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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115화 (115/122)
  • @115화

    “대공님, 일부러 그러셨죠?”

    밀러는 메뉴판으로 표정을 감췄다. 이상하게 다른 사람 앞에서는 술술 나오던 대처 방법도 린느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거짓말은 고사하고, 아주 쉬운 단답형 거짓말조차도 린느 앞에서는 쉽지 않았다. 밀러는 그녀와 맞서기를 피하기 위해 아예 표정을 숨기기로 했다.

    “아까 레스토랑은 전체 예약 하고, 여기는 일부러 그렇게 안 하신 거잖아요.”

    밀러는 말없이 헛기침을 하며 대답을 피했다.

    살롱 주인의 철칙까지 모조리 파괴하면서까지 예약을 하고 싶진 않았다. 그리해서 얻은 자리를 린느가 마음 놓고 즐길 리가 없지 않은가. 이깟 명당자리야 건물을 새로 세우든가, 살롱을 인수하면 그만이지만 린느가 사랑하는 이 명당자리는 자리가 아니라, 분위기였다. 영리한 남자는 그걸 눈치채고, 알렉스를 이용했다.

    「알렉스, 오늘은 나와 따로 움직이지.」

    「당연하지요! 설마, 제가 눈치도 없이 각하와 아가씨 사이에 껴서 데이트를 망치겠습니까? 대공저 걱정은 하지 마시고 푹 쉬다 오시지요. 가까운 바닷가로 놀러 가셔도 좋고 말입니다.」

    알렉스는 신난 아이처럼 헤실거리며 손을 가만히 두질 못했다.

    「어째 그대가 더 신나 보이는군.」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웃음을 멈추기가 힘듭니다. 이건 단연 저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대공저 식구 모두가 앓고 있는 병이지요.」

    그는 광대를 치켜올린 채로 하하 웃었다. 그 덕에, 밀러도 그의 웃음에 옮아 느슨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소리가 잔잔하게 멎을 때쯤, 밀러가 그의 어깨를 톡톡 다독이며 말했다.

    「노을이 특히 예쁜 살롱이 있다던데. 거기에서도 명당자리에서만 노을을 직관할 수 있다더군.」

    「그럼, 그 살롱도 전체 예약을 하면 되겠습니까?」

    밀러는 고개를 내저으며, 낭만이 없다는 타박도 잊지 않았다.

    「그러지 말고, 티 나지 않게 그대가 먼저 명당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그리고 우리가 가면 자연스럽게 그대가 떠나면 되겠지.」

    「오… 아주 좋은 방법인 거 같습니다만……. 살롱에 홀로 아침부터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란 말씀이시지요?」

    밀러는 눈매를 단단히 굳히며 알렉스를 빤히 바라봤다. 그럼 누가 하겠냐며 타박하듯 바라보자, 알렉스는 그만 이기지 못하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혼자 살롱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것도 슬프지만, 아침부터 초저녁까지 혼자 무슨 낙으로……. 그때, 밀러가 위로하듯 말했다.

    「그대의 친우를 부르면 될 게 아닌가. 내 알게 모르게 주위에 친우가 많은 줄 아는데.」

    밀러와 달리, 알렉스는 사근사근한 성격으로 늘 주위가 시끌벅적한 편이었다.

    결혼한 친우 부부부터 아는 귀족을 데려와 차 대접을 하면, 아침에서 초저녁까지 시간을 보내는 게 어려울 것도 없었다. 알렉스는 휴가를 받은 사람처럼 환하게 웃었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각하, 감사합니다!」

    알렉스는 그 길로 살롱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가는 길에 발 빠른 사용인들의 힘을 빌려 영지 내에서 지내는 친우들을 불러다가 살롱에서 거하게 티 파티를 열었다. 이 얼마 만에 누리는 호사인지! 알렉스는 오랜만에 만난 친우들과 종일 웃으며 떠들어, 뺨이 아플 지경이었다.

    「그나저나, 각하께선 정말로 결혼식을 올리신단 말씀인가?」

    「그러엄. 우리 아가씨와 얼마나 사이가 좋으신데! 오늘도 이 자리도 우리 각하께서 꾸리신 거란 말씀이지.」

    알렉스는 너털웃음을 숨기며, 친우들을 향해 상체를 숙여 들릴 듯 말 듯 조용히 속삭였다.

    「내가 아까도 자네들에게 말했다만, 우리 각하께서 살롱에 딱 들어오면 눈도 마주치지 말고 그대로 살롱 밖으로 나가 주면 돼. 인사치레도 접어 두고, 알았지?」

    「그래도 되나. 그래도 인사는 드려야 하지 않겠어? 아무리 여기 주인장 몰래 하는 거라지만…….」

    「그럼, 여기 사장 체면이 뭐가 되겠어. 우리 아가씨는 그런 인위적인 걸 아주 싫어하셔. 딱 오늘만 부탁할게. 각하께서도 자네들에게 왜 인사를 하냐 마냐 하실 분도 아니시니, 부디 내 말대로만 해 줘. 응?」

    「아유, 알았어. 알렉스, 자네의 잔소리는 어째 갈수록 느는 거 같아.」

    그들의 투정에 알렉스는 나지막이 그런가, 하고 읊조렸다. 그것도 잠시, 금세 해야 할 일도 잊고 그들은 대화를 이어갔다. 가벼운 안부부터 시작해, 요즘 황궁 돌아가는 소식과 같은 무거운 이야기도 함께였다.

    「두더지처럼 후작저에서 나오지도 않는다던데. 하긴, 태자 전하께서 그토록 노하셨으니, 목숨 보전하고 싶다면 알아서 나오지 않아야겠지.」

    알렉스는 찻잔을 기울며, 그들의 대화를 가만히 듣기만 했다. 공은 공이고 사는 사이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후이니, 칩거가 끝이지. 하이레니아 후작가의 가신들은 모조리 팔다리가 잘려 나간 모양이던데? 그들의 수족들이 모조리 잘려 나갔으니 말일세.」

    「아, 난 또 정말 팔다리가 잘려 나간 줄 알았네.」

    「잔인한 구석이 있어? 뭐, 그 정도면 차라리 진짜 팔다리가 잘리는 게 나을지도 모르지. 사실상,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잖아?」

    한참 떠들던 그들은 하이레니아가 돌려받은 업보를 통쾌해했다.

    짤랑.

    뺨에 잘게 경련이 일만큼 웃고 떠들던 와중, 밀러와 린느가 살롱 문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그들은 웃음을 뚝 그치고 알렉스에게 지시받은 대로 그대로 살롱 밖으로 나섰던 것이었다. 나름 고도의 훈련을 받은 연기였다.

    밀러는 메뉴판을 천천히 내려 두며, 린느를 바라봤다.

    “난 홍차로 하지.”

    “커피 안 드시구요?”

    “응. 언제부턴가 커피에 손이 안 가서.”

    “정말요? 신기하네요. 원래 커피를 좋아하는 사람은 무덤까지도 커피를 들고 가는데.”

    원래라면 그랬었다. 린느가 직접 만들어 준 커피를 마셔 보기 전까지는, 가리지 않고 어떤 커피도 잘만 마셨는데. 린느가 만들어 준 커피를 마신 이후로는 어떤 커피를 마셔도 만족스럽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용인을 닦달하는 건 취미에 없었고, 그 귀찮은 일을 린느에게 시키고 싶지 않아 홀로 커피를 끊은 셈이었다. 린느는 이를 알 리가 없어 고개만 갸웃거렸다.

    “그래서 근래에 원두도 들이지 않으신 거예요?”

    “응. 손님에겐 홍차면 충분하니까.”

    “아아…… 그런데 저는 아직까진 커피가 더 좋아요.”

    린느는 가볍게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홍차와 커피를 한 잔씩 시키고, 직원이 자리를 떠나자 밀러는 나지막이 웅얼거렸다.

    “원두….”

    “네?”

    “린느, 이쪽으로 와. 여기에서 노을이 더 잘 보여.”

    그렇다면 가야죠! 린느는 맑게 웃으며 자리를 옮겼다. 숨마저 탁 트이는 시야에 지는 해가 대롱대롱 걸려 있었다.

    “대공저에서도 노을이 잘 보이기는 한데……. 뭔가 대공저에서 보는 노을은 정말 누구 숨통 하나 끊어질 것 같단 말이죠.”

    “살벌하군.”

    “약간 그렇지 않아요? 해가 뜨는 어스름은 그나마 괜찮은데, 해가 질 때는 황혼의 느낌이고. 대공저는 또 특히 음산한 분위기라서……. 아, 아무튼 그렇다구요.”

    “해가 뜨는 어스름은 그나마 괜찮다니, 다행이야.”

    “네, 그렇더라구요. 제가 아침잠이 무척 많은 편인데, 해가 뜨는 어스름은 어제도 봤어요. 어떻게 봤냐구요? 글쎄, 저도 알고 싶지 않았는데…….”

    린느는 그 맑은 눈동자로 밀러를 힐끔거렸다. 그러자, 밀러는 잠시 허공을 바라보더니, 뒤늦게 입꼬리를 비틀어 웃었다. 린느도 그를 따라 웃더니, 손과 입을 그의 귀에 가져다 댔다.

    “대공님이 워낙 절륜하신 덕분이죠.”

    밀러는 제 품에 폭 안긴 그녀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한껏 웃음 짓던 그가,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살롱에 가득 찬 달콤한 디저트 향기보다도 더 달콤한 그들이었다. 그때, 땅에 걸쳐 있던 해가 점점 사라지자, 쨍한 주황빛 노을이 얇아졌다. 린느는 노을을 빤히 바라보며 밀러의 가슴팍에 머리를 기대었다.

    그녀에게 노을은 매번 공허함만 안겨 줬다. 어릴 적에는 오지도 않을 가족을 기다리며 노을만 며칠을 봐야 했고 성인이 된 이후로도 린느에게 노을은 여전히 쓸쓸한 존재였다.

    노을이 질 무렵 퇴근해 아무도 없는 집으로 향했다. 노을이 지고 밤이 찾아오면, 종잇장보다 얇은 관계의 친구들과 큰 노랫소리에 파묻혀 밤이 지나길 바랐으니. 노을은 늘 린느에게 외로움을 각인하는 존재였다.

    “저 사실 노을 별로 안 좋아했어요.”

    “나도 별로였어.”

    “그런데 오늘부턴 좋아요.”

    “나도 좋아.”

    린느가 턱을 들어 새초롬한 얼굴로 밀러를 바라보자, 밀러는 또다시 그녀 이마에 입을 맞췄다.

    “노을 많이 봐 둬. 앞으로 뭐 얼마나 평화롭게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네? 와, 보기와 다르게 무척 엉큼하시네요.”

    “음, 그런가. 하지만 그게 사실인걸.”

    나지막한 목소리가 무덤덤하게 답하자, 린느는 온몸에 오소소 전율이 일었다. 어제 그가 남긴 흔적들이 온몸을 훑어내린 탓이다. 괜스레 목이 타서 찻잔을 기울이자, 밀러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함께 찻잔을 기울였다. 날렵한 그의 금안은 린느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오묘한 기류가 흘렀다. 때마침 노을빛도 사라져 창밖으로 노을의 흔적만 남아 있었다. 그때, 살롱 전체에 옅은 불빛이 켜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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