 전하께 면이 없는 가문의 가주겠지만, 그래도 제가 열심히 일구면 전하께서도 노기를 푸시리라 믿어요.”

    “그럼요. 라밀라 님은 뭐든 어디서든 다 잘 해내실 거예요. 루비의 언니잖아요.”

    “……루비. 루비 예뻐해 주셔서 감사했어요. 각하께 인사드리고 가고 싶은데, 다음에 우연히 마주치면 그때 인사하라 하셔서 인사도 드리지 못하고 떠나네요.”

    “으휴, 대공님이 꼭 그래요. 제가 보기엔 감사하단 말에 두드러기가 있는 거 같아요.”

    라밀라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울며 웃었다. 그런 그녀에게 린느가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말을 얹었다.

    “그런데… 정말 확실히 죽은 거 맞겠죠? 락센인가 뭔가 그 사람, 워낙 비열해서 죽음까지 위장했을지도 몰라요.”

    “어제저녁에 그를 모시던 보좌관이 다녀갔어요. 락센이 죽지 않고서야, 증거로 제게 보일 수 없는 전리품도 함께 가져왔더군요.”

    그 전리품이 무엇이냐 묻고자 했으나, 린느는 고개를 잘게 흔들며 질문을 삼켰다. 죽지 않고서야 보여 줄 수 없는 거라면, 머리나 심장이 아니겠는가. 그 험한 꼴을 보기가 꺼려졌다.

    “그럼 정말 다행이구요. 나중에 놀러 갈게요.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서한도 하셔야 하구요…….”

    라밀라는 두 팔을 펼쳐, 린느를 가볍게 끌어안았다. 마치, 큰 언니가 막냇동생을 다독여 주는 것 같은 포옹은 무척이나 따듯하고 부드러웠다. 어쩐지, 드레스가 외출복이더라니. 린느는 그녀와의 이별을 피부로 느끼며 라밀라의 등을 토닥여 줬다.

    선대 대공비에 대한 죄책감은 당신의 것이 아니었다고 딱 말해 주고 싶었지만, 그건 똑똑한 그녀가 알아서 알아챘을 거라 기대하며 라밀라를 놔줬다. 마차가 주차된 곳까지 함께 걸었고, 그곳엔 단정하게 차려입은 루비가 보였다. 하녀복도 잘 어울렸지만, 귀족가 영애들이 입는 드레스 역시 잘 어울렸다.

    루비는 오열하듯 울며 린느의 품에 눈물 자국을 잔뜩 만들었고, 그다음 차례는 메리였다.

    “루비! 편지 보낼 테니까 무시하지 말아!”

    “우웅. 언니도 귀찮다고 무시 마! 그리고 나 또 대공저에 올 거니까, 흑…. 꼭 올 거야! 안나 님두, 넬 부인두……. 큽.”

    루비는 히끅히끅 울며, 그동안 동고동락한 이들과 이별했다. 아쉬움은 많았으나, 슬픔은 티끌도 없는 완벽한 이별이었다.

    “메리.”

    “…….”

    루비와 더 추억이 많은 사람은 린느보단 메리였다. 대공저에 오자마자 메리가 가장 먼저 사귄 친우는 루비였으니까.

    “아가씨께서 있으니, 전 괜찮아요…….”

    메리는 힘없는 목소리로 괜찮다 했으나, 린느는 그런 그녀의 어깨를 꼭 끌어안았다.

    “조금 안정이 되면, 따로 휴가를 줄게. 루비가 있는 곳에서 푹 놀다가 와. 내가 그렇게 해 줄게.”

    “말씀만으로도 너무 감사해요…. 하지만, 제가 그럴 시간이 어딨어요.”

    “아냐. 그럴 시간이 왜 없어?”

    메리는 한탄하듯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아가씨 결혼 준비도 준비해야 하고, 신혼 방도 꾸며야 하고…….”

    “결혼을 무슨 평생 해? 게다가, 신혼 방은 꾸밀 필요도 없고.”

    “그리고 곧 태어날 아기도 봐 드려야 하고……. 설마, 따로 유모님을 구하실 건 아니시죠? 아기님은 저와 넬 부인이 전담으로 돌보기로 이야기가 다 끝나 있어요.”

    메리는 단정 짓듯이 말을 끝냈다. 금화 보따리를 지키려는 부자처럼 눈빛이 매서울 정도였다. 나지막이 다른 이들에게 뺏길 수 없다는 포부까지 읊조렸다.

    바짝 힘이 들어가 있던 린느의 눈매가 느슨하게 풀렸다.

    “어어? 곧 태어날 아기?”

    “네. 두 분께서 침실을 그렇게 열정적으로 오래 쓰셨으니, 못해도 올해엔 아기님이…….”

    “결혼식도 안 올렸는데?”

    “아휴, 그게 다 무슨 소용이에요? 결혼식은 안 하셨지만, 사실 대공비나 다름이 없으신걸요? 순서는 중요하지 않아요, 아가씨. 서로의 마음이 중요한 거죠.”

    “맞는 말이긴 한데……. 할머니 같은 말을 잘도 하네.”

    “그런데, 정말 너무 기대되는 거 있죠? 아가씨를 닮은 아기라니. 부디 성격은 음… 음, 헬렌 아가씨를 닮길.”

    메리는 출산을 앞둔 손녀를 둔 할머니처럼 푸짐하게 웃었다. 동시에 린느는 웃음기 없는 얼굴로 허공만 바라봤다.

    ‘밀러가 아기를 원하지 않는 거 같던데.’

    두 사람은 매일 불처럼 사랑했으나, 그 완벽한 남자는 단 하루도 실수한 적이 없었다. 병적으로 자신의 씨를 치우고, 또 치웠다. 마치, 아이를 갖길 원하지 않는 사람처럼 말이다.

    물론, 린느 그녀가 아이를 원한다고 밝힌다면, 밀러라면 아기가 싫어도 무조건 좋다 할 남자일 것이다. 그러고는 스스로 ‘난 아이를 좋아한다’는 세뇌까지 서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린느는 그걸 원하지 않았다. 너무나 원해서 태어난 아이라도 평생 감당하기 힘든 게 어디 한둘이던가.

    린느는 그의 성격을 잘 알기에, 더욱 조심했다. 특히, 아기를 언급한 그날 이후로 그녀는 아기라는 단어조차, 입에 담지 않았다. 그게 곧, 우리 모두를 위한 거라 여긴 결과였다. 여기에서 우리는 린느 그녀 자신과 밀러 그리고 태어날 아이를 위함이었다.

    ‘……없어도 행복하니까 괜찮아. 밀러의 마음도 이해해.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랐으니, 아이 갖기가 두려울 수밖에 없지. 당장 나도 그러니까.’

    사실 괜찮은지 괜찮지 않은지는 모르겠지만……. 린느는 양팔을 문지르며 본관으로 들어섰다.

    * * *

    제국의 위용을 보여 주듯, 태자 궁은 햇살을 받아 오늘따라 유독 더욱 빛이 났다.

    “그래서, 대공저에 꿀이라도 발라 놨소? 내 친우가 이리 성정이 급한 줄은 또 몰랐군. 하하하하!”

    “안색이 편안해 보이십니다, 전하.”

    “그럼! 내가 그 벼룩의 집을 꺼내다가 모조리 불태웠으니, 웃음이 날 수밖에 없지 않겠소? 대공, 이게 다 그대 덕분이오. 여태 그렇게 큰 그림을 그리고 있을 줄이야!”

    “과찬이십니다.”

    “과찬이라니? 절대 과찬이 아니오. 아니, 오히려 내가 말로만 표현해 아쉽소. 크흐, 그 지난 세월 간 대공저에서 일부러 은거했을 때부터가 그대의 큰 그림의 시작 아니겠소? 그대가 약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더라면, 그것들을 세상 밖으로 유인할 수도 없었을 것이오.”

    밀러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뒤늦게 찻잔을 들이켜며 대답을 피했다.

    “그렇게 유인한 벼룩을 장작불까지 어떻게 홀린 것인지! 하, 내가 이래서 부황께 매번 혼이 나는 게요. 그 잘 짜인 판에서 홀랑 음식만 먹고 나온 셈이 아니냐며 부황께서 어찌나 혼을 내셨는지. 하긴, 나도 조금 너무하긴 했소. 그대가 짠 판에 내가 주인공인 척 끼어들었으니.”

    “태자 전하께서 직접 나서 주신 덕분에 이렇게 일이 잘 풀린 것입니다. 만약, 나서 주지 않으셨다면 저도 골머리를 썩였겠지요.”

    “거참, 내가 뭘 했다고. 하, 하하….”

    황태자는 난감하단 얼굴로 어색하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희미하게 옅어지자, 두 사람은 기다렸단 듯이 찻잔을 기울며 정적을 대신했다.

    “그래서, 락센은 죽었단 말이오?”

    “라밀라가 가주를 이어, 락센가의 명맥을 잇겠다 했으니 큰 걱정은 마십시오.”

    “흠. 그럼 다행이고……. 이제 웬만한 건 다 치운 듯하오. 아, 온 김에 하이레니아를 보고 갈 텐가? 황궁 지하에 있으니, 구경은 할 수 있소.”

    “좋은 것도 아닌데 구경은 사양하겠습니다. 좋은 일을 앞두고 그런 걸 눈에 담을 순 없으니 말입니다.”

    “아, 아아! 그렇지! 우리 친우들께서 결혼을 하는군! 그래, 대예식장인가? 만약, 필요하다면 내 이름을 대고서라도 예약하시오! 어차피 그날 내가 친히 참석할 테니 말이오.”

    “말씀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만.”

    하하 웃던 황태자가 눈을 얇게 뜨며 밀러를 빤히 바라봤다.

    “꼭 저 말을 하고 나서는 좋은 말이 돌아온 적이 없었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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