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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금 피폐물 악녀, 남주에게 찍혔다-44화 (112/122)
  • @44화

    오랜만에 정찬실에 세 사람 모두 자리했으나,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봐, 화난 거 맞다니까?’

    린느는 밀러의 눈치를 살피며 마른침을 삼켰다. 오늘따라 왼편에 앉은 밀러의 시선이 따끔거릴 만큼 노골적인 탓에 눈동자를 굴려 눈치 살피는 것도 일이었다.

    ‘이런 날에는 입 다물고 조용히 지내는 게 나아.’

    린느는 식기 부딪치는 소리마저 조심하며 음식을 맛봤다.

    “어디 불편한가?”

    “아, 아니요?”

    “평소엔 잘도 조잘대더니, 오늘은 퍽 조용하여 물었다.”

    밀러는 눈썹을 굽이치며 린느의 포크와 린느의 눈동자를 번갈아 봤다. 평소라면 식전주를 달라거나, 집무실에서 일하는 게 마음에 안 든다는 투정이라도 할 텐데. 조용해도 너무 조용한 탓에 걱정마저 그득했다.

    “조잘대긴요…….”

    린느는 어색한 웃음과 함께 음식을 깨작댔다.

    “음식이 입에 안 맞나?”

    “아니요? 전 평소와 똑같아요. 하하…!”

    더는 그의 신경을 건들지 않기 위해 고깃덩이를 잘게 잘라 오물거렸다. 하지만 밀러의 시선은 내내 린느에게 머물렀으니. 미리안은 그게 못마땅한 듯 밀러에게 곁눈질했다.

    ‘식사라도 편히 하시게 두지.’

    미리안은 입을 달싹이며 안절부절못하지 못했다. 차마 입 밖으로 내놓을 용기가 부족한 탓이다.

    덜컥.

    그때, 알렉스가 정찬실 문을 조심스레 열고 들어섰다. 원래라면 정찬 시간엔 업무도 뒤로 미루지만, 알렉스의 안색을 보아하니 급한 일이 틀림없었다. 밀러는 냅킨으로 입가를 톡톡 두들겼다.

    “지금 가지.”

    밀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알렉스와 함께 정찬실 밖으로 향했다. 정찬실 문 앞에서 밀러는 반쯤 돌아 린느를 바라봤다.

    “집무실로 9시 30분까지.”

    오랜만에 다 같이 식사를 했으니, 린느의 성정이라면 함께 코코아라도 마시자 권할 터. 그러니 9시 30분까지 집무실로 오라 명령한 것이다.

    “……넵.”

    린느의 대답을 듣고 나서야 밀러는 문밖으로 나섰고, 미리안은 두 사람 사이에서 한숨을 삼켰다. 아침 부엌일을 시킨 것도 모자라, 집무실까지 오라 하다니.

    ‘불쌍한 린느 님….’

    미리안은 침울한 눈으로 린느를 바라봤으며, 린느는 싱긋 웃으며 미리안에게 말했다.

    “식사 마치고 코코아라도 마실래요? 그 정도 시간은 남을 거 같아요.”

    “린느 님 아침부터 고생하셨잖아요. 잠깐이라도 쉬셔야죠.”

    “아니에요! 저 완전 힘 넘치는데? 그리고 미리안 님과 코코아 마시는 게 제 휴식법이라구요.”

    린느는 배시시 웃으며 포크에 콕 찍힌 고기를 입에 넣었다. 당분간 미리안과 틈틈이 시간을 보내며 신뢰를 회복해야 한다. 그래야 말없이 도망치다가 밀러에게 붙잡히는 불상사를 막을 수 있을 테니까.

    두 사람의 웃음소리가 간간이 정찬실을 울렸고, 그녀들의 웃음소리는 써니룸으로 옮겨 갔다. 미리안은 써니룸을 둘러보며 눈망울을 반짝반짝하게 빛냈다.

    “대공저에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헐. 정말요? 세상에, 앞으로 우리 여기 자주 와요.”

    대공저에서 린느가 가장 자주 들르는 곳을 꼽으라면 써니룸이었다. 물론, 홀로 출입한 적은 없고 늘 밀러와 함께였다. 그런데, 저보다 3개월 먼저 대공저에서 지낸 미리안이 써니룸을 와 본 적이 없다니 앞으로 자주 데려와야겠다 생각했다.

    린느는 코코아 잔을 기우는 미리안을 지그시 바라보며 간만에 평화를 만끽했다.

    ‘도망가는 것만 빼면 너무 착하고 상냥한데…….’

    만약, 린느 그녀가 미리안이라면 린느를 이렇게 쉽게 용서할 수 있었을까? 미리안의 도망이 아무리 서툴다 해도, 마음만큼은 진심이었을 터. 그런 도망을 막아선 린느를 향해 비난하지 않고, 단번에 용서했다. 비록, 미리안의 아비가 그녀의 목숨을 노리는 탓에 대공저에서 보호하고 있다지만 그건 철저하게 밀러의 생각이었다.

    ‘그냥 미리안에게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그럼 미리안도 밀러에 대한 오해도 풀고, 더는 도망가려 하지도 않을 테고.’

    서로 윈윈하는 방법은 미리안에게 사실대로 털어놓는 거라 단정 지으려던 찰나였다. 미리안이 자신의 아비를 떠올리며 비뚜름하게 울며 웃던 그녀의 표정이 떠올랐다.

    원작을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봤으나, 미리안이 자신의 아비를 죽이고 싶을 만큼 증오하는지는 언급한 바가 없었다. 자신의 아비만큼이나 밀러를 증오한다는 표현은 있었지만 말이다.

    ‘그래서 밀러가 미리안에게 이 사실을 비밀로 하려는 걸까? 미리안이 아비를 더 미워하게 되어 더 상처받고 비뚤어질까 봐?’

    똑똑한 남자인 건 알았지만, 이렇게까지 똑똑할 줄이야. 린느는 한숨과 함께 코코아 잔을 기울였다.

    “린느 님, 죄송해요….”

    “네? 왜, 왜요?”

    “그냥, 모두 다요.”

    미리안은 죄인이 성당에서 자신이 저지른 일들을 고백하듯이 초연한 얼굴로 사과했다. 프레이 역시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지만, 린느에 비할 바가 못 됐으니. 미리안은 자신 때문에 곤욕을 치르는 린느에게 무릎이라도 꿇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미리안 님, 저는 미리안 님에게 사과받을 행동을 한 적이 없어요. 그러니 그런 말씀 마세요.”

    도리어 자신이 사과를 해야 하건만. 미리안 이 답답이! 이렇게 착해서 어쩜 좋아! 린느는 미리안의 사과를 받아 주는 대신에 잘 구워진 쿠키를 다정하게도 건넸다.

    “다음에는 우리 뒷마당에 가 볼래요? 써니룸도 좋지만, 거긴 햇살이 정말 왕창 쏟아지는 곳이거든요!”

    “……네. 저는 린느 님이 하시는 건 뭐든 좋아요…!”

    뒷마당이 그렇게 넓다면, 도망갈 수 있는 공간이 있을지도 모른다. 미리안은 결연에 찬 얼굴로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새끼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다. 뒷마당에 꼭 함께 산책 가자고.

    * * *

    밀러는 집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테이블 위로 가지런히 놓인 초대장에 시선을 뺏겼다.

    “황실에서 연회 초대장이 왔나 했더니. 그건 아닌가 보군.”

    “차라리 황실에서 도착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알렉스는 걸음을 재촉하여, 수북하게 쌓인 초대장 중에서 가장 근사한 편지지에 휘황찬란한 인장까지 달린 초대장을 들었다.

    [루텡라스 클라메린 락센]

    보낸 이의 이름 역시 편지의 외관만큼이나 휘황찬란했으니. 밀러의 표정이 단번에 식었다.

    “각하, 물을 가져다드릴까요?”

    당장 몇 달 전만 해도 쫓기듯이 도망 다니던 이름이 아니던가. 물론 남들 눈에는 밀러가 락센 경을 싫어하여 피한다 생각하지만. 천만에, 그 반대였다.

    “그간 각하께서 너무 봐주셨어요.”

    그럴 수밖에. 락센 경의 현 부인이자, 6번째 부인인 라밀라 락센 부인은 선대 대공의 정부였으니까.

    「꼬락서니하고는.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시기라도 했느냐? 유난 떨지 말고 새어머니가 될 라밀라에게 격식을 차려 인사 올려.」

    추악한 말에는 악취가 흐르기 마련. 그때의 그 악취가 아직도 코끝에 스민 듯 밀러는 미간을 좁혔다. 그는 테이블 위로 두 손을 어깨보다 넓게 짚고서 편지지를 빤히 바라봤다.

    밀러의 어머니이자, 선대 대공비가 생을 달리하자마자 선대 대공은 라밀라를 대공비 자리에 앉히려 혈안이 되어 있었다. 고작 16살밖에 되지 않은 대공자였지만, 선대 대공의 추악한 계획쯤이야 진작에 눈치채고 있었으니.

    밀러는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죽일 듯이 선대 대공을 노려보며 답했다.

    「싫습니다.」

    선대 대공비가 죽음으로써 선대 대공의 손아귀에서 탈출했고. 그제야 밀러는 아버지에게 태초의 반항을 저질렀다. 선대 대공의 신경을 건들면, 그는 보란 듯이 밀러 앞에서 선대 대공비를 비난하고 손을 올리니, 밀러는 그간 참을 수밖에 없었다.

    「뭐? 싫어?」

    아무리 안하무인인 선대 대공일지라도 어린 아들이 저지른 태초의 반항은 꽤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따라온 밀러의 말이 더욱 충격이었으니.

    「일개 정부 따위에게 머리를 숙일 만큼 배알 빠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부디 체통을 지키십시오.」

    후련했다. 아니, 살 거 같았다. 16년간 틀어막혀 있던 숨통이 탁 풀어진 기분마저 들었다. 부자간에 침묵이 흘렀고, 역시나.

    짝!

    선대 대공의 더러운 손이 이제 막 소년이 된 대공자의 목이 부러지도록 세게 내려쳤다. 하지만, 밀러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선대 대공을 힐난하듯 바라봤다. 어린 밀러는 단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았건만, 선대 대공은 그의 눈빛만으로도 흠칫 떨었다.

    ‘망할 눈깔. 어쩌면 저렇게 지 어미와 똑 닮았는지!’

    선대 대공비와 똑 닮은 금빛 눈동자. 매사에 자신감이 넘치는 그 망할 놈에 금빛 눈동자!

    이웃 제국의 9황녀 주제에 황태녀라도 되는 듯이 당당한 성격에 위엄 있는 선대 대공비는 호탕한 여인이었다. 제국을 호령하라면 기꺼이 호령할 여인이었으나, 선대 대공은 그런 그녀의 기개가 싫었다.

    검술이라면 검술, 사교계면 사교계, 정계라면 정계. 부인들 사이에서도 귀족들 사이에서도 심지어, 황궁에서도 당당하던 그녀가 싫었다. 그런 그녀는 태양처럼 빛나는 금안을 가졌으며, 대공자는 그런 그녀의 기개와 함께 금안을 물려받았다.

    만약 밀러가 대공자가 아닌, 첩의 아들이었다면 당장이라도 눈알을 파내라고 명령하고 싶을 만큼 혐오스러웠다.

    「그, 그년이 죽으니 이젠 네 놈이 그 망할 누런 눈깔로 날 흘기는구나. 그래, 어디 그렇게 막살아 봐. 라밀라에게서 아들을 보면, 네 놈도 끝이야.」

    그럴 리는 없다. 꽤 그럴듯한 협박이지만 선대 대공은 허풍쟁이에 겁쟁이라 그런 대단한 짓은 못 꾸린다. 밀러는 그를 향해 조소했고, 선대 대공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자신의 손으로 망가트리고 죽음으로 몰아세운 선대 대공비가 밀러에게서 보였는지, 밀러가 방 밖으로 나설 때까지도 선대 대공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

    왼뺨이 찢어진 듯 홧홧했으며, 왼쪽 눈동자는 실핏줄이 터졌다.

    「대공자님, 괜찮습니까?」

    밀러는 반쯤 고개를 돌려, 라밀라를 바라봤다. 뺨 맞은 게 괜찮냐는 건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괜찮냐는 건지. 혹은, 라밀라 자신이 밀러의 새어머니가 되어도 괜찮으냐 묻는 것인지, 밀러는 알 도리가 없어 말을 아꼈다.

    「대공자님께서 걱정하실 일은 없을 거예요. 부디 걱정하지 마세요.」

    라밀라의 말대로 그녀는 밀러의 새어머니가 되지 못했다. 선대 대공이 재혼을 서두르던 중에 밀러의 친조부께서 직접 나선 덕분이었고. 그게 곧 라밀라의 작품이었을지도.

    그만큼 라밀라는 선대 대공처럼 멍청하지 않았다. 그러니, 락센 가에서 도착한 이 초대장은 라밀라의 남편인 락센 경의 것이 확실하다.

    “루텡라스가 그녀를 버릴 생각인가 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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