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와…….”
린느는 그의 품에서 나와 살롱을 크게 둘러봤다. 은은하게 피워진 오렌지빛 불들이 살롱 분위기를 크게 달궜다. 커플들의 나지막한 대화 소리와 잔잔하게 틀어진 재즈 음악. 대화가 넘실대는 낮과 확연히 다른 분위기에 린느의 눈동자엔 호기심이 크게 일렁였다.
“밤에는 저도 처음 와서……. 너무 좋은데요!? 전 낮도 좋은데, 저녁이 더 마음에 들어요.”
“이럴 땐 와인을 한잔 마시는 것도 좋지. 마실까?”
“네? 여기 와인도 팔아요?”
“응, 그렇더라고.”
린느는 꽃받침 한 얼굴로 밀러를 바라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은근 모범생이란 말이죠. 메뉴판을 정독하구.”
“은근이 아니라, 꽤 모범생 타입이야.”
“예를 들자면 어떤 부분에서요?”
밀러는 직원에게 와인을 주문하더니, 한 손으로 메뉴판을 넘겨 주며 말했다.
“연애랄까.”
“…….”
린느는 웃음기를 멈추고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빈 잔을 빤히 바라봤다. 또다시 갈증이 오른 탓이다.
“서툴기 짝이 없지. 그런데도 그대가 날 이리 어여삐 여겨 주니, 난 행복한 사람이야.”
“이미 잘하고 계세요. 연애에 관련된 모든 걸 다요.”
“아니야. 아직 멀었어.”
완벽하지 않을 거면, 시행조차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미완된 걸 완성시킨 후에야 움직이는 게 밀러의 방식이라면 방식이었다. 그래서 무던히 노력하고 공부하고 연구해, 보다 더 완벽을 추구했다. 하지만, 연애만큼은 공부도 연구도 무용지물이니 그에겐 어려울 수밖에.
“천천히 해요. 난 지금도 좋단 말이에요.”
“하여튼 자애로워.”
린느는 그의 대답에 넉넉하게 웃어 답했다. 매일 대공저 침실 침대 위에서 내려오지 않는 게 최고라 생각했는데, 오늘처럼 영지를 돌아다니는 것도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그리고 만족하는 만큼 마음이 조금 불안해졌다.
“그런데…….”
린느가 쭈뼛거리더니, 조심스레 물었다.
“앞으로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 못된 후작은 다신 안 오겠죠?”
“못 오는 거야, 린느.”
“주, 죽었어요?!”
“죽일까?”
아니라고 답해야 하는데, 린느는 쉬이 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미리안이 평화를 깨트린 것처럼, 그 못된 후작은 수백 번도 평화를 깨트릴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죽어도 되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무슨 자격으로 죽이라 할까. 린느는 머리가 복잡해졌다.
“다시는 그런 비슷한 일로 그대를 걱정시키는 일 없도록 할게. 지내다가 그 작자의 안부가 궁금하면 그때 내게 물어봐. 생사를 알려 줄 테니까.”
때마침 주문한 와인과 고급 크리스탈 와인잔이 테이블 위로 올려졌다. 그러자, 밀러는 유연하게 말을 돌렸다.
“그럼 이제 우리 결혼식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하는데. 식장은 어디가 좋아?”
“음…….”
“크고 화려한 게 좋다면, 수도에 있는 대예식장이 좋겠지. 하지만, 거긴 흔하니 동쪽 바닷가 근처에 있는 대예식장도 좋아. 아님, 대공저 본성에서 치러도 좋고. 대신에, 본성에서 예식을 치르려면 준비할 게 많아지긴 할 거야. 린느, 생각해 둔 곳이 있다면 말해 줘.”
“저야 생각만 해 봤지, 딱히…. 지리도 잘 모르니까요.”
“그럼 분위기만 정해 볼래? 차분하게 하고 싶다면 차분해도 좋고, 뭐든.”
“딱 생각한 것 없지만요. 사실 그렇게 화려할 필요가 있나 싶어요. 이것저것 생각하고 고려하면 다리 아프고 허리 아프고 귀찮단 말이죠? 그리고 제 인생 자체가 앞으로 더 화려해질 건데, 굳이 신경 써서 더 화려하게 하고 싶진 않아요.”
화려한 게 좋을 거 같으면 연회장을 화려하게 꾸미면 그만일 테고, 연회장이야 앞으로 매년 열 텐데?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것보다도, 그녀는 더 탐나는 게 있었다.
“전, 가족끼리 식을 올리고 싶어요. 꼭 가족이 아니어도, 가족처럼 편한 사람들을 불러서 함께 식사하고 도란도란 대화도 나누고 싶어요. 제 어머니도 귀국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버지와도 시간을 많이 보낸 거 같지 않고…….”
밀러에겐 부를 가족이 없다는 걸 깨닫고서, 린느는 급하게 말을 얼버무렸다.
“아, 아니다. 그냥 수도에 있는 대예식장에서 할래요.”
하지만 그녀의 예상보다 그의 눈치가 더 빨랐다.
“대예식장은 흔해 빠져서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아. 그리고, 그대의 말대로 하는 게 더 끌리기도 하고.”
“거짓말.”
“진심이야. 다른 사람들의 축하보다, 그대의 부모님께 축하받고 싶어. 욕심인 건 알지만 솔직히…… 꽤 부러운 가족이야.”
“저희 가족이요?”
밀러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린느의 와인잔을 채워 줬다.
“그대도 알다시피 난 형제도 없으니……. 그날 그대의 아버지 표정을 봤을까? 다리는 부러져서 퉁퉁 부어 있는데, 그대를 보며 울 듯 웃는 모습. 진심으로 행복해 보였어.”
“아버지가…….”
“내가 못 할 짓을 했어. 그대를 강제로 대공저에 발을 묶었으니, 세르트 경은 하루하루를 마음 졸이며 지냈을 거야.”
오랜만에 마주한 세르트 경의 얼굴은 낙엽처럼 푸석푸석했다. 나이에 맞지 않게 풍채가 좋은 그였으나, 린느가 대공저의 가신으로 들어간 이후로 그의 몸은 빠르게 노쇠해 갔다.
어쩌면, 이번 낙마 사건으로 다리가 부러진 것도, 노쇠의 흔적일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지 않았더라면 뼈에 금만 갔을지도. 밀러는 그게 무척이나 마음에 걸렸다.
게다가 세르트 백작 부인은 딸 험담하는 하이레니아를 자리에 무릎까지 꿇렸으니. 그들의 자식 사랑은 온전하고도 깊었다.
“그대가 말한 대로 하는 게 어때? 진심으로 나 역시 바라는 바야.”
린느는 그의 말에 잠시 머뭇거렸다. 무척이나 고마운 제안이지만, 그렇게 하면 신랑 측 손님이 텅 비어 있을까 걱정이 앞섰다.
“세르트 가문이 곧 내 가족이나 다름없지만, 이번을 기회로 함께 지내고 싶기도 해.”
“네? 함께 지내다니요?”
“내가 그대에게 강제로 뺏은 시간을 돌려줘야지. 결혼식을 마치고, 백작저에서 생활하려고.”
“아니, 신혼부부가 각방을 쓴다고요?!”
“그럴 리가. 함께 백작저에서 생활하잔 뜻이야.”
린느는 바보처럼 입을 벌리고서 밀러를 빤히 바라봤다.
“아, 아버지께서 불편하실 텐데요?”
“그거야 내가 풀어 갈 숙제라고 생각해. 처음에는 불편하겠지만, 아들 하나 생겼나 생각하시면 좋지 않겠나.”
“대, 대공 각하께서 아, 아들 같은 사위가 되시겠…… 다고요?”
“응. 노력하면 다 돼. 그리고 난 노력해서 못 이룬 건 없었어. 내 병만 빼고.”
그는 결연한 얼굴로 와인잔을 기울였다.
* * *
덜컥.
침실 문을 열자마자, 침대에 누워 있던 세르트 경이 상체를 일으키며 끙 앓았다. 그 모습을 본 엘리자가 도도도 뛰어와 그의 등을 턱 받쳐 줬다.
“말을 하래도 꼭 혼자 일어나려 하죠? 아주, 말을 더럽게 안 들으세요.”
“미안 미안. 사실, 아까 대공저에서 서한이 도착했는데 부인이 오면 함께 읽으려고 아껴 놨거든. 저기 저 협탁 두 번째 서랍이오.”
“흥.”
엘리자는 콧대를 치켜들며 협탁 두 번째 서랍을 드르륵 열었다.
“린느가 보낸 거예요?”
“매번 대공저 이름으로 보냈으니, 린느가 맞을 테지. 이리 와서 함께 읽자구.”
세르트 경은 허허 웃으며 침대를 톡톡 두드렸다. 그러자, 엘리자는 편지에 시선을 두고서 침대에 걸터앉았다.
“어머, 세상에! 그건가 봐요! 린느가 나랑 함께 결혼식장 꾸리고 싶다 했었거든. 그걸 상의하려고 서한을 보냈나 봐!”
“에이, 연회가 끝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결혼식장 이야기겠소? 뭐, 내 다리는 잘 붙었는지 안부차 보낸 서한이겠지.”
“시간 지나면 알아서 다 붙을 뼈인데 그게 뭐 궁금하다고 보냈겠어요? 분명 저한테 보낸 서한이 틀림 없다구요.”
허허 웃던 세르트 경이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더니, 헛기침을 했다.
“그, 그런가…. 그래도 내 다리가 더 걱정될 텐데…….”
그 말을 끝으로 엘리자는 서한을 능숙하게 뜯으며 해맑게 웃었다.
“…….”
엘리자는 눈동자만 도르르 굴리며 서한을 읽더니, 어느 한 지점에 뚝 멈췄다. 놀란 눈치가 역력하자, 세르트 경이 안절부절못하며 움직였다.
“뭐라 적혀 있소? 이번 주에 백작저에 들르겠다 쓰여 있소? 아니면, 내 다리가 붙었는지 궁금해하고 있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엘리자는 남은 편지도 주욱 읽더니, 당황한 얼굴로 세르트 경을 빤히 바라봤다.
“왜, 왜 그러는 거요? 서, 설마 뭐 벌써 둘 사이에 뭐가 생긴 건 아니지? 우, 우리 작고 귀여운 내 딸은 몸이 약한데. 그, 그런 거 아니지? 아이 거참, 답답해 죽겠네. 부인!”
엘리자는 그의 손아귀에 편지를 올려 주며, 눈을 두어 번 깜빡거렸다.
“일단 첫 번째, 결혼식을 우리 백작저에서 하고 싶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고 싶다네요.”
“린느가? 뭐, 린느가 그렇게 하고 싶다면, 그렇게 해야지. 예쁜 것. 마음도 예쁘지, 아주. 그래도 퍽 아쉽군.”
“일단 결혼식은 제게 맡기세요. 우리 저택 화원이 이번 대회에서 2등을 했잖아요? 그러니, 그곳에서 하면 돼. 문제는 두 번째예요. 자, 답해 봐요. 우리 세르트 가문의 가주가 누구죠?”
“갑자기 그건 왜…….”
“아니 그러니까, 제가 아니라 경께서 가주잖아요?”
“맞기야 하다만……. 실세는 부인이잖소. 금고 열쇠도 이 저택도 마구간에 늘어선 말도 다 부인의 몫이니. 난 이대로 부인께 쫓겨나면 영락없이 거지 신세요.”
“아니 그러니까, 그건 다 떼놓고요. 경께서 가주 맞죠?”
세르트 경은 불안에 찬 눈동자로 엘리자를 빤히 바라보더니, 아주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 나한테 왜, 왜 그런 질문을…… 하시는 거요? 나 불안해지려 하오.”
“그럼 경만 믿을게요. 자, 편지 읽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