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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114화 (114/122)
  • @114화

    “내가 뭐랬어.”

    대공일지도 모른다며 먼저 말을 꺼냈던 직원이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각하, 소백작님! 제가 자리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햇살은 들어오지 않지만, 바깥 풍경이 훤히 보이는 명당 자리에 안내받았다. 린느는 자리에 앉기 전에 레스토랑을 크게 훑어봤다. 레스토랑 규모는 대공저 정찬실 만큼이나 커다랗고 고급스러웠다. 그만큼이나 고위 귀족들이 드나들 법한 고급 레스토랑이었다. 그것도 그냥 고급도 아니고, 최고급.

    ‘누구 남자인지 돈도 많아요.’

    린느는 밀러가 귀여워 웃음을 참기가 어려웠다. 도대체 이런 깜찍한 이벤트는 어떻게 생각한 건지! 린느는 헤헤 웃으며 자리에 앉았다. 린느가 자리에 앉자, 밀러도 뒤늦게 자리에 앉았다.

    “여기서 식사하고 근처에 있는 공원에 가 보는 게 어때?”

    “좋아요!”

    “공원에 무명 악단이 자주 공연을 한다더군. 그대 마음에 드는 악단이 있다면, 대공저 전속 악단으로 두면 되지 않겠어?”

    “그래도 좋구요. 뭐든요.”

    “고마워.”

    “네? 제가 감사하죠.”

    “좋아해 줘서 내가 더 고맙지.”

    밀러는 테이블 위로 손을 뻗어 린느의 손을 가볍게 그러쥐었다. 그리곤 그녀의 손등에 입술을 가볍게 맞추더니, 예쁘게도 웃었다. 그리고, 예약한 음식들이 차례대로 커다란 테이블을 가지런히 채웠다.

    너무 과하지도 않았으며, 적지도 않았으니. 린느는 예술에 가까운 음식을 바라보며 해맑게 웃었다.

    “먹기 정말 아깝게 생겼지 않아요?”

    “셰프와 한번 같이 와 봐야겠어. 눈썰미가 좋으니, 이 정도는 금세 따라 할 거야.”

    “따라 하는 정도가 아니라 더 맛있게 완성하실걸요?”

    “그렇지.”

    밀러는 정갈하게 자른 스테이크를 린느의 앞으로 옮겨 줬다. 그는 커다란 접시를 한 손으로도 가볍게 들었다.

    “맛있는 음식은 항상 옳아요.”

    “그대처럼.”

    “으이그, 진짜. 여기에 우리 둘만 있어서 다행이네요.”

    “왜지?”

    “대공님 때문에요.”

    밀러는 왜 나 때문이냐 되묻고 싶었으나 잔소리를 들을까 그만 입을 다물었다. 린느는 창문 아래에서 도란도란한 가족을 보며 절로 웃었다. 다정한 부모님과 아장아장 걷는 아기까지, 완벽한 가정이었다.

    “귀여워라.”

    밀러는 그녀의 시선을 따라 창문 밖을 바라봤다. 그의 시선엔 키가 큰 귀족들만 보였다. 뭐가 귀엽다는 건지. 밀러는 수색에 나선 맹수처럼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누군진 몰라도 린느의 입에서 귀엽단 소리가 나온 이상 신경이 곤두설 수밖에.

    * * *

    호화스러운 식사를 마치고, 두 사람은 레스토랑 직원과 사장에게 넘치는 배웅을 받으며, 레스토랑에서 빠져나왔다. 걷기에 좋은 날씨에 린느가 밀러의 손을 꼭 잡았다.

    그러자, 그는 깜짝 놀라며 자신의 손을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것도 좋아.”

    “팔짱도 좋구요?”

    “응.”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린느의 손가락 사이사이에 조심스레 끼워졌다. 고작 깍지를 끼는 건데도 이렇게 야할 일인가? 린느는 입술을 지그시 눌러 일자로 만들고서 눈동자를 도르르 굴렸다. 어제의 뜨거웠던 밤이 새록새록 떠오른 탓이다.

    “린느.”

    “느에?”

    “아니다.”

    밀러는 장난기 어린 얼굴로 짓궂게 웃었다. 그리곤, 그는 그녀의 왼손 약지를 자꾸만 매만졌다. 공원에 도착할 때까지도 그는 그녀의 손가락을 도르르 만지기 바빴다.

    “마침 악단이 나와 있어.”

    “정말요? 전 안 보여요!”

    린느가 자리에서 까치발을 들고 주변을 살폈다. 그래도 보이지 않자, 밀러와 꼭 잡은 손을 톡톡 당겼다.

    “대공님은 보여요? 악단은 몇 명이에요?”

    “일곱은 되는군.”

    그때, 밀러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아당기더니, 앞에 놓인 커다란 돌 위로 그녀를 올려 줬다. 그제야 린느의 시선이 그와 비슷해졌고, 린느는 만족스레 웃었다.

    “감사해요!”

    “감사는 무슨.”

    밀러는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둘러 단단히 잡았다. 이 말괄량이가 악단 노래에 춤을 추다가 떨어질까 걱정이 된 탓이다. 다행히도, 악단의 선곡은 바람결처럼 정적이었다. 그들의 음악 소리가 광장 전체에 퍼져나가자, 웅성거리던 목소리가 잠들었다.

    “너무 예쁘다.”

    쾌청한 하늘에 어울리는 음악 소리. 린느는 밀러와 뺨을 기대고서 가볍게 눈을 감았다. 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는 노래였다. 비록, 과격한 춤과 어울리지 않는 노래였으나 또 하늘하늘한 춤과는 어울리는 곡이었다.

    구경나온 커플들이 하나둘씩 파트너의 허리에 손을 얹으며 가볍게 스텝을 뗐다. 늦봄과 어울리는 노래에 드레스 자락이 기분 좋게 움직였다.

    “우리도 출래요?”

    “기다렸어.”

    밀러는 그녀의 허리 잡아 가볍게 바닥에 내려줬다.

    “새삼 느꼈어요. 대공님 키가 엄청 크단 걸요.”

    “괜찮아. 내가 그대의 다리가 될게.”

    “그… 래요.”

    두 사람은 천천히 발을 맞춰 음악에 몸을 맡겼다. 반걸음씩 천천히 느릿느릿하게 움직이며, 린느는 음악을 음미하고 밀러는 그녀의 눈동자를 음미했다.

    “이젠 나보다도 춤을 잘 춰.”

    “춤은 원래 대공님보다 잘 췄죠.”

    “맞아. 그랬어.”

    “제가 그렇다면 다 맞다고 해 주시는 거 알아요? 이러다가 해가 남쪽에서 뜬다 해도 믿으시겠어요.”

    “그럼. 믿고 말지.”

    밀러는 능청맞게 웃으며 그녀를 품에 꼭 끌어안았다. 린느의 뺨이 그의 널찍한 가슴팍에 닿았다.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에 린느는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의 심장 소리만으로 근심이 싹 달아나는 기분이었다.

    “전, 다른 춤도 다 좋은데요. 이 춤이 제일 좋아요.”

    “그럼 저녁 식사 이후에 매일 이렇게 춤추는 건 어때. 악단에게 이 노래를 맡기면 금방 배울 테고.”

    “좋아요. 날씨가 좋은 날에는 로비 문도 열어 두고 바람도 들어오게 해요, 우리.”

    “화원에서 불어오는 꽃내음이 상당히 좋긴 하지. 그래, 그렇게 살자.”

    그렇게 살자는 그의 대답에 린느는 평생소원을 이룬 사람처럼 안도감이 차올랐다. 평생 풀지 못했던 숙제를 푼 기분이었다. 의지할 곳도 없이, 당장의 화려한 삶에 기대어 하루하루 즐기며 살던 아슬아슬했던 삶. 그 상태로 낯선 땅에 불려오는 바람에 이겨 냈노라 착각했던 불안증이 도졌다. 그런데, 그것도 이젠 끝이다.

    평생을 걸쳐 서로를 지지해 줄 거대한 지지대. 그게 생긴 한 린느도 밀러도 더는 두려울 게 없었다. 그것도 일방적으로 어느 한쪽만 지지하는 지지대가 아닌, 두 개의 사다리가 서로를 지지하며 건강한 모양을 보여 주고 있지 않은가.

    두 사람은 행복에 겨웠다. 하여 이 시간이 멈추길 바라기보단, 앞으로 펼쳐질 미래가 기다려졌다. 동시에 악단의 노랫소리도 잔잔하게 막바지에 이르렀다.

    * * *

    “늦었어요. 지금 가면 절대 자리가 없을 거라구요.”

    “그대는 내가 대공이란 사실을 가끔 잊는 거 같아.”

    “너무 친해서 가끔 잊기도 하지만, 그래도 그 살롱은 예외가 없어요. 그 어떤 고위 귀족이 와도 절대 예약 따위 받아 주지 않는다구요.”

    “사장의 철칙 같은 거란 뜻인가?”

    “맞아요! 저도 처음에 이 살롱에 왔을 때 엄청 오래 기다렸단 말이에요.”

    밀러는 그녀의 손에 질질 끌려 걸음을 재촉했다. 하지만, 살롱에 방문한 적이 있단 말에, 밀러의 짙은 눈썹이 움찔했다. 살롱이란, 미혼의 귀족들이 서로의 짝을 찾기 위해 오는 곳이 아니던가?

    혹은 이미 파트너가 있는 경우 드나드는 곳이건만. 밀러는 나직이 물었다.

    “언제 와 봤는데?”

    조심스레 묻자, 린느가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말했다.

    “어…… 대공님이 제게 스토커라고 뭐라 할 때였어요.”

    “아.”

    밀러는 더는 말을 잊지 못하고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린느가 바라는 대로 걸음을 재촉했다. 살롱이 코앞쯤 다가오자, 그는 어두운 안색으로 말했다.

    “미안.”

    “엇, 저기! 저기예요!”

    린느는 그의 사과를 듣지 못한 채, 그의 손을 끌고 뛰기 시작했다.

    대공의 걸음에는 제국의 체면이 달려 무겁고 진중해야 하기에, 쉬이 뛰는 일은 없어야 한다던 그의 조부님 가르침 따윈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밀러는 체면도 던져 두고 린느와 속도를 맞춰 줬다.

    * * *

    살롱에 도착하자마자 린느는 눈동자를 도르르 굴리며, 명당을 찾았다. 명당자리엔 그녀의 예상대로 많은 귀족이 앉아 있었는데…….

    “어? 아, 알렉스? 아니, 잠깐. 알렉스 님이 여기 왜…….”

    알렉스는 찻잔을 후다닥 내려놓더니, 자세를 고쳐 앉았다. 방금까지도 귀족들과 편하게 대화하던 그의 안색이 바짝 굳었다.

    “이.런! 여기 이곳에서 이렇게 마주칠 줄은 또 전.혀 예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알렉스의 눈동자가 린느와 밀러를 넘나들며 불안하게 떨렸다. 초짜 연극배우를 데려다 놓은 듯한 어색한 발성과 표정까지. 이보다 더 완벽히 망한 거짓말도 없겠지. 린느는 말없이 한숨을 내쉬며, 느슨하게 팔짱을 꼈다.

    그래, 어디까지 거짓말하는지 보자. 그녀는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알렉스를 빤히 바라봤다. 그때, 그녀 뒤에 서 있던 밀러가 나섰다.

    “합석해도 되겠나?”

    “당연히 됩니다!”

    알렉스는 기다렸단 듯이 자리를 옮겨 주며 밀러와 린느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그러자, 알렉스와 함께 대화를 나누던 귀족들도 기다렸단 듯이 자리를 비켰는데. 그들은 서로 연기가 죽여 줬다며 소리 죽여 호들갑을 떨었다.

    “아이쿠, 대공 각하, 저는 이만 대공저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시간이 이렇게 된 줄은 꿈에도 몰랐지 뭡니까?”

    “그래, 돌아가 봐.”

    두 사람 사이에 낀 린느가 어이가 없어 그만 코웃음을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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