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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117화 (117/122)
  • @117화

    엘리자는 평소와 달리 상냥한 얼굴로 편지를 펼쳐, 세르트 경의 코앞에 가져다줬다. 그러자, 린느의 눈동자 색과 똑 닮은 세르트 경의 눈동자가 도르르 굴러가기 시작했다.

    “아니, 린느가 아니라 대공 각하께서 보낸 편지였소?”

    엘리자는 곁에 있던 냉수를 벌컥벌컥 마시며 대답을 피했다.

    “잠깐… 뭐, 뭐? 뭐!? 가, 각하께서 왜 누추한 백작저에서 왜, 왜 묵으려고……? 부인, 내가 지금 읽고 있는 게 맞소? 각하께서 우리 백작저에서 함께 3달간 지내신다는 게?!”

    “린느 때문이겠죠. 가신으로 들인다면서 대공저로 데려가신 지도 몇 달이 아닙니까?”

    세르트 경은 많은 감정을 담은 눈동자로 서한을 빤히 바라봤다.

    “그렇긴 하다만…….”

    “어차피 백작저에 별관도 있으니, 그곳 전체를 내어드려도 좋구요. 아무튼, 저는 이 일은 잘 모르겠네요. 우리 믿음직스러운 세르트 가문의 가주께서 처리해 주세요.”

    “아니, 엘리자. 엘리자?”

    “저는 잠시, 헬렌에게 이 사실을 전하러 다녀올게요.”

    “자, 잠깐! 이 서한에 내가 답장하는 거였소!?”

    “네, 그럼요!”

    엘리자는 그대로 침실 밖으로 도망쳤다.

    달칵.

    침실 문 너머로 세르트 경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렸으나, 엘리자는 배시시 웃으며 헬렌의 방으로 향했다.

    “어? 어머니?”

    “이제 들어오니?”

    헬렌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엘리자에게로 자연스레 방향을 틀었다.

    “저 오는 길에 언니 만났어요.”

    “어? 린느를!?”

    “네, 오랜만에 살롱에 들렀거든요.”

    무심한 얼굴로 말하던 헬렌이 픽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글쎄, 두 사람 완전 뜨겁던데요? 아주 그냥, 대공님 눈동자가 언니를 바라볼 때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데 크크.”

    “……취했니?”

    “아뇹.”

    “아무튼, 그래서 잘 지내는 거지? 어차피 곧 만나긴 할 거 같다만……. 그리고 연회장에서도 좋아 보이긴 했지만…….”

    그래도 걱정되는 게 부모 마음이었다. 헬렌은 그런 그녀의 팔을 가볍게 토닥이며 울상까지 얹어 말했다.

    “좋아 보이는 정도가 아니었어요. 두 사람 떼어 놨다가는 각하께서 전쟁이라도 일으키실 정도였거든요.”

    “신혼이라 그래.”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어요…. 하, 아무튼 나중에 보면 알겠죠.”

    “그건 그건데 헬렌. 물어볼 게 있어. 오늘 대공저에서 서한이 도착했는데, 너한테 물어보고 결정해야 할 거 같아서.”

    “저, 저한테요? 뭐길래…….”

    헬렌은 본능적으로 몸을 뒤로 빼며 불편해했다. 대공저에서 도착한 서한인데 자신의 의견으로 뭘 결정한다는 건지. 헬렌은 의심이 가득한 눈으로 엘리자를 바라봤다.

    “글쎄, 각하께서 석 달 정도 백작저에서 지내고 싶으시다던데 말이야.”

    헬렌의 눈동자가 실시간으로 커지는 게 보였다.

    “가, 각하께서 왜요?”

    “린느를 배려하시는 거겠지. 너도 알다시피 각하께서 형제가 있니, 친척이 있니? 이 세상에 홀로 남아, 피붙이조차 없으시잖니. 그러니 이참에 우리와 더 돈독하게 지내시려고 그런 서한을 보내신 게 분명해. ……천하의 페리하츠 대공 각하께서.”

    엘리자는 자신이 말하고도 어이가 없는지 헛웃음을 뱉었다. 그리고, 이를 듣고 있던 헬렌은 ‘피붙이’라는 단어에 굳은 채로 입만 뻐끔거렸다. 보다 못한 엘리자가 말을 덧붙였다.

    “석 달간 함께 지내며 가족처럼 온정을 나누자는 깊은 뜻이겠지. 게다가, 불편하면 대공저에서 우리가 생활해도 좋다 하셨고.”

    “아… 그러니까 매끼 식사를 함께 같은 테이블에서 먹고? 홍차 마실 때도 함께 같은 공간에서 마시고? 저택에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얼굴이라도 마주치면 그 어색한 분위기는 또 어쩌고…….”

    헬렌은 고장 난 사람처럼 삐걱대며 계단에 힘겹게 올랐다. 그런 그녀 등 뒤로 엘리자는 두 손을 입에 가져다 대며 외쳤다.

    “잘 생각해 보렴! 엄마는 일단 찬성이야! 이왕이면 우리가 대공저로 가는 게 더 좋구!”

    엘리자의 목소리가 백작저 로비를 윙윙 울렸으나, 헬렌은 뒤돌아보지 않고 터덜터덜 방으로 향했다. 웬만한 귀족들은 살면서 고위 귀족들의 얼굴도 한번 보지 못하고 죽기도 한다던데. 마치, 전설 속 동물처럼 말이다.

    ‘고작 자작가에서 태어났는데, 뭐 이렇게 휘황찬란하지?’

    게다가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전까진 린느의 광적인 패악질에 지겨워, 가족애는커녕 제대로 된 대화조차도 드물었는데……. 그래서 별다른 욕심도 기대도 없었다.

    ‘내 형부가 대공 각하인 거야? 그럼?’

    새삼스럽지만,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지난번 처음 마주쳤을 때만 해도 세르트 경의 병환 때문에 경황이 없었지만. 오늘 다시 마주친 두 사람에게선 익숙하고 편안한 감정마저 느낀 탓이다.

    ‘어쩌면…… 괜찮을지도. 어차피 대공 각하께서 매일 백작저에 있으실 것도 아니고.’

    헬렌은 린느와 달리 무척이나 영리한 사람이었다. 무려 1년 전만 해도, 세르트 자작저를 두고 졸부라며 손가락질하던 귀족이 어디 한둘이었던가? 그런데, 린느가 대공저의 가신으로 들어가며 세르트 자작가가 자연스럽게 백작이란 작위를 받아 내자 귀족들은 면을 달리했다.

    한데, 대공이 직접 백작저에 들어와 함께 생활을 한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가 어디 있을까? 헬렌은 이번 기회에 ‘가족애’와 더불어, 자신의 커리어도 쌓으리라 홀로 다짐했다.

    ‘미리 추천장을 받아 두길 잘했어.’

    고시 3관왕보다 힘들다던 아카데미 수석 졸업. 졸업자 대표생까지 해낸 헬렌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님은 헬렌의 수석 졸업장을 전혀 반가워하지 않았었다. 뭐든 건강이 최고인데, 헬렌이 무리해서 공부했다며 오히려 세르트 경은 잔소리까지 얹기도 했다.

    「살이 아주 그냥 쪽 빠졌군! 망할 졸업시험 탓이겠지. 헬렌! 그 흰 뺨이 다람쥐처럼 불기 전까진 하루 네 끼는 먹거라.」

    「아버지, 제발 화내면서 걱정하지 좀 마세요. 누가 보면 제가 아주 잘못한 줄 알겠어요!」

    「그럼 잘못이지! 누가 너더러 쌍코피 흘려 가며 공부하라 했더냐? 네가 원해서 아카데미에 보내 준 건 맞지만, 그 어떤 것도 너의 건강보다 중요한 건 없어!」

    듣기 좋은 잔소리이긴 하다만, 헬렌은 못내 서운했다. 자신의 아버지를 두고 졸부라 욕하는 것들에게 한 방을 먹여 주고 싶었을 뿐인데, 부모 걱정을 산 자식이 된듯해 마음이 무거웠다.

    차라리 이럴 거면, 남들처럼 공부하다가 나올 걸 그랬나. 그런 생각마저 했으니 말이다. 헬렌은 보기 드물게 바보처럼 헤헤 웃으며 아카데미 교수들에게 받아 낸 추천장을 촤르륵 모았다.

    ‘나도 언니처럼 인정받아서 가신이 될 거야. 못 할 게 뭐 있겠어? 겁먹지 말자!’

    헬렌은 기대를 안듯이, 그 추천장을 품에 안고 침대에 누웠다.

    * * *

    와인은 이래서 안 돼. 린느는 무거운 눈꺼풀에 인상을 찌푸렸다.

    함께 살롱에서 와인을 3병을 비우고, 대공저로 돌아가려던 길목에서 헬렌과 마주쳤고……. 며칠 만에 마주친 헬렌은 그녀의 약혼자와 함께였다.

    처음 딱 마주쳤을 땐, 헬렌의 눈동자가 당혹감에 가득했었으나 금세 표정을 풀고 부드럽게 웃었다. 아버지의 다리가 많이 나아졌다는 둥, 어머니가 병간호는 아주 똑 부러지게 잘하고 계시지만, 성의가 없다는 둥. 두 분의 금실은 여전히 불타오른다는 둥. 여느 자매들의 대화와 다를 게 없었다.

    “대공님, 어제 헬렌 만났었죠?”

    “응, 만났었지.”

    그의 따듯한 입술이 린느의 목덜미부터 어깨 그리고 등까지 맞닿았다. 맨 살결에 입술이 닿을 때마다 척추가 활처럼 휘었다. 잠이 덜 깬 채로, 그의 입맞춤을 받자 온몸이 노곤노곤하게 녹았다.

    “으응….”

    그만하라며 허리를 틀자, 밀러는 미소를 머금은 채 동그란 어깨에 쪽 입을 맞췄다.

    “라밀라가 오늘 그대와 함께 차를 마시고 싶다던데.”

    라밀라라는 말에 린느가 눈을 치켜뜨고 미간을 찌푸렸다. 햇살에 눈이 부신 탓이었다. 이불 사이에 폭 잠겨 든 그녀가 너무 사랑스러워, 밀러는 다시 침대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하지만 저녁 약속 때문에 늦장 부릴 수 없어, 그는 넥타이를 반듯하게 고정하며 말했다.

    “저녁엔 함께 세르트 백작저에서 정찬을 먹는 게 어떨까 해.”

    “네? 저희 집에서요?”

    “응. 세르트 경의 병세도 살필 겸.”

    “그래요, 그럼.”

    그는 참지 못하고 반듯하게 잘 다려진 양복바지를 구겨 가며, 린느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사랑해. 다녀올게.”

    족히 일주일은 저택을 비울 것처럼, 그의 눈가엔 아쉬움이 가득했다. 린느는 그런 그에게 어서 다녀오라며 재촉했고, 그는 그만 쫓겨나듯이 침실 밖으로 나섰다.

    * * *

    정신을 차리고 정찬실로 들어서자, 셰프가 기다렸단 듯이 숙취 해소 전용 드링크를 건넸다. 대공저에 이런 것도 있냐며 크게 놀라자, 셰프는 넉살 좋게 하하 웃으며 밀러의 명령을 받아 급하게 사 왔다 말했다. 린느는 그의 섬세한 배려에 호호 웃으며, 조금 늦은 정오 정찬을 모조리 해치웠다.

    원래는 정찬을 마치고 밀러와 동관 쪽 화원 뜰에서 수다를 떨곤 했는데, 오늘은 그가 황궁에 가는 날인지라 린느는 서관 화원으로 머리를 틀었다.

    “라밀라 님을 이리 모셔올까요?”

    “응.”

    린느는 작고 아담한 벤치에 앉았다. 상대적으로 동관은 사용인들이 자주 드나드는 곳이라, 인적이 많은 편인데 서관은 무척이나 한적했다. 그리고 이 한적한 화원에 홀로 남은 벤치에는 먼지 한 톨 없이 깨끗했으니. 역시, 우리 대공저 사용인들은 먼지 잡는 귀신이라며 린느는 작게 웃었다.

    주변을 크게 돌아보기도 하고, 발치에 있는 흰색 튤립을 빤히 바라봤다. 그때, 라밀라가 화원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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