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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113화 (113/122)
  • @113화

    보좌관은 자리에서 다급하게 일어나, 머리를 조아렸다. 백작저에서 지낼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에서 흘렀다. 라밀라가 이토록 위엄 있는 사람이었는지, 보좌관은 당혹감에 눈동자를 꿈뻑거렸다.

    그때, 라밀라와 밀러 사이에 시선이 맞았다.

    “제가 들은 게 맞나요? 제가 백작가의 차기 백작이 되어야 한다는 게?”

    “맞아. 한 가지 더 얹자면, 백작가의 사정이 아주 어렵다던데. 뭐, 빚이라도 없는 게 어디야.”

    밀러는 비아냥대려는 건 아니었으나, 뱉는 말마다 무척이나 얄미웠다. 보좌관은 그만 끙 앓으며 입을 쉬이 떼지 못했다. 밀러의 말대로 빚은 없지만, 황궁에게 완벽하게 찍힌 가문이 아닌가.

    하지만, 라밀라가 백작이 된다면 황태자에게 받던 눈총도 쉬이 지울 수 있다.

    “라, 라밀라 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저 살자고 라밀라 님의 고충을 방관했습니다……. 하나, 지금은 라밀라 님밖엔 답이 없습니다! 주인님께서 정신을 되찾으셔도 백작가의 명성은 쉬이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태자 전하께 찍혀서겠죠. 그리고, 전 황후 폐하와 안면이 있는 사이이니, 제 명예를 이용해 백작가의 실추된 명예를 다시 바로 잡으려는 생각이 아니십니까?”

    보좌관은 입을 떨며 마른침을 삼켰다. 라밀라와 대화를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었기에, 그냥 그런 사람이라 생각했건만. 자신이 오래도록 모신 락센과 비교하지 못할 만큼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 사실을 이제야 깨달은 거에 화가 치밀면서도, 라밀라가 차기 백작만 되어 준다면 백작가의 미래는 훤하겠단 안도가 차올랐다.

    “부디, 한 번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자비는 온종일 베풀었어요. 제가 당한 일들을 모조리 삼켜 줬으니, 이미 충분히 자비를 베풀었다 생각하는데요.”

    “맞는 말씀이십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지요. 하지만…….”

    라밀라는 차게 식은 얼굴로 그를 빤히 보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솔직히 다른 건 다 좋지만, 그쪽 말을 믿지 못하겠어요. 백작저로 돌아갔는데, 락센이 멀쩡히 있으면요?”

    보좌관은 기겁하며 양손을 마구 저었다.

    “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라밀라 님께서 아끼시던 그 하녀가 주인님을 보고 있는걸요!”

    “아, 아직 백작저에 남아 있는 겁니까?”

    “네! 전 진작에 알고 있었습니다. 그 사용인이 라밀라 님의 곁을 지키고 있단 것을요. 하지만, 절대 해고하거나 다른 불이익을 준 적이 없습니다! 그날, 그 초대장도 어찌 멀쩡히 발견됐겠습니까? 제가 우편함을 매일 확인하는데…….”

    라밀라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더니, 나지막한 목소리를 말했다.

    “그럼, 락센 경을 깔끔하게 처리해 주세요. 이왕이면 명예롭게요. 그래야 차기 백작이 될 제 면도 서죠.”

    듣고만 있던 밀러도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되면 대공저 지하 감옥을 이용해. 이미 한 명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긴 하다만, 남는 자리는 많지.”

    그의 섬뜩한 말에 보좌관은 어깨를 떨며 아래턱도 함께 떨었다.

    “그럼 처리한 뒤에 다시 대공저로 와 주세요. 처리했다는 증거도 함께요.”

    “그, 그렇게 하겠습니다. 그리하지요!! 라밀라 님, 감사합니다! 절 믿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평생 갚겠습니다!”

    보좌관은 바닥에 넙죽 엎드려 라밀라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또 맹세했다. 이로써 라밀라가 락센 가를 택한 것이었다.

    “그럼, 조만간 다시 대공저로 찾아오겠습니다. 각하, 이리 허락해 주시어 감사합니다. 두 분 모두께 오늘 입은 은혜는 평생 갚으며 살겠습니다!”

    보좌관은 울먹이며 땅에 머리를 조아리길 반복한 후에야 응접실 밖으로 쫓겨났다. 그가 시끄럽다는 밀러의 타박 때문이었다. 보좌관의 발소리가 멀어지자, 라밀라가 나지막이 말했다.

    “감사해요. 덕분에 그 빌어먹을 락센 가의 새 주인이 되게 생겼어요.”

    “그러게. 린느가 알면 좋아하겠어. 그대가 직접 전할래, 내가 전할까.”

    “조만간 제가 직접 소백작님께 말씀 전하도록 하죠. 작별 인사도 할 겸…….”

    대공저 사용인들과 또다시 정든 라밀라였다. 못내 걸음이 아쉬웠으나, 여동생의 미래와 자신을 위해서는 락센 가의 새로운 주인이 되는 게 보다 나은 선택임이 분명했다.

    게다가, 락센에게 당했던 모든 걸 한 번에 되갚아 줄 수 있는 명료한 복수가 아닌가. 라밀라는 가벼운 걸음으로 응접실을 나섰다. 그녀의 발소리가 옅어지자, 밀러는 뛰듯이 걸어 침실로 직행했다.

    “기다리다가 목이라도 빠졌을까 걱정이군.”

    “고작 30분 걸렸는걸요, 각하.”

    “말대답이 나날이 늘어.”

    “죄, 죄송합니다, 각하.”

    “죄송하면 여행 계획을 짜 와, 린느 취향으로.”

    “네……?”

    린느 취향을 자신이 어찌 알겠느냐 되묻고 싶었으나, 여느 가신들처럼 미소를 곁들며 밀러의 비위를 맞췄다.

    “아가씨께서 안목이 워낙 뛰어나신지라, 감히 저 따위가 여행 계획을 짜도 될지 고민스럽습니다, 각하.”

    “말대답에 이어 말대꾸 실력도 늘었어.”

    밀러는 그 말만 남기고서 침실로 들어섰다. 왔다며 요란스레 인사하려 했으나, 린느는 침대 위에서 곤히 잠들어 있었다. 어제저녁이 무척이나 고됐나 보다. 밀러는 발소리도 죽여 그녀에게 다가갔다. 햇살이 그녀의 얼굴을 더 희게 비추고 있어, 그는 캐노피 커튼을 천천히 풀어 햇빛을 가려 줬다.

    그녀의 머리칼을 매만지고 저 흰 뺨에 입을 맞추고 싶어 손끝이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녀의 단잠을 깨울까 봐 꼭 참았다. 의자에 걸터앉아 캐노피 커튼 너머로 곤히 잠든 린느를 바라봤다.

    그때, 그녀가 농담하듯 던진 말이 또다시 그의 귓가에 맴돌았다.

    「아이라도 생기면 응석받이로 키울 게 눈에 훤하다구요.」

    정말 그럴까? 나름 공과 사가 철저하다고 자부하는 그였다. 한데, 그녀와 똑 닮은 아이라면 그래… 응석받이로 키울지도 모르겠군. 밀러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작고 오뚝한 콧대와 앙증맞은 입술을 바라봤다.

    아이. 아이라……. 욕심 아닐까?

    밀러는 금세 미소를 지우고, 그녀를 내려다봤다. 제 몸집에 비하면 터무니없이 작은 몸으로 아이를 낳다가 다치거나 아프면 어쩌나 걱정이 앞섰다. 게다가, 들리는 소문으론 자신의 부모님도 자신을 낳기 전까지는 금실이 좋았다 했으니……. 밀러는 미간을 찌푸리며, 울컥 샘 솟는 두려움을 삼켰다.

    눈에 보이지도 않는 아이보다야, 린느가 훨씬 소중했다. 그녀와 함께하는 순간순간이 선물이고 축복인데, 고작 아이 때문에 이 행복을 침범당하고 싶지 않았다. 나아가, 아직 그녀와 해 보지 못한 게 산더미인데, 아이라니. 가당치도 않지.

    물론, 린느와 온갖 곳을 여행 다니고 맛있는 음식을 모조리 맛봤다 한들. 그녀와 함께하고 싶은 순간이 줄어드는 건 아니었다. 밀러는 그녀가 원하지 않는 한, 아이는 욕심내지 않으리라 다짐하며 그녀의 단잠을 지켜 줬다.

    그때, 얇은 눈두덩이가 말려, 청록색 눈동자가 밀러를 향했다.

    “왔으면 깨우지 그랬어요.”

    “깨우긴. 보기만 해도 좋은데.”

    “저 잠버릇 별로란 말이에요.”

    “괜찮아. 그것도 좋아.”

    “어우, 진짜.”

    린느는 닭살이 돋는다며 팔을 문질렀다.

    “뭐 할까. 뭐 하고 싶어?”

    “음, 살롱에 가 보고 싶어요. 거기 명당은 자리 맡기가 힘들긴 해도, 노을 보기에 딱 좋거든요.”

    “그럼 노을 질 때쯤 가기로 하고, 식사부터 할까?”

    “어…… 거기 예약도 안 되고 명당이라 자리 찜콩도 안 되는걸요?”

    “과연 그럴까.”

    그는 얄미울 만큼 확신하며 웃었다.

    * * *

    대공저 마차가 영지 시내를 가로지르자, 지나가던 귀족들도 걸음을 멈추고 넋을 뺐다. 대공저 마차는 한눈에 봐도 티가 날 만큼 화려하기에, 어린 귀족들도 대공저 마차는 한눈에 알아봤다.

    “대, 대공 각하?”

    “어머!”

    마차가 멈추고, 내실 마차 문 사이로 밀러와 린느가 내리자 영지민들이 가던 걸음을 멈추고 환하게 웃었다. 대공저에서 연회를 연 덕분에, 영지 시내에 자리한 상점에 활기가 띠었다. 고작 연회라고 해 봐야 하루뿐이었으나, 여파는 상당했다.

    길목을 오가는 귀족들이 영지 시내에 있는 상점에서 영지 특산물을 구매하고, 필수용품을 구매한 덕이었다. 그 덕분에 영지민과 귀족 모두 밀러와 린느를 진심으로 반겼다.

    ‘나 여태 관종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구름처럼 몰려든 그들의 시선에 린느는 쑥스러워하며 간신히 인사를 받아 줬다. 그때, 밀러가 레스토랑 문을 직접 열어 주며, 린느를 바라봤다.

    “상냥하기도 해라.”

    “대공님도요.”

    두 사람은 시선을 맞닿은 채 싱긋 웃었다.

    “어서옵……! 대, 대공 각하! 소백작님!! 예약하신 분이 대공 각하셨군요!”

    직원 한 명이 요란스럽게 인사를 하자, 뒤에서 대기하던 이들이 기겁하며 입술을 떨었다. 돈 많고 유난스럽게 연애하는 고위 귀족이 전체 예약을 했다 여겼건만. 그게 밀러일 줄이야! 게다가, 데이트에 꼭 꽃다발은 빠지질 않는 건지!

    도대체 예약자가 누구인지 궁금하다며, 누가 예약했을지 내기하던 직원들은 당혹감을 벗지 못했다. 설마, 아주 설마 말도 안 되지만, 이 정도로 돈이 많은 귀족이라면 대공 각하가 아니겠냐며 우스갯소리를 한 탓이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대공 각하일 리가 없지.」

    「왜? 대공 각하께서 소백작님을 얼마나 아끼시는데. 곧 결혼하신다던데?」

    「그러시기야 하겠지만, 체면이 있지. 상상해 봐, 그 차가운 얼굴로 이런 깜찍한 이벤트를 꾸밀 분이시냐고.」

    어쩌다 한 번 마주친 밀러의 얼굴을 상상하며, 그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그리고는 일이나 하자며 그들은 금세 테이블을 닦고 또 닦았다.

    그런데, 밀러가 떡하니 나타나자 그들은 놀라 자리에서 굳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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